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들의 소굴.


  추적추적 쏟아지는 빗줄기가 몸을 기분 더럽게 희롱하고, 담배 연기가 중력을 거스른다.


  “으윽, 하아….”


  소녀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다. 추위에 덜덜 떨며 자신의 몸을 끌어안아 보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소녀는 불순한 두 시선을 눈치채고 달리기 시작한다. 춥다, 배고프다.


  나는 몰살 당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하아, 하아-.”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시야가 뿌옇게 변한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넘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쿠당탕.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진다. 안 그래도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는데, 무릎에서 붉게 피가 흘러나온다.


  재빠르게 일어서 두 남성을 향해 아무런 쓰레기들이나 던진다.


  “뭐하냐?”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소녀의 뺨을 친다. 반동으로 소녀의 몸이 벽에 부딪힌다.


  의식이 아득해진다. 잠시 눈을 깜빡이면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소녀가 두 남성을 째려본다.


  “이거 놔 - !”


  소녀의 손목을 붙잡은 살인귀가 말했다.


  “이거, 찐인데?”


  옆에 있던 그의 동료도, 한마디 했다.


  “팔면 꽤 짭짤하겠어.”


  소녀의 목에 달린 가문의 상징. 몰락한 가문의 것이라고는 하나, 값어치가 상당한 물건이다.


  반짝거리는 금뿐이랴? 

  무법지대인 이곳에서 미성년자 강간이란, 금기시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쓰레기들 사이에선 자랑할 만한 업적이었다.


  소녀는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가, 감히 평민이 내 손목을 허락 없이 만져?!”


  당당하게 외친 것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벌벌 떨린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10살의 소녀.


  “뭐? 평민? 하하하!!”


  “고귀하신 아가씨께서 잘못 아시고 계신 게 있으시네요.”


  “여기선, 귀족이건 황제건 힘없는 놈들은 다 죽는 곳이야.”


  소녀의 표정에 절망이 드리누운다. 


  그래,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귀족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을 지킬 힘도 없다. 나는 힘없는 약자다.


  -이 아이는 죽이지 않는 건가?


  -아아, 이 아이에게 가문의 상징을 주고, ‘쓰레기들의 소굴’에 데려다 놓는 건 어떻습니까?


  -으음…? 좋은 생각이로구나. 그래, 그리하여라.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 당시에는 그놈들이 내게 자비를 베푼 줄 알았다.


  지금 와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자아이를 무법 지대에, 그것도 비싼 물건을 손에 쥐여주고 방치하는 것은 살인보다 끔찍한 짓이다. 

  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싫다. 저런 쓰레기들에게 희롱당할 바에는.


  “괜찮아, 죽일 생각은 없어. 최대한 오랫동안 쓰다가-”


  -서걱, 하고 남성의 목이 잘렸다. 


  일 검이었다.


  “이런 미친….!”


  살인귀는 재빠르게 단검을 역수로 꺼내 든다.


  살인귀는, 대검으로 자신의 동료를 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다.


  “그래, 여기선 귀족이건 황제건 중요하지 않지. 그렇지 않아?”


  라고, 대검을 쥔 소년이 말했다.


  자신의 몸보다 큰 대검으로 살인귀를 겨눈다. 


  살인귀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 꼬마?”


  살인귀를 보며 소년이 말한다.


  “네 말대로, 힘없는 놈들은 다 죽는 거야.”


  소녀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피 묻은 검을 털어냈다.


  빗물에 피가 닿아, 색깔이 붉어진다.


  “하, 뭐라고 했나? 힘없는 놈들? 네가 모르는 게 있는데, 나는 기사랑 싸워서 이긴 적- !”


  -서걱, 하고 또다시 남성의 목이 잘려나간다. 


  목 잘린 자리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렇게 목 잘린 시체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철퍽, 하고 쓰러진다.


  “말이 많냐.”

 

  소년은 괜히 귀를 긁으며 그렇게 말했다.


  본인만한 대검을 등 뒤에 매고, 소녀에게 다가간다. 


  갈색깔 가죽 신발이 철퍽, 철퍽 소리를 내며 소녀에게 다가간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가 지면을 쉼 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핏물 섞인 웅덩이를 밟자, 물이 사방으로 튄다. 

  걸음의 끝에는 벽에 몰린 소녀가 소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퀭한 눈매에 온몸이 멍투성이다. 그럼에도 소녀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었다.


  소년은 쓰게 웃었다. 과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던 터.


  손을 내밀며 소년이 말했다.


  “많이 힘들지 - ?”


  울컥, 하고 눈물이 올라온다.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옥구슬 같은 눈물을 흘린다. 


  10살 소녀가 하루아침에 이런 일을 당하게 됐다. 눈물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다. 친척과 주변 사람들을 잃었다. 


  ‘와~ 아가씨, 아가씨 이거 봐요! 제 딸이 저 보고 엄마래요!’

  ‘날 부른 거 아니야? 아까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거든.’


  날 때부터 함께였던 시종과 아직 걷지도 못하는 그 시종의 아이까지 잃었다. 

  

  모두를 잃었다, 하루아침에.


  “괜찮아.”

  소년이 소녀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다 쏟아내.”


  그 말에 소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아닌 척했지만, 소녀는 울고 싶었던 것이다.


  



  -





  “뭐, 뭐, 뭐라고 - ?!”


  “싫으면 말고. 나야 괜찮지만…”


  “한 지붕에서 같이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으…. 이렇게 좁은 곳에서 살면.”


  좁아도 너무 좁다. 

  방이 고작 한 개뿐이다. 


  어떻게든 비를 피해서 눈을 붙일 수 있는 공간을 바랐지만. 

  방금 전까지 품에 안겨서 엉엉 운 주제에, 얼굴을 보면서 살기에는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평, 평민이랑 같이 사는 건 - .”


  “아직도 그 소리야?”


  “.... 그렇지만.”


  “네가 귀족이든 뭐든, 나는 너를 대우해줄 이유가 없어. 여기는 그런 곳이니까. 너 혼자 살아남아야 해.”

  “윽….”


  그에게 미움받기 싫었다. 그래서 자존심을 굽힌다.


  “미, 미안해…”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그렇게 말한다.

 

  “아니, 딱히 미안하다고 말할 것까지는…”


  “날 도와줬잖아. 게다가 이렇게 방도 내어주고 - .”


  그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뭘. 이렇게 돕고 사는 거지. 나중에 갚으면 되는 거 아니야?”


  “..... 응, 알겠어.”


  뭔가, 괜찮은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응, 진짜로 괜찮은 사람….


  “그것보다, 귀족이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이젠 귀족 아니야.”


  “어? 아까는 - .”


  입술을 짓씹는다. 아침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잊고 싶어도 자꾸만 떠오른다.


  “오늘, 다 죽었어. 우리 가문이랑 관련된 사람 전부….”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송글송글 맺혀 흐른다. 그러다 뚝, 뚝 바닥으로 낙하한다.


  내 두 손은 검은 색깔 드레스를 꽈악, 잡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너만 살아남은 거야?”


  살아남은 게 아니다. 살려둔 거다. 그것도 지독한 악의를 가지고…


  “그놈들이 나를 일부러 이곳으로 갖다 놓은 거야.”


  “그건 - .”


  ‘너무 잔인하잖아’ 라고 소년이 말을 덧붙였다.


  바보처럼, 울보처럼 눈물이 또다시 뚝, 뚝 떨어진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두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


  소년은 두 눈을 꼭 감고선 말이 없었다.


  나는 두 팔로 내 몸을 안았다.

 

  “나, 무섭고 외로워. 다들 내 곁을 떠나버리니까. 혼자니까 너무 슬퍼.”


  몸을 떨고 있는 나를 소년은 안쓰럽게 봤다. 그 사실을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다.


  빗물이 창문을 강타하는 소리와 시계 초침 소리만이 존재하는 침묵.


  소년이 입을 열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이 어떻게 될지 난 잘 모르겠네.”


  소년이 이어 말한다.


  “그치만, 곁에 있으라고 하면 곁에 있어줄게. 그건 약속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새끼손가락을 내민다.


  나도 약속하듯 새끼손가락을 건다.


  “평생, 내 곁에 있어줘.”


  “아니, 그건 조금 어려….”


  새끼손가락에 힘을 준다.


  “아야야, 농담이야. 옆에 있을 거야.”


  “고마워.”


  전부터 그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나, 언젠간 다시 가문을 일으켜 세울 거야.” 


  소년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뜬다.


  “우리 가문의 이름을 달고 다시 일어설 거야. 이 가문의 상징을 걸고서.”


  소년이 뒷목을 긁으며 웃었다.


  “나는 그럼, 네 기사가 될게.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아니, 그런 식으로 대충대충 말해서는 안 돼.”


  나는 진짜 진심으로 다짐했다. 그런데 저렇게 가볍게 말하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진중한 표정을 보고 그도 살짝 표정을 굳힌다.

  “알겠어. 크흠, 평생 당신의 검이 되어주겠소… 이렇게 말하면 되냐?”


  “푸흣!”


  “..... 아 씨, 웃지 말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그대를 나의 기사로 삼겠어요.”


  “당신을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소년이 무릎을 꿇고선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등에 짧게 키스한다.


  “..... 나의 기사님.”


  “네, 주인님.”


  우리 둘은 서로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서로 동시에 고갤 돌렸다. 

  자신이 무슨 짓을,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이제 판단이 섰다.


  10살 짜리 소년, 소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얇은 꼴로 한 이불에서 자게 됐다.


  옷은 말려야 하니까 최대한 벗었고. 이불은 하나뿐이라, 한이불에서 자게 되었다.


  숨소리와 빗소리만 남는다. 무어라 말을 걸기에도 어색하다. 살짝 살이 닿게 되면 심장이 미친 듯이 맥동하고 만다.


  조금 부끄러웠다.





 -



  세상 일 알 수 없다고 했던가.


  “성녀님.”


  수많은 성기사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잠시 거리를 나와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당사자인 나도 당황스럽지만, 얀붕이는 오죽하겠는가.


  “성녀….?”


  세상에 대한 욕심이라고 있어봤자, 그나마 얀붕이었다. 둘이서 행복하게, 이대로 쭉 같이 살았으면 했다.


  이렇게 12년을 같이 살았다. 

  그 삶이 망가지는 것은, 12초도 걸리지 않았다.


  “....”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 삶이 붕괴하였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나를 떠나보내려 했다.


  “나는 가기 싫어. 너랑 떨어지기 싫다고!”


  “..... 성녀로 간택받았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나는 그냥 옆에 네가 있어주기만 하면 - .”


  “그럴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성녀는 남성이랑 가까이 있으면…”


  소년은 괴로운 표정으로 말을 잇다가 말았다.


  “그냥,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줘. 무섭단 말이야. 지켜달라고…”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쓰러진다.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위해 애원한다.


  나의 기사님을 뺏어가지 말라고.

  이대로 영원히 함께 살고 싶다고.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날 이후로는 상당히 힘든 삶을 살았다. 


  딱히 나를 물리적으로 괴롭힌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성녀를 누가 괴롭힐 수 있겠는가? 제국의 황제와 맞먹는 권력을 갖는 자리이다. 함부로 ‘너희 아버지 미국 가셨지?’ 같은 농 한 번 하면, 그대로 목이 댕강 날아가게 할 수 있다.


  황제가 성녀를 두려워할 정도다.


  “하아 - .”


  상당히 힘든 삶이다.


  매일매일이 진수성찬이고, 특별히 몸을 움직이는 일도 없었다.


  “얀붕아….”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어떤 노동도 필요 없다. 


  그가 없다.


  그가 없는 삶이, 미친 듯이 지루했다.


  아니. 내 몸의 장기라도 도둑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흐윽, 흐윽 - …”


  12년 동안 한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떨어져 살라니. 

  가슴이 아려왔다.


  얀붕이를, 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간 그와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떨어져도 괜찮을 거라고 상상했다.


  지나고 보니,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얀붕이는 그냥 사람. 내게 있어 좋은 사람이었다.


  그냥 같이 살았기 때문에 친근감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를 일절 ‘사랑’해본다고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성녀님, 그거…. 사랑, 아닌가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냥 걔는…. 그냥…. 어. 아니야, 사랑은 아니야.”


  “그렇지만. 보고 싶고, 마음이 아픈 거면 사랑이죠.”


  “그게 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친 - .”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어요?”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낱 시종이 한 말이, 내 옷을 발가벗기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은, 나를 발가벗기려고만 하지 않았다. 내 심장을 움켜쥐고, 쥐었다가 핀다. 대답을 하지 못한 게 아니다, 대답은 필요 없다.


  “뭐, 사랑이 무조건 ‘너를 위해서 죽을 수 있어!’ 라는 말을 해야 사랑인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요.”


  사랑, 이라.


  딱히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내가 그를 사랑했었다니. 불구덩이에 던져진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당연하게도 얼굴 또한 붉어졌다.


  바람이 필요했다. 손으로 부채질하며 얼굴을 식힌다.


  그럴 리가 없다.

  그냥 걔는 친구다…



  


  성녀는 바쁘다.


  “네네, [구원이 있으라 - ]”


  부상자는 많았다.


  하루종일 주문을 외워도, 부상자들의 줄은 끊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제가 꼭….”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내 손을 만졌다. 상당히 불쾌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성녀님 제발 저희 아들 좀 한 번만 봐주세요…!”


  이런 게 성녀의 삶이다.


  “네, [구원이 있으라 - ]”


  내가 도망치면 이 부상자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생판 모르는 남이더라도 생명은 귀중한 것이다. 살려야 하는 것이다.


  이들을 구원해야 한다.


  “아아, 감사합니다!”


  어제보다 맑게 웃어줄 수 있었다.


  오늘은 행복한 하루가 될 테니까. 





  “..........”


  숨을 죽이고 몰래 얀붕이의 뒤를 따라다닌다. 벽을 엄폐물 삼아 슬쩍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아끼고 아낀 외출권이다. 기회를 틈타 얀붕이를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다.


  “여자…?”


  그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대화를 진행한다. 여자는 내 것을 건드린다. 손으로 터치하며 대화를 진행한다.


  “하….”


  나는 아무런 이해도 하기 싫었다. 그를 이해하려면 정신적인 수고가 필요했다. 그건 아침에 질리도록 한다.


  그래서 다가간다. 


  그의 품에 안긴다. 아니, 그이의 품을 안는다.


  성녀라고 남자의 품에 안기면 안 되나? 남자랑 같이 동거하면 뭐 어떤가?


  “내 거야 - .”


  선포하듯, 아니. 사실을 말하듯 담담하게 말한다.


  “그 손 떼.”


  그러곤 그이의 가슴에 얼굴을 문대며 숨을 크게 들이쉰다.


  얀진… 이라는 이름의 여성었나? 그녀는 내 모습을 보며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나를 보고 성녀가 아니냐고 질문해온다.


  “눈이 있으면 알잖아. 내가 성녀면, 뭐. 남자랑 이야기하는 것도 안 돼? 내가 너같은 걸 - .”


  “얀순아, 이제 그만….”

  “나는, 나는 힘들었지만 참았어. 그런데 너는 한 번을 안 찾아오더라.”

  “.........”


  얀붕이가 괴로운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건, 들여보내 주지 않으니까 - .”


  “....”


  나도 안다. 그는 분명 나를 찾으러 몇 번 왔었다.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만, 탓하고 싶었다.


  “너도 알잖아.”


  “그 여자는.”


  “그…. 여자는.”

  “왜 말을 못해?”


  “그, 미안. 요즘 친하게 지내고 있는 - .”


  그 이후로 이어질 말이 안다. 

  구태여 들으려 하지 않고, 자리를 뜬다. 나는 저 여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무슨 권리로 여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명령을 하겠는가.


  … 그랬으면 안 됐다.


  호위를 따돌려 그를 만난 것까지는 좋았다. 


  어차피 나도 마법 좀 쓸 줄 아니까,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철컥.


  “성녀님.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하하, 이거 참 날쌘 분이시네요.”


  제국의 기사단장을 포함한 정예가 나를 죽이러 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나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무력을 갖췄었다.


  “죽이게 참 어렵게요.”


  그리고, 제국이 나를 죽이려 들 줄도 몰랐다.


  일제히 칼을 뽑아드는 제국의 병사들.


  아니 대체 왜?


  그런 의문이 첫째로 들었고. 둘째로는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 사고했다.


  “당신들 뭐야.”


  무작정 도망친다고 해서 달아날 수는 없다. 일단 어째서 나를 죽이려 드는 것인지 알아둬야 했다.


  “이제 곧 세상 떠나실 분이 알아봤자 무얼 합니까?”


  “....”


  “뭐, 그래도 알려 드릴게요. 일이 너무 쉽게 풀리니까 기분이 좋네요.”


  “뭔데.”


  “황제는 성녀님을 두려워하십니다. 전 성녀님께서 얼마나 막강한 힘을 가지고 계셨는지…. 어휴, 둘이 기 싸움이 안 됐다니깐요? 성녀를 믿는 사람의 수가 어찌나 많았는지…. 쩝.”


  웃으며 기사단장이 칼을 이리저리 휘두른다. 그에 맞춰 철제 갑옷들이 철컥 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전 성녀는 절반 정도 여신이었어요. 백성에게 거의 신 취급 받았다니까요?”


  “.... 아.”


  “이해했죠. 죽이는 이유?”


  나를 죽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성녀의 힘이 세지기 전에 잘라두는 것이다. 어차피 성녀의 힘을 활용하지 못하는 제국은, 성녀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 


  “나를 죽이게 되면 - !”


  “교황 측, 별거 없습니다. 성녀 믿으러 오는 신자가 태반입니다. 어차피 당신 없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태양은 달의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성녀가.”

  “이번처럼, 한참동안은 없을 걸요?”


  “.....”

 

  호흡이 빨라진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는 것일까.


  어린 나이에 가문이 몰살당하고, 성녀가 되어 얀붕이와 떨어져 살게 되고, 나를 죽이러 기사단장이 오고.


  “한심한 년.”


  기사단장의 칼이 천천히 움직인다. 속도를 빠르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저항해봤자 더욱 아프게 죽을 뿐이라고, 성녀가 판단했다. 

  고 생각했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고 마력을 손에 끌어모아 보지만.


  “카운터.”


  뒤에 있는 마법사가 이를 눈치채고 방해했다.


  칼이 목으로 천천히 근접해온다.


  - 나는 그럼, 네 기사가 될게.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 알겠어. 크흠, 평생 당신의 검이 되어주겠소… 이렇게 말하면 되냐?


  행복했어요.


  


  눈을 감는다.


  끝이다.






  “미안해, 늦어서.”


  -챙, 하고 검과 검이 부딪힌다. 


  “뭐냐 너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다. 눈물이 솟구쳐 올라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아니. 저번처럼 왜 잡냐고, 이럴 땐 혼자 내버려두라고, 눈치 없는 놈이라고 또 면박을 줄까 봐….”


  “바보야, 원래 그럴 땐 잡으라고…. 흐윽, 흑…”


  정말 구제할 수 없는 바보다.


  그런 바보에게 기사단장이 칼을 내민다.


  “당신, 누구죠?”


  “그…. 어….”


  그는 한참 말을 버벅이고 고민하다, 말을 내뱉는다.


  “얀순이의 첫 번째 기사.”


  자신을 나의 첫 번째 기사라고 칭한다.


  “흐음…. 성기사 치고는 - .”


  “아니, 나는 성기사가 아니야.”


  “방금 분명, 성녀의 기사라고….”


  “얀순이의 기사야.”


  -챙, 하고 검이 다시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해줄 필요는 없지?”


  “네, 이기고 난 뒤에 물어보겠습니다.”


  “넌 나 못 이겨.”


  육중한 대검으로 기사단장의 검을 수차례 내려찍는다.


  그에 맞춰 기사단장의 검이 진동한다.


  “......”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





 


  그는 질척거리는 지면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상처는 그의 옷을 피로 물들였다.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아낸다. 이에 따라 작게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다. 그가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숨소리는 고통스러웠고,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은 고통 때문에 흐릿해지고 있었다. 


  성녀에게 다가가다 결국, 땅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성녀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옷은 약간 젖어 있을 뿐, 그 어떠한 상처도 입지 않았다. 성녀는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그는 성녀에게 손을 뻗는다. 아주 천천히, 또 느리게. 떨리는 손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힘이 빠져버렸다.


  그의 눈은 어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괜찮아.”

  그를 쓰다듬는다.


  “움직이지 말아줘.”  


  성녀가 그를 쓰다듬는다.


  “제발…..”


  혼자서 추가병력까지 모조리 쓰러뜨린 그는,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듯이 말했다. 


  “응, 열심히 했어. 멋졌어….”


  그의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한다.


  “안 돼. 가면 안 돼….. 너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나는 너 없으면 -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키득키득, 그가 웃으며 말한다. 나 없이 살아갈 수 있겠냐고.


  “.... 안 돼. 못해…”


  그는 말했다. 자신은 약속을 이뤘다고.


  -당신을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죽게 내버려 둘 것 같아? 


  안 돼. 아직 갚지 못한 게 너무나 많다. 그냥 떠나보낼 수 없다.


  “[구원이 있으라 - !] [구원이 있으라!!]”


  손 끝에서 빛이 나며, 마법이 발동된다. 되었다만, 성녀의 마법이라도 이 정도의 중상을 치료하기엔 불가능했다.


  “평생 내 검이 돼준다며! 날 지키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제발….”


  그가 사력을 다해 일어선다.


  이후 내게 무릎 꿇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


  이번엔 내가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내 손등에 키스한다.


  “..... 나의 기사님.”


  “네, 주인님.”


  나는 진흙투성이인 그를 안았다.


  “얀붕아……”


  “그, 얀순아.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사실 나 - .”


  그가 말을 잇는다.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이제서야 깨닫는다.


  “말… 하고 싶었는데. 여태까지 말 못했어. 근데 안 되겠더라.”


  아아, 나는 너를 좋아했구나.


  “성녀면,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 만날 테니까, 멋대로 포기했어.”


  아니, 너를 사랑했구나.


  “다른 남자가 너랑 사귀는 모습 못 봐, 너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줘도 그건 못 보겠어.”


  너도 나를 좋아했구나.


  “미안해 욕심쟁이라.”


  그가 내 뺨을 만지며 말한다.



  “사랑해 - .”


  그것으로, 그는 숨을 거두었다.
















-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아아, 들어봐요. 가능하다니까요?


  그으… 뭐냐, 신성력만 있으면.


  아니, 알아요! 신성력은 성녀님밖에 없다는 걸!


  근데 만약에, 성녀님께서 이 방법을 시도하신다면 - ?


  아니, 사기꾼 아니라니까요? 이게 다 마법적으로 검증 가능한 내용이에요.


  “그 말, 정말이니?”


  “............... 성녀?”


  끼긱- 세상이 뒤틀린다.


 


  얻지 못한 것을 위해.


  미련을 위해.


  사랑을 위해.


  그대를 위해 시간을 뒤튼다.



  -



  과거로 돌아왔다. 그와 다시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전과 같은 실수 따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적이게도 그의 죽음은 찾아왔다.


  


  다시, 다시, 다시! 


  도박에 중독된 사람처럼, 몇 번이고 시간을 되풀이했다. 


  안 된다. 그 어떤 수를 써도 그를 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운명을 뒤틀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정해진 사실인 것처럼. 강제적으로 그는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몇 번을 시도해봐도, 그가 살아남는 미래 따윈 없었다.


  “.... 회귀했다고?”


  “응.”

  “왜? 회귀를 왜 한 거야?”

  “네가 죽어.”


  그래서 털어놓아 보았다.


  “으음, 무슨 수를 써도 내가 죽는다…..”


  “이거 방법이 없을까.”


  “없어. 무슨 수를 써도 내가 죽는다매. 그럼, 운명인 거지.”


  “.... 받아, 들이라고?”


  “응, 나는 괜찮아. 네가 날 포기하더라도.”


  “.......”


  “나를 잊고 살아가줘. 가문, 다시 세우기로 했잖아?”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다.


  너만 있으면 된다.





  그가 죽는다.



  시간을 되풀이해서 얻는 것이라곤, 그거 하나뿐이었다.


  수천번.


  아니, 어쩌면 수억 번.


  몇 번을 시도해봐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포기해.


  받아들여.


  응, 나는 괜찮으니까 - .


  


  그이의 말들이 내 귓가를 파고든다. 나를 악마처럼 설득하려 든다.


  인정할 수 없다.



  까득 - , 이를 깨물며 걸어간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성녀님?


  아아, 소생이요?


  그건 좀 어려운데…..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조금 말도 안 되는 말이기는 한데, 제국의 모든 생명을 바친다면.


  으으음….


  아하하하, 아무래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죠. 시간을 비트는 거면 몰라도, 소생은 힘들단 말이죠….


  언니가 누굴 살리려는 건지 저는 모르겠지만 포기하는 편이 - .


  “...... 제국의 모든 생명을?”


  언니?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는 법이다.



  



  피가 내린다.


  쌓인 시체 위로, 아름다운 여성이 앉아있다.


  그이의 신체를 끌어안고 속삭인다.


  “[구원이 있으라 - ]”


  그가 눈을 뜬다.


  “..... 얀순아?”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당황한 듯 말을 내뱉는다.


  아아, 사랑스러워라 - .


  너만 있으면 돼.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너 앞에선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꿈도, 무의미해진다. 내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제국의 모든 목숨을 바쳐서라도,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좋아. 그런 목숨들 알 게 뭐야.


  내겐 너뿐이니까.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는다.


  “이제야, 맺어졌네.”


  그이의 입을 맞추며 생긋 웃는다.


  “나의 기사님.”

 









긴 분량에도 끝까지 봐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에 더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