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 되어라.
어머니가 자주 하시던 말이었다.
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기는 하지만, 어머니에게서 들은 기억이 더 선명해서 자세히는 몰랐다.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은 순간도 선명하다고 하지는 못했고, 또 어린 나이의 기억들은 대개 구름에 가린 듯 흐릿했으니까.
그래도 그 말 자체는 기억하고 있었다. 괜히 이유를 고민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 역시 정의감, 사명감, 착한 마음씨. 라고 하는 종류의 원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 단어가 꺼려졌다기 보다는, 조금 부끄러운 것이어서 마음과 맞았다고는 보기 어려웠으니까.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에, 분명 마음에 와닿는 감정이 있었다.
그러니까, 조금 아이 같이 표현하자면 만발한 유채꽃 무리를 봤을 때의 느낌, 혹은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볼 때의 느낌 같이, 그런 화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 원인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내가 죽는 순간, 그 아이에게, 그녀의 검은 그림자에 꿰뚫리는 순간,
어쩌면 완전히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착한 사람이 되는 것, 그 하나의 상태를 그토록 갈망했던 건. 내 인생에, 내 마음에 남은 그 말에 매달린 건.
“에스, 프레소…”
오래전 본, 이젠 더 이상 못 볼 거라고 여겼던, 저 맑은 연둣빛의 눈동자에게,
‘나’라는 존재가 담기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라고.
***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 귀찮은 애 빨리 꺼졌으면 좋겠다.
아마 두 번째부터 백 번째까지 생각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민 남자아이의 평범한 옷, 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사실 복장 자체는 평범했지만, 그 복장의 깨끗함과 정갈함을 보면 저절로 알 수 있었다.
평민인 척 하는 게 서툰 귀족 아이나 입을 옷이라고.
당연히 그 옷을 입은 아이는, 옷 만큼이나 멍청해보였다.
말 그대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온실 속에서만 자란, 무엇 하나 어려움 없이, 기껏 본인 입장에서 어려운 일이라 해 봐야 편한 환경에서 모든 제반이 갖춰진 채 공부하는 것이 최대인, 그런 짜증날 정도의 귀족 아이의 전형.
“넌 뭐야? 기분 나쁘게.”
처음 이 말을 하고 바로 그 사실을 깨닫자, 앞선 불쾌감과는 다른 종류의 답답함, 혹은 거슬림이 튀어나왔다.
좋은 집안, 좋은 가정환경, 좋은 인생.
모두 나에게는 먼지 한톨만큼도 해당하지 않았다.
눈이 살짝 찌푸려지려는 걸 참고, 귀족이냐며 물었다.
물론 그 아이는 예상한 대로, 어쩌면 예상보다 더 바보같이 놀라고 당황해했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모습은, 솔직히 훨씬 어린 내 동생들보다 더 어린애 같아 보였다.
“어떻게 알았냐니, 어디 아가씬지는 모르겠지만 향기가 너무 좋잖아.”
그럼에도 첫마디가 이토록 ‘정중했던’ 건, 하찮은 평민의 타고난 습성 때문이었을까.
“눈에 띄니까 남의 지방 기웃거리지 말고 돌아가.”
겨우 쥐어짜낸 무례한 말이 이 정도.
모질지 못한 성격이라서? 아니었다. 그저, 난 평민이고, 저 아이는 귀족이니까. 그 사실에 구속된 것 뿐, 언제나처럼 복종한 것 뿐이었다.
불만은 없다. 딱히 미워하지도 않는다. 이 아이와 나는, 서로가 각자 속한 세상은, 비록 이렇게 만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섞일 수는 없었으니까.
그 사실은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어릴 적에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그러니, 이 순간도, 이 짧은 대화도, 모두 지나갈 한순간의 일이었다. 아무 변화도 주지 않는, 그저 한 조각에 불과한 일.
어쩌면 이 귀족 아이에게는, 버릇없는 평민을 너그러이 봐준 관용으로, 훗날 귀족 사회에서 자랑할 만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
“실례했습니다. 귀하신 분인 줄도 모르고. 방해하지 않을 테니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럼 이만.”
이 만남은 끝, 평민 아이가 분수에 넘치게 귀족을 영접한, 퍽이나 운 좋은 일은 끝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폐가 안된다면 네가 일하는 걸 관찰해도…”
끝일 터였다.
“내 용돈, 보수로 줄게!”
끝일, 터였는데.
“…들어오세요”
그때 나는 나 자신이, 어쩐지 더 싫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돈을 받은 게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 아이의 행복을 빼앗고, 인생을 구속하고, 재밌게 다뤄보는,
비할 바 없는 유흥의 대가로는 아주 싼 편이었으니까.
그렇지?
피에르.
***
오늘도 찾아온 그 사람들은 너그럽게도 뺨 한대로 그날의 분노를 삭히고 돌아가주었다.
필사조합, 이라지만 이름좋은 폭력배에 불과한 집단. 적은 보수로 필사를 해주는 내 존재에 불만을 느끼는 그 사람들은, 언제나 날 그들 조합에 가입시키려 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조합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지 않아…? 넌 너무 일을 많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참.
“다 같이 공평하게 일하면 싸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여기 있었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훗…”
비웃음. 경멸. 조소. 모두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이었으니까.
“ ‘아가씨’는 정말 순진하시군요. 부러워요. ”
그러니까 내가 전할 말은, 그저 한없이 깨끗한, 구역질나는 진실 뿐이었다.
“재미있는 구경까지 시켜드렸으니 이만 가주시겠어요? 받은 돈값은 한 것 같은데.”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귀한 ‘아가씨’ 몸에 해를 끼치지 않게, 애꿏은 문에만 화풀이를 하며 내쫓았다.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었다. 그 감정을 떠올리는 것도, 모두, 싫었다.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모두, 싫어.
***
첼시에게 에스프레소를 도와달라고 부탁한 다음 날.
다시 찾아간 에스프레소의 집은, 전날과 확연히 다르게, 눈이 멀지 않았다면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집이 통채로 주저앉았다던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누군가 고의로 했다는 생각이 드는 집의 전소. 전날 에스프레소를 찾아왔던 그 사람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그때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에스프레소와 친구가 되자고.
‘되어주자’고.
***
첼시 위타드, 우리 지방의 영주. 내가 도달할 수 없다, 라는 인상을 그 누구보다도 확고히 새겨온 그 사람.
여전히 변장엔 소질이 없어보이는 그 아이가, 나에게 첼시 위타드의 이야기를, 그리고 첼시 위타드와 친구라는 이야기를 건냈을 때는, 솔직히 조금 놀랐다.
그냥 평범한 귀족 수준이 아니었다, 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래선지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지만, 그 아이는 말을 막으며 내 손을 잡았다.
“어때?! 내가 좀 도움이 됐어!?”
투명한 물빛 눈동자가 하얀 바람을 만나 빛났다. 머릿결도 부드럽게 흩날렸다.
예뻤다.
바보같게도, 마치 사춘기 때 첫사랑을 발견한 아이처럼, 난 그 생각을 해버렸다.
“그, 그건 더 지켜봐야 알죠…”
가슴 부근이 살짝 저렸다.
마치, 있지도 않은 양심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
귀족과 평민이 친구 사이가 되었다.
흔한 가십거리로도 못 팔릴 소재였다. 적어도, 내가 겪어온 세상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그 아이, 피에르 디아즈의 세상에서는 그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피에르의 본심이 어찌되었든, 그녀는 그날 이후로 나와 친구로서 지내고자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평민이 알 리 없는 마법의 원리도 알려주고, 게다가 들어오는 일이 늘어난 것은 피에르가 손을 써둔 게 틀림없었다.
피에르는 그것이 퍽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에 보답하듯, 나도, 가끔이지만,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점점 늘어가는 식으로, 웃음을 지어주었다.
웃어주는 대가는 컸다. 올때마다 나에게 정성을 쏟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북부 산맥의 높은 지대에 있는 푸른 초원, 희게 칠해진 나무로 가득한 설산, 꽃들이 만발한 언덕, 광활한 하늘에 펼쳐지는 유성우, 맑은 밤하늘의 고운 별들.
모두 평민 계집아이가 꿈꿀 수 없는, 생계를 유지하면서 가려고 하기에는 불가능한 곳들. 하나같이, 그 사실을 증명하듯, 잔인하게 빛나고, 아름답게 반짝였다.
진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피에르는 확실히 나에게 배려, 라는 명목으로 많은 편의를 봐주려 했다.
필사조합, 안 그래도 빌어먹을 지경인 내 생계를 더 괴롭히는 그 사람들의 가입 협박과 폭력은 더 이상 없었다.
이런 과분한 배려에, 하찮은 평민인 나는, 그저 감사하다며 머리를 조아리는 게 마땅했다.
그 배려가, 그 아이의 자기만족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나는 엎드려 절해야 했다.
동생 중 한 명이 실족사로, 한 명은 폭행으로 ‘불행하게’ 죽는다고 해도.
날 미워하는 필사조합이, 길조차도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가게에서 물건도 살 수 없게 방해한다 해도.
어차피 그 꽃밭의 아가씨는, 평민들의 이런 더럽고 비천한 일 따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
고귀한 귀족 눈에만 띄지 않으면, 그 잘난 양심이 눈치를 채지 못한 그대로, 그대로 상처 입지만 않으면.
나는 괜찮았다.
‘괜찮아야만’ 했다.
우연찮게 필사조합의 사람들이 동생이 떨어진 절벽에 있었고, 우연찮게 폭행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 믿어야 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술을 달고 살게 되어도, 그저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뿐이었다.
설령, 내가. 그 하찮은 생명이.
어느날 눈, 코, 귀에서 피를 흘리며 필사 종이를 가득 적시더라도.
나는 괜찮았다.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어머니의 시신을 봤을 때부터, 그렇게 느껴왔다.
피에르도 괜찮을 것이었다.
귀족은 장난감이 망가져도 언제든 새로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바랐다. 아주, 추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그 구차한 미련을 입 밖에 조용히 내었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살짝 젖어 있는 말이 새어나왔다.
“버려지고 싶지 않아.”
그건, 솔직히 다신 듣고 싶지 않았다.
***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라는 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아무 변화도 주지 못했다.
나는 그저 예전처럼, 피에르의 과분한 은총을 받는, 운 좋은 평민으로 살아갔다.
다만,
약간, 아주 약간, 시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을 뿐.
피에르는 날 친구로 생각하길 원했다.
적어도 그녀는, 나와 친구라는 걸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나에겐 그게 아주 잘 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눈치가 빠른 아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지만, 솔직히, 그 칭찬을 들을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도도알 수 있을 정도로,
피에르는, 살아온 환경을 방증하듯, 아주 순수했다.
나와 대화하는 한 순간, 나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는 한 순간, 나에게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는 한 순간, 그것들이 모인 모든 시간 동안.
피에르는 내가 기뻐하길 바랐다. 때로는, 조금, 아니 많이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어린 동생들 보다도 감정표현을 숨기는 게 서투른 그 아이와 노는 것은, 마치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어쩌면. 그 때문에 이 마음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깊이 박힌, 더 이상 빼낼 수 없는, 질척하고, 음울한, 흙탕물에 적셔진 듯한 마음에서, 음열에 찌든 채, 단 한마디가 맴돌았다.
짓밟고 싶다.
“…그래서 난, 다음 주부터 거름을 잡으러 나가야 해. 나가면 한동안 못 올 것 같은데…”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에스프레소.”
그렇지만, 피에르가 상처 입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될 것 같았기에, 내 반항은, 그렇게 크게 나타날 것이 아니었다.
귀한 공주님을 울게 했다간 목이 날아갈 게 뻔했으니까. 난 그 정도로 멍청한 계집은 아니었으니까.
“…응, 나.”
그러니까, 아주 약간, 사소한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꼭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어.”
잠시 동안만, 평민의 주제에 넘치는,
하지만 결국 한낱 일탈에 불과할 장난 하나를.
“같이 가줄 거지?”
***
“아…”
“가고 싶다는 곳이, 우리 집 서재…?”
걸렸다.
당황해하는 피에르를 보고 든 생각이었다.
당연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이 아이는, 내 생각보다 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피에르는 횡설수설하며 서재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했다
그게 누구 입장에서 낫다, 인지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미소짓고, 가만히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필사하는 내용, 혹시라도 기억하거나 하면 좋은 일은 없을 줄 알거라.
몇 번을 들었는지도 모를 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전하는 그 내용이, 머릿속에 한 번, 구역질나게 파도쳤다.
-살짝, 계획했던 것보다 조금 더 나가보자는 충동이 들었다.
“내가 신분 차이를 잊고 무례한 부탁을 했네. 잊어줘.”
“어…? 왜, 왜 그런 말을…”
어쩐지, 조금, 저 물빛 눈동자를 가지고 싶었다.
“귀족에 성에 이런 꾀죄죄한 평민을 들이다니 안 될 일이지.”
“나도 내 주제는 알아.”
피에르는 내가 기뻐하길 원하니까. 그렇게 해서 자기자신이 편해지길 바라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친구를 위하는 마음인 셈이었다.
***
엄청난 양의 책. 일생을 일하고 고생한다 해도, 그 값 때문에, 가난한 생활 때문에 결코 눈에 담지도 못할 고급 서적들.
난 홀린듯 수많은 책을 빼와서 쌓아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읽는 데 열중했다.
확실히 훌륭한 책들 투성이였다. 특히 민간에 내놓지 않는 책들도 많았다. 그것들은 특히 귀족을 위한 책이라는 걸까, 말 그대로 평민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은 듯한 내용이 산재했다.
다만, 하루 종일 서재에 있으면서 계속 눈길이 가는 것은,
“피에르. 저 책은 뭐야? 엄청 눈에 띄는데.”
돌아온 피에르의 답은 더 흥미를 돋구기에 충분했다. 저 책에 대한 것과, 이 아이의 심리에 관한 것, 둘 다.
디아즈 가문의 비전서. ‘위급할 때만 열어봐라.“ 라는 그럴듯한 설명까지 덧붙여진, 그야말로 가문의 핵심이라 할 만한 것이엇다.
“서, 설마 저것도 보고 싶다는 건 아니지?”
그러니, 내 마지막 일탈로, 이 정도면 적당한 것이었다.
“아냐. 내가 어떻게 그런 뻔뻔한 말을 하겠어.”
오늘이 끝나면, 다시 말 잘 듣는 개로 돌아갈 운명이었으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
이 아이의 심연을 보고 싶어졌다.
“피에르는 지금도-
내가 책 내용을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하지?“
사실대로 말해도 돼. 디아즈.
처음부터, 나 같은 건 그냥 심심풀이용, 알량한 양심 채우기용, 대단한 미담 쌓기용으로 소모시키려 했던,
그저 값싼 일회용품에 불과했다고.
“내가 책을 볼 때마다 계속 쳐다봤잖아. 그런 눈빛 알아. 나에게 일을 맡기는 사람들이 보이는, ‘일은 맡기지만 내용까지 이해하면 가만 안둬.’ 라는 눈빛.”
그러니까, 응, 진심을 말해도 괜찮아. 화내지 않을게. 어차피 너에게 그런 짓 했다간, 얼마 남지 않은 생, 더 빨리 끝날 거고, 나 그런 건 바라지 않으니까.
“거짓말 안 해도 돼. 단지…”
한 번은 말해줄 수 있잖아?
어차피, 개에게 사람 말로 욕을 해봤자,
“내가 앞으로 이상한 착각하지 않게, 차라리 날 하대해줬으면 좋겠는데.”
개는 아무 것도 모른채, 그저 웃으며 꼬리를 흔들 테니까.
“친구라고도 하지 말고.”
너에게 난, 친구 같은 게 아니니까. 또, 결국, 또. 나만.
“왜 그런 말 하냐는 표정 짓지 마.”
“믿지도 않으면서, 친구라고 하는 거.”
나는. 지금.
“정말 슬픈 일이거든…”
피에르를 꼬옥 끌어안은 내 모습은, 어쩐지 이제껏 살아온 순간들 중 가장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스, 프레소.”
아아, 그래, 이 정도로 무례를 범했으니, 분명, 그 가면을 쓰는 것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지.
피에르의 표정은 점점, 재밌어 질 정도로,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요저번에 일이 생각났다. 필사조합 사람들이 동생 둘을 죽이고도 나만은 죽이지 못해 분해하던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피에르가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한 종자였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모르는 것에 만족하고, 그럼에도, 쓸데없이, 나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마음대로 다루고 싶어하는 주제에, 날 생각해주는 척은 기본인.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를,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하찮게 으르렁대는 강아지로 만든.
말 그대로의, 짓밟고 싶은 존재.
하지만, 동시에, 이 아이가 날 짓밟아주길, 그렇게 해서라도, 날 끊어내지 않길, 먼지 한톨 만큼 남아있던 자존감이 더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바라고 있었기 떄문에.
그저 한 번, 주인의 화난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그 아래에 조아려서 비는 복종의 맹세를 하는 것으로, 내 인생의 마지막 자유를 바치고자 했다.
“…에스프레소.”
네, 고귀한 귀족님, 부디 이 버릇없는 개에게-
“…내용은 암호화되어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보고 싶어?”
“……응?”
무슨, 소리
“증조할머니가, ‘가문에 위기가 닥쳤을 때 열어보라.’고 하셨지만, 너는, 날 믿고 부탁했을 테니까, 분명.”
아니야.
그 믿음에 보답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아게 아니야.
“—-나도, 너를 믿을게..”
아니잖아. 아니어야 해.
“친구니까.”
이게 너의, 진심이라면,
나는————
“에스프레소…?”
하, 하하.
그렇, 구나.
응, 그래. 그런 거구나.
이제야 알겠어.
“…고마워, 피에르.”
내가 왜, ‘너’ 라는 생물에 빠졌는지를, 알게 해줘서.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알게 해줘서.
***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비전서가 결계에서 풀린다.
내 손에 자연스럽게, 안착한다.
피에르는 나를 보고 있다. 여전히, 맑은 눈동자였다. 이제는, 완전히, 가지고 싶다, 라는 일직선의 감정밖에 들지 않는, 그것.
“살짝만 볼게.”
그건 ‘에스프레소’ 라는, 조금 눈치가 빠르고, 잔망스럽고, 평민치곤 재주가 있는 편이었던, 하지만 그저 그뿐인, 그 뿐이어야 했을 평민 여자아이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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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백합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미안. 근데 제목에 달아놨으니까 들어와서 비추는 누르지 말아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예전에 네웹에서 완결난 웹툰 <아메리카노 엑소더스> 2차 창작임.
솔직히 조회수 그런 거 모르겠고 걍 내가 이 웹툰 팬이라서 쓴 거.
근데 분량 조절 실패해서 2부까지 써야 할 판이네…
일이 바빠서 당장은 못 올라오고, 그래도 이번 주 안으로는 2부 써옴.
뭐 안 보고 싶으면 무댓글 무추천으로 응답해줘.
그럼 2부 쓰고 나 혼자만 봐야지 뭐.
어쨌든 이거 올리고 자러감. 피곤하다.
(+ 이거 단편인지 연재인지 아는 사람 말 좀... 일단 단편으로 올리는데 아니면 연재로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