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나쁜 거예요."



짝.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간다. 날 침대에 속박하고 있는 수갑과 사슬이 보인다. 얼얼한 얼굴을 다시 위로 올리자 왠 여자가 분노로 가득찬 눈길로 날 위에서 노려보고 있었다.



"아랫놈들이 다 보는 앞에서 무릎까지 꿇었는데도."



짝.

또 다시 얼굴이 왼쪽으로 처박힌다. 이번에는 속박된 팔과 함께 저 멀리의 유리창으로 구름 사이로 솟아난 타워와 높은 건물 사이를 에어카들이 물고기처럼 헤치고 다니는 절경이 보인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날 쓰레기 버리듯이 내 고백을 거절했죠."



짝.

이번에는 더 쌨다. 다시 얼굴을 돌리니 눈물을 흘리며 날 바라보는 여자가 보였다. 갈색의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작고 동그란 귀염뽀짝한 얼굴. 그 아래로 야시시한 속옷과 스타킹을 입은 몸매는 매우 치명적이다.



얼굴이고 몸매고 나쁠게 하나 없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리고 그 미녀의 매끄러운 양손은 내 배에서부터 가슴, 쇄골을 서서히 오르더니 이내 내 목을 감쌌다. 그리고 작은 그녀의 손은 압도적인 힘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커읔... 으어억!"



숨막혀 죽을 거 같다. 발버둥을 처도 사지가 결박되어 있어 몸을 파닥파닥 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녀의 작은 고양이 같은 귀여운 얼굴은, 지금은 분노한 맹수의 시선을 지은 채 점점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왜 거절한 거예요? 왜 도망가려 했어요? 수백 개의 성단, 수백만의 함대, 수억 개의 행성까지! 사랑만 주면, 내가 가진 걸 전부 주겠다고 했는데!"



"커거억...! 사...사..!"



그녀의 하체가 내가 못 움직이도록 내 하체를 누른다. 블랙홀처럼 어둡고 격렬한 분노를 품은 그녀의 눈동자는 머리카락이 얼굴이 스칠 거리에서 내 눈과 시선을 맞댄다.



"그녀ㄴ... 어...ㅅ...."



그녀의 조그마한 얼굴이 흐려진다. 귀에 가녀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몸에 힘이 풀려간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걸까.







**







난 별과 별 사이를 떠돌며, 누가 뭘 찾아달라거나 누군가를 어떻게 해달라면 해주고, 그냥 돈되는 일이면 다하는 그런 사람이였다.



돈도 없고, 내 고향인 지구 연합에서는 범죄자 신세였으니 나에게 안성맞춤이였다.



"지옥에서 조상놈들 후장이나 빨아라! 아하하하!!!"



"유탄 작작쏴, 씨발년아!!"



그렇게 우주를 떠돌다보니 싸움도 하고, 빵야빵야 총질도 하면서 난 얀진이라는 능글맞은 난사광 년도 군식구로 들였다.

전투용 강화인간 2세대 출신이라 총쏘고 패는 건 잘했고, 정비소 일을 해서 그런지 우주선 수리도 잘했다.



하지만 워낙 사고가 많다보니, 돈은 돈대로 날리고 사는 나날이라 그리 살기가 시원치는 않았다.



그리고 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게 이 일에 찌들어 권총으로 백 미터 밖의 사람을 맞출 수 있게 될 즈음이였다.



"그러니까 의뢰자가.... 너라고?



"무례하다! 감히 이름 없는 떠돌이 주-읍읍!"



그 만남은 방랑자, 범죄자들이 다 모인 우주 정거장 구석의 한 시장에서 시작됐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제국의 어린 귀족 아가씨.



그 자리에서 '나 귀족이오' 라고 티내는 그녀를 안 끌고갔으면 저 귀여운 미모에 귀티나는 아가씨는 아주 끔찍한 꼴은 다봤을거다.



"이거 놔! 천 것 주제에 감-으브브븝!"



"쉿."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무리들에게 걸렸으면 더더욱. 그 수상한 무리들은 잠시 인파 사이를 헤집더니, 우릴 못 보고 지나갔다.



"휴, 드디어 갔네."



"으므므믑!"



만남부터 나와 그녀의 만남은 한참 일그러져 있었다.



"연합 아래에 있는 데레 왕국으로 가달라고, 요?"



"그러하다. 본녀의 오라버니를 만나야 하는데, 여객선을 타고 여유를 즐길 상황이 아니기에 이 음지까지 당도하였도다."



그녀의 의뢰는 오빠를 만나기 위해 우주선을 빨리 타야한다고 우리 꺼를 태워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난 다짜고짜 저러는 미친 싸가지에, 그냥 태우지 않으려 했다.



"이 반지와 목걸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녀가 선금으로 낸 아름다운 문양들이 새겨진 반지와 목걸이는 내 불만을 잠재웠다. 가뜩이나 가기 직전인 고철 우주선의 추진기와 엔진이라도 바꾸기 좋은.







**







그런 이유로 건조된지 80년은 된 엑소더스 호의 탑승 인원은 1명 더 늘게 되었다.



"고전적인 외관에 비해 안은 깔끔하군."

"식사는 언제 나오지?"

"연합의 서민들은 다 이런 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나?"



제국의 귀족 아가씨는 애로사항이 차암 드럽게 많았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선금이라도 먹었으니 그냥 먹튀할까도 생각했다.



"자, 여기. 아리따운 귀족 아가씨?"

그래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난사성애자 얀진의 그 오두방정함이 그 아가씨와 아주 잘 어울리다보니 나에게 가는 관심이 줄었다. 저렇게 식탁에서 과자에 차까지 같이 먹다니.



설원같은 긴 백발과 붉은 달같은 눈을 가진 여걸과 갈색 단발에 검은 눈을 반짝이는 귀여운 미녀의 조합은 겉으로는 참 아름다웠다.



정작 그 속은 매우 끔찍하지만.



"귀족의 다례를 아는 자로군. 고귀한 귀족을 예우할 줄 모르는 누구와 다르게."

"저 친구가 사교성이 없긴하죠. 아! 오죽 친구가 없으면 가상현실에-"

"아가리 닥쳐, 미친년아!"



그렇게 왕국을 향한 항해가 시작됐다. 약간 먼길을 돌아서 가야했지만.



"연합을 지나서 가지 않으면 왕국으로 한참 돌아가야하지 않느냐!"

"다 사정이 있으니까 그냥 가시죠? 시간도 많으니까 유람한다 생각하쇼."

"얀순 아가씨가 이해좀 해주세용. 우리 얀붕이는 거기서 큰일을 저질러서, 잡히면 깜빵에서 평생 썩거든요."

"얀진 이 시발년아!"



그 과정에서 내 전과를 저 아가씨가 알게된 건 매한가지다. 이후로 그 아가씨는 미친 난사광인 얀진을 누나처럼 잘 따랐지만, 날 은근히 피해다녔다.



그나저나 성씨 중에 얀이라는 성이 그리도 흔했었나?







**







이후로는 연합의 공식 항로가 아닌, 다른 3국의 항로를 거치거나 무법지대의 항로를 통해 워프를 하면서 별과 별 사이를 날라다녔다.



[거기 구형 우주선! 반복한다! 즉시 함선을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한다!]

[이 새끼들아! 당장 거기서! 그 아가씨만 넘겨!]



"함장이여! 빨리! 더 빨리 몰거라!"

"이게 최대 속력이야! 할 거 없으면 엔진실가서 냉각로나 좀 봐봐! 씨바알!!!"

"팡팡 터진다! 끼야하!!!"



근데 어째선지 다른 나라의 항로에서는 짭새선이, 무법지대에서는 해적새끼가, 때로는 왠 최신식 함선들이 뒷구녕에 붙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속력으로 도망가길 수십 번, 80묵은 엑소더스 호는 마개조된 상온 핵융합 엔진과 펄스 추진기를 달고 인생 최후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오, 제발 기계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여, 제발 엔진이라도 살려주ㅅ.... ㅣ발!! 추락한다!"

"으아아!! 귀족 살려!"

"끼얏호오!!"



그렇게 목적지까지 40광년 정도 남은 순간, 엑소더스 호는 엔진이 멈춰버리며 숨을 멈췄고, 인근의 시뻘건 행성의 중력에 이끌려 시속 수백 km의 속도로 지표면에 투하됐다.



"으아아.... 우리 살아있냐...?"

"아빠.... 보고시퍼..."

"휘우! 재밌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도달한 곳은 인간이 숨쉴 수 있는 행성이였고, 비상착륙장치가 가동하면서 안전하게 핏빛의 바닷물이 넘실대는 해안가에 불시착했다.



행성 분위기도 좆같고, 이제는 쫒기다 못해 이렇게 엔진이 작살난 채 처박히기까지 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시발년아. 솔직하게 안 말하면, 대갈통에 빵꾸 낸 후 물고기밥으로 던질 줄 알아. 혹시 정체가 뭐신지요?"



지구 시대에는 이런 말이 있다던데, '빠따를 들고 친절한 말을 하면 상대방이 잘 들어준다' 라고.



그 고대의 격언을 변형시켜, 플라즈마 피스톨을 철컥거리며 손에 쥔 채로 으르렁거리니,

평소에는 거만한 그 아가씨의 얼굴이 지금은 겁에 질린 채 일그러져 있었다.

그 애처로운 눈빛은 얀진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내 불같은 분노에 얀진도 별 수는 없었다.



"나, 난. 라우스 제국의 다섯 ㄷ,대공 중-"



"잠깐, 시발 뭐?"



라우스 제국. 과거 지구력 2100년 대에 지구 연합 정부가 보낸 초기 개척선 다리호의 탑승객들을 시조로 삼는 봉건제 국가다.



2천 년이 지난 지금, 제국은 사실상 공국의 모임회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공국들의 군사적, 경제적 비중이 컸다.



그중에서 다섯 대공은 하나하나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사실상 황제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얀이라는 성을 쓰는 가문이라면-



"얀챈 대공국의 얀 가문?"



"....."



인터넷의 정치 관련 영상에서 나오던 그 오만한 여귀족과 닮은 귀여운 여자가 겁에 질린건 의외로 볼만했지만, 내 인생도 끝나기 직전인걸 느꼈기에 더 즐길 수는 없었다.



"얀진아. 빨리 배 고쳐. 바로 제국으로 돌린다."



"잠깐! 이미 돈 받았지 않았느냐!"



"죄송하지만, 공녀님. 님 애미가 너 찾는다고 우리 다 조지려 해서 안되겠네요!"



"모, 몰라! 돈을 백 배, 아니 천 배 더 줄테니 당장 왕국으로 우주선을 몰아!"



"씨바 생각해보니까 니네 오빠가 왕국 여왕의 남편이잖아! 아이고야, 대공의 딸이라는 년이 가출이나 하다니."



우릴 쫒던 해적, 경찰들은 아마 대공작이 뒤에서 시켰을 것이고, 그 수상할 정도로 최신식인 함선들은 분명 대공국의 첩보선이었을거다.



인정하긴 싫지만, 저 세상 물정을 1도 모르는 귀족 아가씨는 태어날 때부터 뭔 유전자 개조를 해대서 맨손으로도 목을 딸 수 있다. 지는 그걸 모르지만.



분명 그 얀챈 대공이라면 불법적이든 뭐든, 집나간 딸을 분명 잡아올거다. 그 과정에서 나와 얀진같은 떠돌이는 눈에도 안들어 올거고.



자기 사정만 생각하는 저 아가씨는 그것도 모르고 배째라며 막무가내로 나 앉아 있었다.



"뭐, 뭐야 그거?"



구석에서 비상용 동면관을 가져오자 그 소위 대공의 딸이라는 여자의 얼굴이 매우 긴장되어있었다.



"여기서 대략... 세 달 쯤 잠들어있으면 편할꺼야. 그러니깐 들어가십쇼! 아가씨발년아!"



"싫다! 싫어! 돈이건 작위건 다 줄테니 제발 보내다오! 나의 벗 얀진이여! 도와주게!"



"....."

평소에 지랄발랄한 난사광인 얀진이 측은하게 자신을 보자, 결국 그 아가씨는 필사적으로 버티면서 울고불고 사형당하는 죄수마냥 살려달라는 듯이 빌고 있었다.



"이렇게 빌게요! 오빠! 주인님이라고 부를게요! 제발요! 절 마음대로 써도 좋으니까 제발...!!!"



이젠 자존심까지 버리고 비는 꼬라지가 참으로 우스웠다. 근데 쟤가 그동안 잘했다면 모를까, 그놈의 귀족 타령하며 은근 무시하고, 지금은 우주선이 반병신이 된 게 자기 때문인거걸 못 깨닫고 저러고 있었다.



".....야, 그냥 태워다줘!"

그런데 얀진 이 미친년이 그때 갑자기 태워주자고 했다.



"너 미쳤냐? 저 귀족년 안 넘기면 우리 목숨도 장담 못해!"



"그렇다고 이런 작고 불쌍한 아가씨를 가혹한 어머니에게 넘기자고? 이렇게 싫다는데?"



"그 어머니가 우리 둘다 죽일지도 모른다고. 이년아."



"노 리턴, 노 리스크! 몰라? 감수하는 거 없이는 얻을 것도 없다. 그리고 이제 거의 다왔는데 되돌아가는 전기값이 더 들껄?"



"하씨, 그래도..."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 바닥에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며 주인님 타령하며 비는 아가씨가 준 돈은 열라 많았었다. 엔진과 추진기를 교체하고 개조하는데 거의 다 쓰기는 했지만, 대략 6개월 간 휴양지에서 먹고 놀수 있는 돈이었다.



그 돈보다 100배는 더 많은 돈이라면, 신세 고치기에는 충분했다. 근데 죽으면 다 도루묵 아닌가.



"앞으로 쫓기는 건 어쩔건데?"



"40광년만 더 가면 왕국이잖아. 그 오빠라는 사람도 지 애미랑 좋은 사이는 아니라서 가면 바로 도와줄껄? 그리고 좀 북쪽의 외곽지대, 그래. 거긴 해적들도 사람없다고 안 오는 곳이니까 돌아서 가긴 딱 좋을걸."



그녀 딴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논리를 짯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다지 설득은 안됐다.



"암튼, 얀순이 보낼 생각이면 나도 우주선 안 고칠 거야."



하지만 얀순이랑 어느새 정이 들었는지, 저렇게 파업 선언을 하니 별 수가 없었다.



"졔발료.... 뭐든지 다 햘떼니까.... 흐윽."

"아이고, 우리 아가씨! 뚝! 예쁜 얼굴 다 상할라, 여기 좀 닦자. 내가 어찌저찌 해서 곧 오빠 만나러 갈테니까, 뚝 하세요."

"고맙ㄷ- 아니, 고마워요. 언니, 흐으윽.."



얀진이 달래주니, 이제 좀 칭얼거리는 소리가 작아졌다. 마치 도도한 고양이가 주인의 손길에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이후로, 우주선을 고쳐 행성을 탈출한 후 얀순은 '절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말을 한걸 후회하게 됐다.



"왜! 내가! 천한 것들이나 할 짓을..!"



엑소더스 호에는 소박하게 나마 매력과 귀태가 나게 입던 대공국의 영애 얀순은 어디가고,

작업복을 입은 노가다꾼 얀순이 땀과 먼지에 절여진 채 부품들을 옮기고 있었다.



"엄마 보고싶어?"

"....."

"저기 레이져포 빠떼리 갈아끼우고, 저 구루마랑 같이 중력유지장치 부품들도 저 밑의 창고에서 가져와."

"알, 알겠다."

"직원 주제에 말대꾸?"

"... 알겠어.. 요..."



그렇게, 얀순이 가문의 명예를 걸고 선금의 천 배 정도의 보상금과 계약직 선원으로 일한다는 조건으로 엑소더스 호는 다시 왕국을 향해 진로를 향하기 시작했다.



"조종간에 저거, 버튼 누르고 앞으로 당겨."

"이, 이렇게... 요?"

"어, 어. 그렇게 그렇게. 잘 하네."



난 무심결에 때 묻은 작업 장갑을 낀 채 얀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미안. 머리 다 상했네."



하지만 어째선지, 얀순은 윤기나는 갈색 머리가 때와 먼지에 더럽혀졌어도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였다.



"아뇨, 괜찮아요."

"여기 수건 있는데 이거 써."



그렇게 말하고는 난 옆에 걸린 수건을 얀순에게 준 다음, 엔진실로 갔다.



"흐읍...... 하."



뒤에서 약간 천에 막히는 음습한 숨소리가 들려서 뒤를 봣지만, 거기 있는 건 그냥 머리를 닦는 얀순이가 있었다.



그렇게 얀순에게 여러 잡일도 시키면서 우주선 수리하는 법, 우주선 모는 법도 가르쳐주면서 그녀도 이제는 엑소더스 호의 일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1인분을 하게 되었다.



왜 그녀가 가출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애초의 그녀의 어머니가 쌓은 악명이 엄청나다 보니.



"이렇게 하면... 완성!"



얀순은 근본부터가 좀 특이하다보니, 힘쓰는 거나 머리쓰는 일이나 다 잘했지만, 그중에서 요리를 매우 잘했다. 그냥 후라이팬 몇 번 달그락 거리고, 재료들만 몇 번 넣고는 순식간에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냈다.



"히야, 우리 얀순이 정말로 잘만들었네!"

"별걸요."



얀진과 얀순은 피만 안 이어져있을뿐, 사실상 자매 사이라 말해도 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얀진이한테 요리좀 가르쳐줘라, 얀순아. 저 쇠밥통은 요리실력을 기계 다루는 재주랑 바꿔.. 케게엑!"



오늘도 얀진은 내 목을 졸랐다. 이제는 뭐, 거의 연례 행사나 다름 없었다.



"니 오늘 진짜 죽었어!"

"미친..! 힘만 쌘.... 등신려...나!"



하지만, 얀순이가 오면서 이제 얀순이 얀진을 말리는 것도 반복되었다.

"언니! 그만두세요! 그러다가 오빠 죽어요!"

"오빠? 얀붕 이 새끼가! 감히 가련한 귀족 영애를 타락시켰구나!"

"헤으으윽...! 나 지짜.... 주거욧...!"







**







그렇게 엑소더스 호의 일상은 평범했다.

얀진이 날 줘 패거나, 얀순이 워프 항법 장치를 잘못 건드려서 가스 행성에 처박힐 뻔하거나, 하는.



그럴 줄만, 알았다.



[언니!! 정신 차려요!! 언니!]

"얀순아! 뭔일이야!!"

[언니가! 절 지키려다가... 가슴에 파이프가 박혀서, 일어나질 않아요..!]



콰광하는 둔탁한 진동이 우주선 전체에 울린다,



"일단! 파이프 톱으로 자르고 거기 3층에 있는 붉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왠 관이 있거든? 거기에다 얀진이 넣고 생체 회복이라는 버튼 누르고 시작버튼 눌러! 그럼 끝이니까!"

[알았어요! 끝나고 바로 조종실로-]

"오지마! 거기 가만히 있어! 거긴 안전하니까 그대로 콱 박혀 있어!"

[네? 하지만-]



"반박은 안 받는다!"

난 존나 박력있게 무전을 끊은 다음 조종실로 달려가 조종간을 잡고 전방위 카메라로 우주선 바깥 상황을 보았다.



그리고 별빛빼고 작은 천체조차 관측되지 않는 공허에, 5km 크기의 우주선 하나가 측면을 보인채로 겨우20m 길이 밖에 안되는 엑소더스 호로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보호막 내구도 0%]

[함선 좌측면 끝 3층, 2층 복도, 우측면 끝 복도 완파!]

[추가적인 손상 발생 시 함선 중파 위험!]



붉은 글씨로 살벌한 문구를 띄우는 창 사이로 난 화면을 띠딕띠딕 만지며, 우주선이 최소 도망이라도 칠 수 있게 최소한의 동력만 돌린 채, 모든 동력을 추진기와 워프 드라이브에 돌린다.



지금 함선 상태가 영, 메롱메롱 해서 이게 버틸런지. 난, 제발 최소 함선의 형태라도 온전하길 바라며 워프 드라이브를 켰다.



그리고, 점차 별빛들이 찌그러지며 뒤로 미끄러지듯이 흘러갔고, 우주선은 그 수축된 공간으로 달려갔다.

앞은 찌그러져 뒤로 간 다음, 팽팽히 펴져 뒤에서 바람을불어넣듯 지나가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







"언니... 언니... 나 때문에..."

다급히 간 대피실에서, 얀순은 눈물을 펄펄 내면서 녹색 재생액이 가득찬 재생관 속에 누운 한 백발의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 관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죽은 것처럼 누운 여자. 얀진은 등 뒤의 관 아래까지 보일 정도로 큰 구멍이 오른쪽 가슴에 뚫려 있었다.



다행이 일찍 관에 들어간 덕에 목숨은 건졌다.



"흐... 흐윽... 나 때문이야..."



얀순이는 머리를 뜯으며 자신을 자책하고 있다.



그리고 난 털썩,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난 그녀의 옆에 앉았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얀진이를 제외하곤 여자랑 그렇게 말을 해본 적이 있어야지.



그렇다고 가만이 있어봤자, 죽도 밥도 안되니, 별 수 없었다. 일단은 난 울고있는 얀순이를 안아주었다.



".... 흐읏.?"



내 품안에 안겨있어서 얼굴은 안보였지만, 울음은 멈춘 것 같았다. 이 다음에는 그냥, 등을 토닥였다. 오른손으로 마치 애기 달래듯이.



그 누구나 말로만 쉬운 흔하디 흔한 구린 말과 함께.

"니탓이 아니야. 그, 그놈들이 나쁜거지"



"....."



뭔가 달래주려다가 조진 느낌이 들었다. 점차 그 느낌이 내 심장을 파고들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만가지의 후회와 번뇌가 내 뇌속에서 반복되듯이 무서웠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나하고.



"..... 흐흑... 오빠아아...!"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내 허리를 껴안으며 나에게 더욱 달라 붙었다. 저 여린 여체에 약간의 욕망이 일렁거렸지만, 저 슬픔에 잠겨 받느라고 점차 사라졌다.



"고마... 고마워요...! 으흐흑...."



그녀는 내 품속에서 그렇게 슬픔을 쏟아냈다.



그리고 내 품안에서 아마, 그 슬픔은 분노가 되어 자식이 부모를 향해 겨눈 칼을 가는 맷돌이 됐을 거다.







**







"자, 우리 얀순 대공님께서 개만도 못한 애ㅁ- 어, 그년을 죽이고 대공 작위를 계승한 기념으로. 다함께 건배!"

"아... 거, 건배!"

"말꼬라지 하곤. 건배."



평소와 비스무리 하게 상또라이 얀진이 패드립을 참으며 천박한 건배사를 내뱉고, 얀순은 당황하면서, 난 혀를 차면서 술을 마시는 날이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낡은 엑소더스 호가 아닌, 벽지 하나하나에도 은박이 입혀진 웅장한 식당이였다.



중앙에는 가문의 문양이 화려하게 걸려 있었으며, 몇백 미터 길이의 창문에는 마치 무릉도원처럼 구름이 걸린 거대한 빌딩들이 고고하게 서있었다.



차마 말로 표현하기에는 그 어느것도 부족했다.



엑소더스 호 공격 사건 이후, 얀순은 왕국으로 가서 오빠를 만난 다음 왕국과 대공국 내의 일부 가신들, 돈 좀 굴릴 생각으로 합세한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어머니, 얀챈 대공과 10년 간의 전쟁을 벌였다.



나와 얀진은 얀순의 경호원으로 재계약되어 그녀를 보조했다.



명분은 지어낼 필요가 없었다.



전쟁 이전에 공국 내 언론에서 자신의 이름인 '얀희'를 칭호도 없이 적었다고 있는 죄, 없는 죄를 만들어 줄줄이 엮은 후, 함선용 고사포로 자기 반대파 수십 억명을 천국으로 보내버려서 그냥 명분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도자로는 옛 카이사르의 재림 수준이었지만, 애미 및 인간으로는 이 세상 존재가 아니셨던 얀순이 어머님은, 얀순이의 인맥빨과 대신들의 뒤통수 세례로 결국 10년 간의 전쟁 끝에, 수도를 따이고 항복했다.



생각해보니 카이사르도 부하한테 배때기 칼빵 맞고 뒤졌지, 아마.



얀순은 그동안 혁명군을 이끌면서 다진 지도력으로 몇 달 만에 대공국 내의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대공의 자질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편에 붙은 대신들 중 큰 놈들만 다 없애고, 작은 놈들은 그냥 작위만 박탈하고 추방했다. 그리고, 자신의 오빠를 제외한 나머지 50여 명의 형제자매들을 다 황천길로 보냈다.



그리고 작위를 딸에게 작위를 계승한 어머니는.... 차라리 죽는게 나은 형벌을 받았다.



"피고, 얀희에게 하인형을 선고한다."



"아, 아아. 안돼, 안돼, 안돼!!!"



하인형, 인간의 뇌를 신체 개조 관에 넣어서 뇌의 지능이나 인지능력, 기억, 신체를 개조해서 생체 AI로봇인 서번트봇으로 만드는 제국의 최고형이다.



자아와 기억을 완전히 상실한다는 점에서 그냥 사형이나 다름 없지만, 니가 저지른 죄는 몸으로 계속 갚으라고 수명을 최소 200년까지 연장시켜준다.



게다가 서번트봇은 제국법 상 인간으로 간주가 되지 않기에 전쟁, 인체실험, 매춘, 항로 계산, 연산용(이건 제국이 높은 수준의 AI를 금지해서 쓴다나.) 등등 제국의 온갖 곳에서 그 죗값을 다하게 된다.



특히 여자라면, 무려 그 대공으로 만든 서번트봇이면 여러 개조시술을 받아서 신체수명이 최소 천 년은 될테고, 외모도 여신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우니 아마 여러 남자들에게 격렬히 예쁨 받을 거다.



최소 몇백, 아니 천 년 동안.



"차라리 죽여줘! 제발! 얀... 얀순아 제발..!"



"오빠, 왜 그런 눈빛으로 저년을 보세요? 네?"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알듯이, 얀순이는 그런 날 웃으며 보았다. 그래도 자기 어머니가 저렇게 비는데 나만 본다는 게 참 기괴했다.



"안돼! 안돼! 제발! 부탁이...!"



어머님이 병사들의 테이저 찜질에 바닥에 부들부들 떨면서 쓰러진 후, 질질 끌려감에도 얀순이는 계속 나만 끈덕지게 봤다.



"나중에 개조가 다 끝나면 저년은 오빠한테 드릴까요?"



"안 받아. 그리고 그런 식으로 보지마. 좀 무섭다."



"무서워 하니까 더 봐야지."



"얀순아, 쟤는 영 아니야. 딴 놈 찾아."

얀진이 웃으며 말한다.



"헛소리하네, 저게."



그렇게 해피엔드.









인줄만 알았다.







**







행복하다, 정말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순간. 내 평생, 이런 때는 안 올줄 알았다.



집안에 있을 동안 우리 오빠를 제외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죄다 날 괴롭히거나 했다. 비록 불로불사에 가까운 초인의 몸일지라도, 온갖 진귀한 금은보화와 귀한 것들에 둘러 싸여 있었어도, 난 노예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



어머니는 날 무능아 취급했고, 나머지 형제들은 날 없는 놈으로 여겼다. 그래도 오빠가 있어서 궁에서의 삶은 나쁘지 않았건만, 오빠가 결혼으로 나가자 가족들의 괴롭힘은 더 심해졌다.



결국 오빠가 나간지 6개월 만에 가출한 후, 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가족들을 찾았다.



얀진과 얀붕.



얀진이 언니는 매우 친절하다. 처음에는 큰 덩치에 근육, 눈까지 빨간 여자여서 무서웠지만, 나중에는 일찍 친해졌다. 정신나간 면이 있지만 그래도 날 잘 아껴준다. 그래도 강하고 거칠어보이는 겉에 비해 속은 꽤 여리다.



얀진 언니가 울 때마다, 나도 언니를 여러 번 달래주었고, 얀붕 오빠도 언니를 안아준 적이 많다.



그리고 얀붕 오빠, 내 첫사랑.

처음에는 정말 싫었다. 갑자기 날 끌고가질 않나, 함선 상태는 작살나기 직전이질 않나, 그리고 날 총으로 협박하거나 했다.



하지만, 오빠는 친한 이에게는 끝없이 잘해준다. 비록 대인관계에는 서툴고 까칠하지만, 상대방을 잘 배려해주고 친절하다.



그리고 난 오빠에게 반했다. 나나 얀진이 언니가 힘들 때면 늘 위로해준다.



이둘이 아니였으면 10년 동안 전쟁을 이끌지도 못했을 것이고, 대공의 자리에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얀순 언니, 얀붕 오빠."



"아냐, 별걸. 아, 잠깐만. 얀순아. 어디 잠깐 자리 좀 비워도 될까?"



내가 수줍게 예예 거리자, 언니는 읏쌰 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저 화려하고 큰 문을 향해갔다. 멀리서 봐도 저 크고 탄탄한 몸매와 가슴은 엄청 부럽다.



"밑에 층에 젊은 시종이랑 만나러 가는 건 아니냐?"



"느금마요, 씨발아!"



그 와중에 얀붕이 오빠는 이 고급스러운 방안에서 상스러운 농담을 치며 얀순이 누나에게 욕을 먹었다. 그런 저질한 말임에도 왜 둘다 웃는지 마음으로 따스하게 느껴졌다.



"아이고, 저거. 또 저 지랄이네. 음, 이거 맛있다. 이걸 진짜 니가 다 만들었다고?"



"그냥 메인 요리 정도만 살짝 손댔어요."



"그동안 니한테 물건 옮기기만 시킨게 후회되네, 진짜."



얀붕 오빠는 앞에 있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딱 썰어서 먹은 다음, 와인 잔에 담긴 탄산음료를 소믈리에처럼 잔을 흔들고, 기울이다가 향을 맡은 후 조금씩 마셨다.



"푸하, 이 정도면 제국 명예 소믈리에 인정?"



"흐흐, 소믈리에 저리가라네요."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모든 걸 사랑하게 된다고 하던가. 그래서 그런지 저 스테이크를 씹어먹는 입, 포크를 잡은 오른손, 탄산이 튀는 와인잔을 잡은 왼손, 날 보며 약간의 눈치를 보는 눈, 하나같이 다 매력적이고 가지고 싶다.



지금 당장 오빠의 윗옷을 벗기고, 저 품속에 안겨서 온기와 체취를 느끼고 싶다.



하지만, 때에는 시기와 과정이 있는 법. 얀진 언니가 없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고백하기 매우 좋은 타이밍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서로의 살을 맞대고, 때로는 내가, 때로는 오빠가. 서로가 서로를 아침 해가 뜰때까지,탐하면서, 하. 상상만 해도 아래가 저려온다.



그래, 바로 하자.



"저기 오ㅃ-"



띠디디딕- 띠디디딕-



갑자기 타이밍이 참 더럽게 얀붕 오빠의 수신기에 전화가 걸려온다. 오빠는 잠시 어디를 좀 다녀와야 겠다고 말하고는 잠깐 자리 좀 비워도 되겠냐고 한다. 내가 다녀오라고 말하자 오빠는 자리를 비키며 전화를 계속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져도, 일반 사람의 몇십 배는 좋은내 귀에는 그 전화 내용이 아주 잘 들렸다.



"얀진, 왜?"



[잠깐 와.]



"어디로."



[나가서 왼쪽 복도로 쭉가면 실내 정원 나와. 거기로.]



"그래."



전화기에서 친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얀진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심장이 덜컹거리며 뜨거워졌다.



어째서일까, 왜 평소에는 친구같은 저 둘의 목소리가 이때만큼은 연인처럼 달달하고 애뜻한 걸까?







**







난 얀붕 오빠가 나간 후 몰래 실내 정원 쪽으로 갔다. 그리고, 꽤나 놀라면서도 뜨겁고, 배신감드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 둘의 옷은 바닥에 벗겨진 채 둘다 태초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라 본채, 살과 살을 맞대고 있었다.



"언제 나갈.... 흐읏! 자, 잠깐... 히잇!"



몸이 파이프에 꿰뚤려도, 총에 다리가 반쯤 날아가도, 비명 한 번 안내고 웃으며 총으로 적의 머리를 박살내던 얀진 언니는, 한 남자의 손짓과 움직임에 다리를 절고, 신음을 계속 내뱉고, 얼굴을 붉히며 쾌락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일단은 한 번만 하고."



"샤, 사람 오면 어떠... 큿!"



"여기 근처에는 아무도 안와, 얀순이가 다 보냈잖아."



그리고 얀붕 오빠는 평소에는 자신을 힘으로 압도하는 얀진 언니를 단지 손과 말, 그리고 아래의 것으로 완벽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20분 정도 함께 붙어 있었다, 그 짓을 계속 하면서. 오빠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얀진 언니를 마치, 잡아먹듯이 탐하고 있었다.



"얀순이가 이 표정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진짜 궁금해지는데."



"헤으으... 닥쳐어억..."



얀진 언니는 오빠에게 안긴 채 더는 말이 없이 여운에 잠긴 신음만을 내뱉어었다. 붉은 눈은 고통과 쾌락에 위로 올라가 있었으며, 하얀 백발은 거친 남자의 손길에 헝클어져 있었다.



"이런 반전 매력도 나쁘진 않네."



그리고 얀붕 오빠는 언니의 드러난 넓은 등을 쓸어주면서 안아주었다. 언니도 오빠의 허리를 팔로 안으면서 몸을 오빠에게 밀착시켰다.



"이게 사귀는 건지.... 대주는 건지, 씨ㅂ-흐읍...!"



얀진 언니가 말하려 하자, 얀붕 오빠는 거칠게 턱을 잡고 언니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댔다.



"난 널 사랑해. 진짜."



얀진 언니는 긴 키스 후 오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는 볼을 밝혔다.



그리고 난, 배덕감과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언니가 말하는 속칭, 대주는 건 이해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방랑자들 끼리는 그냥 즐기는 거라니까.



하지만, 사귄다니.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먼저 좋아했어. 내가 먼저 좋아했다고!



평소에 둘이 필요 이상으로 붙어있어도, 뭐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진짜로 애까지 만들 생각으로 열렬히 맞대는 가족 사이가 되버릴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둘이 성격이나 기호가 맞는 게 없어서 그런 사이는 안될줄 알았다. 난 돈도 명예도, 힘도 있으니 오빠가 저절로 나에게 올 줄 알았다.



"후우, 그만. 그만. 시간 너무 끌었어."



"아우, 알았어. 그래도 더 하고싶.... 악!"



어느새 오빠와 누나는 여운에서도 빠져나와 옷을 입고 있었다. 언니는 다시 평소 그러듯이 오빠의 등을 때렸다.



"됐고, 얀붕. 어떻게 나갈지는 생각해놨어?"



"얀순이가 잘 때 몰래 우주선 타고 빠져나가자. 행성 내 항행국에는 잘 이야기 해놨어."



"그래? 제국에서 나가면 어디가서 살거야?"



"으음... 이제 돈도 많은데, 한 번 잘사는데 가야지. 페르잔인가 뭔가 하는 데는 어때?"



"거긴 별로, 돈벌레들만 사는 곳이잖아. 좀 특색있는데 가고 싶은데."



"그럼 카디아는?"



"....너는 진짜 선택에는 존나 꽝이네."



"그러니까 널 만난 게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란거야."



"씨바, 다음에 또 그말하면 니 머리통 때서 우주선 장식으로 쓸 줄 알아."



얀진 누나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볼을 붉게 밝히며 쑥스러워 했다.



배신자들. 여길 나가? 오늘 새벽에? 왜? 왜, 왜, 왜!

내 가족이라 할 사람들은 오빠랑 언니 밖에 없어, 드디어 가족을 이뤘다 생각했는데, 왜 떠나려는 거야?







.....절대 안돼.



안돼, 못 떠나. 언니랑 오빠가 날 여기까지 이끌어와줬잖아, 날 구원해줬잖아. 셋이서 행복하게 지내던 그 시절이 있었잖아.



그런데 날 버리겠다고?



왜 둘이서만 행복해? 나도 같이 행복하고 싶어.

왜 둘이서만 함께해? 나도 같이 함께하고 싶어.



난 반드시 가족과 사랑을 놓치지 않을 거야.

언니와 같이 살 거야. 오빠와 사랑을 나눌거야.



가족을 잃지 않을거야.

그 어떤 짓을 하더라도.







**







[나 먼저 가있을테니까, 빨리와.]



"갈꺼면 같이 좀 가지, 거참."



얀진은 내가 잠깐 자던 사이, 어느새 먼저가겠다고 문자만 보내놓고 사라져 있었다. 은근 서운함이 들긴 했지만, 별수는 없었다.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미건조한 무인택시의 인사음을 들으며 선착장에 도착했다. 주로 귀족들이 자주쓰는 곳이라서 그런지 겉에서 부터 아주 기깔났다.



"얀붕님, 이쪽입니다."



그리고 입구 쪽에는 날 도와줄 항행국 쪽의 직원이 있었다. 난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얀진은 어디갔습니까?"



"먼저 우주선에 타고 계십니다."



안은 매우 화려했다. 말만 선착장이지 그냥 궁궐에다가 선착장이라고 이름만 써놓은 것 같았다. 천장에 있는 내 몸값보다 비싼 샹들리에 하며, 대리석으로 정갈하게 뒤덮힌 바닥과 벽에 그려진 문양들까지.



"나중에 집 구하면 이렇게 넓게 보이는 곳에서 살아야겠다."



그리고 저 구름이 걸려있을 정도로 높게 세워진 빌딩들이 줄줄이 세워진 빌딩숲이 유리창 너머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뭔가 도시의 낭만과 구름이라는 자연요소가 합쳐진 그런게 약간 내 심장을 관통하는 거 같다.



그렇게 건물 안의 진풍경들을 보던 중, 갑자기 띠리링 거리는 수신음이 들렸다. 얀진이 보낸 문자였다.



[도망쳐]

[얀ㅅㅜ이 배신하]



시발, 뭐?

그 순간, 난 알았다.

새벽이라지만 왜 선착장에 사람들이 이리도 없지? 뭔가가 엄습해오는 살떨리는 위기가 점차 느껴졌다.



난 바로 뒤돌아 필사적으로 입구쪽으로 뛰었다. 그 직원은 '대상이 튀었습니다' 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행성, 아니. 근방 몇 백 광년의 성단까지는 다 그녀의 것이다. 도망간다 해도 어떻게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금새 접혔다.



저 입구 앞에는, 그토록 귀여운, 내 동생이나 다름 없던, 얀순이 깔끔한 고급 양복을 입은 채 무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와 미래적 스타일을 잘 섞은 전투복을 입은 근위대와 함께.



뒤에서도 어느새 수십 명의 근위대가 날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시발."



앞이고 뒤고, 저년이 날 잡겠답시고 일당백, 아니. 일당천인 자기 근위대를 이백 명 정도나 끌고왔다. 날 이렇게 고평가 해주니 아주 개같기 황송하기 짝이 없다.



얼씨구, 밖에서는 초계함까지 함포로 날 조준하네.



그리고 어느새 얀순의 옆에는 돈까지 받아 먹고 날 팔아먹은 그 직원새끼가 무릎을 꿇은 채, 빌고 있었다.



"대공 전하... 분부하신 대로 했습니다. 제발, 제 가족만은 살려주십쇼..!"



"이거나 받고, 빨리 니네 가족한테 꺼져."



그녀는 어떤 기계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뭔 작은 육각형 모양의 것이었는데, 그건 제국에서 주군이 봉신에게 땅과 작위를 하사할 때, 천체의 소유와 귀족임을 증명하는 전자서류가 내장된 매달이었다.



저 작은 거 하나에, 최소 고손자의 고손자까지 쓸 수 있는 재산과 귀족이라는 명예가 들어있다는 거다. 그런 걸 저렇게 던진다는 게 떨떠름했다. 뭐 대공 정도면 저정도야 껌값이긴 하다.



그가 버튼을 눌러 서류를 확인하자, 직원은 깜짝 놀라면서 나와 얀순이를 교차해 보더니 근위대에게 끌려 밖으로 나갔다.



어찌저찌 요약한 마지막 서류의 내용에는 '30개의 성계를 다스릴 권리와 그대의 자손 대대로 백작위를 하사하니, 주군과 제국에 충성을 다하라.' 는 말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 별 5개도 아니고 30개 짜리 복권이라니, 이정도로 미친 당첨금 쌘 복권은 세상에 없을거다.



난 얀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날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얼굴에는 슬픈 것 마냥 약간 울먹이는 눈으로 날보고 있었다.



"사냥이 끝났으니 이제 개새끼들은 삶아 먹는다는 겁니까? 대공 전하?"



"...오빠, 가지마요."



그녀가 애처롭게 말한다. 가고 싶어도 사방에서 나에게 총구를 겨누는 데 어떻게 갈 수가 없다. 장난하나.



"얀진이는 어떻게 한거야."

 

"언니는 도망쳤어요, 근위대 15명을 순식간에 묵사발 내고 숨어버렸다네요."

 

"걔가 싸운 짬밥이 얼만데, 순순히 잡히진 않을 껄."

 

"어차피 금방 잡힐거니까 걱정은 마요."

얀순은 웃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웃음으로도 그 안에 있는 슬픔과 새로이 일어나는 분노와 애착이 깊게 드러났다.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구두의 소리가 내 앞에서 울려 퍼진다. 그녀는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궁궐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남자와 여자. 주변의 살벌한 분위기만 빼면 참으로 드라마 같은 풍경일거다.

 

한 발짝,

조금씩 움직이며 바지 겉으로 드러난 다리의 곡선은 매력적이었다.

 

한 발짝,

와이셔츠의 단추가 약간 풀려, 그 가운데에 있는 살과 깊은 골을 보이며 슬쩍슬쩍 드러나고 있었다.

 

한 발짝,

그녀의 얼굴에는 귀여움과 날카로운 매력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고, 그 요염한 눈은 손으로 닿을 거리에서, 날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얀순은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주위의 근위대는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한듯 고개를 들썩거렸다. 그리고 곧, 여리고 부드러운 손이 내 바짓가랑이를 붇잡고.

 

"으흐흑.... 떠나지... 마요... 으에에...!"

얀순이는 울기 시작했다. 처음 엑소더스 호에서 동면관에 넣어지기 직전의 그 때처럼. 근위대가 있건 말건 그냥 지맘대로.

 

"왜에... 왜 떠나려는 거에요..? 가지마요..."

 

"대공국이건 대공 작위도 모두 줄테니 떠나지마요... 매일 절 마음대로 해도 좋아요.... 저 별도, 함대도 다 줄게요. 원하는 게 뭐건, 다 드릴테니까...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요... 흐으윽...!"

 

대공은, 아니. 얀순은 나에게 빌고 있었다. 바지를 적신 눈물이 내 다리에 족쇄를 채우듯이 점차 적시기 시작했다.

 

그 도도하고 귀여운 동생의 얼굴이 다 상하는 게 왠지 마음이 아파왔지만, 지금 내 앞에 닥친 이 상황과 맞물려 일어난 긴장감에 크게 슬프다거나 하진 않았다.

 

"후우, 얀순아."

 

"흐윽... 가지마요."

 

"알았으니까 일어나봐."

 

난 얀순이의 손을 잡고 땅바닥에서 그녀를 일으켰다. 똑바로 선 그녀를 숨이 맞닿는 거리에서 보니, 더는 그 귀여운 아가씨는 많이 커 있었다.

 

슬픔에 습기낀 얼굴에는 그 귀여움과 더불어 유혹적인 매력이 넘처흘렀다.

 

뭔가, 기특함? 대견함도 느껴졌다.

 

그리고, 미안함도.

 

저기 저, 창문까지만 같이가자. 얀순아.

 

"미안하다. 얀순아."

 

얀순이가 내 말이 뭔 뜻인지도 모르고 날 당황하며 보는 순간, 난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왼손에들며 얀순이의 뒤로 돌아 오른팔로 목에 초크를 걸었다.

 

"으윽... 으으윽...! 헤에에...♡"

 

근위대는 바로 날 쏘려했지만, 내가 말하기도 전에 얀순이가 명령했다.

 

"쏘지마앗...! 쏘면, 주긴따.. 이거또... 나쁘진... 흐흐흣...♡"

 

얀순이는 날 좋아한다. 그러니 내가 뭐 다치거나 그런 건 안바라겠지. 역시 예상대로다. 말에 은근 이상한 숨소리가 들어간 것 같지만.

 

어디 심리치료라도 했어야 됐는데. 진짜 후회된다. 모전녀전이라는 말이 평소에는 싫었지만, 지금은 왠지 존나 쓰고싶다.

 

"오, 오뺘... 이. 이대ㄹ, 로.... 같이..."

 

"잘 있어라, 얀순아."

 

칼등으로 내리친 유리의 쨍그랑 소리와 함께, 난 얀순이를 밀치고 구름 보다 더높은 저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추락하면서 생기는 바람에 몸을 맡기며 그렇게 난 탈출각을 잡았다. 저 아래의 어둠이 짙은 아래까지만 내려가면, 휴대용 중력 조절 장치를 써서 착륙을 할 수 있을 터 였다.

 

오른쪽을 슬쩍보자 내 쪽으로 난사되는 그물을 맞기 전까지.

 

"이런 씨부럴!"

 

나에게 얽혀든 그물의 줄들은 끈끈이 마냥 내 몸에 들러붙어버렸다. 그리고 초계함과 그물이 줄로 연결됐는지 추락도 멈췄다. 난 그렇게 잽싸게 튄지 몇초 만에 허공에 매달린 고치마냥 대롱대롱 거리는 신세가 됐다.

 

"....."

 

그리고 30초 만에 난 얀순이를 다시 보았다. 말 그대로 생기없는 눈으로 공중에 대롱거리는 날 바라보는 얀순이. 아마 분노로 그 생기를 다 불태워 재만 남은게 아닌가 싶다.

 

"....할 말 없으시죠?"

"....짜, 짜잔!"

"기절시켜."

 

그리고 얀순이의 말이 끝나고 갑자기 그물에 찌릿한 느낌이 감돌다가 곧 내몸에 찌릿한 감각이 요동치며 내몸을 마비시켰다. 그리고 점차 내 의식도 서서히 전기의 파동에 마비되가며 눈이 감겼다.





 

**





 

"으어, 으어억!"

 

목이 아프다. 팔다리를 움직이려니 의자에 묶여있어서 움직이질 못한다.

 

잠깐, 여기가... 아, 그래. 난 얀순이한테 도망가려고 자유낙하 했다가, 다시 얀순이한테 잡혔고, 그리고 개쩌는 침실에서 야릇한 속옷을 입은 얀순이의 정신착란증세를 강제로 상담해주다가 모가지가 졸려서 기절을 했다.

 

"므믑! 으브븝!"

 

그리고 내앞에는, 얀진이 있었다.

피에 적셔진 코트와, 바지. 다행히도 어디 상처가 있거나 하진 않았다. 묶여는 있지만, 나와 다르게 입이 재갈에 막혀있었다.

 

"야, 얀진! 괜찮냐?"

 

"으으! 느그츠으! 느느그츠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말한다. 그 성깔이 재갈의 바깥으로 크게 나왔다.

 

"그래, 나도 괜찮아!"

 

나도 내 소식을 말하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좀 어둡긴 했지만, 고대 신전에나 있을법한 돌기둥과 석화가 새겨진 벽, 그리고 최소 100m는 넘어보이는 무대를 보아, 어떤 극장인것 같았다.

 

난 무대 제일 앞에 있는, 다른 자리에 비해 더 크고, 더 좋아보이는 좌석에 묶여있었고.

 

얀진이는 무대 위의 놓인 고풍스런 흰색 의자에 묶여 있었다. 이 어두운 극장 안에서, 빛은 오로지 얀진이에게만 비춰지고 있었다.

 

또각, 또각,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조명이 비추며 누군가가 무대의 왼쪽에서 나왔다. 익숙한 그 귀여운 얼굴 아래, 가슴골과 어깨, 구두로 높아진 다리를 드러낸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제국의 대공, 얀순이었다.

 

야릇함과 고귀함이 공존하는, 중독적인 모습이였다.

 

그거와 별개로, 나는 뇌수가 들끓는듯한 심정과 함께 입에서 온갖 말이 튀어 나왔다.

 

"얀순 이 미친 개버러지같은 정신병자년아! 당장 이거 풀어!! 좆같은 개씹갈보년아!"

 

"으스, 으즈끄트느으!!!! 드즈느씌그뉴으쯔즈스즈그으뜨드끄으!!!!"

 

그건 얀진도 마찬가지 였는지, 붉은 눈으로 얀순을 살벌하게 보면서 재갈 사이로 포효하듯이 여자의 그곳을 찢어서 자궁을 뜯어버리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몸을 계속 흔들어 속박을 풀려고 하는 모습은 나 조차도 두려웠다.

 

그 힘이 얼마나 쌘지, 그 큰 의자가 좌우로 계속 쓰러질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으읍! 으브브브!!!"

 

"언니, 진정해요. 제가 이러는 건 두분 다 제 소중한 가족이기 때문이에요."

 

얀순은 오른손으로 얀진의 왼쪽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눈동자에 가득한 생기와 색체는 매우 소름이 돋았다.

 

"비록 언니도 사랑하는 가족이긴 하지만, 제 사랑을 빼앗아서 저한테서 도망가려고한 건. 용서할 수 없어요."

 

그녀의 손가락은 점차 얀진의 몸을 스쳐갔다. 목, 쇄골, 가슴, 배, 다리까지. 어떤 보물을 평가하듯이 섬세하게 손가락을 쓸며 입맛을 다셨다.

 

"으브븝! 으브브븝!!"

 

"역시 언니는 저보다 키도 크고, 용감하고, 가슴이랑 다리도 크고. 이래서 오빠가 좋아했나?"

 

그러면서 자신의 곡진 다리와 가슴을 만저보면서 그녀의 몸과 비교해보았다.

 

"뭐, 이제는 상관없죠. 이제 저나, 언니나 오빠를 함께 사랑할꺼니까."

 

그녀가 손을 짝짝치자, 뭔가가 무대 오른편에서 나온다. 새로이 켜진 세 번째 조명이 켜지며 두명의 하녀와 함께, 바퀴를 굴리며 어떤 관이 무대 중앙으로 오고있었다.

 

"므므므.... 므읍! 므으으으읍!!! 으읍!!!"

 

그리고 그 관을 본 얀진은 비명을 지르며 전보다 더 격렬히, 살려고 도망가는 사냥감처럼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흔들며 발버둥쳤다.

 

"으므므믑...! 으으읍..!"

 

하지만 그럼에도 도망칠 수 없자, 얀진의 눈에서 두려움에 질린 표정과 함께 눈물이 흘러나왔다. 관이 점차 다가오자 얀진은 더욱더 몸부림치면서 울음을 더했다.

 

"뭐야... 저거."

 

"신체 개조 관이요. 유전자 조작으로 신체를 개조하는데 쓰이죠. 그리고... 오빠도 아시죠?"

 

뭐? 안돼, 안돼, 저건 안돼!

설마, 아니겠지? 그건 아니겠지?

내 얼굴에 떠오른 표정에 얀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네, 맞아요. 언니를 서번트봇으로 만들거에요."

 

"이 미친 년아!!! 당장 그만둬!! 그만 두라고!"

 

"싫어요."

 

저 냉렬하기 짝이 없는 생기가 없는, 그리고 분노한 눈으로 얀순이 날 바라봤다. 날 침대에 묶고 뺨을 때리던 그때처럼.

 

"언니도 물론 제 가족이긴해요. 하지만, 언니는 저한테 아주 큰 죄를 저질렀잖아요? 그러니까 죗값을 받아야죠."

 

저년이 정녕 우리와 함께 있었던 얀순이 맞는지가 심히 의심된다. 하지만, 그 귀여운 얼굴과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 얼빵한 미소는 저 여자가 우리와 함께 한 얀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제발, 제발 얀진이는 놔둬! 얀진이 보고 가족이라면서, 넌 가족을 이렇게 대하냐!!"

 

"....그런 사람들이, 날 내팽겨치고 튀려했어요?"

 

그녀의 말에 난 침묵했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저 정신나간, 그리고 사랑이 담긴 눈. 얀순은 진심으로 나와 얀진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더욱더 사랑하고 있다. 함께할 연인으로써.

 

"자자, 됐어요. 어차피 비극은 곧 끝나고, 행복 만이 올테니까."

 

그 여러 기계가 달라붙은 관이 얀진의 곁에 왔다.

 

"으읍.... 으으으으....!"

 

얀진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곤, 눈물을 흘리며 우는 거 외에는 할게 없었다.

 

"하반신이 반쯤 날라가 죽기 직전에도 미친듯이 총을 쏴재끼던 언니가 울다니."

 

얀순은 얀진의 붉게 물든 눈가에 맫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정성스레 닦아주면서 말했다.

 

"울지마요, 언니. 이전의 기억들은 그냥 막아뒀다가 이정도면 됐겠다 싶으면 풀어줄테니. 한 백 년쯤?"

 

"므으으으...!"

 

"그래도 걱정마요. 수명 연장 시술도 해주고, 오빠의 첩으로 들여서 아이는 낳게 해드릴테니. 그러니, 후에 다시 만나요. 언니?"

 

얀순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관의 양쪽에 있는 두명의 하녀 중 하나가 얀진에게 어떤 약물을 주사한다.

 

"므으으읍....! 으으ㅇ...."

 

"안돼!!! 얀진아!!! 정신 차려!!"

 

얀진은 몸을 계속 흔들며 저항하지만, 약의 기운은 점차 온몸에 퍼저서 눈꺼풀조차 뜰 수 없도록 만들어간다.

얀진은 눈조차 뜨기 힘든 상황에서, 날 보았다.

 

"으브.... 스르흐...."

'얀붕.... 사랑해....'

 

그녀답지 않은 가련한 미음과 함께. 그리고, 마침내 얀진의 사지는 미동조차 사라졌다.

 

한 명은 관을 열고, 나머지 하나는 포박을 푼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옷을 하얀색의 환자복으로 갈아 입힌 후,몸을 들어 관에 집어 넣는다.

 

안돼, 하지마. 차라리 날 저 관에 넣으라고.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그 버튼 누르지마, 누르지마. 누르지마, 죽여버릴 거야!!! 시발!! 시발!!!! 하지말라고!!! 하ㅈ-

띠디딕.

 

낭랑한 알림 소리가 들리며, 관 속에는 녹색의 물이 점점더 차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그 안에는.





 

**





 

"나도... 그냥 죽여줘... 차라리 죽여줘..."

 

더는 목에서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처음에는 죽여버리겠다며 성대가 박살나기 직전까지 분노했고, 중반에는 제발 그만하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지금은,

밑바닥을 긁는 듯한 목소리로 가증스러운 그녀의 품에 안긴 채, 죽음을 빌고있다.

 

"우리 오빠, 얼굴이 팍 상했네. 불쌍해라."

 

"....."

 

이일의 원흉은 어느새 내 옆자리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손수건으로 땀과 눈물과 기름이 뒤섞인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주면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으로 날 본다.

 

삐비빅.

 

기계음과 함께 치이익 거리는 김세는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는 곳에는 네모난 관처럼 생긴 기계의 문이 열리고 있다.

 

터벅, 터벅.

 

그리고, 환자복을 입은 한 여자가 밖으로 나온다. 하얀 백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고대 민화의 괴물같이 붉디 붉은 눈을 가진, 큰 키에 근육으로 다부진 여자가 나온다.

 

각진 얼굴에 큰 키, 기이한 빨간 눈과 조금 있는 근육에 좀 무섭게는 생겼지만, 그래도 얼굴도 괜찮고 몸매도 좋은, 여자.

 

"이제 나왔나 보네요."

 

내 옆에 앉아 있던 얀순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

 

"얀진아! 얀진아!!"

 

내가 계속 자신의 이름을 연신 불러대도, 그녀는 가만히 선 채로 허공만 응시한다. 분노에 붉게 물들고, 슬픔에 젖어들던 그 붉은 눈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었다.

 

얀순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의 이름은 뭐죠."

 

"모르겠습니다."

 

얀진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냥 아무런 뜻도, 의미도 없이, 명령대로만 하는 기계처럼.

 

"언니의 이름은 얀진이에요."

 

"네, 제 이름은 얀진입니다."

 

"저기 앉아 있는 남자가 누군지 아시나요?"

 

얀순이 날 가리키며 말한다. 그 방향에 따라 얀진은 허공에 올라간 눈길의 방향을 무대 앞 특등석에 묶인 나에게 향한다.

 

제발, 얀진아. 나야. 나라고.

맨날 니한테 줘 터지고, 함께 싸우고, 존나게 일 터뜨리던 얀붕. 제발.

 

내 바람을 담아, 그녀의 눈을 향해 텔레파시 아닌 텔레파시를 보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서 말이 나온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아. 아. 아.

안돼. 안된다고. 이게 뭔 개좆같은 경우야. 시발, 시발. 시발!!!

 

"아.. 으아아... 으아아아!!"

 

따끔거리던 목이 찢어질듯이 저려온다. 그딴 거 보다 지금 이 상황이 차라리 꿈이어서 그냥 깨버리고, 가상현실 속에서 허우적 대듯이 그런 상황일 거야. 그딴 게 아니면 설명이나 이해가 가능한건지 아닌건지는 몰라도 내 뇌가 말하고있다고이게뭔개좆같은소리인건지내가뭐라는건지애초에갑자기왠년이나타나십년지기동료겸여친을살아있는로봇으로만들면누가재정신이냐고이건다꿈이고가상일거야꿈이라고꿈이라고꿈이라고꿈꿈꿈!!!

 

"이건 다 꿈이야...."

 

온갖 생각과 슬픔에 눈이 잠겨 앞을 봐도 앞이 안보이지만, 양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현실을 불러온다.

 

"꿈이 아닌걸요. 오빠?"

 

오른쪽 귀에서 귀여운 얼굴의 여성이 청량한 목소리를 숨과 함께 소리를 불어넣는다.

 

"현실입니다. 주인님."

 

그리고, 왼쪽에서는 다부진 근육과 큰 키를 가진 여성이 왼쪽 귀에 대고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칼칼하고 미친 말이 나오는, 거칠면서 부드러웠던 입에는 다정한 말로 주인님이라 속삭이지만, 그 안에는 어떤 희로애락도 담겨있지 않았다.

 

"사랑해요, 두분다."

 

"사랑합니다. 얀순님, 주인님."

 

두명의 여자가 양쪽에서 몸을 밀착시키며 날 껴안는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