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억... 허억

 

숨을 거칠게 쉬면서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이건 꿈이 분명한데??’라는 생각이 들어도 아래에서 불길한 기운 때문에 멈출 수 가 없다.. 그 기운에 잡히면 현실에서도 죽을 거 같아 난 다시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더 이상 못 올라간다고 생각이 들 때 눈앞에 문 하나가 보였다. 그 문을 본 순간 난 앞뒤 생각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어라...?”

 

내 앞에는 머리가 허리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소녀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날 따라오던 불길한 기운은 사라지고 그 공간엔 소녀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온통 까만 공간에서 난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까만 공간보다 더 새까만 하지만 동시에 빛이 나는 머리카락. 오히려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인 것을 자각할 정도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머리카락에 손을 대보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몇 발자국 안 남았을 때 그녀가 나를 눈치챈 듯 나를 향해 뒤를 돌았다.

 

바다

 

날 쳐다본 것은 바다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다가 담겨있는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동자 속으로 빠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끌림도 잠시, 그녀가 날 향해 미소를 짓자 그 바다는 하나의 심연이 되어 나를 삼키려고 했다. 한번 빠지면 벗어날 수 없는 바다 깊은 곳을 연상시키는 미소. 내가 두려움에 발을 한 발자국 뒤로 물리자 바닥이 꺼지며 잠에서 깨어났다.

 

“...!”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보니

 

‘7시 12

 

학교 갈 준비를 하기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눈을 감았지만 자면서 식은땀을 너무 흘렸던 탓인지 찝찝함과 갈증이 생겨, 난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냉장고를 열어 목을 축이고 화장실에서 가볍게 몸을 씻어낸 난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문손잡이를 잡던 찰나

 

어머 아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일어난 김에 식탁에 반찬 좀 올려놔라.”

아…. .”

 

딱히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엄마를 도와 아침밥을 차렸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서면서 핸드폰을 키고 톡을 보냈다.

 

ㅇㄷ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중!’

그럼 정문에서 기다림

ㅇㅋ!’

 

수아와 톡을 하며 나는 아파트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수아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한반도 빠짐없이 같은 반이었던 친구.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어서 서로 볼꼴 못볼꼴 전부 본 사이다. 어렸을 때는 내가 수아한테 장난을 치다가 수아가 내 X랄을 차버려서 울면서 엄마한테 이른 적도 있다. 이렇게 서로 치고받으면서 자라서 이성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지경에 왔다.

 

얘는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오나...”

 

아파트 정문에서 애꿏은 돌멩이를 발로차며 궁시렁거리던 그때 뒤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왔어!!”

 

뒤를 돌아보니 수아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쏘리! 엘리베이터가 말썽부리지 뭐야~”

에휴... 넌 그냥...”

? 어쩔 건데~ 한 대 치게?”

됐다... 그냥 가자

때리지도 못할 거면서 ㅋㅋ

 

날 조롱하는 미소를 보이는 수아와 함께 등교하다 문득 꿈 생각이나 수아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맞다. 나 오늘 이상한 꿈 꿨다.”

뭔데, 야한 꿈 꿨냐?”

그냥 말을 말자

아 뭔데 빨리 얘기해봐

그게...”

 

내가 꿈 얘기를 시작하자 수아는 내 얘기를 듣다가 소녀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그래서 그 여자애가 나오고 끝이야?”

... 그렇지 그냥 무서운 꿈 꿨다고 생각하려고, 근데 머리카락이 진짜 예쁘긴 하더라

... 그래...?”

어 꿈에서 깼는데도 머리카락은 머릿속에 남아있더라.”

그렇구나... 새까만 머리카락...”

야 너도 머리카락 까만데 왜 그러냐?”

“...설마

야 뭐라고?”

 

수아는 정신이 어딘가에 팔린 것처럼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야 강수아!! 내 말 듣고 있냐?”

?? ... 듣고있지..”

뭐냐 왜 갑자기 멍때려?”

?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그럼 말아라.”

“야. 나 집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런데 너 먼저 갈래?”

그래? 아침부터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암튼 나 먼저 갈게?”

어! 먼저가!

 

난 수아의 반응에 딱히 신경을 쓰지 않고 먼저 학교에 도착했다.

 

야 웬일로 너만 오냐? 수아는?”

몰라 집에 뭐 두고 왔다는데?”

난 또 너네 부부싸움 한 줄 알았지~”

뒤질래? 부부싸움이 아니라 그냥 싸움이야 우리는”

 

나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애들에게 손가락 욕을 날려주며 나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곧이어서 수아도 뒤따라서 들어왔다.

 

오 뭐야 금방 왔네?”

? 다시 생각해보니까 가방에 챙겼더라고 그래서 그냥 왔지~”

 

아까 같은 차가운 느낌은 없어지고 다시 해맑게 미소를 짓는 수아였다.

 

곧 조례를 알리는 종이 치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 모두 조용히 하고~ 오늘 우리 반에 새로 온 전학생이 있다.”

~~”

“외국에서 살다 온 친구니까, 전학 온 친구 무시하지 말고!”

~ 외국~” “그럼 혼혈이겠다~” “! 여자에요? 남자에요?”

자 다들 조용! 정하야 들어와~”

 

교실 앞문이 열리자 뜨거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고요함으로 바뀌었다. 이 고요함은 사람이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를 보았을 때 느끼는 경외심 같은 고요함이었지만 난 달랐다.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흑진주 같은 머리, 바다같이 푸른 눈동자, 내가 오늘 꿈에서 본 그 소녀와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그녀가 반에 들어오고 나서 나랑 눈을 마주치기에는 3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에 눈동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야 뭐하냐?”

 

그런 나를 깨운 건 옆자리에 앉은 수아였다.

 

?”

뭐하냐고

 

분명 방금까지 해맑던 수아에게서 아까보다 더 차가운 느낌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꿈속에서 나를 쫓아오던 불길한 느낌과 같은...

 

난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함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수아에게 대답했다.

 

근데 저 정도 머릿결이 되려면 타고나야 하는 건가?”

... 그치? 왜 저런 머릿결이 취향이야?”

아니 그냥 신기해서 사람 머릿결이 저렇게 좋을 수 있나 생각이 되네

수아랑 시후 조용히 하렴! 전학생이 자기소개하잖니!!”

, !” “!”

 

이크 아무래도 지방방송이 너무 컸나 보다.  나는 수아 탓이라는 듯 수아를 째려보았고 수아는 그런 나를 보고는 메롱을 했다.

 

저걸 진짜 어쩌지

 

안녕? 난 윤정하라고 해, 작년까지 해외에서 살다가 올해 한국에 왔어. 잘 부탁해~”

그럼 정하가 새로웠으니까, 반장인 시후 옆자리에 앉아야 할 거 같은데? 수아야 네가 좀 양보해 줄 수 있니?”

....? 제가요??”

그래 정하가 처음이니까 반장인 시후 옆에서 많이 배워야 할 거 같아~”

... 알겠습니다...씨발

 

방금 욕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수아를 쳐다보았지만, 수아는 애써 미소를 보이며 짐을 챙기고 다른 자리로 옮겨갔다. 다시 정하를 쳐다보니 한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 그럼 정하는 시후 옆자리에 앉고, 시후는 잠깐 교무실로 와라. 조회 끝!”

 

정하가 내 옆자리에 앉자 선생님은 조회를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갔다.

 

안녕? 네가 시후구나?”

어.. 안녕? 반가워. 일단 내가 교무실로 가야하니까 반 친구들이랑 얘기하고 있을래?"

 

마침 반 친구들이 정하에게 다가오고 있어서 나는 반친구들한테 정하에게 학교에 대해서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음놓고 반을 나가려다가 뒤를 돌아봤는데 정하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정하는 나에게 눈웃음을 보였고 나는 애써 그 눈웃음 못본척하며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선생님 아까 교무실로 오라고 하셔서 왔는데요.”

어 그래 잘 왔다. 정하가 부모님이 아직 외국에서 일하고 계셔서 당분간 집에 혼자 있데. 근데 마침 정하네 집이 너랑 같은 아파트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당분간 등․하교할 때 정하랑 같이 다녀야 할 거 같은데 어때?”

 

뭐지 최근에 우리 아파트로 이삿짐 차가 들어온 걸 못 봤는데...’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반으로 돌아가서 정하 잘 챙겨주렴~”

 

교무실에서 나오면서 최근 일주일 동안 이삿짐 차가 들어왔나 생각해보았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이삿짐 차를 본 기억은 없었다. 더 생각하면 머리가 피곤해질 것 같아 생각을 접고 시끌벅적한 교실 문을 열었다. 교실 문을 여니 반 친구들이 정하 옆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야 1교시 시작한 거 아니야? 수학쌤은 어디 가셨어?”

아 수학쌤 일이 있으셔서 오늘 자습이래

야 시후야! 그것보다 정하 타로 볼 줄 알아! 완전 대박! 짱 신기해!!”

 

반 친구들을 비집고 자리로 가보니 정하가 책상 위에 검은 천을 펼치고 타로로 운세를 봐주고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수아가 앉아있었다.

 

뭐야 너 타로도 믿어? 되게 의외다?”

뭐래 그냥 심심해서 보는 거거든!! 그래서 어떻게 된다고?”

... 카드를 보니까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를 쟁취할 수 있다고 나온다. 파이팅해봐!!”

어 정말? 너무 고마워!!”

이제 돌아가지? 선생님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 범생이 납셨다. 재미가 없어~”

 

수아와 친구들을 자리로 돌려보내고 나도 간신히 내 자리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정하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나 본 적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