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정신 차려보니 새하얀 백지 앞에 붓을 쥐고 있었다.


  처음부터 화가가 꿈이었다.

  

  언제까지고 화가를 하고 싶었다.


  언제까지나 화가가 꿈일 것이다.





  학교 미술 시간에는 꼭 한 번씩 상대방의 얼굴을 그리게 한다.


  

  사각사각, B4 연필로 상대방의 얼굴을 그려내린다. 이리저리 손목을 비틀어 상대방을 그려낸다.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웠다가, 다시 그려보지만 얀순이의 얼굴 같지 않았다.


  나름 그림 좀 그린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당최 제대로 그려낼 수 없었다.


  “잘 그려지고 있어요?”


  “아니, 잘 안 그려지네.”

  

  이마를 살짝 긁으며 내가 그린 그림을 바라본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본판에 비할 바는 안 된다. 


  “의외네요. 그림, 잘 그리잖아요.”


  “동급생이잖아. 존댓말 안 써도 돼.”


  “말버릇이에요.”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걸 보면, 그냥 말버릇인가 보다. 뭐 저런 말버릇이 있냐.


  철혈이자 냉혈이자 철인이자 초인 같은 여자다.

 

  성적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어떠한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존재. 전혀 웃지 않는다, 말도 잘 하지 않는다.


  나랑 이렇게 대화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 믿기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열지 않는 애니까, 잡담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정도 그렸나요?”

 

  “아, 이제 다 그렸어.”

 

  내가 완성된 그림을 보이자,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너는 다 그렸어?”


  “네, 저는 이미 다 그렸어요.”


  얀순이가 그림을 보였다.


  …. 도저히 나로선 흉내 내지 못할 솜씨다. 얀순이를 앞에 두고 감히 화가를 꿈꿔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아무런 수상도 없는 나니까. 단순한 동급생이 내 실력을 훨씬 뛰어넘어버리면, 허탈감이 들곤 한다.


  “잘, 그렸… 네.”


  자신감이 꺾여나간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림마저 완벽해서 열등감이 불같이 치솟는다.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고아에, 친구도 없고, 하나뿐인 그림마저도 재능이 없다. 반대로 모든 걸 가진 얀순이가 미웠다.



  그 미움이, 그 열등감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입 바깥으로 내뱉게 만들었다.


  “저랑 사귀어줄래요?”

  

  “싫어 - .”


  내가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며, 동시에 얀순이가 내 추악한 감정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것은 악수(惡手)였다.


  



  -




  의외로 사람은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간다. 


  아니, 사람은 대부분의 것을 잊고 살아간다.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인간의 뇌 용량에는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기억을 소거해야만 한다.


  얀붕이는 나를 소거했다. 


  나는 그의 안에서 소멸되었지만, 나는 그를 소거시키지 않았다.


  아니, 소거시킬 수 없었다.


  기억은 분명 잊히기 마련이지만. 때로는 잊히지 않는 기억도 있는 법이다….




  “이렇게 예쁜 그림인데 - ?”


  옆에서 어떤 남자애가 그렇게 말했다.


  “예쁜 그림이라고요? 농담하는 거죠?”


  엉망진창이다. 인간인지 강아지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그림을 보고 예쁜 그림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응, 농담하는 거 맞아.”


  “이, 이 - !”


  이 나쁜 사람, 이라고 말을 내뱉기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하지만. 예쁜 그림이 충분히 될 수 있어.”


  순전한 의문으로 우리의 관계는 시작됐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건, 이렇게 해서….”


  그게 얀붕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얀붕이는 내게 그림을 가르쳤다. 아침부터 만나서 저녁까지 서로 그림을 그리는 건 당연한 일이 됐다.


  만날 때마다 얀붕이는 내 그림을 칭찬해주었다. 잘 그리지는 못했지만, 예쁜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그림에서 사랑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 .”


  “사랑? 그게 뭔데요?”


  “.... 흠, 어려운 질문이네.”


  그림에 좀처럼 관심이 없던 소녀는, 그림에 흠뻑 빠져버렸다.


  아니, 그에게 흠뻑 빠져버렸다.


  

  세상 일은 잘 풀리지 않는다. 그 말을 깨닫게 된 건 그날이었다.


  처음으로 얀붕이와 다투게 되었다. 그렇게 심한 말 할 생각 없었지만,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어버렸다.


  뭐, 이때는 별생각 없었다. 그냥 내일 만나서 내가 사과하면 되니까, 아니면 얀붕이가 사과하러 와줄 테니까. 우리가 반년을 만났는데, 이런 사소한 이유로 끊어지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종잇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찢긴다. 그림들이 모조리 찢겨진다. 내가 아끼던 작품도, 열심히 그린 작품도 구분하지 않고 찢겨진다.


  “이딴 쓸모없는 짓이나 하지 말고, 공부나 하렴.”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아니, 저런 것에 나는 꺾이지 않는다.




  나한테 얀붕이가 있다. 네가 있다. 싸우긴 했어도 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잖아, 내 그림을 인정해줄 거잖아. 


  나를 인정해주잖아.


  너를 만나러 갔지만.


  “..... 흐윽, 으흑 -  얀붕아 - …”


  공원의 시계가 12시 정각을 가리킨다. 어제도 이 시간까지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공원의 조명들이 꺼지고, 한없이 어두운 밤이 내 몸을 감싼다.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하면 안 됐는데.


  다투면 안 됐는데…


  몸에 눈이 수북이 쌓인다. 지상에 하얗게 담요가 덮인다. 으슬으슬 떨어도,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펑펑 함박눈이 내리던 그날,


  너는 끝내 오지 않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했다. 


  고등학교 입학식,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향기가. 네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혀 변하지 않은 너.


  고등학교에서 너를 찾을 수 있었다.


  네 물건을 수집한다. 몰래 너의 사진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 너를 그린 그림들을 벽에 붙여놓는 게 취미가 됐다.


  나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너를 조사했다. 네가 좋아하는 여성이 되기 위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이 조사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너에게 고백하는 그날까지 매일매일 노력했다. 결실이 맺어지도록.


  결실은 맺어진다.




  “저랑 사귀어줄래요?”


  “싫어 - .”


  아니, 맺어지지 않는다.




  -





  눈을 뜬다. 


  그 어떠한 것도 시야에 담기지 않는다. 안대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손을 움직여 일단 일어나 - .


  -철컹, 하고 쇳소리가 크게 났다. 


  일어날 수 없다. 누가 내 손에 수갑을, 아니 이건 수갑이 아니다. 쇠사슬에 가깝다.


  쇠사슬? 왜 이런 게 내 몸에….


  “일어났어 - ?”


  얀순이의 목소리다.


  대체 왜 얀순이가 여기 있는 거지? 얀순이도 여기 붙잡힌 건가. 아니, 그전에 나는 왜 속박당해 있는 거야.


  장기매매? 미치광이 사이코패스 살인마? 그 어느 쪽을 생각해보아도, 좋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얀순아, 침착하고 들어봐. 일단 우리 납치된 거 -”


  얀순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응, 맞아.”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뭔가 이상하다. 어떻게 저렇게 평온할 수 있는 거지?


  당황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다. 보통의 여자애라면…..


  아니. 얀순이는 벌벌 떨 이유가 없다.


  “내가 했어.”


  가해자는 피해자를 보고 벌벌 떨 이유가 없다.


  “... 왜?”


  기억을 되살려 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분명 집에 들어가서….


  “나 없는 새에 바람도 피웠더라?”


  우리 집은 다소 허름한 빌라기는 하나, 잠금장치가 없는 게 아니다. 


  “이 창남 새끼야, 누구는 너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그렇게 애타게 찾았는데.”

  “나는, 한시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어.”

  “근데 너는 나를 버리고, 다른 여자랑 사귀고 있더라 - ?”


  얀순이의 눈이 어두워졌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데, 돈도, 사랑도 다 줄 수 있는데 - .”


  그래, 우리 집에는 잠금장치가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잠금장치가 있다고 무조건 들어올 수 없는 게 아니다. 


  얀순이는 몰래 내 방에 들어와서 나를 납치했다.


  “아아, 정말정말정말 기분 나빠.”


  나를 납치할 동기는 무엇인가. 나를 납치해야 할 만한 이유가….

 

  아니, 납치할 만한 이유 따위는 없다. 납치는 범죄다. 그 어떤 사정이 있더라도 해서는 안 될 범죄다.


  “얀붕아, 요즘 다들 너를 싫어하지? 괜찮아, 모두 너를 쳐내도. 모두가 너를 싫어해도. 나는 받아줄 수 있어. 나만 사랑하면 돼.”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너는 인정하면 되는 거야, 내 그림을. 나를 인정하기만 하면 돼.”


  입술을 짓씹는다.


  현실감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쇠사슬이라도 발버둥치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너는, 나만을 위한 인형이 되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해줄게. 성욕도, 식욕도 무엇 하나 빠짐없이 해결해줄게.”


  미친년. 그런 말이 절로 나왔다.


  몸을 움직여보면 볼수록, 더 강하게 절망이 드리누운다. 인간의 근력으로 쇠사슬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포기할 순 없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야. 나를 사랑해줘.”

  “나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너를 사랑할게.”


  그렇게 말하며 따스한 손길로 내 볼을 만져온다.


  “씨발 풀어줘!”


  “왜?”


  “이건, 이건 범죄잖아! 제정신이야? 이런 짓을 하고도….”


  나는 얀순이를 좋아했었다. 사랑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남성이라면 얀순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만큼 예뻤으니까, 그만큼 아름다웠으니까.


  근데, 이건 아니다. 

 

  이런 면을 보고도 ‘하하호호 얀순이가 좋아’ 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머리가 꽃밭인 사람은 못 된다. 나름 긍정적이게 사고해보려고 노력해봐도 이건 아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 뭐?”


  “사랑하면 이렇게 묶어둬야지. 우리 엄마도 아빠를 이렇게 - 단단히 묶어두고 아이 만들기 하던데.”


  “.........”


  상식이 무너져 있다. 제정신이 아닌 여자다. 


  이런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여자다. 


  “사랑하면, 아무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으니까. 이렇게 가둬두는 거잖아.”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 이성이랑 대화하고 있는 꼴을 볼 수 있어? 이성과 웃고 떠드는 꼴을 볼 수 있어? 그건 걸레들이나 하는 짓 아니야?”


  “지, 지랄 말고 이거나 풀어! 나는…..”


  “내가 이상한 거야?”


  이대로 영원히 묶여있을 순 없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다.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속박된 상태라면….


  “자, 안대 벗겨줄게.”


  어둑어둑한 방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방안은 온통 나를 대상으로 그린 초상화뿐이다. 


  “..... 믿었는데. 좋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존경하고 있었는데.”


  나의 이상이었다. 


  내 안의 얀순이가 순식간에 무너진다.


  “나는 좋은 애인데?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안 돼.”


  츄우웁, 하고 그녀가 내 입술을 빨아들이듯이 키스한다.

  

  “우읍, 흐읍…..”


  “퍄하 - .”


  입술이 떨어진다.

  

  “히히, 귀여워.”


  그렇게 말하면서 얀순이가 나를 안는다.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는다. 상당히 부드러웠다.


  얀순이를 바라본다. 내 이성은 저 여자를 두려워하고 있으나, 내 남성성은 끊임없이 몸을 부풀려나간다.


  그녀는 옷을 벗고 있지도, 야한 차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와, 기뻐라~♪”

 

  대체 뭣 때문에…..? 내가 이 정도로 여자를 밝히지는 않을 텐데.


  “진짜 최악이네요♥


  “그만해. 이런 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 !”


  “닥쳐 이 창남새끼야♥ 너도 좋잖아? 너한텐 거부권이라는 게 없어.”

  “그냥 받아들이면 돼. 나를 사랑하기만 하면 돼.”

  

  얀순이가 내 위에 올라탄다. 나는 저항 없이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손발이 묶인 놈이 무슨 저항을 할 수 있을까.


  나를 꼬옥, 끌어안으며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넌 내 거야. 누구에게도 못 줘. 영원히 함께 하자.”

  “죽을 만큼 사랑해♥


  달콤한 얀순이의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화가가 돼야한다…. 명작을 남겨야 하는데…. 빨리 벗어나서 - …


  해결책은 없다, 이대로 그녀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오늘, 엄청, 엄청~ 위험한 날이니까. 잘 참아야 해? 신랑님♥


  스르륵스르륵, 그녀가 옷을 벗는다. 그녀의 새하얀 나신이 눈에 들어온다.


.


  그이의 인정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이라는 물감이 나를 칠해줬으면 좋겠다.


  나를 칠하면?


  그렇게 물감은 굳는 거다. 영원히, 내게 칠해진 상태일 것이다.  


  그이가 마지막으로 그려내는 혼신의 역작.


  우리 딸♥









3650일만에 만난 둘의 이야기입니다. 윤달 제외?

앞으로 더 좋은 글로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