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다테 하루나






밤이 완전히 깊은 키보토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


나는 척 봐도 비싼 음식값을 자랑할 것 같은 래스토랑에 와 있었다. 살면서 한두번 올까말까 한 장소에 이런 늦은 시간이라니, 부자연스러워도 너무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늦은 시간까지 밀린 업무를 끝내고 샬레 밖으로 나오니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고,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선생님. 하루나에요. 지금 저에게 시간을 조금 내주실 수 있나요?]


[좋아. 어디로 가면 될까?]


이대로 집에 돌아가서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으나, 나를 만나고 싶다는 학생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함부로 연락을 해올만한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된답니다. 선생님의 시간, 받아가겠어요."


하루나의 답변을 기다리던 그때,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고 팔장을 꼈다. 그 뒤에는 가슴이 닿고 있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하루나에게 붙들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어째서 이런 늦은 시간에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는데... 단지 야식이 먹고 싶어졌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전채요리는 붉은 빛을 띄는 참치로 만든 카르파쵸. 이것 만으로도 내 월급으로는 벅찬 음식인 것 같아서 먹기가 꺼려졌으나...


"돈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미리 2사람분의 예약을 해두었으니, 저와 미식을 찾은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즐겨주세요."


음식을 눈앞에 두고 미소를 짓는 하루나를 보니 먹지 않을 수가 없었지. 선생으로서 학생의 기분을 망치는 일은 할 수 없었으니까. 나 때문에 그녀가 식사를 망치는 일은 피해야 했다.


"참치는 기름진 생선이라 에피타이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만... 라임과 레몬 껍질, 그리고 레몬그라스를 곁들이니 날생선의 단맛과 상큼한 맛이 입맛을 돋우어주는군요. 미식이라고 할만 하네요."


"확실히 침이 조금씩 새어나오는 듯 한데... 나는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미식을 추구하는 하루나에 비하면 나는 초보자이기 때문일까."


"어머, 선생님은 다재다능하시니 미식에도 일가견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앞으로 자주 이렇게 식사자리를 만들어야겠군요. 선생님과 미식의 길을 걷는다면 더 깊은 맛을 찾을 수 있겠죠."


"하하... 시간이 된다면 말이야."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새에 다른 요리가 식탁에 놓였다.


"라자냐군요. 이곳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볼까요."


하루나가 능숙한 솜씨로 잘라낸 그 속에서 노란색과 하얀색 치즈가 천을 짠 듯이 쭈욱 늘어졌다. 한눈에 봐도 맛있어 보이는 모습에 입 속에 침이 고였다.


"헤에... 체다 치즈에 고르곤졸라 치즈라... 이렇게 강한 조합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꽤나 흥미로운 표정으로 하루나는 라쟈냐를 한입 먹었고...


"이런 조합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군요. 체다 치즈의 짠 맛이 고르곤졸라의 고소함을 부스트 시켜주는군요. 소스에는 무엇을 넣었는지 짠 맛을 중화시켜주는군요. 다진 고기와 채소의 맛이 함께 녹아들도록 조리했다니 훌륭하네요. 이것도 미식이네요."


"그런 것까지 감지해내야 하다니... 미식은 어렵구나."


"아니요 선생님. -해야한다 는 표현은 미식에 어울리지 않아요. 혀로 느끼는 그대로를 인지하는 것. 그것이 미식의 자세랍니다. 강박감이 서려있으면 맛을 제대로 볼 수 없어요."


"감각에 솔직해지라는 말인건가...? 좋은 음식이라도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잖아."


"바로 그것이랍니다. 선생님. 미식에 왕도는 없는 법.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최고라고 느껴지는 맛을 찾는 것.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역시 저와 함께 미식을 추구할 최고의 파트너는 선생님이에요."


다행히 그녀의 말 뜻을 이해한 것 같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이던가. 하루나는 즐거운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나갔다.


"하루나. 이 동글동들한건 뭐야?"


"아, 아란치니로군요. 밥 속에 치즈나 고기 등을 채워 구 형태로 만들어 튀겨낸 음식입니다. 본고장에서는 냉장고에 남은 식재료에 따라 내용물이 달라지는 흥미로운 음식이라고 하죠. 여기는 어떻게 만들었으려나요..."


아란치니 속에는 잘게 썰은 문어와 치즈, 담백하면서도 달달한 소스가 들어있었다. 그것이 바삭하게 튀겨진 밥알과 어우러지니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이건 생각보다 평범한 맛이네요. 문어의 쫄깃한 식감이 특이점을 만들어주긴 하지만, 너무 안정적인 맛이에요. 자극적인 맛을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선호할지도 모르겠어요."


"같은 음식이라도 다른 감상이 나온다니, 맛이란건 뭘까..."


"서로 맛의 감상을 나누다 보면, 맛의 견문이 넓어지지 않겠어요? 혼자일 때보다 둘이서 있을 때가 세상이 넓게 보이잖아요."


하루나와 둘이 식사를 이어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하루나가 웨이터를 불러세웠다.


"앞으로 나올 요리와 디저트까지 전부. 다 가져다 주시겠어요?"


"전부 말입니까...?"


"네. 전부요. 부탁드릴게요."


그녀의 요청에 테이블에 온갖 요리가 들어찼다. 우리가 먹던 음식들은 물론이고, 토마토 소스로 만든 듯한 파스타와 달콤할 것 같은 티라미수 케이크와 홍차와 김이 나는 우유까지. 호화로운 식탁이었다.


"꽤나 장관이잖아. 맛있는 음식부터 디저트까지 한번에 있다니..."


"그렇네요.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음식들이에요. 분명 전부 맛있는 것들일 테죠."


"저기.... 하루나?"


하루나는 갑자기 테이블에 있는 음식을 파스타가 담긴 접시에 몰아넣기 시작했다. 아란치니를 나이프로 난도질 하듯이 잘게 다지고, 라쟈냐와 티라미수 케이크를 포크로 휘저어 파스타 소스와 섞어버린다. 정말 맛있었던 음식들은 각자의 모습을 잃고 한데 모여 뒤엉켜 흑연을 반죽해 놓은 듯이 걸쭉하고 거무튀튀한 기분나쁜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어째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루나의 미소 뒤에는 짜증섞인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금 화가 난 것이다.


"자, 이건 어떤 맛을 낼까요?"


걸쭉하고 거무튀튀한,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를 음식을 하루나가 포크로 집어올려 입으로 가져갔고, 천천히 씹으며 그것을 음미했다.


"으음.... 무슨 맛이야?"


"최악이에요. 끈적거리는 것으로 모자라 딱딱한 이물질이 씹히는 기분나쁜 식감. 맛은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온갖 맛이 뒤엉켜서 혼란을 자아내는,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같은 맛이에요. 지금 당장 없에버리고 싶을 정도네요."


"하루나.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한게 있을까? 알려줘."


"오늘 딱히 잘못하신건 없어요. 아까 처음 만난 것이니 무언가 잘못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잖아요?"


"그럼 왜..."


"선생님이 평소에 제 미식을 망쳐버린게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이죠."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내가 하루나의 미식을 망쳤다니?


"방금 보셨겠죠. 훌륭한 맛을 가진 음식을이 뒤섞이니 이렇게 흉한 몰골로 끔찍한 맛을 낸다는 것을요."


하루나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녀의 오라는 그녀가 꽤나 짜증이 났음을 어필하고 있다.


"저에게 최고의 미식은 선생님이에요. 그 미식을 혼자서 만끽하고 있는데, 다른 맛이 끼어들어 버리면 이 흉한 음식처럼 되어버리고 말죠. 정말 기분나쁜 일이에요."


"하루나.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선생님의 곁에 있는건 분명 저인데 다른 여자의 연락을 받는다거나, 다른 여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는걸 들어버리면 그날의 미식을 망쳐버려요. 선생님과 함께 있는 시간은 저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시간인데 말이에요. 유형이든 무형이든 다른 여자가 그 시간에 끼어들면 추억의 맛은 망가져 버리죠. 그뿐인줄 아시나요? 선생님과 꽁냥댔다는 학생들에 관한 소문, 선생님의 몸에서 나는 다른 여자의 냄새. 그것만으로도 꽤나 제 미식을 망쳐버린답니다? 선생님은 업무상 다른 학생들과 접촉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 그 점은 이해해야겠지만, 솔직히 향수를 뿌려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매번 들어요. 단 둘이 있는 시간은, 온전히 두 사람의 것으로 만끽하고 싶으니까요."


물을 한 모금 마신 하루나가 말을 이어갔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맛인데, 맛보기 전인데도 다른 맛이 끼어들어서 망쳐버리는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먹고싶지 않아서 먹지 않은게 아닌데 말이에요. 더 숙성하고, 더 느끼고, 매 순간을 음미하면서 극상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먹는 것이 제 염원인걸요. 다른건 다 양보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방해받는건 용납하지 못합니다."


"하루나... 무슨 말인지 잘..."


하루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이미 알아 챘는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좋아해요 선생님. 선생님을 좋아한다구요. 선생님과의 순간... 아니, 선생님을 천천히 음미하고 시간을 추억으로 쌓고, 저희 둘의 마음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사랑으로 맺어지는 순간을 음미하는게 제 염원이에요. 그런데 그걸 다른 여자가 방해하다니요? 이런 만행이 따로 있나요? 그걸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최악이네요.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하게 되다니요. 끔찍해서 울고 싶어요."


말을 끝낸 하루나는 숨을 한번 들이쉰다. 끊김 없이 능숙한 손길로 홍차가 담긴 찻잔에 따뜻한 우유를 천천히 부었고, 그것은 밀크티가 되었다.


"좋은 맛의 밀크티네요. 찻잎의 향도 좋아요. 이렇게 좋은 재료가 서로 뒤섞이면 훌륭한 맛을 연주한답니다. 선생님과 저의 관계도 그렇게 되어야 하죠. 제가 그렇게 되도록 만들 거에요."


찻잔을 내려놓은 하루나의 표정에 조금 그늘이 서린 듯 했다. 실제로 그늘이 내린건 아니겠지. 그녀의 분위기가 바뀌었을 뿐. 그 분위기는 위험해 보이면서도 매혹적이라, 가시를 잔뜩 뻗은 장미를 보는 듯 했다.


"앞으로는 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늘려나가겠습니다. 선생님도 반드시 필요한 업무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은 협조해 주세요. 지금 쓴 맛을 보여드렸으니, 앞으로는 선생님도 만족하실 추억을 만들어 나갈 거에요. 그리고, 한가지 기억해 주세요."


하루나가 주머니에서 꺼낸 유리관 안에는 한 송이 시든 장미꽃이 있었다. 그것을 나에게 받으라는 듯이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었다.


"저는 아직 맛보지 않았을 뿐이에요. 한번 맛보고 끝낼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까, 제 미식을 망치는 일은 하지 말아주시기를 간곡히 부탁 드립니다."


앞으로 하루나를 대하는게 조금은 불편해질 지도 모르겠다.


"덧붙여서, 방해하는 사람은 제가 가만두지 않겁니다. 절대로요."







*시든 장미의 꽃말 : 당신과 영원을 맹세하다.








이상 블루아카 쓰레기 사료였구요...

후... 글 쓰는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