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 구름 조금


일기장에게.

오늘은 화이트데이야. 지난 밸런타인데이 때 현민이한테 초콜릿 줬다고 한 거 기억나? 그게 걔가 받은 유일한 초콜릿이었지. 정말 그때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얼마나 귀여웠는지 볼을 마구 꼬집어주고 싶었다니까.

근데 오늘 그 녀석이 기특하게도 날 위해서 사탕을 갖고온 거 있지? 저번 달의 답례라면서. 마음씨가 얼마나 예뻐? 근데 너무 귀여워서 한번 쓰다듬어주니까 얘가 또 날 살짝 밀치는 거야. 부끄러운 건지 낯설어서 싫은 건지 모르겠어. 하지만 아마 후자 아닐까? 주변에 여자라고는 걔네 엄마랑 나밖에 없으니까. 그 이상 있을 리가 없잖아?






3/18 비


일기장에게.

우산을 안 가져와서 비를 쫄딱 맞은 현민이를 본 적 있어? 비맞은 강아지마냥 완전 시무룩해있는 게 너무 귀여웠다니까! 젖은 것만 아니었으면 확 껴안아줬을 거야. 대신 우산을 같이 쓰면서 같이 팔짱은 끼고 갈 수 있었어. 정말, 현민이는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게 맞다니까. 현민이도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할말없다는 듯이 축 처지더라고.

근데, 내가 팔짱 끼고 가니까 말은 싫다고 하면서도 내가 더 세게 잡아도 밀어내지도 않더라. 귀도 살짝 빨개지던데, 혹시...?


헤, 설마. 그럴 리가.

게다가 그렇다고 해도 나 호락호락한 여자 아닌데. 쉽지 않을걸.






3/22 맑음


일기장에게

대체 뭐부터가 잘못된건지 모르겠어.


여느때처럼 저녁에 현민이가 노트 필기한거 바로잡아주고 있었는데, 내가 하여튼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 라고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그만하라는거야. 자존심상한다고. 그래서 나도 그게 사실아니냐고 받아쳤거든? 그러니까 막 화내면서 따져들었어. 자기도 바보 아니라고, 너 없이도 잘사니까 그따위 취급 그만하라고.

그러고는 울것같은 표정을 하더니 갑자기 나같은 사람은 싫다면서 가방들고 뛰쳐나가는데...

아니 평소에는 그렇게 말해도 그냥 실실 웃던애가 갑자기 왜그런거냐고. 집에 무슨일 있는건가? 그럴수도 있는게 걔가 그렇게까지 심한말 하는걸 유치원때부터 지금까지 같이지내면서 한번도 본적이 없거든. 게다가 친한친구라고는 나뿐이니까 다른친구들이랑 싸운것같지도 않고.


근데 그말은 심했어. 나 없이도 잘살거라니.. 말도 안돼.







3/


씨발년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어

가만안둬 잡아서죽여버릴거야







3/28 구름 조금


일기장에게.

미안, 한동안 일기를 못 썼네. 생각을 좀 할 게 있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 깊게 알 필요는 없어. 곧 해결볼 거니까.


말도 안 되지. 현민이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게. 근데 있더라고. 그것도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점심시간에 현민이를 불러놓고는그씨발좆같은년이나몰래그더러운아가리로고백하ㄴ



미안. 그 모습은 다시 떠올리기가 싫네.

근데 또 웃긴 건 뭔지 알아?


현민이가 그 고백을 받아줬어.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잖아? 겨우 몇 번밖에 본 적 없는 선배가 고백한 걸 받아준다고. 그럼 나는 뭐야?


내가 더 예전에 만났어.

내가 더 오래 알고 지냈어.

내가 더 많이 알고 있어.

손도 내가 먼저 잡아봤어.


그런데 왜?

왜 내가 아니라 그 년이야?


바로잡아야겠어. 다 잘못된 거야. 내가 바로잡아야 돼.


현민이는 순진한 애야. 이제 막 고등학교에서 사람들 만나기 시작한 완전 꼬마라고. 내가 옆에서 안 챙겨주면 눈 뜨고 코를 베여도 모를 걸?

그 년도 말이 우등생이지, 딱 봐도 양아치같이 생긴 년이야.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년한테 순한 현민이가 속아넘어가다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 보나마나 1달도 안 돼서 어장관리에서 쫓겨나든가, 자기 말만 듣는 노예처럼 만들어서 자기 마음대로 망가뜨리려고 할 거야.


그렇게는 안 되지.


내 말이 틀리지 않았어. 현민이는 나 없으면 못 살아.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해. 내가 그 년한테서 구해주면 현민이도 자기가 틀렸다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거야. 그 다음에는 고백하게 둬야지. 진짜 고백 상대에게.


그 년은? 음... 처리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둔 게 있긴 한데,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려나. 어찌됐든 대가는 확실히 치르게 만들어야겠지?

어디서 뭐 하는 년이든, 우리 현민이를 데려가면 가만 안 둬. 그 년도 곧 있으면 뼈저리게 깨닫게 될 거야.



이제 2시간 남았네. 행운을 빌어줘.






3/29


왜?

도대체 왜?

왜 내가 싫은거야?

내가 구해줬잖아.

그 영악한 여자로부터 건져준거잖아.

왜 나를 무서운 여자 취급하는거야?




아니야.

내가 싫은게 아닌거야.

너무 갑작스러웠잖아?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거야.


시간이 필요해.

홀린 마음을 제정신으로 돌릴 시간을 만들어야돼.

그러면 원래대로 돌아올거야.

다시 나만 바라보게 될거야.






4/1


현민이의 정신을 되돌려놓기 위한 방법들을 사흘째 시도하고 있지만 진전이 없어. 거기다 주말이 끝나는 바람에 현민이가 실종된 것도 모두가 알게 됐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풀어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어. 조금 강한 방법을 쓰는 수밖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나면 현민이도 이해해줄 거야.






4/6


정말 이상하다.

갈수록 현민이의 반응이 더 나빠지고 있다.

이제는 나에게 하는 말의 절반이 욕이 되어버렸다.

나는 정말 현민이를 생각해서 하고 있는 건데... 결국 대판 싸우다가 주먹이 나가고 말았다.

다른건 몰라도 주먹으로 맞은건 현민이도 처음이었다. 많이 충격받은듯 했다.

나도 별안간 씁쓸해졌다. 처음 데려왔을때 귀엽던 얼굴이 어느새 눈물자국만 가득해있었다. 이러려고 구한게 아닌데.






4/


내잘못이 아니다.

현민이말처럼 내가 미친것도 아니다.

백프로 현민이잘못이다. 아니, 그때 그년이 가장 책임이크다.

그걸 돌려놓으려는것도 사랑이지. 현민이도 언젠가는 인정해줄거다.

그리고 어차피 그정도 베인상처는 쉽게 아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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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미안해내가잘못했어미안해미안해아니야거짓말이야이럴리가없어현민아아니야아니야아니야제발제발제발제발현민아미안해미안해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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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갤에서 누가 올린 아이디어 가지고 몇 시간 끄적거려봤음. 쓰다보니 엔딩이 이거;;

뭔가 자신만만하던 소꿉친구가 눈돌아가는 모습을 더 확실히 연출 못한게 아쉽긴 하지만 단편인데 뭐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