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yandere/106370546 -2편


"귀여워..."

 

나를 향해 뱉은 수아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뭐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술기운 때문에 비틀거리면서 나는 애써 수아네 아파트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경험이었지만 입술과 손가락에 남아있는 감촉은 너무나 생생했다.

 

혼란스러워하며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거의 내려왔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톡톡' 쳤다. 뒤를 돌아보니 편의점에 다녀온 듯한 정하가 서 있었다

 

", 괜찮아?"

"... 괜찮아."

"너 혹시 술 먹었어? 술 냄새나는데."

"..."

 

정하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문이 열립니다.'

 

나 대신 엘리베이터가 대답하며 문이 열렸다.

 

"미안, 너 먼저 올라갈래..?"

"... 잠깐..!"

 

나는 도망쳤다. 지금 상황에서 정하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전부 얘기할 것 같아 무작정 달려 나왔다.

 

달리고 있으니 밤공기가 나에게 정신을 차리라며 뺨을 때린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한 대씩. 그렇게 얼마나 맞았을까. 발걸음을 멈춰보니 난 전에 살던 아파트 놀이터에 와있었다.

 

'왜 하필 여기지..'

 

무의식적으로 이곳에 발을 옮긴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난 그네에 앉았다. 그네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날씨가 흐려서 별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내 마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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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부정적인 걸 생각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코끼리를 생각하지마!"라고 하면 '코끼리'부터 생각나는 게 사람이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을 상자에다 가둬놓고 테이프로 꽁꽁 싸매도 틈 사이로 나와 끊임없이 날 괴롭힌다.

 

이 기억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이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던 나는 술래를 하면서 친구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친구들이 몇 명 안 남았을 때, 나는 저 멀리 화단 앞에 앉아있는 한 아이를 보았다. 숨바꼭질을 좋아했던 나는 '기록 경신'이라는 생각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를 뒤에서 확 잡아당겼다.

 

"!"

 

누가 들어도 여자아이의 목소리, 싱글벙글하던 내 미소는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

 

내가 흥분해서 힘 조절을 못 한 것일까. 아니면 여자아이라 쉽게 넘어간 걸까. 내가 당긴 그것보다 크게 넘어간 아이는 화단 뒤에 있던 보도블록 연석에 머리를 부딪혔다.

 

한마디를 내뱉고 쓰러진 소녀의 머리 위로 검붉은색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너무 어려서 ''라는 개념을 몰랐던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막으려고 했다.

 

주위에 지나가던 경비아저씨가 그런 나를 보고는 구급차를 부르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소녀의 머리를 지혈한 덕분에 소녀의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엄마는 소녀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외국으로 떠났다는 말만 들었고 이후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이 사건을 겪고 나는 이전보다 더욱 사람들을 피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딱히 주목받고 싶지도 않았고 나랑 있으면 누군가가 피해를 본다는 생각에 다른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굳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 옆자리였던 수아한테 물감이랑 붓을 빌려준 정도? 그때는 말 걸 용기가 없어서 그냥 자리에 놓고 내가 대신 혼났다. 딱히 혼나는 거에는 두려움이 없었으니까

 

그 무렵부터 수아가 나한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내가 한 발짝 물러나면 수아가 한 발짝 더 가까워지긴 했지만 난 수아 쪽으로 다가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 거리만 유지하고 있었다.

 

중학교에 와서는 몇몇 여자애들이 나한테 말을 걸어왔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다들 곧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보니 지금 내 인생에 접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는 수아랑 그 꼬마뿐이네..."

 

과거 회상에 잡혀있다 보니 문득 그 아이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윤기 나는 검은 단발머리 그리고 구급차에서 날 바라보다 파란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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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파란 눈동자? 설마...’

 

나는 그네를 멈추고 혼잣말로 말했다.

 

치료를 받고 바로 해외로 나갔다 했지. 정하도 초등학교 전까지는 한국에서 살았다고 했고... 그리고 파란 눈동자...!”

 

간신히 가라 앉힌 내 마음을 이 사실이 나에 마음속에 다시 태풍을 일으켰다. 설마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 나 본 적 없어?”

 

그때 정하가 나한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설마 일부로 날 찾으러 온 건가? 왜 하필 지금?”

 

그 어떤 추리도 답이 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았다. 정하가 복수하기 위해 지금 찾아온 것이라면, 나를 위한 최고의 복수는 무엇일까

 

납치? 감금? 아니면 살해?

 

아니야,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사람을 죽일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린다.

 

저벅저벅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라는 생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파자마에 가디건만 걸친 정하가 서 있었다.

 

"어떻게...?"

 

당황한 나를 향해 정하가 걸어온다.

 

저벅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날 따라온 건가?'

 

저벅

 

'아니야 옷을 갈아입고 온 거니까. 집에 들렀다가 온 거야.'

 

저벅

 

'그렇다고 해도 정하가 어떻게 여길?'

 

저벅

 

'설마 정하가?'라고 생각의 흐름이 끝맺을 때쯤 정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렇지??"

 

한 문장이지만 많은 뜻이 담겨있는 말이 날 향해 날라왔다.

 

".. 그치..."

"해외로 나가서도 여기는 잊혀지지 않더라."

 

날 떠보는 건지 정하가 말했다. 내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때자 정하가 말을 이었다.

 

"어린 나이에 머리도 다쳐보고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고 생각해."

 

다시 정적

 

"근데 그거 알아? 너 그때도 지금 표정이랑 똑같았어 ㅎㅎ"

 

나를 놀리는 건가 싶어 정하를 쳐다보고 있으니 정하도 나를 쳐다보았다.

 

"있지 시후야. 우리 부모님은 네가 일부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 실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어. 너 그렇게 죄책감 가지지 마."

 

정하가 미소를 지으며 날 쳐다봤다.

 

희망

 

내가 그 미소에서 본 것은 희망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짊어지고 가던 죄책감이란 돌덩이를 내려놓게 할 수 있는 희망.

 

정하의 바다같이 파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는 그 바다에 편안히 둥둥 떠다니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그런 나의 행복한 상상을 가로막듯 정하가 말을 이었다.

 

"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정하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정하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무슨.. 보상?"

"날 바라봐줘"

".. 너무 가까운데.."

 

정하가 쪼그려 앉더니 내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내가 애써 눈을 피하려고 하자 정하가 말했다.

 

"고작 이것도 못 해줘?"

 

내 죄책감을 찌르는 한마디. '고작'

 

나는 어쩔 수 없이 정하의 눈을 계속 쳐다보았다.

 

"옳지 착하다."

 

정하의 눈빛은 한 마리의 강아지를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난 고작 눈만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목에 목줄이 채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10초가량 지났을까.

 

"됐어"

 

내 턱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고 정하도 일어났다. 하지만 왜일까. 계속 정하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뭐해? 집에 가야지"

"? ..."

 

나도 그네에서 일어나며 정하와 함께 길을 걸었다.

 

"... 저기..."

 

아까 수아와 있던 일을 얘기하기 위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수아가 나한테 좋아한다고 고했는데.."

"그래서 받아줬어?"

"?"

"받아줬냐고"

"아니 아직..."

"받지 마."

"?"

"귀먹었어? 받지 말라고!"

 

정하가 짜증이 섞인 듯한 말투로 내게 쏘아붙였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애완동물을 빼앗기기 싫은 듯한 느낌.

 

"알았어."

 

일단 대답은 얼떨결에 했지만 나는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게 말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에 도착했다. 버튼을 누르고 몇 번째인지 모를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난 옆에 있는 정하의 눈치를 보았다.

 

"왜 할 말 있어?

 

그런 나를 눈치챈 듯 정하가 물었다.

 

"아니야.."

"에휴... 너 왜 이렇게 변했어?"

"?"

"학교에서는 인싸처럼 행동하더니 왜 나랑 있으니까 찐따가 되는 건데??"

"너한테는 미안한게 남아있으ㄴ..."

"그거는 이미 다 끝난 거라 얘기했을 텐데?"

 

정하가 딱 잘라서 얘기했다.

 

"그거는 이미 지난 일이고 난 바라는 게 딱 하나야. 네가 날 바라봐주는 것, 그거 하나면 충분해."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하는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어색한 침묵

 

침묵 속에서 우리는 각자 층수를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맞다. 너 번호 좀 줘."

 

대뜸 정하가 말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정하를 쳐다보았다.

 

"학교갈때 연락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정하가 귀찮음과 짜증 섞인 말투로 말하며 자기 핸드폰을 건넸다. 정하의 핸드폰을 받아든 나는 내 전화번호를 입력해주고 다시 건넸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난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서 빠져나왔다.

 

"잘 가~"

 

뒤를 돌아보니 정하가 귀엽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띠리링!

 

문이 열리고 난 내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아직 안 들어오신 건가.'

 

방에 들어오면서 엄마 신발을 보지 못한 나는 피곤함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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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 띠띡... ... 띠리링!

 

현관문이 열리며 수아가 들어온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연 후 현관문에 놓여있는 시후의 신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에 있구나..."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은 수아는 까치발을 들고 시후의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수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잠이 든 시후였다

 

현관문에서부터 입가에 맴돌던 미소는 시후를 보자 더욱 크고 기괴하 번져나갔다. 만약 제3자가 바라본다면 그 미소엔 광기가 서려 있다고 말할 것이었다.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간 수아는 엎드려 자는 시후에게 다가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쓰ㅡㅡㅡㅡ으ㅡㅡㅡㅡㅂ"

 

"하아~"

 

피 냄새를 맡은 뱀파이어마냥 시후를 바라보는 수아의 눈에는 꿀이 떨어지고 있었다.

 

"~ 빨리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수아가 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번에는 귀 뒤쪽의 냄새를 맡았다.

 

"쓰ㅡㅡㅡㅡㅡㅡㅡㅡㅡ으ㅡㅡㅡㅡㅡㅡㅡㅡㅂ"

 

아까보다 더 깊게 더 오래 힘껏 들이마신 수아의 손은 어느 순간 자기의 하복부로 향하고 있었다.

 

~♡ 더 이상 못 참을 거 같아... 조금만 더...”

 

시후가 입고 있는 옷에다 코를 가져다 댄 수아가 마지막으로 숨을 깊게 들이켰다.

 

쓰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으....?”

 

옷에 코를 파묻은 수아를 자극한 것은 미약한 알코올 냄새, 시후의 체취 그리고 처음 맡아보는 달콤한 냄새였다. 생에 처음 이런 냄새를 맡아본 수아는 냄새를 더 잘 맡기 위해 코를 살짝 때고 냄새를 맡았다.

 

킁 킁, 이건 시후 냄새가 아닌데...”

 

마약을 찾아낸 마약 탐지견처럼 수아는 시후의 몸 구석구석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건 다른 여자 냄새 같은데... 누구지..”

 

혼자서 골똘히 생각해보는 수아였지만 시후 외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냄새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으음..”

 

시후가 불편해하자 뒤척이자 수아는 흠칫 놀라며 시후를 바라보았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얼른 비켜줄 게~ 잘 자고♡ 내 꿈꿔~”

 

수아는 시후의 볼에다 입을 맞추고 방을 나가기 위해 일어났다. 방을 나가기 직전 수아는 

시후의 방을 시후를 보고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한번 보고 집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