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하려면 최소 인원만 알고, 최소 인원만 투입한다.‘


회장의 철칙이다. 세 명만 알면 비밀도 아닌 법. 얀붕은 손수 얀순을 휠체어에 앉혀 손발에 벨트를 채웠다.


“얀붕아... 제발, 같이 동남아든 미국이든 도망가자.”


“당신, 내 인생까지 조져놓고 그런 말이 나와? 난 당신을 상사로밖에 본 적없어.“


”흐그윽... 가족처럼 같이 오래있었잖아. 다 당신을 위해서였어. 정말 나한테 이러기야?“


”그만해. 날 그렇게 원하면 날 위해 얌전히 사라져.”


휠체어에 구속당한 얀순은 그렇게 밴을 타고 온 남자들에게 인계되었다.


* * *


“네. 환자는 아주 안정적입니다만. 언제나처럼요.”


간호사 시오리는 쓱 뒤를 돌아보았다. 의문의 한국인 환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검은 긴 생머리를 배배꼬며 놀고있었다. 


“주제넘는 말이지만, 정말 수갑을 계속 채워놔야... 아,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호의적인 환자를 철저히 구속해놓고 수시로 확인까지 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일개 간호사인 그녀는 알 자격이 없었고, 알려해서도 안 되었다. 


시오리는 항상 이 협조적이고 착한 여성의 구속을 확인하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네. 아침약도 먹였습니다. 삼킨 것도... 확인했어요. 네, 네. 저녁에 다시 보고하겠습니다.“


시오리가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 얀순상-하려는 순간, 눈앞에 쇠사슬이 번쩍했다.


시오리는 숨소리도 제대로 못 내본 채 쓰러진 의자를 걷어차고 요양병원 바닥을 발로 긁으며 죽어갔다.


* * *


”여어- 얀순양, 오랜만이군.“


”네... 회장님. 잘 지내셨어요?“


전화를 받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한 회장은 애써 의연하게 말하고 있었다.


”자네 휴양지가 마음에 안들었나보군?“


“아뇨, 서비스 좋던데요. 생각 좀 정리하기도 했고.”


“그려그려. 기분은 좀 풀렸나?”


“그 새끼들이 주는 ‘바보되는 약’이면 기분이 풀리지 않을 수가 없더라구요. 너무 풀려서 내가 누군지도 가끔 잊어요. 그럼 안 되죠? 김얀순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얀순이. 자네 살릴 방법이 그거 밖에 없었어.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게.”


“저야 언제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죠. 다 뺏긴 제 현실은 뭘까요? 그냥 경시청에 가서 다 불어버릴까? 백퍼센트 사형이겠죠.”


”이봐. 그렇다고 한국으로 넘어올 생각은 아니겠지, 절대로 못 올-“


”이 씹쌔들이 기특하게도 내 여권은 병원 구석에 잘 모셔뒀더라고요. 이 새끼들 셋이 죽었는데 경찰에 신고도 못하고 지네 편들 시체 공구리 치느라 바빠. 날 어떤 곳에 맡겨주셨는지 잘 알았어요. 밀항편들 싹다 뒤질 생각은 접어두시라고요. 국민답게 들어올테니까.“


”이봐, 원하는게 뭐지?”


“산재처리비, 위자료, 그리고 내 파트너.”


전화가 뚝 끊어졌다.


* * *


“아, 형! 더 뜯을 수 있는데 이걸로 봐주면 어떡해요?“


”뭐 임마! 이거면 감지덕지지.”


“어우 썅... 아주 사람이 흐물흐물해져가지곤... 믿고 따라온 내가 미친 놈이지.”


“뭐 이새꺄!”


큰 일에 휘말린 후 꼴에 떳떳한 사업을 하겠다고 사설탐정사무소, 그러니까 그냥 흥신소를 굴린지 어느덧 일년째, 얀붕은 한때는 그렇게 깍듯하던 부하에게 바가지나 긁히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 여직원이 살갑게 말을 건냈다.


“사장님. 얀챈캐피탈 회장님 전화가 왔었어요.”


“응? 무슨 일이지?”


얀붕은 은근히 기대하는 부하를 애써 무시하고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전화거셨습니까?”


옛날 생각하며 명랑하게 인사한 얀붕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 * *


”니미... 형님. 말했잖아요. 손씻기 쉽지 않을거라고.“


”잘 알고 있었지...“


얀붕은 일본 지부에 있던 시절, 지부장 얀순이의 부하였다. 위험한 약거래를 척척 해내는 얀순은 유독 그를 아꼈고, 덕분에 얀붕은 3년 내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나마 남들 다 가는 소프랜드 같은 곳도 서슬퍼런 얀순의 눈길에 한번도 가서 놀아보지 못했고, 얀순의 구애는 점점 노골적으로 변했다. 몇 번 몸을 섞기도 했지만, 얀붕은 가능한 피했다.


그러다 한번은 유력 거래처인 야쿠자의 살롱에 들렀다. 야쿠자 는 얀붕에게 여자를 붙여주었고, 얀붕은 그저 맞춰주려했을 뿐이다. 그런데 별안간 얀순이 튀어들어오더니, 야쿠자들의 머리를 술병으로 여럿 후려까버리고는 얀붕에게 붙은 호스티스의 얼굴을 깨진 유리병으로 그어버렸다. 


그날 이후 얀붕은 잭다니엘 블루를 마실 수 없었다.


거액의 위로금을 바치고 바짝 엎드려야만 했던 회장은, 얀순을 다른 야쿠자 조직에게 사주하여 정신병자로 위장해 요양원에 가둬버렸다.


한때의 정으로 그렇게 목숨만은 살려준 것인지, 아니면 숨을 붙여 본보기를 보인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 * *


얀붕은 돈가방을 들고 바닷가 창고로 왔다. 3년간 일한 지부장으로써의 얀순의 몫. 그리고 자기 자신. 검은 세단 한대가 창고로 들어왔다.


긴 검은 생머리. 퇴폐미적인 화장. 그때와 거의 똑같이 갖춰 입은 검은 수트와 하얀 와이셔츠. 향기가 닿을 같지 않은 거리임에도 그 특유의 향수냄새가 코를 자극하는 것같았다. 유폐당한 일년이 그녀의 원본에 아무런 손도 못댄 듯 했다.


”아하, 얀붕이. 우리 자기. 잘 지냈어?“


”덕분에 참 잘 지냈지... 다신 보기 싫었을 정도로.“


“정말, 너무 나쁜 남자야...”


얀붕은 돈이 가득 든 가방을 최대한 얀순에게 가까이 던졌다.


“20억. 회장님이 호의로 넣은거다. 계산이 맞을거야.”


“흐음? 이 돈을 누구랑 쓰고 살지?”


“제발 가줘... 진심이야.“


”하? 내 조건이 뭐였는지 전달 못 받은건가?“


그때 부하가 식칼을 꺼내들었다.


”어이, 김얀순. 형님이 이렇게 너 살려주려고 부탁하시잖아. 눈치도 없냐? 들고 튀라고.“


”뭐야 이 눈도 못 마주치던 양아치 새끼는? 빠져.“


”이 미친년이? 오냐, 형님이 아주 미쳐서 니 새끼 살리자고 생돈 넘겨주려 하시는데, 나는 못봐주겠다, 씨발 그냥-“


탕!


얀붕이 달려드는 부하를 채 말리기도 전에 시야가 붉은 빛으로 가득차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이... 주혁아...”


얀붕은 절로 무릎을 꿇었다.


얀순은 피식 웃으며 바닥으로 흘러오는 피에서 살짝 발을 치웠다.


”얀붕아, 회장이 왜 날 살려뒀을까? 불쌍해서? 아니야, 내가 타고 온 차랑 이 ‘도구’같이 한국에 이것저것 숨겨둔게 많아서였지. 그걸 먼저 다 뜯어내려했어. 회장이 왜 선뜻 이 돈을, 가짜로 장난도 안치고 줬을까? 원래 내 돈이거든. 내 돈 갖고 날 낚으려 하다니 어이없지?“


“제발 그만해...”


"쫄지마. 다 잘될거야. 다음 계획, 니가 날 족쳐서 잡아놓고, 회장을 부르는거지. 회장은 날 직접 심문하러 올거야. 운전사랑 추가로 한 명이나 더 올까? 날 바다에 던지려면 니 부하랑 너까지 해서 네 명이면 충분하고도 남지. 그게 노인네 방식이니까.“


"너 혼자 해... 니 미친 계획대로 하다가 피걸레 되느니 총 맞고 뒈지는게 나아...”


”내가 어떻게 널 해치겠니. 너 아니었으면 그냥 그 병원에 살았을거야.“


얀순은 무릎을 꿇은 얀붕 앞으로 걸어와, 그의 머리를 붙잡고 격하게 입을 맞췄다. 얀붕은 얀순을 붙잡을까 생각했지만 갑자기 느껴진 이상한 쓴맛에 멈칫했다. 그녀의 혀를 타고 약 한 알이 들어와, 얀붕은 속수무책으로 삼켰다.


“하아... 정말 그리웠어...... 헤헤. 내가 먹던건데 꽤나 차분해지거든. 몇 번 순순히 먹어주고 혀 밑에 숨겨서 모아왔지.“


* * * 


회장이 말했다. 자기가 얀순을 보러온건 자기와 함께 왔던 시체들밖에 모른다고. 보내주면 그냥 넘어가겠다고. 


얀붕은 가라앉은 마음으로 그 말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했다. 내가 회장과 함께 사라지면 안돼. 빠져나가야해. 평생 쫓길거야. 


하지만 그는 그녀가 가볍게 끼어온 팔짱조차 벗어날 상태가 못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얀붕을 꼭 껴안고 쓰다듬어주었다. 


고생했어. 이제 쭉 같이 있자. 


그녀가 가슴팍에서 얀붕의 얼굴을 떼고 입을 맞추자, 다시 약 한 알이 들어갔다.


회장의 차는 피냄새가 가득했다. 뒷자리에 얀붕의 부하와 회장의 운전사가 겹쳐져있고, 트렁크에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회장이 뚱뚱한 똘마니의 시체 밑에 깔려서, 살아도 산게 아닌 기분일 터였다. 그건 조수석에 탄 얀붕도 마찬가지였다.


밤의 고속도로를 달리며, 얀붕은 가로등을 보고 헤실거렸다. 


차가 타오를 때도, 잔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폐차장에서 조각조각 부서질 때도, 얀붕은 그저 얀순의 손을 꼭 잡고 실실 웃으며 지켜봤다.


그녀는 계속 약을 입에 넣어주었다. 자기가 갇혀있던 시간을 그에게 갚아주듯이. 그녀는 물론 그걸로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 고분고분해진 그를 보면 일말의 원망도 사라질만큼 사랑스러웠다. 약 때문에 발기할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모든게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자취를 감추도록, 그가 갈 곳이 없어지도록 일이 착착 진행되는 동안 그는 약의 환영 속에서 모든걸 꿈으로 치부할 수 있어 행복했다. 꿈이고 말고.


몽환 속에서, 그가 유일하게 또렷이 하는 생각이라곤 그녀의 약이 떨어지지 않길 바라는 것이었다. 약이 깼을 땐 평생 모든게 준비된 고급주택에 숨어 그녀에게 매달려야 살아갈 수 있을거란걸 알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