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선언이 나왔습니다.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날 아침 점호는 빠르게 끝났다.

점호고 나발이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모두가 기뻐하면서 집으로 돌아갈 생각 뿐이었다.

나는 분명 기뻤지만.......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그저 농사나 지으면서 살던 순박한 청년은 참호에서 죽었다.

연막을 뚫고 적에게 달려들어 총을 쏘고 야전삽으로 머리통을 깨뜨리던 삶에서 한순간에 농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직감할 수 있다.

머리는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지옥에서 먹은 구정물이 더 익숙해진 모양이다.

 "엄마!형이 돌아왔어!"

 첫날은 기뻤다.살아서 가족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니까.

적어도 다른 놈이 우리 집에 찾아올 일은 없어서 다행이다.

 "다른 집 애들은 돌아왔어요?"

 "네 또래 남자애들 중에서 돌아온건 너 하나라던데."

 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서 도로변에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너 담배도 안 피던 녀석이."

 "이거라도 없었으면 참호에서 잠들었겠죠."

회색 연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아직도 평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참호에서 보내던 그 지옥같은 시간이 내 인생을 좀먹고 있었다.

 "야야,저기 케니야."

 "전쟁터에서 살아서 왔다는데 분위기 장난 없긴 하다."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를 듣다보니 문득 머리를 정리하지 않은지 꽤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겨우 가릴 정도의 길이지만 확실히 길기는 했다.

 "우중충하게 쭈그려앉아서 담배피냐?"

 "우중충보다는 고독한 남자의 오라라고 해줄래?"

 "뭐래,불이나 빌려줘봐."

 이 입이 걸쭉한 여자는 옆집 목수아저씨의 둘째인 제인이다.

 "야,언니가 너 걱정하더라."

 "뭐래,누나는 내 걱정 안해.너나 네 여동생이면 몰라도."

 "멍청아!하루 종일 죽상으로 담배피고 동네 돌아다니면 씨×.온 동네 사람들이 다 걱정한다고."

 "제이드,언어 순화."

 "뭐래.종강해서 집에 왔더니 네가 온 동네에 우중충한 분위기 뿌리고 다니니까 기분 나쁘거든?"

 "걱정마.털고 일어날거니까."

 나는 손가락을 튕겨서 담배불을 껐다.

 "드웨인은 죽었냐?"

 그녀의 질문에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서 물었다.

 "담배 그만 물고 질문에 대답해."

 녀석이 내 담배를 가로챘다.

 "마지막에 봤을 때는 살아있었어.지금도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말이야?"

 "새해 첫 주말에 우리 참호로 포격이 떨어졌어."


06시에 시작된 포격은 12시에 종료되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깊게 판 참호가 피해를 막아주었지만

대부분은 공포에 질려서 움직이지 못했다.

모두가 그랬다.

드웨인은 큰 덩치와 리더십으로 분대장이었기에 공포를 빠르게 이겨내고서 외쳤다.

 "적들이 달려온다!기관총 잡아!"

 그 다음으로 빨랐던 사람은 나였다.

나는 빠르게 기관총 진지로 올라가서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개때처럼 밀려오는 상황에 조준을 할 시간따위는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데로 쏠 뿐이었다.

"씨×새끼들아!빨리 쏘라고!"

기껏해야 기관총 하나로 얼마나 막을 수 있겠는가?

 "드웨인!방어선 밀린다고!"

공이가 빈 약실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합지졸,징집병들을 긁어다가 숫자만 맞춰서 쑤셔박은 부대의 현실이다.

지휘관?포격소리를 듣고서 대응하려다가 저격수한테 대가리가 뚫렸겠지.

 "드웨인!적들 온다."

 "그만 오라고 협상 좀 하면 안되냐?"

 "너 외국어 할 줄 알아?"

 "모르지."

 "그럼 총이나 잡아.뒤지기 싫으면."


 "거기서 부상 당하고 군병원에 보내진 뒤로는 몰라."

 "너는 안 다쳤어?"

 "운이 좋았던거야.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마지막 남은 한 개비를 물고서 불을 붙였다.

보급품으로 받았던 담배는 이게 마지막이다.

 "그리고 나한테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아줬으면 한다."

 오늘은 담배가 맛이 없었다.원래도 맛은 없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맛이 없었다.

 "입 밖으로 꺼낼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

 마지막 개비를 다 태웠을 때에는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오랜만이네?"

 "누나는 왜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거야?"

 "옆집이니까?"

 "그거 참 합당한 이유네."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애초에 저 누님은 머리가 완전 꽃밭이다.

"아,아빠가 너랑 나랑 결혼하라던데 넌 어때?"

 "안 해."

 "왜?아빠는 너 되게 좋아하는데.장인이 사위를 좋아하는 경우가 흔한 줄 알아?"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누나랑 결혼하는건 고려할 사항이 많아."

 나는 식사를 마치고서 뒷마당에 누워서 별을 보았다.

야간 경계조일 때 항상 생각했던 조용한 밤하늘이었다.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아마도 내가 전쟁에서 유일하게 쉴 수 있던 순간이 밤하늘을 볼 때 뿐이었으니까.

 "케니,많이 힘들어?"

 "힘들지.눈 앞에서 뭔가 벌어지는데 현실감이 전혀 안 느껴질만큼 무서웠거든."

 "그러면 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도 되는거 아닐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달빛이 이렇게 밝았던가?

 "술도 안 마셨는데."

 피로가 쌓인 것 같았다.

감각이 이상하다면 보통의 경우 피로가 원인이다.

전장에서의 교훈이다.

 "피곤하네."

 몸은 정밀한 기계다.어딘가에 고장이 난다면 피드백이 온다.

그저 감각이 둔하면 못 느낄 뿐이다.

 "먼저 들어가서 잔다."


 "언니,케니네 집에서 뭐하다 왔어?"

 "프로포즈."

 "걔,많이 위험하던데.등 떠밀면 바로 죽어버릴정도로."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는 동생의 말을 들은 언니는 크게 웃었다.

 "그래서 더 괜찮은거야.위태로운 순간에 주어진 도움은 구원으로 받아들여지거든."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이냐?"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아픈 상황을 마주했다.

 "어.......사전조사?"

 "조사의 목적이 엄청나게 불순한 것 같은데 당장 그거 내려놓고 나가."

 "노처녀 누나 좀 데려가주라."

 "꺼져.창 밖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결혼?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녀석은 이미 포탄맞아서 시체도 안 남은지 꽤 되었다.

 "예전에는 목욕도 같이 했었는데."

 "학교도 가기 전의 어린 시절의 감성을 지닌 케니는 참호에서 총맞아 뒤졌으니까 그만 찾아."

 "너무 차가운거 아냐?"

 "정 결혼하고 싶다면 기다려줘."

 잠을 잤음에도 아직 피로가 덜 풀렸는지 눈이 아파왔다.

 "적어도 총 맞는 꿈이 안 나올 때까지만 기다려줘."

 누나는 싱긋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다행이다.그래도 진짜 창 밖으로 던질 상황은 안 나왔다.

 "아참,제이드가 오늘 시내 나갈건데 같이 갈거냐던데?"

 "금방 나갈거니까 기다리라고 해줘."

 나는 옷을 꺼내입었다.

전쟁터를 가기 전에 입던 옷이라 그런지 살짝 헐렁했다.

 ".......역시 남자는 퇴폐미인가."

 "가자."

 약간 반응이 이상한 제이드와 함께 시내로 향했다.

버스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시내에 도착했다.

 "대학 다시 다닐거야?"

 "학적 사라졌을걸."

 "남아있을거야.참전용사니까 잘만 하면 장학생으로 다닐 수도 있고."

 "나 무슨 학과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

 살기 위해서 처음으로 잘라낸 것이 대학 공부였다.

아예 백지화가 된 상태라서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럼 내가 도와줄게.한번 다녀보자."

 "그래.네가 원한다면야."

 "진짜?두말하기 없기다."

 "넌 내가 한번 결정한거 뒤집는거 봤어?"

 그녀는 내 팔을 잡아 끌면서 대학 사무처로 향했다.

 "다음학기 복학 신청은 언제죠?"

 이런저런 서류를 보고 있자니 안 좋은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호흡이 어려웠다.

 "제이드,잠깐 나 밖에 있을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서 밖으로 나왔다.

손이 덜덜 떨렸다.아마도 내 몸은 재입대로 착각한 모양이다.

대충 둘러보는 사무원의 모습이 뭐라고 해야할지 모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괜찮아?"

 제이드는 벤치에 앉아서 손을 떠는 나를 보고서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미안.괜한 짓 해버렸네."

 "괜찮아.잠깐......당황했을 뿐이야."

 "안 괜찮은거 알아.나한테 거짓말하지마."

 제이드는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서는 내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힘들면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도 환자의 일이야."

 "아픈 곳 없어."

 "아니,넌 환자야.누가 봐도 환자니까 도와달라고 말해."

 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정도는 혼자서 이겨낼 수 있어."

"그러면 악몽을 꾸지는 않겠지."

 제이드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넌 천성이 착한 놈이니까 네가 전쟁에서 얻은 기억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될까봐 걱정하는거야."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해 빠져서 스스로를 다시 섞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거야.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그 손길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손떨림이 멈췄다.진정이 된 듯 하다.

담배의 영향인지 그녀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서류상으로는 문제 없이 복학 가능해."

 "다행이네.아직까지 남아있어서."

 "시골 청년 케니는 아직 죽지 않았어.그저 한바탕 악몽을 꾸고 이제 일어났을 뿐인거야."

 나는 담배불을 끄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대학에 복학한다고?그러면 제이드랑 같이 다니는거야?"

 "응,아마 통학하기 힘들어서 기숙사에 들어갈거야."

  누나는 조금 아쉬운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결혼은 대학 졸업 후로 미뤄야겠네."

 "왜 자꾸 결혼을 하려하는거야?"

 이 무지성 결혼 이야기는 언제까지 할 지 모르겠다.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뭔가 이상하긴 하다.

 "노처녀의 설움을 네가 알겠니."

 "그리고 난 연하취향인거 몇번 말해줬잖아."

 누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풀이 죽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취향은 극복하는거야.사랑으로 극복 못 하는건 없어!"

 "일단 그 생각을 내 앞에서 말하는 시점에서 아웃이라고 생각해."

 누나는 결심을 했는지 벌떡 일어나서 집에서 짐을 챙겨왔다.

 "나 네가 복학하기 전까지 너랑 같은 집에 있어야겠어."

 "집주인인 우리 엄마랑은 상의가 아직인걸로 아는데."

 "괜찮아.어머님은 무조건 찬성할거니까."

 고민의 여지도 없는 즉답이 돌아왔다.

 "방도 같이 쓰고 침대도 같이 쓸거야."

 "어린애 아니니까 각방이야."

 누나를 내 방에서 밀어낸 뒤에 문을 닫았다.

무슨 다 큰 어른이 저런 어린애같이 나오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집에 들어오면서 우편함에 있던 편지를 읽었다.

대충 노고에 감사하고 보상금 어쩌구 하는 이야기였다.

 "......돈을 얼마를 준다고 해도 걔들이 살아서 오는게 아닌데."

 입맛이 쓰다.독한 담배를 폈을 때보다 더 쓰다.

참 아이러니하다.사람이 비싼걸 알면서도 사람을 죽여야만 승리할 수 있는게 전쟁이다.

아마 앞으로 사람이 모자람에 따른 여파가 올거다.

예정된 수순이다.

 "......결국 미래를 위해서는 대학인가?"

 답은 나왔다.그렇다면 망설일 것이 없다.

명백한 답이 나왔다면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