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어느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엄청 발달한다고 하잖아. 시각 장애인이 청각이 발달한다든지, 그런거. 나는 시각 장애인이 후각이 발달한 걸 소재로 써보고 싶음.


얀붕이는 시각 장애인이지만, 냄새를 잘 맡음. 사람한테서 나는 냄새로 사람을 구분하고, 땀냄새에 찌든 철 냄새가 나면 옆집 김씨가 일 나갔다 돌아 왔구나, 하고 시간 가늠하고 또 강아지 냄새가 나면 근처에 개가 있구나, 하고 피해가기도 하고 그러는거지.


그걸 살려서 얀붕이는 조향사 직업을 하는 연인의 시험용 제품을 테스트 해주기도 하고, 또 오늘 나갔었는데 이런 냄새가 났더라, 이게 좋았다 하는 말도 해주곤 해. 연인은 그 말을 듣고 가끔 그가 좋다고 했던 꽃을 기본 시료로 사용하거나 하지. 그들은 동거 중이야. 부모님도 그녀를 좋게 보고 있거든.


연인한테서는 은은하게 달콤한 향이나. 무슨 꽃인지 모르는 얀붕이는 그녀의 향기를 '얀순이의 향기'라고 기억하지. 그녀가 가끔 웃으면서 향기 나는 손을 내밀고, 얀붕이가 그 손을 잡으며 그녀가 앞에 있음을 실감할 때 얀붕이는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 깨닫게 돼.


그러던 중에 얀붕이는 우연찮게 그녀가 씼으러 간 동안 그녀의 전화에서 오던 전화를 받게 돼. 벨소리를 그녀의 도움을 받아 같은 소리로 맞춰뒀었던 얀붕이로써는 어쩔 수 없었지. 더듬거리면서 전화 수신 버튼을 찾던 얀붕이는 겨우 전화를 받자마자 충격적인 말을 듣게 돼.


그 전화는 그녀가 다니던 회사의 다른 직원이 걸었던 전화였어. 알고보니 그녀는 시각장애인인 얀붕이를 보조한다는 핑계로 회사를 나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던거야. 꽤 오랫동안 말이야. 지금껏 그녀가 얀붕이와 회사 스트레스, 신제품에 쓸 아이디어 같은 이야기를 했던건 다 지어냈던 거야. 회사를 나간다고 집을 나섰던 그녀는 사실 어디선가 시간을 떼우고 있었던 거겠지.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온갖 무서운 상상을 하던 그는 우선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그녀가 나왔을 때 그는 그녀의 몸에서 항상 나던 그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아. 씼었기 때문이겠지. 그녀의 몸에선 느끼한 비누의 냄새만 날 뿐이었어. 하지만 얀붕이는 그 향기가 자신이 알던 그녀의 마지막 향기라는걸 깨달아. 그래서 다음날, 그녀가 출근한다고 하자마자 집을 나가려 해. 그녀에겐 나중에 모든것을 밝힐 예정이었지.


다음날,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그는 있던 방에서 뛰쳐나가. 하지만 그는 그 순간 절망해.

그 넓은 집의 사방에서 그녀의 향기가 났던거야. 그가 사랑했던 그 향기가. 멘탈이 붕괴한 얀붕이는 더듬거리면서 현관을 찾는데,  그 순간 뒤에서 그녀가  끌어안겠지. 출근 하는 척, 항상 집에 숨어서 그를 지켜봤던 그녀가 말이야.


이제 그는 그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살아가. 혹여나 그는 그녀가 올까 두려워서 홀로 방에서 냄새를 맡지. 그녀의 향기가 나더라도, 그건 그녀일까? 어쩌면 그녀를 그리워하는 자신의 착각일지도 하면서 두려워해. 얀순이는 그런 그를 약해질대로 약해질때까지 괴롭히다가, 마지막 순간에 취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