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눈을 뜨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색빛의 칙칙한 공간이다.

또렷해지는 정신속에서 슬쩍 고개를 돌리자, 환기조차 제대로 될까 의심스러운 작은 창문에서, 아침을 알리는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하."


답답함을 토해내듯, 한숨을 쉬어본다.

아침의 상쾌함을 느껴본적이 언제였던가.

그다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내던진 휴대폰의 시간을 쳐다보니, 알람조차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

듣는것만으로도 기분이 확 나빠질 알람을 미리 꺼두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딸칵.


스위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의 불이 켜진다.

내 앞의 목선까지만 겨우 보이는 수준의 작은 거울에는, 왠 거지 하나가 한심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엉망이네.

그리 중얼거리며, 옷을 벗었다.

푸촥 촤착 차차차차착...

기침을 하듯, 제멋대로 쿨럭이는 샤워기를 머리에 쳐박으니 정신이 번쩍 달아날 정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으허! 으허허! 으흐흐!"


물이 몸을 두들길때마다, 절로 이상한 괴음이 입으로 터져나온다.

그야 말로 이가 떨릴정도의 냉수.

보일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사는 곳이 여건이 좋지 않아도, 온수는 잘만 나왔다.

하지만, 잠에 취한 몸을 깨우는데는 뭐니해도 냉수마찰이 가장 효과가 좋은 편이다.


"후."


샤워가 끝나고 면도까지 마친 뒤,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낸다.

거지꼴은 겨우 벗어난 남자를 거울을 통해 들여다 본 뒤, 잘 개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간만의 여유있는 아침.

부족한 잠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해, 늘상처럼 거르던 아침식사를 오랜만에 먹을 생각이었다.


벌컥.


무의식적으로 냉장고를 열어, 식재들을 살핀다.

하지만, 처참하기만 한 냉장고의 상태에, 유감스럽게 다시 닫고 말았다.

평소에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없는데, 냉장고에 뭐가 있는게 더 신기하겠지.


편의점이라도 가야 되나.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다.


"에?"


문득, 벙찐 소리가 튀어나온다.

시선이 멈춘 곳.

내 눈은 어째서인지 모르게 꽉 차있는 식탁에 멈추어 있었다.


"뭐야, 이거."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가득한 음식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지, 김이 모락거리는 음식들을 보며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누가 해놓고 간거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들어온거지?

혼자 사는 집에, 누가 음식을 해놓고 갔다.

충분히 말이 안되는 상황이다.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들었다.

무단 침입의 가능성.

현대판 우렁각시도 아니고, 현대인으로서 이런 광경을 보는 것은, 경찰을 부르기에 충분히 합당할만한 상황이다.

근데 경찰한테 뭐라고 말하지?


그렇게 아침 댓바람부터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한 나 자신에 대한 묘한 기구함을 탓할 즈음.


"아, 일어났어?"


분명 잠구어놓았던 문이 벌컥 열리며,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미인이 들어왔다.

루비처럼 빨갛고 맑은 눈.

갈색과 백색을 섞어놓은 듯한 신비한 머리칼.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움찔 할만큼 완벽한 몸매.

모두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그야말로 절정중의 초절정 미인이었다.


"음? 아빠? 아빠 왜 그래?"


너무 경악스러운 외모에 숨조차 쉬지 못할만큼 굳어있는 내 모습을 보며, 여자가 이상하다는 듯이 다가온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여자.

그제서야, 어제 산에서 있던 모든 일들이 총알처럼 스쳐지나간다.

전생의 기억. 셋카. 만남. 붉은 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 어. 아니야 셋카."


"어디 아픈건 아니지? 아프면 언제든지 말해야 돼?"


유독 내 건강에 민감했었던, 셋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 이마에 댄다.

우와앗.

어렸던 시절보다는 부쩍 키가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보다는 머리 하나 정도 작은 셋카가 가슴에 몸을 기대자,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버렸다.

상대는 셋카다.

상대는 셋카야!

정신차려라.

그렇게, 되뇌는 사이. 셋카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순진하게 손을 떼었다.


"약간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아니다! 절대 아니다! 멀쩡하고 말고, 음음, 당연하지."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몰렸다고는 절대 말 못한다.

당황해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부어버리고는, 황급히 식탁에 앉았다.

자연스러운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저 귀엽게만 여겼던, 셋카의 갑작스러운 성장에 제멋대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속으로 매질했다.

명색이 아빠가 되서 말이야...

부덕하고 못난 아빠야...나는.

그렇게 새카맣다 못해 시꺼멓게 변해가는 내 속도 모른채, 셋카는 새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식탁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아빠, 어때? 제법 잘 했지?"


"응, 정말 맛있어 보이네. 셋카 요리 정말 많이 늘었구나!"


솔직한 감탄이었다.

전생의 시절, 요리의 요자도 모르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 내 눈 앞에 놓인 요리들은 한 눈에 봐도 수준급의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다.


"히힝, 아빠 생각해서 만들었어."


"허허, 좀 쑥쓰럽네."


순수한 미소에 화답하며, 젓가락을 들어 맛을 보았다.

맛있다.

음식이 혀에 닿자마자 들은 생각이었다.


그 이후에는, 뭐랄까 조금 허겁지겁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걸신이라도 들린걸까.

셋카가 보고 있음에도, 체면따위도 없이 음식을 입에 쑤셔넣고 있는 한심한 나 자신이 있었다.

그 모습마저도, 셋카는 만면에 미소를 띤채 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빠, 맛있어?"


"움, 움! 진짜 맛있어. 장사 해도 되겠는 걸?"


"그래? 히힝, 엄마 말대로 열심히 배워놓길 잘했네."


엄마?

아, 어제 말하던 그 서왕모 신선님 말하는 건가.

문득, 어제의 해후가 떠오른다.

내가 없던 그 긴 시간동안, 옆에서 셋카를 이끌어준 양어머니.

나로서는 정말, 몇번이고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정도로 셋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던 분이었다.

언젠가는 꼭 인사드려야지.

감사하다고.


"엄마가 말하길, 남자가 제일 좋아하는 아내상이 밥을 잘 하는 여자랬거든."


"움?! 웁, 푸헙!"


순간 사레가 들려, 밥을 뿜어내버렸다.

셋카에게 튈라,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대참사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충격적인 발언을 들은 머리는 이미 대참사였다.

방금 뭐라고?


"그래서, 어때? 이정도면 합격이지? 아빠 그렇지? 완전 일등 신붓감이지?"


"그, 그렇네...이정도면 차고 넘칠 정도인걸...?"


갑자기 고장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고개를 억지로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이 찾아오는 서운함.

그러면 안되는 것을 알면서도, 묘하게 섭섭해지는 것은 아마 만국 공통 아버지들의 마음일 것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걸까.

아니지...그리 긴 시간이 지났는데, 생기지 않았을리가 없지.


하지만, 어제 겨우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나로서는, 갑자기 셋카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며 찾아올 생각을 하는것만으로도, 문득 기분이 울적해졌다.

눈 앞의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너무나도 맛있는 요리들.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기에, 이렇게 피나는 노력을 한 걸까.


"역시 그렇지? 다행이다! 고마워 아빠!"


섭섭한 내 속도 모르고, 셋카가 콩콩거리며 웃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망상.

거대한 식장의 문이 열리고, 보이는 기다란 복도.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를 입은채, 내 손을 잡은채 살짝 떨고있는 셋카.

신부 입장이라는 사회자의 말과 함께, 그 복도를 걸으면 보이는 감히 내 사랑스러운 딸을 채간 남자.


'키워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우리 잘 살게요.'


라고 말하며, 이윽고 꽉 쥔 손을 놓는 셋카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뒷골이 서늘할 정도로 아프다.

안된다! 이놈들아! 이 결혼은 반대다 반대!

라고 망상속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나를 마지막으로 망상이 끝나자 셋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있다.


"아빠, 진짜 아픈거 아니야? 갑자기 얼굴이 새파란데?"


"...마음이 아파서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는, 저도 모르게 앞섶에 넣어둔 담배갑으로 손이 간다.

아, 나도 모르게.

셋카가 있는 앞에서 피우는 건, 조금 그렇지.


"마음이 아파? 아빠 정말 아픈거야?"


타다닥!


그러는 사이, 셋카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내 앞으로 다가온다.

확 다가오는, 체향.

마치 봄의 꽃밭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산뜻한 향이 코를 간질인다.


"아프지마, 아빠. 이렇게 겨우 만났는데, 또 아파버리면 나 진짜..."


말을 채 잇지도 못하며, 살짝 울먹거리는 모습.

이내 앉아있는 나를 와락 껴안은 채, 놓지 않겠다는 듯이 꾸욱 힘을 주는 셋카의 등을 저도 모르게 쓸어내렸다.

이런 점만은 그때의 셋카와 똑같구나.

조금은 성숙해졌어도, 여전히 이별은 익숙하지 않은, 셋카는 그 만큼 정이 많은 아이였다.


"안 아파. 아빠가 그냥 이상한 생각해서 그래."


"이상한 생각?"


"응, 그냥...."


아까까지 떠올랐던 망상을 그대로 내뱉기에는 무리가 좀 있지.

궁금해하는 얼굴로부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리지, 절대 무리지.

낯부끄러워서 절대 말 못한다.


"에에, 나도 좀 알려줘!"


"어, 시간이 벌써? 어서 출근해야겠다!"


"이이잉! 말해줘!"


황급한 척, 자리에서 일어나는 내 앞으로 셋카가 바동거린다.

어린시절 셋카도 귀여웠지만, 다 큰 어른의 생떼도 셋카가 하면 파괴력이 제법 엄청나다는 것을 느꼈다.

허나, 이제 진짜 머뭇거렸다간 지각이다.


"말! 해! 줘!"


구두를 신고 있는 내 앞으로, 셋카가 팔을 활짝 벌린 채 나를 막고 있다.

와, 안 본 사이에 제법...

고집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셋카의 볼이 햄스터마냥 빵빵하다.

절대 보내주지 않겠다는 의지.

백기는 결국 전생에도 이번에도 내가 들어야만 하는가 보다.

어릴때보다 곱절은 늘은 고집에, 한숨을 푹 쉬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


"그냥, 셋카가 결혼하면 좀 쓸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었지."


"에...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을까.

벙찐 소리를 내뱉던 셋카가, 이내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왜에?"


"그냥...아침밥도 그렇고, 셋카가 얼마나 좋아하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을까...좀 부럽기도 하고..."


횡설수설.

괜히 낯부끄러워 요점도 없이 늘어놓기만 하는, 내 말을 듣고있는 셋카의 뺨이 언뜻 붉어보였다.


"아빠."


"응?"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끄러워 돌렸던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셋카가 엄청 가까이 있었다.

이내 입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입술에 감도는 은은하고 달콤한 향에, 나도 모르게 숨을 헛 들이켰다.


"나는, 아빠를 사랑해."


부끄러운듯, 하지만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순간 홀린 것 같은 느낌이다.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셋카는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아빠'라고는 안 부를래."



붉은 실의 매듭이 한차례 더 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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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막.

이제 진짜, 보내줄 때가 됬다.

그 후로 대충 얘 여섯 낳고 잘 먹고 잘 살았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