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약, 과거의 나를 만나게 된다면 명심해둬.'


'말을 할때는 단어 하나도 신중하게.'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는 말은 삼가도록해.'


'그곳에 있는건 더이상 당신의 연인이 아닌.'


'그저, 인간을 먹잇감으로만 인식할뿐인 흡혈귀니깐.'








*     *     *





그녀가 옥좌에서 잠에 든지 서너시간쯤 되었을까.


앞으로 내가 당분간 사용하게 될 방을 정리해봤지만, 여간 쉬운일은 아니었다.


멀쩡한 가구는 단 하나도 없었으며, 죄다 방치된지 수십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가구들 뿐이었으니.


이래서야 방을 청소한다기보단,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골라내는 일에 가까웠다.


그렇다 하더라도 요괴로 득시글 거리는 밖에서 사는것보다는 그녀의 저택에서 그녀의 비호아래 살아가는것이 백배는 나으리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옥좌가 있는 중앙 홀까지 이동하는 도중에,


무언가 기이함을 느끼자.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옥좌를 향해, 보다 정확히는 레밀리아를 향해 쏟아지는 달빛은, 그녀의 위압감을 더욱이 끌어올리고 있었으니.


이것이 정말 내가 알던 그 레밀리아가 맞는건가,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그렇게 놀랄 시간에,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주인의 상태를 확인하는건 어떨까나?"


조금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의 주인을 달래기 위해,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불편한거라도 있...나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존댓말, 그야 수년간 말을 놓으며 연인처럼 지내왔는데 이제와서 경어를 사용하라니.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녀의 손에 의해 다진고기가 되는것보다는 나은 일이었기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수 밖에 없었다.


경어 사용은 익숙해진다 치더라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을 진짜 문제는 따로있었으니.


"주인이 원하는것도 눈치 못채다니... 집사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는것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며 아직도 모르겠냐며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에.


"... 이래선 합격점 턱걸이는 고사하고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겠는걸."


나는 진땀을 뺄 수 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원하시는걸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주인의 입으로 직접 알려달라는거야? 정말 최악의 하인이네, 당신."


과거의 그녀는 참으로 귀찮은 여자였다는, 별로 알고싶지 않았던 정보를 얻으며.


"아직 미숙한점이 많기에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하기위해 낮은 자세로 다가갔다.


"... 뭐 됐어. 이번에는 용서해줄게."


그런 노력이 빛을 발한걸까.


다행히 별 소란 없이 넘어간 덕분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당신, 지금부터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세요."


라고 할뻔한 찰나, 안도의 한숨은 곧바로 취소할 수 밖에 없었으니.


"식사... 입니까?"


흡혈귀의 식사.


그것은 곧 인간의 피를 섭취하는것을 의미했고, 지금 나에게 혈액을 구할 방법은 없었으니.


즉, 나에게 피를 내놓으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한끼 식사분의 혈액이라면 인체에도 별 문제는 없었으니 상관없지만.


중요한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연인인 미래의 레밀리아와 맺은 약속.


오직 그녀에게만 피를 줄것을 맹세한 피의 계약.


말뿐인 약속이었기에, 다른 사람에게 줘도, 하물며 과거의 레밀리아에게 주는것은 더욱이 아무런 문제도 없을테지만.


나로서도 지키고싶은 연인과의 약속이었기에, 되도록이면 어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죄로 살해당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렇기에, 나는 두눈을 질끈 감은채로 옷깃을 잡아 목 부근을 그녀에게 드러내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 순간이 최대한 빠르게 지나가기를 바랬지만.


아무런 느낌도 들지않아 이상함을 느껴 살짝 눈을 떠보니, 그곳에는 나를 향해 '무얼하고 있냐' 라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레밀리아가 있었다.


"당신, 보나마나 시장의 위치도 모를테니깐 이번만 같이 따라가주려는 거였는데."


한숨을 내쉬며 지갑을 챙긴 그녀는 나에게 장바구니를 들라며 건넸다.


"사람의 호의를 무시한채로, 무슨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있는걸까나."


순식간에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차가운 말과 함께.


"시장에서 인간의 피를 팝니까?"


"그거, 주인에 대한 모욕을 아득히 넘어서 흡혈귀라는 종 자체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들리는데."


"그런게 아니라..."


과거의 레밀리아가 내뱉은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알고있었던 흡혈귀에 대한 상식과는 괴리감이 있었기에.


"... 흡혈귀는 인간의 피밖에 먹지 못하는거 아니었습니까?"


지식의 이질감을 그녀에게 물어보았지만.


"아까부터 무슨 바보같은 말을 하는걸까나.

물론 인간의 피가 가장 효율적인건 사실이지만, 딱히 평범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건 아니야."


"... 그렇군요."


미래의 그녀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지만, 금세 잊어버렸다.


그런것보다도, 지금의 그녀에게 피를 주지 않음으로써 연인과 한 약속을 어기지 않아도 된다는것이 무엇보다 기뻣으니.


들뜬 마음으로 인간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한층 가벼워진 나의 발걸음과는 반대로.


'그런것보다... 왜 흡혈귀의 옆에서 살던 인간이 그런 동네 아이들이나 믿을법한 엉터리 괴담을 믿고 있는거지?'


인간 마을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던 그녀의 발걸음이.


'그리고 왜 고작 한끼 식사분의 피를 주는일에 그렇게까지 거부반응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늦어지는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 인간의 피밖에 먹지 못한다고 속인건 설마...'


이윽고.


'그리고 그렇게나 싫어하더니, 피를 주지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표정에 활기가 돈건... '


완전히 정지하고 나서야.


"... 그러고보니 치사하지 않아?"


뒤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똑같은 레밀리아 스칼렛인데, 차별하는건."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먹이를 눈앞에 둔 굶주린 흡혈귀가 된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