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발 내 인생"



한 여름 가난한 자취생들의 구원자라 볼 수 있는 불쾌하지만 어느 정도 더움을 막아주는 선풍기 바람이 아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에 자연의 풀 내음을 가득 담은 산들바람이 내 뺨을 스치며 지나가자 마자.


내 머릿속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찼다.



"씨발 여기가 어디야!!!"



눈 앞에 보이는 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보이는 지저분한 내 방 따위가 아니다.


분홍과 녹색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넋을 놓고 쳐다보게 만드는 빽빽한 벚꽃 나무들과.


언덕 아래로 보이는 일본 특유의 향기가 강하게 풍기는 전통 마을들이 넓게 펼쳐진 광경은. 


정통 판타지 웹툰에서나 나올 법한 현대 사회의 더러움이라고는 1도 묻지 않은 깨끗하고 푸르른 자연 그 자체.


만약 이곳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았더라면 가공할만한 광경에 놀라 감탄사를 내뱉었겠지만.


막상 직접 격게 되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기 보다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흔한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죽음의 문턱에 몰렸던 것도 아니었고.


어떤 작가에게 5800자 소설에 가까운 비난 글을 쓴 것도 아니었고.


특정 게임을 현생을 내다 버린 사람처럼 한 것도...



"..아"



하나 있긴 있다 죽기 직전까지 하던 게임이...



"이런 ㅆ...팬 게임 하다가 빙의하는 병신이 있다고!?"



원신의 2차 창작.


즉 팬 게임들 중 하나인 원신 인 히로인.


원신에 등장하는 캐릭터들과 인연을 쌓는 미연시 게임으로.


2차 창작 답지 않게 엄청난 퀄리티와 삽화 그리고 자유도로 잠깐 원작인 원신보다 더 높은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난 그 당시 한참 원태기에 빠져있던 시기였기에 이 2차 창작 게임에 빠져 버렸고.


미연시 답지 않게 해피 엔딩이나 노멀 엔딩 베드 엔딩 외에도 다양한 엔딩이 있다는 사실에.


가장 흥미로울 것 같았던 희생 엔딩만을 골라 모든 히로인들의 엔딩을 보는 것에 성공했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빙의한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고작 희생 엔딩 하나 봤다고 빙의하는 거지 같은 일이 있을리가..



[메인 퀘스트:과오를 바로 잡아라!]


[사랑의 신은 자신이 만든 게임에서 희생 엔딩만을 본 당신에게 사랑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모든 히로인들의 연인 스토리를 클리어 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서브 퀘스트 목록]


[라이덴 에이 연인 스토리 (미완)]


[신학 연인 스토리 (미완)]


[푸리나 연인 스토리(미완)]


[아를레키노 연인 스토리(미완)]


[!!주의!! 모든 히로인들은 희생 엔딩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조심하세요!]


[개연성의 법칙! 당신은 당신이 빙의했다는 사실과 원작 지식을 남에게 발설 할 수 없습니다!]



"..있네"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람을 빡치게 하는 내용을 가득 담은 듯한 눈 앞의 푸른색 창을 보자.


안 그래도 처음 보는 곳에 강제로 끌려와 잔뜩 올랐었던 분노 게이지가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씨발...희생 엔딩만 봤다고 강제로 끌고 올 줄이야..누가 이럴 줄 알았냐고..그냥 있길래 본 건데 왜..!!


그리고 희생 엔딩이 뭐 나빠?! 희생 엔딩이야 말로 미식인 것을..


신이 꼴알못이군..



"...답이 없는데.."



[이름:호연]


[직책:라이덴 마코토의 호위 무사]


[보유 신의 눈:불의 신의 눈,바람의 신의 눈]


[능력치]


[체력:중상/근력:상/지력:중/매력:최상]


[한줄 평:신의 눈을 두 개나 소유하고 다룰 수 있는 특별한 자질을 가졌습니다.


당신의 능력은 만인지적에 가깝습니다.


당신의 외모는 달이 부끄러워 구름에 숨고 꽃이 시들 정도입니다]


[현재 목표:라이덴과 혼인(미완)]


'...주인공 능력치도 그대로네..'



원신 인 히로인은 특이하게도 주인공의 외형은 물론 능력치 마저 주사위로 커스터 마이징이 가능했다.


그렇게 해서 조정한 능력치는 게임 내에서 등장하는 랜덤 인카운터에서 사용되며.


신기하게도 능력치가 높아야 도움이 되는 인카운터만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능력치가 낮아야 성공할 수 있는 인카운터들도 있었다.


얘를 들어 어린 아이와 놀아주는 인카운터는 근력이 일정 수준 이하여야 잘 놀아줄 수 있고.


적들과 싸우는 인카운터는 무력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게임 오버가 뜨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 캐릭터의 스텟은 라이덴 스토리에서 나오는 랜덤 인카운터의 대부분을 넘어갈 수 있게 만들었는데..



"이게 근력 상의 힘인가..개쩌네.."



그게 현실이 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의 머리통 정도는 한손으로 부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무척이나 초 HIGH한 기분이다!


물론 이 정도 능력치라도 라이덴과의 대련 이번트에서 한 합을 버틴 적이 없었지만.



'..아무튼 내가 있는 곳이 대련장이 맞다면 아마 시점은 스토리 시작 극초반부일 텐데..이거 원래 스토리가..아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아마 지금 시점은 극초반부일테고.


라이덴 인연 스토리 극초반부 내용이...


밤 늦게까지 훈련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밤 산책을 거닐던 에이와 마주치는..



"....호연?"



은은하게 땅을 비추는 달빛 사이로 눈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에게 이어진 두 시선은 모두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본 사람의 시선이었지만.


한 쪽의 시선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를 보아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라면.


다른 한 쪽의 시선은 절대 마주 치면 안될 괴물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 이런 젠장'



아직 내 머릿속에는 그 어떠한 대책도 있지 않았다.


애초에 희생 엔딩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태라면 원작 지식도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고.


희생 엔딩 특성상 가지고 있어도 도움은 커녕 오히려 안 좋은 영향만 끼칠게 뻔했기에.


나로써는 라이덴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 지 모르기에 최대한 많은 수를 대비해 놓아야 했지만.


이렇게 생각할 틈도 없이 만나게 될 줄이야..



"꾸..꿈이 아니야..진짜 호연이야..아직 살아있어.."



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와 같이 매우 아름다워 보는 것 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았지만.


평소에는 그저 멍한 느낌이었던 것과는 달리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두운 공허함만이 가득한 두 눈은.


두근거리려던 가슴을 차갑게 식게 만들기 충분했다.



"호..호연..! 보고 싶었.."


"하급 무사 호연이 라이덴님을 뵙습니다"



그렇기에 최대한 머리를 차갑게 식혀 이 상황을 타계할 대책은 바로.


모르쇠 작전이었다.


반응으로 보아하니 그녀는 아마 희생 엔딩 때 죽어버린 날 보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으니.


애초에 제약 때문에 내가 희생 엔딩 당시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 하지 못하기에.


이럴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뭐..? 나..날 기억 못 하는 거야..?" 



원작에서도 주인공은 라이덴 에이를 라이덴 마코토로 착각하고 무릎을 꿇었으니.


그때와 똑같이 하면 그녀도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그러면 드디어 나에 대한 기억으로만 호연이의 머리를 가득 채울 수 있게 된 거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