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심장이, 가슴이- 고동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허억...허어억...!”


저질렀다.


그래, 저질러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곧장 내 방으로 뛰어갔다.


“미친년, 씨발 진짜 미친 거 아냐?!”


“가시내야, 왜 오자마자 욕을 그리...”


“아빠는 쌰랍!”


쾅! 나는 문을 닫은 뒤, 무너지듯 문에 등을 기댄 채 앉았다.


“...내가 진짜 뭔 짓을 저지른 거야?”


그건- 그건 거의 강간이나 다름없었다.


강제로 키스하고, 희롱하고, 매도하고-


“으아아아아아!”


제정신이 돌아오니 미칠 것 같은 죄책감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아으으으...”


그 녀석의 첫키스를, 첫사랑을 빼앗아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리고 그 사람이 내가 아닌데.


“백솔, 너 진짜 미친 거 아니냐고...”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저지를 수가.


나는 크게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결과적으론 잘된 걸지도.’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긴 했지만, 어쨌든 내 목적은 이뤘다.


“사귀...는 거구나, 오늘부터...”


확실히 대답을 받아왔으니 무를 수도 없다.


“히.”


이크, 웃지 말자. 그 생각만 하면 자꾸 입가가 씰룩거리지만

일단은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진수한테 미안한 짓을 했네.’


이진수, 그 녀석한테 악감정은 없었다.


솔직히 말조차 섞어본 적 없고, 진수에게 죄가 있다면 그

등신을 저도 모르게 유혹해버린 것뿐.


...아니, 생각해보니까 좀 괘씸하긴 한데.


“어...어쨌거나 이제 나랑 사귀는 거니까...우...우흐흐...”


아- 역시 못 참겠다.


기분이 붕 떴을 때는, 샌드백이라도 치는 게 낫다.


나는 글러브를 낀 뒤,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걸려있는

새까맣고 커다란 샌드백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훅! 후욱!”


퉁, 투웅! 내가 칠 때마다 샌드백이 크게 요동쳤다.


“내가 이겼어! 그래, 내가 이긴 거라고!”


인생은 투쟁이다. 이게 우리 집안 가훈이다.


사람도 결국엔 짐승, 사랑이든 목숨이든 싸우고 이겨내서

얻는 수밖에 없다.


나는 진수와 싸웠고, 조금 비겁한 방법으로나마 이겼다.


‘그래, 어렵게 생각할 거 뭐 있어!’


생각해보니 내가 그렇게까지 미안할 필요도 없었다.


원래 사귀고 있던 것도 아니고, 물론 딱 봐도 진수도

그 녀석한테 마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그리고 내가 조금 더 빨랐을 뿐이다.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쾅! 샌드백이 거의 천장에 닿을 뻔했다.


“이크.”


턱, 나는 샌드백을 받아낸 뒤 호흡을 골랐다.


“무조건 빠지게 만든다. 나만 보게 하면 되는 거라고.”


이진수 따위는 싹 잊어버리도록, 전력을 다해 사랑해준다.


그 녀석도 결국엔 남자다. 그리고 남자들 특징은, 자기한테

잘해주는 여자한테는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도 이기는 법!


“후...역시 난 천재야.”


“어이 딸, 이 늦은 시간에 샌드백을 그리 치면 우짜니...”


“아빠는 조용히 하라고!”


결국,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그 녀석을 완전히 사로잡을 거라고.






...라고 어젯밤 호언장담을 해놓기는 했는데.


‘시벌, 부끄러워서 가까이 가질 못하겠잖아!’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뻔뻔하게 말을 걸 수가 있겠냐고!


그냥 협박한 것도 아니고, 죽이니 살리니 따먹어버리겠다느니

뭐 아주 온갖 협박을 다 했는데, 아무리 나라도 얼굴에 철판

깔아놓고 말을 걸기는 힘들다.


‘...아, 진짜 개꼴리게 생겼네.’


교실 밖, 문 옆에 서서 창가 자리에 앉아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던 그 녀석을 훔쳐보았다.


안혁진.


외모는 솔직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검은 곱슬머리에 알이

커다란 안경, 남들보다 조금 작은 체격, 퍽 날카로운 눈매.


딱 봤을 때 귀엽다거나 잘생겼다는 인상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만 평가했을 때의 이야기고.


저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세심하고 소심한 성격의 갭이 또

일품이다. 


한 성격 할 것 같게 생긴 주제에, 조금만 밀어붙여도 약한

소리나 하고, 그러면서도 엄청 어른스럽고.


“잇.”


“...거기서 뭐 하는데.”


“아, 아무것도...”


들켰다. 하긴 누구든 이렇게 대놓고 훔쳐보면 알아차리겠지.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다른 애들은 우리 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뛰어놀거나 엎드려 잠을 잤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도 결국엔 애들이나 다름없다.


“...미안.”


“뭐?”


“미안하다고, 어제 일은...”


왜 처음 튀어나온 말이 사과였을까.


아니, 이게 내 진심이었겠지.


“그렇게 억지로...강압적으로 할 건 아니었는데.”


“진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 거야?”


“다, 당연하지! 누굴 쌍년으로 아나, 이게 진짜...”


나는 녀석에게 바싹 다가가며 말했다.


“그, 그렇다고 물릴 생각 없으니까! 알겠어!?”


“네가 그럴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안 했어, 진심으로.”


“시...싫어...? 진짜 못 견디게 싫은 거면, 그...”


아니지, 약해지지 말자. 약해지면 지는 거다.


이미 저지른 짓,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말이다.


“그...그래도 안 돼. 역시 넌 못 줘, 넌 쭉 내 거 하는 거야.”


“아, 그러셔...?”


“아무튼! 집에 같이 가자, 어차피 가는 길은 비슷하잖아?”


“나한테 거부권이 있긴 한 거야?”


“없어!”


나는 혁진이를 데리고 하굣길에 올랐다.


가는 길은 어제 그때처럼 온통 주황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노을빛을 볼 때마다, 내가 저지른 짓을 떠올리고 만다.


아무도 없는 도서실에서 첫키스를 빼앗고, 강제로 밀어붙여

사귀자고 협박한 그 무자비한 짓을...


“...묘하게 조용한데, 너답지 않게.”


한창 생각에 빠져있을 때,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뭐가? 난 원래 과묵한 여자라고.”


“네가?”


“뒤질래?”


내가 주먹을 치켜들자, 녀석이 바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포, 폭력 반대.”


“새끼...누가 보면 맨날 때리는 줄 알겠네.”


“넌 네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야 해. 네가 한 대 칠 때마다

뼈가 부러지는 것 같단 말이야, 알아?”


“지랄, 진짜 제대로 함 쳐줘?”


“하, 하지 마!”


아, 역시. 이 녀석하곤 이래야지...

아니 근데 이러면 평소랑 똑같잖아!


‘사귀기로 했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뭐라고 해야 하나, 달콤함? 꽁냥거림이 좀...부족하지 않나?


뭔가 더 연인다운 일을 하고 싶은데, 다짜고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내 성격에 안 맞는다.


참고로 난 억지로 애교부리는 년들을 제일 싫어한다.


남자한테 아양 떠는 꼬라지가 털 빠진 늙은 개새끼가 뼈다귀

한 번 얻어먹자고 재롱 피우는 것 같아서, 영 보기 좆같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봐야 하는 거 아냐...?’


그나저나 이 녀석도 그래, 여친이 생겼으면 좀 더 팍팍! 어!

남자답게 손도 함 잡아보고 그래야지, 쫄아서는!


“오, 오늘 날이 살짝 쌀쌀하네...”


“뭔 소리야? 아직 여름 안 끝났거든?”


“뭐냐 거시기 그, 손이 살짝 시려운 것 같기도 허구...”


“주머니는 장식이 아니야, 솔아.”


아오 씨발 눈치 없는 새끼가 진짜!


여친이 손이 시렵다고 하면 후딱 손이나 잡아줄 것이지!


‘눈치 없는 새끼...고자 새끼...씨이...’


근데 그런 이 녀석을 미워하지 못하는 내가 제일 한심하다.


아양을 떨어서라도 사랑받고 싶어서, 평소라면 입에 담지도

못할 말조차 내뱉게 만들어버린다.


“...손.”


“응?”


“...손...잡아주라...살짝만...응?”


내가 먼저 빌다니, 이 백솔이 누구한테 머리를 숙이다니.


하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다.


“정말 그거면 돼?”


“으...으응...”


“알겠어, 알겠다고.”


녀석이 내 손을 살짝 잡았다, 정말 아주 살짝.


“됐지?”


“...”


감질나게 이게 뭐야, 남자답게 확 잡아버릴 것이지.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혁진이의 손을 확 잡아챘다.


“야, 너무 당기지 마.”


“...시꺼.”


손...드디어 잡았다...


생각보다 보드랍고 축축했다, 아, 이 녀석도 긴장했구나.


그렇구나. 나랑 있어서 긴장한 거구나.


역시 너도 내가 신경 쓰이긴 한 거구나.


“후후, 으흐흐...”


“왜, 왜 웃어?”


“아무것도 아냐.”


그때, 시내로 들어서니 눈에 띄는 가게가 보였다.


이름이 뭔 프랑스어인지 독일어로 되어있는 디저트 카페-

내가 이전부터 이 녀석하고 오고 싶었던 가게였다.


‘무엇보다도 나 혼자선 들어갈 용기가 안 생겼단 말이지.’


나 같은 선머슴이 이런 핑크핑크한 가게에 들어갔다간...


우웩, 내가 생각해도 좀 아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근데 커플로 오는 거면 괜찮지 않을까?’


“뭐해? 안 오고.”


“야, 이리 와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이씨, 오라고 하면 빨리 와!”


나는 녀석을 반강제로 끌어당겨, 카페 안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인테리어 진짜...천장이고 벽이고 다 분홍색이라

저도 모르게 속이 메스꺼웠다.


“우왓, 인테리어 진짜 장난 아니네...”


“그러게...그, 그래도 커플 됐으니까 이런 곳도 와봐야지.”


“진심이냐, 너...?”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키오스크로 주문을 넣은 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내 살다살다 이런 곳에 다 와보네, 백솔 너 진짜...”


“뭐, 왜!? 올 수도 있지 이런 곳! 나도 단 거 좋아하거든?”


“나도 싫어하진 않는데...분위기가 좀...으음...”


그러고보니 여기, 손님 대다수가 커플인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요즘 데이트 장소로 핫하다고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 그럼 이것도 데이트인가?’


사귀자마자 데이트라니,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아니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키스부터 박았으니 아닐지도...


“아, 나왔다.”


혁진이가 아이스크림을 받으러 갔고, 돌아오자마자 그걸

내려놓고선 나를 노려보았다.


“야...너 이거 진짜...아니, 아니다...”


“왜, 왜? 맛있어 보이잖아?”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이미지로 봤을 땐 괜찮았는데...내가 주문한 커플 전용

핑크 하트 어쩌고는 극악한 비쥬얼을 자랑하고 있었다.


커다란 하트 모양 딸기 아이스크림 위에, 온갖 화려한 초코

장식물이며 요사스러운 생크림 따위가 얹어져 있었다.


“마, 맛있겠다. 그치?”


“맛이야 있을 것 같은데...왜 내가 다 부끄럽지?”


나는 입을 벌린 다음, 혁진이에게 혀를 내밀었다.


“자, 아앙.”


“...진짜로?”


“빨리 줘, 애인 사이잖아.”


내가 말해놓고 좀 부끄럽지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이런 걸 해보겠는가.


혁진이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크게

뜨고선 내 입에 넣어주었다.


“...맛있다!”


“뭐, 맛이야 있겠지.”


“자, 너도 한 입 줄게. 아앙.”


“난 싫어. 내가 알아서 먹을 거야.”


“빨리, 아앙!”


“그러니까 싫대도, 그런 낯부끄러운 짓을 어떻게 하라고?”

이 새끼가 진짜...내가 주는 건 싫다 이거냐?


‘진수가 해줬으면 좋다고 받아먹었겠지?’


갑자기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거지 같아졌다.


그 녀석하고 여길 왔다면, 내가 아니라 진수하고 사귀었다면-


“야.”


“그러니까 싫-”


“아가리 벌려, 뒤지기 싫으면.”


“...”


아, 아앙.


녀석이 그제야 입을 벌리고선 내가 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맛있어?”


“어, 어어. 맛있네.”


아, 역시 귀여워 죽겠다니까.


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고선, 혀를 내밀었다.


“자, 아앙.”


“...진짜로? 진짜? 진심이야?”


“차가어, 빠리.”


후룹, 후루룹...


마지못해 받아먹는 거긴 했지만, 녀석이 혀를 내밀어 받았다.


“잘 들어, 이 새끼야.”


나는 녀석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앞으론 내가 주는 것만 받아먹어, 딴 년이 주는 거 받아먹음

내 손에 뒤질 줄 알아...알겠어?”


“넵...”


“히, 진짜 좋아해...으히힛...”


뭐, 이런 식으로.


첫 데이트는 아주 성공적이었던 것 같았다.














거의 반년만에 쓰는 2편....

그런 의미에서 3편은 올해 말에 쓰면 되는 건가?

아무튼 감다뒤 감다뒤 노래를 부르더니 진짜 감이 다 뒤져버린 듯...

데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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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은 ai로 직접 만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