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내 몰골이 어땠는진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눈 앞의 커다란 짐승은, 장정 여럿을 숨결 한 방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콧방귀를 가볍게 뀌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나였지만 그 괴물의 눈에 띄지 않게 슬금슬금 기어가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던 것은 기억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내가 풍기는 살점의 냄새 때문이었나? 아니면 기어가는 동안 몸에 부딪힌 자갈 소리 때문이었나?
곧 내가 몸을 숨겼던 바위 위에서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고, 여름 바람 같은 뜨거운 숨결이 나 머리카락을 휩쓸었다.

이를 떤 채 올려다 본 그곳에는, 커다란 뱀의 머리가 발톱으로 바위를 으깨며 나를 향해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 황금빛 섬광을 내뿜는 용은, 그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내 화염을 맞고도 살아남았는지 궁금하구나, 작은 살코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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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자면,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여관을 들락거리며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여관을 들어선 나는 자리에 앉아 주인장에게 에일 하나를 주문했다. 비싼 술은 많이 마셔봤지만, 태생이 촌놈이라 그런지 이런 여관에서 파는 싸구려 에일이나 사과주가 입맛에 맞았다.


"오늘은 일거리가 좀 있습니까?"


여관 주인은 언제나처럼 말 없이 엄지로 입구 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일행을 가리켰다. 단단히 싸맨 복장을 보아하니 기사나 모험가보단 용병 일행에 가까운 듯 했다.
주인장에게 잘 마셨다며 인사하고 은화 몇 푼을 쥐어준 다음, 용병 일행에게 다가갔다.


"길잡이를 찾고 있습니까?"


일행은 총 다섯 명이었다. 하나같이 얼굴에 흉터 하나씩은 남기고 있는 것을 보아 꽤 험난한 인생을 겪은 듯 했다. 무거운 분위기에 살짝 위축이 되었다.
그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일어나 내 앞에 섰다. 어찌나 큰지 내 키가 큰 편이 아님을 감안하더라도 머리 두 개를 더 얹어야 그 남자의 키가 닿을 정도였다.


"당신이 길잡이 로빈이오?"

"이름까지 알고 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생긴 것과 서 있는 것만으로도 험악한 분위기를 내뿜던 그 남자는, 갑자기 활짝 웃음을 보이며 내 손을 잡아 악수했다.


"당신 이야긴 이 주변에서 꽤 유명하다오. 웬디고들이 사는 설산에 간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오."

"재주는 빨빨 돌아다니는 것과 수다 떠는 것 밖에 없어서요."

"듣던 대로 유쾌한 친구로군. 마음에 들어."


대장은 허허 웃으며 겸상하자며 손짓을 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의자 하나를 테이블에 붙여 앉았다. 뒷통수에 주인장이 '나갈 때 제자리에 돌려놓고 가' 라 말하는 듯한 시선이 꽃혔다. 손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며 테이블 안 쪽으로 고개를 붙였다.


"어디를 안내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고산을 넘어 북동쪽으로 가려고 하오."


대장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에 검지로 북쪽과 북동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쪽에서 노드리치 제국과 오스틀리케 왕국이 전투를 벌였다 하더군. 우린 이 곳에서 한 탕 챙기려고 하오."

"도끼날 바짝 세우셔야 하겠군요."

"전장에 굴러다니는 전리품만 주워도 두둑하지."


대장은 클클대며 국경 아래의 고산을 가리켰다.


"우리는 누구보다 한 발 앞서 일거리를 선점하고 싶소. 그러려면 가장 빠른 방법은 이 고산을 넘는 게지. 하지만 이 산맥은 산 하나만 넘으면 국경이 바로 보이지만 그 산을 넘기가 험난하다 들었소."

"그래서 제가 필요한 거죠."

"그래. 그렇지! 그래서 당신을 찾은 거지!"


대장은 또 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웃음이 많은 사람인 듯 했다.


"그렇다면 언제쯤 산맥을 넘을 생각이십니까?"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넘고 싶지만, 당신도 준비가 필요하지 않소. 이틀 뒤에 이 여관에서 다시 보도록 합시다. 의뢰 비용은 선금 반에 나머진 후불로 해도 되겠소?"

"선금으로 받을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환영이죠."

"금화 다섯 냥 정도면 충분하겠소?"

"아량이 그 몸집만큼 넓으시군요, 대장님."


우리는 크게 한 번 웃으며, 이틀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악수한 뒤 헤어졌다.

이 때엔 몰랐다. 그냥 거절하고 나왔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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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건 제법 순조로웠다. 그 산을 오른 것은 그 때가 세 번째였고, 체력이 달려 빌빌대는 모험가들이나 갑옷 때문에 헐떡이던 기사들과는 달리 우락부락한 이 용병들은 생긴 것 만큼이나 듬직하게 산을 올랐다.

좁은 협곡을 지나고, 외줄을 타는 것과 같은 얇은 잔도를 지나 마침내 산 중턱에 올랐을 때, 우리는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적절한 공터에 캠프를 세웠다.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양고기를 구우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용병들의 모습은 마치 곰과도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던 것을 참았다.
대장은 적절히 익은 듯한 양고기 다리 하나를 나에게 주며 물었다.


"오르기 엄청 버거운 산이라 들었는데, 의외로 중턱까지 술술 올라왔구려."

"보통 사람이면 중턱도 오르기 전에 나가 떨어지죠."

"흠, 약골들이 주변에 널렸나 보구먼."


대장도 어느 새 양고기 하나를 집어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그는 음식을 씹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당신, 몸에 이것저것 많이 두르고 있구먼. 그게 다 뭐요?"

"호신용 부적들과 장신구들입니다. 이 놈들 덕분에 목숨 여럿 건졌죠."

"허허, 눈에 안 띄게 조심하시오. 나였으니 망정이지 좀 악독한 놈들은 바로 목을 따고 탈탈 털어갈 거요."

"이 놈들 덕분에 그런 놈들한테도 목숨 여럿 건졌죠."


대장은 입에 물고 있던 양고기가 튈 만큼 크게 웃었다.


"그런데 이 고산에는 괴수 같은 건 없소? 이런 산이라면 그리폰이나 와이번 같은 놈은 있을 줄 알았는데."

"산 정상 쯤에 와이번이 사는 건 봤습니다. 하지만 전에 안내했던 기사 일행이 토벌했죠. 지금은 기껏해야 곰이나 코볼트 같은 것들만 살고 있을..."


그 때였다.
쿵 하고 지축을 뒤집는 소리.
비극을 알리는 소리가 사방을 뒤흔들었다.


"무, 뭐야!?"

"저도 모릅니다! 전에 산에 올랐을 땐 이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쿵! 쿵!
다시 산이 울리고 바닥의 자갈들이 솟구쳤다.


"이런 제기랄, 전투 준비!"


지진과도 같은 진동이 멈췄을 때, 공터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들리는 소리라곤 바람 이는 소리, 거친 숨소리, 철기들이 잘그락거리는 소리 뿐이었다.

곧 하늘에서 그늘이 일며, 거대한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용!? 저런 건 전혀 보지 못했어요!"

"우라질! 그렇다면 최근에 이 산에 둥지를 튼 건가..."


용병들은 무기를 고쳐 잡고 대장의 신호를 기다렸다. 대장은 공터 길목을 막아선 저 거대한 용과 대치하였다.

다리가 저리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여태껏 산을 올랐지만, 용병들에게 말했다시피 산양, 코볼트, 기껏해봤자 천산갑이나 곰, 와이번 같은 것들을 만날 뿐이었다.

그런데 용, 하필이면 용이라니.

자그마한 기대를 용병들에게 걸었다. 그래도 체력 좋고 숙달된 이 용병들이라면, 우리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난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짐들을 주워 담고 퇴각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 희망이 헛된 것임을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용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듯 싶더니, 크게 부푼 그 볼과 입에 불똥이 틱틱 튀는 것이 보였다.


"화염입니다! 피하세요!!"


하지만 말을 꺼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곧 어마무시한 열기가 산 중턱을 휘감았고 그 엄청난 열기와 광원에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땅을 기며 몸을 숨길 바위 그늘을 찾았다. 화염 저항을 부여해주는 아뮬렛은 슬슬 금이 가고 있었다.

뜨겁다. 점점 타오르는 불길이 살결을 간지럽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서둘러 전방의 바위 그늘에 몸을 던졌다.
웅크려 참으로 오랜만에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신이시여, 여기서 살아 나간다면 매 주마다 교회에 봉헌하겠습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신이 기도를 들어 주었는지 우연인지, 아뮬렛이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기 직전, 불길이 멈췄다.
슬그머니 바위 그늘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처참했다. 방금까지 웃으며 양고기를 뜯던 용병 일행은 시체도 남지 않은 채 살 타는 냄새와 철 녹는 냄새를 풍기며 바닥에 검게 들러붙어 있었다. 용은 주변을 천천히 기웃거리며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기서 걸리면 끝장이다. 겨우 살아난 목숨을 다시 저승사자 앞에 내놓고 싶진 않았다.

나는 포복 자세로 천천히 땅을 기었다. 하다못해 타지 않은 짐이라도 챙겨 산둥성이를 내려가야 배가 곯기 전에 마을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듯, 앞서 말했듯이 용은 섬뜩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내 앞에 서 있었다.


"신이시여..."


아랫도리를 축축히 적시며 내가 되뇌인 말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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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쓰던 거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안 풀려서 어제 생각났던 소재로 심심풀이 삼아 썼음
생각나는 대로 써재낀 거라 계속할 수도 잇고 안 할 수도 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