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에 나오는 일부 이름과 기관은 허구임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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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몬 에레스타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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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수도로 부터 외곽 쪽에 위치한 마을에 태어나 헌터로 생활하며 하루하루 겨우 살아가는 인생.


오늘도 의뢰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에 들었던 난 언제나 또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눈을 떴다.


하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지겹도록 봐왔던 허름한 나무 천장이 아닌, 끝없는 공간이었다.


'뭐야,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한평생 지겹도록 봐온 천장이 아닌 아예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곤 나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정신을 차린 나는 주위를 서서히 둘러보았다.


주변은 끝없이 아득하니 어두운 공간을 넘어서 이질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고, 그 끝없이 펼쳐진 장소는 시간 마저 흐르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게 길을 잃은 아기새처럼 얼타고 있을 때, 뒤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정의 상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니,

도심의 길거리 상점처럼 차려진 가게와 그 앞에는 한 사내가 인자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검은 후드티를 깊게 눌러쓴 탓에 얼굴이 자세히는 안 보였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만으로도 중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내 그는 책상에 올려져 있는 한 서류를 들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읽어갔다.


"리몬 세즈, 나이는 21살이며 어렸을 적 몬스터의 침략으로 부모님을 잃고 홀로 뒷골목 생활, 현재는 몬스터 헌터로 하루하루 벌어 활동 중...."


30초만에 내가 살아온 인생을 훑어내린 그를 나는 그저 황당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여기는 사후세계인가요? 당신은 누구고....."


"하하, 이 곳에 온 사람들의 첫마디는 다 그렇게들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게 말한 사내는 손깍지를 끼곤 이어서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듯, 여긴 부정의 상점입니다.

그리고 여긴 다른 차원의 장소이고요."


".......부정의 상점......이요?"


"네, 보통 상점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는지?"


"화폐를 통해 물건을 사는 장소....요."


"하지만 이 곳은 다릅니다. 여기서의 화폐는, '감정'이죠."


어린 시절부터 생사를 넘나들며 헌터 생활을 하여 나름 강심장이라 생각했건만, 지금 상황을 따라가기에는 벅찼다.


하지만 사내는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감정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죠. 그 중에서도 여기는 '부정'의 감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내 머릿속에는 여러가지 부정의 감정이 떠올랐다.


슬픔, 후회, 자책, 비참, 허망......


내가 여태껏 살아왔던 인생에서 언제나 느꼈던 감정들.


그와 동시에 과거 헌터 생활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필 저런 놈팡이처럼 생긴 사람 때문에 우리가 받는 전리품이 적어지잖아. 에라이!'


'쉿, 그러다 듣겠어.'


급하게 헌터 인원을 구한다는 귀족 파티에 들어가서 들은 소리부터.


'아무래도 당신은 저희 파티에 어울리지 못하는 거 같아요.'


'그러게요. 그런 몰골로 돌아다니면 우리의 체면까지 구겨진다니까요.'


자신의 파티 이미지만 챙기기 위해 서슴없이 파티에서 내쫓은 기억까지.


아주 단편적인 사건만 떠올렸을 뿐인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마치 과거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후벼파는 것처럼.


"제 인생은 불운했습니다."


나는 허탈한 감정으로 사내에게 말했다.


"제가 있음으로써 주변 사람들이 힘들고, 그 힘듦을 저에게 쏟아내는게 힘들어서, 저는 혼자 지냈죠."


말하다보니 마음 한 켠에 있던 우울감이 점점 차올랐다.


"차라리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모든 잘못이 저에게 있다는 생각을 할수록 편했습니다."


어차피, 나는 혼자가 될 운명이었으니.


그러자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사내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글쎄요. 제 눈에는 그저 모험심이 강한 한 사내가 보이는 군요.

그리고 이 곳에 선택받아서 온 것이라면 운이 없는 것도 아니죠."


그러고는 그는 옆으로 살짝 자리를 비키며 말했다.


"어쩌다보니 말이 길어지게 되었군요.

차원을 유지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아서 말이죠.

자, 당신이 가진 감정의 수량은 100입니다. 골라보시죠."


사내가 비키자 보이지 않던 진열된 물건들이 보였다.


모험가가 쓰는 장비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으며,

그 밑에는 다양한 숫자가 적혀있었다.


'아마 저 숫자가 가격이겠군.'


장비 하나하나가 웅장한 느낌을 줄만큼 엄청난 등급의 물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 이목을 끌었던 건 그런 장비들이 아닌, 구석에 있는 하나의 알이었다.


가격은 100. 물건들 중 제일 비쌌으며 딱 내가 가지고 있다던 수량에 맞는 가격이었다.


"이 알은 뭐죠?"


"아, 그건 하나의 생명체가 깃든 알입니다.

여태까지 손님 말고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극소수의 사람들은 저 가격에 해당하는 감정의 수량을 가지고 있지 않아 여태까지 팔라지 않았지만..."


"......이걸로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말동무이자 친구를 구하고 싶어서요."


그러자 사내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탁월한 선택이시군요. 한 가지 팁을 드리자면, 그 생명체는 당신의 감정을 먹으면서 자란답니다."


"감정을 먹는다니, 그게 무슨......"


"안녕히 가십시요. 손님."


그의 말과 동시에 난 아득한 느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눈을 뜬 나는 낡은 나무로 된 천장을 바라보았다.


.....돌아왔구나.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내가 살던 집 그대로였다.


'......그냥 꿈이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날려는데,

옆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을 그대로 반영한 듯한 새하얀 피부, 만년설처럼 깨끗한 순백의 머리카락, 그리고 머리에 달린 두 개의 강렬한 느낌을 주는 단단한 뿔까지.


아주 자그마한 소녀가 내 왼쪽 팔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게 나와 전설로만 내려오던 고대의 생물인 드래곤과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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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그녀와의 만남 이후로, 7년이 지났다.


내가 '에레스타' 라는 이름을 지어준 그녀와 나의 관계는 어느새 특별해졌다.


고대의 생물답게 인간으로 치자면 유치원생의 나이일텐데, 7년밖에 안 지났음에도 성숙한 여자의 모습으로 자랐고, 드래곤이라서 그런걸까 그녀의 힘은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손가락을 한 번 튕겼을 뿐인데도 우리 둘의 덩치보다 세네 배쯤은 큰 오우거를 흔적도 없이 터트릴 정도면......


든든함을 넘어선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한 번 알려준 지식을 습득하는 걸로도 모자라 응용까지 할 정도니, 말 다했지.


"드디어 요구한 전리품들을 다 얻었네. 에레스타 덕에 수개월 걸릴 의뢰를 몇 일만에 끝냈는걸?"


던진 물건을 되가져온 강아지처럼 전리품을 모아서 온 그녀를 내가 칭찬하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 옆에 착 달라붙고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았던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의뢰를 완료한 나는 보상금을 받으러 수도의 의뢰 관리국으로 갔다.


특이점이 있다면 에레스타는.....소유욕이 엄청 강한 것 같았다.


특히 나를 상대로.


내가 여자와 친근하게 대할 때 옆에서 엄청나게 나를 째려본 적이 있었는데,

마치 악마 앞에 선 죄인처럼 엄청난 두려움이 몰려온 적이 있었을 뿐 더러.


그녀가 눈치를 준답시고 내 손목을 살짝 잡았을 터인데,

완전히 으스러질 뻔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전에 무심코 관리국 여성 직원과 대화를 나누다가 화가 난 에레스타가 살기를 내뿜는 것 만으로 건물 자체를 날려버릴 뻔했을 수도 있었던 걸 보면......


아무튼 의뢰 보상금을 받고 관리국을 나와 집에 나가려던 찰나.


"이야, 이게 누구야. '패배자' 리몬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제발.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그대로 몸이 경직되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죽은 줄만 알았는데, 이야~ 역시 뒷골목에서 생활한 거지 근성 덕인가~?"


좀 더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내 손을 쳤고,

찰랑, 의뢰 보상금 뭉치가 바닥에 떨어진다.


"댁의 실력으로는 절대 그 정도의 보상금을 받을 정도의 의뢰를 받아낼 수 없었을텐데~

뭐, 어디가서 훔치기라도 했나? 크크큭!"


"그쯤 해두자고. 아무튼, 어이 형씨! 우리가 마침 또 술집에 갈 돈이 필요한 참인데, 조금 기부해줄 수 있을까 해서~

서로 피는 안 보고 평화롭게, 응?"


그와 동시에 나에게 가장 큰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꿰뚫었던 기억이 오버랩 되었다.


상급 던전 소탕 당시, 함정에 빠져 큰 위기였던 순간에 나를 고기방패로 이용하여 버리고 도망간 파티였다.


나를 고기방패로 세우자고 소리치던 검사,

함정 쪽 몬스터들로 나를 던져버린 마법사,

어차피 뒷골목에서 살던 녀석이니 뒤져도 누구도 신경을 안 쓸꺼라고 말하던 힐러.


악몽의 기억이 떠오르자, 점점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숨이 가빠오고,

손이 떨린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심장을 누가 움켜쥐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울린다.


너 때문이야.


너가 다 망쳤어


왜 사냐?


머저리, 미련해


왜 안 죽어? 죽어버려.


그렇게 내가 완전히 무너지려 할 때 쯤, 갑자기 눈 앞에 바로 무언가가 덮여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마치 베개에 몸을 맡긴 것처럼 편안한 무언가가 내 두 눈과 두 귀를 감쌌다.


그것이 에레스타의 손임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심장을 옥죄어오던 감정과 머릿속에서 울리는 망할 목소리가 고요해졌다.


내 등 뒤에 달라붙은 그녀의 심장소리가 내 심장소리와 함께 뛰고 있었다.


마치, '괜찮아' 라는 것처럼.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뒤를 돌아보니 최악의 악몽을 심었던 그 망할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에레스타가 쫓아낸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과거의 사건이 아직 맴돌고 있던 탓인지 후유증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하게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집에 가고 싶을 뿐이었다.


평생 혼자 고독하게 살아오고, 모든 짐은 자신이 짊어지려 했던 그가,

이제는 앞으로 걸어가는 길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토록 위안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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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남자에게 가장 아픈 흉터로 남았던 기억의 주인공들은 수도에서 말 그대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되었고......


그로부터 3구의 시체가 관리국 뒷쪽 골목에서 온 관절이 꺾인 채 기괴하고 끔찍한 몰골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물론 그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아니,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녀와 '얽매어져' 있는 이상,


어둠 속에서 보라빛과 분홍색이 서로 점칠된 안광이 번뜩인다.


세상 그 누구도, 더 이상 그를 건드릴 수는 없을테니까.


힘차게 아침 요리를 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웃는다.


건드리게 된다면 그 녀석은 아마,

차라리 죽여달라고, 지옥에 있는 게 더 나을 거라며 처절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 치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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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째 소설입니다.

요즘 다들 품질 좋은 소설들이 많이 올라오고 개인적인 일도 있어서 쓰는 게 많이 늦었습니다.

죽은 건 아니니 걱정마십쇼.

오랜만에 왔으니 삼겹살입니다.

오타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