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가 집에 방문한 게 오전 11시였다. 그때까지 쭉 자고 있었던 셈이다. 원래라면 방문 즉시 청소를 시작했어야 했지만, 그가 아침을 먹지 않았으므로 식사부터 했다.


다이아에게는 점심이고, 그에게는 아침 겸 점심 메뉴는 다이아가 가져온 샌드위치였는데 빵, 채소, 햄 어느 것 하나 뒤떨어지는 것 없는 최상품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담소와 함께 배가 꺼지길 기다리니 12시 반. 그때부터 청소를 개시하니 2시가 되어 끝났다.


넓은 집도 아니며 먼지를 빨아들이고 걸레로 닦는 것이 주인 작업이었으니 오래 걸릴 턱이 없다.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 게 냉장고 정리 정도였다. 그것도 냉장고에 이렇다 할 저장 음식이 없어 빨리 끝난 편이다.


그는 다이아가 바닥과 창문 등을 정성스레 쓸고 닦는 걸 지켜보았다. 그를 돌봐주었을 때처럼 열과 성의를 다해 청소에 임했다. 싫고 귀찮은 기색은 전혀 없이.


그녀의 천성은 온화하고 상냥하다. 다이아의 얼굴을 보면 그녀의 본바탕이 순수하다고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는 다이아가 책장을 건드리게 두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이아가 책장에 손을 대기 전에 먼저 청소를 했다. 급하게 쑤셔 넣은 공략 노트를 절대로 눈치채지 못하게.


다이아의 시선이 책장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노력이 통했는지 다이아는 책장을 신경 쓰지 않았다.


“후후, 마음마저 개운한 느낌이네요!”

“고마워, 다이아. 나 혼자 청소했으면 시간이 걸렸을 거야.”

“괜찮아요. 뭐든지 다이아에게 맡겨주세요!”

그녀는 가슴을 툭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참 티 없이 순수해 보였지만...


그녀의 미소가 왠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청소가 끝난 후 잠시 산책하러 나가기로 했다. 그가 가볍게 씻으니 2시 20분 정도 되었다. 오후를 충분히 즐길 만한 시간이다. 그렇게 집을 나서려는데 뜻밖의 인물이 그를 불러 세웠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안 보여서 이사라도 가셨나 했어요.”

현관문 앞. 깔끔하게 생긴 남자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반응이 시원찮으니 남자가 의아해했으나 곧 설명을 듣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거 참... 힘드셨겠습니다.”

남자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드러났다. 남자는 곧 표정을 관리하곤 말을 이었다.


“그럼 자기소개를 다시 해야겠군요. 제 이름은 마츠다 엔지라고 합니다. 가끔 이웃사촌으로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습니다.”

남자, 마츠다 엔지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벼운 악수가 이어졌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제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단서가 있으면 기억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음... 그렇게 깊은 교류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떠올려 보면... 조심성 많은 생활을 하셨던 것 같아요.”

“조심성이요?”

“네, 집에 들어가실 때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시기도 하고, 신중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니라 미츠히데가 보여줬던 CCTV 영상을 떠올렸다. 무언가에 쫓기던 영상. 그러는 와중에 간간이 뒤를 돌아보던 그의 뒷모습.


마츠다는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인상만 따지면... 누가 올까 봐 경계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혹시 원한이라도 산 건가 싶었다니까요.”


역시 그는 도피 목적으로 이 마을에 온 것이 맞았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려고 이 마을까지 왔는데 결국 들킨 것이다. 그래서 공략 노트에 심정을 적어놓고 등산로로 도망치려다가 실패한 것일 테지.


그는 마른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체 누가 그를 노린단 말인가. 어떤 목적으로? 금전인가? 아니면 원한인가?


그렇다면 기억을 잃은 지금은 왜 접근하지 않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무렵, 팔에 온기가 닿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이아가 팔짱을 낀 채로 그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다이아는 그러면서 마츠다 엔지에게 물었다.


“정말 트레이너 씨가 그런 행동을 하셨어요?”

“아, 네. 제가 보기엔 그랬어요.”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다이아가 끼어들어서 그런가. 마츠다 엔지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혹시 사귀는 분이신가요? 그전까지는 뵌 적이 없어서...”

“예? 아뇨. 아직...”


다이아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면서 그를 조심스러운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저희는 사제 관계 비슷한 겁니다. 제 몸이 이래서 신세를 지고 있죠.”

그가 이야기를 재빨리 수습했다. 그러나 마츠다는 믿지 않았는지 그와 다이아를 번갈아 보면서 묘한 웃음을 지었다.


“두 분 잘 어울리시네요! 에이, 아무리 봐도...”


결국 그는 헛기침을 동원하여 말을 끊었다. 마츠다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다이아와 외출 길을 다시 나섰다.


그는 걸으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실족 사고는 ‘사건’임이 확실하다. 누군가 때문에 그가 등산로에서 사고를 당한 거다. 도피로까지 준비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대에게 쫓긴 건 확실하다.


그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문제지만. 기억이 없으니 당연한 건 둘째 치고, 그가 병원에 있던 기간에 그를 찾아온 이 중에는 수상한 사람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태연함을 가장했을 수도 있지만.

그가 알고 있는 이들 중에서 수상한 인물을 굳이 뽑자면...


지금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다이아다.


“트레이너 씨. 조금 전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트레이너 씨를 노렸을 가능성이 있어요.”

다이아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힘 조절을 해서 아프진 않았지만, 다이아의 온기가 한층 더 강하게 느껴졌다.


“저, 트레이너 씨가 트레센 학원을 나가셨을 때 충격받았어요.”

다이아가 갑자기 멈춰 섰다. 발음은 제법 차분하고 덤덤했지만, 묘하게 감성을 자극했다.


“혹시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니면 제가 트레이너 씨를 실망하게 했는지... 매일매일 스스로 물었어요.”


다이아의 손이 조금 떨렸다.


“제가 부족했던 건지, 아니면 제가 트레이너 씨를 곤란하게 해드린 건지... 매일매일... 매시간, 매 순간 생각했어요.”


다이아는 트레이너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떨림을 손아귀 힘으로 애써 가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트레이너 씨를 발견했을 때... 너무나도 기뻤어요. 당신이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슬프지만, 기뻐서...”

다이아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다이아가 하고 싶은 말을 그도 알 것 같았다. 다이아가 그동안 보여준 모습을 보면, 다정함 그 이상의 호의를 보면 기억이 없는 그라도 알게 된다.


다이아가 그에게 애정을 품고 있다는 걸.

병실에서 다이아를 처음 본 순간. 다이아의 넘칠 것 같은 마음이, 그녀의 눈물이 가슴을 뜨겁게 적셨을 때부터 어렴풋이 느꼈다.


“저, 트레이너 씨를 다시는 놓지 않을 거예요. 트레이너 씨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이상... 더욱이요.”


다이아가 조금 촉촉한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트레이너 씨가 다른 사람한테 다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가 트레이너 씨를 지켜 드릴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걷는 속도에 맞춰서.


둘은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목발 때문에 속도를 내지는 못했지만, 천천히 흘러가는 광경을 같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이아는 만족한 모양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를 이끌고 있으니까.


둘은 곧 상점가에 당도했다. 가게를 구경하며 걷다가 다이아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인형 뽑기 기계였다. 딱 한 대만 있었지만, 다이아는 기계를 보고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반색했다.


“사토노 그룹의 인형 뽑기가 여기에도 있었네요! 트레이너 씨! 이 인형은 이번에 새로 나온 거예요.”

그녀는 곧장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동전을 만지작거리면서 인형들을 살폈다.


“이 각도는 안 되겠고... 아, 저쪽은 엉켜 있어서 안 되겠어. 크레인의 강도 설정을 생각하면... 집게를 다리에 걸어서...”

다이아는 중얼거리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내 계획을 전부 수립했는지 동전을 기계에 넣고 레버를 조작했다.


“뽑았어요! 후후, 저 인형 뽑기는 엄청나게 특기예요. 직접 보여 드리는 건 처음이었죠?”

“그러네. 되게 잘 뽑네. 신기하다. 덕분에 구경 잘했어.”

다이아가 인형을 그에게 내밀었다. 다이아를 모델로 한 인형이었다. 전에 다이아가 뽑아준 것과는 다른 포즈다.


이번에도 그에게 주는 것이리라.


“트레이너 씨, 이걸 꼭 곁에 두세요. 꼭이에요!”


그 후 며칠간 다이아는 빈번히 그의 집을 찾아왔다. 그의 집에 다이아가 가져온 물건이 한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원래는 그 혼자만의 집이었지만, 혼자 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사실 집에 오고 나서 혼자라고 느낀 적이 없다. 오히려 다이아가 찾아오지 않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기억을 잃기 전의 그가 다이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그는 다이아에게 감사의 마음마저 품었다.


하지만 어느 테두리를 넘지 않게 마음을 억눌렀다. 다이아가 좋은 아이라는 건 알고 있고 오해도 풀었지만,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는 다시 공략 노트를 펼쳤다.

도망치라는 말이 빼곡하게 적힌 페이지. 그는 이걸 본 순간부터, 다이아를 보면 가슴이 떨리게 되었다.


호의적인 의미가 아닌 공포의 의미로.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서 착각하는 건가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마치 몸이 자기주장을 하는 것처럼 절로 가슴 속을 헤집었다.


다이아는 위험하다.

그렇게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


머리는 기억을 못 해도 몸은 기억하는 걸까?


하지만 그는 다이아를 꺼리지 않았다. 가슴속 불편함을 감수하며 다이아와 교류를 계속했다. 이걸 심증으로 쳐야 할지도 모르지만, 심증만 있을 뿐 다이아가 그를 위협한 실질적인 증거가 없다.


그는 다이아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건 이미 본능적인 영역이다.


그래서 머리와 몸의 의견이 충돌할 때마다 그는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이아가 범인인 걸까?”

애석하게도 몸은, 가슴은 대답하지 않는다. 입을 제어하는 건 머리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시간은 밤 9시를 향했다. 슬슬 하루의 마무리를 준비할 때다.


전화가 왔다.

니라 미츠히데 형사의 전화였다.


“급한 소식입니다. 내일 오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 수사에 진전이 있었나요?”

“진전을 논할 수준이 아닙니다. 잡았습니다.”


뭘 잡았는지를 굳이 물을 필요도 없다.


“목격자가 있었어요. 겨우 찾았습니다. 목격 정보를 토대로 수사를 이어나간 결과,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습니다.”


가슴이 떨린다. 그를 옭아맨 모든 근심의 원인이 곧 드러난다.


“범인은... 누구였습니까?”

그가 물었다.

그러자 니라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전화상으로 자세한 수사 내용을 말하긴 그렇고요. 내일 직접 오실 수 있으시죠? 오후 5시로 하죠. 그때 꼭 와주셔야 합니다.”

“예? 아, 예. 갈 수 있어요. 갈게요.”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바로 범인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일이면 알게 된다. 그가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던 차에,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죠. 범인은... 당신과 연고가 있는 우마무스메였습니다. 들어오시기 전에 최대한 진정하시고 들어오시는 편이 좋겠죠.”

니라가 대답했다.


결국 그날은 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 그는 정확한 시간에 맞춰 경찰서에 도착했다. 실은 더 일찍 오고 싶어서 일찍 출발했지만, 오는 길이 불편해서 지금 도착했다.


니라 형사는 최대한 진정하고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에겐 그럴 여유가 없었다. 걸음을 뗄수록 심장의 펌프질이 더욱 거세졌다.


그걸 견디며 그는 방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전처럼 책장에 앉아있는 니라. 그리고 그 앞에 한 우마무스메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그 우마무스메를 보고 숨을 크게 집어삼켰다.


“너... 누구야.”


전혀 모르는 우마무스메였기 때문이다.


그가 물어도 우마무스메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숙였다. 그 대신 니라가 청산유수처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름은 네레이드 랑데부. 트레센 학원에 재학했다가 자퇴한 학생이었습니다.”

“자퇴요? 그런 아이가 대체 왜... 혹시 저한테 원한이라도? 저 때문에 자퇴했다거나...”

“이걸 보시는 게 설명이 빠르겠죠.”


니라가 모니터에 자료를 띄웠다. 윈도우 폴더 안에 수십 장의 사진 파일이 있었다. 니라는 그중 하나를 임의로 클릭해 화면에 올렸다.


번듯한 복장을 하고 업무에 매진하는 그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장소는 트레이너실로 보였다.

그는 의아했지만, 다른 사진들을 보고 깨달았다.


전부 그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런데 시선이 하나같이 카메라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각도도 전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트레이너실에서 찍은 사진은 물론이고 트레센 학원의 시설에서 찍은 사진. 그가 거리를 걷는 사진. 식당에서 식사하는 사진. 그리고 숙소에서 옷을 벗고 있는 사진까지.


이건 몰래 찍은 사진이다.


“너.. 뭐야. 왜 이런 짓을...?”

순간 두통이 몰려왔다.

조금 전까지 요동치던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다. 구멍에서 피가 전부 새어 나와 심장이 쪼그라들기라도 한 양.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는 직전까지만 해도 다이아를 의심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전혀 모르는 우마무스메가 있었고,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사진이 잔뜩 있었으며,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것만은 그 우마무스메, 네레이드 랑데부가 대답했다.

잔뜩 긴장했는지 기어 나오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저, 저는... 트, 트레이너 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 짓을 저질러버리고 말았어요. 트레센 학원을 자퇴한 건 일이 커, 커져서... 경찰에 연행되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라고... 들어서... 트레이너 씨... 그러니까 당신이 아니라 저를 담당하셨던 다른... 어.... 제 담당 트레이너가 그래서...요. 그만두라고 한 건 그 사람...”


랑데부의 대답에 그는 아연실색했다.

스토커 범죄라는 소리였으니까.


“자, 자퇴한 후로도 트레이너 씨하고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계속 옆에 있었어요. 그랬더니 트레이너 씨께서 그만두셔서... 그래서 계속 따라다녔는데... 그러다가 사고가 나서... 죄,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예상치 못한 사태여서 어이가 없었지만,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으르렁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너 때문에 난 죽을 뻔했어! 그리고 다리도 망가져 버렸어! 너는 우마무스메이니 이게 얼마나 절망적인지 잘 이해할 거야. 하지만 지금 내가 가장 화나는 건... 너 때문에 애꿎은 아이를 의심했다는 사실이야.”


그는 분노했다. 랑데부 때문에 다이아를 의심했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죄송합니다!”

랑데부는 연신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그는 랑데부를 용서하지 않았다.


“내가 과거에 그쪽하고 무슨 관계였는지는 몰라. 하지만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어. 네가 저지른 짓은 범죄야. 너는 내 인생을 빼앗았어. 니라 형사님. 이 아이는 법대로 해주세요.”

그는 곧바로 방에서 빠져나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전신에서 힘이 급격히 빠졌다. 그는 허탈감에 지배당하면서도 목발을 의지해 경찰서를 겨우 빠져나왔다.


그가 나가고 잠시 후.


니라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분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러자 방에 연결된 다른 문을 열고 니라의 ‘의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니라는 의뢰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일은 제대로 처리됐습니다. 그는 이제 더는 의심하지 못할 겁니다.”

니라는 의뢰인의 표정을 살폈다.


“만족하시는지요? 와오~ 이런 해피엔딩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 잘된 일입니다. 이 자리에서 손해를 본 이는 아무도 없지요! 그는 의문이 풀렸을 테고, 저는 인맥을 얻었으며, 당신은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얘는...”

니라는 랑데부를 숨김없이 그대로 쳐다보며 비아냥거렸다.


“제 아비가 싸지른 빚더미를 갚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참 한심한 아버지를 둬서 자식새끼가 고생하는군요. 우마무스메로 태어난 이상 트레센 학원에서 달리고 싶었을 텐데... 아비 빚 때문에 그만뒀으니. 잘못이 있다면 쓰레기 같은 아비를 둔 게 잘못이겠지요. 그래도 나쁜 거래는 아니니까요. 얘는 아직 미성년자니까 가벼운 처벌을 받을 테죠.”


니라는 부들부들 떠는 랑데부의 어깨를 보고 만족했는지 큭큭 거리면서 웃었다. 그리곤 다시 의뢰인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어라? 어디 부족한 점이라도 있었습니까? 어디 불편하신 점이라도? 분위기가 너무 무거우니 환기라도 시킬 걸 그랬나요?”

니라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의뢰인의 심기를 진작 헤아렸다.


“하하,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 이후로 그와는 절대로 접촉하지 않겠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되면 이 일을 다시 입에 올릴 일은 없을 겁니다. 그와 접촉한 이유는... 당신이라는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더는 볼일이 없죠.”

니라는 낄낄거리며 말했다.

문밖에 있는 경찰 한 명이라도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지만, 니라는 개의치 않았다. 경찰 한두 명쯤 입을 막는 정도는 의뢰인의 힘을 빌리면 간단했기에.


니라는 의뢰인의 안색과 함께, 의뢰인의 귀와 꼬리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리고는 우마무스메의 감정표현에 대한 지식을 머릿속에서 살폈다.


니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가는 상관없이, 의뢰인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무척이나 의연하고 태연하게.

속마음을 완벽히 감춘 채로.


그녀는 가야 할 곳으로 갔다. 









귀가한 후에는 줄곧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뱃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로 침대에 틀어박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밝아질 동안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한 가지 생각이었다.


앞으로 다이아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까?


생각해 보면 다이아는 그가 기억을 제대로 새기기 시작한 부근부터 늘 함께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나, 지금의 인생에 있어 다이아를 빼면 분량이 상당히 줄어든다.


그 분량만큼 다이아는 옆에서 그를 지탱해주었다. 그저 선의만으로 계속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런 그녀를 그는 의심했다. 오직 심증만으로 스스로 꺼리고 무서워했다.


앞으로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아침이 오자 그는 다이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부탁이니까 오늘은 오지 말아줘.”


일방적인 통보. 다이아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받아들였다.


물론 통화하는 중에도 죄책감에 시달렸다. 다이아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그가 괜히 피하는 셈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루라도 마음의 정리를 하지 않으면 다이아 앞에 도저히 설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 정도로 그의 마음은 궁지에 몰렸다.


방을 나서자 옆문에서 우편함을 뒤적거리는 마츠다 엔지와 마주쳤다.


“어디 나가시나요?”

“예, 바람이나 쐴 겸.”

그대로 집을 나서려 했으나 웬일인지 마츠다가 참견했다.


“오늘은 그 우마무스메 분은 같이 안 계시는가요?”


마츠다 입장에선 가볍게 건넨 말이지만, 그는 쉽사리 대답하기 힘들었다. 사정을 전부 털어놓고 싶은 마음도 없을뿐더러 다이아에 관한 화제를 올리자니 마음속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혹시 싸우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하하, 그러셨군요. 제가 주제넘게 참견하는 것 같지만... 두 분이 같이 계실 때와 분위기가 좀 다르다고 생각해서요. 그땐 참 좋아 보이셨는데 말이죠.”


의외였다. 그는 오히려 다이아와 함께 있을 때, 거북한 기색을 보였다고 여겼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저, 실은...”

그래서 그간의 사정을 조금 각색해서 말하고 말았다.


모종의 일로 다이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다이아에게 공포마저 느꼈지만, 실은 그게 오해로 밝혀졌다. 그래서 다이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요, 그럼... 음...”

마츠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웃사촌이라 해도 현대 사회에선 그저 남인데 이런 사정까지 괜히 이야기했나 싶을 무렵, 마츠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죄책감이라고 해야 하나. 잘못했다고 느끼면 그만큼 보상해야겠죠. 그럴 수밖에 없잖습니까.”


마츠다의 의견은 지극히 원론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곧바로 실행하기 힘든 게 문제지. 그도 염치없다고 느끼지만, 지금 당장에 다이아를 마주하기엔 심신이 모두 지쳐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신 것 같은데... 듣자 하니 그 아가씨께서는 당신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건 알고 계시죠?”

“그건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신 거잖아요. 그럼 보답해야죠. 그건 사람으로서 당연한 거예요.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더라도, 일단 만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는 게 어떨까요?”


그는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마츠다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의견이다. 아직 결심이 완전히 서지 않았지만, 다이아에게 죄책감을 안고 있다면, 적어도 피하면 안 된다는 데엔 그도 동의한다.


“되도록 빨리 전하는 게 좋을 거예요. 시간을 끌면 엇갈릴지도 모르니까요.”

“참고하겠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아서 그런지 그의 마음도 조금은 편해졌다. 그는 마츠다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고려하며 마을을 산책하기로 했다.


그러려던 중 문득 마츠다가 들고 있던 우편물에 눈이 갔다.


주소는 연립주택의 주소고, 상세 주소도 마츠다의 방이 맞았지만. 수취인이 달랐다. 거기엔 마츠다의 이름이 아닌 ‘사토 타로’라는 생소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아아, 요즘 우편이 잘못 와서요. 곤란하던 참이었습니다. 하하.”

마츠다는 쓴웃음을 지으며 우편물을 찢었다.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는 그대로 집을 나섰다.


다이아와 함께 걸었던 길을 더듬으며 걸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사라져서 그런가. 이전보다 더욱 많은 것이 보였다. 어쩌면 마음에 여유가 돌아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다이아는 이 길을 어떻게 보았을까? 쓸데없는 의심으로 풍경도 제대로 즐기지 못한 남자와 함께해서 즐거웠을까?


그는 산책로를 걷다가 벤치에 앉았다. 그만 평소보다 빨리 걷고 말았다. 걷느라 찬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이른 오후였지만, 가족 단위 인파가 많아 보였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마무스메. 그리고 인간과 우마무스메와 그 자식 등등...


다들 행복한 얼굴이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테지만, 행복의 형태는 비슷해 보였다. 그중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남자와 우마무스메 커플이 몇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를 눈에 담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인생을 서로의 파트너로 채우려는 모습.

문득 다이아가 떠올랐다.


그에게 가족은 없다. 천애 고아. 그는 남은 혈육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래도 헛된 인생을 살진 않았는지 입원 시절에 찾아온 사람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가족에 가까운 이를 뽑으라면 역시... 다이아다.


그가 무슨 마음을 품든 간에 언제고 옆에 있어 준 다이아.


코가 시큰해졌다. 조금 붉어진 눈가를 애써 쓸고는 다시 일어났다.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상점가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가족 단위의 손님이 많았다. 인파를 피해 전자제품 상점 앞을 지났다. 제법 빵빵하게 튼 스피커에서 기업 광고가 흘러나왔다.


《내 손안의 모형 정원, 내 손안의 상자, 내 손안의 미래. 사토노가 만듭니다.》


“수제 도시락입니다! 30년 전통입니다! 맛도 영양도 듬뿍 담긴 도시락 사가세요! 어? 손님 오늘은 혼자십니까?”

도시락 가게 점원이 그를 알아보았다.


“도시락도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요! 2개 사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뇨, 오늘은 됐습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집에서 다이아가 기다리고 있다고 전제한 말투였으니까.


상점가를 거닐다 보니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말을 걸었다. 내용은 도시락 가게 점원이 한 말과 대동소이했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그 우마무스메 분은 같이 안 오셨어요?”

“다음엔 같이 오세요! 커플 쿠폰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쿠폰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생각보다 그와 다이아를 알아보는 이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무리도 아니다. 목발을 짚고 다니는 남자와 우마무스메라는 눈이 가는 조합. 그리고 레이스에 흥미가 있으면 다이아의 얼굴을 알아볼 테니까.


그는 그런 반응을 들을 때마다 깨달은 바가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가족 손님. 그는 혼자.


만약 이 자리에 다이아가 있었다면 그도 이 광경에 잘 녹아들었을 텐데.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정육 코너까지 왔다

새빨간 소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전골을 만들면 맛있을 것 같다. 다이아와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전골을 끓여 먹는 상상을 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인지도 못 했으며 다시는 기억하지 못할 한 마디였다.


“내일 저녁은 전골이 좋겠네.”


그날 저녁. 그는 다이아에게 전화했다.


“내일 와줄 수 있겠어?”

물론 다이아의 대답은 뻔했다.


“네!”


다음 날 저녁. 다이아는 전골 재료를 한 아름 들고 나타났다.


다이아가 준비한 전골은 정말 맛있었다. 재료에 육수가 환상적으로 스며들어서 다 먹은 후에도 생각이 나는 맛이었다.


설거지까지 마치니 석양이 방을 침범했다.


TV도 켜지 않은 조용한 정적 속에서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범인이 잡혔어. 등산로에서 실족한 건 내가 도망치다가 일어난 일이라는 것 같아.”


다이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범인이 트레센 학원의 학생이었다는 것. 여기까지는 시원스레 설명할 수 있었으나 범행 동기를 설명하는 건 역시 좀 꺼려졌다. 그 부분은 두리뭉실하게 처리했지만, 다이아는 굳이 추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다이아에게 사과하는 것이다.


“다이아. 있잖아. 나 너를... 의심하고 있었어.”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놀렸다. 그러면서 다이아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다이아에게서는 동요나 놀라운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놀란 건 그였다.


“실은 알고 있었어요. 트레이너 씨께서 저를 대하시는 게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거든요.”

“뭐?”


전혀 몰랐다.


“그러면 왜 내 곁에 계속 있던 거야?”

“언젠가 알아주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이아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에 앉았다.


“실망하지 않았어? 너는 날 이렇게 도와줬는데 나는 그런 널 의심이나 했어.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하지만 의심이 풀렸잖아요? 제게 직접 말씀해주셨으면 더 좋았겠지만요.”

다이아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것만으로 다이아에게서 신뢰감이 전해졌다.


“트레이너 씨를 믿고 있었으니까요.”

다이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것처럼.


하지만 그에게는 농담을 즐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순진무구한 애정과 친애를 그는 어떻게 보았는가.

그저 미지에 대한 공포로만 받아들였다.


다이아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가 다이아에게 그런 감정을 품은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이아... 이제 나와 만나는 건 그만하자.”“어째서요?”

“나 같은 놈 옆에 있어봤자 다이아한테 좋을 게 없어. 다이아의 인생을 낭비할 뿐이야.”


다이아가 눈을 치켜떴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다이아는 단호했다.


“다이아몬드... 그런 제 이름을 빛내주신 분과 함께 하는 인생이에요. 세상 그 어떤 보석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시간이에요.”

“난... 기억이 없어. 나한테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

그는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네가 나와 함께 하면서 충실한 시간을 보낸 건 알겠어. 하지만 그건 기억을 잃기 전의 나야. 예전의 내가 어땠는지는 몰라. 하지만 지금 나는 네가 과거에 함께 했던 그런 남자가 아닐 거야. 별거 아닌 거로 너를 믿지 못하는 한심한 남자일 뿐이야.”


자신의 비어버린 근본을 바닥까지 긁어모은다. 그래봤자 손바닥 하나도 채우지 못한다. 그나마 남은 것도 먼지 더미처럼 볼품없다.


가만히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옆에 두기에 민망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이아는 단호했다.


“저는 트레이너 씨를 잘 알아요. 기억을 잃으셨어도 트레이너 씨는 트레이너 씨였어요. 몸짓, 말투, 성격... 가치관... 그리고 그렇게 고민하는 것도. 모두 트레이너 씨 그대로인걸요. 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트레이너 씨에 대해 잘 알아요. 저 같은 트레이너 씨 전문가는 없을걸요?”

다이아는 그의 팔을 감았다.

팔짱을 끼며 머리를 더욱 깊이 묻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제가 끝까지 달릴 수 있던 건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과거의 트레이너 씨와 지금의 트레이너 씨는 같은 사람이에요. 타인이 아니에요. 제가 보증합니다. 이 온기는 변함없이 똑같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석양이 그와 그녀를 삼켰다.


같은 석양 속에서 같은 시간을 보냈다.


“트레이너 씨. 이 마을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마을이야.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좋은 곳이지. 도피 목적으로 온 마을이지만, 왜 여기를 골랐는지 알 것 같아. 이런 곳에서 평생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렇죠? 좋은 마을이죠?”

다이아의 목소리가 들떴다. 그의 대답이 기뻤던 모양이다.


“저는 아직 가고 싶은 곳이 많아요. 트레이너 씨와 함께 가고 싶은 곳, 체험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게 많아요. 전국, 세계를 돌고 여기로 돌아오는 거예요. 근사한 보금자리가 될 거예요. 분명.”

다이아가 그의 손에 깍지를 끼었다. 그건 거절하기엔 무척이나 달콤한 행위라서 그는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여름에 불꽃놀이 축제를 한다고 해요.”

“같이 보러 가는 것도 좋겠구나.”

“아마 방에서도 보일 거예요. 여름에 축제를 하면... 여기서 이렇게 저와 트레이너 씨가 창문 밖의 불꽃을 바라보는 거예요.”


황홀한 광경이 머릿속을 수놓는다. 그저 황혼만 깔린 하늘에 지금이라도 불꽃이 터질 것만 같았다.


“트레이너 씨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지만. 제게 있어서는 전부이자 모든 것이에요.”

다이아는 그렇게 말해주었지만,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지만, 다이아 같은 아이의 전부라는 과분한 평가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생각하든 다이아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트레이너 씨, 저를... 다이아를 받아들여 주세요.”


다이아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 석양에 잠겼으면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빛을 품은 눈이었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 영광인 그 눈을 앞에 두고 그는 망설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비어버린 인생이다.


“다이아... 나는...”


하지만, 생각해보면 남은 게 있었다.

다이아의 존재다.


병원에서 만난 이후로 계속 곁에 있는 그녀. 다이아와 함께 한 추억이 지금은 그를 채우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도 인생 상당수를 그녀로 채워도 괜찮을지 모른다.


죄책감이 그에게 속삭였다.

이제 선택지가 없다.

다이아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그게 다이아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트레이너 씨. 당신의 인생을... 이번에도 제게 주세요.”


다이아가 애원하듯이 본다.

그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정도겠지.


“사랑해. 다이아.”


사랑은 담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이아의 표정을 보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둘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


-


제법 이른 아침에 눈이 떴다.

다이아는 아직 곤히 자고 있다. 침대에서 규칙적인 숨을 내뱉으며. 그는 다이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다이아의 뺨은 지금도 불그스름하다.


그는 옷을 챙겨 입었다. 어제 다이아가 온몸에 남긴 잇자국이 옷 면적만큼만 가려졌다. 다이아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을 나와 창고로 향했다.


왜 창고로 향했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저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홀린 것처럼 공략 노트를 펼쳤다. 그러자 표지 사이에서 메모가 한 장 떨어져 나왔다. 풀 같은 것으로 붙였었는지 표면이 조금 끈적였다.


《←←←→→→↑↑↑ Act 7 ←←←→→→↑↑↑》


게임의 커맨드 코드가 적혀 있었다.


그는 게임을 세팅하고는 콘솔 게임기의 전원을 켰다. 이내 게임의 타이틀 화면이 그를 반겼다.


주인공이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악한 과학자의 야망을 저지하는 게임이다. 스테이지를 진행하며 재화를 모으고 특별한 보석 아이템을 얻으면 주인공이 파워업하는 게임이었다.


그가 커맨드 코드를 입력하자 게임이 디버그 모드로 넘어갔다.


그러자...


철장 안에 갇힌 주인공, 그리고 그런 주인공을 감시하는 듯한... 새하얀 보석 아이템이 화면에 떠올랐다.


보석은 게임 설정상 에메랄드다. 어린 시절의 그는 노트에 꼭 다이아몬드처럼 생겼다고 적었지만.


화면에는 과학자가 만든 여러 메카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그가 디버그 모드로 직접 제작한 스테이지 같았다.

그는 그걸 멍하니 보다가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그러나 주인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뭐야 이건.”


무슨 목적으로 이런 걸 만들었을까? 어떤 메시지라도 보내고 싶었던 걸까?


그는 딱 30초 정도만 그걸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것 같았지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하나도 공감되지 않는다.


그는 곧 콘솔 게임기의 리셋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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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종 1급 기밀문서 20***** 외부 유출 엄금


사토노 그룹 계획도시 조성 계획에 대하여...


**** *****의 지방 ** ***에 투자하여 인프라를 확립하는 것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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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토노 그룹 계열사와 관련 유통 업체만으로 생활이 가능한 도시를 목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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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도시에는 사토노의 친족과 남편 예정자(이하 남편으로 호칭)가 직접 도시에서 생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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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 주변의 환경을 **** ** 시설로 조성하여 이동에 불편함이 없도록 설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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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사토노 친족과 남편이 거주하는 연립주택의 거주민과 상점가의 상인 역할로 사토노 그룹 관계자를 선별한다. 이전 거주민들과 상점 관계자들은 적절한 보상안을 제시하여 다른 도시로 이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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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3년은 연립주택에 거주.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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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한 가정이 오직 사토노 그룹의 라이프라인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증명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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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 이후 사토노 본가에 합류하면 프로젝트를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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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행복한 가족 계획으로 명명한다.


아이디어 원안 발안자: 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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