눈이 부셨다.

깨어났을 때엔 그 생각 뿐이었다.


낯선 천장이다.


이거 혹시, 어제 읽은 로판의 악역 영애로 빙의된걸까?

잠시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천장에 박힌 LED 조명이 너무 밝았기에 그 생각은 접어뒀다.


그렇다면 대체 여긴 어디란 말이야?


몸을 일으켜 주변을 살피자, 흔한 대학생이 살법한 풍경의 원룸이 눈에 들어왔다.

나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것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가구도 모두 내 취향이었고, 뒤늦게 눈치챈 이 방 안에 차있는 향도 꽤 향긋했다.


" 사실 알고보니 내 집이라던가? "


나는 후흐, 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게 문제였다.

뒤돌아 보지 않았어야 했다.

그냥 나가야 했다.


나는,

침대 위에 누워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말았다.


제 체구보다 조금 큰 침대 위, 가지런하게 놓인 두 다리.

고요하게 숨을 내쉬며, 그 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가슴.

반쯤 열린 창문 사이 스며든 바람에 흩어진 머릿결.

LED 조명으로 인해 그림자가 진 채, 감겨있는 눈.

무엇보다도 그 입술.


놀라야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그 입술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던 것일까.


*

*

*


뜬 눈으로 날을 맞이했다.


그 집에서 뛰쳐나온 후 밤을 지새워버린 것이다.


" ... 으으읏. "


바보, 바보!

어쩌자고 그런 짓을!


" 죽어! 죽어 김얀순! 죽어서 사회에 도움이 돼!! "


퍽, 푹.


그래, 아무리 베개로 때려봐도 이 정도가 한계겠지...


" 어찌어찌 집으로는 돌아왔지만... 으음... "


긁적.


"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왜 갑자기 거기 있었던거지... ? 난 분명 종강 쫑파티에서... "


" 헛! "


그렇구나! 쫑파티에서 필름이 끊겨서 선배 집에서 자고 있던거야!


이제야 해결이 된 기분!

당장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해야겠다.

그나저나, 폰이 어디 있나 했더니 집에 놔두고 갔던 모양이다.

방금 막 발견해서, 모두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폰을 켰다.


" ... 응? "


그런데,


" ... 분명 쫑파티는 12월 11일... "


이었는데....


" ... 왜, 왜 2월 7일이지??? "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

*

*


"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환자분은 갑상선암입니다."


" 아, 그래요? "


" 충격 받은거 이해... 예? "


" 놀라지 말라면서요. "


이상한 사람들인가보다.

옆 방에서 오는 소리를 무시하고, 눈 앞의 의사선생님께 집중했다.


" 김얀순 양... 현재 얀챈대학교 4학년 진급 예정... 그런데 본인은 3학년 2학기 이후 기억이 없다... 맞죠? "


" 네, 무슨 일일까요? 방학이 갑자기 증발해버렸는데... "


" 음, ... 아마도, 해리성 기억상실이 의심됩니다. "


" 헐! "


" ... 해리성 기억상실이 좋은건 아닙니다, 아시죠? "


" 헐! "


" ... "


그대로 진단을 마치고 쫓겨나듯 병원에서 나왔다.

하얀색 약이 가득한 약봉투를 손에 든 채, 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분명 스트레스가 주 원인이라고 했지.

혹시라도 뭐,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다지만은... 그건 희귀하다고 하고. 응.

그냥 지내다 보면 회복된다니 별 일 없겠지, 뭐.


이럴땐 참 스스로의 대책없는 사고방식이 자랑스러워진다.

다른 사람들은 뭐, 꽃밭이고 자기 멋대로라 한다지만은... 알 바는 아니지!


" 안녕하세요. "


카드를 찍는 소리와 함께, 

듣기 좋은 목소리의 남성이 버스 기사님께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예의 바른 남자라니, 얼굴을 확인해야겠군.

절대 목소리 때문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창 밖을 향하던 시선을 살짝 옮겼다.


그래,

이게 세 번째 실수였다.


다시,

마주쳤다.


*

*

*


왜 내 옆에 앉아서 말이야!

가는 내내 어쩐지 부담스러워 죽을 뻔 했잖아!


...

사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그냥 그렇구나- 했겠지만... 으음.

아무튼 참 눈길이 가는 사람이야. 잘생긴건 아닌데.


그런 생각들을 접어두고, 나는 집에 들렀다가 친구들과의 약속에 향했다.


" 하이! "


" 완전 오랜만이다! 너 왜 연락도 안하고 살았어, 죽은줄 알았네. "


" 뭐 남자라도 생긴줄 알았네, 또 축하주 한 번 할 뻔 했잖아. "


" 뭐래! 그냥 바빴겠지, 뭐. "


" 하긴 뭐, 기억 안 나는 사람한테 물어봤자긴 하지! 술이나 한 잔? "


" 미쳤냐! 다친 애한테 뭔 술이야! "


" 과연 1월의 얀순이와 지금의 얀순이는 같은 사람일까...? "


" 철학과 조용! "


" 냅둬, 얀희 저거 아니면 전공 써먹을 곳 없어. "


실실 웃음이 나왔다.


" 뭐야, 왜 웃어? "


" 머리 다쳐서 그런거 아냐? 알코올로 소독하자!! "


" 미친년아 제발! "


후흐, 역시 친구들이 좋긴 좋구나.

솔직히 조금 불안했었는데, 그런 마음이 녹듯 사라졌다.


" 아냐! 얀진이 말대로 술이나 마시자! "


그리고 그 후는... 뭐.

술자리에서 나오는 이야기 중에 영양가 있는게 뭐가 있겠는가.

남자 얘기지, 뭐.


" 그러고보니, 너 썸남 있었던건 기억해? "


" 엥! 그게 뭔 말이야! "


" 얘 그것도 까먹었나본데? "


" 방학도 잃고 썸남도 잃었대요, 바보. "


" 말도 안돼! 내 남친! "


" 말은 똑바로 해야지, 예정이야, 예정. "


" 심지어 그것도 짝사랑에 가깝지 않았나? "


" 엉... 사실, 얀순이가 기억 잃어서 말하는거지만... 일방적에 가까웠지... "


" 역시 1월의 얀순이와 지금의 얀순이는 다르다는거구나. "


" 문과 죽었으면. "


나한테 썸... 아니, 뭐. 짝남?

아무튼, 그런게 있었다니.

충격에 소주잔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얀순얀순, 왜 그래. 알코올이 부족해? "


" 얀붕씨 때문에 그러는거지 뭐. "


" 근데 뭐, 김얀붕 잘생긴건 아니니까 괜찮을지도. "


" 이과 죽었으면. "


" 이거 이과랑 상관 없지 않아?? "


" 김얀붕... 그런 이름이구나? "


잠시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됐다.

얀진이는 말할것도 없고, 방금까지 싸우던 분위기던 얀희와 얀미도 일제히.


" ... 다들 왜? "


" ... 으음, 아니... "


얀미가 제 안경을 고쳐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 기억 잃은걸 알기는 했지만...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충격인걸. "


" ... 잘 들어, 얀순아. "


*

*

*


카페, 원두 향이 감돌아 참 공부하기 좋은 장소다.

나는 그냥 시간 때우러 왔지만.


아무튼, 어젯밤 술자리에서 얀미에게 들은 말은.... 음.

솔직히 꽤 충격적이었다.


내가 얀붕이라는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계속 따라다니고, 은근슬쩍 다른 여자를 밀쳐내기까지 했다니...

내가 그 정도 사람이었던가...


그 이야기를 듣고 벙쪄있자 얀미가 얀붕이 사진도 보여주려고 했는데, 얀희가 이과는 아픈 애한테 배려도 없냐고 일갈하며 막아서 결국 보지는 못했다.


하긴, 봤으면 더 구체적으로 충격을 받기는 했겠지.

셋 다 입을 모아서 잘생기진 않은 얼굴이라고 했으니까...

솔직히 말을 예쁘게 한거지, 못생겼단 소리잖아.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고 집착한게 이해가 안 되는 수준이라고 했으니.... 하아.

왜 그랬을까, 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개를 푹 숙인채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손가락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꽉 쥔 채.

영 마음이 불편했다.

그 얀붕이란 사람에게 사과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

...

아니, 잠깐만.


" ... 그래서 나 모르는 남자 집에는 왜 있던거지?? "


... 헉, 설마.

나쁜 짓을 당하기 직전....! 이라기에는, 응.

그 분도 주무시고 계셨지.

내 상태도 너무너무 멀쩡했고 말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사건의 진실도 그렇고,

지금 카페로 들어온 사람이. 


그 남자였다는 사실도.


그래, 이 정도면 실수라고 칠 수도 없다.

이미 세번이나 실수를 저질렀는데, 더 추가해 봤자 달라질 것은 없겠지.


그런데 이상하지.

정말로 이상해.


기분이 나빠졌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감정.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워서 긁고 싶은데, 긁지는 못하고.

계속 목이 떨려오고, 가슴이 따가운 느낌.

머리에 피가 안 도는 감각,

조금 불쾌하고.


그냥, 이유를 모르게 토할것만 같은.

그런 감정.


그 남자가,

모르는 여자와 함께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나는 왜 그 사실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걸까.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내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것만 같았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를 눈치챈 모양인지, 시선이 마주쳤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 얀순이 누나? "


그 목소리, 그 호칭, 그 눈빛.

깨달았다.


나는 뭔가 잊은 것이 있다,

이 남자에 대해서.


" ... 그렇구나. "


감정 탓에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왔다.


" 네가, 김얀붕이었어. "


얀붕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야.

짜증난다.

짜증나.


그 사이에 또 다른 여자랑 붙어먹었구나.


...

또?


그렇구나, 

너는 바람둥이였어.

그래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던거야.


" 야, 김얀붕. "


" 네? "


촤악.


얼음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온다.

옆 테이블 손님의 놀란 소리가 들린다, 여자다. 짜증난다.

손님, 하고 부르는 종업원의 소리 뒤로 걸음 소리가 바삐 들려온다.

뭐냐며 따지는, 주제 모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내 귀를 채웠다.


빈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마저 여자에게 던졌다.

그때까지, 나는 네게 눈을 떼지 않았고 말야. 얀붕아.


" 잘하자. "


괜히 누나가 짜증나게 하지 말고, 응?


그래, 항상 그렇게.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달라고. 

김얀붕.


*

*

*


사실 소재여서 여기서 끝임.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좀 급하게 끝낸 감이 있다...

기억상실 얀순이가 기억 잃은 채로도 집착하는거 "써줘"


얀붕 - 얀챈대 경영학과 2학년, 미필, 흔한 얼굴


얀순 - 얀챈대 경영학과 4학년, 서글서글한 성격과 스윗한 얀붕이에게 반해서 계속 얀붕이한테 집착하다가 안 받아주고 다른 여자하고 놀자 스트레스 맥스로 쌓임. 이 상태로도 위험했으나 결국 약 먹이고 주거침입. 막 기정사실을 만들려던 참에 얀붕이가 잠결에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른 것이 트리거가 되어 그대로 해리성기억상실.


얀진 - 얀챈대 심리학과 4학년, 애주가, 술 먹으면 행복해진다고 믿음. 술먹고 쓰러졌을때 예전에는 친구들에게 연락했으나, 최근들어 얀붕이에게 전화하는 횟수가 잦아짐. 술 취한 것을 핑계로 가끔 달라붙어옴.


얀희 - 얀챈대 철학과 4학년, 엉뚱함. 얀붕이가 가장 처음 만난 히로인임. 가끔 곤란해질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도와줌, 만능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얀붕이 앞에서만 그럼. 얀붕이에게 완벽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음.


얀미 - 얀챈대 약학과 2학년, 3수함. 얀붕이와 같은 동아리 소속임. 얀붕이가 짝사랑 하고 있는 대상. 그래서 약 먹었을떄도 얀미를 불러서 얀순이가 기절했으나, 현재 얀순이는 그것도 잊어버렸음.


저번에 쓴 글이 추천 100개 넘은거 보고 신나서 급하게 써왔어...

부족한 사람이 쓴 부족한 글인데 다들 좋아해줘서 고마워

처음으로 써봤고, 써가는 거라서 많이 부족할 수 있어

이 글도 재미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