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2편


3편


4편


묘지, 내 아버지였을 뿐인 그 괴물이 그저 빚을 못 갚았다는 이유 만으로 죽을 때까지 팼던 사람들을 내가 가진 땅에 다시 묻어준 사유 묘지다. 그런 곳에 그 괴물의 자식인 내가 진심으로 조의를 표하러 왔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는 일이다. 분명 그 폭한의 자식인 내가 밉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니다. 단지 그 자식이었을 뿐이다.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따로 있건만, 그 자식인 내가 이렇게 찾아와서는 뒷바라지라도 하듯이 용서를 구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희생하겠다는 고결한 성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제에도 없을 잘못을 짊어지길 자처한다. 그 위선이 혐오스럽다고 해도 이상할 것도 없다.


사실, 툭 까놓고 말해서, 이건 남을 위한 일이 아닐 거다. 날 위한 일일 거다. 내가 그 괴물 같던 인간이랑 조금이라도 더 안 닮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니까 하고 있을 뿐인...구걸이다.


나는 그 사람하고 달라요. 나는 그 남자가 아니에요. 나는 그 괴물의 자식이 아니에요. 제발 그럴 수 있게 해주세요. 


이렇게 빌고 있을 뿐이겠지.


좀 더 잘 빌려고 묘지에 꽃을 바친다. 가방에서 꺼낸 꽃은 자주색 히아신스다. 한 송이, 한 송이, 묘단 위에 조심스럽게 놓는다.


그렇게 꽃을 바치고 있으니 등 뒤로 누군가 빠르게 지나간다. 내 뒤에 얌전히 선 채로 기다리던 파르샤가 혹여나 방해가 될까 봐 잽싸게 길을 터준다. 그 배려에 지나가려 하던 사람은 고개를 짧게 숙여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는 후다닥 제 갈 길을 갔다.


분명 고인을 찾아온 유족이겠지. 이 묘지가 내 사유 묘지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공동 묘지처럼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다. 단지 내가 면목이 없을 뿐이다.


"완전히 갔습니다. 자세를 도로 펴도 됩니다."


그래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잔뜩 움츠리고 있으니, 조금 있다가 파르샤가 그렇게 말했다. 그제서야 자세를 조금 펼 수 있었던 나는 막혔던 숨을 몰아 쉬었다.


"미안."


무심결에 이런 말이 나왔다. 파르샤가 곧장 묻는다.


"뭐가 미안하십니까?"


"....그냥, 다."


스스로도 뭐가 정확히 미안한지 몰라서 이렇게 얼버무린다. 빈말은 아닐 것이다. 이토록 가슴이 쿡쿡 찔리는 걸 보면 그냥 모든 것이 다 미안한 건 틀림없었다.


"미안해 하실 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도련님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그래."


묘지에 들르면 항상 파르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때마다 파르샤는 내가 그녀를 질질 끌고 집으로 갔던 일을 언급하며 날 다독여줬다. 그리고 그렇게 다독여질 때마다 나는 "하지만..." 이라는 말머리를 시작으로 그 말을 거절했다.


구해줬다고 해봤자 뭐하나, 어차피 파르샤의 부모님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꽃을 놓는다.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성스럽게, 조심해서 꽃을 놓는다. 그러는 걸 반복하다 보니 너무 기계처럼 꽃을 바치고 있는 건 아닌지 덜컥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불현듯 멈춰버리니, 뒤에 있던 파르샤가 차분한 목소리로 날 격려해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도련님께서는 진심으로 이 분들께 조의를 표하고 계시니까요."


그렇게 말해준 파르샤가 조심스레 다가와서는 내 어깨에 손을 지그시 얹고는 살짝 눌러준다. 마치 그러면 힘을 전해줄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정말로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이 놓이고 기운이 솟았다.


다시 꽃을 바치며 기도를 올렸다. 이름을 부르고, 죄송하다고 빌고, 부디 안식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어떻게 하지 못 했던 그 끔찍한 일에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무덤마다 기려간 끝에 가장 중요한 묘소를 앞두게 되었다. 파르샤의 부모님의 묘다. 이 묘지에 묻힌 사람들 중 내가 그나마 제일 잘 아는 사람들, 그나마 제일 연결 고리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러 찾은 사람들.


"파르샤."


"네, 블라크."


뒤에서 기다리던 파르샤를 부르니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옆으로 다가왔다. 무척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파르샤네 부모님의 무덤 앞에서 만큼은 나는 그녀의 도련님이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 추모를 하러 온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나와 파르샤는 그녀의 부모님의 묘 앞에 나란히 섰다. 내가 가방에서 꽃을 꺼내 그녀에게 전해주고, 그녀는 꽃을 받아 묘단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따로 챙겨온 꽃을 꺼내 묘단 위에 바쳤다.


정말 예쁘게 피어난 흰색 카네이션이다.


그렇게 꽃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고, 진심으로 빌었다. 다른 무덤보다 좀 더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나서 나는 파르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기, 파르샤?"


"네?"


파르샤가 묘하게 평소보다 빠르게 대답했다. 원래도 빠르지만, 이번에는 더 그랬다. 착각인가 싶어서 이내 신경을 끄고 하려던 말에 집중했다.


"너희 부모님한테...드려야 할 말이 있거든."


내 주제에 대체 무슨 드릴 말이 있을까, 나 따위가 감히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온갖 부정적인 거부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차라리 말하지 말까? 이제 와서 없던 이야기로 할까? 


오늘, 그러니까 '그 날' 은 1년에 단 한 번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일정을 비울 정도로 신경을 쓰는 주제에 1년에 고작 한 번만 챙긴다는 것도 웃기지만, 아무튼 그 하루를 넘기면 또 다시 1년 동안 유예가 생긴다.


오늘 입을 다물면 1년 더 버틸 수 있다. 1년 더 미룰 수 있다.


단지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이런 욕심이 생기는 건 아니다. 미련, 내게 주어졌던 것을 놓아주기 싫어서 욕심이 생긴 것이다. 정말이지, 추하다.


그 욕심이 내 고개를 돌린다. 두 눈이 파르샤의 얼굴에 못 박힌다. 예쁘다. 내겐 너무 과분하다 못해, 차라리 처음부터 곁에 둬서도 안 됐을 정도로, 절대로 더럽혀서도 안 됐을 정도로, 파르샤는 아름답다.


"그으, 얼마든지 하셔도 좋지만, 그으, 왜 이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시는 겁니까?"


나도 모르게 너무 오랫동안 바라봤다. 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개를 돌린 파르샤가 말했다. 너무 부담스러웠나 보다. 미안하다. 안 그래도 미안한데.


"미안."


"아닙니다. 그, 제 부모님을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아, 아아, 그렇지, 참."


아무리 죽은 자는 말을 못 한다고 하지만, 애초에 난 지금 무덤에 대고 말하려 하는 중이지만,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 한다. 아니, 무덤에 대고 말하니까 더더욱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지.


"음, 흐음."


목을 가다듬고 마음을 다 잡는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마지막으로 망설인다.


"안녕하세요."


그렇게 각오를 하고 말하건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이래도 되는지, 뭘 그리 잘 안다고, 뭐가 그리 인연이 있다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이렇게 아는 척을 하는 건지,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같잖아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엄마랑 아빠를 뺏아가서, 그렇게 행복해졌어....?!]


문득 베이냐가 내게 토해냈던 울분 어린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 말을 듣고 오늘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버리자고 마음 먹었다. 무르고, 망설이고, 뒤로 미룬다는 고민조차 해서도 안 됐다. 


더욱이, 그렇게 각오를 다져놓고 흔들려서도 안 됐다.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주저하지 말고 해야 한다.


"잘 지내셨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지만, 대답을 들은 것 같아서 그 다음 말을 한다.


"전...관심 없으시겠지만,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따님인 파르샤 양도 정말....잘 지내줬죠."


파르샤한테 시켰던 일들이 떠오른다. 잘 지내긴 했다. 그녀는 내 부탁을 무척 잘 들어줬다. 완벽했다. 살인만 안 했을 뿐, 폭력은, 그것도 평범하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들을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성공시켰다.


지금 파르샤네 부모님들께서 되살아 나셔서 날 당장 찢어 죽이려고 하신다면 달게 받아들이겠다.


안타깝게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쯥.


"뭐, 제가 해도 될 말은 아니지만, 어때요? 파르샤 양, 진짜 예쁘게 잘 자랐죠, 게다가 능력도 좋고?


이렇게 예쁘고 대단한 따님을 두셔서 정말 자랑스러우시겠어요, 그쵸?"


술 마셨던가? 왜 취한 것처럼 말을 못 가리고 나불대는 건지 모르겠다.


"덕분에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예쁜 여자애가 옆에서 절 도련님이라고 모셔주고, 도와주고, 부탁만 하면 어려운 일도 척척 해주고, 아무튼 참....많이 도와줬어요.


절 구해줬네요."


말 그대로다. 만약 파르샤가 곁에 없었더라면, 그 누구도 모르고 있던 대단하기 그지없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하여 날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제 손으로 아버지를 찔러 죽이고 홀로 남게 된 나약한 아이가 살아남을 길 같은 건 없었다.


나약했던 어릴 적의 나를 지켜줬던 이는 결코 나약하다고 할 수 없지만, 나약해도 됐었을 같은 나이의 여자애였다.


그 뒤로도 쭉, 계속해서 날 지켜줬다. 날 지켜주려고 살인마저도 불사할 수 있었다. 오늘도 파르샤는 날 지켜주고, 그러다가 누군가를 죽일 뻔도 했다. 내가 그걸 말린 건 단지 책임을 졌을 뿐이다.


그녀가 절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지 않게 한다는 당연한 책임, 설령 내가 살인을 저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파르샤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 만큼은 막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래 전에, 아니, 처음부터 해야 했던 일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래서 말이죠, 흐흣, 제가아....파르샤를 지키는 건 모르겠고, 그래도 파르샤한테 너무 많은 은혜를 입었으니까요, 그러니까요, 그 보답을 해야겠네요.


파르샤."


나는 파르샤를 부르며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파르샤는 무슨 일인지 두 손으로 얼굴을 꼭 가린 채로 있었다. 너무 당황스러운 일인 지라 하려던 말도 잊고 묻는다.


"왜,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아닙니다. 하시려고 했던 일을 계속 해주십시오. 그냥, 그, 조금 부끄러울 뿐입니다."


부끄럽다고? 뭐가 부끄러울까? 원래 보상을 받을 때는 당당하다 못해 뻔뻔할 정도로 대담하던 파르샤가 부끄러워 한다고 하니 꽤나 놀라웠다. 아무튼 괜찮은 모양이니 하려던 말을 계속 한다.


"파르샤."


"응, 블라크."


내 의도를 어떻게 안 걸까, 파르샤는 내게 더는 말도 높이지 않고, 내 이름을 그대로 불렀다. 나는 또 다시 내 속내를 너무나도 잘 꿰뚫어 본 그녀에게 감탄해서 웃으며 말했다.


"넌 자유야."


"그 말을 정말 오랫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