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몇 주 전, 누나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몇 달 전에.

 

6평짜리 좁은 집 안, 설거지대에 쌓아 올린 접시의 탑은

온갖 벌레가 점령하였고, 여름철 열기에 썩어버린 음식물은

본래 어떤 음식이었는지 가늠조차 못 할 정도로 녹아내렸다.

 

수없이 많은 파리가 바닥에, 벽에, 천장에 붙어있고, 누나의

시체는 이미 원형조차 남지 않았다.

 

이게 원래 사람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미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건만, 그럼에도 나는 바닥에 누운

저 무언가가 한때는 나의 누나였음을 확신했다.

 

어째서였을까, 저 샛노란 머리카락만은 남아있기 때문일까.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눈물이 나오는 이유는, 분명 악취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됐군.”

 

아아, 나의 아름답고 어리석었던 누님.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동정했을 뿐이다.

 

아름다운 여자에게 지혜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대다수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알았기에, 나는 그녀를 동정하였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그녀는 이렇게 끝났다.

 

“성 라자로시여, 그녀의 영혼에 안식을 주소서.”


그럼에도 그녀는 나의 유일한 혈육.

 

...마지막 작별 인사 정도는 해줘야겠지.

 

“음?”


그때, 나는 쓰레기 더미 속에 파묻힌 무언가를 보았다.

 

저 샛노란 머리카락은...그것은 나를 보고도 정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에, 난 그것이 이미 죽었으리라고

순간 착각했다.

 

하지만 저 붉은 눈동자는 분명히,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그런가, 너는...”


나는 그것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양어깨에 손을 넣었다.

 

“...”


“만나서 반갑구나, 아이야.”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멍하니 나를 보고만 있었다.

 

오물이 잔뜩 묻어 끈끈한 머리카락은 한 번도 정돈된 적이

없다는 듯 길고 푸석거렸다. 

 

옷을 입고 있지 않아 나는 이 아이가 여자라는 걸 겨우

알 수 있었고, 팔다리는 빼빼 말라 뼈만 남아있었으며

배만이 볼록 튀어나와 마치 올챙이처럼 보였다.

 

무엇보다도 이 눈.

 

아무런 빛조차 남지 않은 커다란 눈이, 누나를 쏙 빼닮았다.

 

나이는 이제 막 다섯 살이 됐나, 어쩌면 더 많을지도.

 

“내 이름은 바우르 엔. 너는?”


“...”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단 여기 계속 있을 필요는 없겠지.”


나는 그녀를 데리고 화장실에 들어가, 그녀를 씻겨주었다.

 

화장실 또한 이미 벌레와 곰팡이로 가득했지만, 이 상태로

바깥에 내보내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물은 아직 나왔고, 나는 그녀를 최대한 깨끗이 씻기고

그나마 깨끗한 옷을 입혀주었다.

 

“이제 가자꾸나.”


“...”


그녀가 처음으로 내게서 눈을 돌려, 제 어미를 보았다.

 

“너희 어머니는 죽었다. 이제...더는 만날 수 없지.”


소녀는 울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내 말에 납득한 듯 아주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차에 태워 은신처로 가다가, 문득 눈에 띈, 내가

좋아하는 햄버거 가게에서 멈췄다.

 

“아무것도 못 먹었을 테지, 햄버거는 좋아하나?”


“...”


아, 햄버거가 뭔지도 모르는 건가.

 

하지만 나는 여태껏 햄버거를 싫어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즉, 이 아이도 햄버거를 좋아할 거라 멋대로 생각하고, 나는

가게로 들어가 햄버거 세트를 두 개 주문했다.

 

햄버거는 고작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왔고, 나는 그녀의

앞에 햄버거를 내려놓았다.

 

“천천히 먹거라, 배가 놀라서 아플 수도 있으니.”


“...”


그녀가 천천히 햄버거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 다음, 입을 크게 벌려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고.

 

“...!”


처음으로, 소녀의 표정이 변했다.

 

몸을 오들오들 떨다가,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맛...있어...”


“입에 맞으니 다행이구나. 그래서...네 이름은?”


그 아이가 몸을 웅크리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시리...제 이름은...시리...에요.”


“그렇구나.”


나는 눈물을 닦아주지도,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그 아이가 햄버거를 다 먹어치울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저 멀리서 떠오르는 샛별만을 보았다.

 

 

 

 

 

#1

 

그는 자신이 나름대로 자상한 아버지라 믿던 남자였다.

 

그걸 증명하듯, 제임스 오웰은 오랜만에 아들 제이크를 데리고

숲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수로 데려가고 있었다.

 

“멀미는 좀 가라앉았니, 아들?”


“네. 조금 나아졌어요.”


제이크는 벌써 일곱 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자동차에만 타면

멀미를 일으키며 심할 때는 구토까지 했다.

 

하지만 항상 바쁜 아버지와 단 둘이 어디로 놀러 가는 일은

흔히 앉았으므로, 제이크는 의젓하게 멀미를 참았다.

 

그들이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4차선 도로로 들어왔을 즈음,

웬 대형 트럭이 그들이 탄 자동차 옆에 나란히 달렸다.

 

“뭐야, 이 트럭은? 그냥 빨리 지나-”

그 직후, 트럭이 그들의 자동차를 툭 밀어냈다.

 

밀려난 자동차는 그대로 나무에 처박혔고- 제임스 오웰은

그 순간 머리가 터져 즉사했다.

 

트럭이 사고 지점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멈췄고,

두 사람이 트럭에서 내렸다.

 

“가서 확인해라, S.”


“아, 네, B,”


S라 불린 소녀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한 손에는 작은

쇠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자동차에 다가가, 운전석에 머리를 박고 죽어있는 

제임스를 보았다.

 

“확실히 죽었어요, 봐요, 뇌, 뇌가 유리창에 붙어있잖아요?”


“그렇군. 다른 곳도 확인해라.”

 

“넷.”


그때, 그녀가 뒷좌석에 앉아 있던 소년을 발견하고서 망치를

뒤에 숨기고 문을 열었다.

 

“어머, 괜찮니? 손 이리주렴, 도, 도와줄게.”


“고, 고마-”


제이크가 그 손을 잡은 순간, S가 숨겨놓은 망치를 꺼내 들어

단숨에 머리를 내리찍었다.

 

“아, 피 묻었네...좀 더 깔끔하게 죽여야 했는데...”

 

“아, 어, 으?”


“미안, 뒤처리는 확실히 해야 하니까.”


쩍! 그녀가 제이크의 머리를 확실히 으깨버린 뒤, 시체를

끌고 나와 등에 메고 있던 시체 가방에 넣었다.

 

그 뒤, 운전석에 있던 제임스 역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삼촌, 저...정리 끝났어요.”


“가지고 오거라,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해도 사람이 지나가면

처리하기 힘드니까...”

 

“네.”


S가 시체 가방을 들고 트럭 뒤로 갔다.

 

그 후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들이 흔히 벌레통

이라고 부르는 박스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갈색 애벌레가 수없이 많이 들어있었고- 그녀는

시체를 꺼내 그 통 안에 휙 던져 넣었다.

 

“많이 먹어, 히, 귀여워라...”


-시체란 본래, 남들 모르게 처리하는 게 어려운 것이다.

 

물에 던지면 떠오르거나 밀려오기 마련이고, 태우면 반드시

연기와 재가 나오며, 또 시체를 깔끔하게 태울 정도의 화력은

그리 쉬이 만들 수 없다.

 

콘크리트에 파묻으면 부패하면서 생긴 가스 때문에 부서지고,

땅에 묻어도 결국 뼈는 수십 년 동안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우르가 찾은 방법은, 벌레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밀웜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면서도 시체를 아주 깔끔하게

먹어치운다.

 

고작 며칠이면 사람을 뼈만 남기고 먹어치울 정도이며,

남은 뼈는 공업용 믹서기에 갈아 땅에 흩뿌린다.

 

이렇게 하면 제아무리 뛰어난 명탐정이 오더라도 시체를

찾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역시 삼촌은 똑똑해...’

 

화르륵- S, 즉 시리가 컨테이너에서 나오니 아까 부순 타겟의

자동차가 불길에 휩싸여있는 게 보였다.

 

“이제 이탈한다, 경찰이 오기 전에 떠야지.”


“네, 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경찰은 불타오른 자동차를 보고 어째서 시체가 없는지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시체를 찾을 길은 없고, 목격자도 없으니, 결국엔

사고사로 처리하고 넘길 것이다.

 

“오늘도 수, 수고하셨어요...삼촌.”


“흠, 이 방법도 나쁘진 않지만 역시 경찰의 눈길을 끄는 것

같으니...뭔가 더 좋은 방법을 찾아봐야겠구나.”

 

“저, 저도 같이 생각할게요. 정말 아무한테도 눈에 띄지 않는

방법도 있을 거예요...아마도.”

 

바우르가 대시보드 위에 올린 달력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시리가 일을 돕기 시작하고 벌써 2년이나 됐나.’

 

고작 15살 무렵에, 시리는 느닷없이 킬러 일을 돕겠노라고

선언하고서 그의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바우르는 한사코 이를 거절했으나, 결국 시리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그리고 이를 기뻐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시리에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계획성, 대담함, 냉정함, 인내심.

 

킬러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을 모두 갖춘 그녀는, 고작해야

2년 만에 어지간한 킬러들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게 됐다.

 

“저, 저...삼촌?”


그가 한창 운전하던 중, 시리가 조용히 말했다.

 

“듣고 있다.”


“오, 오늘이 그러니까...제 생일이라서 말인데요...”


사실, 오늘은 시리의 생일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오늘- 8월 13일은 시리와 바우르가 그 썩어가는

방에서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하지만 시리는 그 날은 자신의 생일로 삼았고, 바우르도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저녁 식사...가, 가, 같이, 같이 하실래요?”


“새삼스럽구나. 우린 언제나 같이 밥을 먹는데.”

 

“아, 아뇨!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뭔가 좀 더...오붓하게...”

 

시리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이 새빨갛게 익었다.

 

사람을 죽일 때조차 눈 한 번 깜빡하질 않으면서, 정작 이런

순간에는 화장실이 급한 어린애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것도 좋겠구나. 그 전에 먼저 보고하러 가야겠지만.”


“...또 그 여자인가요.”

 

순간 시리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냥 전화로 보고하면 안 되는 건가요.”


“대면 보고가 원칙이니까...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하는 일이라곤 앉아서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것뿐이면서

잘난 척하는 그 꼬라지만 보면 속이 뒤틀려서요.”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에도 바우르는 그녀의 명령에 거스를 수 없었다.

 

“연좌제라는 건 참...성가시단 말이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부모의 죄는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주고 만다.

 

그는 시리를 흘깃 보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2

 

“어머, 엔. 수고 많았어, 금방 끝내고 왔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금발 머리의 미녀가 말했다.

 

착 달라붙는 붉은 정장에 풍만한 가슴, 길쭉길쭉한 다리가

매력적인 여자였으나, 두 사람 모두 그녀의 외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에 별 감흥도 없었다.

 

“뒤처리는 확실히 했고?”


“물론입니다, 아가씨. 보고서는-”

 

“벌써 썼어? 뭐, 안 읽어도 문제없겠지만 말이야.”

 

그녀가 턱짓하자, 옆에 서 있던 덩치 큰 경호원이 엔에게

다가가 보고서를 받았다.

 

“여기 있습니다, 클라우 아가씨.”


“흥흥흥~ 살짝 훑어만 볼게, 잠깐만 기다려줄래?”


“천천히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가 보고서를 훑어보는 동안, 시리는 클라우를 매섭게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음흉한 년.’

 

경계하지 않는 척하면서도 무장한 경호원을 둘이나 세우고,

들어오기 전에는 신체검사를 했으며, 만약 가까이 오면 

공격할까 경호원을 시켜 보고서를 받게 했다.

 

말투는 꼭 친근한 척 하지만, 클라우는 두 사람을 확실히

경계하고 있었다.

 

‘거기에 여차하면 죽일 생각이잖아.’

 

바우르도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저 커다란 창문 너머 빌딩

어딘가에서 저격수가 그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곧바로 제거할 수 있도록...

 

“응! 보고서도 이쁘게 잘 썼네, 역시 일처리 하나는 확실해~”

 

“...그럼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아니아니, 잠깐만.”


클라우가 다리를 꼬며 미소 지었다.

 

“마침 새 의뢰가 들어와서 말이야, 맡아줄 수 있지?”

 

딱,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경호원이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번엔 누구입니까?”


“음...이번엔 좀 거물이야. 과학부 장관의 외동딸이거든.”

 

그가 경호원이 건네준 보고서를 받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응, 그러니까 너한테 맡기는 거 아니겠어?”


삼촌 입에서 쉽지 않다는 말이 나오다니, 시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삼촌이 어렵다고 한 임무는 거의 없었는데.’

 

요 2년 사이 그가 어렵다고 말한 임무는 고작 두 개였다.

 

그리고 그 두 개 모두,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며

바우르조차 거의 목숨을 걸고 수행해야만 했다.

 

“이번 건은 지원이-”


“무슨 헛소리야? 지원 같은 게 있을 리 없잖아.”


아하하하- 클라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네 처지를 잊은 건 아니지? 네 아버지의 빚이 아직 얼마나

남았는지 다시 말해줘? 응?”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변하는 건 없으므로.”

 

바우르는 이미 빚 갚는 걸 포기한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인간쓰레기였다.

 

도박과 술, 여자 놀음에 빠져 인생과 돈을 허비하고.

 

집에 돌아와선 가족을 두들겨 패고, 자존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흔해 빠진 버러지 같은 인간.

 

그는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절대 빌려선 안 될 돈까지 빌렸고.

 

그 빚은 그가 죽은 후에도 남아, 그의 아들인 바우르가 킬러

일을 하며 갚고 있었다.

 

‘하지만 삼촌이 빚을 갚을 날은 영영 오지 않겠지...’

 

사실 여태껏 바우르가 번 돈만 해도, 이미 그의 빚을 거의

수십 번씩 갚을 정도일 터였다.

 

그러나 조직에게, 클라우에게 있어 바우르란 남자는 언제

어디서든 써먹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였다.

 

빚을 목줄 삼아, 그가 죽거나 잡힐 때까지 부려먹을 생각뿐.

 

‘삼촌만 허락하면 당장에라도 죽여버릴 텐데.’

 

시리는 당장에라도 클라우를 찢어 죽여버리고 싶었다.

 

삼촌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들고, 노예처럼 부리는 저 여자가

죽이고 싶어서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삼촌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리 할 것이다.

 

“여하튼 이번 건수도 잘 부탁해~”


“...돌아가자, 시리.”


“네.”

 

덜컥, 문이 닫히자마자 시리가 표정을 확 구겼다.

 

“이런 건...불공평해요.”


“시리.”


“제 말이 틀렸어요? 저, 저 여자는 아무것도 안 하는 주제에

앉아서 저희가 번 돈을 거의 다 가로채고 앉아 있잖아요...!”

 

의뢰비의 9할은 클라우가 챙겨간다.

 

나머지 1할은 그나마 생활비로 쓸 정도이고, 그마저도 둘이

겨우 아껴 써야 그럭저럭 버틸 정도의 푼돈이었다.

 

살인을 대가로 받는 돈이라기엔, 턱없이 적다.

 

“삼촌이 얼마나, 얼마나 고생해서 번 돈인데...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그런 돈인데, 그런 돈인데...!”

 

“난 괜찮다...부모의 죄를 대신 갚는 게 드문 일도 아니니.”

 

“제가 안 괜찮아요! 사, 삼촌이, 삼촌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사실 킬러 따윈, 하고 싶지 않으시면서...!”

 

“그만 됐다...오랜만에 뭔가,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가자.”

 

그녀는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가장 괴로운 사람은 삼촌이라는 것을.

 

“...햄버거. 햄버거 사주세요, 삼촌.”


“그걸로 좋다면.”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그녀는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이빨을 갈았다.

 

 

 

 

 

#3


이젠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벌레와 곰팡이, 악취로 가득 찬 방, 바깥에서 흘러들어오는

자동차 소리, 끝없이 쌓아 올린 접시와 들어오지 않는 전등.

 

“가, 아, 너, 너그, 너-”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으며, 그녀가 손을 뻗었다.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애원하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내가 아니야.”

통하지 않는 변명을 내뱉는다.

 

이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대답했다.

 

어머니가 오래 전에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토해냈다.

 

“내가 안 그랬어, 난 아무 잘못 없어, 내가! 내가 아니야!!”

어머니의 형체가 무너져내린다.

 

썩어 문드러지는 피부, 눈알이 툭 떨어지며 터지고, 점점

뼈가 드러나 마치 좀비처럼 보였다.

 

“전부 너 때문이야.”


“아니야!!”


-아.

 

그녀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하아...지금...몇 시지?”

 

새벽 3시 15분. 이번에도...또 그 꿈을 꾸었다.

 

“...”

 

시리가 고개를 돌려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수영장에라도 들어간 것처럼 번들거리는

피부, 그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아니, 이유는 알고 있다.

 

전부 변명이라는 것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 용서해주지 않는 거야?”


달칵, 그녀가 전등을 켜고 일어섰다.

 

그녀의 방안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장난감이 잔뜩 있었다.

 

대부분은 7, 8살짜리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인형이나 혹은

플라스틱 피규어 따위가 있었고, 옷 역시 조금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디자인의 옷이 전부였다.

 

정장을 입고 다니는 건 일할 때뿐.

 

어디까지나 삼촌이 자기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도록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삼촌, 아직 깨어있으려나.”


시리가 방에서 나와, 바우르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사는 은신처는 상가 건물 지하에 있는, 예전엔 창고로

쓰던 지하실이었다. 

 

그 때문에 습도가 높아 곰팡내가 났지만, 이마저도 종종

월세를 내지 못해 애를 먹곤 했다.

 

싸구려 판넬로 만든 방 너머, 시리가 조심스레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바우르가 보였다.

 

“...또 악몽을 꾸었구나.”

 

“소리 질러서 죄송해요, 삼촌...”

 

“괜찮다. 이리 오거라, 함께 자도 괜찮다면...”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시리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악몽을 꾸는 건 싫지만, 악몽을 꾼 날에는 바우르가 함께

자는 걸 허락해준다.

 

시리는 얼른 바우르의 옆에 누워,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에...헤헤헤...히히...죄송해요, 삼촌.”


“잠이 오지 않는다면...”

 

“좀만 얘기하다가 자요, 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시리는 삼촌이 해주는 이야기라면 뭐든지 좋았다.

 

때로는 그가 믿는 성인교의 성자, 라자로의 일화에 대해

들려주곤 했고, 때로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동화...아무거나 좋으니까 동화 들려주세요...”


“그런가. 알았다, 그럼 옛날 옛적에...”

 

그가 탑 꼭대기에 갇힌 공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리는

말없이 바우르를 보며 눈동자를 빛냈다.

 

‘역시 나한테는 삼촌밖에 없어...’

 

그녀가 이쪽 세상에서 사는 동안 본 남자들은 대개 비슷했다.

 

기생충 같은 인간, 복어처럼 허세만 가득 찬 인간,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발정 난 개새끼 같은 인간.

 

그러나 삼촌은 달랐다. 똑똑하고, 다정하고, 믿음직하다.

 

‘이대로 평생 삼촌이랑 같이 살 수만 있다면...’

 

삼촌을 생각할 때마다, 몸이 달아올라 미칠 것만 같다.

 

벌써 서른을 넘긴 나이건만 그의 몸은 언제나 먼 옛날 최고의

예술가가 빚은 것 같은 조각상 같았고, 얼핏 평범해 보이는

얼굴은 그가 진지해졌을 때 더없이 이지적이고 야릇해 보였다.

 

킬러라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그는 더없이 자상한 사람이었다.

타겟 외에는 절대 손대지 않으며, 사적인 원한으로 사람을

죽이지도 않는다.

 

가능한 고통을 주지 않는 방법만을 사용하면서도 죽인 사람을

절대 무시하거나 조롱하지도 않았다.

 

-만약 킬러가 아니었다면, 그는 분명 성직자가 되었을 거라고.

 

시리는 자신도 모르게 가랑이를 꼼질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스으...”


“아.”

 

바우르가 동화를 들려주던 중 잠들어버렸다.

 

그러나 시리는 깨우지 않고, 한참이나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삼촌...자?”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자고 있음을 확신한 시리가 조심스레 자신의 바지에

손을 쑥 넣었다.

 

“삼촌...좋아해...좋아...세상에서 제일 좋아...”


삼촌과 조카 사이가 아닌, 유사 부녀 관계가 아닌.

 

한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연인, 아니 부부가 되고 싶다.

 

그게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애타게 원했다.

 

“삼촌이랑 결혼하고 싶어...삼촌의 아이...가지고 싶어...”


본인 앞에서 이런 말을 하다니, 바우르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경멸할까.

 

그러나 시리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이 배덕감에 중독되고 말았기에.

 

“삼촌을 볼 때마다 아랫배가 근질거려요...이힛...삼촌하고

같이 잘 때마다 덮치고 싶어서...참는 게 너무 힘들어...”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에게 격하게 안기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해줬으면, 평생 같이 있자고 말해줬으면.

 

“삼촌 좋앗...삼촌, 삼초...오온...”


시리가 몸을 파르르 떨다가, 조심스레 침대에서 나왔다.

 

“...이거, 진짜 그만둬야 할 텐데.”

 

행위를 마치고 나면 죄악감과 수치심이 몰려왔지만.

 

결국 끊지는 못할 거란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4

 

“네?”

 

“이 교복을 입으라고 했다.”

 

교복...? 시리가 흰 셔츠와 짧은 치마를 들어 올렸다.

 

‘거기에 스타킹까지...? 헛, 설마 이건...!?’

 

드디어 그때가 온 것인가? 결국 삼촌도 참지 못하게 됐나!?

 

시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침까지 흘렸다.

 

“아, 그, 삼촌이 원한다면...얼마든지...하지만 이런 취향은...

물론, 저는 받아줄 수 있지만...에헤, 이히힛...”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너는 그걸 입고 학교에 잠입하여

정보를 모아야 한다, 시리.”

 

아.

 

아, 아아.

 

시리가 수치심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타겟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거의 항상 경호원의 보호를 

받아 접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죽여버렸다간 

일이 커지겠지...최대한 의심 받지 않고 죽일 방법이 필요하다.”

 

“제,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일단 그 학교에 위장 전입하여 타겟과 친분을 쌓도록.

어디서 뭘 하는지, 좋아하는 건 뭔지, 사소한 정보도 좋다.

시간은 넉넉하니 조바심내지 말고 자연스럽게 접근해라.”

 

“학교...인가요. 헤, 한 번도 다녀본 적 없었는데...”


학교에 가기 전 어머니가 죽었고, 아버지란 작자는 둘을

버리고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그녀는 학교에 가본 적이 없었다.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삼촌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좋아. 수속은 이미 끝났다, 오늘 바로 시작할 수 있어.”

“그럼 바로 시작하죠...시간 끌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 직후, 바우르는 그녀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그들이 향한 타이슨 고등학교는 흔히 말하는 상류층 아이들이

다니는 정부 교육부 직속 고등학교였다.

 

흔해 빠진 일반 고등학교와 달리, 이곳에선 진보된 교육법을

사용하며 어중이떠중이는 문턱조차 밟을 수 없는 곳.

 

그 명성에 걸맞게, 커다란 학교 건물은 새하얀 대리석 외벽에

널찍한 공원, 커다란 운동장, 심지어 수영장까지 갖추었다.

 

“저, 저, 아무리, 할 수 있겠다는 했지만, 이건 좀...!?”

 

“어차피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 겁먹을 필요 없다.”

 

“그건 알지만...우으, 소, 속이 안 좋아요...”

 

그때, 바우르가 느닷없이 시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헷?! 아, 하히후헤호!?”


“괜찮다.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도와주마.”


“그, 그, 그, 아, 알겠, 알겠습니닷! 헤, 저, 저는 삼촌만

믿고 있으니까...부르면 꼭 와주셔야 해요?”

 

“음.”


그리고 바우르는 타고 온 자동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시리 혼자.

 

‘할 수밖에 없어...그래,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잖아?’

 

평소에 어떤 일을 했는지 생각해보면, 처음 온 학교에

들어가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 이거 먼저 읽어봐야지.”


여기 도착하기 전, 바우르가 그녀의 PDA에 임무 지침서를

보내주었다.

 

시리는 지침서를 쭉 훑어보며 어찌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과연...대충 어떤 여자인지는 느낌이 오네.’

 

타겟의 이름은 이리아 A 라즈벳.

 

나이는 17세, 과학부 장관 알렉산더 라즈벳의 외동딸.

 

외모 우수, 품행 우수, 무엇보다도 특기할 것은 그녀의 뛰어난

지적 능력이었다.

 

과학부 장관의 딸답게, 온갖 대회에서 상을 탄 것은 물론이요

예술 쪽에도 재능이 있어 꽤 유명세를 탄 모양이었다.

 

‘한 마디로 규숫집 따님이다 이거구먼.’

 

재수없다, 기분 나쁘다.

 

문득 솟아 오른 열등감 때문인지, 죽여도 딱히 죄책감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뭐 좋아...일단 해보자고.”

 

-그 직후, 시리는 학교에 발을 들인 것을 후회했다.

 

“아...안녕, 하세요...시엔...이라고 합니다...”

 

새로 전학 온 미소녀라는 건,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주목 받았다.

 

고작 몇 시간밖에 안 지났건만, 그녀는 평생 이보다 더

관심을 받을 수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너 어디 살아? 아버지가 데려다주는 거야?”

 

“어, 화장 안 했네? 왜 안 했어? 이렇게 귀엽게 생겼는데?”

 

“너 번호 뭐야? 아, 우리 반 애들 번호는-”


태생부터 아웃사이더, 즉 남들의 관심을 싫어하는 시리에게

이 과도한 관심은 고문이나 다름없었고.

 

“-나, 나! 화, 화, 화장실 좀 다녀올게!”

 

거기서 달아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시리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서 벗어나, 겨우겨우

3층 복도까지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학교라는 건 원래, 이렇게 무서운 곳이었나...!?’

 

토할 것 같다. 거기 10분만 더 있었으면 정말 그랬을지도.

 

시리가 비틀거리며 복도를 걷던 중,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어랍쇼...”

 

창문 너머, 음악실에 홀로 앉아 있는 소녀.

 

은발에 푸른 눈동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는 눈을 감고

이름 모를 곡을 경쾌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망할, 진짜 예쁘긴 하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가 바로, 타겟인 이리아라는 것을.

 

시리가 한참이나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중, 아리아가

고개를 돌려 싱긋 웃었다.

 

“와, 우리 처음 만나나? 안녕?”

 

“에, 으, 아으?”

 

“아하하, 뭐야 그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이리로 와.”

 

아리아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이끌고 피아노 앞에 앉혔다.

 

“나, 나 피아노 칠 줄 모르는데!?”


“괜찮아. 뒤에서 도와줄게, 너무 긴장할 필요없어.”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리 친근하게 굴 줄이야.

 

이리아가 시리의 손을 포개듯 잡고, 천천히 건반을 눌렀다.

 

“자, 피아노의 기본은 음이름과 건반 위치를 외우는 것부터야.

도레미파솔라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지?”

 

“그러니까, 어음, 그, 그 정돈 아마, 알고 있지 않을까.”

 

사실 거짓말이었다. 악기 연주를 해본 적이 없으니 음악에

대해 아는 거라곤 쥐뿔도 없었다.

 

하지만 이리아는 그녀를 비웃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는 듯

음이름을 가르쳐주며 한 건반씩 누르게 했다.

 

“재미있지?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이렇게나 즐거운 거야.”

 

“아...으응...”

 

햇살과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오는 아침.

 

코끝을, 마음을 간지럽히는 오렌지 라임향.

 

극세사 이불처럼 부드러운 손,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

 

“같이 연주할래? 너는 그냥 몸을 맡기기만 해.”


----

 

이리아가 시리의 손을 잡고 연주를 이어갔다.

 

이름도 모르는 곡이지만, 그 소리는 더없이 맑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짧은 연주가 끝났을 때, 이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참, 나는 이리아 A 라즈벳이야. 너는?”

 

“...시엔. 그냥 시엔이라고 불러줘.”

 

“우리 학교에 온 걸 환영해, 시엔. 앞으로 잘 부탁해.”

 

참으로 기묘한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시리는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5

 

시리 엔에게 있어 친구란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선심 쓰듯 던져 준 플라스틱 기사님은

그녀 인생에 있어 유일한 친구였다.

 

물론 무어라 말을 걸어도 기사가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시리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 따윈 어차피 아무도

없었으므로 아무 상관 없었다.

 

그것이 부서졌을 때, 시리는 친구라는 존재를 포기했다.

 

인생에서 친구 따윈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뭐해? 안 먹어? 혹시 배 아프다거나?”


“아, 아니...괜찮아...근데 이거...좀 비싸 보이는데?”

 

시리가 난생 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디저트를 보며 말했다.

 

유리컵에 아이스크림, 과자, 초콜릿,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이름도 모를 디저트는 대충 봐도 비싸 보였다.

 

‘이거 먹을 돈이면 사흘 동안 배부르게 먹을 텐데.’

 

그녀가 그리 생각하며 숟가락을 뜬 순간, 무언가가 번쩍였다.

 

“마, 마, 맛있어...!”

 

“응? 파르페 처음 먹어보는 거야?”


“응!...아, 그, 그게, 우리 삼촌이 디저트는 못 먹게 해서...”

 

“너무해!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게 했단 말이야?”

사실 못 먹게 했다기보다는 먹을 돈이 없어서 그랬지만.

 

시리는 쓴웃음을 흘리다가, 다시 파르페를 입에 넣었다.

 

“그래서 시엔, 너희 부모님은 뭐하는 분들이셔?”

 

“아...”

 

거기까진 생각 안 해뒀는데.

 

시리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옛날에 돌아가셔서 말이야.”


“아, 미, 미안!”

 

“아냐, 진짜 괜찮아. 지금은 삼촌이랑 둘이서 살고 있어.”

 

이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괴었다.

 

“그으래? 그럼 삼촌은 어떤 분이셔?”


“우, 우리 삼촌은 말이지!”


이어서 시리의 멈추지 않는 삼촌 자랑이 시작되었다.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또 얼마나 유능한지 등등.

 

말하면 안 되는 정보만 빼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부터 평소

즐겨 듣는 노래까지- 정말 온갖 것을 떠벌렸다.

 

“와우, 시엔 너...삼촌 진짜 좋아하는구나?”

 

“응! 진짜 좋아해! 에헤, 으헤헤헤...”

아차, 이러면 안 되는데.

 

시리가 제정신을 차린 뒤 자세를 똑바로 잡았다.

 

“그렇게 잘생겼으면 말이야...나중에 한 번 만나도-”


“안 돼.”

 

시리가 표정을 바꿔 정색했다.

 

단순히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 만약 그와 이리아가 만나게

되면, 아마 그 순간...

 

‘타겟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가능하면 나중에 죽이고 싶다.

 

킬러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 생각했다.

 

“왜애? 아, 삼촌 빼앗길까 무서워서 그렇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시리가 피식 웃었다.


‘뭐, 삼촌이 그럴 리는 없을 테지만.’

 

그는 여러모로 목석 같은 인간이었다. 

 

여자를 찾는 일도 없고, 술 담배는 입에 댄 적도 없으며,

의뢰가 없을 때는 철저하게 루틴을 짜서 생활했다.

 

그 흔한 취미조차 따로 없을 정도이니, 시리는 종종 삼촌이

정말 같은 인간이 맞나 싶었다.

 

“아, 슬슬 시간 됐네. 나 이제 집에 가야 해서.”

 

이리아가 손목시계를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응...잘 가, 내일 보자.”

 

“응! 내일 보자!”

 

이리아가 먼저 자리를 떠났고, 시리는 파르페를 전부 먹어 치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녀석이야, 정말로.’

 

사랑받고 행복하게 산 인간은, 저리 아름답구나.

 

남을 의심하지도 않고, 힐난하지도 않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반면 나는...’

 

무엇이든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경계한다.

 

“나도, 저 녀석처럼 살 수 있었다면...”


시리가 고개를 돌려 카페 안에 손님들을 보았다.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워 보였다, 커플끼리 온 손님은 서로

케이크를 먹여주고 있었고, 친구끼리 온 손님은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고 있었다.

 

“나도...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면...”

 

킬러에게 이런 감정이 사치라는 걸 알면서도.

 

품어선 안 될 마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시리 엔은, 그 순간 평범함을 동경했다.

 

 

 

 

#6

 

즐거운 시간은 언제나 빠르게 흘러간다.

 

지난 두 달 동안, 시리는 자신의 임무마저 잊어버리고 말았다.

 

함께 카페에 가거나, 시험공부를 하거나, 쇼핑하러 나갔다.

 

평생 해본 적 없는 평범한 일들을 잔뜩 즐겼다.

 

나중에, 좀만 더 나중에.

 

그렇게 하루, 이틀 미루는 사이, 시리는 깨달았다.

 

“...나, 그 녀석을...좋아하고 있구나.”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다가 문득 본 거울에는 킬러가 아닌

평범한 소녀가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는 순해졌고, 다크서클도 사라졌으며, 표정은

마치 길들어진 강아지 같기도 했다.

 

“친구...인가.”

 

평생 삼촌 이외에 친한 사람을 만든 적이 없었다.

 

애초에 킬러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게 기본이기에, 다른

사람하고 사교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

 

아마도 이리아는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가 될 것이다.

 

아니,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라 부를 수도 없었다.

 

‘나는 결국 그 아이를 속이고 있으니까.’

 

본명도, 정체도, 목적도, 그 무엇 하나 솔직하지 못한 채.

 

-거짓된 우정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시리?”


“아, 삼촌.”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삼촌과 마주쳤다.

 

평소라면 기쁜 마음에 웃었을 테지만...

 

“뭔가 있구나. 말해도 된다, 네가 괜찮다면.”

‘역시 삼촌은 눈치가 너무 빨라...’

 

하긴 눈치 없는 킬러는 진작 잡혔거나 죽었겠지.

 

시리가 그리 생각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 사, 삼촌, 그, 들으면, 아마, 화낼 텐데, 그, 제발,

일단 들어만...줄 수 있어요?”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마.”

 

“...이번 의뢰...취소하면 안 돼요?”

 

그 순간, 바우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평소 거의 변하지 않는 그의 표정이 변하다니, 시리는 그걸

보고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자각했다.

 

“드문 일이구나,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하, 하, 하, 하지만! 그, 있잖아요! 이리아는 꽤, 그러니까...

진짜 괜찮은 녀석이라서...죽이기엔 좀 아깝다고 해야 하나...

물론 킬러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는데요...”

 

바우르가 말없이 그녀를 내려보았다.

 

한참이나, 아주 긴 시간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삼촌...역시 화났구나...응, 그렇지...당연히 화내겠지...’

 

“시리.”


“네, 네네넷!”


“-알겠다. 클라우에겐 내가 직접 말할 테니, 너는 이번 건에서

손을 떼거라. 아니...”

 

바우르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뒤,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됐다. 시리, 너는 이 일에서 손을 떼.”

 

“네...? 그 말은, 그러니까, 설마...킬러를 그만두라고...?”

 

“넌 이제 킬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말한 거다.”

 

그는 킬러가 어떤 존재인지, 아니 어떤 존재여만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킬러란 도구다. 비유하자면 총에 가깝다. 사용자가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을 내뱉어 목표를 파괴한다.

 

그 외에 나머지는 생각해선 안 된다.

 

사적인 감정에 얽매인 순간은, 킬러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순간과 마찬가지다.

 

“언젠간 말해야 할 일이었지만...시리, 네 아버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아버...지요?”

 

사실, 시리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종종 술에 취해 어머니와 자신을 때렸고, 어느새 사라져서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됐다는 것만 떠올랐다.

 

“네 아버지는...네 할아버지와 비슷한 인간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인간쓰레기였지. 네 엄마가 병에 걸리고

쓰러지자, 그 남자는 집안의 돈을 모두 들고 도망쳤다.”

 

“그게 왜요?”

 

“나는 킬러다. 즉, 사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

그러나 딱 한 번, 나는 내 사적인 원한을 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 적이 있었다.”

 

설마.

 

시리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하셨나요?”


“죽여서 벌레 먹이로 줬다.”

 

“그런가요.”


어차피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말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시리는

내심 이해하고 있었다.

 

“사적인 원한을 내세워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지.

비록 나는 그 이후에 반성하고 마음을 잡았지만...마찬가지로,

사적인 감정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된 킬러는 결국

아무도 죽일 수 없게 된다.”

 

“저도 결국...그렇게 될 거란 뜻이죠?”

 

“아마도.”


시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바우르를 보았다.

 

“이번 건은 어쩔 수 없었지만, 다음엔-”


“다음은 없다. 넌 이제 킬러로 살지 마라, 이참에 그 학교에 

정착해서, 가능한 한 평범하게 살거라. 아니...”

 

바우르가 무어라 말할지, 시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너도 곧 성인이 된다. 굳이 내게 얽매일 필요도 없지.

너의 인생을 찾아라, 네 엄마도, 나도 찾지 못했던 평범함을...

평범한 행복을 찾으려무나, 너라면 할 수 있을 테지.”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클라우를 만나러 가마. 이제 넌...괜찮을 거야.”

 

시리는 그를 멈춰세우지 못했다.

 

“삼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아니, 킬러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아닌가? 그만두고 싶었던 건가? 평범하게 살고 싶었나?

 

“나...나는...어쩌면...어떻게 해야...좋은 거야...?”

 

평범한 삶을 선택하면, 이제 삼촌을 만날 수 없게 된다.

 

킬러의 삶을 선택하면, 이리아를 죽여야만 한다.

 

-세상은 언제나 선택을 강요한다.

 

이제, 선택할 때가 온 것이다.

 

 

 

 

 

#7

 

바우르 엔은 한 번도 자신의 직업을 사랑한 적 없었다.

 

우연히 킬러의 재능이 있었고, 운 나쁘게도 그의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게 되어 인생을 저당 잡히고 말았다.

 

평생 킬러로 살아도 그 빚을 다 갚는 날은 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또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시리, 너만은 그리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뒤틀린 가정환경 탓에 그리 됐지만, 시리의 본성은 분명

선한 쪽에 있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승강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신체검사를 받은 후

클라우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커다란 소파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레 웃고 있었다.

 

“엔~ 나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클라우 님.”

 

“아가씨가 아니라 클라우 님이라. 네가 날 그렇게 부를 때엔

꼭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더라?”

 

이 말을 어찌 꺼내면 좋은가.

 

바우르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번 의뢰를 취소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당연히 안 되는데 뭔 헛소리야? 아하하, 설마 그런 농담

한 번 하자고 나랑 미팅 잡은 건 아니지?”

 

“...진심입니다, 클라-”


“한 대 갈겨줘.”

 

뻐억-!!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경호원이 그의 무릎 뒤를 후려쳤다.

 

“...”


“와우, 제대로 들어갔는데 비명도 안 지르네?”


바우르가 일어서려고 하자, 경호원이 그의 머리를 붙잡고

바닥에 내리 찍었다.

 

“...이러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아니, 네가 요즘 살짝 자기 처지를 잊어 먹은 것 같아서~”

 

클라우가 그를 내려보며 미소지었다.

 

“엔, 너는 말이지. 플라스틱 칼이랑 다를 게 없다고.”


“플라스틱 칼...입니까.”

 

“응! 일단 제대로 들 때는 쓰겠지만, 언젠가 날이 무뎌지면

그냥 버리고 새로운 걸 사서 쓰는 일회용품 말이야.”

 

그녀가 경호원에게 눈짓하자, 그가 바우르의 상의를 거의

찢듯이 벗겼다.

 

“그런 주제에 뭐라도 된 것처럼 뻔뻔하게 요구하는 꼬라지를

내가 용납할 거라고 생각했어? 진심으로? 아하하, 엔...”

 

드륵- 그녀가 서랍에서 채찍을 꺼내 들었다.

 

“날 우습게 본 대가는 치러야지?”

 

쩌억- 쩌어억-!!

 

채찍이 내리꽂힐 때마다, 피와 살점이 벽과 바닥에 튀었다.

 

그러나 바우르는 꼼짝 않고 바닥에 누워,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그 모든 걸 등으로 받아냈다.

 

그걸 지켜보던 경호원들조차 표정을 구길 정도로 혹독한

채찍질이 이어졌건만, 바우르는 그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말없이 참았다.

 

그렇게 10분이나 이어진 고문 끝에, 땀에 푹 젖은 클라우가

채찍을 바닥에 휙 던졌다.

 

“아~ 오랜만에 운동했더니 힘드네. 그래서 바우르, 생각이

좀 바뀌었어?”

 

“...부디,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이고, 그깟 여자가 뭔 대수라고 이 난리야? 네가 지금껏

죽인 사람들하고 뭐가 다른데? 이제와서 죄책감이 들어서?”

 

“제 조카...시리에게...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바우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패널티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좋아, 그럼. 하지만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된 거겠지?”

 

턱. 그녀가 나이프를 꺼내 책상에 박았다.

 

“어디 보자...그래, 왼손가락 3개는 잘라야겠다. 손가락은

두 개만 있어도 방아쇠 정도는 당길 수 있잖아, 그렇지?”

 

“...”


“에이, 그거 자른다고 안 죽어~ 그래도 엔, 너는 그래...나름

충실한 부하였으니까, 기회를 줄게.”

 

3일. 그녀가 손가락 세 개를 들며 말했다.

 

“3일 줄게. 3일 안에 그 여자를 죽이면 이번엔 용서해주지.

하지만 3일 뒤에도 네 마음에 꺾이지 않았다면...손가락은 

잘라야겠지만, 의뢰는 취소해줄게.”

 

“그걸로 된다면...”

 

“와, 너 진짜 독종이구나?”

 

클라우가 큭큭 웃으며 나가라고 손짓했다.

 

방에서 나온 바우르는, 승강기에 타자마자 그대로 넘어졌다.

 

“...이걸로 됐다. 손가락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손가락 세 개로 시리를 구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동차를 몰아, 은신처로 돌아갔다.

 

“삼촌...!? 뭐, 뭐야 이 상처는!? 어, 어쩌다 이렇게-”

 

“어떻게 잘...이야기가 됐다. 넌 죽이지 않아도 돼...”

 

“이, 일단 침대! 침대로 가서 누워요, 네!?”

 

시리가 바우르를 부축하여 침대에 엎드리게 했다.

 

“이게 다 뭐야...채찍 자국...? 설마 그 여자가...!”


“항생제랑 진통제...얼음도 좀...”


“네, 네!”


시리의 응급처치는 거의 완벽했다.

 

사실, 과거에 의뢰를 마친 뒤 큰 상처를 입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시리는 바우르에게 미리 응급처치 기술을 배웠다.

 

그들은 병원에 갈 수조차 없었다...돈도 없거니와 신분이

불분명한 킬러가 병원에 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체 얼마나 때린...세상에, 뼈가 다 보이잖아...!?”


“클라우와 거래했다...이번 의뢰는 취소해도 괜찮을 거다.”

 

“그 여자가 이 정도로 봐줬다고요? 그럴 리가...”

 

“손가락 세 개...그걸로 넘어가주기로 했으니 다행이겠지.”

 

손가락이라고?

 

붕대를 감던 시리의 손이 우뚝 멈췄다.

 

“저, 저, 저 때문에...손가락을, 세 개나...”


“괜찮다. 조금 불편하긴 할 테지만 의뢰는 수행할 수 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시리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저 때문에! 제 고집 때문에, 제 응석 때문에! 사, 삼촌이 왜

손가락을 잘라요? 제, 제가 자를게요! 제가 자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아냐,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다고요!”

 

“시리.”


“왜 세상은 이렇게나 잔인한 거예요? 왜 우리한테 이래요?

왜 아무도 저희한테 상냥하게 대해주지 않는 거죠? 우리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냥, 한 번은, 한 번 정도는!!”


쌔액- 쌔애액- 시리가 과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

 

“한 번 정도는, 용서해 줄 수 없는 건가요...?!”

 

“...미안하다.”


“삼촌이 왜 미안한데요...”


이 사람은 항상 이렇다.

 

자신의 죄가 아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 때문에, 언제나

상처 받는다.

 

그의 아버지 때문에 킬러가 됐고, 이젠 조카 때문에 손가락을

잘라야만 한다.

 

‘정말로 세상에 신이 있다면...’

 

어째서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는 것인가.

 

우리 같은 악인에겐, 구원 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말인가?

  

‘...제발, 우리 삼촌 좀 행복하게 해주세요.’

 

시리는 기도를 올릴까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

 

결국 우리를 구해주는 사람 따윈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았기에.

 

 

 

 

#8

 

노을의 색깔은 주홍색이 아니다.

 

태양과 가까운 부분은 붉은색이며, 거기서 멀어질수록 선명한

보라색이 되며, 거기엔 희미한 초록색이 섞여 있다.

 

학교 옥상에서 본 노을은, 항상 보던 것과 조금 달랐다.

 

이리아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그렇게 느꼈다.

 

“시엔, 무슨 일이야? 학교를 이틀이나 빼먹고...”

 

“일이 좀 있었거든.”

 

이리아는 난간에 기댄 채 시리를 보았다.

 

뭐라고 해야 하나, 평소와는 무언가 좀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날 여기 부른 거야? 아, 설마 생일 선물

미리 주려고? 에이, 아직 열흘이나 남았는데~”

 

“뭐...비슷해. 너한테 이걸 전해주고 싶었거든.”


시리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들었다.

 

“편지? 우와, 요즘도 편지 쓰는 사람이 있었어?”

 

“그러게...하지만 이게 아니면 안 되거든.”

 

시리가 이리아에게 다가가며 희미하게 웃었다.

 

“음, 있지. 이리아?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흐응, 어떤 사람인데?”

 

“어떤 머저리 같은 여자애 이야기야.”

시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별이 보였다. 희미하게나마, 거기에 분명 별이 있었다.

 

“그 아이는 불행했어. 불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태어났어.

어머니는 병약했고, 아버지는 가정에 관심이 전혀 없었지.

가난하고 불안정한 집안에서, 그 아이는 사랑 받지 못했어.”

 

그녀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어머니가 쓰러졌을 때, 아버지는 거길 버리고 달아났어.

애초에 애정 따윈 없었으니까. 부인에게, 자식에게도...”

 

“...그래서?”

 

“그 아이는 말이야, 그래도 나름 착했다고 생각해. 처음에는

어머니를 도우려고 무던히 애썼어.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어.

하지만 어머니는, 버려졌다는 절망감과, 자식 때문에 이렇게

불행해졌다고 믿은 모양이야. 핫, 히히...좀 웃기지 않아?”

 

마치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아무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았는데.

 

멋대로 낳아놓고서, 멋대로 미워해 버리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냉혹한 인간인가.

 

“그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어. 어머니에게 얻어맞고,

욕을 먹고, 온갖 학대를 당해도...사랑받고 싶었어.”

 

시리가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냐면, 아무 말도 못하는 플라스틱...

아무도 안 가져갈 쓰레기 같은 장난감에 이름을 붙이고 자기

친구로 삼았다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어느새 깨달았어.”

 

친구 따윈 필요 없다고.

 

나는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그 사실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렸다.

 

“그래서 그 아이는 전부 부숴버렸어. 유일한 친구를 부쉈어.

어머니의 산소 호흡기를 고장냈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걸

무시하고,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구경했어.”

 

그것이 나의 첫 살인이었어.

 

어느새 시리가 이리아의 발치에 서 있었다.

 

“...시엔...?”


“내 이름은 시엔이 아니야.”

 

그녀가 배시시, 미소를 흘렸다.

 

“내 이름은 시리 엔. 지금까지 수십 명을 살해한 킬러야.

그리고 이리아, 너는 내 타겟이고.”

 

“...!”


“움직이지 마. 이 거리에서 널 죽이는 건 일도 아냐.”

 

어느새 그녀가 나이프를 꺼내 이리아의 배를 겨누고 있었다.

 

“시, 시엔...이거 장난이지? 지금 몰래카메라-”

 

“그랬으면 좋겠네. 응,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시리가 큭큭 웃다가,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그런 내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어. 삼촌은 있지, 유일하게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이야. 나 같은 쓰레기에게 새로운 이름을,

살아갈 장소를 주고,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었어.”

 

그래서, 정말로 사랑한다.

 

연인들이 헛소리처럼 지저귀는 사랑이 아니다.

 

목숨을 바쳐, 영혼을 바쳐, 사랑하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어, 사람을 죽여도

문제없어.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나를 필요하다고

말해준다면, 아니, 장난감이어도 좋아.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결국 버리게 될 존재라도 좋아.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리아는, 그 순간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느끼는 것은 당혹감과, 동정심.

 

-눈앞에 서 있는 이 작은 소녀가, 너무나도 가여웠다.

 

“나 있잖아, 네가 좋아. 삼촌 이외에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바로 너야, 이리아. 그래서 널 정말정말 죽이고 싶지

않아. 근데, 그러면 안 돼. 그럼 삼촌이 다쳐, 삼촌이 나를...

나를 버리고 말아. 내게서 멀어지고 만다고.”

 

“시리...”


이리아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있지, 이리아. 난 용서받을 수 없겠지?”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을이 일그러져 보였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엄마를 죽이고, 친구를 부수고, 사람을 죽인 나는, 끝끝내

용서받을 수 없겠지? 이런 내가 평범함을, 평범한 행복을

갈구하는 건, 분명 잘못된 일이겠지? 그렇지? 응?”

 

“-그건 아니야.”

 

이리아가 싱긋 미소지었다.

 

“너도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고마워.”

 

그러니까.

 

“날 용서하지 말아줘.”

 

툭-

 

이리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아.”


“너는 정말, 정말 좋은 친구였어.”

 

-콰직.

 

둔탁하고 건조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리는 이리아의 유언장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

 

결국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지금까지 죽인 사람들하고 다르지 않다.

 

“하, 히, 이히, 힛, 아힛, 아하하, 흐히히히, 아하하하하...!”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다.

 

“아하하하하하...!!”

 

하지만 알고 있었다.

 

방금 자신이 유일한 친구를 죽였다는 사실을.

 

어머니를 죽였을 때처럼, 소중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사람처럼 웃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9

 

비가 내렸다.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새어 들어왔다.

 

바우르는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조용히

자신의 방문을 연 것을 눈치챘다.

 

“시리?”

 

“의뢰는 완수했어요, 삼촌.”

 

...설마.

 

비에 젖은 시리가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왔다.

 

“한 거냐?”

 

“했어요. 자살로 위장했으니까 의심받진 않겠죠...아마도.”

사실, 시리의 정보 수집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녀를 친구라고 인정한 시점에서도, 시리는 이리아를 죽일

가장 적당한 방법을 반사적으로 찾아다녔다.

 

경호 인원이 붙지 않는 것은 학교에 있을 때만.

 

거기에 옥상에는 사람이 거의 오질 않고, 필적을 조작해 쓴

유언장까지 남겼다.

 

모두가 그녀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믿을 것이다.

 

“이제 손가락을 자를 필요는 없어요, 삼촌.”

 

“...어째서...”

 

“제가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시리가 배시시 웃으며 바우르에게 다가갔다.

 

“좀 잘해줬다고 바보처럼 오해해선, 친구? 그딴 게 저한테

필요할 리 없잖아요. 저는 킬러잖아요, 그렇죠?”

 

바우르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난 네가...이번 기회에 손을 씻기를 바랐다.”

 

“하! 아하하, 그럼 제가 한 일이 없던 일이 되나요? 네?

제가 죽인 사람들이 되살아나요? 죽은 엄마가 절 용서해요?

아니잖아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이잖아요.”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너무, 너무나도 늦어버렸다.

 

애초에, 그러길 바랐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저에겐 이 길밖에 없어요.”

 

시리가 팔을 활짝 펼치며 웃었다.

 

“저에겐 삼촌밖에 없다고요.”

 

그리고 그녀가 바우르의 위에 올라타며 껴안았다.

 

“삼촌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도, 당신을 원하는 것도, 오직 저뿐.

우리에게 다른 사람 따윈 아무도 필요하지 않았던 거예요.”

 

평범한 행복을 원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행복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저한테서 멀어질 생각 따윈 하지 마세요.”


-키스했다.

 

두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키스를 했다.

 

“사랑해요, 삼촌.”

 

우리들은 플라스틱 칼.

 

우리는 플라스틱 장난감.

 

결국 언젠가 부서져 버려질 테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저만큼은 마지막까지 함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시리 엔은.

 

자신의 비극을 스스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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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생각해보니 최근 비극을 거의 안 썼던 터라, 오랜만에 쓴 비극이라 잘 썼는지는 잘 모르겠음

저번에 대회용으로 낸 소설은 솔직히 내 기준 미달이라...이번에 새로 써서 냈음

이거 하나 쓴다고 거의 5일 넘게 잡아먹힌 거 같은데 그에 반해 퀄리티는...?
아무튼 얀데레 성분이 살짝 약한 거 같기도 한데, 이번 작은 느와르(비극)에 중점을 둬서 그랬을지도 ㅇㅇ

이하 나머진 안 읽어도 상관없는 뒷설정 이야기




1. 바우르 엔


현재 시점 나이는 약 32세, 대략 16살 무렵에 킬러가 됐다.

인간쓰레기 같은 아버지 밑에서 누나와 함께 살았지만, 누나란 인간 역시 얼굴만 예쁜 인간쓰레기나

다름없었기에 가족에 대한 애정은 거의 없었다. 결국 누나는 먼저 시리의 아버지와 눈이 맞아 달아났으나

결국 비참하게 죽었고, 누나의 상태를 슬쩍 확인하러 왔다가 시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 #0의 이야기다.

그리고 본인은 누나를 싫어한다고 믿었지만, 누나의 복수를 한 것을 보면 알겠지만 누나에 대한 감정은 애증에 가까웠다.

금욕적이고 과묵하지만 다정한 성격이라, 본래 성직자가 되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기 위해 시작한

킬러 일이 적성에 맞아 반강제로 킬러 생활을 하게 됐다. 살인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시리를 두고 죽을 순 없었기에 결국 킬러 생활을 이어갔다. (일을 포기하는 순간 살해당하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킬러의 재능이 있었기에, 클라우 밑에서 일하는 킬러 중에서 가장 오래살아남았으며 영화에 나오는

킬러들과 달리 총이나 칼, 폭탄, 독이 아닌 자동차 같은 일상에 흔히 쓰이는 물건을 사용해 암살한다.

그 덕분에 여태껏 경찰의 의심을 받은 적도 없었고, 애초에 그는 살인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철저히 숨기기에

그의 타겟들은 전부 실종 처리되었다. 

참고로 시리가 자기 옆에서 자위하는 걸 알고 있지만, 그냥 못 본 척 넘어가주는 중.



2. 시리 엔


현재 시점 나이는 약 17세, 약 15살 무렵에 킬러가 됐다. 본래 성씨는 엔이 아니었지만, 현재는 삼촌의 성을 쓰는 중.

본래 천성은 귀여운 걸 좋아하는, 조금 소심한 성격일 뿐이었으나 과거에 겪은 사건들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다.

실제로 작중에서 아이들 장난감을 모으거나 하는 이유 또한 정신 연령이 5~7살 시점에서 멈췄기 때문이다.

덩치가 작고 (약 147cm) 소심해보이는 인상 때문에 의심받지 않고, 삼촌을 닮아 인내심과 계획성이 뛰어나

킬러의 재능은 탁월한 편이다. 그래도 나름 평범한 삶을 동경했지만, 이젠 킬러로 살 수밖에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또 겉보기와 달리 신체 능력은 매우 우수하며, 삼촌보다도 살인 기술이 능하다. 

삼촌을 이성으로 자각하게 된 것은 12살 무렵이며, 2차 성징이 왔을 즈음부터 삼촌을 짝사랑했다.

뒷이야기는 나오지 않겠지만, 아마 조만간 삼촌을 덮쳐 기정사실을 만들지 않을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