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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밝다. 정말 밝다. 그리고 좋다. 너무 좋아서 이래도 될까 의심마저 갈 정도다. 꼭 하늘도 이 결혼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다. 암흑가의 사람이 받기에는 너무나도 과분하기 짝이 없는 그런 축하다.


나는 내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파르샤와 팔을 낀 채로 서있는 중이다. 씩씩하게 울려 퍼지는 결혼식 음악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려 하는지 한 번 더 일깨워준다.


결혼식, 서로 타인으로서 태어난 두 사람이 앞으로 자신의 혈연만큼, 아니, 어쩌면 혈연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될 것을 맹세하고, 또 당당히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


한때, 그저 다른 사람의 자식, 아니, 내 경우에는 그저 가족으로서 존재하던 '나' 라는 개인은 이제 그 울타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가족이 되기를, '나' 라는 개인이 아닌 '부부' 라는 공동체로 거듭난다.


그 사실을 눈에 보이고자, 드러내고자, 그리하여 물릴 수 없는 확실한 사실로써 단단히 새기고자, 나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신랑' 으로서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당당히 선다.


"신랑, 앞으로."


주례자가 날 부른다. 그러자 음악이 점점 더 성대해지고, 나는 때가 왔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가족에게서 벗어나 신랑으로서, 신부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벗어나게 될 가족인 파르샤를 돌아봤다.


파르샤는 얼굴을 면사포로 가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화려했다. 화사하다고 할까, 빛이 나는 듯 했다. 그래도 본인이 장담한 대로 너무 눈에 띄지는 않았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날 성심성의껏 도와주는 파르샤에게서 벗어나기 전에,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 했다. 생각해둔 말이 있다. 다만 막상 하려고 하니 조금 망설여질 뿐이다.


생각해보니, 그 고마운 마음을 전하려 하는 말의 내용이 신랑이 신부를 두고 다른 여자에게 하는 말로는 다소 부적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막상 곱씹어보니 무슨 연애 소설에서나 할 법한 끈적한 말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또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게 만약 멀쩡한 가족이 있었더라면 지금 하려고 했던 말을 주저하지 않고 전했다.


부모에게 말했더라면 지금까지 길러줘서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을 테고, 형제나 자매에게 했다면 좀 더 털털하게 말했을 거다. 형제, 자매는 원래 티격태격하는 법이니까.


아무튼 지금 내 곁에 있는 파르샤는, 내 혈육이 아닌 고마운 은인은, 혈연으로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새빨간 남이지만 그럼에도 이 말을 전해야만 하고, 또 듣기에도 모자라지 않은 내 아주 소중한 가족이다.


내 곁에 있어주고, 날 지켜주고, 내 부탁을 들어주고, 내 슬픔은 반보다 더 작게 나눠주고, 기쁨을 배보다 더 크게 불려줬다. 


그러니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 제대로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파르샤는 나와 핏줄로 이어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내게 원한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데도 그녀는 내 가족이 되어줬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게 해줬다. 


그리하여 내가 내 아버지일 뿐인 그 괴물처럼 되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지켜줬다.


그러니까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감사를, 고마운 마음을 담아, 내 인생에서 가장 진지하고 솔직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말을 전한다.


"그동안 곁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웠어,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살아갈게. 네가 곁에 있어줘서 좋았던 만큼, 아니, 좋았던 만큼보다 훨씬 더,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러니까 갈게."


얼른 앞으로 나아가라고 허락하듯, 어쩌면 등을 떠밀어 추진력을 더해주듯, 파르샤는 단단히 끼고 있던 내 팔을 앞으로 살짝 밀듯이 놓아주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축복 속에서, 웅장한 축가와 찬란한 햇살 속에서,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신부, 입장."


엄숙하게, 하지만 다정하게, 주례자가 이번에는 신부를 부른다. 그러자 뒤쪽의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팔짱을 꽉 낀 채로 서있던 케이트의 모습이 보인다.


케이트는 얼마나 날 보고 싶었는지 문이 열려 내 모습을 보자마자 팔을 번쩍 들어보이며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런 돌발 행동을 다행히 옆에 있던 파이크 씨가 제지하셨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그녀다워서 나는 은근히 흐뭇해지기까지 했다.


잠깐 삐걱거린 뒤에 케이트는 이 결혼식의 주인공답게 잔뜩 분위기를 취한 채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파이크 씨도 마찬가지로 흠 잡을 곳 없이 완벽한 걸음걸이로 케이트에게 맞춰 이쪽으로 다가오신다.


이번이 케이트가 정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팔짱을 껴보는 건 결코 아니겠지만, 아버지의 품에서 자라난 사랑하는 딸로서는 마지막으로 팔짱을 껴보는 것일 테다. 


그러니 벌써부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케이트도 그렇지만, 그녀와 팔을 꼭 끼고 걸어오시는 파이크 씨 또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으실 것처럼 울컥하셨다.


제일 앞줄 객석에 앉아계신 케이트의 어머니, 켈러 여사는 그런 파이크 씨를 보며 무슨 주책이냐고 마땅치 않아 하는 기색이긴 하셨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눈물이 맺히는 건 어쩔 수 없던 모양인지 눈가가 촉촉했다.


그런 광경을 보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비록 암흑가에서 잘 나갔을 뿐인 놈팽이이지만, 잘 나가봤자 결국 뒷골목의 악당들 중 한 놈일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런 나는 절대로 케이트를 불행에 빠뜨리지 않겠다고, 행복한 생을 보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진심이다. 케이트의 부모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 또한 케이트를 사랑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니까.


문득 신랑쪽 객석을 봤다. 내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는 사람, 내 행복을 축하하러 온 고마운 사람까지 없는 건 아니다. 신뢰하는 부하들이 객석을 쓸쓸하지 않게 채우고 있었다. 몇몇은 또 바깥에서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하여 경비를 서고 있었다.


고맙지만, 정말 고맙지만, 그래도 조금 쓸쓸하긴 했다. 파르샤는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단지 그녀가 없어서 아쉬운 건 아닐 거다.


"신부의 아버님께서는 이제 신랑에게 신부의 손을 맡겨주시길 바랍니다."


쓸데없는 감상을 접고서 주례자의 말대로 내게 팔을 내민 케이트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아버지인 파이크 씨가 건네다시피 받쳐서 내게 향하게 한 그 손길에서 힘이 느껴졌다. 


딸의 손을 받치는 파이크 씨의 손아귀 힘, 딸이 행복하길 바라기에 신랑에게 자신의 마음을 확실하게 전하려는 그 사랑의 크기가 절절히 느껴진다.


팔에 힘을 단단히 불어놓고 그 손길을 받는다. 파이크 씨가 그런 것처럼, 나도 케이트의 손을 단단히 잡는다. 하지만 그녀가 아프지 않게, 하지만 거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게, 그저 단단히 지탱해줄 수 있도록, 그래서 그녀를 지켜줄 수 있도록, 손을 잡았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주례자의 앞으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주례자가 다시 말한다. 그 말대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와서 또 뒷걸음질 치고 싶다는, 찾아올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나는 걸까,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케이트 또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어서, 은근히 그녀가 뒷걸음질 치려는 걸 느낀다.


그때마다 기다렸다. 그녀도 기다리곤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금이라도 뒤로 가도 된다고 허락해주고, 허락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허락을 받았기에 오히려 뒤로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앞으로 전진했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으면 못하는 청개구리 짓이다. 그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온다.


"신랑과 신부는 서로를 마주보고 서주십시오."


그 말대로 나는 신부를 본다. 두 눈에 오직 케이트만을 담는다. 내 키가 작은 건 절대 아니다. 평균보다 조금 크다. 케이트의 머리 꼭대기는 그런 내 턱 위 쯤에 겨우 걸쳐진다.


나보다 작은 사람, 나보다 연약한 사람, 내가 지켜줘야 할 그런 사람이 날 올려다 본다. 내 눈을 들여다 본다. 그 눈동자 안에서 비치는 감정은 오직 사랑 뿐이다.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만나면 으레 느끼는 두려움과 낯설음 따위는 전혀 없다. 그저 날 좋아해줄 뿐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눈빛 밖에 안 보인다.


"신랑, 블라크 세지예프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선 신부를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지켜주고, 지켜주기에 사랑받으며, 그리하여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신부, 맥슬런 케이트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선 신랑을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지켜주고, 지켜주기에 사랑받으며, 그리하여 평생을 함께 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그렇다면 서로가 한 맹세의 증거로, 언제 어디서나 그 약속을 기억하고 증명할 수 있는 증거로, 신랑과 신부는 이제 그 맹세의 증표가 될 반지를 서로의 왼손 약지에 끼워주십시오."


주례자가 미리 준비된 반지함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우리에게 보여준 함 안에는 정성스럽게 세공된 반지 한 쌍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케이트가 먼저 반지를 집어 내 손가락에 끼워준다. 맛있는 건 나중에 챙겨먹는 성격다운 행동이다.


"절대, 절대 잃어버리지 않기, 약속."


자기 손보다 큰 내 손에 그 작고 귀여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는 손짓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얼른 끼워 넣고 싶어서 허겁지겁 반지를 집었지만, 아프지 않을까 걱정해서 조심조심 밀어넣으며 부드럽게 반지를 끼웠다.


그리하여 반지가 다 들어가자 정말 기뻐서 자리에서 조금 펄쩍 뛴다. 나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는다. 이제 내가 할 차례다. 벌써부터 왼손을 앞으로 쭉 내민 채로 도도하게, 새침하게, 곁눈질로 살짝 살짝 살피는 것이 조금 우습게,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애처럼 잔뜩 기대에 부푼 그 모습이 정말 재밌다.


과연 손가락에 반지를 완전히 끼워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얼마나 기뻐하고, 또 얼마나 감동할까, 그래서 울어버리는 건 아닐까?


기뻐서 울지도 않았으면 하는 그런 이기적인 마음마저 든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흘린 눈물을 얼마든지 닦아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미쳐도 좋다. 결혼하면 다들 바보가 된다고 하고, 그 말을 비웃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바보가 될 것 같다.



쨍그랑! 와장창! 깡! 파챙챙!



행복에 겨워 현실에서 멀어지려고 하던 나를 다시 현실로 강제로 끌어온 건 난데없이 터져 나오는 유리 부서지는 소리의 향연이었다.


마치 이 행복한 현실이 산산조각 나려 한다는 걸 알리듯, 내 머릿속에 너무나도 깊고 선명하게 꽂히는 불길한 소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