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새하얀 비가 온다. 


검은 새벽이 자정을 말없이 지나갈때. 너는 아마도 술김인지도 모를 입으로 하얀 입김을 내보내며 말했다. 텅 빈 허공엔 헤어지자는 말이 울렸다. 그 뒤로 나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불쌍해서 사귀어줬고, 이렇게 추할줄은 몰랐다는 등. 온갖 이유를 대고 일방적인 통보를 한 채 네가 돌아섰다. 


사귄지 3년째 되는 기념일이었다.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네 앞에서 익숙한 반지가 바닥에 튕겼다. 금색의 밋밋한 커플링이었다. 순간 끔찍하게도, 일말의 감정도 남지 않은 채 내 안에서 완전히 끝나버린걸 예감했다. 머리가 아파왔다. 그녀와 똑같이 커플링을 버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억지로 집으로 걸어가 쓰러지듯이 이불에 누웠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 뒤로 1년. 매일 식은땀을 흘리며 꾸는 악몽은 안타깝게도 현실이었다. 왼손 약지의 커플링은 이미 책장 구석에 박혀 먼지가 쌓여가고 있었고, 책상 위의 약봉지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휴일을 맞아 책상 위의 찢어진 약봉지를 치우던 도중에 구석에서 안쓴지 오래된 구형 스마트폰을 발견했다. 


그날,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았던 날. 술이 다 깬 뒤 자신이 말을 실수한거라고. 미안하다고. 통화의 뒷편에서 울부짖는 그녀의 연기는 수준급이었다. 


그녀의 술버릇은 솔직해지는 거였다. 술을 마시면 항상 커플링을 보고 미소를 짓고 늘 사랑한다고 지저귀었던 그녀가 무표정으로 커플링을 바닥에 던지고 욕하며 영원히 사라지라는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금이 한번 가면 이어붙여도 언젠가는 깨지게 되어있었다. 그녀는 이미 내 안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흐느끼는 소리만 나오는 통화에 네가 어제 새벽에 했던것처럼 꺼져준다고 말한 뒤 통화를 끊었다. 용서는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고 정은 이미 떨어질대로 떨어진지 오래였다. 한때 결혼까지 생각했었지만 이젠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미친듯이 울리는 스마트폰의 전원을 끈 뒤 베개에 울리는 머리를 묻었다. 


추한 방법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계속 후회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때 탄 하얀 스마트폰을 구석에 박아놓고 같은 모델의 검은색을 개통한 뒤 가족과 믿을 수 있는 친구들과만 통화했다. 이미 소문이 퍼져 쓰레기 새끼로 낙인찍힌 대학교를 자퇴한 뒤 내려와 알바를 뛰었다. 그러다 직장을 얻어서 다니고 있다. 


언뜻 그때가 생각나 나도 모르게 몸을 떨며 구형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통신사 로고가 잠시 뜨더니 화면이 켜졌다. 옛날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느렸다. 


[지현 (1237)] 


켜지자 마자 눈에 보이는건 통화 1200통. 각종 메세지 앱들은 메세지가 너무 많이 와 오류가 난건지 숫자가 깨진 채로 있었다. 신경쓰지 않고 그냥 게임을 켜서 했다. 근 1년만에 하는 모바일 게임은 익숙하지 않아서 헤매다 그냥 폰을 베개 위에 훅 던졌다. 


검은색 스마트폰에서 듣기 싫은 전화벨이 울렸다. 

[중부 3팀 김신형 팀장] 


재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담당 구역 MD가 사고를 쳤다는 급보였다. 양복을 입을 새도 없이 대충 옷을 챙겨 입고 나갔다. 



구형 스마트폰의 화면이 진동과 함께 잠시 켜졌다. 


[지현: 잘 다녀와] 


대답 없이 화면 위를 떠다니는 배웅은 천장 위 반짝이는 렌즈와 마주친 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