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졌다.


그냥 진 것도 아니고,

남자는 여자에게  철저하게 처발렸다.


남자는 도전자로써 흑돌을 잡고

명인은 백돌을 잡고

6집 반의 덤을 고려해도


명인이 도전자보다 많은 수의 집을 앞선 채로 끝내기 단계에 들어갔다.

중계진들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여자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다.


아직 머리를 싸맨 채 계시원이 읽어주는 초읽기 시간을 허비하는 남자와 달리

중계진들은  좌상귀에서 벌어진 난전에서 남자가 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명인의 묘수가 어디서 작렬햇는지 평론하기 바빳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엿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남자는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이정도 차이에서 끝내기의 초읽기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들여가며

시간을 낭비하는것도 결례다.

적당한 시기에 돌을 던져 항복을 선언해도 무리가 아니다.

중계화면 한쪽 모서리엔 AI가 명인이 잡은 백의 승리를  95% 이상으로 예측한다.


남자는 이기기 위해서 초읽기 시간을 허비하는게 아니다.

단 한집이라도, 

아주 작은, 단 한집이라도 여자에게서 뺏어와

내일 자 바둑신문에 실릴 기보의 집 수 차이를 줄이고자 한다.


그리고 남은 일말의 희망마저,

컴퓨터가 계측한 5%승률마저 여자가 날카로운 수로 막아버렸을때


“졌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였다.


두 남녀는 마주앉아 가볍게 목례를 하고

계가를 마치고 복기를 하며 토론을 한다.


프로 바둑기사들은, 경기가 끝났다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진 사람이든, 이긴 사람이든 바둑판을 비우고

다시 처음부터 수순에 따라 돌을 놓으며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E스포츠로 판이 넘어오면서 이 ‘복기’의 행위가

‘최고의 플레이’라는 명장면 다시보기로 변화되기도 했지만

‘인성질’, ‘티베깅’이라며 폄하되기도 한다.


바둑에 있어서 복기는 대국을 완성시키는 중요한 요소중 하나다.

승자라고 해서 완벽한 대국을 펼친게 아니고

패자라 해서 경기중 묘수가 없던게 아니다.

361칸의 바둑판에서

패자가 차지한 집도 있고

승자가 차지한 집도 있다. 


수험생이 오답노트를 정리하듯

바둑기사들은 복기를 하면서 자신의 실력을 한 단계 위로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 부분은…”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기…”


“...”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토론이 되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이 진 이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포석을 좀 더 날카롭게 만들 기회도 잃어버린다.


“하아…. 이만 마치겠습니다.”

남자는 옆에 있는 기록원에게 말을 건네고

바둑알을 정리한다.

여자도 자신의 백돌을 잡아 바둑알통에 집어넣는다.


십여분 뒤,

사진기자들 앞에서 여자는 명인전 우승 트로피와 상패를 들고,

남자는 준우승 상패를 들고서 각각 사진을 찍는다.


곧이어 기자들이 마이크를 들고 여자 앞에서 온갖 질문을 건넨다.

“오늘 경기에 대해서 한말씀 해주시겠습니까?”


“...”


“이번에 다시 4년만에 열릴 응씨배에서 우승하실 자신이 있으십니까?”


“...”


여자는 머뭇머뭇,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조훈현, 이창호, 이세돌, 박정환, 신진서를 잇는 대한민국 바둑 최강이자 세계 최강의 기사.

여류기사 최강으로 회자되던 루이나이웨이와 최정을 뛰어넘는

살아있는 AI, 바둑두는 기계.

그것이 여자에 대한 세간의 평가이자,

이 파멸적인 언변까지 포함한 별명이자 멸칭이기도 했다.


한국에선 그나마 차도녀 정도의 이미지를 가지지만

국제기전에서 그녀가 두각을 나타낸 뒤론

일본에선 설녀로,

중국에선 한술 더 떠서 나찰녀로 불리운다.


아무런 말 없이, 어떠한 표정의 변화나 감정 표현도 없이

바둑판 위에서 상대의 수를 철저하게 박살낸다.


“오늘 대국의 54번째 수가, 중계진들 사이에서 묘수로 거론되는데요.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리셨나요?”


“그 수가…”

드디어 여자가 입을 뗀다.

기자들은 반대로 입을 다물고, 여자의 작은 목소리를 캐치할 수 있게 마이크를 바짝 붙인다.


“그 수가… 정답이니까요”

일순간 흐르는 정적


말은 통하지만, 상대의 의중을 고려하지 않는 대답.


약간의 정적 뒤에 연신 카메라 셔터음이 울려퍼진다

기자들이 여자의 자극적인 대답에 앞다투어 추가질문을 건네지만

여자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서 멀어져간다.


—---------- 

[정답正答]


다음날 바둑신문 1면에는 여자의 기보와 함께 단 두글자가 큼지막하게 인쇄되었다.

인터넷에선 여러 사람들이 여자의 대담에 대해 논한다.

누군가는 커제나 이세돌처럼 한 때 잘나가는 기사의 버릇없는 호기라 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실력에 근거한, 하나뿐인 진실이라 평한다.


바둑 연구실에서 신문을 보는 대회의 준우승자

바둑계의 살아있는 콩라인

그마저도 초대 콩라인인 서능욱 기사에 밀려

2대 콩라인인 남자


남자는 그저, 그 여자 답다고 생각했다.


“너답다면 너답구만.”


“...”

옆에 앉아있는 여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저 눈 앞에 있는 컴퓨터에, 어제 남자와 두었던 대국을 기록한다.


그리고 한 수, 한 수

컴퓨터가 계산한 승률이나 최적의 수를

자신의 기억과 대조한다.


그녀에게 있어선 이것이 ‘복기’였다.


십여년 전, 컴퓨터 공학 박사 한명이 실험 하나를 계획했다.

그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를 보면서, AI의 가능성과 그 한계를 보았다.

AI는 인간을 뛰어넘는 계산력으로 당대 최고의 바둑기사를 압살하였으나

AI는 자신의 힘으로 바둑판 위에 돌 하나 놓지 못해 돌을 대신 놓아주는 대리기사가 필요했다.


결정적으로, 한 경기를 인간에게 패배했다. 

AI는 그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서도, 결국 인간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으며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인간의 창의적인 수에 대해선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박사는, AI와 인간의 능력을 융합하고자 했다.

자신의 실험실에, 은퇴한 한명의 바둑기사와

10살 남짓의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를 초빙했다.


그리고 바둑의 ㅂ도 모르는 두 아이들에게 

AI를 통한 바둑 학습을 시작했다.


먼저, 여자아이에겐 AI를 학습시키듯 바둑의 ‘룰’만 알려준 채로

무수한 대국을 통해 바둑 실력을 성장시켰다.


여자아이에 대한 교육은 컴퓨터 박사가 담당했다.


AI의 보조를 중점적으로, 승률이 높은 지점을 찾아 바둑돌을 놓아 나갔다.

그저 컴퓨터가 짚어준 높은 승률의 착점을

계속해서 외워나는걸 반복했다.. 


여자는 지금까지도, 묘수풀이나 정석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렇게 완성된 여자의 기풍은 “0 과 1”이였다.

무수히 많은 오답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정답.

그것이 여자가 바둑을 대하는 자세였다.


남자아이에겐, 전통적인 바둑학습을 컴퓨터 보조를 통해 진행했다.

사활이나 묘수풀이, 수읽기, 심리전을 교육시킨다.


은퇴한 바둑기사가 남자아이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다.


바둑 기사로써 상대하는건 결국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과거 데이터를 AI로 분석하고

상대방의 기풍을 읽어내고, 약한 지점을 찌른다.


수많은 지뢰를 깔아놓고, 상대방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며

잡아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연쇄적으로 터뜨린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상대는 아차하는 순간에 형국이 뒤집히고

돌을 던진다.

그것이 남자의 기풍이였다. 


뭇 바둑 기원에서 이야기하는 ‘ㅈ같이 두는 바둑’의 완성형이

남자가 바둑을 대하는 자세였다.


박사는 AI와 인류가 공존해 나아갈 방향성을 이 실험을 통해 알아내고자 했다.

영화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처럼 인류가 컴퓨터의 도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불이나 바퀴처럼 인류는 AI를 도구로 삼아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인가.


박사는 내심 여자아이를 가르치면서도 

남자아이의 실력이 더 뛰어나길 바랬지만

결과는 참혹하리만치 명확했다.


그렇게 컴퓨터 공학 연구실 부속 바둑교실에서

최연소 프로 바둑기사 두명과

최연소 바둑 명인, 국내 명인전 우승자가 탄생했다.


언제나 우승 트로피와 상패를 들고있는 여자의 옆에선

준우승을 기록한 남자가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실험을 마친 박사는 연구실을 폐쇄하고, 

대학 교수직도 내려놓은 채, 칩거에 들어갔다.

실험 결과에 따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AI에게 물어보고, 행동한다.


같이 연구실을 운영했던 은퇴한 바둑기사가

박사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유했지만

박사는 그것마저도 AI에게 물어보고 나서, 병원에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당대 최강의 바둑기사를 배출한 바둑교실은

하는 수 없이 은퇴한 바둑기사가 운영하는 기원으로 위치가 변경되었다.


기원의 사무실 안쪽엔, 박사가 남겨놓은 AI가 설치된 컴퓨터 한 대와

바둑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그게 지금의 두 남녀가 다니는  바둑 교실이다.


처음엔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뭇 부모들이 기원 안쪽의 사무실을 두드렸다.

어쩌면, 저 최연소 여자 명인처럼, 자신의 아이도 천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초라한 바둑교실의 상태와

인간미라곤 없이, 바둑두는 기계와 같은 여자의 모습을 보고선

어느 누구도 교실의 회원이 되고자 나서지 않았다.



“다 했어?”

단 둘뿐인 바둑교실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이야기를 한다.


“응”


“이제 밥 먹을까?”


“응”


“뭐 먹고싶은거 있어?”


“아니”

남자의 질문에 대해, 여자의 대답은 보통 ‘0과 1’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집 어때? 짜장면?”


“싫어”


“그럼, 쌀국수? 볶음밥?”


“싫어”


“햄버거는 안돼, 어제 먹었잖아. 자꾸 그런것만 먹으니까…”


“그럼 ㅍ…”


“피자도 안돼, 치킨도 금지”


“...”

말문이 막힌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본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돼, 운동도 안하고, 맨날 그런것만 먹으면 나중에 큰일 난다고”


“...”


“한국인이면 밥하고 김치도 먹어야지. 그런거에 방부제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있는데”

흡사 5살 어린아이를 달래듯, 남자는 여자를 타이른다.


“...”

여자는 꿈쩍도 하지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와 눈싸움을 한다.


“하아.. 내가 졌다. 그럼, 함바그 스테이크 해줄게, 대신 밥도 다 먹어야한다?”


“그래”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어낸 여자는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려 복기를 마무리한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마트로 향한다.

다진고기와, 돈까스 소스, 양상추와 샐러드 드레싱이 필요하다.


“선생님, 부르스타좀 쓸게요”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기원의 문을 빼꼼 열고, 손님을 맞는 자신의 스승에게 허락을 구한다.


“내가 기원에서 밥 해먹지 말라 그랬지!. 여기가 밥집인줄 알어?”

선생님이라 불린 은퇴한 바둑기사는, 남자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다그친다..


“아 쫌. 손님들도 다 짜장면 시켜먹고 그러는구만, 맨날 왜 나만가지고 뭐라그래요”


“꼬우면 니도 손님 하던가”


“교실 회비 저번 달에 냈잖아요”


“교실 회비를 냈으면 학생이지, 손님이야?”


“아 몰라, 이미 장보고 왔으니까  좀 봐줘요. 나보다 바둑도 못두면서”


“이~~~게!”


“으아아악!”

푸닥거리를 한번 하고 난 뒤에, 

남자는 등짝을 슬리퍼로 두드려 맞고 나서

바둑 교실에 요리재료와 휴대용 가스렌지를 들고 들어올 수 있었다.


다진고기에 소금간을 하고, 미리 다져놓은 채소를 섞어서 불판 위에 굽는다.

고기가 익는동안, 양상추를 자른다.


남자가 요리를 하는동안

여자는 햇반을 손님용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상 위에 놓인 바둑판을 치우고, 신문지를 깐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즉석밥을 가져오고 나선

의자에 앉아, 남자가 요리하는 모습을 쳐다본다.


“...”


“좀만 기다려, 거의 다 익었으니까”


“...”


“드레싱 소스는 키위? 마요네즈?”


“마요네즈”


“냉장고 안에 있으니까, 꺼내 줘”


“꺼내놨어”


“나 참. 이런건 또 빨라요”


“...”

여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나찰녀? 설녀?

남자는 세간의 평가에 코웃음이 나온다.

이런 반찬투정도 심하고, 속내가 뻔히 보이는 여자가 차도녀는 무슨


어제만 해도 바둑판을 앞에두고 전쟁을 하던 두 남녀가

이제는 나란히 앉아 프라이팬 위에 햄버그를 나눠 먹고 있다.


남자도 속이 상하지 않는건 아니다.

한때 세계 바둑을 주름잡던 조훈현 기사가

자신의 우승 타이틀을 하나씩 뺏어가던 내제자 이창호 기사와

같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 같이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그것도 지금처럼, 자신이 패배하고 난 바로 그날에.


우승을 매번 여자에게 밀려 따내지 못했던 남자가 

감히 과거 챔피언의 타들어가는 속내를 어찌 알까 싶다가도, 공감이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오물오물 햄버그를 돈까스 소스에 찍어 먹는 여자의 모습을 보면

바둑이고 우승이고 다 뭔가 싶다.


세상 수많은 바둑기사의 속내를 들춰보고, 연구하고, 떠보면서 살아왔고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못하는 여자의 속내를 부처님 손바닥 보듯이 알고 있지만

당췌 여자에겐 바둑을 이길 수가 없었다.


바둑을 둘 때 만큼은 오히려

남자의 의중을 여자에게 발가벗겨지듯이 들키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가장 깊숙히 파묻어놓은 대인용 산탄 지뢰를

여자는 자신의 백돌을 오함마삼아서 뻥 터뜨리고, 그곳에 자신의 진지를 세웠다.

 

“너, 응씨배 참가 신청은 했어?”


“...응? 그거..해야 해?”

여자의 반응에, 남자는 관자놀이를 부여잡는다.


“그럼 대회 안나갈거야?”


“아니”

처참한 여자의 언어구사력.


“아니.. 대회에 나가려면 참가신청을 해야지”


“지금까지 참가신청 해본적 없는데”


“..뭐?”


“해본적 없어”

여자는 샐러드 위에, 마요네즈 드레싱을 좀 더 뿌린다.


“옛날엔 박사님이나 선생님이 해줫다 치고, 그럼 어제 대회는 어떻게 참가한거야?”


“몰라, 한국기원에서, 그냥 오라고 했어.”


“..........뭐?”


“한국기원에서, 대회있으니까, 와서 바둑 두라고 했어”

오늘 들어서, 가장 긴 어절을 이야기한 여자.


“참 내. 이번에도 그럼 기원에서 오라니까 가는거야?”


“다음달에, 중국행 비행기 끊어 놨으니까, 여권들고 오래”


“나참. 챔피언은 이렇게 대우가 다르다 이거지. 왜?  5성호텔도 잡아놨다 하겠다?”

같은 교실에 있는걸 뻔히 알면서, 한국기원은 남자에겐 전화 한 통 없었다.


“응. 그래서 갈아입을 옷도 가져오랬어”

여자는 부모에게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을 이야기하는 학생처럼, 남자에게 말한다.


“아 몰라, 응씨배 가던가 말던가. 누구는 숙소도 알아서 예약하라는데”


“...넌 안가?”


“갈거야! 나도 응씨배 참가 할거라고”

무관의 왕자, 

그것이 남자에게 내려진 세간의 평가였다.


여자의 통산 전적은 승수가 그리 많지 않다.

최초의 우승 뒤로, 언제나 정점의 자리에서

올라오는 도전자를 하나하나 부수는게 그녀의 일이다.


어쩌다 한 경기를 빼앗기는 경우는 있어도

타이틀을 빼앗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전성기의 이창호 기사마냥 승률이 아니라, 대회 우승률이 그녀의 성적을 나타내준다.


반면에 남자는, 통산 전적은 여자보다 배는 많다.

여자처럼 100%의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기보가 아니기 때문에

까딱하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래도 승률이 꽤나 준수하고, 결승전에서 가장 많이 여자와 맞닥뜨린 게 남자다.


언제나 낮은 시드권을 손에 쥐고서

죽기살기로 경쟁자들을 밀어내고 절벽을 기어올라가

정상에서 기다리는 여자에게 깨지는게 남자의 일상이였다.


제왕은 될 수 없어도, 권좌에 가장 근접한 왕자의 자리가 그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였다.

남자는 왕자란 별명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준우승을 햇어도, 어제 경기에서 졌기 때문에 레이팅 점수가 조금 깎였다.

남자는 세계 3위, 대한민국 2위의 성적으로

국제기전인 응씨배에 참가한다.


“호텔은?”


“모른다니까, 내가 5성호텔 묵을 돈이 어딨냐”


“준우승 상금 있잖아”

여자는, 남자의 가장 아픈 부분을 아주 가볍게 파고든다.


“그거 다 쓰면 난 나중에 뭐 먹고 살라고”


“내가 밥 사줄게”


“얼씨구, 됐네요. 매일 피자에 햄버거에 라면이나 먹으라고? ”


“....그럼 넌 어디서 자?”


“몰라, 길바닥에서 자던가 해야지”

괜히 심술이 난 남자가 여자에게 뻐댄다.


“...잠깐만”

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야, 밥먹다 말고 뭐하는거야”

그런 남자의 입을, 여자는 잠시 검지로 틀어막는다.


“여보세요? 네. 네. 그 숙소 때문에…”

그리고는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네. 같이, 네. 그렇게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도대체 뭘 하는걸까? 

통화가 끝나서야 여자는 남자의 입술에서 자신의 검지를 떼어넨다.


“호텔방, 네 것도 잡아준데”


“명인님 전화 한번이면 5성호텔 방도 생기는구만…아악! 핥지 마! 더럽다고!”

비꼬는 남자의 말을 아랑곳 하지 않고

여자는 자신의 검지손가락에 묻은 돈까스 소스를 핥았다.


남자는 부리나케 물티슈를 꺼내와 여자의 손가락을 닦는다.



—-----

응씨배

바둑을 너무나도 사랑하던 대만의 대부호 응창기가 개최한 세계대회


당시 세계 바둑을 주름잡던 중국/대만/일본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열린 대회에

들러리로 한 명을 겨우 참석시킨게 당시 대한민국 바둑의 위상이였다.


그리고 결과는

그 들러리로 참가했던 단 한명인, 조훈현 기사가

눈치없게도

정말 눈치가 없게도

당대 최고의 바둑기사들을 모두 때려부수고 우승한 게

제 1회 응씨배다.


물론 체면을 구긴 국가들이 칼을 갈고 다음 대회를 준비했지만

2회 대회엔 서봉수 기사가 

3회 대회엔 유창혁 기사가

4회 대회엔 전설의 이창호 기사가 

눈치없게(?) 우승을 했다.


최근 들어선 AI덕분에 상향평준화된 국제 바둑실력에 여러 국가들이 우승트로피를 나눠가지게 되었지만


정점에 군림하는 여자의 바둑실력에 기대를 걸며

한국기원은 응씨배 트로피를 전통에 맞게 한국에 가져올 것을 학수고대 하고있다.


남자는 연일 컴퓨터가 분석해준 기보를 보며 머리를 싸맨다.

출전하는 30명 모두의 최근 데이터를 AI로 분석해서

남자가 직접 하나하나 기풍을 정립하고

그에 따른 대응책을 강구하면서

그와중에 어떻게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지뢰를 숨길까 고민한다.


대회를 준비할때면 언제나 산더미처럼 쌓인 A4용지들과 바둑판 앞에서

커피를 홀짝이는게 남자의 모습이다.


그리고 산더미같은 A4용지는

대회 직전에 1~2장짜리 보고서처럼 요약시키고, 대회장소로 향한다.


남들이 보는건 꼴랑 1~2장으로 정리된 요약노트를 들고

‘바둑을 ㅈ같이 두는’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남자는 그 1~2장의 요약노트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대국을 분석한다.


여자는 평소처럼

컴퓨터 앞에서 딸깍거리며 AI와 대국을 연습한다.


남자 몰래 사온 패스트푸드 브랜드 감자튀김을

용감하게도 남자의 뒤편에 앉아 하나씩 까먹으면서

몇십 번, 몇백 번, 몇천 번  AI와 대국을 둔다.


언제나 대회 전날이면

남자 몰래 제로콜라를 마음껏 홀짝인 여자가 

나름의 만족스러운 무표정한 얼굴로 대회 개최장소로 향하고


그 뒤를 쓰러질듯한 남자가 따라나선다.


이번엔 해외에서 열리는 국제기전이기 때문에

기차에서, 비행기에서 남자는 내리 잠만 잤다.


여자는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건네주는 공짜 콜라를

2캔이나 비우고 나서, 3캔째를 먹을까 말까 고민했다.


혹여나 캔을 따는  ‘딸깍’ 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는 남자가 깨기라도 한다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호텔로 이동하는 택시에서도 내리 자다가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남자가 호텔 프론트에서 예약된 방을 확인한다.


컨시어지가 내주는 카드키를 받아들고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다.


“이야, 이런 호텔에 스위트룸을 다 묵어보네”


“...”


“너도 스위트룸이지? 덕분에 좋은데서 묵네, 명인 친구도 둘만 하네”


“...”

남자의 응씨배는, 지금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모르는 여자의 기분이나 속내를, 자신만큼은 읽어낼 수 있다.

참가자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행동거지나 표정을 파악하는 것도

그의 바둑 전략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여자는 꿀먹은 벙어리마냥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마저도 여자의 기분을 파악하기 힘들다.


보통 이런 경우는 굉장히 기분이 언짢거나…


“그럼 내일 아침에 보자고, 나는 방에 들어가서 좀 쉴게”


“...”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남자와 같은 층에서 내린다.

남자는 캐리어를 끌고 자신에게 배정된 방문을 연다.


도어클로저에 자동으로 문이 닫히다가, 

여자가 방 손잡이를 잡고 다시 문을 연다.


“왜? 뭐 할말이라도 있어?”

남자는 자신의 방 앞에서 여자와 대치한다.


“...”

여자는 무표정에 말도 하지 않는다.


“왜, 카드키 안받아 왔어? 몇호실 인데”


“...여기”


“뭐? 여기는 내 방이고, 네 방 어디냐니까?”


‘..여기”


“여긴 내방이…래도?”

무언가 그제서야 여자의 의중을 파악한 남자가

의문문으로 자신의 말을 끝마친다.


그래. 여자가 보통 이런 경우는.

기분이 언짢거나


대형 사고를 쳤을 때다.


“자.. 정리해보자”

남자는 관자놀이를 다시 부여잡고, 여자에게 이야기한다.

상황파악은 끝낫지만, 현실을 부정하고자 한다.


“응”


“내가 묵는 방이 어디지?”


“여기”


“네가 묵는 방은 어디야?”


“여기”


“그래서 침대도 더블이 아니라 트윈인거야?”


“응”


“우린 같은 방을 쓰는거고?”


“응”


“으아아아앍!!! 전화기 내놔! 한국기원 매니저 어딨어!!”

현실을 부정하지 못한 남자가

그제서야 소리를 지르며 날뛴다.


남녀의 문제도 있지만, 어릴적 부터 같은 연구실에서 자라난 여자기 때문에 그리 큰 거부감은 없다. 


하지만 한명의 바둑 기사로서, 내일부터 적이 될 사람과 동침을 할 정도로

성미가 좋지 못하다

여자는 부리나케 방문을 닫고서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입을 검지로 막는다.


“그….미안”


“이게 미안하다고 될 일이야?”


“기원에서 예산이 부족하데서”


“나 참, 메스컴에 뭐라고 기사라도 나면 어쩌려고”


“...부부?”


“남매겠지! 부부는 무슨!”


“...”


“에휴, 됐다. 얼른 먼저 씻고와. 밥먹으러 갈꺼니까”

남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뇌에 부족한 영양분을 채우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로 했다.


—---

대회는 4일동안 강행군을 이룬다.


1일차 

28명이 대국을 치르고, 14명이 남는다.


곧바로 제 2국째

전 대회 우승자와 준우승자가 시드권으로 참가하여 16강전을 치룬다.


2일차 8강전을 치르고

3일차에 준결승전을


마지막 날 3&4위전과

대망의 결승전을 치른다.


시드권이 있어도 하루에 한 경기씩

시드권이 없으면 최대 4일 5경기를 진행한다.


바둑기사에게 한 경기는 마라톤과도, 전쟁과도 같다.

4일 연속으로 전면전을 치르고 나서야 당대 최강의 기사가 뽑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자와 남자는 토너먼트 끝과 끝에 위치해 있다.


남자는 매 경기 매 경기마다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절벽을 기어올라갔다.


안 그런 적이 없었다.

매 대회마다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절벽에서 매달린채 칼싸움을 한다.


서로 칼로 찌르고 쑤시고 넝마주이가 되어서

마지막엔 발길질로 겨우 상대방을 걷어차서야 간신히 대국에서 승리한다.


백을 잡던, 흑을 잡던 언제나 반집차 승리

세심하게 상대방의 표정이나 숨소리도 읽고

돌을 두는 손가락의 모양새마저도 하나하나 잡아내서

상대방의 생각을 읽어내고

다음 수를 예측해서, 그 자리에, 지뢰를 심는다.


그 지뢰는

지금 터져도 안되고

나중에 터져도 안되고

남자가 안배한 바로 그 시점에

기폭되야 한다.


상대방이 실수를 저지를 때 까지, 상대방이 겨누는 칼날에 

죽지만 않을정도로 맞으면서 버텨야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방이 밟은 지뢰가 뻥!


열심히 남자에게 유효타를 먹이고 있다고 생각한 상대방은

급작스럽게 형국이 뒤집히면서 피를 흘린다. 그리고 죽는다.


당하는 입장에선 이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baduk jott kkachi du nae”

외국어로 말하지만, 남자는 상대방이 말하는 의중을 알아챌 수 있었다.

준결승에서 남자와 마딱뜨린 외국 기사는 복기도 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넝마주이가 된 채로 

승리자로써, 남은 바둑알을 정리한다.


내일이면 결승전이다.

절벽에서 떨어진 대회도 많았지만

이번에는 악착같이 기어서 올라왔다.


열에 아홉은 악착같이 기어서 올라온 정상에서

그녀가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진표를 바라본 남자는

이번에도 저번 대회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시작한 준결승전 이였지만

여자는 일찍이 상대방을 죽이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결승전 한쪽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그 누가 이기든 

대한민국이 

전통에 걸맞게 트로피를 되찾아 온다는데 기분이 한껏 고양되어 있었다.


남자가 결승전까지 올라온건 상정 외였지만

여자의 우승은 세계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3일간 대국에서 보여주었듯

여자의 기력은 압도적 이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흐트러짐도 없이

상대방의 집 기둥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그곳에 자신의 터를 잡았다.


기자들이 다가와 여자에게 인터뷰를 한다.

분명 결승전을 진출한건 남자도 마찬가지 였지만

세간의 관심사는 모두 철의 여인에게 쏠린다.


남자는 이러한 광경이 익숙하다.


“결승전에 진출하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잘 모르겠어요”

언제나 그렇듯, 언변은 최악이다.


“우승하실 자신은 있으십니까?”


“글쎄요”


“남자친구는 있으신가요?”

으례 여류기사에게만 행하는 비신사적인 질문.


“...아뇨 없습니다.”

여자는 으례 이런 질문을 받을때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다.

물론 다른 질문에도 표정은 변하지 않지만.


아차차.. 저건 기분 상한거 같은데…

남자는 아무도 모르는 여자의 속내를 읽어내며 혼잣말을 한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시나요?”

기자들은 끊임없이 바둑 외적인 질문을 건넨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철의 여인에게서 어떻게든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것 이겠지


“음…. 저보다 강한 남자요”

이례적으로, 여자가 구체적인 답변을 한다.


“하하.. 독신선언을 애둘러서 말씀하시네요”

기자의 재치에, 다른 사람들이 하하호호 웃는다.


옆에서 그 말을 듣는 남자만이 웃지 못한다.


자신은 관심조차 없는 기자들의 행태에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여자에게 무례한 질문을 지속하는 기자들의 언행에도 불쾌한 것도 사실이다.


하물며, 자신보다 강한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참 내,

매번 여자에게 깨지는 자신이 여자의 이상형에서 한참이나 먼 것은

별로 문제가 되는 사안이 아니다.


철의 여인, 설녀, 나찰녀, 여러 이명으로 불리는 여자일지라도

결국엔 사람이다.


언젠간 나이를 먹고 기력이 떨어지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시대가 지나면 여자보다 강한 상대가 나타날 것이다.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니까.


언젠가 여자보다 강한 상대방이 나타난다면

하물며 그것이 어디서 되먹지도 못한 말뼈다귀같은 남정네라면

남자는 둘의 관계를 인정해 줄 수 없다.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겟지.

남녀간의 사랑이라고 하기보단

친남매의 가족애가 좀 더 가깝다.


어릴때부터 자신이 돌보아온 같은 바둑교실 여동생이

남자에게 있어서 여자의 위치였다.


자신이 인정하는 멋드러진 사나이가 아니라면

여자의 남편감으로 인정할 수 없다.


하물며, 바둑기사는 더욱 더 안된다.

바둑기사는, 모두가 한 집의 가장이다. 집의 기틀을 잡고, 집을 지키는 가장이다.

모두가 고집이라곤 있는데로 세고, 자존심도 드높다.

배우자감으론 모두가 빵점이다.


있는지도 모르고, 설령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내뿜으면서 남자는 결승전을 준비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기자들이 두 남녀가 같은 방에 머무는지 모른다.


한국기원 관계자의 능력이 좋은 것일까?

같은 방에 머무는걸 기자들이 알아챘다간, 응씨배고 뭐고

동내방네 열애설이 퍼질 것이다.


그런건 좀 봐달라고….


“내일이면 결승전이네”

남자는 방으로 돌아와, 여자를 짐짓 떠본다

으례 그렇듯, 남자의 결승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내일 대국 상대를 앞에 둔 소감은?”

짓궂은 질문도 마다하지 않는다.

기자들 만큼 무례하진 않지만.


“저기..”


“오, 뭔데 뭔데?”

왠일로, 여자가 반응을 보인다. 


“너는, 여자친구 있어?”


“뭐야, 아까 기자들이 물어봤다고 나한테도 물어보는거야?”

남자는 그런 질문에 신경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친다.


“여자친구 있어?”

여자는, 남자에게 재차 질문한다.


“아냐. 없어 나도”


“그럼, 이상형은?”


“흐음… 글쎄?”


“대답, 피하지 말고”

여자가 집요하게 남자를 캐묻는다.

상대방의 눈치를 읽는 걸 업으로 삼는 남자가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다.


“이 일단, 바둑기사는 말고! 다들 하나같이 고집쟁이에 독불장군이잖아 하하…”

자신의 여자의 남편감으로 인정할 수 없는 조건을

둘러대듯 이야기한다.


“응. 알았어”


“뭐야. 그걸로 끝이야?”


“응”


“그래, 내일 한번 붙어보자고, 세계랭킹 1위”


“응. 내일 봐”


남자는 그 말을 끝으로, 소등을 했다.


—----


언제나 그렇듯

남자는 흑돌을 쥐고

여자는 백돌을 쥐고


결승전에서 두 남녀가 마딱드렸다.


여자의 첫 수는 무엇일까?

이런 수에는, 어떻게 반응할까?

여자의 가까운쪽, 좌상귀를 노려볼까?

아니면 착점하는데 조금이라도 시간이 걸리도록

나에게 가까운 쪽으로 둘까?


남자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한쪽 귀퉁이 부분에 자신의 흑돌을 올려놓는 것으로 경기를 시작한다.


아무리 바둑에 경우의 수가 많다 하더라도

시작은 체스나 장기보다 더 천편일률적이다.


가장 적은 수의 돌로도 많은 집을 차지할 수 있는 

바둑판의 가장자리, 네 귀퉁이 부터 공략한다.


남자의 선점에, 여자는…


“...천원?”


“여기서 천원이 나오나요?”


“무슨 생각으로 저기에 둔 걸까요?”

여자의 백돌 한 수에, 장내가 술렁인다.


천원 (天元)

바둑판 가장 한가운데

좌표점으로는 (10,10)

가장 먼저 공략해야하는 네 귀퉁이에서 가장 먼 부분.


뭇 바둑만화에서 최강자가 자신의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기 위해

천원에서부터 수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현실의 프로의 세계에선, 어림도 없는 소리다.


물론 예~~~~전의 바둑기사들이

칸도 얼마 없는 귀퉁이를 노리기보단.

광활하고 드넓은, 지을 집이 많은 바둑판 가운데 부분을 노리는

‘우주류’를 개척하기도 했지만


한때의 풍류였을뿐, 해석되고 공략된 지 오래다.

그나마도, 시작은 언제나 네 귀에서 시작하지

천원부터 두지 않는다.


여자의 의중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동공이 흔들린다.


뭐지?

무슨생각이지?

우주류?

정말 가운데에서 집을 짓겠다는건가?

나와의 기력 차이가, 그정도로 난다고 생각하는건가?

착실하게. 네 귀부터 선점할까?

정중앙에서 승부를 벌여야하나?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에 남자가 초읽기를 허비한다.

중계진도, 중계진이 활용하는 AI도 혼돈 그 자체에 빠져있다.


남자는 초읽기 가장 끝부분에서 겨우, 다른 귀퉁이에도 자신의 흑돌을 올려놓는다.

알 수 없는 여자의 의중을 떠보기보단

과거의 데이터에 기반해서

착실하게, 자신의 집이 될 부분을 늘려나간다.

그것이 바둑이니까.


“....이건 또 뭐죠?”


“경기를 포기한 건가요?”


“두 점이나 버리다니요. 이러고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요?”

중계진이 다시한번 초토화된다.


여자는 자신의 백돌을, 천원 바로 옆 칸에 둔다.

여자의 백돌 두개가 바둑판 한 가운데 나란히 놓여진다.


“하.”


“하하.”


남자가 웃는다.


중계방송에도 남자의 웃음소리가 잡힌다.


“웃길만 하죠”


“저도 백의 의중을 전혀 알수가 없는걸요”

중계진들이 남자의 웃음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듯 말하며

간신히 방송을 이어나간다.


머저리들


남자는 자신을 따라 웃는 관전자들을 보며 생각한다.


이게 지금 웃겨?

니들이 그러고도 바둑기사야?


남자는 여자의 백돌 두개에서

여자의 의중을, 생각을 모두 파악할 수 있었다.


어제의 인터뷰

그간의 대국

어젯밤 자신에게 해온 질문

여자가 바둑을 대하는 자세

자신이 소망하는 바.

그 모든게 단 한가지로 귀결된다.


여자는 이 경기에서 이길 생각이 없다.


이제까지 보인 적 없던

남자에게만 보이는

여자의 옅은 미소가 

남자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꾼다.


아마 저 멍청한 여자는

지금쯤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겟지


남자를 우승시키고

남자의 환심을 사고

자기는 징계를 먹던, 은퇴를 하던 바둑기사를 그만두고

그대로 결혼에 골인.


무엇이 여자를 자극한 것일까?

하여튼 기자들이 문제야

어디서 이상한 질문이나 하고 말이야….


남자는 스승이 절대 하지 말라던 내기바둑을 떠올린다.

기원에서 쌀가마니빵이 어떻게 벌어지는지 아는가?


두 대국자는, 처음에 간단한 점심빵부터 대국을 시작한다.

승자는 패자를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봐주다가, 막판 끝내기에서 반집 차 정도로 이기고 나서


‘아이고 이거, 짜장면 맛있게 먹겠습니다’

하며 능청을 떤다.


그럼 패자는 속이 뒤집어 진다.

점심을 사줫으니

간식이나 저녁식사를 걸고 경기를 한다.

그리고 연이어서 반집차로 승리하고선 하루치 식사를 모두 얻어먹는다.


속이 있는데로 끓어오른 호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면 그걸로 끝이지만,

진짜 호구는 거기서 다시 덤벼든다. 

그리고 거기에서, 호구에게 한번 져준다. 반집차 정도로.


그럼 호구는 득의양양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분명, 다시, 다음날에도 기원에 들어온다.

지갑에 현찰을 가득 끌어안고서.


그리고 거기서부터 호구를 털어먹는 것이다.

그렇게 반집차 정도로 계속 승리하며 야금야금 지갑을 갉아먹고나면

마지막에, 호구는 한마디 하며 바둑판을 뒤엎는다.


‘바둑 ㅈ같이 두네’


간식이나 얻어먹을 요량으로 내기바둑에 참가했던 학생시절 남자가

정말 죽지만 않을 정도로 스승에게 두드려 맞고

다시는 기원 손님들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바둑은, 특히 프로에겐 점잖고 격식있는 스포츠여야한다.

왜냐하면, 나라마저도 말아먹은 전적이 있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삼국시절 땡중에게 넘어가 바둑에 국사를 내팽개쳐버린 왕의 이야기를 하며

남자를 교육시켰다.


문제가 있다면, AI에게 바둑을 배운 여자는 이런 ‘예절’을 모른다는 것이겠지…

그녀에게 바둑이란 0과 1일 뿐이니까


남자는 ‘격식’있는 기원 손님들이 화가 났을때 하는 행동을 안다.

그런 신사들은 절대, ‘ㅈ같은’ 소리를 입에 담지 않는다.


그저 한쪽 손날로, 바둑판 전체를 끝에서 끝까지 쓸어낸다.

그러면 떨어진 바둑알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진다.


죄송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기원 사장에게 돌아가 게임비를 내고

자리를 떠난다.


만약 그런 손님이 나타난다면

기원 사장님들은 비상이 터진 것이다.


단 한국의 경기때문에 평생 손님을 하나 잃는 것이다.

살아있는 MMR 판독기인 기원 사장이 매칭을 잘못 시켜준 것이다.


한달음에 버선발로 손님을 쫒아가

온갖 감언이설로 떠나가는 손님을 붙잡아서

다시 다른 손님과 매칭을 시켜준다.


최대한 기력이 비슷하고, 지더라도 재밌는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남자는 기원에서 배운대로


‘촤르르’

오른 손날로 바둑판을 쓸어낸다.


그리고선


“죄송합니다”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런 경우는 보통 기권으로 보아

흑의 불계패

백의 불계승이다.


남자는 이런 승리따위

하물며 이런 우승따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자신은 

지고하고

격식있고

고집세고

한 집의 가장인

‘바둑기사’다


중계진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기원에서 TV를 보던 은퇴한 바둑기사가 머리를 감싼다.


헤실헤실 웃고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지도 않고

경기장 밖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나간다.


처음으로, 중계 카메라가 여자가 아닌 남자의 모습을 쫓는다.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자를 붙잡는다.


“어…어디가”


“이거 놔!”

열이 있는데로 뻗친 남자가 여자의 손을 쳐내려 하지만

여자가 카메라도 개의치 않고, 남자의 팔뚝에 엉겨붙는다.


“너… 우승하고 싶어했잖아. 

항상 항상 이기고 싶어했잖아

  너한테 우승시켜주려고, 다른 사람들 다 이기고 결승전 올라온거란 말야

 너 올라오면, 우승시켜주려고

 나..나.. 이제 바둑기사 안할꺼야. 

  지긋지긋한 바둑따위 거들떠 보지도 않을꺼구

  바..밥도 잘 먹을께. 햄버거도 한달에 한 번만 먹구

  말도 잘 들을게

 

 그럼..

 그럼… 이제 네 이상형이지?”


여자는 울먹이는 얼굴로 남자를 쳐다본다.

그제서야 남자는, 여자와 눈을 마주친다.


평생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가 잡는 팔뚝의 힘이 조금 풀린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팔을 빼내고, 경기장 밖으로 향한다.

자리에 주저앉은 여자가, 

경기장 바깥을 바라본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철의 여인이 처음으로 보이는 애틋한 감정이

중계 카메라를 타고 전 세계에 송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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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위에서 벌어진 결과는

설령 신이 오더라도 뒤집어지지 않는다.


단 4수만에 결정된 결승전의 승자는

백의 불계승.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바둑 국제기전에서 

역사와 전통에 따라 다시 대한민국이 우승을 차지했다.

트로피엔 여자의 이름이 새겨졌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정말,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그 뒤로, 여자는 바둑을 두지 않았다.


후대의 사람들은 만약 전성기의 이창호가 알파고와 자웅을 겨루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듯

전성기의 그녀가 현재까지 바둑을 했다면 어떤 경지에 다다랏을지 상상한다.


하지만 상상일 뿐이다.

여자는 그 뒤로, 바둑돌을 잡지 않았으니까.


여자는 박사가 남겨준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는다.

매일,

매일 매일,

몇번이고 그 4수짜리 대국을 복기했다.

아무리 계산기를 돌려보아도, 자신이 낸 두 백돌은 승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게 분명했다.


AI는 여자의 패배를 아주 높게 예측했다.


분명, 그게 정답이였다.

하지만, 여자의 곁에 남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