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 세상이 한편의 영화라면

일단 나는 절대 주인공은 아닐 것이다


나처럼 평범하고 심심한 사람이 주인공이라면

무조건 망할게 뻔하니까

 

그렇다고 딱히 세상을 원망하진 않는다

난 이런 평범하고 평탄한 삶에 만족하니까


이런 비관적인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에 쓰러진다


"드디어 주말이구나..."


주말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서 자다가

깨면 다시 자는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던 중 전화벨이 울린다 

최유진? 얘가 웬일이지 


"여보세요"


"어 도윤아 오랜만이야~ 나 유진이, 기억하지?"


"그럼 기억하지, 잘 지내지?"


"뭐 남들이랑 똑같지, 넌 어때?"


"나도 그렇지 뭐, 근데 웬일이야 전활 다하고"


"그게..."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이지

돈이라도 빌려 달라고 하려 그러나


"너 얀챈대 들어갔지?"


"어, 너랑 같은 학교잖아. 그건 왜?


말이야 같은 학교지 얘는 치대, 나는 전문대라 급이 다르지만.

학과 건물도 떨어져 있어서 같은 학교지만 마주칠 일도 없다


"혹시 소개팅 안 받을래?"


"소개팅? 갑자기"


"어, 같은 과 친군데 키도 크고 예뻐 공부도 되게 잘하고"


정말이다. 문자로 보내준 사진 속에는

20년 인생 살면서 본 여자 중 가장 예쁘고

내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아니 이상형 그 자체인 여자가 보인다

당장이라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난 안돼, 다른 사람 알아봐라"


"왜? 혹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너무 마음에 들지. 완전 이상형"


"근데 왜?"


"급이 안 맞잖아. 쟤가 나랑 만나주겠냐?

괜히 나 같은 놈 소개 시켜줬다가 너도 욕먹는다"


"아~ 그런 거면 괜찮아. 남자면 아무나 괜찮다고 그랬거든"


"...진짜 아무나? 이거 뭐 몰카 아니지?"


"아 그렇다니까! 자꾸 답답하게 굴래?

할 거야 말 거야 3초 안에 대답해. 3...2..."


"아 할게 할게 한다고!"


얘가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왜 이렇게 급해


"그래 그럼 한다고 했다? 걔 번호 지금 보내줄게"


"진짜 고맙다, 이걸 어떻게 갚지?"


"갚기는 무슨, 소개팅이나 잘하세요

아 이제 끊을게, 버스 왔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유설아 010-XXXX-XXXX 

이거 꿈 아니지?

이런 여자랑 소개팅을 하다니

너무 비현실적이라 믿어지지 않는다

친구 잘 둔 덕을 이렇게 보는구나


침착하고 일단 연락을 보내보자


'안녕하세요 이도윤입니다 

유진이한테 소개 받았는데 지금 연락 괜찮으세요?'


'내일 오후 4시 시간 괜찮으세요?'


'네 가능합니다'


'얀챈카페 어딨는지 아시죠?'


'네'


'그럼 내일 오후 4시 얀챈카페에서 뵙겠습니다'


...이러고 끝?

원래 이런 저런 얘기도 좀 주고받고 하는 거 아닌가?

본론만 말하고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점심이나 저녁에 만날 줄 알았는데 

4시에 카페라니, 이 애매한 시간은 뭐지


에라 모르겠다. 내일 만나보면 알겠지

제출 기한이 얼마 안 남은 과제가 있어서

더 의문을 끌어안고 있을 여유는 없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밖은 벌써 어둡고 눈은 감겨온다

주말도 있으니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지

혹시나 하고 휴대폰을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시야에서 치우고 이불을 덮는다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을 추스리고

하루를 마무리 하기로 한다




지금 시간은 오후 4시 30분

9시 즈음 일어나서 게임 좀 하다가

어제 하다 남은 과제 마무리하고 기숙사 점심 먹고

옷장에 있는 옷 중 가장 무난한 옷으로 골라 입고

너무 긴장돼서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와버렸다

약속 시간은 벌써 30분이나 지났는데

무슨 일 생기셨나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더 버티는 것도 눈치 보여서

뭐라도 더 시키려고 일어나려는 순간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어제 사진으로 본 사람이 들어왔다


두리번 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제스처에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유설아씨?"


"...그럼 그쪽이 이도윤씨?"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도윤이라고 합니다"


"유설아에요. 일단 앉아서 이야기 하시죠"


카운터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를

가져와 테이블에 앉는다

혹시 사진이 좀 과장된 건 아닐까 싶었는데

과장은 무슨, 사진빨을 못 받는 수준이다

하얀 피부의 전형적인 냉미녀

180인 나와 거의 비슷한 눈높이로 보아

키도 정말 큰 듯 하다

키를 받쳐주는 비율도 좋고

꽤나 펑퍼짐한 옷을 입었음에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몸매까지

말 그대로 완벽에 가깝단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사진도 그렇고 실제로 만나서도 그렇고

표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거

미동도 없는 무표정을 유지한다

웃으면 더 예쁠 것 같은데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다


"죄송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늦었네요"


"아 괜찮아요, 저도 온 지 얼마 안됐어요"


"언제쯤 오셨나요"


"....3시쯤에 도착했습니다"


"흐응.."


무슨 면접 보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럴 순 없다

회심의 질문을 던져본다


"저희 동갑인 것 같은데 말 놓을까요?"


"아니요, 전 이게 편해서"


"아 네 알겠습니다"


살면서 소개팅을 처음 해보는 나라도 알 수 있다.

이건 망했네. 하하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감정이 없다 못해 차갑고 딱딱한 말투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지 않은 눈빛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보이는 태도는 절대 아닐 것이다

기대 이하, 수준 미달.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은 결국

짚신의 짝은 짚신이라는 것

주제도 모르고 꽃신을 원하면

돌아오는 건 멸시와 조롱, 그뿐이다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그랬을까

꼴에 대학 왔다고 그새 까먹었나

잘만 먹던 커피가 괜히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씨...도윤씨!"


"ㄴ...네! 갑자기 무슨..."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괜찮으세요?"


"아...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뭐라고 하셨죠?"


"얀챈대 다니시는 거 맞으시죠?"


"아 네 맞습니다. 얀챈대 화공과입니다"


"할 줄 아는 운동 있으세요?"


"고등학교 때 복싱을 잠깐.."


"뭐 키도 꽤 크시고...이 정도면 괜찮겠지


도윤씨, 저와 교제해 주시겠습니까?"


?

내가 잘못들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차갑게 대하다가 갑자기?

같은 대학교에 복싱 좀 배운 게 

그 정도로 좋은 조건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대신"


그럼 그렇지, 행복회로 안 돌리길 잘했네


"밥은 저랑 같이 드시고, 수업 끝나면 데리러 오세요

스킨쉽은 제가 허락했을 때, 시키는 만큼만 하세요

데이트는 주말에 한번만, 되도록 대학 근처에서

연락은 제가 먼저, 그 전엔 삼가주세요"


"...네?"


"아직 군대는 안 갔다 오신 것 같은데,

언제 갈지 정하셨나요?"


"올해 7월에 갑니다. 근데 그건 왜.."


"그럼 헤어지는 시기는 그때로 하죠"


대화를 따라가질 못하겠다

갑자기 사귀자더니, 별의 별 조건을 걸질 않나

헤어질 때를 정하고 사귀는 건 또 뭐야

이거 설마...


"...저랑 사귀는 '척'을 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맞아요, 다행히 이해가 빠르시네요"


막 던진 말인데 그게 맞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

날 놀리고 있거나 몰카거나, 둘중 하나다

최유진이랑 짜고 치는 건가?

근처에서 누가 찍고 있는 거 아니야?


"장난 같은 건 아니니까 의심 안 하셔도 돼요"


자기가 생각해도 장난 같았나 보지


"장난치는 게 아니면 이런 걸 왜 합니까?

이유가 있다면 설명해보세요"


설아씨는 잠깐 고민하는 듯 하더니

한숨을 한번 쉬곤 얘길 시작했다




설아씨의 주장은 이랬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길 따라다닌 스토커가 있었는데

경찰에 신고를 해도 항상 '할 수 있는 게 없다' 는 대답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땐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도움 덕에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대학 갈 때 까지만 버틴다는 생각이었지만

원래 살던 곳에서 꽤 멀리 대학을 왔음에도

따라온 스토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도울 사람이 없단 사실을 아는지 점점 행동도 대담해져서 

이대로 가다간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 같아 대책을 강구한 게

이 사귀는 '척'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드라마나 애니에서나 보던 일을 실제로 겪었다니

역시 픽션은 현실을 못 뛰어넘는구나


"이제 설명이 좀 되셨나요"


"어느 정도는 이해했습니다

근데 제가 안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죠"


"다른 사람 알아봐야죠"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솔직히 찜찜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조건도 많고 헤어질 날도 정해져 있지만

나 같은 인간이 언제 연애를

그것도 이런 여자랑 연애를 해보겠는가

사귀어 본 것 만으로도 평생 술안주 감이다


"그럼 여기 서명하고 사인해주세요"


가방에서 꺼낸 빼곡한 A4 용지를 읽어보니

이게 장난이 아니란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근데 뭐야 이거, 자세히 보니까...


"아까 들은 것보다 지켜야 될게 많은데요"


"싫으면 관두세요. 다른 사람 알아보죠 뭐" 


"...누가 안 한답니까"


종이 구석에 을 이라는 글자 옆에

서명과 사인을 한다


갑 유설아

을 이도윤


이게 잘하는 짓인가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문자로 계약서 사본 보내드릴 테니까

계약 조건 다시 잘 읽어보세요

남은 주말 잘 보내시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아 네, 조심히 들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간다

아무리 맘에 안 들어도 그렇지

너무하네 거 참


"...세요"


남은 커피나 마저 먹고 일어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