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께가 타오른다.

불인가 싶어 언저리를 부여잡자 만져지는 것은 차게 식은 핏물뿐이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두통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젠장할….”


정녕 우리들은 패하였단 말인가.

수호의 뜻을 품은 모든 정파 무림의 고수들이 합세한 전쟁이었다. 패할 수는 없었다. 아니, 패배라는 상정조차 할 수 없을 사투였다.


그럼에도 패하고 말았다.


상대는 거대한 군세가 아니었다.

금기시된 사술을 쓴 것조차 아니었으며, 또한 갖은 묘책으로 비겁이 전투에 임하지도 않았다.


그저 순수한 힘의 격차였다.

말로 표현하기조차 너무나 아득한 힘.

감히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극명히 나타나는 천부.


모든 결과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의 패도.

천지를 부수고 망망한 바다조차 가르는 정점의 영역.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자들이 경배할 정도의 찬란한 권세를 지닌 이.


천마 천예린.

그녀가 당연하게도 무림을 정벌했노라고.


저잣거리에서 설서인(說書人)이 방정맞게 떠들어대는 흔한 삼류 소설의 결말처럼. 전투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었다.


피로 물든 시체들을 지르밟으며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그만 끝내시오…”


고개를 푹 숙였다.

꺼져가는 숨을 간신히 부여잡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다만 돌아온 것은 따스한 손길이었다.

붉은 선혈로 물든 손이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대체 뭣 하는 짓인가. 영문을 몰라 흐려지는 두 눈을 깜빡였다.


“어찌하여 내가 그대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는가. 본좌는 그대를 죽일 생각이 없노라. 나의 협객이여.”


상냥한 투로 웃음 짓는 천예린.

그 모습에 끝없는 의문이 이어졌다. 어떠한 연유로 저런 기묘한 언행을 한단 말인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이윽고 속으로 해답을 내린 내가 피섞인 울분을 소리쳤다.


“생사결의 전투에서 패한 이를 끝끝내 조롱할 셈이냐!”


명백한 조롱이었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하여 상대의 의지까지 짓밟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가. 결단코 네 그 오만한 생각대로는 되게 하지 않겠노라.


남은 모든 힘을 다해 정신을 다잡았다.


진기를 강제로 역류시켰다.

본디 정방향으로 순환되는 내기를 역으로 행한다는 것은 곧 자멸을 뜻하는 행위.


설령 작은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동정에 빌붙어 살지 않음으로써 녀석의 자존심 아주 조금. 그 편린이라도 흠집 낼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것을 본좌가 허락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측은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예린이 어느샌가 나의 귓가로 다가왔다.


“본좌에게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와 동시에 나의 단전을 쥐어잡은 천예린이 자신의 내기를 나에게 흘려 넣기 시작했다.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고통. 자연스레 입에서 격통 섞인 비명이 터졌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이상하리 만치 뜨겁게 발열하는 내공. 

강력한 힘의 원천이 흘러들어 모든 혈맥을 깨운다.

그로 인해 단전이 터질 듯 팽창함이 느껴진다. 몸 구석구석 스며드는 천예린의 내공.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될 텐데.

서둘러 자결하여야 긍지를 지킬 수 있을 터인데.

야속하게도 눈꺼풀은 추를 단 듯 무거워졌다. 그렇게 나의 시야는 암전 되었다.



* * *



눈을 뜨자 마주한 것은 익숙한 풍경.

찌뿌둥한 몸과 함께 깨어난 곳은 다름 아닌 나의 침소였다. 


언제나처럼 평화로 가득 찬 고요한 침실.


“꿈…. 이었던 것인가.”


그래. 그 모든 것들은 꿈이었다.

두 번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을 끔찍한 악몽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맹주였던 나의 아버지와 그 어깨를 나란히 하던 절세 고수들이 모두 전멸했다는 것은 사실상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이 어찌 현실일 수 있겠는가.


“마용 거기 있는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종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시종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방문으로 향했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적막으로 가득 찬 복도가 드러났다. 본디 사람 소리로 시끌벅적해야 할 집안이 이리도 조용하다니. 본 적 없는 풍경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인기척이 없을 수가 있나.’

 

걸음이 빨라졌다.

기묘한 집안 모습에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집무실에 있을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아무리 꿈이었다 해도 도저히 가만히 손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 천마가 중원을 침략하러 올지 모르는 마당에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맹주, 아니 아버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급함에 문을 두드리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답이 없었기에 그냥 들어갈까 갈팡질팡하고 있을 무렵. 문이 절로 열렸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일단 나는 집무실 안으로 향했다.


아버지의 의자는 반대로 돌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누군가 앉아있었다. 아버지인가 하여 포권을 취하려던 찰나,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는 행동을 멈추었다.


끼이이이익-

의자가 다시금 제자리로 회전했다.

암흑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이의 모습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극심한 충격에 머리를 감싼 채 중얼거렸다.

의자에 앉아 거만하게 자신을 내려보는 이.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도포를 걸친 그녀. 마교의 수장 천마 천예린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나른한 꿈에서 깨어라.”


그녀의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 모든 일들은 현실이었다.

우리들은 마교의 침입을 저지하지 못했고, 결국 천마에게 중원으로 내어주고 말았다. 저항한 모든 이들은 끝끝내 최후를 맞이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살렸지! 어찌하여 나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정도 무림을 쇠락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적이라면 맹주의 장자인 자신의 자결을 막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비참한 기분에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렸다.


어느샌가 다가온 천예린은 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따스한 온기가 입술을 통해 전해지며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푸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체 어디까지 사람을 조롱해야 만족하실 겁니까!”


당황하며 소리치던 내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칭하길 피도 눈물도 없는 천(天) 가의 마귀.

천마(天魔). 아무런 감정의 변화 없이 인간을 학살한다는 뜻에서 붙은 별칭이었다.


그녀에겐 오로지 살육만이 유일한 쾌락일지언데.

방금에 입맞춤 직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은 한껏 고양된 듯 붉게 상기된 채였다.


“아아, 바로 이것이 쾌락. 심장이 고동치는구나.”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리는 그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왜? 그 원초적 의문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두려운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자 이번엔 분이 차올랐다.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나는 소리쳤다.


“당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젠장할! 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를 알려달라고!”

“처음으로 느낀 나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라니….”

“마교의 주인이 아닌 오롯이 나 자신의 의지에서 파생된 강렬한 열망 그것이 나를 잡아끌었다.”


그녀가 흉터가 새겨진 나의 손을 쥔 채로 손을 살폈다.


“오직 나를 위해 생긴 상처. 이것을 보니 도저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어진다. 자꾸만 아랫배가 떨려와서 이상한 기분을 참을 수 없단 말이다.”


나는 무심결에 뒷걸음질 쳤다.

광기로 가득한 저 붉은 눈동자에 집어삼켜질 것만 같아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서서히 내게 다가오며 이야기했다.


“교인들의 숙원이었던 중원을 정복했으니, 교주로서의 책무는 다했을 테지. 파천 따위 이젠 아무래도 좋다. 본좌, 아니 나의 새로운 하늘은 너니까.”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천예린이 순식간에 나의 어깨를 붙잡고 그대로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문득 공포감이 들이닥쳤다.

지금 도망치지 않는다면 이 여자에게서 두 번 다시 벗어날 수 없다고 본능적 직감이 고성을 쳤다.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이 나를 지배했다.


내게 올라탄 천예린을 힘껏 밀쳐버리곤 그대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애석하구나.”


희미하게 들려온 그녀의 말소리.

순간 그와 함께 몸 안에 모든 혈맥이 터질 듯 팽창하기 시작했다. 혼절할 듯한 고통에 도망치던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비명을 내질렀다.


마치 몸 안에 흐르는 모든 내기가 폭주하는 듯한 현상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그때. 


무언가가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그녀의 능후한 진기가 나의 몸을 잡아끌었다.

아무리 저항해 보아도 거대한 그 내공의 힘 앞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대체 무슨 짓을….”

“그대의 몸속에 들어간 것은 평범한 내공이 아니다. 오직 나만이 제어할 수 있는 혈기(血氣). 마음만 먹는다면 그대를 죽이는 것도, 죽을 만큼의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니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거라.”


대체 나에게 왜 이런 짓을.

뭘 잘못했다고…. 그저 위험에 처한 그녀를 구해줬을 뿐이다. 따지자면 은혜를 베푼 격. 그런데 어째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냔 말이다.


“제발, 제발…. 싫다고! 당신이라면 자신의 모든 걸 박살 내버린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진심을 내뱉었다.


“내가 네 모든 걸 가져갔으니, 이젠 네게 내 모든 걸 주겠다. 그거라면 정당한 거래 아니던가.”

“웃기지 마!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야!”


제정신이 아니다.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저 괴물 같은 여자는 보통 사람과는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궤를 달리할 만큼의 인물이다.


나는 그런 광인의 눈에 띄어버린 것인가.


“그럼 차라리 죽여! 왜 살려두는….”

“결정은 네가 내리는 것이 아냐. 나는 한번 마음에 든 것은 모두 가져야 할 만큼 탐욕적인 인간이니까.”


뒤로 쓰러진 나의 몸 위에 찬찬히 올라탄 그녀가 기쁜 듯이 귓가에 속삭였다.


“세상이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있자.”



 * * *



무구한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천예린. 새외(塞外)인 신강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부모와 함께 평이한 삶을 영위하던 아이. 


그런 소박한 일상은 불과 수시간 만에 완전히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모조리 죽이고 탐하라!”


근방에서 세를 떨치던 도적 무리의 습격.

마을은 불바다가 되었고 도망치던 사람들은 도적들의 칼끝에 참혹한 끝을 맞이했다.


강제로 범해지는 아녀자들의 통곡소리와 도적들의 경박한 함성이 뒤섞여 소녀의 마을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는 도적의 칼에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어머니는 예린을 지키기 위해 도적을 유인하다, 그만 그들에게 붙잡혀 끔찍하게 유린 당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자신들을 희생해가며 내어준 시간은 그녀에게 최후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어린 천예린은 간신히 마을을 빠져나와 달렸다.

며칠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앞만을 본 채 내달렸다.


험준한 신강의 지형은 어린 소녀가 감당키엔 아득한 고난이었으나, 천예린의 소망은 단 하나. 도적들에게 인질로 잡혀 지독한 꼴로 범해지고 있을 자신의 어미를 구하는 것.


그를 위해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를 찾는 것.


그것만을 위하여 소녀는 발톱이 빠지고 발목이 퉁퉁 붓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에 천예린은 예전 아비가 해준 이야기를 되뇌었다.


“예린아. 이 세상엔 협객(俠客)이란 이들이 있단다.”

“아버님 협객이 뭡니까?”

“자신의 안위보단 타인의 위급함을 위해 나서는 이들이란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기꺼이 돕는 이들. 그들이 바로 협객이겠구나.”

“우와아…. 협객이란 분들은 참 대단하신 듯 하옵니다!”

“하하, 우리 예린이에게도 나중에 큰 위험이 닥친다면 그 협객이 꼭 찾아올 것이니 염려치 말거라.”


협객. 그들을 찾아야만 했다.

며칠이나 산길을 내달렸을까. 천예린의 눈앞에 무인의 행색을 한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복장과 모습으로 판단된 그들은 도적이 아니었다.


“강 형 그래서 그때 내가 어찌했냐면. 놈을 아주 그냥 반을 죽여서…. 응? 넌 누구지.”

“호, 혹시 정파(正派)에 속한 분들이십니까…?”

“그렇다만. 우리에게 무슨 용무라도 있느냐?”


얼핏 들어본 적 있다.

잘은 모르지만 중원 무림은 크게 정파(正派)와 사파(邪派)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데. 흑도(黑道)를 걷는 사이한 사파의 사람들과 달리 정파인들은 정도(正道)를 지향한다고.


천예린은 생각했다.

바를 정(正) 자로 자신들을 칭하는 이들이라면 분명 선뜻 나서서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마치 아버님이 이야기해 주셨던 그런 협객들처럼.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간절한 어린아이의 동심을 가차 없이 깨부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물론 도와줘야지. 암 도와주고 말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그런데 꼬마 아가씨. 우리가 네 부탁을 들어준다면 뭘 해줄 수 있지?”

“네…? 그게 무슨….”


한없이 염세주의적인 그의 태도에 천예린은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분명 아버님은 그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타인의 위급함을 돕는다 하셨는데.


“그, 저는…. 저….”


자신처럼 어린 소녀가 대가를 충당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 사내들은 명백히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라고.


“크하하하! 이보게 어린애를 놀리는 것은 그만두지? 자네도 가만 보면 성격이 참 더럽단 말일세.”

“강 형이 할 소립니까? 그래도 뭐 고된 여행길에 재미있었으니 그걸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사내들은 그대로 천예린을 지나쳐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번뜩 차린 그녀가 울면서 그들의 바지 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제발 한 번만 어미를 구해달라고. 원하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마련해서 주겠다고.


그들이 뿌리치면 계속해서 따라붙어서 애걸했다.


“이런 정신 나간 애새끼가!”


그러나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스스로를 정파라고 주장한 이들은 열댓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를 고작 자신들을 귀찮게 했다는 이유로 가차 없이 폭행했다.


“그, 그만해에…. 잘못했어요….”

“후우….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한 번만 더 귀찮게 하면 다음은 이게 나갈 테니 심기에 거슬리는 짓 하지 말거라.”


그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들곤 그녀의 목에 겨누며 경고했다. 극한의 공포에 다다른 소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허무함에 반쯤 넋이 나간 채 천예린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혹여 도적들에게 붙잡혀 끔찍한 꼴을 당하더라도, 어머니에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 따스한 품 속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고 싶었다. 


꼬박 일주일 가까이 굶은 탓에 피골이 상접한 그녀가 다시금 당도한 마을의 초입. 소녀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뾰족한 대나무 끝에 관통당한 잘린 목들.

수십 개의 대나무들 중 마주친 익숙한 얼굴. 생채기로 가득 찬 어미의 목과 대면한 순간. 그녀의 머리에서 무언가 끊어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강해져야 한다. 강하지 않으면 당해버린다. 약자 같은 건 죽어버리는 게 당연한 거였잖아.’


감정이 짓뭉개진 그녀의 머릿속엔 그 생각만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세상에 대한 무한한 원망.

그것이 그녀를 행동케 하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가식과 허울뿐인 정도(正道) 무림을 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이자 삶의 의미였다.


천예린은 수련에 매진했다.

그저 미친 듯이 검만을 휘둘렀다.

손바닥이 다 터져 피가 새어 나와도, 혹사한 팔근육이 찢어지더라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기구한 명을 타고난 그녀를 하늘이 동정이라도 했던 것일까. 


마침내 그녀의 재능은 발현했다.

범인(凡人)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양의 선천 진기. 그리고 고작 눈으로 훑어본 정도로 타인의 무공을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을 천부적인 재능까지.


강대한 재능에 뼈를 깎는 노력까지 더해지니, 고작 스물의 나이에 그녀는 이미 무림에서 칭하는 십 대 고수와 맞먹는 무력을 지닐 수 있었다. 하나, 그녀는 고작 그것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높은 경지를 원했다.

그 때문에 천산의 한 가운데 신교를 세웠다.

널리 퍼져있는 무림인의 수만큼 무림을 증오하는 이들도 많기 마련. 신교는 어느새 거대한 규모로 성장해 중원 무림을 위협했다.


그녀는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을 통하여 강해지기 위한 미약한 결과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헤아릴 수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대가로 결국 그녀는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무림에서는 철저히 터부시되는 사술(邪術).

인간의 피를 흡수함으로써 신체와 내공을 강화시키는 금단의 무공.


혈마공(血魔功).

이를 완성시킴으로서 그녀는 기어코 무림의 일인자라 일컬어지는 십 대 고수의 일존인 무림 맹주를 능가하는 데 성공했다.


모든 사전 준비는 끝났다.


이제 곧 자신의 손으로 멸할 중원 무림.

그녀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직전. 뿜어지는 살기를 억누른 채 무림맹의 본영이 위치한 낙양의 거리를 거닐었다.


세간에 단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길거리를 거니는 그 누구도 그녀가 감히 천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참으로 태평하구나. 본인들의 미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로….”


곧 모든 것이 절망으로 물들 터.

찰나의 평화라도 즐기는 편이 그들에게는 좋은 편일까.

당장 내일이면 비명으로 들어찰 시장 골목은 아직까지 시끌벅적 생기가 넘친다.


“젠장…! 비켜! 뒤지기 싫으면!”


험상궂게 생긴 사내 하나가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손에는 단도를 쥔 채 한 쪽 손엔 누군가에게 빼앗은 듯한 은자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고작해야 삼류 수준의 남자가 휘두르는 단도 따위가 그녀에게 해를 끼칠 리 만무했기에 피하지도 않았다. 칼날이 닿기 직전에 피할 생각이었으나,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발생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큭…. 괜찮습니까 소저…?”


예린을 감싸 안은 채 힘겨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남성.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웃음 짓고 있었으나 이미 강도의 단도가 그의 손을 꿰뚫고 나와 있었다. 붉은 선혈이 그의 손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육안으로 보이는 남자의 기운은 잘 춰줘봐야 절정의 초입. 현경의 극에 다다른 자신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한 차이였다.


“어찌 나를 구했는가. 그대와 나는 초면일 터인데.”


정말로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된 물음.

그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였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그는 입을 열었다.


“사실 왜 그런 건진 저 역시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리 되어 있더군요. 하하 더럽게 아프네요.”


웃기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런데 가슴은 왜 이리 두근거리는가. 

일평생 검만을 휘두른 그녀에게 이러한 감정의 고동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냥, 그냥 조금 알고 싶어졌을 뿐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평생 미동조차 없던 천예린의 표정에 미약하게나마 변화가 일어났다.


“현무휘. 현무휘라고 합니다.”


이름을 듣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맹 내부에 심은 첩자들의 첩보로 귀가 닳도록 들었던 그 이름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정파 무림의 맹주.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현무휘였다.


우둔하고도 어리석은 남자.


자신이 지금 누굴 구하려고 한 것인지나 알까.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찰나의 오판에 몸을 맡긴 것인가.


“그 손…….”

“아, 이 손이라면 그리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제가 자초한 일이니까요.”

“그대는 무인이 아니던가. 그런 상태라면 당분간은 검조차 제대로 쥘 수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하하 이것 참…. 이미 몇 번이고 말씀드렸지만 이 모든 건 제가 결정한 일입니다. 소저는 제게 어떠한 보상도, 책임도 디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둔하다 못해 머리가 비어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 역시 한평생을 무(武)에 바친 몸. 무인에게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생면부지의 인물을 구했다니.


그런 건 마치, 마치… ‘협객’이 아니던가.


아냐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그때도 정파인들은 자신을 돕지 않았다. 세상에 협객 같은 것이 존재할 리 없다. 그렇게 믿고 현재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남자를 봐버리면 그동안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은 어찌하란 말인가.


잊고 살았던, 아니 애써 잊으려 했던 기억.

그것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감정을 잃은 그녀의 눈에서 십수 년 만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다 괜찮습니다. 소저의 마음을 이리도 두렵게 만든 자도 이젠 사라졌으니. 소저의 눈물이 멎을 때까지는 제 품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정신없이 울었다.

어찌 보면 원수 사이라고 할 수 있을 한무휘의 품을 끌어안고 그녀는 목놓아 울었다. 허무하게 살해당한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애정. 결핍된 감정들이 하나 둘 깨어나며 자신들을 충족해 하라고 아우성쳤다.


묵묵히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위로하는 무휘를 바라보곤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이 사랑. 사랑이라 칭하는 감정이구나.’


더욱더 강한 힘을 추구하는 것만이 생의 전부였던 그녀에 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협객, 그대는 협객이 틀림없다.”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말해주시니 부끄럽네요.”

“심판의 때에 맞이하러 가겠다. 협객이여.”


멸정(滅正)에 예외를 둘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예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정파가 아닌 자신에게 속한 이라면 처단치 않아도 되리라.


부디 얌전히 기다리고 있기를.


오직 나만을 위한 영원한 협객님.




* * *



한때 파천(破天)의 뜻을 품은 이가 있었다.

강자존 약자멸(强者存, 弱者滅) 그것만이 삶의 가치관이던 어리석은 이가 있었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서도 늘 지독한 허무에 휩싸였던 아둔하고도 탐욕스러운 이가 있었다.


극악의 가면을 쓴 채로 역천의 검을 휘두르며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채우려 안간힘을 쓰던 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드디어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오직 자신만의 협객을.


“그만, 오늘은 부디 그만해….”

“아니 될 이야기다. 밤이 이리도 길게 남지 않았던가. 이 정도에 만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조금만 더….”

“제발... 누군가 구해줘…!”

“누군가 올 리 없지 않은가. 혈마공의 모든 초식을 동원하여 만든 결계를 뚫을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나 이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도망치려 바닥을 기는 남자를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듯 끌어안는다.


“사랑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해. 영원히 함께 하자 나만의 협객님. 아니 낭군님♥


훗날 이야기 하나가 구전되어 전해진다.


중원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 탐욕스러운 천마.

그녀는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을 찾아내었다. 하나, 그것을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던 나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장소에 꼭꼭 숨겨 오직 자신만이 독식하였다.


그러나 우연찮게 그 근처를 지나던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리 이야기했다.


‘남자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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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무협 도전해 봤는데 재밌게 읽었으면 좋겠네.

뭔가 무협 세계관 고증에 안 맞는 게 있었다면 미안해ㅋㅋ 나도 막 깊게 파본 사람도 아니고 무협은 웹툰으로 본 게 거의 전부라 잘 모르거든.


암튼 무협 배경 얀데레는 색다른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