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내 가치는 무엇일까.


노예일 적의 나는 지시하는 일에 군말 없이 따르는 충실함이 유일한 가치인 줄 알았다.


그것으로 내 값이 매겨졌으니까.


하지만, 르노 경의 후계자가 되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


난 혼란스러웠다.


“힐트! 당장 멈춰라-! 이 미련한 놈아!”

“아.”


르노 경의 호통에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목검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르노 경은 등잔을 들고 어두운 밤길을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큼지막한 손아귀로 내 두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본 내 손바닥은 피와 진물이 앉아 거무죽죽한 진창이 되어 있었다.


내가 멀뚱멀뚱 르노 경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그는 피곤함에 찌든 눈매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나는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법을 익히라고 했지. 네 몸을 혹사시키라고 했던가?”

“.......”

“네가 아무리 미련한 놈이지만.... 밤이 되도록 똑같은 자세로 손이 부르터질 때까지 휘두르기를 반복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손에 붕대라도 감아 줄 테니 따라와라!”


왠지 억울했다.


르노 경이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두르는 걸 익히고 있었는데, 도리어 화를 내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르노 경은 간혹 내게 일을 시키고, 내가 그 일을 해내면 입에서 불을 뿜듯이 호통을 쳤다.


그럴 때마다 내 별명이 하나씩 더 생겨났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내가 식재료를 가져오라고 동전까지 줬더니, 그걸 가게에서 아무 말 없이 훔쳐 와!? 당장 돌려주고 와!”

“이런 간을 삶아 먹을 놈! 강 건너 마을을 헤엄쳐 갔다 와?! 너는 목숨을 내던지고 싶은 거냐!”

“어디에서 피 칠갑이 되어 왔나 했더니.... 너구리라도 잡아 오라는 농을 듣고 숲에 들어갔다 온 거냐! 네 녀석은 정녕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줄 모르는 거냐!”


바보, 멍청이, 미련퉁이, 문둥이, 얼벙이.

그런 별명이 차곡차곡 쌓이고, 맘속에도 억울함이 차곡차곡 쌓이던 끝에.


르노 경에게 항변하듯 물었다.


“무, 무엇이 잘못된 겁니까? 저는 르노 경께서 내린 명을 따랐는데... 왜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리고 돌아온 르노 경의 대답은,


“아직도 모르는 건가? 네 잘못은 내 명령을 너무 잘 따르는 거다.”

“......?”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르노 경과 함께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를 세고.

내가 태어나고 해가 아홉 번째로 하늘을 돌았다.


나는 르노 경과 다니며 중앙 대륙을 거닐었다.

그는 내게 세상을 돌아보는 법을 가르쳤고, 또 세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검술’이었다.


르노 경은 세 살 때부터 검을 잡은 전사였고, 오십에 가까운 인생의 절반을 기사로 살아왔다.


그가 살아있음은, 그가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난 그의 계보를 이어 나가기로 맹세했기에, 전사로서 걸어온 길을 똑같이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난 훈련을 위해 받은 목검을 빼앗겼다.


대신,


“이것이 너의 검이다.”

“.......”


르노 경은 내 상반신보다 살짝 긴 장검을 내려주었다.

생에 처음 쥐어보는 장검. 그것은 내가 휘두른 목검보다 두어 배는 무거웠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자. 르노 경은 대뜸 날 끝으로 내 손가락을 살짝 벴다.


피 한 방울이 날에 묻을 만한 희미한 상처였다. 르노 경은 날에 흘린 핏방울을 문질러 검날에 먹였다.


“가장 먼저 검에 묻혀야 할 피는 주인의 것이다. 그래야 검이 제 주인을 알아보고 베지 않으니까.”

“그렇습니까?”

“그리 맹신하진 마라. 전사들의 오랜 풍습이니까. 이래봤자 제 검에 찔릴 수 있으니 멍청한 짓은 삼가거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손에 들린 장검을 보았다.

이제껏 르노 경의 보검인 ‘회색은’만을 보아왔지만, 내 검 또한 검신부터 검파두식까지 모난 곳이 보이지 않는 잘 정련된 검이었다.


아주 잘 만들어진 검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장검은 내 것이다.


나이 아홉에 처음으로 온전히 가져보는 나의 검이다.


기쁘면서도, 슬프고, 또 어색한.

복잡미묘한 감정에 잠겨 있을 때.


스응-!


순간 느껴진 날카로운 금속성과 머리로 향하는 살기에 검을 곧게 세웠다.


카앙-!


날아온 건 매서운 검날이었다. 내가 막지 않았다면 그대로 목이 잘렸을 것이다.

갑작스레 검을 뽑은 르노 경은 입꼬리를 올린 채, 휘두른 검을 뒤로 되감았다.


“역시 감이 좋군. 하지만 아직 자세가 엉성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모든 싸움은 갑작스러운 법이다. 널 위해 기다려 주는 상냥한 전장 따윈 없다.”


르노 경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가늘어진 눈매에서는 진짜 살기마저 풍겨왔다.


그 살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다.


“마력까지 쓰는 겁니까?”

“내가 진심으로 휘둘러야지 너도 진심으로 막지 않겠나?”


르노 경의 검, 회색은의 날에는 엷은 빛으로 막이 덮여있다.


그는 마력 체질을 가진 전사이기에, 몸속에 감도는 마력을 검에 흘려보내는 것이다.

물론 나는 마력 따위 다루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그저 불만스러운 눈으로 볼 뿐이었다.


“앓는 소리 말고 자세부터 잡아라. 검을 받았으면 써봐야 할 것 아니냐?”

“.......”


나만 피를 볼 것이 뻔한 싸움이기에 마음속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몸의 근육이 기억하는 대로 자세를 잡았다.


검 끝을 앞으로, 다리는 넓게, 허리는 굳히고, 어깨는 가볍게.


불과 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장검을 뽑아 든 르노 경과 대치하자, 긴장감이 몸을 짓눌렀다.


이내.


카앙-!


먼저 달려든 쪽은 르노 경이었다.

그가 검날이 내 머리를 향하여 짓쳐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머리 위로 검을 쳐들었다.


카드득-!


철과 철이 맞부딪치며, 날과 날 사이에 갇힌 공기가 지른 비명이 날카롭게 울렸다.


나는 그 검을 받아내고 알 수 있었다.

르노 경이 검에 담아낸 마력은 깃털만큼 가볍고, 붓을 움직일 때처럼 가볍게 검을 놀렸을 뿐이라고.


“크윽...”

“왜 그렇게 죽을상이냐?”


나도 이제 훌쩍 컸고, 르노 경의 키에 머리 네 개까지는 따라잡았다. 힘에서는 성인들과도 비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난 힘겹게 르노 경의 검을 받아냈다. 얼굴에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말이다.


쉬이익-


카앙-!


르노 경은 내가 숨돌릴 틈도 주지 않았다.


돌려낸 검을 다시 옆구리 쪽으로 휘둘렀고, 그걸 빗겨쳐내며 겨우 검날을 피했다.


“막지만 말고 공격을 해라!”


르노 경은 목청껏 재촉하면서도 검무를 멈추지 않았다.


세 번째 공격은 도무지 맞받아칠 생각조차 못 했다.

땅바닥으로 굴러 르노 경의 검을 피하고, 엉덩이를 찧은 채로 쏘아진 검을 쳐냈다.


카앙-!


그리고 결국 내 손은 검을 놓쳤다.


내 패배였다.


르노 경은 내가 검을 놓치자마자 곧바로 살기를 거두었다.

내가 다시 검을 들려고 하자, 그는 손을 들어 막았다.


“되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패다.

그의 압도적인 힘에 무너져, 땅바닥에 굴러 흙까지 잔뜩 묻힐 정도로 엉성한 발악이었다.


억울하진 않았다.

내 힘이 약할 뿐이니까. 난 검조차 제대로 잡지 못할 뿐이니까.


그런데 르노 경의 생각은 나와는 달랐다.


“분하지 않다고?”

“예, 제가 약한 탓이니까요.”

“...힐트!”


르노 경은 또 화를 냈다.

평소와 달리 내 이름을 똑똑히 부르며 노기를 쏟아냈다.


“넌 내가 널 죽이려 했음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는 거냐?”

“하지만 경께서는 절 죽이지 않으셨....”

“전사가 싸우는 목적은 목숨을 거두기 위함이다! 그걸 잊었단 말이냐!”

“.......”


그가 터뜨린 분노에 나는 입이 다물렸다.

그리고 배우지도 않은 변명을 토해낸 것이 놀라웠다.


부끄러움.


뒷간 일을 한다며 놀림을 당할 때도, 여자들 앞에서 알몸으로 바닥에서 나뒹굴 때도, 칼에 빗맞아 우스꽝스럽게 땅바닥에 뒹굴 때도 느낀 적이 없었는데.


난 지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난 부끄러움을 지우려 변명을 토해냈다.


내가 말이다.


“힐트, 넌 나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조차 읽어내지 못하고, 내가 걸어온 길을 뒤를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이냐?”

“.......”

“전사는 패배를 수치스럽게 여겨야 하고, 특히 승자에게 목이 거두어지지 않았을 때 가장 치욕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래야만 필사적으로 싸울 수 있으니까.”

“.......”

“힐트, 너는 너무도 쉽게 순응한다. 부당함에 복종하고, 부조리 앞에 무력해지지. 존재하지도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이 말이다.”


나는 르노 경의 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으니까. 수치스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차마 그에게 시선을 올리지 못했다.


난 여전히 날 때리고 붙잡던 아버지의 주먹이 보였다.


그래서 노예상의 채찍을 보고, 그에게 스스로 복종하길 자처했고.

그래서 르노 경의 검을 보고, 순순히 패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르노 경의 호통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아버지와의 기억.

그것이 나를 가두었던 ‘존재하지 않는 벽’이었다.




* * * * * *




존재하지 않는 벽.


그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손에 잡히지 않으니 깨부술 수도 없다.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지도 알 수 없다.


르노 경에게 그에 대해서 답을 청했지만.


“나도 모른다.”

“.......”

“나한테 아쉬운 표정을 짓지 마라. 그런 마음의 벽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법이니까.”

“르노 경도 말입니까?”

“당연하다마다. 그런 벽을 느끼고 있지만, 깨부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지. 그러니 시간을 들여 고민해보거라. 그 벽은 어떤 벽돌로 쌓였고, 어찌하면 허물어 버릴 수 있는지를.”


구름이 잔뜩 낀 선문답이었으나,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존재하지 않는 벽을 쌓은 그 벽돌은 아버지의 학대였다. 그걸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통해 알게 됐다.


그러나 자다가도 떠오르는 기억을 잊는 법은 어렵고, 학대를 당하며 배우지 못한 감정들을 찾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몸에 밴 습관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처럼 자리 잡았는데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여유롭게 해법을 찾을 시간조차 없었다.


난 한 해를 더 셌고, 이젠 나이가 열을 헤아렸다.


그리고 르노 경과 나는 북 대륙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바람이 느껴지나?”

“예, 춥군요.”

“그래, 배에 내리면 그 한기가 더 깊이 느껴질 거다.”


나와 르노 경은 북 대륙을 오가는 제국군 보급선에 목숨을 맡겼다.


선미로부터 보이는 눈보라로 덮인 대지.


북 대륙.

용암이 굳은 검은 돌로 이루어진 땅 위에 눈과 얼음이 덮인 땅.


흔히 ‘인간계’라고 불리는 중앙 대륙과 달리.

작열하는 용암 계곡과 얼어붙은 영구동토에, 사악한 마족과 흉포한 마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마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음만이 가득한 북 대륙에도 사절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 모닥불 근처는 봄이오-! 솟구치는 화산 아래가 여름이며- 사랑하는 여인의 품이 가을이고- 뒈져가며 오줌 지릴 때가 겨울이라네~! ”””


“뱃사람답게 노랫말 하나는 잘 짓는단 말이지.”

“.......”

“술에 찌든 주절거림은 못 들어주겠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북 대륙은 제국이 북방 원정 선포하면서, 제국군이 식민 도시를 세웠고, 그곳에 자연스럽게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사람이 살기 척박하기 때문에 북 대륙으로 가는 사람은 세 종류이다.


하나는 군인, 하나는 걸인, 그리고 또 하나는 미친놈.


“그리고 우리가 미친놈이라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북방을 지키는 군인도 아니고, 일확천금을 찾아 떠나는 걸인도 아니니까.”

“......그럼 왜 북 대륙으로 가는 겁니까?”

“그야 미친놈이니까.”

“?”


나는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르노 경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배에서 내려 땅에 발이 닫고 나서는.


“이제 알겠느냐?”

“에, 에- 예.... 이, 이건 미..., 미친 짓... 이, 이군요...”


춥다. 시립다.

그런 단어로는 내 몸이 느끼는 추위를 설명할 수 없었다.


따갑고 먹먹하며, 답답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혈액과 피부가 굳어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내가 털로 된 겨울 복장을 겹겹이 입었는데도 말이다.


반면에 르노 경은 털옷 한 겹과 망토를 맸을 뿐인데도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그건 북방 원정에 수차례 참전했던 기사여서가 아니었다.


“마력으로 몸을 덮으면 불어닥치는 한기와 몸의 열이 빠져나가는 걸 보호해 주지.”

“그, 그렇군요.”

“내가 부럽거든 마력체질을 가진 몸으로 다시 태어나거라.”


르노 경은 추위에 떠는 나를 데리고 선착장을 통해 도시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성벽이 마물을 막고, 두 번째 성벽이 삭풍을 막고, 세 번째 성벽이 원귀를 막는다는 삼중 성벽으로 덮인 도시.


푸른 수사슴 도시.


이곳은 내가 보았던 어떤 도시보다 크고 웅장했다.


넓은 평원에서 우뚝 세워진 신성 마리앙 성당을 중심.

영령의 전당과 제국 총독 청사, 해군보병 군수창고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 사이의 틈이 웅장한 광장과 마차 5대가 지나다닐 만큼 넓은 길을 이루었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수천 명의 순례자 무리가 우리를 지나쳤고, 또 수천 명의 군단병들이 지나쳐 갔다.


“여긴 유일신 에덴세께서 잠들어 계신 ‘기약의 바다’로 향하는 중간 기착지이다. 모든 순례자는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영구 동토를 향해 순례를 계속하지. 그래서 이 도시에 특별한 이명이 붙은 거다.”


‘갈망의 도시.’

그런 이명이 아깝지 않을 만큼 거대한 도시이다.


여독을 풀기도 잠시, 르노 경과 나는 도시에서 며칠을 머물지 않았다.


눈보라가 걷히고 날이 풀리자마자,

곧바로 우리는 세 개의 성문 밖을 나섰다.


순례자들이 향하는 순례로를 따라 산맥으로 향했고, 눈송이로 잎을 맺은 얼어붙은 숲에 다다랐다.


겨울의 숨을 잔뜩 머금은 깊은 산 속의 숲은 우아하면서도 잔혹했다.


“사슴이군요.”

“잘도 구분해 냈구나.”


육편 조각으로 잘게 다져진 사슴의 사체가 숲속에 박제되어 있다.

무언가가 사슴을 통째로 입 안에서 씹어 먹다가 발굽과 뿔 같은 단단한 것을 찌꺼기와 뱉어둔 흔적이었다.


곰이나 호랑이 같은 짐승은 먹잇감을 이런 식으로 포식하지 않는다.


“마물이 벌인 짓입니까?”

“그래. 뿔하마의 소행 같다. 흔적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놈의 영역을 나돌고 있을 거다.”

“그런데 발자국이 없군요.”

“여긴 반나절만 지나도 눈이 턱 밑까지 쌓이는 설산이야. 발자국 같은 건 남지 않는다.”


르노 경은 노련한 전사답게 빠르게 마물을 파악하고, 놈의 습성에 따라서 뒤를 쫒았다.


“뿔하마의 이마에 달린 커다란 뿔은 나무의 가지치기를 대신 해주지. 기형적으로 가지가 꺾인 나무를 찾다보면 놈이 나올 거다.”


르노 경의 뒤를 따라 발소리를 죽이고 숲속을 뒤적거리자.


- 푸오오오오....


짐승의 울음소리가 숲 전체에 울렸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가팔랐는지, 나뭇가지들이 떨리며 눈바람을 일으킬 정도였다.


가까운 울음소리를 뒤따라가자, 겨울풀이 우거진 공터에 거대한 바위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 몸집보다 커다란 뿔이 이마에 달린 거대한 하마.


생전 처음 보는 마물, 뿔하마였다.


르노 경은 나에게 자세를 낮추라며 손짓하고, 수화로 뜻을 전했다.


/ 여기서 숨소리도 내지 말고 기다려라. /

/ 알겠습니다. /

/ 진짜 숨을 참진 말고. /

/ 예. /


나는 르노 경의 말에 따라 잠자코 기다렸다.


르노 경은 그의 몸이 바람을 거슬러 가는 소리마저도 죽이며, 천천히 뿔하마의 등 뒤로 다가갔다.


덩치 큰 마물은 기척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제 입속을 풀잎 따위로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뿔하마로부터 다섯 걸음이 남았을 때.


파앗-!


르노 경은 거구의 몸으로 날렵하게 뛰어오르더니, 양손으로 뽑아 든 그의 장검 ‘회색은’을 뿔하마의 등허리를 깊숙이 쑤셨다.


- 쿠오오오오오!!!


그 비수에 당황한 뿔하마가 우둔한 몸집을 한껏 뒤채자, 이윽고 치우치는 충격에 르노 경은 나무까지 튕겨 날아갔다.


그러나 르노 경은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나무에 발을 딛고 땅에 사뿐하게 착지한다.

등에서 시뻘건 핏줄기를 흘리는 뿔하마.


집채만 한 마물의 등허리로부터 피가 솟구쳐 흐르고 있지만, 놈은 몸집을 비틀거리면서 불청객을 향해 몸을 돌렸다.


르노 경과 뿔하마의 살기는 같은 일직선을 이루었다.


“오거라-!!!”


르노 경이 검날을 세워 하늘 위로 쳐들자, 뿔하마는 커다란 발자국을 얼어붙은 땅에 찍으며 돌진한다.


놈의 커다란 뿔을 뒤척이며 두꺼운 나무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리더니, 놈이 돌진한 곳은 큼지막한 발자국과 짓이겨진 나무 조각만 남았다.


- 쿠오오오오!!!


인간은 저런 마물과 맞서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덩치와는 다르게 재빠른 놈이구나!”


르노 경은 놈이 돌진할 때마다 발목이나, 뱃가죽을 검날로 긁을 뿐, 마물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르노 경은 웃고 있다.

그것도 아주 활짝.


르노 경은 미쳐버린 걸까?

미친놈이라서 북 대륙에 온 걸까?


결국 먼저 지쳐 짓밟히는 쪽은 르노 경이 될 것이다. 그가 마력체질을 가진 노련한 전사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도와야 한다.

내가 르노 경을 살려야 한다.


...그러나 내 발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도 내지 말고 기다리라는 명령.

르노 경이 내린 명령이 내 발목을 꽉 붙잡고 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오래 주저했던 걸까.


콰아아아아앙-!


뿔하마의 뿔이 르노 경을 쳐내 날려 보냈다. 그는 멀리 날아가 바위에 등을 부딪치더니, 눈이 소복이 쌓인 언덕에 쓰러졌다.


내 눈은 그 광경을 보고.


또 수풀을 박차고 커다란 마물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보았다.


양손에 쥔 검과 몸이 하나가 된 듯. 나는 뿔하마의 발목을 향해 몸을 던졌다.


푸우욱-!


- 푸오오오오오-!!!


뿔하마는 커다란 비명을 지르더니, 곧바로 발을 털었다.


문제는 내가 검을 미처 빼내지 못했다는 것이고, 나는 충격에 휩쓸려 하늘을 날았다.


나는 르노 경처럼 몸이 날렵하지 못했기에, 눈바닥으로 떨어져 수십 번을 굴렀다.


“크윽....”


다행히 눈이 두껍게 쌓인 눈밭에 떨어져, 몸에 가해진 충격은 덜했으나.


- 쿠오오오오!!!


뿔하마의 시선이 내게 돌려졌다.

놈은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고, 이 눈밭에서 몸을 날려 피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질끈 감는 것뿐이라고 여겼지만.


슈와아악-!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어디선가 쏘아진 검광이 뿔하마의 몸을 갈랐다.


뿔하마의 옆구리부터 목덜미까지 피부와 살점이 적나라하게 갈라지며, 하얀 눈밭에 붉은 피 분수를 뿌렸다.


그 거대했던 뿔하마가 반으로 갈린 채 죽었다.


그리고 검광이 쏘아진 방향으로부터 누군가가 달려오는가 싶더니, 곧바로 발길질이 날라왔다.


르노 경이었다.


“목숨을 벼룩처럼 여기는 놈아! 드디어 실성한 거냐!”

“아윽....”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 왜 무모한 짓을 못 해서 안달인 거냐!”

“죄송합니다....”


나는 발길질에 맞은 어깨를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르노 경은 씩씩거리며 화를 냈지만, 그의 몸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해 보였다.


“...괜찮으냐? 일어나 서봐라.”


르노 경은 나를 일으켜서 몸 이리 저리를 둘러보고는, 내가 멀쩡하다는 걸 알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르노 경을 보며 무언가 느껴졌다.


그가 뿔하마의 공격에 당해 날아갔을 때, 가슴 속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는데.

그가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어붙은 가슴에 따뜻한 온기가 번졌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깨달았다.


안도감.

안도감이었다.


르노 경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걸까.

그와 나는 서로에게 걱정했고, 또 서로에게 안도했다.


그런 새로운 감정을 알게된 것도 잠시.


르노 경은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아 장검을 쥐게 했다.


“다시 검을 쥐어봐라.”

“예?”

“제대로! 두 손으로 쥐어!”


성화에 못 이겨 나는 장검을 똑바로 잡았다.


“이제 힘을 손에서 검으로 집중시켜 봐라.”

“어떻게 말씀입니까?”

“거 말이 많이 늘은 거냐! 해보라면 해보는 거지!”

“으응.......”


검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줄 수는 있어도.

검 자체에 힘을 줄 수는 없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말에 따라서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스릉-!


카앙-!


르노 경이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 검날으로 쳐들었는데.


“흐흐흐흐!”


르노 경이 뿔하마를 상대할 때와 같이, 만면에 광소를 품고 있었다.


내 장검 검신을 덮은,

회색의 희미한 빛무리을 보면서.


“이제보니 마력을 위해 다시 태어날 필요까지는 없겠구나.”

“.......”


태어나 해를 열 번 세고.

북 대륙에서 아홉 번 달을 보낸 날.


내가 마력체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4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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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 1년 달 = 1일

이런 시간 개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