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마력체질.


마력을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격이다.


마력이란 본래 신의 흔적이다.

신께서 대지를 조각하고 바다를 맺으며 하늘을 그렸을 때, 그가 남긴 잔향이었다.


“그러니, 하찮은 돌 조각에도 갯가에 흐르는 갯물에도 남아 있는 것이 마력이다.”


르노 경은 태연하게 들고 있던 돌 조각을 감싸 쥐었다.


그러자 쥐어진 돌 조각이 미약한 다홍색으로 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내 눈에는 그 돌 조각이 마치 보석처럼 보였다.


그는 내게 가장 하찮은 돌 조각에 담긴, 가장 고귀한 힘을 보여주었다.


“이게 바로 마력이다.”

“신비롭군요.... 그럼 어째서 평소에는 마력이 발하지 않는 겁니까?”

“힐트, 너는 불씨 없이 장작이 스스로 타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르노 경은 그렇게 말하며 마력이 일깨워진 돌 조각을 꽝꽝 얼어붙은 호숫가로 던졌다.


“마력은 스스로 일어서지 않는다.”


돌은 마치 화살촉처럼 거세게 쏘아져 손 뼘 두께의 얼음을 깨부수더니.


“오직 좋은 촉매를 만나야만 자신의 온전한 색을 찾을 수 있지.”


고요하게 잠 들어있던 호수에 파문이 일렁이고 빙판은 깨진 항아리처럼 수십 개의 갈래로 쪼개어졌다.


그렇게 겨울잠에서 깨어난 호수는 은은한 녹색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깐깐한 스승과 미련한 제자처럼 말이야.”

“......”

“자, 힐트 네 차례다.”


그 말에 따라 손에 쥐고 있던 돌 조각을 들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숨을 들이쉬듯이 힘을 응결해, 벅차도록 끓어오른 힘의 기운을 어깨로, 그리고 팔등으로, 그리고 손끝으로 흘려보내어.


이내 손가락 끝마디에 닿은 돌조각으로 흘려냈다.


파앗-!


그러자, 돌 조각의 묻은 잘은 흙먼지가 스스로 흩어지며 미약하게 하얀 빛이 발하여 나온다.


그 빛은 희미한 것과 달리 조금은 탁한 색이 덮여있으니.


“역시 너의 회색 마력이구나.”

“실패한 겁니까?”

“그래. 돌 조각의 마력을 깨우지 못하고, 네 마력만이 돌을 겉돌고 있어.”


르노 경의 말마따나, 내가 돌조각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곧바로 빛을 잃고 평범한 상태로 되돌아갔다.


살짝 아쉬운 느낌이 들자, 르노 경의 큼지막한 손바닥이 내 어깨에 덮였다.


“뭐든지 첫술에 배부른 법은 없다. 그건 그렇고 우연이도 이런 우연이 없군.”

“제 마력의 색이 르노 경의 색과 같군요.”

“흐흐흣- 너도나도 검은 머리에 눈이 검게 질린 생김새니, 누가 보거든 부자 사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말에 나는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부자 관계.

그것이 마력과 관계가 있는 걸까.


마력체질이란 본래 터득할 수 있는 자격이 아니다.


과거, 신의 점지를 받은 수호자와 영령들이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낳은 씨족의 일부만이 그 육신을 온전히 물려받았다.


마력체질은 부모의 핏줄만으로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가문은 고귀한 핏줄이라고 여겨져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그러한 이유로 제국에서 귀족이 노예가 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신의 성은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니까.


그래서 의문 뿐이다.


내 아버지는 마력을 다루지 못 했고, 어머니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럼 내 마력은 어떻게 깨어난 것일까?


“뭐 좋은 거 보고 있냐! 당장 안 따라오고!”

“......뭐 하십니까?”


상념을 깨우는 르노 경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르노 경은 천 하의만 걸친 채, 호숫가 앞에서 몸을 덥히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마력도 몸에 덧씌우지 않았는데, 추운 기색도 없이 홀라당 옷을 벗고 근육질 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다.


그러더니 르노 경은 냅다 얼음이 깨진 호수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둥둥 내밀었다.


“너도 따라 들어와라. 이런 호수는 고대부터 잠든 마력이 풍부하게 얽혀있다.”

“그, 그게 무슨 쌩뚱 맞은 소리입니까....”

“쯧-! 냉찜질이야말로 마력체질을 키우는 수련의 기본이다! 당장 바지만 남기고 물에 들어와라!”


이젠 정말 확신할 수 있다.

르노 경은 미친 사람이 맞았다.


정말, 정말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주섬주섬 옷을 벗고 바지만 남긴 채 호숫가로 가까이갔다.


저 눈으로 뒤덮인 설경의 산맥으로부터 불어닥쳐 오는 삭풍이 몸을 휩쓸자, 두 손이 자연스럽게 겨드랑이에 끼였다.


오들오들 떨면서 겨우 호숫가에 발부터 담그자, 얼굴이 오만상으로 찌부러진다.


내 안쓰러운 몰골을 보던 르노 경은 쾌활한 웃음으로 약을 올렸다.


“크하하핫-! 이제보니 어리광도 피울 줄 아는 귀여운 면이 있네!”

“으그그그그.... 어, 어리광이 아닙니다....”


물에 몸을 담그고 머리만 내밀고 있자, 점점 적응이 되지....


...는 않고 몸이 굳어버렸다.


내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을 때, 르노 경은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콕콕 찌르며 웃음을 짓는다.


“네 몸을 쑤시는 고통을 무시하고, 네 마력을 순환시키는 것에 집중해라.”

“어..., 어떻게 말입니까....”

“마력은 피를 움반할 수 있고, 그 피는 열기를 운반할 수 있다. 너의 머리에 있는 피가 머금은 온기를 마력으로 순환시켜라.”


그렇게 말하는 르노 경은 마치 온천에 앉은 것처럼 평온했고, 그의 피부에서는 뿌연 김이 흘렀다.

그는 마력으로 몸의 열기를 순환하고 있었다.


나도 그를 따라 해보려 했지만, 냉기에 얼어붙은 피와 굳어버린 혈맥들을 마력이 끌고 나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시도했고, 또 계속 실패했다.


냉찜질 수련이 몇 분에 가까워지자.

나를 초조하게 보고 있던 르노 경이 내 어깨를 붙잡아 물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렇게 물 밖에 나온 내 몸은 시퍼렇게 질려있었다.


르노 경은 숨만 쉬는 석상이 되어버린 나를 보더니, 이마를 쓸어내리며 탄식을 내뱉는다.


“허-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군.... 못 할 거 같으면 물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 것 아니냐!”

“나..., 나가고 싶어도... 모, 몸이....”

“되었다! 오늘은 일단 몸부터 녹이고, 내일 얼음이 다시 얼었을 때 돌아오자.”

“......예?”


그 순간 나는 북 대륙이 어째서 마계라고 불리는지에 대한.

숨겨진 이유를 알아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 * * * * *




너른 대양의 파도마저도 얼어붙는, 그런 북 대륙의 겨울을 나고.

버림받은 대지에 자애로운 봄이 찾아와야 할 때.


북 대륙의 추위는 천천히 북쪽으로 밀려났다.


이곳에서 열한 번째 해를 셌을 때.

나와 르노 경은 함께 겨울을 쫓아 ‘유폐의 산맥’을 넘어 북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 산맥 중턱의 길목에서 누군가를 구해준 적이 있었다.


난 늑대보다는 세 배가 크고, 더욱 여린 피에 굶주린 설표를 베었다.

그 여자아이를 구해준 이후로, 생에 두 번째로 내 검으로 누군가를 구해준 것이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린 종자님....”


두꺼운 망토로 몸을 덮은 안경을 쓴 여자.

그녀는 질 좋은 안감의 보따리를 세 개 짊어지고 있었는데, 보따리에는 책과 책을 쓰는 필기구와 잡다한 종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루이시에 에르네스티앙, 견습 서기관이에요. 고귀한 분들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호오- 하팔로디엔 도서관의 서기관이군. 북 대륙 모험기를 쓰기 위해 북 대륙으로 온 건가?”

“예! 그러다가 죽을뻔했지만요!”


르노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죽을뻔한 급박한 상황과 우리와 나눈 말조차도 책에 쓰고 있는 여자.


루이시에는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히 남기는 기록자, 제국 서기관이다.


그녀는 정식 서기관이 되어 머리에 깃털*(슴새 깃으로 대표되는 서기관의 등급)을 꽂기 위해, 그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모험기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같이 목숨을 걸고, 홀로 북 대륙에 오는 서기관은 드물었다.


루이시에와 우리 일행은 서로가 걸어온 행로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에게 축복을 빌며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특별한 선물을 하나 받았다.


“젖지 않는 책과 굳지 않는 붓이라.”

“과분한 선물이군요.”

“과분하긴? 네가 그 서기관 아가씨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5백 장의 하얀 백지로 엮인 깨끗한 책. 그리고 이 하나 빠지지 않은 붓과 검은 먹.

내가 루이시에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서기관에게 책과 붓은 목숨과 같았다.

그들은 죽음이 당면하더라도 책이 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아마포로 끌어안아 지키고, 도서관에 보관된 책을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필사한다.


그렇기에, 루이시에가 내게 책을 주었다는 건 은인에 대한 보답을 넘어선 의미였다.


“그 아가씨는 네가 써내린 이야기를 읽고 싶어 했다.”

“제 이야기입니까....”

“그러니, 그 두꺼운 책을 한 장씩 채워보거라.”


내 이야기가 남겨진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삶을 넘어 영원해진다는 것과 같았다. 그럼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나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보고, 내가 겪고, 내가 들은 이야기들을 써냈다.




* * *




11번째 해, 97번째 달.


르노 경과 산맥을 넘었다. 그리고 여전히 겨울인 그 땅에서 얼어붙은 강줄기를 발견했다.


우린 그곳에 야영지를 세웠고. 강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또 일깨우는 수련에 임했다.


수련은 고됐지만, 내 몸은 점점 마력에 익숙해졌다.



11번째 해, 152번째 달.


나는 처음으로 마물을 벴다.


그리 크지 않았던 검치양*(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늘이 온몸에 돋아난 양)이었고, 마력을 장검에 입혀 몸을 뚫어냈다.


아직 검기를 휘둘러내기에는 미숙했다.


놈의 맹격에 당해 아홉 바늘을 꿰맸고, 다리가 접질렸다. 르노 경은 성을 내셨지만, 내 복기를 거들어주셨다.



11번째 해, 233번째 달.


드디어 검기를 다뤘다.


검선에 마력을 모아 휘둘러, 한 점으로 떨쳐 쏘아 보냈다. 내 검기는 거목에 작은 흠집을 냈다.


르노 경께서는 불만족스럽다고 하셨으나, 어째서인지 말을 더듬으면서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셨다.


무슨 감정을 품고 계신 건진 모르겠다.



12번째 해, 15번째 달.


산맥을 넘어온 순례자 행렬을 보았다.


대부분은 야위었고, 대부분은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순례자 중 늙은 노부인으로부터 중앙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화정 파벌이 다섯 개의 제국 군단과 수십만의 사병을 동원해 황금말굽 기사단을 공격했고, 기사단의 성 두 개가 불탔다.


그에 반격하여 아홉 개의 기사단이 연합해 반격을 가하고 있다.


나는 평화로운 시대를 살았다. 그렇기에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르노 경은 전쟁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밤까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는 내 눈에는 보이지 않을 무언가를 베며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



12번째 해, 97번째 달.


내 몸이 부쩍 자란 걸 느꼈다.


이젠 르노 경과 머리 세 개까지 좁혀졌고, 더는 그에게 고개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된다.


내 검기는 이제 참나무를 베어 쓰러뜨릴 수 있게 됐다.


르노 경은 그걸 보고 괴성을 지르며 웃음을 짓다가, 내가 돌아보자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성을 내셨다.


도대체 뭘까.



13번째 해, 9번째 달.


겨울이 오고 있다.


르노 경과 나는 더욱 북쪽으로 간다.



15번째 해, 36번째 달.


오랜만에 펴보는 책이다.


13번째 해에 나는 르노 경을 따라 북 대륙의 중앙 고도에 닿았고.

암흑으로 물든 땅과, 용암의 호수를 보았다. 그곳에선 끔찍한 생김새의 마물과 죽음이 가득했다.


그곳은 인간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태고로 남아 있는 땅이었고, 지천에 널린 마력은 어느 곳보다 풍부했다.


그 때문에 우리와 같은 수련자들도 간혹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차근차근 마물들을 베어 넘기는 것에 익숙해졌고, 르노 경 또한 그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피로 몸을 씻었고, 검을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내일 우리는 남쪽으로 간다.


그러나 르노 경은 남쪽으로 간다고 할 뿐, 다음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15번째 해, 50번째 달.


순례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다과회 내전’이 끝나고, 칠백만이 죽었다.


3개의 반 제국 기사단이 해제되고, 6개의 공화파 가문이 멸문됐다.


그리고 이사벨 황녀는 하팔로디엔 수도 궁전으로 돌아왔다.

하피네 제국이 되돌아왔다.




* * *




르노 경과 내가 처음 북 대륙에 닿았던 선착장.


그곳에서 나는 그에게 다음 행선지를 물었지만, 되돌아온 답은 단호했다.


“이제 너는 중앙 대륙으로 가거라. 나는 이곳에 남을 것이다.”


르노 경은 내게 홀로 세상에서 살아가라고 말했다.


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 행선지를 물었다.


“너는 이제 내 손에서 벗어나도 될 만큼이나 장성했다. 난 열 다섯이 된 너를 정식으로 양자로 들일 수 있고, 도브레스의 이름을 물려 줄 수 있을 테지.

힐트 도브레스, 너는 이제 내 아들이다. 그 이름으로 내 뒤를 이어가라. 나는 이 척박한 대륙에서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봐야 하니.”


나는 다시 한번, 매여오는 목에서 끓어낸 단어로 내 행선지를 물었다.


그러자 르노 경은 답했다.


“거추장스러운 미련이 남아 있는가. 그렇다면, 얼른 털어버려라.”


미련.


나를 항상 붙잡은 미련을 끊으라고.

그리고 자신이 내게 품은 미련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건지, 마지막 인사를 내게 남겼다.


“유일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란다, 아들아.”


그리고.


내 아버지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커다란 등을 보이며 선착장을 떠나갔다.


그는 고행을 앞둔 순례자들의 인파 속으로 파묻혔고.

이내 시야에서 지워졌다.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마치 나이 다섯의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5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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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파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