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재능이나 경제력을 타고난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곧잘 부러워 하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재능이 있든 없든 수저를 어떻게 물고 태어났든간에 이미 정해진 운명인 것을 어쩌리.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다. 어린 나이부터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가 할 수 있을만큼의 최선을 다했고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S대학에 가기에는 내 힘이 부족했다. K대학과 Y대학은 등록금이 너무 비쌌다. 결국 시립대학에 입학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만족했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최선이었으니까.

대학생이 된 다른 또래들은 엠티니 미팅이니 불금이니 하며 그들의 청춘을 즐겼지만 난 그들을 손님으로 맞는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렴하기로 유명한 이 대학의 등록금도 내게는 버거웠다. 그네들이 자기들끼리 웃고 즐기는 동안 나는 그들이 더럽힌 바닥을 닦았다. 하지만 박탈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나와 그들의 타고난 운명이 다를 뿐이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몇개월이 지났다. 야릇한 봄기운이 한창일 때였다. 따뜻한 봄바람이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지 사랑에 빠진 남녀가 눈에 많이 보인다. 이번만큼은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아르바이트처에서 처음 만난, 이지예라는 이름을 가진 동갑 여자아이였다. 일을 하며 안면을 튼 그녀와는 교양 수업도 우연찮게 함께였고 집으로 돌아가는 교통편도 같았다. 애초에 같은 원룸 건물이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해 모르고 있었지만 이번 신입생들 중에서 제일 예쁘다고 소문난 아이였고 나 역시 그 외모에 반해 20년 인생의 첫사랑을 시작한 것이었다.


"으으.. 이 교양수업 완전 지루해. 저렇게 재미없게 말하는 것도 재능 수준인데."


"그래도 시험은 쉽게 나온다잖아. 내가 아는 선배들도 다 꿀강의라고 하더라구~"


"그래? 나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라곤 너밖에 없어서.. 그런건 전혀 모르고 신청했어."


"오... 무슨 운이야? 많고많은 강의중에 요 수업만 콕 찝어서 신청해 버리다니."


"그러게. 너랑 같은 수업을 듣게 되서 참 운이 좋았지."


"오글거리는 대사 뭔데~ 너 나 좋아하냐?"


"어."


"ㅋㅋㅋㅋ 농담 못하는 성격인줄 알았는데 꽤 재밌는 놈이었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존대말로 시작했던 관계는 여러차례 마주치며 말문을 트고 마음을 나누는 과정에서 점점 가까워졌다. 나의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의 텐션을 따라갈때까지 기다려 주는 상냥함에 다시 반한 나는 지예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려 식사 약속도 몇번 잡으면서 말도 놓고 지금에는 일상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 웃는 그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녀와 내가 가까이 지내자 다른 학생들은 내게 그녀의 평판이 별로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얘기를 했다. 입학한지 3달도 안 지났는데 남친이 몇번씩 바뀌었다던지 이 지역에서 노는년으로 유명하다던지 그런 험담들. 평소엔 말도 안 붙이던 내게 갑자기 다가와 험담을 늘어놓는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거니와 나는 소문만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주의다. 그도 그럴것이 내가 본 지예는 조금 놀기를 좋아하지만 털털하고 진솔한 순박한 소녀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주말 알바로 일하는 번화가 고급 바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고급 바라고 해서 몇몇 고급주 빼고는 억소리 나올만큼 비싸진 않다. 그럼에도 학생에게는 부담되는 가격인 그런 곳이었다. 물론 내게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고가였지만... 뭐, 평소에 얘가 비싼거 좋아하는건 알고 있었다.


"어? 지예 아니야? 이런 비싼데는 누구랑 같이 온거야?"


"어?? 아... 얀붕이구나. 그냥 아는 오빠가 술 사준대서 나왔어."


"와... 좋겠네. 나도 이런 데서 술 얻어먹어보고 싶구만."


"하하... 그런데 너 여기서 일하는거야?"


"응. 주말에는 알바 3개씩 뛰거든."


"고생하네. 월요일에 수업 끝나면 어디 놀러나 갈래?"


"나 돈없다. 다음주에 월급 들어오니까 그때 가자."


"그래... 아. 오빠가 부른다. 수고해!"


"응. 월요일에 보자."


내 인사가 무색하게도, 예지는 월요일에도 집에 흑교에 오지 않았다. 얘가 공강인 날은 금요일일텐데.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하면서 점심시간 파트알바처로 향하던 도중 모텔에서 주말에 같이 있던 남자와 걸어나오는 그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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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보았을 당시에는 조금 당혹스러웠으지만 집에 와 생각해보니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 최선이었겠지. 나같이 비루먹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보다 '아는 오빠'라던 그 남자. 즉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과 사귀는게 아름다운 그녀에게 수지가 맞는 이야기이다. 애초에 내 사랑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었다. 지금까지 내 타고난 운명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이번엔 무슨 객기로 그런 마음을 품은 걸까.

으음...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를 거듭하지 않아야겠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던가. 앞으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꼼짝말고 붙어있는게...
...
....
.....

"흡...크흐..."
나는 날 전혀 비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타고난 운명이 남들과 다를 뿐이다.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아.
내 뺨에 흐르는 물은 뭐냐고? 이제 초여름이 다 되가니까... 더워서 나는 땀이다. 이제 봄은 끝났으니 말이다.

내 마음의 봄도 그렇게 끝이 났다.




언제 갤에서 유니콘 얀붕이 땜에 후회하는 여주 보고싶대서 써보려고 하는 것

부족한 글이지만 재밌게 봐주면 좋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