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을 날려서 간신히 '내 제자'였던 것을 받아냈다. 한 합, 한 합, 애정을 주었던만큼의 살의를 담아서, 베어내고 베어내고 또 베어낸 덕에,

용사의 검격이 아니고서야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마왕'의 몸은 여기저기 부서지고 있었다.......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내 품에 안긴 것이 말했다.


"이, 이렇게, 하면 서, 선생님의 저주를 풀 수 있다고......! 희, 희나리가.......이, 이 방법 밖엔 없다고......!"


내 눈에 있는 노기가 아직도 자신을 향하는 줄 착각하는 이 애는 격통과 함께, 복받쳐오르는 감정에 눈물과 함께 목이 메었는지 말을 잇지 못 했다.

나는 말없이 이 녀석을 끌어안으며, 내가 한 행동에 감탄사를 날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이지?...... 희나리?"


"아하핫!? 이런, 이런, 연극의 완성은 비밀유지가 생명이랬는데! 무녀리!"


 내 노성에는 짐짓 놀란 듯,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희나리는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무녀리를 나무랐다. 그러자, 완전하게 세상의 종언을 불러오는 진홍의 마녀의 모습을 하고서도 두려운 듯 떨면서 나보다 커졌음에도 예전처럼 파고들 듯이 내 옷깃을 부여잡았다. 무엇보다 아까의 그 검기와 검격 이상하다. 절대로 내가 아는 희나리의 실력은 저 정도가 아니다. 절대로.......


"대체, 누구냐....... 넌."


"보시는대로 희나리는 희나리여요."


 나는 덩치만 조금 더 커졌을 뿐, 무녀리 그 자체인 것의 손을 내려놓고서, 다시 자세를 고쳐잡고서 검을 겨눴다. 하늘색에 가까울 희나리의 머리칼의 색이 조금 더 짙게 푸른 듯한 기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세계의 종언을 가져올 마녀 강림에서도 태연자약하게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한다니 어쩌니, 했던 최근의 기억들이 모조리 뇌리를 스친다.


 언제까지고 지속될 것 같던 평화를 깨고서, 일어난 일련의 모든 사태가 녀석이 사실은 흑막이라면, 하는 무서운 생각이 짐짓 들어 손이 떨렸다. 언제 어느 틈에 누구랑 뒤바뀐 거지?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마물이 있었나? 왜 눈치 채지 못 했지?! 뭐가, 역천의 용사냐! 자라지 않는 몸만큼이나 아직도 알맹이가 미숙함 뿐인 거냐!!! 나는 뼛 속까지 이런 변방의 검술 사범이나 어울리는 녀석임에 틀림이 없다.


"흐음,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으셨나 보네요. 선생님☆"


 아마도 숨기지 못 하는 내 표정과 많은 생각이 오가는 칼 끝을 요모조모 뱀처럼 살피나 싶던, 희나리는 이내 다시 여느 때처럼 생긋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리곤 완전히 자세를 풀고서 다시 칼을 집에 그림을 그리듯, 넣더니 그대로 내리는 비에 젖은 채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손짓, 몸짓, 하나 하나 가르치신, 이 희나리도 몰라보실 줄이야........ 연출이 너무 파격적이었나 보네요."


 조금은 실망한 듯 하기도 하고, 깊은 수심을 건드린 듯한 표정이 된 희나리는 자세를 반듯하게 다잡는 듯 했지만, 어딘가 복받혀 오르는 게 있는 듯 살짝 목이 메어 보였다. 턱을 살짝 든 모양새로 보건데, 마치 오래 전에 본 비가 오던 예등제 날, 등을 띄우고서 빗물인 척 눈물을 감추려 하던 자존심 하나는 강한 희나리 같았다. 그래도 속아 줄 수는 없었다.


"헛소리 집어치워! 희나리의 실력은 누구보다 스승인 내가 더 잘 알아! 아까 그 검기는 대체 뭐지?!"


 그렇다, 거의 빈사상태까지 몰아붙인 진홍의 마녀 따위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받아내기에도 버거울 수 있는 그 맹렬한 일격, 범인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그녀가 가진 검으론 고작해야 한 두 번, 더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지고 말 정도의 그런 기술이었다. 나는 겨눈 검을 거둘 생각 따위는 없이 그녀를 추궁했다. 그러자, 희나리는 고개를 떨구고서 입을 열었다.


"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시나보군요. 지금 감싸고 계신 저 아이를 주워 거두셨던 12년 전부터, 제 계획은 시작되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이지 마......."


 나는 검의 떨림을 멈추었다. 호흡을 고치고 명백한 적의를 띄자 그런 날 슬쩍 원망스럽다는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희나리의 눈빛은 뭔가 절절함이 담겨있었다. 그러자 가슴에 손을 모으고선 말했다. 비를 내리는 구름이 옅어졌는지 월광이 비치는 빛에, 주변의 야속히도 진화되지 않는 먼 불길에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희나리의 얼굴이 보인다. 칼집 채로 진흙탕에 내던지고서 그녀는 내게 호소하듯 전했다.


"뭔가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형편 좋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으셨나요? 하나 같이?"


 그녀는 입을 열어 아주 오래 전의 일부터 퍼즐을 맞춰나가듯 운을 떼어냈다. 늘 싸구려 가짜 약이나, 조악한 무기만을 취급해오던 양아치 잡상인 놈들이 인신매매, 그것도 희귀종족을 밀수하게 된 계기부터, 그리고 하필이면 그 날 내가 돈이 모자르다며 운 좋게 초범일 때 때려잡는 일부터, 그리고 내 뒤에 옹송그려 숨은 불길하다는 반마의 종을 무녀리라는 이름을 붙여서 데리고 있게 한 일, 등등 잘 떠올려 보면, 상황에 맞지 않게 이 녀석이 끼어들어 있었던 듯한 착각이 들었다. 8살 때부터, 내 몸에 걸린 저주가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부터, 그것을 해주하려 동분서주했다는 그런 믿지 못 할 이야기.......


 끝내는 무녀리에게 각성의 조건을 충족시키려 갖은 수를 다 써보았단 웃지 못 할 이야기와 내가 검격을 멈추게 했던 무녀리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에 도달했다. '마녀 종언의 저주'를 덧씌워서 내게 걸린 이 영원한 11살짜리 몸에서 벗어나게 해줄 거라는 이야기.


"마, 말도 안 돼....... 그럴리 없어."


"몇 번을, 몇 번이고 도전해서 겨우! 겨우! 여기까지 도달했는데.......! 이, 이제 겨우 완성했다구요?"


"그런 이야기를 날 더러 믿으라는 거야? 기가 막혀서......"


 주절주절 몇 번이고, 날 설득해보려던 희나리는 내가 검을 내리자마자, 희번득이는 안광으로 살기를 내뿜으며, 물흐르듯 바닥에 떨어진 검을 그대로 뽑아들더니, 무녀리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진했다.


"너만!!!! 너만 죽으면!!!! 내가!!!!! 우리가!!!!! 해피엔딩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깡-! 빠악-!


 검집에 넣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내 검이 가까스로 희나리의 검신에 닿자 그대로 희나리의 검은 아까의 일격 탓에 약해진 것인지 두동강이 나버렸고, 난 녀석을 발로 차서 무녀리와 떨어뜨렸다. 갑작스런 터라....... 힘조절이 조금 엇나갔기에 걱정이 되었지만, 혼란스러운 머리가 도저히 정리가 되질 않았다.


"희, 희나리......!"


"아니야! 저건 네가 알던 그런 게......! 십중팔구 가짜잖아! 저런 건!"


 마녀로 각성한 덕분인지 거의 빈사 상태였던 몸을 어느 정도 회복한 무녀리는, 그대로 바람빠진 동네어귀에 있는 귀신 축구공처럼 진흙에 쳐박힌 희나리를 걱정했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내용물이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조금 안도했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는 이 녀석을 옹호할 어떤 방법도 수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어쩌지?! 머리속부터 가려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케흑! 케흑! 아하핫, 이건...... 정말로 상정 외네요...... 선생님이 내가 아니라 그 년을 선택할 줄이야......."


 영락없는 내가 소년 시절 토벌했던 마녀의 모양새가 되버린 무녀리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고있을 때, 그대로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희나리인지 아닌지 전혀 모를, 그러나 그녀와 똑같이 생긴........것은 자신의 부러져 버린 검을 보며 원망스럽게 중얼거리더니, 나를 바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부러진 장난감으로 선생님을 상대하겠다고 덤벼들었다간, 다음 기회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겠네요....."


"하하, 진짜 희나리였으면 칭찬을 해줄 솜씨였어...... 더 해 볼래?"


 그대로 희나리는 이내 체념한 듯 하더니, 그녀는 허공에다 대고 속삭였다.


"필연적으로 맞부딪힐, 영구 순환의 교차로, 진실도 거짓도 하나 더 보탤 수 없는 천칭이여, 그 순례길을 순리대로 건너리니......."


"뭐, 뭘 하는 거야?"


 내가 무슨 반응을 하건,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내가 가르친 일도 없는 말을 하나 싶더니 그대로, 그 조각난 검으로 허공을 내어 갈랐다. 그러자, 희나리의 머리칼색보다 좀 더 짙은 허공 속의 균열이 보였다. 세계 종언을 막아낸 역천의 용사인 나조차도 본 적 없는 완전한 이국인지 이계인지 모를 마법인지 도술인지 감이 안 잡힌다. 딱 하나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형편 좋게 열어젖힌 허공의 균열, 거기에 발 하나를 넣어 걸친 채로 


"이걸 열어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후훗, 다음 번엔 안 질 거예요!"


그렇게 여느 때처럼 해맑게 웃는 희나리를 향해 나도 어깨에 칼을 얹으며, 살짝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마 차원의 틈새라던가 예전에 마왕군이 트랩을 짤때나 매복을 만들 때 쓰던 그런 거니까 저렇게 도망친다면 한동안은 오히려 안심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 칼밥 인생 38년, 그런 말 하는 녀석치고, 날 이긴 놈은 여태까지 한 놈도 없었거든. 하하. 늙어죽을 때를 기다리지나 말라고, 알다시피 그럴 수도 없으니까."


"응, 이제 겨우 21136번 째니까....... 나의 가장 사랑하는 스승님........ 21137번째에겐 반드시 이길 거니까......."


그러고선 그대로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그 균열로 천지를 에워쌌다. 맙소사! 이건 대체......! 나는 재빨리 검을 들어서, 희나리를 겨누고 달려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세계가 정지한 듯, 내 몸은 전혀 다가가지 못 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응, 응, 스승님은 아직 어린아이니까.......딱 이 정도 치사함이 중요하더라....... 자고 일어나면, 그 날부터, 다시 시작이니까........ 잘 부탁......"


마지막에는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게 모든 것이 멀어져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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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발! 비.....! 빌어먹을!"


 나는 허공에 그대로 팔을 검이라도 쥔 듯이 내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한낮의 여름 무더위가 온 몸을 적신 끈적한 땀으로 대변되고, 매-앰 매-앰 여름 벌레 울음소리가 있었다.


"히, 히약! 스, 스승님?!"


 그리고 자습이랍시고, 글을 읽혀둔 채로 내버려 두었던 숙식을 함께 하는 유일무이한 문하생 '희나리'는 별안간 내가 소리를 지르며 일어난 탓에 존나 불안한 모양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고지식한 면이 있는 터라, 진짜 목이 타거나 꼼질거리고 싶을 법한데도, 책장이 넘어간 수와 떨어뜨린 땀방울 등을 보아하니, 진심으로 임한 모양이었다.


"하아, 이 요령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너 진짜 농땡이도 필 줄 모르냐? 따라와. 물이라도 좀 마시고 목욕도 하자. 졸라 끈적이네"


"아, 네엣! 스승님! 그, 근데, 아까 대체 무슨 꿈을 그리 요란히 꾸신 건가요?"


 분명 그리도 분하고, 말도 안 되는 전개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 했던 기분이 드는데, 묘하게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다 자랐을 이 녀석의 얼굴이 상상이 가는 그런 꿈이었던 것 같은데.......으음, 더워서 그런 건가? 젠장, 나는 도저히 제대로 돌지 않는 머리에 짜증스럽게 욕탕의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탕-


 그 때, 팔을 슬슬 걷어붙이는 내 소매를 붙잡고서 희나리가 머뭇머뭇 몸을 꼬면서 말했다.


"어, 저어, 스승님...... 아무리 그래도 저, 저는 여자인데, 같이 씻는 건 조금......"


"그, 그럴리가 없잖아!!!! 바보야 난 물만 퍼다 주고 난 비켜줄 거라니까!"


"흐이잉!"


 하아, 이 애물단지를 건네받은지 벌써 2달인가?......앞날이 다 캄캄하다. 나는 물을 목욕통에 퍼내리면서, 딱 저 바닥이 안 보이는 깊이가 딱 내 수심의 깊이구나 하면서, 희나리의 몸을 훑었다. 아이고. 그나저나 난 외형만 애새끼라지만, 이 녀석은 그래도 고기반찬이라도 먹어야 저 빈상한 몸이 나올 곳 나오고, 들어갈 곳 들어간다. 이거일텐데, 오늘 밤에는 슬쩍 늘 트집을 잡아서 삥을 뜯던 부둣가 양아치 녀석들이라도 털어볼까? 오늘도 착실하게 나쁜 짓을 해줘야 할텐데.......


"흐음....."


 이런 시덥잖은 나한테, 이것 저것 곤란한 것들을 물어온다거나, 착실히 눈치를 보면서도, 거스르려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점이 가상하긴 하지만, 평화의 시대 칼밥 먹고 살기는 빠듯 그 자체인데, 내 붓은 좋게 말해도 길다곤 못 하니까.......


"스승님.......? 저어, 물 넘치고 있는데요?"


이런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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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쓰려던 소설의 결말부는 꼭 쓰고 싶어져서 그만 저지르고 말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