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방







아무리 쓰러뜨려도,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얼마 없을 거라 했을텐데!

분명 금방 끝날거라 했을텐데!


이런 고생 할 줄 알았다면 좀 더 많은 병력과 보급을 챙겼어야 했는데!


저들은 나와 다르게 철저하게 준비했던 걸까.


이젠 아예 내가 숨어있는 폐 건물으로 포탄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점점 커지는 그들의 함성 소리까지.


아아. 이럴 줄 알았다면 마지막 총알은 남겨두는 거 였는데.




저들에게 붙잡혀서 구차하게 살 바에

자살하는 게 훨씬 나으니까.




*****




"저 사람, 몰골 좀 봐."

"어우... 흉측해라."

"나 같았으면 자살했어."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말이란 화살을 쏘아되지만.


이젠 익숙하다.


그것 조차도 내 일상이 되어버렸으니까.


"....그 전에 일은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내 오랜 벗이면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타 지휘부의 지휘관 레베리온은


너무나 신경 쓰이는 건지 손바닥보다 작은 내 잔에 술을 따르며 한 번 더 사과를 했다.


정말로 신경 안 쓰는데도 불구하고.


"죽은 사람도 죽은 인형도 없잖아. 신경 쓰지 마."



"....그래, 사망자는 없지.

하지만 다친 사람은 있잖아.

그것도 내 실수 때문에."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술이 너무나 쓰게 느껴진다.


있었던 것이 없어진 그런 상실감 때문에 그런 걸까나?

아니면 말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사실 속으론 내 친구를 원망해서 그런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


"그건 너 때문이라고 할 수가 없어.

우리 쪽도 적이 얼마 없을 줄 알았거든."


과거는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 덕분에 네가...!"


그도 한 번에 술을 들이켰다.


하나 밖에 없는 내 다리를.

적의 박격포 탄에 맞고 날라가 의족에 의존하는 내 다리를 보면서.



"이제 그 일은 신경쓰지 마.

솔직히 내 잘못도 있으니까."



앞서 말했듯 우리도 적이 얼마 없을 거라 생각해 가볍게 산책 겸 정찰하라고 전술 인형 한 명만 보냈다.

그게 실책인지도 모르고.


벌써 한 달이 넘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다급한 총성 소리와 사방이 빨간 점으로 레이더.



수 많은 적들이 잠복해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내가 직접 장갑차를 끌고 그녀를 구하러 갔다.


왜 나 혼자 갔냐고?


그녀를 구하러 가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더더욱 놔두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가 이미 죽었더라도

시체만이라도 데리고 오겠다는 다짐을 한 채

전장을 향해 엑셀을 밟았다.


말리는 사람이 없었냐고?

잔뜩 있었지! 어떤 애는 아예 땅바닥에 널부러져서 울고 있었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내 의지를 꺽을 수 없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나에게 있어....



"지휘관! 술은 먹지 말라고 했잖아!"


언제부터 내 옆에 있었던 걸까!

갑자기 내 부렛나루를 잡아 당기는게 아닌가!



"아퍼! 아퍼! 환자를 이렇게 다뤄도 돼?!"


"환자가 술 쳐먹는 건 말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 야밤에 혼자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야?

한 쪽 눈도 안 보이잖아!"


....그녀의 말 대로다.


다리만 다친 게 아니다.

내 오른 눈도 포탄의 파편에 맞아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려

궁예마냥 안대를 쓰고 다닌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에 집중되는 거겠지.

거기다 얼굴에 깡패마냥 끔찍한 흉터까지 새겨졌으니.


"어쨌든 빨리 가자! 벌써 야밤이라고!"

전술 인형 아니랄까봐

그녀는 나를 압도적인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더니.

"아니... 좀... 잠깐만...!"


레베이온에게 인사도 하지도 못 한 채

돈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 한 채

그대로 밖으로 질질 끌려나왔다.




****



결국 이 좁은 식탁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뭐, 괜찮다.

나도 우리 인형들을 불러서 마시면 되니까.


그러고보니 알고 있을까?

이준, 그 녀석이 왜 눈과 다리를 읽으면서까지 그녀를 구해줬는 지에 대해서.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이름이


스핏파이어(Spitfire)니까.





저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지옥에서 저를 구해준 지휘관에게

지옥에서 저를 꺼내온 지휘관에게


제가 어떻게 해야 저만을 사랑해줄지, 저만을 바라봐줄 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이준 지휘관을 사랑하냐고요?


지휘관은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알고 있어요.


우리 소대 애들은 죄다 겁쟁이라는 걸요.


전우애 따위 존재하지 않는 겁쟁이라는 걸요.


항상 가던 지역만 가는 그런 한심한 종족이라는 걸요.


그래서 모험 정신이 투철한 제가 항상 정찰을 나섰죠.


그러다가 그 어마무시한 대군을 만나서 다 포기하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지휘관이 장갑차 위에서 기관총을 쏘며 저를 구해주는 게 아니겠어요?!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데도 불구하고요!


그 덕분에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요....


의족과 목발 없이는 제대로 걸을 수 없으며

거기다 한 쪽 밖에 못 보는 사람이지만


저에게 있어 지휘관은


축복


그 자체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지휘관의 옷이란 옷에 위치 추적장치와 도청 장치를 붙쳤습니다.


별 다른 의도는 없어요.

혹여 악인에게 잘못 걸려 구타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교통사고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저번처럼 친구랑 함께 과음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붙친 거 뿐이라고요.



근데도 지휘관은 제 마음을 이해 못 해주네요.


친구랑 술 마신지 얼마나 됐다고,

오늘도 술집에 있길래 손 꽉 잡고 소대로 데리고 왔는데


'이제 모든 게 익숙해졌으니 너 없이 사는 연습을 해야한다.'

'너도 나 없이 사는 연습을 해야한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삶은 언젠가 너를 갉아먹을 것이다.'


이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저는 지휘관에게 의존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지휘관이 좀 더 저를 필요로 해주고,

저를 좀 더 사랑해주길 바란 거 뿐이에요.


하지만 지휘관은 아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건지


누군가랑 통화하면서 게임만 열심히 하고 있네요.


뭐... 괜찮아요.

술 마시는 거보다 훨씬 낫죠.

거기다 할 거 다하고 게임 하는 거니 제가 뭐라할 처지가 안 돼네요....



대체 무슨 게임을 그렇게 재밌게 하는 건지.


이따가 지휘관이 잠에 들면 한 번 봐야겠어요.



그것도 미래의 아내가 될 저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니겠어요?

남편이 엇나가는 걸 막아준다.

그게 아내의 역할이잖아요.


안 그런가요?




*****




요즘 술을 자주 먹어서 그런걸까.


몸이 무거웠다.


누가 내 위에 있는 거처럼.




아니, 잠깐 무거운 거 뿐만 아니라....!



"아, 너무 험하게 움직이지 마.

그러다 또 다치면 어떡해.

나 더 이상 지휘관이 다치는 거 못 봐."


그녀는 아무것도 못 하는, 그저 누워있는 거 밖에 못 하는

내 몸뚱아리 위에 누우면서 말했다.


발이랑 손도 침대 난간에 묶어놨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겠지.


"그래서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스핏파이어."


"글쎄.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가끔은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게 어때?"



감이 잡히질 않는다.


애초에 묶어놓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라면 압도적인 힘으로 날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데

왜 굳이 귀찮게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생각을 해보자.

이례없는 일을 벌였다는 건,

내가 이례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아.


뭔지 알았다.


스핏파이어가 알면 온갖 난동을 피울 걸 알았기에

몰래 작성한 서류.


하지만 그건 프린터하지 않았을 텐데?


설령 암호화 된 내 컴퓨터를 어찌저찌 열어서 뒤져봤다 하더라도

암호화된 사이트에 숨겨놔서 찾을 수 없을 터.


그렇다면 다른 이유라는 건데 나를 이렇게 묶어둘 정도로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있었나?


술 마신 거 때문에 묶어둔 건 아닐테고....


"나 진짜 모르겠어..."


"모르겠다라...."


그녀가 치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끄아아아아악!!"


짜릿짜릿한 걸 넘어서 극심한 고통이 온 몸을 지배하는 느낌이었다!


대체 나에게 뭘....!


"나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잔혹한 물건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근데 자꾸 지휘관이 사용하게 만드네?

그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전기충격기?!

대체 누가 저런 물건을 스핏파이어에게 쥐어줬단 말인가!



그나저나 뭐?

나를 사랑해?



"네가 가진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죄책감이야!

내가 널 살렸다는 죄책감!

그리고 널 살렸기에 내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죄책감!

그 감정에 지배 당하지 마!"



"죄책감? 내가 가진 감정을 단순한 죄책감으로 비유한 거야?!"


"끄아아아아아아악!!"


이럴 줄 알았으면 그 전장에서 돌아오지 말 걸!

차라리 포탄에 맞고 죽어가는 게 덜 고통스러웠겠다!


이유도 안 알려준 채,

나를 사랑한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큰 고통을 선물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진짜 내가 모른다는 걸 눈치라도 챈 걸까.

내 위에서 일어나더니.


침대 밑에 있던 종이들을 내 얼굴에 부어버렸다!

부어버리면 나보고 어찌 읽으라는 건가.

적어도 손이라도 풀어주던가!


하지만 읽을 필요도 없을 거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모든 걸 알려주었으니까.



"전부 봤어.

지휘관이 어떤 게임을 주로 하는 지

지휘관이 친구들이랑 어떤 대화를 하는 지

지휘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어떤 글을 썼는 지

그리고."


못 볼 거라 생각했던,

찾아내지 못 할 거라 생각했던,


"사직서까지 전부 봐버렸어."




****




지금 당장 지휘관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싶다.


내 마음을 박살낸 거처럼 지휘관의 몸뚱아리도

박살내고 싶다.


나 없으면 못 살 정도로.


내가 왜 이 정도로 열 불났냐고?

내가 프린트한 거 읽어 봐.


- 아카라이브 가이진, 전투기 채널-

스핏파이어 1000판 달성했다.

나를 대영제국의 기사라고 불러줄 수 있냐?


- 친구와의 카톡 中 -

지휘관 : 스핏파이어 ㄹㅇ 너무 이쁘다.

지휘관 : 빨리 영국 기서 스핏파이어 영접하고 싶다.



친구 : 네 스핏이나 챙겨.

친구 : 스핏파이어 구출하겠다고 몸까지 던졌다며

친구 : 넌 스핏파이어면 다 좋은 거냐?


지휘관 : 그럴지도 모르지~



- 사직서 내용 中 -


몸이 너무 불편해 더 이상 제대로 된 업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 스핏파이어의 저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

그녀가 자립심을 잃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로....



"지휘관에게 있어서 나는 그 빌어먹을 전투기 , 스핏파이어 대용품이었던 거야?

그 빌어먹을 전투기 때문에, 이름이 같다는 거 때문에

나를 그 지옥에서 구해준 거야?!

어쩐지 내가 전입 왔을 때 너무 잘 해주더라!

그리고 집착?

그래, 내가 지휘관에게 하는 행동이 사랑이 아닌 집착으로 보이겠지.

내가 지휘관이 원하는 스핏파이어가 아니니까!"



"오해야! 확실히 내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좋아하는 건 맞아!

하지만 그 때 일은 그거랑 상관없어!

그 전장에 너가 있지 않았더라도, 난 구해줬을 거야!

이건 정말 진실이야!"



"그렇다면 이 카톡 내용을 봐!

왜 여기서 '그럴지도 모르지~'이라고 얘기한 거야?!

지휘관의 말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자, 변명해보시지.

나는 지휘관이 거짓말하는 지 안 하는 지 다 알 수 있으니까.

어떻게 아냐고?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사소한 습관마저 다 기억하는 게 정상이잖아?

예를 들어...

그래, 거짓말할 때의 습관이라던가.


그러니 거짓말을 하지 마.

만약 거짓말을 한다면...


나도 지휘관에게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확실히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좋아하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랑 겹쳐 보였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름만 똑같았지.


너에 대해 알아갈수록,

모험심 넘치는 너랑 얘기할 수록,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너처럼 느껴지더라.


그래서 결과물이 어땠는 지 알아?"



지휘관이 말하는 건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그라들줄 알았던

지휘관에 대한 내 불타는 감정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스핏파이어 종합 성적 상위 30%! 너 때문에 내 게임 성적이 엄청 좋아졌....
 

끄아아아아아악!"




내가 눈 앞에 있는데 다른 애 이야기를 해서.

내가 눈 앞에 있는데 그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얘기해서.


그래서 혼내줬다.


다른 생각나지 못 하게 끔.

나만 바라봐달라는 의미에서.


많이 아팠던 걸까.

그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있었지만

어쩔 수 없다. 때로는 사랑의 매도 필요한 법이다.


사랑만으로는 교육을 제대로 할 수 없기에.



"그럼 왜 날 떠날려고 한 거야?

왜 내 곁에서 떠나려고 한 거야?!


당신의 말대로라면...."



"네 옆에 있어야 할 건 내가 아니니까!

너는 이 소대에 있지 말아야 하니까!"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지휘관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내가 지휘관의 소대에 있으면 안된다고?


왜?

사직서에 쓴 대로 내가 지휘관에 대한 집착이 굉장해서?


왜?

내가 허구한 날 지휘관이랑 놀아달라고 땡깡부려서?


그것도 아니라면...


나도 모르게 카리나한테서 받은 전기 충격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지휘관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말도 없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왜 그걸 나 때문으로 돌리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는 걸 알잖아.


"차라리 내가 지휘관을 다치게 만들어서 내가 싫다라고 말 해!"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를 좋아했으면 하는 게 진심인 주제에

거짓말을 하는 건 나인 주제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나오려는 그 때.


"내가 널 떠나려고 한 건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어."


제발 내가 싫다는 이유만 하지 말아줘.

그것만은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모험심이 뛰어나는 너는 나 같은 지휘관과 이 소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으니까."




*****




그래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이 곳에서 나가 더 큰 꿈을 펼치라고,

나보다 기량 좋은 지휘관을 만나라는 의미에서.


이제 나는 떠날 때가 됐으니까.


사직서엔 안 써져있지만 이것을 제출할 때 그리폰 대장님께 말하려고 했다.


꼭 스핏파이어를 다른 소대로 전출시켜 달라고.



"그러니 새로운 지휘관한테는...."


그 때 그녀가 내게 안겨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나를 묶어놓은 게 미안해서 그런 걸까나.

나를 전기로 고문한 것이 미안해서 그런 걸까나.


아니면 내 이별을 덤덤히 받아주는 것일까나?


"지휘관! 지휘관! 지휘관!"


그래, 펑펑 쏟아 내.

쏟아낼 수 있을 때 쏟아내야지.


"그럼 지휘관은 나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어?"



그거 때문에 그렇게 구슬프게 울었던 거냐.

너도 참 뻔한 걸 물어보는구나.


"당연하지. 난 널 한 번도 원망한 적이 없어."


인형이 위험에 빠졌다면 구해주는 것이 지휘관의 도리이니까.


"그럼 나 모험심따위 버려버릴 테니까 평생 여기서 있어주는 거겠네!"


어....?

잠깐만...?

뭐라고...?


"지휘관이 말했잖아.

이 소대는 모험심이 투철한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그러니 나도 다른 애들처럼 약한 구역만 돌아다니는 겁쟁이가 되겠다는 뜻이지!"



그것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안 돼! 너는 더 좋은 지휘관을 만나야 돼!

넌 이 곳에 있어야 할 인재가 아니야!"


설령 내가 그녀를 좋아하더라도

그녀는 여기에 둬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 지는 해 일 뿐이니까.


그러자 그녀는 떨어졌던 전기충격기를 다시 줍더니.


"지휘관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왜 자꾸 나랑 떨어지려고 하는 거야?

나도 이 물건 쓰기 싫어!


아, 알겠다. 그 뭐냐?

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나오는 전투기 게임을 못 하게 할까봐 그렇지?!"


어...? 난 거기까지 생각 못 했는데...?


잠깐만 어디가는 거야.

잠깐만 왜 내 위에 전기충격기는 올려놓고 가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이야?


설마...!



"그 게임은 절대 건들지 마!

3000시간 넘게 한 게임이라고!

내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상위 30퍼 찍기 위해 얼마나 고생한 지 알아?!

그 게임 건들면 난 널 싫어할 거야!

평생!"


목이 찢어져라 외쳤기에 그녀는 반드시 들었을 것이다.


만약 못 듣고 내 계정에 손 한 끝이라도 댄다면....


생각하기 싫었다.

내 인생의 절반을 넘게 투자한 게임이 내 곁에서 허무하게 떠나는 걸


상상도 하기 싫었기애.


하지만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한 건지,

그녀는 내 책상에 있던 노트북을 가지고 와 버렸다.



"이미 지휘관은 날 싫어하잖아. 안 그래?"


현란하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요란하게 울리는 키보드 소리.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솔직하게 거짓없이 전해야한다!

"아냐! 난 널 좋아해!
그러니 떠나려고 한거야!

마음 같아선 널 평생 내 옆에 두고 싶어!"


사실이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잡착도 심하고, 술도 마음껏 못 마시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게 나 때문이라는 걸.

그래서 한 편으로 미안했다.


그녀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싫어만 준 거 같아서.


그래서 떠나려고 한 것이다.

사직서까지 숨기면서.


"너라면 알고 있잖아! 내가 널 정말로 싫어했다면

난 널 구해준 걸 후회했을거야!

하지만 난 살면서 그 후회를 해본 적이 없어!"


이것 또한 사실이다.

방금 전에 전기 고문 당했을 때 후회하지 않았냐고?

아니, 내가 살아돌아오지 말고 죽었어야 했다고 했지.

그녀를 죽게 내비둬야 됐었다는 생각은 정말로 해본 적이 없다!


내 말을 전부 믿어주는 걸까.

그녀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너가 그렇게 부끄러워 하면 내가 뭐가 되냐.

나도 부끄러워질 거 같잖아...

너라면 펄쩍펄쩍 기뻐할 거 같았는데.


"그러면 평생 있으면 되겠네! 뭐가 문제야!"

그녀는 내 위에 펄쩍 뛰어들며 말했다.


"문제 많지! 너는 다이아몬드인 반면,
나는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보다 못한 존재야!

그러니 넌....!"


"지휘관, 사태 파악이 아직 안 된 거 같은데?

내 손에 뭐가 있는 지 몰라?"


이런....

아무래도 그녀는 날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는 거 같다.



*****



오늘도 기분, 최고!


왜 그렇게 기분이 좋냐고요?


지휘관의 자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봐요! 지휘관의 자는 모습을! 얼마나 귀여워여?


요즘 귀여운 짓만 해서 그런걸까요? 후훗.


저를 떠나려고 하려도 하지 않고,

술도 마시려고 하지 않고,

친구들도 안 만나려고 해요!


이유를 물어보니까 '저를 사랑해서요!' 라고 대답하는 거 있죠?


아아, 기분이다!

이따가 지휘관 일어나면 게임 해주게 해야겠어요.


왜냐고요?

지휘관, 아니, 남편의 게임 시간 관리도 아내가 해주는 게 정석이잖아요.


그러니 빨리 저에게 반지를 끼워주세요.



남.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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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전투기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소전을 안 해서 설정이 좀 많이 이상할 수 있는데

이 긴 단편작을 끝까지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