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화 3화 4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제국과 왕국이 연합한다니요! 제국이라면 몰라도 저희와 대륙 반대쪽에 자리한 크산나가 무슨 사유로 저희를 치겠습니까. 개국 이례로 크산나와 아국은 크게 다툰 적이 없습니다. 제대로 된 육상 교역로조차 하나뿐인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전쟁이 나겠습니까! 명을 재고해 주십시오!


-하지만 충분히 주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전 마왕의 사망 이후 마족들은 외부로의 세력 투사를 거의 멈췄고 서부의 왕국과 공화국들은 최전선에서 갈려나간 후유증을 아직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재무장 중인 오를레앙이 저희에게 딴마음을 품지 말란 법도 없지 않습니까?


-딴마음은 무슨! 칠 거면 서부의 안타레스 왕국 먼저 치겠지, 인마대전 동안 가장 많은 자원을 소모해서 나가 떨어진 곳이 거긴데! 전력을 거의 보존하고 있는 우리를 무리해서 치겠소?


-오히려 대륙 서부가 전부 부진한 지금의 판도가 갖추어 졌으니 저희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크산나는 대사막 때문에 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오를레앙이 애시당초 크산나는 포기하고 크산나와 이권 밀약이나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저희를 쳐서 대륙 중부를 양분하려는 요량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동부는 그걸 보고만 있는답니까!? 오를레앙이 아무리 체급이 커도 저희를 상대로 양면전쟁을 벌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경은 귀가 먹었습니까!? 동부는 대전쟁 시기 마왕이 끌어모았던 마수들의 소탕이 아직도 안 끝났는데 어떻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겠습니까!?


-뭐요!? 당신 지금 말 다했...!


탁탁


이레시아는 급하게 소집한 신하들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전쟁'이라는 단어에 발작을 일으키며 논쟁을 벌이는 광경을 지켜보며 따분한 마음을 감추고자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두드렸다. 하지만 어전에 모인 신하들의 격한 분위기는 그녀의 작은 제스처를 가리기에 충분한 탓에 누구도 침묵하지는 않았다.


아니, 저들이 갑론을박을 멈춘다고 그녀의 흥미가 다시 돋지는 않으리라. 그녀의 관심사는 애시당초 단 하나 뿐이니까.


'미안해요, 당신.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굴어서 제대로 시간도 못 보내고... 당신도 나 보고 싶었죠?'


본인이 먼저 살벌한 화두를 던져놓았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신경이 온통 다른 곳에 쏠린 탓에 그녀 혼자 이 장소에서 괴리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신하들도 마냥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슬슬 그녀의 침묵을 눈치채고 시선을 모았다. 그 모습이 마치 두려움에 질린 강아지 같아 그녀는 실소를 내뱉을 뻔 했다.


"경들은 내가 생각이 없어 함부로 전쟁을 입에 담은 줄 아나?"


"아닙니다, 폐하! 신들이 어찌 그런 불충한 생각을 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저 최대한 많은 가능성을 고려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폐하!"


침묵 끝에 여왕의 입에서 나온 단 한 문장. 얼핏 들으면 자조의 말로 해석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여기기에는 그간 그녀가 보여준 잔학성에 이미 혀를 내두르고 있었던 신하들은 철렁이는 가슴을 남몰래 부여잡고 황급히 그녀에게 변명을 쏟아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의견에 관심이 없었던 이레시아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까 몇몇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오를레앙과 크산나가 준동하기에 지나치게 좋은 여건이 갖춰졌다."


꿀꺽


무심코 침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올 정도로 긴장한 신하들이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그녀는 이를 감상하려 했는지 잠시 뜸을 들이고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둘이 연합하든, 혹은 오를레앙 혼자서 군사를 움직이든, 만약 서부를 치면 우리가 신경 쓰이고 동부를 쳐도 우리가 신경 쓰인다. 하지만 우리를 치면 좌우 어디든 여유롭지."


"그리고 오를레앙에게 있어 남부는 애초에 고려할 대상조차 되지 않지요."


여왕의 유일한 총신으로 평가받는 빌란 데 에스파뇨의 맞장구에 그녀가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린 후 다른 이들의 의견 또한 다시 들으려 했는지 신하들을 내려다봤으나 아쉽게도 이 노후작 이외에 그녀의 말에 끼어드는 용감한 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 대륙 남부의 반도와 본토를 구분짓는 대사막은 천혜의 요새가 되어주지만 동시에 그들의 확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지. 그러니 남부의 대침공은 애초에 오를레앙이 고려할 요소가 되지 못해."


"하지만 폐하, 그렇다고 크산나가 굳이 저희를 향한 침략 전쟁에 협력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장기적으로 오를레앙이 저희를 친다고 그들이 구 틈에 동부나 서부를 쳐서 병탄할 수 있다는 확신 얻지 못 헸을 테고 다른 쪽에서 이득을 얻을 구석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오를레앙에게 협력하겠습니까? 이는 기우이십니다."


그녀가 계속 평이한 말투로 말을 잇자 용기를 얻었는지 몇몇 무신과 경험 많은 관료들이 슬슬 의견을 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천천히 이를 경쳥하고는 그들의 말에 반박하며 말을 이었다.


"평소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동부와 서부가 외부에 돌릴 여유가 없고 오를레앙마저 정반대에 위치한 우리에게 관심을 쏟고 있는 탓에 크산나는 현재 자국에 많은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 마왕 때문에 끌어모았던 수십 만 대군과 전략물자들을 말이야."


"폐하, 혹시?"


"세작에게서 보고가 들어왔다. 오를레앙의 대사가 크산나의 왕궁에 드나드는 빈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고. 지금 이 시국에 그 둘이 이렇게까지 자주 접촉할 이유가 달리 뭐가 있을까?"


"폐하, 대사가 왕궁에 드나든다는 것만으로 전쟁을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오해였을 경우 저희가 잃을 것이 너무 많습니다."


"맞을 경우에도 잃을 것이 많아지지. 기껏 끌어모은 군대와 물자를 해산시킨 이후에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더더욱."


"그러면 폐하... 정말로 폐하의 말씀대로 그들이 연합하여 저희를 침공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여쭈기 송구스럽지만... 도대체 어떻게 그런 확신을 얻으신 겁니까?"


"...내가 수도와 각 요충지에 심은 세작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결과 거의 확실하다. 오를레앙 뿐만 아니라 크산나도 소집한 군대를 해산하기는커녕 추가적인 징집령을 내리고 있어. 오를레앙과 크산나는 반드시 우리를 치러 올 것이다."


그녀의 발언에 신하들이 근래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며 저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기 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를레앙이라면 몰라도 저 먼 크산나까지 제대로 된 정보망을 이은 귀족은 없었던 터라 그녀의 말의 진위를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판별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물론 그녀의 발언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길어도 몇 주 안에 사실이 될 말이기도 했다. 지금 그 두 국가의 군주들 또한 자신처럼 '그'에게 미쳐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신하들도 더는 자신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리라.


'그분 때문에. 더러운 창녀새끼들이...'


물론 진짜 이유를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대한 그의 존재를 은폐할 준비도 하기로 작정했다. 안 그래도 지금은 자신이 던진 주제 때문에 신하들도 미처 수도에서 화제가 되었던 '그'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이제 곧 분위기가 진정되면 슬슬 그에 관해서도 언급을 시작할 것이 뻔하니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마왕 때문에 군대와 물자를 끌어모으고 요새를 보수했던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지금 성급히 소집을 해제하기보다는 정 내 말이 의심된다면 앞으로 세 달, 세 달만 더 계엄을 유지할테니 추이를 살펴보고 다시 이견을 말하도록."


"명을 받드옵나이다!"


"국왕 폐하 만만세!!!"


여왕이 제시한 절충안에 기분이 찝찝하면서도 섣불리 극명한 반대를 표하기는 어려웠던 신하들은 일단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한 후  침전하는 그녀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다시 저들끼리 분주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이레시아의 머릿속에는 그를 지켜내고 반드시 독점하겠다는 다짐으로 가득찼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모든 걸 내주었지만 결국 자신은 지켜내지 못했던 그에 대한 질적한 감정을 내뿜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