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처지를 깨닫게 된 것은 정신을 차리고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팔과 다리, 손가락 하나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눈마저 뜰 수 없는 탓에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숨을 쉬듯 자연스레 다루던 마나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오로지 내 의식만이 뚜렷하게 깨어있을 뿐이었다.


식물인간.


그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왜 이렇게 되었더라?'



몸 군데군데 느껴지는 쓰라린 아픔과 격통으로부터 아주 조금씩 기억을 되새길 수 있었다.


분명 시작은, 다시 벌어지게 된 전쟁이었다.


예고도 없는 침범으로 인해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인재들이 모두 동원되어 전쟁에 투입되어야만 했다.


몇 주에 걸쳐 방어전이 치뤄져야만 했고, 겨우겨우 전세가 뒤집혔을 무렵이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택한 전략은 바로 나.


나를 구심점으로 적들의 본영을 단숨에 파괴해버리는, 큰 위험을 수반하지만 동시에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었다.



'분명 내 마법은 성공했어. 그런데.....'



많은 이들의 도움 덕택에 적국의 본진은 코앞으로 다가왔고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렇게 마지막 승기를 붙잡으려는 찰나, 어디선가 나를 향해 낯선 투사체가 날아왔다.


촉의 끝에 무언가가 발라진 짧은 화살.


강력한 마법을 시전하는데 온 신경을 모은 탓에 차마 막아낼 수 없었고, 화살은 정확히 내 어깨에 박혔다.


혈관이 역류하고 메스꺼움이 밀려오는 역겨운 감각에 하마터면 적진 한 가운데서 정신을 잃을 뻔 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입에 피맛이 베일 정도로 입술을 굳게 깨물어가며 나는 의식을 유지했고 끝내 마지막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의식이 흐려져가던 찰나에 모두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고, 거기서 내 기억은 끝을 맺었다.



'그 화살에 묻어 있던 독... 평범한 게 아니야.'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몸의 주도권을 상실한 채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오로지 숨만 붙어있는 인형이 되버린채.




***




며칠 정도의 긴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된 사실이 몇가지 있었다.


창문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낯이 익은 몇몇 목소리, 등에 닿는 푹신함을 미루어 나는 내 방의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


귀를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처럼 주변의 말소리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들을 수 있던 정보들을 유추해볼 때 나는 전장에서 쓰러진 그 날로부터 자그마치 반년 동안 이 상태였다고 한다.


온갖 종류의 약을 내게 먹여보고. 마법의 힘을 빌려도 보았지만 내 증상이 호전되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더 이상 잠들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의식을 되찾은 그 날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잠에 들지 못했고, 피로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해, 아주 긴 시간 동안 고독함에 잠겨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대로 가다간 미쳐버리고 말거야.'



이따금 아버지나 친구들이 문안을 찾아와 주었지만, 외로움을 달래는 것도 아주 잠시 뿐이었다.


밤바람이 추운 날에도, 햇볕이 따스한 날에도, 꽃향기가 코를 간질여도, 거센 비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날에도 나는 오로지 혼자여야만 했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지?'



억울하고 분하지만 그 어디에도 내 심정을 털어놓을 수 없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지만 아무도 내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진정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알아줄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의식이 돌아오고서 또다시 반년이 지났고,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오로지 부모님만 남게 되었다.


그마저도 점점 빈도가 줄어들었으니 내 정신은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무너지기 직전까지 치달았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



삶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앞으로 죽을 날만을 기다려야 한다는 현실에 울분이 쌓였다.


그러나 눈물 한 방울을 흘리는 것조차도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어떤가? 우리 딸을 깨어나게 할 방법이 있는가?"



정말로 산 송장이 되어 마음이 문드러질 즈음, 그간 듣지 못했던 낯익은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방법은 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놓았던 이성의 끈의 끝자락이라도 겨우 붙잡고서야, 그 목소리의 주인이 변경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천재이자 마법의 대가로 불리는 이 사람이라면...


포기했다고 생각한 희망의 심지에 다시 작은 불꽃이 일었다.



"내 이렇게 빌겠네. 부디, 제발 부디 도와주시게."



아버지의 절박한 목소리만큼 나 또한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시 깨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적법한 인원을 다시 보내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내 길고 긴 고난이 드디어 끝나는 걸까.


변경백의 대답은 다분히 긍정적이었고, 나는 금새 희망에 매달리고 말았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변경백이 사람을 보냈다.


희미하지만 누군가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터벅터벅 몹시 느린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그 사람은 내 이마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아주 오랜만에 피부로 느껴보는 따스한 온기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낯설지가 않아. 이 감각. 어딘가 기억에 있어...'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 알아채는데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오랜만이야. 시안."


'이 목소리는...!'



애써 잊어버렸던 누군가의 목소리. 그립고 편안하고 동시에 슬픔마저 떠오르는 사람.


그리도 긴 시간 동안을 함께 했는데도, 끝내 멀어진 관계를 되돌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남처럼 지내온 남자.


이반이었다.



'네가 왜 이곳에!' 


"...몇 년만에 보는건지 모르겠네."


'...보고 싶지 않았어.'


"네가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동안 찾아오지 않았는데 말이야."


'무얼 하러 온거야.'


"그런데 너희 아버지가 부탁하시기도 해서, 불가피하게 또 네 앞에 나타나게 됐어."


'또 나를, 사람들을 속일 셈이야?'


"미안해."


'거짓말.'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만큼 이반을 향한 내 원망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깊어졌다.


내가 아는 한, 그가 나를 치료할 방도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터였고, 그를 향한 의심은 이미 내 안에서 확신으로 바뀌어있었다.


기다렸으니까.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아니 이해라도 해볼 수 있는 작은 해명이라도 말해주기를 기다렸으니까.


그렇다면 나도 그에게 뱉은 모진 말을 사과할 수 있을 테니까, 줄곧 이반을 기다렸었다.


하지만 그가 황녀와 혼사를 치르고도 더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반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해빠진 변명조차 없이.



"여전히... 나를 싫어하겠지?"


'그래. 네가 싫어. 너무나도. 그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말이야."


'너무 늦었어. 이젠 네게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


"그래도, 일단은 할 일부터 해야겠지."


'도대체 무슨... 아얏!'



감각이 무뎌졌음에도 내 팔에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무언가 뾰족한 바늘이 찌르는 느낌. 이윽고 그 감각은 색다른 방향의 고통으로 변했다.


마치 피가 통째로 뽑혀나가는 듯한 아픔.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진의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내게 허튼 짓을 저지르는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도 낯설고 진지한 목소리로 맹세하듯 되새기는 그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그를 믿어보고 싶다는 속마음 탓이었을까



"내가 반드시 너를 깨어나게 해줄게."


'.....'



나에게 혹은 그 자신에게 향하는지 모를 굳은 다짐을 들으며, 우리 사이에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 켠으로 안심해버리고 말았다는 건 나의 작은 비밀이었다.




***




그 후로도 이반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말 그대로 '매일' 내게 찾아와주는 그를 향해 당연한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타니아와 혼인한 몸이 아니었나? 어떻게 매일 여기를 찾아올 수 있지? 그보다 남편이 이리 방황토록 두는 아내가 과연 있을까?'



아무리 궁금해도 그에게 물어볼 방법은 없었고, 나는 질문을 보내는 대신 내가 볼 수 없는 세상 이야기를 받을 수 있었다.



"옛날에 우리가 자주 찾아갔던 빵집 주인이 아들로 바뀌었더라. 그래도 맛은 변하지 않은게 되게 신기한거 있지?"


"대공께서 여전히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시길래 많이 놀랬어. 하나도 안 늙으셨더라. 여전히 정정하셔."


"지난주 극장에서 선보인 황실 극단의 연극이 신문 1면에도 실렸어. 꼭 한번 보러가고 싶은데 말이야."


'.....'



내게서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이반은 마치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체 왜...'



내게 이리도 살갑게 대해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전무한데, 왜 나를 도우려는 걸까.


외롭고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던 내게 어떻게든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맺어주려는 그의 행동에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때처럼.....'



잊고 있던 기억들은 금새 다시 홍수처럼 밀려와 가슴 속을 가득 채웠고, 나와의 약속을 언제나 지켜주려 애쓰던 모습들도 다시금 돌아볼 수 있었다.


그 옛날에도 홀로 고립된 나를 바깥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 그의 상냥함이 떠올랐다.


내 무리한 부탁과 생떼같은 이야기도 언제나 받아주던 모습도 새록새록했다.


그를, 믿고 싶어졌다.



'내일은 언제 올까...'



어느샌가 메말라가던 내 마음은 그를 기다리는 초조함과 기대로 가득 채워져, 잃어가던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시덥잖아 보이는 이야기를 하나라도 듣는 것이 좋았고, 그에게만 느껴지는 향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와 다시 이야기하고 싶어. 웃고, 울고, 떠들던 그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다시 눈을 뜨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걸 포기할 수 없게 되었다.


바라는 것과 원하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나도 사과하고 싶어.'



언제나 내게 미안하다 속삭이는 그에게 나도 그러하다 말하고 싶었다.


다시 날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갈 수록 그런 마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만큼, 내 안에 잠들어있던 마나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창문의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의 찬 공기를 한껏 품은 탓에 내 방은 어스름한 추위로 가득 채워졌다.


벌써 2년 동안이나 몸을 움직이지 못한 탓에 이런 추위에도 익숙해진 나지만, 그 날따라 손끝이 시려오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았다.


투둑 투둑 물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래도 비가 내리려는 요량인가 싶었다.



'이반이 올 때까지 날씨가 개인다면 좋을텐데.'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엔 그에 대한 생각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그가 나를 찾아오는 일상이 벌써 1년이나 지난 지금, 이미 내 속에서 이반은 어릴 적처럼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오늘이 끝나길 바라던 내가 내일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끼이이이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여념이 없는데,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을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동안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무언가 강제로 찢어지는 듯한 소음.


그간 느끼지 못했던 긴장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혹여 내게 해를 가하려는 자라도 있는걸까 싶은 의심과 망상이 자라나려할 즈음에,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내 몸의 자유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숨이 멎었으리라.



"하아... 하아... 안녕 시안?"



다행스럽게도, 정체불명의 괴한은 다름 아닌 이반이었다.


아닌 밤중에, 그것도 이런 악천후에 그가 나를 찾아온 것이 대단히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론 만족감이 느껴졌다.



'근데... 이 냄새는... 뭐지...?'



낯설면서도 익숙한 냄새. 다소 비릿한 내음을 맡으며 서서히 등골이 싸늘해졌다.


이건 분명, 진한 피에서 묻어나오는 잔향이다.



'이반!? 무슨 일이라도 있는거야? 이게 대체...'


"후우...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서 다행이야."



그가 어딘가에서 쇠로 된 무언가를 꺼내는 덜그럭 소리가 들렸다.


이반은 발을 질질 끌어 내게 다가와 그 물건을 조심스럽게 배에 올려놓았다.


내게 무언가를 하려는 건 알겠지만, 무얼 하려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적어도 떠나기 전에 널 치료하려 했는데, 하마터면 늦을 뻔했네..."


'치료? 아니, 떠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이반,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줘. 어딜 가려는 거야!?'


"윽..."



가빠지는 호흡 사이사이로 그는 고통을 애써 참아내는 신음을 숨기지 못했고, 불길한 느낌은 더욱 가중되었다.


내 배에 올려진 무언가는 얕은 진동과 함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소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건... 내 마나가...!'



단절되었던 마나와 다시 연결되는 감각과 동시에,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었던 손과 발이 하나 둘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굳게 닫혀있던 눈을 가까스로 뜰 수 있었다.


드디어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열도 잠시, 너무나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신체기관들은 약할대로 약해져 내 맘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눈꺼풀에 온 힘을 쏟아도 겨우 반쯤 뜨여질 뿐이었고, 눈에 들어온 세상은 흐리고 뿌연 막을 씌운 듯 잘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달빛에 비치는 그의 은영만이 내 곁에 있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다... 제대로 작동했어... 이번에야말로, 네 오해를 풀 수 있다면 좋을텐데..."


'오해따위 더 이상 하지 않아. 드디어 서로 엇갈리지 않을 수 있어. 내가 미안해. 미안해 이반!'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이 없네... 그 자들이 곧 여기까지 도착할테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거야? 그 자들이라는 건 누구인거야? 시간이 없다니, 이제 겨우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됐는데...!'



마법이라도 사용해 내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그조차도 오랫동안 사용하지 못한 탓에 마나가 모였다 다시 사라져버리기 일쑤였다.


급한 마음에 속은 타들어가고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몸을 움직여보려 했지만, 인간의 몸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버지의 이동 마법도... 이젠 다 써버렸네..."



그가 손에 쥔 무언가를 바라보더니 이내 맥이 빠진 한숨을 쉬며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어."



허나 그는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를 살리고서 떠나는 길이니, 이제 망설임 없이 도망칠 수 있어."



아주 조금 맑아진 내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그의 웃는 얼굴.


바래진 옛 기억을 떠올리며 몇 십, 몇 백번을 상상해보았던 이반의 얼굴.


나를 향해 티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주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가지 마'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가지 마'


"우리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날이 온다면,"


'가지 마'


"그 때엔 다시 네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게."


'가지, 마!!!'


"안녕, 시안."



제발 가지 마. 제발 이대로 나를 떠나지마.


내가 지켜줄 수 있어. 너를 쫓아오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막아줄 수 있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몇날 밤을 보내도 부족할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내가 미안하다고. 나도 사과하고 싶었다고. 보고 싶었다고. 다시 만나길 기다렸다고.


사랑한다고. 이젠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미어터질 것만 같은 슬픔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뒤늦은 후회의 대가를 이리 치르게 되는가 싶어 울분이 터졌다.



"...일단은 북쪽으로 가야하나."



허나 이반은 외마디 말을 남긴 채 내 방으로 들어왔던 창을 통해 다시 돌아나설 뿐이었다.


내 소리없는 외침에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고요한 적막만이 내 방을 가득 채웠고, 극심한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아아, 아아아, 아아!'



고조되는 감정과 미쳐버리기 직전의 이성이 동조하며, 그간 잠들어있던 내 모든 마나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힘없이 축 늘어져있던 팔과 다리에 피가 도는게 느껴졌고 세상을 인지하는 감각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폭주하는 마나를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이 차마 받아들이지 못해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격통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악문 탓에 입에서는 비린 맛이 느껴졌다.


누군가 내 모습을 보았다면, 흡사 귀신의 형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게 그 모든 걸 고려할 여유따위는 일말도 없었다.



"내,가... 지금, 갈게. 이반...!"



이반을 찾는 것만이 최우선이었기에.



"북쪽..." 



더욱 거세지는 비바람을 헤치고, 온 마나를 쏟아부어 그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매정하리만치 시간은 계속 지나갔지만, 이반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여 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에 불안함으로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어디야 이반... 어디 있어... 제발 무사해줘. 제발, 제발, 제발!"



신이 있다면 기도를 들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온 사방을 헤쳤고, 북쪽 숲의 더욱 깊은 안으로 들어선 뒤에야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나무가 여럿 쓰러지고, 이런 비바람에도 심하게 그을린 흔적들.


마법을 사용한 전투의 흔적이다.



"이반, 이반, 아아 이반!"



이토록 절박래진 적이 내 생애 있었던가.


억지로 몸을 움직인 탓에 마나는 점점 소진되고, 가빠지는 호흡과 빗방울로 눈앞이 흐려지고, 나뭇가지와 돌부리에 긁힌 상처가 아무리 쓰라려도,


그를 찾아야만 한다는 집착만이 나를 쓰러지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소란이 들리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나를... 너희... 절대..."


"천한... 마법의... 이제..."



정말 코앞. 바로 눈 앞에 그가 있음에도, 발걸음은 서서히 더뎌졌다.


바닥까지 마나를 긁어모은 탓에 더 이상 몸을 움직일 힘이 남지 않은 탓이었다.



"이, 바, 아아아아아안!!!"



굵은 빗방울 소리에 내 목소리는 묻힐 뿐이었고, 폭발음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안 돼!"



팔 다리가 으스러질 때까지 기어간 그곳에 남은건, 


나무 기둥 아래 배에 칼이 박힌 채로 끝없는 잠에 빠진,


이반의 싸늘한 시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