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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확히 뭘,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다행인 건 지키려고 했다는 건 확실하다는 점이다. 내 품에 케이트가 안겨 있다. 위협을 감지하고 두려움을 느껴 바들바들 떠는 그녀를 품에 앉은 나는 내 등을 창문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여차하면 몸을 내던져서라도 그녀를 지킬 수 있도록 말이다. 나 말고도 그러려는 이들은 많았다. 찰나의 순간에 뒤를 돌아보니 장인 어른께서는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처럼 부인을 지키려는 중이었고, 그러면서도 딸 아이 쪽으로 눈을 부릅 뜨고 지켜보는 걸 잊지 않았다.


맥슬런 조직의 부하들과 내 부하들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황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손에는 이미 주머니에서 뽑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오사하는 일도 없도록 진형도 잘 갖추고 있었다.


몇몇은 눈치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와서 바로 경호해줄 기세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살인만큼은 절대로 허용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죽이면 안 되니까 그냥 죽으라고 하지는 않는다.


거침없이 꺼내든 권총을 보고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거부감에 더해 분노마저 솟구치지만, 내 이성이 그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 잘 막아낸다.


주례자 양반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저 품에 안긴 케이트를, 그리고 그녀에게 아직 끼워주지 못한 채로 내 손아귀에 꽉 쥐어져 있는 결혼 반지를 느끼면서, 입으로 연신 안심시키려는 말만 반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반드시 지켜줄게."


내 이러한 말이 무슨 주문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저주가 된 걸까, 말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이변이 일어난다. 유리창이 깨진 건 속임수였다. 어디인지 모를 위치에서 뭐가 퍽퍽 터지는 소리가 잇달아 들리더니, 뭐라고 소리칠 새도 없이, 대비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퍼지는 짙은 연기가 시야를 가린다.


그나마 케이트의 입가를 손으로 가리기는 했지만, 그러느라 꽉 쥐었던 손에서 반지가 떨어진다. 아, 놓치면 안 되는데.


놓치면 안 된다고 애를 태울 겨를조차 없이, 몰려오는 연기를 마시고 쓰러졌다. 버티려고 했는데, 못 버티겠다.


"도련.....도련님! 정신 차리십시오, 도련님!"


"....파르샤?"


쓰러졌다가 바로 일어난 건 아닐까,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느낌이 강하다. 억지로 일어난 걸까, 머리가 너무 띵하다. 그 탓에 정신은 번쩍 들어서 나는 날 부른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헷갈리지 않았다.


파르샤, 내가 절대로 잊을 리가 없는 사람의 목소리다. 방독면을 끼고 있는 탓에 목소리가 많이 걸러졌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행입니다, 정신을 차리셨군요."


"어떻게 된...일이야?"


주위를 둘러본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다. 단지 눈으로 본 걸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주위에 자욱했던 그 연기는 다 사라졌다. 커다란 창문이 깨져 있다. 사람들이 다 쓰러졌다.


"케이트, 케이트...!"


"괜찮습니다, 단지 정신을 잃었을 뿐입니다."


본능적으로 케이트를 찾는다. 그러자 파르샤는 늘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척척 도와준다. 굳이 가리킬 필요조차 없다는 듯, 방향조차 안 알려주는 파르샤였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밑에 쓰러져 있는 케이트가 보인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잡고 흔든다.


"케이트, 케이트! 정신 차려, 케이트!"


"그렇게 흔드시면 안 됩니다. 도련님께서는 생각보다 힘이 좋으시니까요. 게다가 제가 이미 조치를 취해놨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안심하고 가만 계셔도 됩니다."


파르샤의 말을 들으니 알고 있지만 떠오르지 않았던 지식이 떠오른다. 확실히, 의식을 잃은 사람을 다짜고짜 흔드는 건 별로 좋지 못한 대처다. 이번에도 날 적절하게 도와준 파르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는 일단은 물러난다.


"창문이 깨지고, 갑자기 뭐가 터지고, 연기가 몰려오고, 뭐라도 해....!"


기억이 되살아난다.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한다. 그러다가 문득 위험을 느끼고는 헐레벌떡 몸을 피하려 한다. 갑자기 들이닥친 습격, 그 원인도, 실행자도 파악하지 못 했다. 


게다가 쓰러진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깨어있는 사람은 나와 파르샤 뿐, 그마저도 나는 상태가 이 모양 이 꼴이다. 대체 뭘 해야 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뭐라도 하기는 해야 했다.


그래서 몸을 벌떡 일으켰고, 곧바로 맥 없이 쓰러졌다.


"도련님!"


파르샤가 제때 받아주지 않았다면 머리를 어디 박으려고 일어난 셈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머리는 안 박았지만, 이제 몸이 안 움직였다. 앞으로 이대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을 거라는 걸 짐작하고도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장시간 거동이 불가능하다는 점에 의해 직결되는 미래는 오직 하나 뿐이다.


"파르샤, 다른 사람.....먼저 챙겨. 부탁이니까....케이트를....제발...."


희생 정신 같은 건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상상조차 안 했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누구나 그럴 수 있듯, 그리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듯,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안위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오직 나 하나만 챙기려 들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서 아무리 괴물이라고는 하나, 내 아버지인 그 인간을 제 손으로 직접 찔러 죽인 괴물의 자식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괴물이 깊게 잠든 때를 틈타, 방에 숨어들어서는, 저항하거나 발버둥 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계획적으로 찔러 죽인, 과연 괴물의 자식다운 인간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내 안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그것도 케이트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내 목숨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더 먼저 챙기려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는 목숨, 마지막 자비가 베풀어져 이럴 수 있는 거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죽고 싶지 않지만, 쉽게 죽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지만 정 죽을 수 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이럴 수 있는 걸로 족하다.


장인, 장모님에게는 정말 송구스럽지만, 그래도 댁의 따님만큼은 반드시 지켜드릴 겁니다. 파르샤라면 분명 가능할 것이다. 내 말은 분명 파르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훗....."


어쩌면 파르샤는 내가 인정한 내 가족으로서, 형제보다는 부모 쪽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마치 자랑스러워 하는 듯한, 만족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대견하게 여기는 느낌의 코웃음이 들렸다. 분명 파르샤가 낸 것이다.


그래, 파르샤,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네가 지금까지 지켜줬던 도련님은 이런 사람으로 잘 자라났어. 그러니까 마지막 부탁인데 부디 케이트를 꼭 지켜주고, 그리고 너도 다치는 일 없이.....


"도련님, 헛다리를 짚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하지만, 도련님께서 오늘 잘못 되실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장담 드리건대, 도련님께서는 털끝 하나 다치시지 않을 겁니다."


확신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죽을 사람을 죽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든 붙들어 매는 그런 필사적인 애원이 아니라, 꼭 일어날 일을 다 알고 있어서 배짱을 부리는 그런 여유마저 느껴지는 그런 말투.


뭔가 이상하다.


"파르샤....정신 차려. 넌....넌 여기서....이렇게 있으면....안돼. 난....아니, 나는...어떻게든 해볼게. 반드시....살아나갈 테니까....그러니까...일단 너부터...그리고 케이트를..."


힘을 짜내, 자꾸만 쓰러지고 포기하려는 혀와 입, 그리고 턱을 깨물고, 씹고, 부숴뜨려도 개의치 않을 각오로 억지로 움직여서라도 꾸역꾸역, 우악스럽게 말을 짜냈다.


각오했다지만 정말로 피맛도 나고, 그리고 부서지는 느낌의 격통도 느꼈다. 몸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라도 난 걸까, 파르샤가 그런 내 턱을 붙잡고는 상태를 살피려 조심스럽게 들여다 본다.


"파르....샤아...."


"말씀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정말 괜찮으니 말입니다. 약속 드리건대,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반드시 지키겠는데, 도련님을 비롯한 식장의 모든 사람들은 그 누구도 죽지 않고, 그리고 심하게 다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려고 일일이 자세를 다 잡아놓는 수고까지 들였으니까요, 철저하게 말이죠."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입력된 기억들과 지금까지 들어온 말들이 번개같이 이어진다. 서로 어디를 어떻게 맞추면 정확하게 이어지는지, 그렇게 이은 걸 어떤 순서로 다시 나열하면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는지, 떠올린 생각들이 그 모든 걸 다 알고서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하나의 결론으로 합체해가는 것이다.


"꼭...."


"꼬옥..."


의도치 않았지만 말이 도중에 끊긴다. 하지만 파르샤는 꼭 내게 문제라도 냈던 출제자처럼, 어려운 문제를 기대했던 대로 풀어내는 도전자를 보고 있는 것처럼, 무척이나 만족스러워 하는 기색으로 내 말을 따라한다.


맹수의 아가리에 머리를 힘차게 들이미는 듯한 심정으로 나는 말을 마저 꺼냈다.


"꼭 네가....다 하기라도....한...것처럼....말한다?"


"왜냐하면 제가 그랬으니까요."


파르샤의 말을 끝으로 세상이 멈춰버린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까먹었다. 1초, 2초, 3초...이런 부분까지 발휘할 끈기는 딱히 없어서 어느 시점에서 시간 세는 걸 까먹는다. 그래서 얼마나 오래 멈췄는지 모르겠다.


대충 때가 되었을 때, 다시 세상이 움직이기 적절한 시간이 되었을 때, 겨우 그 정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저기, 파르샤....농담도 말이야....해도 되는 거랑 안 되는 게 있고, 그리고....그걸 해도 되는 농담도 그걸 해도 될 때와....그렇지 못할 때가 있거든?"


시간이 꽤 지난 덕분에 몸이 아까보다 훨씬 잘 움직였다. 말도 비교적 덜 끊겼다. 이쯤 되니 슬슬 머릿속에서 한 가지 사실이 원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이해가 되고 만다. 


아직까지도 멀쩡하다, 누가 찾아올 낌새는, 개미 지옥에 내던져진 다리가 다 잘린 개미 마냥 무력해진 이 수많은 사람들을 끝내러 올 그런 청부업자가 찾아올 거란 예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농담, 농담이라....때와 상황을 가려가며 말하라는 당연하지만 꽤 거칠었을 충고를 도련님 답게 아주 부드럽게 풀어내서는, 재치 있게 말씀해주시는군요.


그래서, 이렇게 반응하기 싫어지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뭐, 이것보다 더 확실한 표현도 없겠죠."


아직까지도 방독면을 쓰고 있던 파르샤가 그것을 벗어버린다. 방독면이 완전히 벗겨져 얼굴이 드러나기 전의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파르샤가 방독면을 벗어버림으로써 느끼는 해방감을 알아본다.


갑갑하고 거추장스러운 방독면을 벗어던져서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다는 해방감이 아니다. 단지 숨통이 트였기에 해방감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방독면을 벗고, 그 안에 감추고 있던 얼굴을 보인다. 지금까지 숨겨왔던 드러내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상쾌해서, 그래서 파르샤는 해방감을 느낀 것이었다.


"도련님, 빚 갚으셔야 하는 날입니다."


방독면을 벗은 파르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활짝 핀 표정, 그 어느 때보다도 얼굴을 많이 쓰는 저 표정을 보고 나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파르샤는 그녀의 삶에서 제일 행복해 하는 중이었다.


어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