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약속한 기일의 날짜는 앞으로 3일이 남았다.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기약이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그녀에 대한 마음이, 그저 맺어진 인연에 대한 책임 이상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일까.
“나리, 바람이 찹니다. 그만 들어가시지요.”
그런 나를, 눈을 쓸면서도 힐끔힐끔 걱정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하인이 남아있다.
나는 이 충직한 하인에게, 괜찮다는 손짓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내 갑자기 올라온 병증에 의해 가로막혔다.
“커흑...!! 크륵... 크흑...”
새하얀 눈위에 뿌려진 새빨간 선혈.
같은 것이 입가에 잔뜩 튀어, 눈밭 뿐 아니라 온 입가를 더럽히고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지켜보던 하인은 눈을 쓸던 빗자루를 내던지고 내게 황급히 달려왔다.
“나리!”
괜찮은 척,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다행히도 발작할 정도로 병증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저 작은 꼬마에게 나를 들처메고 돌아가야만 하는 일을 맡길 수야 없었다.
“네 말이 옳다. 들어가자. 그래도 너무 걱정마라. 잠깐만 지나면 괜찮아질테니.”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듯, 걱정어린 짜증을 내게 부렸다.
“나리! 제발 몸을 좀 살펴주세요!”
그런 짜증은 언제라도 받아줄 수 있었다. 겉은 거칠지라도 그 속은 나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찬 것이니까.
서서히 몸을 마르게 하고 차갑게 식혀가는 이 폐병에는, 그런 따스함이 언제나 고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런 기특한 하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맙다, 방향(芳香).”
...
이름난 의원도, 용한 무당이나 도사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받은 값을 위해 분주히 노력할수록, 병증은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그런 와중에 혹자는 천형(天刑)이라고 했다. 부자이면서 배풀지 않고, 식자이면서 돕지 않아, 가문이 끊기는 저주를 받았노라고.
그 말을 처음 한 것은 우습게도 가문의 구휼 덕에 기근을 넘겼던 어느 가난한 선비였다고 들었다.
생각하기에, 이 폐병증은 천형일 리가 없었다.
언제나 하늘은 무심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어느 해는 흉작을, 어느 해는 홍수를 일으키는 하늘이, 그래서 백성을 지푸라기 인형으로 보는 하늘이, 한 가문의 명맥이 끊기는 것에 특별히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내가 선선히 죽음을 받아들인 것은 그런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자 그렇게, 모두가 나를 죽을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날 그녀는 내 곁을 떠났다.
횡성수설하는 희언(戱言)이 담긴 편지 한 장 만을 남기고.
‘낭군. 소첩이 소싯적에 불치의 병을 구할 약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낭군께는 부끄럽게도, 아녀자의 몸으로 도술을 익힌 것을 숨기고 평범한 여염집 행세를 해왔나이다.
맹세하오니, 다섯 해가 지나기 전에 낭군의 병을 고칠 약을 구해오리다.
남섬부주의 봉래산에도 없다면 동승신주, 서우화주, 북구로주를 샅샅히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올테니, 부디 강녕하시옵소서.
청아 배상‘
그 뒤 그녀가 가지고 있던 귀한 패물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아내에게 분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동정했다.
병든 남편에게 충실한들, 결과로 남는 것은 청상과부라는 낙인과 함께 가문의 유산의 부스러기일 뿐이다.
힘써 그녀를 후견한들, 죽은 이의 그림자는 산자의 힘을 이기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빠르든 느리든 독수공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운명이 정해진 터일테니...
아직은 젊으니까, 새 삶을 시작해도 좋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은 가문에도 적용되었다.
가문의 사람들도 거의 다 다른 유력자에게로 떠나고 내 곁에 남은 것은 오직 이 충직한 하인 한 명 뿐이다.
죽음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건만, 외로움 하나는 유일하게 두려웠는데...
정말로 고마운,,, 나의 방향.
...
황량한 등불을 키고, 깊어지는 밤의 어둠을 애써 몰아내려는 것은 그녀가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오늘이 내게 남겨진 마지막 날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낮부터 힘이 없어 이부자리에 누웠던 나는 하인에게 물었다.
“방향, 거기 있니?”
그러자 미동도 않던 인영이 서서히 올라가더니,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 나리.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네가 나를 모신 것이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하니?”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방향은 즉답했다.
“해로는 5년이 약간 못 됩니다, 3일 뒤에는 나리를 모시는 것이 5년이 되겠지요.”
내가 아내가 떠난 날을 세어왔듯이, 방향도 나를 만난 날을 세어왔던 모양이다.
정확히 아내가 떠난 날, 방향은 이 가문으로 팔려왔다.
은전 스무 닢에 팔려온 이 불쌍한 아이를 나는, 몸종으로 삼았다.
그저 적당히 보호를 받다가, 세상 물정을 알 때가 되면 언제든 나갈 수 있게.
그렇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젖을 물린 유모까지도 떠나는 와중, 황량한 집에 폐병환자의 간호를 자처한 것은 그녀뿐이었다.
“나를 따른 것을 후회하지 않니?”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불꽃이 꺼지는 것이 느껴져.”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잠시동안의 망설임과 주저함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정도 이상으로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꽃이 피면 봄꽃이 피는 동산으로 소풍을 데려가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봄이라...
내게 다시 봄을 맞이할 기회란 없을 것만 같은데.
내일의 해를 마주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그 아이, 내가 떠나면 세상 누구보다도 슬퍼할 아이인, 방향에게 그런 생각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오늘이 지나기 전, 방향이 품을 수 있는 미련을 조금이나마 덜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방향.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느냐?”
그러자, 그 말에 그녀는 반색했다. 그녀답지 않게.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시겠나이까?”
선물을 주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이었다. 방향에게서 이런 표정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지만,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기엔 내겐 힘이 없구나. 보다시피, 줄 수 있는 재산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 나의 대답에, 다시 그녀는 정색했다.
“그런 것을 바랐다면, 나리의 자리를 찬탈한 놈의 옆을 차지하고 아양을 팔았겠지요. 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방향은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연인을 대하는 태도와 같이 내게 쏘아붙였다.
그런 태도에, 약간이나마 그녀가 원하는 것을 알 것만도 같았다. 서서히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어떻게든 이겨내려 애쓰면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어떤 것을 바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줄게.”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이윽고 바라는 것을 말했다.
“저는...”
...
장례식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요절에다 악상이었기에 곽씨 가문의 장자 곽환의 장례는 그 가문의 위세에 어울리지 않게 초라하고 빠르게 치뤄졌다.
조문을 사절한다는 방만 붙이지 않았을 뿐, 거의 거절하다시피 조문객을 돌려보냈기에. 조용한 집 한 가운데에 자리한 그의 시체는 염해진 채로, 발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의 시신이 담긴 관을 차디찬 땅 아래에 하관할 것이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의 시신의 관을 지키는 것은 그를 죽을때까지 지켰던 충직한 하인, 방향.
어둑한 밤이 되었는데도 방향은 잠들지 않았다.
관의 옆에 몸을 기대어서는 관에 말을 걸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주인이 살아서 듣고있다는듯이.
“내일이면 약속한 기한이라고 했지요? 그렇지만 오지 않았어요.”
“조문객을 거의 돌려보내서였을까요?”
“어쩌면 정말로 왔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모르겠네요.”
“당신의 전부인의 얼굴을 제가 알지 못하니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의 마지막까지 함께하는 여인은 저, 방향 혼자랍니다.”
방향은 관에 입을 가볍게 맞추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죽는 것이 두렵다고 하지 않으셨죠.”
“실은 저는 두렵습니다. 많이 아플까요?”
“당신 옆에 누웠을 때, 제가 웃는 얼굴이면 좋겠으니까요.”
“다 내려놓은 당신은 평온한 표정으로 갔으니, 모든 것을 얻은 저는 기쁜 표정이어야 마땅하겠지요.”
그러나, 방향은 그 달콤한 고백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창호지에 비치던 은은한 달빛을 어둑한 그림자가 점차 집어삼키더니, 이내 다급한 발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온 사람으로 바뀌었다.
미닫이문을 거의 부수다시피 하면서 곽환과 방향이 있는 방에 그녀는 처들어왔다.
낡고 헤지긴 했어도, 그녀가 입은 비단결의 옷은 침침한 등불에도 그 자태를 드러내, 그녀의 신분을 어렵지 않게 알게 했다.
방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에 예를 표했다.
“돌아오셨군요, 마님.”
그러나 그런 인사에는 신경쓸 겨를조차 없다는 듯이, 청아는 방향의 어깨를 거세게 붙잡고 추궁했다.
“낭군은, 낭군님은 어디 있느냐..?”
그 말을 들은 방향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아...「제 서방님」 말씀이신가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경악으로 굳어버린 청아에 면전에 대고, 방향은 승자가 패자를 비웃는 것과 같은 거만한 표정으로 거세게 쏘아붙였다.
“서방님께서는 2일 전에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오지 않을 마님을 기다리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