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그래서, 넌 어떻게 해서 날 찾게 되었고, 그리고 무슨 이유로 이렇게 달려들었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분위기가 되었다. 2층에 있는 방으로 여자애를 데려간 나는 그녀와 마주 앉고서 물어봤다.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독기 가득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얌전해진, 정확히 말하면 주눅이 든 여자애는 고개를 숙인 채로 가끔씩 힐끔힐끔 날 올려다보면서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게 어렵게 대답해줬다.


"지, 집...."


"집?"


"집에 가야 해."


"도련님께서는 너한테 이유를 물으셨지, 네 사정 같은 건 안 물어보셨어."


옆에 서있던 파르샤가 엉뚱한 대답을 한 여자애를 나무란다. 나는 눈짓으로 파르샤를 말리고는 다시금 여자애한테 집중했다.


"집이 어딘데?"


"모, 몰라. 동생이, 아파. 그래서 나온 건데, 그런데...."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점들이 떠오른다. 동생이 아프다, 그래서 나왔다, 닳아빠진 식칼, 부모의 원수, 어린애, 이것들을 조합하니 나오는 추리는 꽤나 흔한 결론이었다.


"돈이 필요해?"


여자애가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눈동자에 탐욕과 비슷한 의지가 비친다. 동생이 아프다고 하니 이야기를 굳이 길게 늘어뜨릴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동생이 아파서 돈이 필요했고, 그래서 위협을 해서 돈을 뜯어낼 생각으로 식칼을 들고 나왔고, 마침 부모의 원수인 우리 조직을 노려 이런 일을 벌인 게...맞아?"


여자애는 내 말을 듣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두 눈을 날 향해 단단히 못 박은 것이 정답을 맞추긴 했나 보다. 다만 원하는 게 있어서 그걸 받아내기 전까지는 자신 또한 이쪽이 요구하는 걸 주지 않을 기색이다.


"대답."


이번에도 파르샤가 개입했다. 이번에는 말리지 못 했다. 돌이켜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내 행동이 이상하고, 파르샤가 취하는 태도가 바른 것이다. 아무리 날이 빠지고 끝이 갈렸다고 해도 식칼은 식칼, 흉기는 결국 흉기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과중도 결과 못지 않게 중요한 게 바로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여자애한테는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이라는 것이 내게 있어서 너무 치명적인 약점일 뿐.


"돈이 필요하지?"


"그래."


점점 기가 살아나던 여자애가 이번에 대답하는 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살아났다. 의자를 벌떡 밀치고 일어나며 소란까지 벌인 여자애는 내게 상체를 확 들이밀면서 협박하듯이 말했다. 


동시에 파르샤가 뛰쳐나와 내게 금방이라도 돌진하려 하던 여자애를 막는다. 그렇게 파르샤에 의해 막힌 여자애는 화난 맹수처럼 몸부림을 쳐가며 내게 소리쳤다.


"돈 많잖아, 썩어 넘쳐서 그렇게 비싼 옷도 입고 다닐 정도잖아, 안 그래?! 


이쪽은 굶는 게 정상이고, 아프지나 않으면 행운인데 말이야, 응?!


그런데 동생은 아파, 도와주는 사람은 없어, 엄마랑 아빠도 없어,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로운데, 그런데.....!


엄마랑 아빠를 뺏아간 너희는 왜 그렇게 행복한 거야? 엄마랑 아빠를 뺏아가서, 그렇게 행복해졌어....?!"


과연 내가 행복하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여자애의 사정에 비하면 행복한 건 맞을 테다. 배가 고픈 적도 없고, 추위에 떤 적도 없고, 똑같이 부모는 없지만 날 도와줄 사람은 있고, 그러니 적어도 살아있는 게 너무 힘들고 괴롭지는 않다.


하지만 파르샤는 나처럼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게 뚫린 입이라고...!"


정말로 분노한 파르샤의 손이 번쩍 올라가자 여자애는 팔을 모으며 웅크리면서도 그 눈빛 만큼은 죽지 않았다. 나는 그런 파르샤를 붙잡아 말리고는 여자애한테 말했다.


"돈을 주면 돼?"


막는 자세를 취한 양팔 사이의 틈새로 날 바라본 여자애는 조금 기다리다가 답했다.


"내놔."


"얼마나?"


"다...!"


나는 백지 수표를 꺼냈다. 내가 백지 수표를 꺼내는 걸 본 파르샤가 놀라서 날 말린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너, 이름이 뭐야?"


"카실로, 베이냐."


"카실로 부부의 딸이구나."


여자애, 그러니까 베이냐가 언급한 카실로라는 성을 듣자마자 바로 연관점이 떠올랐다. 이름도 미처 안 물어봤건만, 이 여자애는 내가 직감했던 대로 내 아버지일 뿐인 그 괴물이 죽인 채무자들 중 한 부부의 혈육이 맞았다.


이 놈의 직감은 이럴 때만 말도 안될 정도로 정확했다.


"나, 블라크 세지예프는 본인의 계좌에서 다음과 같은 액수에 대한 권리를 본 수표를 통해 양도할 것을 약속한다. 


받아, 내가 빚진 너희 부모님의 목숨 값이다."


내 계좌에 있는 모든 액수를 다 적어낸 백지 수표를 베이냐에게 내민다. 깨끗하고 빳빳한 백지 수표의 공란에는 내 전재산의 액수와 같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아깝지는 않다. 그간 이자가 쌓였다고 생각하면, 실로 암흑가의 거래답게 그 액수가 불어난 셈이니까.


내가 강제로 지게 된 빚, 베이냐네 부모님의 목숨 값이라는 부채는 이토록 엄청난 액수로 자라났다. 하지만 결코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베이냐는 가져가기만 하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줄 말도 안 되는 돈을,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사악한 마법을 가져가지 못 했다. 아니, 가져갈 수 없었다.


대가를 받아간다는 건 그 값어치를 치르는 것이다. 백지 수표를 가져가면 베이냐는 그녀가 빼앗긴 부모님의 목숨 값을 치르게 된다. 값을 치르고 나면 그걸로 끝이다. 끝난 거래에 미련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지는 못 한다. 이 돈으로도 그녀의 부모님은 되살아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원한을 더 이상 내게 쏟을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끝난 거래에 미련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결국, 베이냐가 이렇게 말했다.


"필요 없어."


잠자코 있는다.


"엄마, 아빠, 돌려....줘."


미안하지만 못 돌려준다.


"안 됐지만 그건 못해, 알잖아."


"몰라, 알 게 뭐야, 내 잘못이 아닌데. 다 네 놈들이 저지른 건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또 생각하고, 반성하고, 되돌아보고, 또 생각해봤지만,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저러한 말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 한다. 그래서 입을 다물게 된다. 도망치듯이.


그 비겁한 행동에 베이냐가 분노를 터뜨린다. 내가 내민 수표가 마치 나인 것 마냥 마구 찢어가며 원망을 토해냈다. 


"이딴 거 필요 없으니까 엄마랑 아빠나 돌려내라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뒈져버려, 당장!"


"못 돌려줘!"


악에 받쳐 소리쳤다. 내 고함을 터져 나온 뒤로 소름 끼치게 조용해졌다. 그 고요함이 너무 괴로워서 억지로 말을 짜냈다.


"못 돌려준다고....그렇다고 뒤질 수도 없다고...."


그 괴물을 죽여서 겨우 살았단 말이야, 겨우 살았는데....죽을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제발 좀 돌려줄 수 있게 해줘, 부탁이니까."


떼를 썼다. 나보다 한참 어린 애한테 빌기라도 하는 것처럼, 추하게 울먹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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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


집사장이 저택으로 돌아온 나를 맞아준다. 파르샤에게는 말 대신 가볍게 목례를 건네는 것으로 예의를 차렸다. 시계를 보니 이제 오후 5시였다. 베이냐의 집 앞까지 갔다가, 병원에 들르고, 자매에게 필요한 새 옷을 사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예정 같은 건 이미 한참 전에 다 틀어지고도 남았다.


일정이 꼬인 탓에 느껴지는 불편함을 삼킨 나는 집사장에게 말했다.


"곧 다시 나갈 겁니다. 그 전에 조금 볼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볼일이 있다고 말하며 시선을 조심스럽게 옮기니, 집사장이 내 눈길을 쫓아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집사장의 눈에 내가 저택으로 데려온 카실로 자매의 모습이 들어간다.


"함께 오신 일행 분들은 누구십니까?"


집사장이 곁눈질로 카실로 자매를 살핀다. 꾀죄죄한 옷, 영 좋지 않아 보이는 상태, 무엇보다도 일면식조차 없는 낯선 얼굴, 지금까지 저택에 데려온 적이 없는 새로운 유형의 손님들이었다. 그러니 노련한 집사장조차도 그 눈에 감조차 안 잡힌다는 의문스러운 빛을 숨기지 못 했다.


나는 그런 집사장에게 저택으로 올 동안에 적당히 생각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새....식구입니다. 내....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나는 카실로 자매의 등을 아주 조심스럽게 밀어 집사장에게 보냈다. 카실로 자매는 영 불안해 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 했지만, 노련한 집사장은 그런 기색을 보고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능숙하게 대처했다.


"...그렇군요,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두겠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나가는 집사장의 일 처리에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서 감사를 표하고는 말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잘 좀 부탁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새 식구들한테 필요한 일도 전부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늘 그랬듯이 알아서 잘 해두겠습니다."


집사장의 다짐을 받고 나서 카실로 자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 아침 만에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큰 변화를 겪게 된 그녀들은 무척이나 불안해 하다 못해, 바들바들 떨기까지 했다.


특히 언니인 베이냐보다 그녀의 동생인....이름을 안 물어봤네. 아무튼 동생 쪽이 그 정도가 더 심했다. 


하지만 뭐,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가진 것도 없이 부모를 여의고도 지금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은 그 생존력을 생각하면 적응하는 건 시간 문제조차 아닐 거다.


다른 건 몰라도 언니인 베이냐 쪽이 워낙에 믿음직하니, 아마 동생을 잘 지켜주겠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 나중에 봐."


카실로 자매를 안심시키고자 한 마디 남기고는 저택을 나선다. 파르샤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렇게 입구의 커다란 철문을 지나칠 때 쯤에 뒤를 돌아 카실로 자매를 잘 데려가는지 확인한 나는 파르샤에게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했다.


"미안."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말씀이십니까, 도련님?"


어색할 정도로 흔쾌한 말투에 나는 반사적으로 파르샤를 훔쳐봤다. 파르샤는 평소의 그 무뚝뚝한 표정이 아니라 무척 흡족한 느낌인 얕은 미소를 지은 채로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것이 보이는 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을 알아본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 내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오늘...일정이....너무 많이 틀어졌잖아, 그치?"


"아뇨, 괜찮습니다. 알고 보니 무척 호색한이셨던 도련님께서 훗날에 골라 먹으실 신붓감을 미리미리 모아두시고자 이렇게 발품을 파시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훼방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


할 말이 없었다. 비참할 정도로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아무 말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로 그저 묵묵히 걷고 있으니 한참이 지나서야 파르샤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농담입니다."


"농담도 정도라는 게...."


"진심이 담긴 농담입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하게 이런 소리를 내뱉는 파르샤에게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도련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다는 건 잘 아니까요."


어안이 벙벙해져서 표정이 굳은 내게 파르샤는 특유의 그 옅고 섬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다 보니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묘지,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지어줄 수 있는 집에 도착했다. 해가 저물어 지평선 위에 걸쳐져 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