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린은 베란다 문을 가로막듯 팔짱을 끼고 벽에 몸을 기댔다.

 

“누구야?”

 

나는 이번에는 거짓말하지 못했다.

 

“수연이야, 전화가 왔네.”

 

“만나자고?”

 

대화가 이어질수록 이혜린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다.

나는 별일 아닌 듯 대답했다.

 

“그렇네. 나한테 배신감이라도 느꼈나 봐. 얼굴에 물이라도 끼얹으려고 그러나. 하하.”

 

“가지마.”

 

이혜린은 완전히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

 

“도영아, 가면 안 돼. 최수연을 생각하는 건 괜찮아. 언젠가 나한테 돌아올 거니깐. 하지만 만나는 건 안 돼.”

 

“네 몸은 언제까지나 여기 있어야 돼. 언제나 내 곁에. 그게 최소한의 조건이야. 그걸 어기면…”

 

이혜린은 천천히 내 앞에 다가왔다.

그녀의 머리가 내 가슴팍에 닿았다.

 

“나도 어떤 짓을 할지 몰라.”

 

이혜린이 내 신상을 최서현에게 낱낱이 까발린 것은 새발의 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은땀이 등줄기에 흘렀다.

 

 

****

 

 

밤 10시.

최수연은 김도영과 처음 만난 카페에서 그를 묵묵히 기다렸다.

만나면 무슨 말을 퍼부어야할까.

그게 사실인지부터 물어야한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했다.

 

“하아… 왤케 안 와.”

 

카페 문이 열리는 짤랑거리는 소리에 최수연의 눈빛에 기대가 서렸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그가 왔다.

몸이 아니라 그의 문자가.

 

<김도영> : 앞으로 볼 일 없을 것 같아. 만날 이유도 없고. 차단할 거니깐 전화하지 마.

 

“그러니깐, 영화값 너무 비싸다니깐 재미도 없고.”

“다음부턴 흥행작만 골라서 가자. 호호.”

 

한 커플이 사이를 지나가다가 최수연의 어깨를 툭 쳐버렸다.

최수연이 들고 있던 커피가 테이블에 엎질러졌다.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며 황급히 사과하려 했다.

 

“어,어머. 이를 어째. 괜찮으세요? 옷에 안 묻었죠? 어.”

 

여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최수연을 보고 당황했다.

 

“저,저기”

 

“흑흑흑.”

 

“자기야, 그러니깐 조심했어야지. 애가 울잖아.”

“여보가 말 걸어서 그런 거잖아! 옷에 안 묻은 것 같은데 왜 그러지, 정말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어디 뜨겁나요?”

 

“으앙.”

 

최수연이 대성통곡하자 커플은 더욱 당황했다.

무엇이 그녀를 울린 것인지 모른 채.

 

 

****

 

 

“자.”

 

이혜린이 내 휴대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차단했고 답장도 했어. 내일 휴대폰도 바꾸자. 어때?”

 

“괜찮네.”

 

“얼굴 풀어. 화났어?”

 

“그냥, 내 꼴이 우스워서 화난 거야.”

 

“후후, 어때? 천만 원 줄테니 오늘 밤 그걸로 갖고 놀래?”

 

이혜린이 내게 쥐어주는 돈.

그것은 달콤하면서도 내 마음을 갉아먹고 있다.

 

“…좋아. 기분도 안 좋은데 그러지.”

 

이혜린이 옆에서 속삭였다.

 

“잃어도 괜찮아. 언제든지 내가 대줄 테니깐.”

 

옆에 있어 준다는 조건은 간단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았다.

마음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이혜린의 계획대로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될 지도 모른다.

내 존엄성과 자주성은 그렇게 훼손되고 사라져갔다.

이혜린이 내 목을 팔로 감싸안았다.

 

 

****

 

 

다시 2주가 지났다.

김도영이 과외를 관두고 강서준이 새 과외를 맡은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강서준이 처음 그녀를 맡았을 때 자신에게 호감도 있어 보이지 않는 말괄량이라 걱정했지만 그녀가 묵묵히 수업 진도를 따라오는 걸 보며 안도했다.

내준 숙제도 군소리 없이 잘해온다.

단 하나. 걱정이 있다면.

 

“응응. 맞아. 잘 하네. 기억력이 좋은데?”

 

“…….”

 

“아, 그건 풀이는 맞았는데 답이 틀렸다. 그럴 떈…… 이렇게 풀면 되는 거야. 간단 하지?”

 

“…….”

 

소통이 없다는 것.

원래도 자신에게 쌀쌀맞게 대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정확히 2주 전부터 그녀는 과외 받을 때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귀로 듣고 눈으로 문제지만 바라볼 뿐이었다.

 

‘사춘기가 늦게 왔나. 이 나이대 여자는 어려우니깐.’

 

그래도 말 한 마디 없는 학생을 가르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무시당하는 기분이다. 상대가 설령 그런 뜻이 없다고 하더라도.

강서준은 최수연이 풀고 있던 문제지를 슬쩍 옆으로 뺐다.

최수연의 시선이 강서준에게 가지 않고 그저 문제지에만 따라갔다.

 

“……?”

 

“후우. 수연아 우리 잠깐 말 좀 하자.”

 

최수연은 하기 싫다는 듯 무기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화가 났니?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최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말은 했잖아. 무슨 고민 있어? 선생님이 아무한테 말 안 할 테니깐, 속 좀 털어놔 봐.”

 

“에휴.”

 

최수연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공부나 해요. 시간 아깝게.”

 

최수연이 문제지를 빼앗고 다시 펜을 잡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강서준은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졌다.

특히 이번에는.

2시간이 지나고 강서준이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배웅은 없다.

문을 열고 나가자 최서현이 밝은 얼굴로 자신에게 인사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조심히 돌아가시고요.”

 

“저기, 어머님.”

 

“네?”

 

“수연이가 무슨 고민 있나요? 수업은 잘 따라오는데 도통 말을 안 해서…”

 

“아… 요새 집에 와서도 말을 안 하는데 선생님한테도 그러시군요.”

 

“네. 좀 걱정 되네요.”

 

두 사람은 최수연의 방문을 걱정하는 듯 바라봤다.

최수연은 강서준이 나가자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둔감한 자신이어도 이쯤 되면 눈치를 채고도 남는다.

그날이었다. 그 날, 펑펑 울고 깨달았다.

김도영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 차단 당했음에도 하염없이 전화를 거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한 성격이다.

무언가에 미련이 남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불륜을 저지른 아버지란 인간이 객사할때도 속시원 하다고 생각했다.

김도영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란 것을 알았을 때 그렇구나, 하고 신경 끄면 되는 문제다.

그런데 그게 안 된다.

그 입으로 뭐라고 해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알량한 거짓말이라도 하면 눈 감고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인간이건 그는 자신에게 자상했다.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늘 자상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때로는 내 마음대로 해도 자유롭게 놔뒀고 때론 자신을 설득했다.

귀엽다 싶다가도 선생님 같고 어쩔 땐 성인 남자처럼 느껴졌다.

계기가 뭐였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만나는 시간들이 모두 계기였을 지도 모른다.

무기력한 자신이 낯설다.

내 피에 활력이 넘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울하다. 가만히 있으면 눈물을 흘릴 것 같아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다.

스트레스는 계속 쌓여만 간다.

역시 만나봐야 한다.

차단 당하고 어디 사는 지도 모르지만 만날 수 있는 길은 있다.

김도영이 자신에게 보여줬던 전 여친의 인스타 사진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백 만이 넘는 인플루언서에게 이런 일로 DM을 보낼 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랴. 답답한 마음에 죽은 듯 사는 것보다 낫다.

 

<최수연> : 저기, 김도영 쌤 아시죠? 저는 그분의 학생인데요. 잠시 대화 좀 가능할까요?

 

메시지를 보내고 읽는 데 한참이 걸릴 것 같았는데 답장이 곧바로 왔다. 

전 여친인 이 사람도 김도영에게 집착이 심하다고 하는데 혹시 그 때문일까.

 

<이혜린> : 무슨 일인가요?

 

<최수연> : 별 건 아니고요. 김도영 쌤이 걱정돼서 그런데 혹시 사는 곳 좀 알 수 있을까요?

 

이번엔 메시지를 보냈는데 한참 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최수연은 멍하니 채팅창을 들여다봤다.

곧이어 답장이 왔다.

 

<이혜린> : 과외 관뒀다고 들었는데… 알 필요가 있나요?

 

<최수연> : 과외는 관뒀지만 작별 인사도 못 해서요. 그때까지는 제가 그분 학생이에요.

 

다시 한참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최수연은 묵묵히 답장을 기다렸다.

 

<이혜린> : 좋아요. 알려드릴게요. 하지만 제가 알려줬다고 말하면 안 돼요.

 

최수연의 어깨가 순간 들썩거렸다.

 

<최수연> : 아, 감사합니다! 절대 말하지 않을게요.

 

이혜린이 집 주소를 찍어줬고 최수연은 다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활력을 잃은 피가 온 몸에 다시 활기를 찾은 느낌이다.

김도영을 만나고 어떻게든 매듭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까지 우울할지 예측되지 않았다.

 

 

****

 

 

“갔다 올게요.”

 

최서현은 오랜만에 말을 꺼낸 최수연에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어. 그,그래. 잘 갔다오렴. 수연아.”

 

최수연은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를 내려왔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학교가 아니라 김도영의 집이었다.

택시를 타고 갈까 생각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서 진정시킬 요량으로 지하철을 탔다.

오랜만에 느끼는 덜컹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최수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나면 무슨 말부터 꺼낼까? 왜 학교 안 가고 여기 왔냐고 핀잔부터 들을까. 무슨 애기든 좋아. 그냥… 말이라도 섞고 싶어.’

 

최수연은 역을 나와 묵묵히 지도 앱을 보며 길을 걸어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낡은 빌라가 눈에 보였다.

최수연은 계단을 올랐다. 

 

“201호… 201호…”

 

호수를 찾았다.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분명 이 문 건너편에 김도영이 있을 것이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띵동.

 

“…….”

 

묵묵부답이다. 문을 두드렸지만 역시 반응은 없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심하게 울리는 복도라 간신히 참았다.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문은 잠겨지지 않았고 어설프게 닫혀있었던 모양이다.

최수연은 조심스레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저기… 사람 있어요?”

 

반응이 없다. 한 눈에 보이는 원룸은 집주인이 부재한다는 걸 증명했다.

 

“어디… 편의점이라도 간 건가.”

 

최수연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치 안 사는 집마냥 이곳 저곳 먼지가 쌓여있다.

하지만 김도영의 집이 맞다. 그가 입고 있는 옷들이 옷장에 걸려 있었다.

그가 쓰는 섬유유연제, 그만의 향기도 느껴졌다.

이혜린이 제대로 집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뭐 기다리면 오겠지. 흠. 뭐하지.”

 

김도영의 집에 오자 온 몸이 떨렸다.

마치 해선 안될 짓을 하는 기분이다.

먼저 김도영이 자는 침대에 몸을 누웠다.

혹시라도 김도영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봐 치마 안이 안 보이게 밑으로 내렸다.

 

“푹신하네. 냄새도 좋고. 여기서 자는 구나.”

 

최수연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다가 순간 자신의 행동을 깨달았다.

 

“…하아. 발정난 개도 아니고 냄새를 왜 맡는담.”

 

최수연은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책상에는 컴퓨터가 있고 옆엔 자신을 가르치려고 준비한 교보재도 정성스럽게 쌓여 있었다.

최수연은 그것을 보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쌤이 가르쳐주면 공부 재밌을 것 같은데….”

 

일단은 만나는 게 우선이다.

최수연은 의자에 앉는데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아.”

 

“응?”

 

“……아아.”

 

“이게 무슨 소리지?”

 

옆 집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다.

낡은 빌라라서 방음이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적막한 집에서 옆 집 여자가 내는 듯한 신음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



오타 지적 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