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죄와 죄


왕의 일행은 그 날 낮에 사냥을 나갔다. 왕후 귀족들의 사냥은 취미와 실익을 겸하고 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전투를 위해 무의 기량을 높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냥감을 얼마나 잡았는지 겨룰 수 있고, 또한 단순하게 푸른 하늘 아래에서 말을 모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마련이다.


엘리어스는 사냥을 무척 좋아했다. 형제 중에 가장 실력이 좋았다는 것도 있었다. 기분 전환도 되고, 공훈도 세울 수 있다. 이처럼 걱정 없이 지루할 틈도 없는 공식 행사는 드물었다.



신호음이 울려 퍼지고 각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리어스는 애마의 몸을 애무하며 가볍게 달리기 시작한다. 집요하게 추적한 결과, 최종적으로는 멋진 사슴에게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위의 칭찬을 받으며 돌아온 그의 눈에 비친 것은 기가 막힐 정도로 무관심한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비만 체형의 왕은 원래부터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나태하게 쉬는 편이 좋은 것 같았다. 처음부터 쫒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고, 마음에 드는 애인, 그리고 제 3, 제 4 왕자, 심지어는 왕녀를 시중들게 만들고는 우아하게 담소하여 뒹굴거리고 있었다.


한편, 운동 신경이 나쁜 제 2 왕자는 마지못해 사냥에 참가는 했지만, 일찌감치 낙마한 것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훌쩍훌쩍 울고 있는 꼬라지는 아무래도 스무살이 넘은 남자가 할 짓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엘리어스가 활을 움켜쥐고 있을 때, 왕은 비로소 시선을 돌려 왕자의 업적을 눈치챘다.



「대의(大義)*였다.」



제 5 왕자가 그러는 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당연한 일에 귀찮지만 대답해 주었을 뿐. 아버지의 태도는 노골적이라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처음엔 실수해서、두 번째로 어떻게든 처리했습니다.」



「그렇구나.」



「오랜만의 사냥이라 그런지、실력이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처리했잖느냐? 무어가 문제냐.」




아버지의 멍한 둥근 얼굴에 침이라도 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엘리어스는 참았다. 참아서 훌륭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으니까.



「엘리어스는 정말 손이 덜 가는 아이여서 다행이에요. 뭐든 잘도 해주고.」



역시 언짢은 것을 느꼈을까. 왕비도 오냐오냐하며 둘째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엘리어스는 휙 발길을 돌린다.



「어디 가는 게냐. 이제부터 네가 잡은 사슴을 모두에게 돌려야지.」



경박한 말투에 그는 고개를 돌린 채 대답했다.



「오랜만에 사냥이라 그런지、조금……식히고 오겠습니다.」



다쳤습니까, 그렇다면 치료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에 올라타 시중들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전히 혼자가 됐을 때, 혼자가 됐음을 인식하면서도 그는 아직 소리칠 수도 없었다. 밖에서 방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숲 속 어디선가 누군가 그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엘리어스는 웃었다. 목이 쉬도록 큰 소리로 웃었다. 웃고 또 웃다가 말을 멈추고 내려 난폭하게 강에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자가, 그것도 왕자가 남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니. 하물며 슬픔도, 기쁨도 아닌 굴욕으로 인해 흐른 눈물을 말이다.


강물은 기대했던 대로 그의 패배의 흔적을 씻어줬다. 하지만 가슴에 뚫린 상처까지는 치유되지 않았고 곪은 것처럼 지끈지끈 쓰라렸다.




돌아온 엘리어스에게 해체될 사슴을 앞에 두고 자신이 잘 하고 있는지 애매했다. 엘리어스가 이쪽을 봐주면서 이야기를 해줬으면 하는 상대는 모조리 다른 인간을 상대했고, 엘리어스가 아무래도 좋다 생각하는 상대만이 기회를 놓칠세라 다가와서는 옮기려고 했다.


그건 누구였을까. 함께 사슴을 쫒던 남자 한 명이 다른 몇 명과 마찬가지로 앞에 와서 똑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엘리어스의 굳어진 표정을 눈치챘는지 어딘가 애처로운 듯이 얼굴을 찡그린다. 저쪽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즐거워하는 면면들――, 그리고 이쪽의, 칭찬을 받으면서도 어딘가 공허한 공기가 감도는 자리에 힐끗 눈을 돌린다.


그 역시 말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얇게 벌린 입술에서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것일까. 다른 누구에게 들리지 않더라도 가장 들려서는 안 될 본인에게는 분명하게 전달되고 말았다.



「불쌍하게도.」



남자는 분명하게 그렇게 말했다. 가엾고 멍청한 제 5 왕자에게 소박한 본심을 털어놓았다.


엘리어스는 그 순간 자신이 마침내 감정을 약간이나마 토로해버렸던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무슨 뜻이냐고 웃으면서 시치미 떼기 직전, 왕자의 눈동자는 분노로 불타올랐을 것이다. 남자는 멋쩍은 듯 눈길을 돌리고, 해산의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어디론가 허둥지둥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엘리어스의 몸은 서서히 뜨거워지며, 끓어오를 듯 폭발하고 있었다.



왜 용서받는 걸까.


저게 왕이고, 저게 왕자에다가, 저게 왕비라니. 그리고 이것들이 신하라니. 정말 저게 가족에다가 피가 연결됐단 말인가.


왜 나 자신은 이렇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이렇게 필사적으로 무예를 쌓아서. 그리고 이렇게까지 바보 취급을 당해도 뭐라 할 수도 없다. 열 다섯씩이나 나이를 먹고도 이 꼴은 무어냔 말이다!



핏발이 선 엘리어스의 눈은, 술통을――어른들의 소양이며, 남자를 강하게 하며, 또한 마음을 위로해 줄, 금기의 액체가 자연스럽게 품에 들어왔다.






「키티、키티、어딨나! 주인님이 돌아왔다고――빨리 나와、죽고 싶은 거냐!」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난폭하게 커다란 소리로 순종적인 하인을 불렀다. 심야인데도 오늘도 잠들지 않고 기다린걸까. 곧바로 그녀는 달려왔다. 키티는 평소와 확연하게 모습이 다른 주인에게 귀를 쫑긋거렸다. 아마 가볍게 풍기는 술 냄새에 놀란 것이겠지. 


엘리어스는 그녀의 목걸이를 잡아 채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넌 내 말이면 뭐든지 듣잖아. 너만은 내 뜻대로 행동해줄 수 있잖아――? 그렇지、그렇다고 말해!」



고함치자 소녀는 눈을 부릅뜨지만 이내 얼굴을 느슨하게 만들며 긍정의 의지를 전해 온다. 이런 때조차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엘리어스는 점점 더 머리에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왕자는 천박하게 웃으며 소녀의 목줄을 잡은 채 끌고 방 안쪽으로 향한다.



「좋아、키티. 난(ぼく) 이제 어린애가 아니야. 어른이라고. 어른 남성이란 말이다. 사슴도 죽였지. 외국어도 3개 국어도 가능해. 책도 과제도 전부 읽었지、구석구석 암기해줬다고.」



침대 위에 내던져진 소녀는 역시 괴로웠는지 기침을 하고 있었다. 엘리어스는 개의치 않고 올라탔다.



「난 이렇게나 대단한 남자다、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마땅하겠지、그렇잖아!」



찌지직,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마치 여자의 비명 같았다. 키티는 귀를 떨며 꼬리를 세웠지만 싫어하고 있는 얼굴이 아니라, 변함없이 무저항했다. 얌전히 당하는 대로, 흥미진진한 모습으로, 벗겨지는 자신과 드러난 엘리어스의 상반신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소년은 거추장스러운 것을 걷어내자 한 번, 어리석은 소녀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띄웠다.



「위로해줘、키티. 너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키티가 엘리어스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수인을 그렇게 대하는 것도 인간 사회에서는 허용되는 일이다. 그들은 아인. 인간이며 결코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비록 자신의 노예라 할지라도, 엘리어스는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것,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 버린 것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고조된 격정이 사라져 버리자 후에 남은 것은 후회와 거기서부터――.




엘리어스가 한 짓은 폭행이었을 것이다. 신뢰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을 것이다.


어떠한 짐승이라도 상처받으면 생리적으로 혐오하게 된다. 폭력이란 원시적인 힘이요, 그렇기에 언제나 죄가 된다.



하지만 키티는――이 맹목적으로 충실한 소녀는 겁탈당하고 있는 그 순간조차, 한 번도 엘리어스를 거절하지 않았다. 엘리어스가 하는 짓을 싫어하지 않았다.


목걸이가 죄였을 때처럼, 고통스러우면 반사적으로 그러한 표정은 짓는다. 그래도 직후엔 금세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다는 듯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로 엘리어스를 바라본다. 마치 엘리어스가 한 짓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리에 꼬리가 감기는 순간, 소년 엘리어스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소녀는 괴이하게 눈동자를 빛내며 요염하고 만족스러운 듯 웃고 있었다. 입가를 핥는 붉은 혀의 늘씬한 동선이 눈꺼풀 깊숙이 파고들어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 엘리어스는 걷잡을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리고 그날 밤, 동시에 막연하게 이해했다.



그가 길들이고 있었을 터인 소녀에 대한 의심.


3년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지만, 항상 눌러 죽여 온 것.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소녀는 평소와 전혀 달라진 게 없다는 듯 엘리어스에게 응석을 부려왔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목을 울리면서 머리를 비벼대는 것을 보고, 진심으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고――이별을 결심했다.


그는 두려웠다. 소녀가. 소녀를 대하다 보면 벗겨져 버리는 자신의 껍질이. 그리고 언젠가 드러날 자신의 속을 바라보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는, 자신은 이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인이라고, 그는 지금까지 너무 의존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등으로 해두고 엘리어스는 소녀를 자신에게서 떼어냈다.


그리하여 나쁜 꿈은 전부 기억 속에 파묻고, 잊어 버리기로 했다.


실제로 엘리어스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다. 이 소녀를 곁에 두면 자신은 파멸한다. 아마도 그의 위기감은 옳았다.


다만 이해했다고 해서 역시 소년 엘리어스가 어쩔 수 없는 바보인 건 확실했으며, 깨달았을 때에는 모든 것이 늦었던 것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당신은 옛날에、저를 버렸지요. 필요 없다는 이유로. 깨끗하게. 아무런 미련도 없이.」



과거를 회상하는 꿈의 끝, 희미하게 부상해 가는 의식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상냥하게 말을 건네고 있다. 그는 그 목소리가 들어보지 못했을 텐데도 묘하게 그리운 듯한 이상한 감각에 빠졌다.



「하지만 주군. 저는 기억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지 않았나요? 그걸 없었던 일로 하자니, 너무 잔인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엘리어스는 신음하며 각성했다.


차르륵, 하고 순간적으로 움직인 순간, 손 근처에서 무언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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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大義) :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엘리어스 편 11편 / 키티 편 6편으로 구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