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숙적 '  레나'






" 휙! "

" 으윽.. "




무언가 얇은 물체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별안간 살을 에는 듯한 통렬한 감각이 느껴져왔다.

감각이 반응하는 곳을 향해 급하게 눈길을 돌린 내가 발견한 것은, 이두근에 박혀있는 검지손가락만한 길이의 가느다란 쇠바늘.

아뿔싸. 잠시나마 동맹을 맺고 난관을 돌파한 탓에, 눈 앞에 서 있는 숙적에게 방심해버렸다는 것인가.





" ... "





나는 이어질 공격에 대비할 요량으로 곧바로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옮겼으나,

그녀는, 그런 걱정이 괜한 기우라는 듯, 그저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나를 쏘아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이게 무슨 짓이지? 레나? 임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던건 분명 너였을 터인데, 어째서.. "





나는 몰려드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며, 걸터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난 뒤, 급한대로 책상에 놓여있던 검을 꼬나들어 전투태세를 취했다.

일단, 팔뚝에 박힌 바늘을 뽑는 것이 먼저이리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해보았지만, 상대는 노련하디 노련한 도적.

어수룩하게 빈틈을 보였다가는, 괜한 화를 입을 터.

방금까지도 호되게 당해버린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 후. 이젠 그 상황에서 빠져나왔으니, 자연스럽게 동맹도 끝난 것 아닌가요, 카일? "





여전히 나를 쏘아보며, 히스테릭한 어투로 말하는 그녀.

그녀는 여전히 문 앞에 선 채로, 단숨에 전투태세를 취한 나의 모습을, 팔짱을 끼고서 여유롭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늘상 얼굴의 하관을 가리고 있는 두건을 착용하고 있던 터라,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십 년이 넘어가는 오랜 악연이었던 그녀라면, 허둥대는 나의 모습을 보고서 얕은 조소를 흘리고 있으리라.





" 젠장.. "





나는, 한껏 해이해졌던 신경을 다시금 날카롭게 벼려내며, 검의 손잡이를 말아쥐었다.

아직도 나를 응시하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게서, 변잡스럽게 교차하는 감정들. 

나는 같잖은 유대감에 취해, 방금까지 대화하고 있던 상대가, 나의 숙적이었다는 것을 망각했다.

지금, 방문 앞에 서 있는 저 여자가, 금지된 어둠의 힘을 다루는, 더러운 방식도 마다하지 않을만큼 아주 질 나쁜 여자라는 것을.

아무래도 오늘 밤은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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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끼에에엑-! "

" 으럇!! "





강한 인기척을 느끼고 다가온 오크 무리를, 차례차례 능숙한 솜씨로 암살하는 그녀의 모습과,

신성력을 머금은 검기를 날려, 몰려드는 마물 잡졸들을 파죽지세로 끊어내는 나의 모습이 대비된다.

내막을 모르는 자가 이 모습을 본다면, 나와 그녀가 몰려오는 마물군단에 대적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일 터.

하지만, 하늘에 맹세코 나와 이 여자는 같은 편이 아니었고, 나 역시 그렇게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았다.





" 후후, 이러다 둘 다 당하겠군요. "

" 윽... 그렇군. 어떻게든 돌파할 방법을 찾아내야할텐데.. "





겉보기에는 우리 쪽이 나름 우세해보였으나, 상대는 고작 마물 몇 마리가 아닌 군단.

그나마, 아직은 대적할 힘이 남아있기에 망정이지, 힘이 다하는 순간 그대로 포위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결단코, 이 이상 길게 가져가서는 안 될 싸움이리라.





" 제가 아까 이야기 한 '방법'에 대해서는, 한 번 생각해봤나요.., 카일? "

" 젠장.. 사교도와 동맹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을..! "





양손에 쥔 단검을 사용하여,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재빠르게 달려나가는 그녀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오우거의 집채만한 몽둥이를 방패로 막아내는 나의 모습.

아무래도, 슬슬 공세종말점에 다다른 것 같았다.

이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할 나로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으리라.





" 늘 그랬지만, 당신은 솔직하지 못하군요, 카일. 마물들이 우릴 에워싸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는 이미 머리를 맞대고 싸우고 있지 않았나요? "

" ...큭. "





한 없이 주저하는 나를 향해, 답답하다는 듯 정곡을 찔러오는 그녀.

쉴 새 없이 기동하는 것이 슬슬 힘에 부치는지, 밤하늘처럼 새카만 단발머리와, 하관을 가리고 있던 얼굴 두건이, 온통 식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여체의 곡선이 한껏 도드라지는 흑갈색 전신타이즈에는 군데군데 터진 자욱이 난무했다.





" 당신이 이런 곳에서 최후를 맞고 싶다면야,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카일, 나는 정정당당히 승부로 그대를 꺾길 바라요. "

" 피차일반이다. "





나는, 그녀의 말에 강렬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거늘, 애석하게도 그녀의 말이 모두 진실인 탓에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공공의 적들로 둘러싸인 작금의 상황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방금까지 목숨을 노리던 숙적에게 등을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였으리라.

그래,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 헬레나... "





그 이유는, 내가 아직 고향 마을에서 살고있을 적, 사교도에게 희생당한 소꿉친구이자 첫사랑.


우리는 무슨 사이냐는 그녀의 질문을 밤새 되새김질하던 나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고백할 결심을 하고서, 아침이 되자마자 그녀에게 줄 들꽃을 꺾어 그녀의 집으로 향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집인 교회에 다다르자 아침마다 마당을 쓸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도 없이, 장로님과 권사님으로 추정되는 시신 두 구만이 어둠의 힘에 잠식당한 채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 날, 나는 결심했다.

이 땅에서 사교도들을 뿌리 뽑아버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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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랑 잠시 힘을 합치는건 어때요, 카일?"

" 이런 상황에도 농담이라니, 부끄럽지도 않나. "

" 흥, 농담 아니거든요? 당신은 이 방법 말고 다른 마땅한 방법이 있나봐요, 카일? "

" 큭.. "





임시동맹.

늘 그렇듯 해오던 진검승부 중, 갑작스럽게 몰려온 마물군단으로 인해 양 쪽 모두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그녀가 내게 먼저 제안한 일이었다.

신성하고 거룩한 태양교단의 고위 성기사가, 거짓된 힘을 쓰는 더러운 사교도에게 먼저 동행을 하고자 제안한다는 것은, 

골백번 생각해도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거니와, 그러한 의견에 찬동한 나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일이었지만, 딱히 마땅한 수가 없는 것을 어쩌랴.

헬레나의 복수도 그렇고, 기사단장의 자리도 그랬듯, 내겐 아직 단명하기에는 못 다 이룬 목표와 소망들이 많았다.





" ...몸은 괜찮나, 레나? "

" 네, 별로 문제는 없어요. 그나저나, 살다보니 제가 당신에게 치유를 받는 날도 다 생기고,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후훗.. "





그렇게, 대지를 휩쓸듯 몰아치는 마물들의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내는데 성공한 나와 그녀.

오랜 숙적이라는 포지션과 하등 맞지 않게, 나와 그녀는 마을로 향하는 오솔길을 통해 터덜터덜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포션이나 신성력을 사용하여 몸은 어찌저찌 치료할 수 있었지만, 손상된 장비는 어쩔 수 없었기에, 나와 그녀 모두 꽤나 너덜너덜해진 상태.

마법이나 고속기동 따위는 언감생심이었고, 지금은 그저 희끄무레한 별빛에 의지하여 천천히 걸음을 옮겨나갈 뿐이었다.





" 그래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카일. "

" 너 같은 호적수가, 저런 한낱 마물 따위에 쓰러지는 걸 바라지 않았을 뿐이다. 착각하지마라. "

" 호적수.. 그렇군요, 카일. "





그녀는 곁에서 걷고있던 나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듯 흘끔흘끔 바라보았지만, 그 곳에 살기는 없었다.

그래. 분명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괜찮았으리라. 최소한 그 때 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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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일, 나는 당신을 꼭 이겨야겠어요. "

" 윽- "





내가 검을 든 자세를 고치려 하던 찰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허리춤에 있는 쌍단검을 무서운 속도로 뽑아들고서는 단숨에 달려드는 레나.





" 챙-! "





순간, 그녀의 단검과 나의 검이 맞부딪히며, 대장간에서나 날 법한 파열음이 작렬했고, 잠시동안 방 안을 타고 흐르던 묵직한 정적이 산산히 박살났다.

아까 못 다한 결투의 서막이, 기어코 다시 오른 것이리라.





" 우리가 처음 본 지, 몇 년이나 지났는지 알고있나요, 카일? "

" 십 년 즈음이겠지. "

" 틀렸어요! "





대화와 함께 이어지는 공격.

나는, 그녀가 내지르는 공격에 대응하는 것에 감각을 집중하며, 대화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빈 틈을 파고드는 속도가 빠르다 할 지라도, 단언컨대, 내가 신경을 쭈뼛 곤두세우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 역시 섣불리 피해를 가하지 못하리라.

나는 그 동안 수십 번이 넘는 결투를 하며, 그녀가 어떻게 움직일 지에 대해,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고, 

갑주도 챙겨입지 못 한 지금은, 적극적인 공세가 힘들 것이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최소한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스릉-! "

"못 보던 검을 들고 나왔다 했더니, 가벼운 금속으로 만든 검인가 보군요, 카일!"

" 챙-! "

" 그래, 너를 단칼에 베어버릴 기회를 번번히 놓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져서 말이야. "





밀폐된 방 안에서 이어지는 근접전.

몸을 피하거나 후퇴할 공간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더더욱 그녀의 공격을 흘려내거나 막아내는데 집중했다.

나는 지금, 그녀가 기습할 때 사용한 바늘에 무슨 독이 발려있는 지도 모르는 상태.

되도록이면 상처를 입지 않은 채 그녀가 후퇴 할 때 까지 버텨내야했다.





" 거짓말.. 그런 거짓말로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제대로 틀렸어요! 카일! "

" 챙! "

"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거냐! 이 사교도놈! "

" 그럼, 날 베어버리려고 검까지 새로 만들어 온 사람이.., 은퇴하고 결혼같은걸 하러가나요? 카일? 제대로 대답해봐요! "

" 그건, 니가 알 바 아니다! "


" 파칭-! "





단검에 발린 맹독을 주입하기 위해, 얕은 공격을 주로 하던 그녀답지 않게, 꽤나 힘을 싣은 일격.

한 순간 스파크가 일어 날 정도로 강렬한 일격에, 그것을 가까스로 막아낸 나는 침대의 앞까지 밀려났다.





" 첫 만남 때도 그렇고, 나에게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도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이러냐고. "

" 헤-.. 첫만남이라면, 카일 당신이 풋내기 종자였던 그 때를 말하는건가요? "

" 그래.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전부. "





도대체 몇 번이나 합을 겨루었는지, 검을 잡고 있던 양 손에 저릿저릿한 감각이 공명한다.

이어지는 전투에 지친 것인지, 일격을 끝으로 달려들지 않는 그녀.

약간은 가쁜 듯 내쉬는 숨, 가늘게 떨리고 있는 단검을 쥐어든 손, 왠지 모르게 격앙된 감정이 실린 말투까지,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심란하게 만든 것인지, 마물들이 몰려오는 위급상황에도 능글맞게 평정심을 유지하던 그녀답지 않았다.





" 흠.. 당신이 제 편이 된다면 모든 것을 들려드리죠, 카일. "

" 그렇다면, 너를 이 검으로 베어버린 후, 그 사연이란 것까지 같이 저승에 묻어버리겠다. "

"어머, 그것 참 무드있네요, 카일."





마지막 대화를 끝으로, 다시, 그녀와 나는 동시에 격돌했다.

여관 주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전투가 끝난 뒤에도 여관 건물이 성하게 남아 있으리라고는 차마 장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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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염을 전혀 다루지 않고, 오로지 빛 만을 고집하는 괴짜 성기사. '

' 고대의 관습에 따라, 순수한 빛의 발자취를 좇는 성기사. '





이 꼴사나운 수식어는, 교회에서 드문드문 돌아다니는 나에 대한 평가였다.

이런 평판이 아무 이유도 없이 생긴 것은 분명 아니리라.

나는, 열두살에 태양교의 수도원으로 입회했을 적부터, 빛의 마법에 두각을 보였었으니까,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여길 수 있는 일.

만일, 내가 견습사제로 임명 받은 지 한 달 째 되던 날에, 그 인간을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사제의 길을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 날 저녁, 나의 숙적인 레나를 만나서 처절하게 패배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 후후.. 너무 약한거 아니에요, 카일? "

" 이런.. 비겁한 녀석 같으니.. "

" 흥, 몇 합 겨루지도 않았는데 쓰러져놓고 비겁하다뇨. 이건 제가 비겁한게 아니라, 순전히 당신이 제가 생각한 것 보다 약한 탓이거든요? "

"크윽.."





반으로 부러진 채 나뒹구는 수련용 나무 지팡이와, 자리에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

나는, 무방비한 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핏대를 세우며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 사제고 뭐고, 별로 소질도 없는 것 같은데, 다 때려치고 나랑 같이 일하는거 어때요, 카일? "

" 절대. 너희 사교도들이랑 일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 "

"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데려갈 수 밖에 없는건가요? 휴... 손 많이 가는 남자는 딱 질색인데. "

" 빌어먹을 사교도놈. "





농익은 곡선이 한껏 도드라지는 현재의 자태와는 다르게, 풋풋하고 치기어린 기운이 가득했던 그녀.

레나는, 나와 정 반대로 순수한 어둠의 힘을 다루는 도적이었다.





" 뭐, 일단 오늘은 그냥 갈테니깐, 다음에는 좀 더 제대로 준비해와봐요, 카일. "

" 무슨...? "

" '이렇게 데려가는건, 별로 재미가 없으니까.' 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





그것도, 이미지에 맞지않게 의외로 정정당당한 구석이 있는, 그런 도적.

만약, 내가 이 때까지 상대해왔던 도적들이 평범한 도적들이라면, 그녀 역시 분명 그 바닥에서는 별종 취급을 받고 있을 터.

하여튼 간에, 어둠의 힘 따위에 당한 것이 분했던 나는, 더욱 더 강력한 빛의 가호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지망하던 직업군을 사제에서 성기사로 바꾼 것도, 그녀와의 전투에서 한계를 느껴서였으니.





" 카일 경, 이제 빛의 힘 만으로는 높은 경지에 오르기 버거울 것입니다. 그러니, 화염의 힘을 같이 다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만, 저는 은혜로운 빛의 가호만으로도 제 영이 충분함을 느낍니다. "





순수한 빛의 힘 만으로는, 성기사의 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들다는 사실은, 나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순수한 어둠만을 다루던 그녀에 대한 오기였을까, 나 역시도 순수한 빛 만을 다루어 그녀에게 대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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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도 이제 인정해야 할 텐데. 비겁한 술수 따위로는 날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걸. "

" 후후.. 비겁하다라. 카일, 당신이 궁지에 몰린 대부분의 상황은, 지혜와 힘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었나요? "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에게, 칼 끝을 겨누고 있는 나의 모습과,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채 낄낄대는 그녀.

오늘따라 유달리 김정적이던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결정적인 빈 틈을 내주었고, 나는 그 기회를 노렸을 뿐이었다.





" 어둠의 힘을 버리고, 회개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는 결코 그럴 인간이 아니겠지. "

" 역시, 저를 잘 아시네요, 카일. "

" 그렇다면, 여기서 끝일 뿐이다. "

" 카일, 당신은 제가 왜 태양교를 싫어하시는지 아시나요? "

" 그런걸 내가 왜 알아야하지? "





그래, 내가 그랬듯이 누구든 사연이 있을테지만, 최소한 이런 상황에서 듣고 싶지는 않았다.

대등한 상황이 아닌,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주절주절 풀어놓는 사연은, 그저 한낱 감성팔이의 영역이었으니.

그녀가 추하게 목숨을 구걸하려 하기 전에 끝내는 것이, 그녀를 향한 나의 마지막 배려일 터. "





" 아니, 자초지종을 들으면 분명 생각이 달라질거에요, 카일. 내게 조금만 시간을 줘요. "

" 네가 내게 목숨을 구걸할 줄은 몰랐다. 실망이 크군. " 





대화를 끝으로 그녀가 손을 움직이자, 나도 그녀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검을 들어올렸다.

희미한 별빛을 머금어 옅게 번들거리는 검의 첨단부.

막연하기만 했던 이 순간을 위해, 참으로 기나긴 시간을 버텨왔노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 내게 일렁이는 감정은, 쾌감도 희열도 아닌 명백한 회한.

그 회한의 한 켠에는 못내 섭섭한 감정이 자리잡아 있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검을 내리쳤다.

바야흐로, 기나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으려 하는 순간이리라.





" 카일... "

" ...! "





순간, 백지장이 된 듯 정지하는 사고.

그녀의 목을 베어내려 있는 힘껏 휘둘러지던 검이, 그녀의 목에 도달하기 전에 간신히 멈춰섰다.

다행히 목이 날아가는 일은 없었지만, 검날이 일으켜 낸 바람이 목에 닿는 것만으로도 섬찟함을 느꼈는지, 이마에서 식은 땀을 뚝뚝 흘리며 온 몸을 벌벌 떨어대는 그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 헬..레나.. "

" 말했잖아요, 카일. 분명, 생각이 달라질거라고요. "

" 윽.. "





하관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벗어던진 그녀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당황한 채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을 수 밖에 없었고,

일순, 허벅지에 느껴지는 따가운 감각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은 채 자리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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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났군요, 카일. "

" 으윽..., 넌 누구냐.. "

" 실망이 크군요, 카일. 안 본 지 십 년은 족히 지났다지만, 사랑하던 사람의 얼굴도 까먹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 거짓말. 헬레나는 오래 전에 죽었다. 이 세상에 존재 할 리가 없단 말이다. "





다시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보이는, 레나, 아니 헬레나의 얼굴.

분명, 누군가가 나의 약점을 캐고서, 헬레나의 모습을 훔쳐 변장한 것이리라.

그녀의 집이 사교도에게 습격받은 참상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나였다.

그녀는 이 세상에 존재할 리도 없었고, 존재해서도 안 되었다.





" 그렇게 의심할 줄 알고 미리 준비해 놓은게 있죠, 카일. "

" 고문 같은걸 한다 해도, 내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 이 목걸이, 제 생일날에 당신이 건네 준 것인데 기억해요? "





잔뜩 경계하는 나의 눈 앞으로, 그녀가 들이민 것은 낡고 투박한 목걸이.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인지, 어디 할 것 없이 손 때가 타 있었고, 군데군데 끊어진 줄이 접합된 부분도 있었지만,

목걸이에 매달린 담황빛 마석의 형태로 보건대, 틀림없이 내가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던 물건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 알고있는 비밀장소에서 건낸 생일선물.

그것을 내가 잊을 리 없었다.





" 그나저나, 집채만한 마물도 단숨에 마비시킬 정도로 강한 독이었는데, 역시 당신에게는 잘 안 통했나 보네요. "

" ... "

" 물론, 이럴 걸 대비해서 하나 더 준비해왔지만요. "

" 헬레나.. 어째서 이런 일을.... "





내 앞에 있는 여성이 헬레나임을 확신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보려 시도했지만, 양 팔 다리가 침대의 네 귀퉁이에 단단히 결박되어있는 탓에 실패했다.

그녀는 아직, 내게 화가 난 것일까?





" 흐흐, 곤히 자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네요, 카일. 당신이 혹시나 깰까봐 늘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게 전부였는데 말이에요. "

" 그게 무슨.. "

" 말은 안 했지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은 진즉 파악하고 있었어요. "

" ... "

" 잠시 해야 할 일이 생겨서, 당신이 며칠 전 수도로 갔을 때는 미처 따라가지 못했었는데, 결혼을 하기로 한 것도 그 때 정해진 것이겠군요. 맞죠? "





음침하게 웃으며, 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는 말을 이어나가는 헬레나.

꼼짝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첫사랑이, 나의 숙적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던 나는, 꿈이라도 꾸고 있는 양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 그래서 좋았어요? "

" 뭐? "

" 몇 십 년 동안 당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나를 버리고, 그깟 아무런 가치도 없는 년이랑 결혼하러가니까 좋냐고요. "

" 그건... "

" 정체는 못 밝힐지라도, 언젠가 당신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내가 얼마나 참고 참았는데요.. "

" 당신은 벌을 받아야해요, 카일. 그것도 제일 무거운 종신형으로 말이에요. "





방금까지 방글방글 웃어보이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는 시니컬한 표정의 그녀.

분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앙 다문 입술, 끝을 알 수 없는 진득한 질투심이 깃든 탓인지, 한 없이 혼탁해진 에메랄드빛 눈동자.

늘 헤실헤실거리며 내게 웃어보였던 과거의 그녀와 비한다면, 많은 것이 뒤틀려있었다.





" 그냥.., 그냥, 처음부터 이야기 해줬으면 되는거잖아. 어째서 지금까지.. "

" 내가 이렇게 말을 한들, 당신이 순순히 믿었을것 같나요, 카일? "

" ... "

" 당신이라면, 분명 사교도가 이상한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을거에요. 아닌가요? "





나의 말을 자른 뒤, 잠자코 듣기나 하라는 듯 자신이 할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 

맞는 말이었다.

사교도 중에서는, 트라우마나 기억을 악용하여 정신적인 공격을 하는 음험한 자들도 있었기에, 그녀가 말을 한들 절대 믿지 않았을 터.





" 괜찮아요, 카일. 당신이 태양교에 입회한 건 나를 위해서 한 일이잖아요? 교회에서 이 말을 엿들었을 때, 아직 나를 잊지 않은거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구요. "

" 그럼, 그렇다면 장로님과 권사님은.. "

" 제가 죽였어요. "





이어지는 경악할만한 진실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장로님과 권사님이 태양교에 앙심을 품은 사교도들에 의해 살해당한 줄로만 알고 있었건만, 사실은 그녀가 죽인 것이라니.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나의 얼굴을 당연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그 동안 있었던 속 사정을 설명했다.





" 이 저주받은 재능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몇 시간씩 경전을 읽으며 참회해야했어요. 심할 때는 채찍으로 구타 당할 때도 있었죠. "

" 웃기는 일이죠. 그들은 죽을 때까지 저를 자식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는데, 저는 저 혼자 애정을 갈구했으니. "




자신이 지닌 어둠의 힘으로, 흑색의 구체를 만들어보이는 그녀.

회상하는 듯한 눈길로, 자신이 만든 구체를 바라보는 모습이, 퍽 구슬퍼보였다.

누구보다도 어둠을 싫어했던 태양교의 장로씩이나 되는 인물의 자식이, 강렬한 어둠의 힘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큰 파동이 일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그래서, 장로님과 권사님은, 그녀를 억누르며 키우고 있었구나.

어째서 그녀가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것인지, 그녀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가 갔다.





" 하지만 이젠 다 필요없어요. 내겐 당신이 있잖아요, 카일? "

"..."

" 오늘 밤은 저랑 함께해주셔야겠어요. "

"우리 애기는 어떨 것 같아요, 카일? 엄마를 닮아서 어둠의 힘을 다룰까요. 아님, 아빠를 닮아서 빛의 힘을 다룰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빛과 어둠 둘 다? 뜬 소문으로는 모든 속성 마법을 통달하는 대마법사가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던데, 헤헤..."





순간,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목소리에 강력한 광기가 깃들었고,

타이즈의 국부 부분을 찢으며 내게 올라타는 그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아직, 남은 시간은 많았고,


아무래도, 오늘 밤은 많이 길어질 것 같았다.









(다음편) 약혼녀가, 첫사랑을 만나고 온 나에게 집착한다.
https://arca.live/b/yandere/6866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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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때는 괜찮았는데 다 쓰고 보니 구리네.

그냥 지우려다 아쉬워서 올려봄.

떡씬은 쓰기 귀찮아서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