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불공평하다.


부유한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모두 하나같이 큰 불행함을 안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


가난한 사람은 매 끼니를 걱정하며 당장 앞날을 걱정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들러붙는 들벌레같은 존재들을 뿌리치며 먼 앞날을 걱정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선동으로 온갖 악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 선동질에도 그저 꼬리표만 붙는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열등감이 쌓여 더욱 필사적으로 선동을 한다.


그리고 그건, 작은 사회라고 불리는 학교라는 미성숙한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쟤, 고아라며?"



단지, 선악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선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향할 뿐.



"더러워. 우리 반에 왜 하필 저딴 새끼가 있는거야?"


"야, 말도 섞지 마."



가난한 아이는 억울했다.


자신이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 이런 것도 아닌데, 그저 부모의 바닥 때문에 자신마저 이런 취급을 당한다는 게.



"아, 이윤서다."


"야, 자리 피해."



하지만 그 순수한 악의도 입방아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이 딱 그 순간일 것이다.



"신경쓰지 마. 원래 저런 애들이니까."


"고, 고마워......"


"이름이 뭐야?"



소년은 낯을 가리는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강, 강지성......"


"그래? 지성이라고 불러도 돼?"


"으, 응."



소년과 소녀는 이내 금방 친해지며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같이 했다.


같이 밥을 먹는 것부터 시작해 놀 때도, 낮잠을 잘 때도, 간식을 나누어먹을 때도 언제나 붙어다니며 서로에게 의지했다.


마치, 운명공동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 가족, 이민 갈 거래."



그러나 아이들의 6번째 겨울이 다가올 무렵, 이 작은 아이들의 이별이 찾아왔다.



"그......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



인연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이게 아니라면 못 살 것처럼 미친 듯이 갈망하던 그 순간마저 무색하게, 이별은 급작스레 찾아오는 것이다.



"걱정 마,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거야. 꼭 돌아올게."


"응......"



소년의 마음을 모르는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는 12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여린 소년과 의연한 태도의 소녀는 막연한 생이별을 했다.




*

*

*




세월은 야속하게 지나가고 흘러가, 어느덧 기나긴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강지성, 그만 자고 나갔다 와라."



흉터투성이의 남자가 효자손으로 싸구려 와이셔츠와 촌스러운 남색 코트를 걸친 채로 신문지를 얼굴에 덮고 자고 있던 강지성의 어깨를 툭툭 치며 깨웠다.


이제는 노가다로는 벌어먹고 살 수 없음을 뼈저리게 직시한 소년은 이름 없는 폭력조직의 말단으로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다.



"......오늘도 수금입니까?"


"아니, 저어그 재개발 지역에 있는 거렁뱅이 섀끼들 겁 맥이고 내쫓는겨."



지금의 강지성은 잡일 시다바리나 하는 밑바닥부터 시작하는 깔개같은 존재.



"아, 그리고 오늘 약속 있당가?"


"없습니다."


"그럼 일 끝내불고 술이나 한 잔 허자."


"그러시죠."



강지성은 화장실로 들어가 뻗친 머리와 침자국을 수돗물로 씻어내고는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에게 말하고 문을 열어 사무실을 나갔다.



"갔다 오겠습니다."


"어엉."



사무실을 나선 강지성이 향한 곳은 사무소 근처, 딱 봐도 치안이 안 좋아보이는 거리의 구식 빌라의 지하계단.




[끼이익]




2020년대라는 지금 시대에 연식이 50년은 훌쩍 넘어보이는 현관문을 열자 초겨울의 날씨를 직격으로 맞은, 집이라는 역할 하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곰팡이 얼룩 가득한 반지하 독방.



"......"



지저분하게 바닥에 깔려 있는 담뱃재, 꽁초와 함께 개기 귀찮아서 방치해둔 이불에 싸구려 양복 차림 그대로 몸을 던진 강지성은 천장에 개성있게 까맣게 얼룩진 곰팡이를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내 거라고 할 만한 게 진짜 아무것도 없네."



좆같다.


그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물때가 가득한 지저분한 싱크대도, 모서리가 다 닳아 부서지기 직전인 식기들도, 손잡이에 있는 무늬마저 다 손때에 닳아 흐릿해진 수저들도 전부 빌린 것일 뿐,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딱 하나 그만의 것이 있기는 했다.


지금 강지성이 차고 있는, 조직에서 공동구매한 중국산 도금 손목시계.



"......"



약은 언제 다 닳을 지 모르고, 시간이 지나면 도금도 벗겨져 이도저도 아닌 짝퉁 쓰레기가 될 시계를 자신과 오버랩해보며 강지성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태어난 이 곳에서 빚이나 갚아가며 살다 죽는 것만큼 비참한 죽음이 따로 있을까?



"......슬슬 일 나가야지."



언제쯤 이 시궁창 인생을 벗어날까.


조소 가득한 입꼬리를 다시 내리고, 강지성은 양복에 생긴 주름도 펴지 않고 그대로 무기력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와 언덕 위의 판자촌을 향해 걸어갔다.


어젯밤 읽었던 [연어의 습성]이라는, 자신에게는 마치 저주처럼 들리는 기분 더러운 잡지를 좆같은 기분으로 발로 즈려밟고.




*

*

*




"아이고!"




[쾅]




낡은 대문을 강하게 발로 차자, 강지성 앞에 하얗게 머리가 샌 노인이 딱딱한 시멘트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나가라고 했잖아, 할배."


"그, 그렇지만 우리는 지낼 데가......!"


"길바닥은 지낼 데 아니야?"



노인이 주저앉은 눈높이에 맞춰 쪼그려앉은 강지성이 신문지에 감싼 사시미 칼을 꺼내 보여주자, 노인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좋게좋게 말로 할 때, 조용히 나가."


"아, 알겠어!! 대신에 나갈 준비할 시간만......"


"할배."



강지성이 이번에는 사시미 칼을 노인에 목에 갖다대며 깔린 목소리로 읊조리듯이 말했다.



"내 말이 듣기 같잖아?"


"아, 아, 알겠어! 지금 당장 나갈게!"


"나가는 척 하고 다시 눌러앉았다간 가둬놓고 집채로 불태워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 말을 끝으로 강지성은 대문을 밀고 폐가를 나왔다.


흉물스럽게 빛나는 사시미 칼을 다시 신문지가 찢어지지 않도록 꽁꽁 싸맨 후 깊게 숨을 내뱉고는 사시미를 싸 들고 온 검을 비닐봉투에 다시 넣었다.



"이걸로 오늘 일은 끝이고, 슬슬 사무실로......"




[툭]




"아."



그러다 곧 공사로 밀려나갈 빈민촌에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옷차림의 여자와 어깨를 부딪힌 강지성은 괜한 골치아픈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안 보고 다녔네요."


"어, 네. 괜찮아요."



강지성은 양아치답지 않은 사과를 하고는 그대로 언덕을 내려갔다.



"소나무향......"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강지성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여자는 웃으며 중얼거린다.


마치, 소중한 물건을 되찾은 아이처럼.




*

*

*




"수고했다잉. 술집 예약했으니께 바로 가자."


"옙."



사무실로 돌아와 사시미를 [공용 사시미]라고 쓰인 골판지 상자에 넣는 강지성을 보고 담배를 지지며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투덜거렸다.



"니미럴, 저러다가 아그들 손꾸락 잘리믄 책임도 안 질 거믄서 뭣이 저래 자랑시럽다고 올려논다냐."


"죄송합니다."


"너거가 뭔 잘못이 있다냐? 돈 애낄라고 칼통도 안 사는 형님 구두쇠 심보가 이 지랄로 맹근 거 아니겄어? 다 했으믄 가자야."



그들이 술을 마시기로 한 곳은 허름한 사무실 앞의 삼겹살집.


연탄불에 올려놓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육즙 빠진 냉동삼겹살과 상표없는 싸구려 소주로 응어리를 푸는 게 그들의 한 달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렸다.


에탄올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얼마나 몸에 안 좋은지는 그들의 신경거리가 될 수 없었다.


그저 다음날 있을 숙취로 하루종일 고생하더라도 오늘 있었던 좆같은 일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독하기만 하면 될 뿐.



"......지성아, 우리가 언제까정 여그서 썩어야 쓰겄냐?"


"또 큰형님이 뭐라고 다그치셨습니까?"


"나가 존나게 서러워서 그런다, 씨발 존나게 서러워서!! 달구 눈깔만한 돈 뽀시레기 받아가믄서 시다바리는 다 하고 앉었능게 서러워서!!"



푸념을 늘어놓으며 징징대는 남자는 그렇게 자기 말만 하다가 술에 절여져 꼬박 잠들었고, 강지성은 꽁초와 담배가 섞여있는 담배갑을 열고 한 까치와 라이터를 꺼냈다.




[치익]




뱉자마자 해가 뜨기 시작한 하늘의 안개처럼 흩어지는 담배 연기가 그의 눈 앞을 뒤덮는다.


발도 들여본 적 없는 매춘업소 전화번호가 적힌 싸구려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이고, 강지성은 깊게 빨아들였다가 흰 연기와 함께 한숨을 깊게 내뱉었다.



"후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되는 걸까.


강지성은 수십 번 생각해봤자 답도 없어보이는 의문을 머릿속에 품은 채, 깊게 빨아들여 반밖에 안 남은 담배를 입에서 빼고 하늘을 향해 또 한숨을 내뱉었다.


꽁초만 남은 담배를 담배갑에 넣고 들어가려던 순간, 한 여자의 목소리가 강지성을 멈춰세웠다.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옷차림의 여자가 담배 한 까치를 빌리기 위해 강지성에게 다가왔다.


흔하게 보이지는 않는 짙은 녹색 포니테일에 동글뱅이 선글라스를 낀 너머에는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여 돋보이는, 강지성 자신과는 다르게 우아함이 기본적으로 배어있는 자태의 여자였다.



"아, 그때 그 판자촌에서 봤던......"


"여기요."




[치익]




여자가 그에게 받은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향긋한 커피향이 둘의 코를 마비시켰고, 만족스럽게 담배연기를 맛보고 여자는 그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고마워요, 자."


"가지세요. 필요없으면 버려도 되고."


"그래요?"



기름도 없어 앞으로 3번도 붙을까말까 한 라이터를 고이 양복 안주머니에 넣는 여자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강지성은, 다시 여자의 말에 발목이 잡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른 곳에 가서 한 잔 하실래요?"


"죄송한데 제가 돈이 없는데요."


"여태껏 받기만 했는걸요? 제가 살게요."


"안에 있는 분만 집으로 보내드리고 가도 된다면."


"그럼요."



강지성은 전화를 들어 콜택시를 불렀고, 이내 도착한 택시에 남자를 태워 돌려보내고는 다시 여자에게 돌아왔다.



"따라와요.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이 있어요."



그들의 발걸음은 조용히 허름하고 오래된 거리를 벗어나 깨끗한 상가의 한 재즈바 앞에서 멈춰섰다.


문을 열고 나트륨등의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바 안으로 천천히 걸어간 둘은 이내 주광색 전등이 옅게 비치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앉는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뇨. 이런 데는 온 적이 없어서."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는 강지성이 모습이 귀여웠는지 여자는 조신하게 손으로 입을 가려 웃고는 탁자에 있는 벨로 마스터를 불렀다.



"마스터, 블랙 러시안이랑 난이도 낮은 칵테일 하나에 안주는 치즈 플레이트로 부탁해요."


"예."



조용히 주문을 받고 돌아가는 마스터를 보던 강지성은 여자게에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지역을 처옴 오신 건 아닌가봐요?"


"처음 온 건 아니에요. 예전에 여기서 살았다가 잠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거든요."


"여기가 그리웠나요?"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의 질문에 여자는 조용히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글쎄요. 그래도 찾아온 보람 정도는 있었어요."


"실례합니다. 주문하신 치즈 플레이트, 블랙 러시안과 롱 아이스 아일랜드 티입니다."



어색한 흐름을 끊고 테이블에 놓인 샴페인 다이아몬드빛 칵테일과 황수정빛 칵테일, 그리고 살라미와 각종 치즈가 보기 좋게 진열된 도마 플레이트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이런 부류의 술을 마셔본 적도, 본 적도 없는 강지성은 여자가 시킨 술을 집고 그대로 단숨에 들이켜버렸다.



"아으, 끅! 어우, 소주보다 독한 건 처음 마시는데."


"후훗, 처음 마신다더니 진짜였어요?"




술자리는 무르익고, 나트륨등이 서로의 눈에 비쳐 어둑어둑한 분위기마저 즐거워져가는 무렵, 술기운에 말이 어눌해진 강지성이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아...... 슬슬 가야, 되는데......"


"제가 모셔다 드릴게요."



데려다준다는 말을 듣고 택시비를 아낄 수 있다는 생각에 강지성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어가려 했으나,



"가, 암사합나다. 그러고, 보니까...... 이, 름이......"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이내 술기운과 잠기운에 져 그대로 뻗어버린 강지성.


옅게 숨을 쉬며 테이블에 엎드려 잠에 든 강지성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여자는 속삭이듯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야, 이윤서."



순수한, 그러나 음흉한 웃음을 띈 여자는 들을 리 없는 그의 볼에 입술을 붙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난다는 약속, 지키러 왔어."



나트륨등의 어둡고 창 너머의 누런 가로등불이 소유욕에 가득 찬 여자의 흑심을 감춰주는 어두운 새벽.


소년의 마음 속에 남아있던 소녀가, 다시 기억의 태엽을 감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

*

*




"내가 알아보라고 했던 그 조직은 어떻게 됐어?"



아침부터 분주한 이윤서의 사무실.


바닥은 대리석에 타일 시공으로 금이 섞인 호화스러운 사무실의 주인인 이윤서는 한 잔에 도수가 40도가 넘는 블랙 러시아를 5잔이나 마셨는데도 숙취 기운이 전혀 없어보였다.



"3년동안 강지성 씨의 상환금 1억 3천만원을 몇 배로 불려서 착취했네요. 이 정도면 염전 노예보다 더 심각한데요?"


"그래서 지금 갚아야되는 금액은 얼마인데?"


"9억이에요."


"미친 새끼들."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윤서는 책상에 올려놓은 액자를 바라본다.


액자는 누가 뭐라해도 비싸보인다고 할 정도로 비싸보였지만, 액자 안에 담긴 소년과 소녀의 사진은 마치 세월의 흐름을 피해가지 못한 듯 낡고 빛바래있었다.



"그 사진, 언제쯤 바꾸실 거에요?"


"신혼사진 찍으면."



액자 너머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이윤서를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일은 저희가 처리할까요?"


"아니, 차 대기시켜. 내가 직접 갈 거야."


"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비서는 사무실 문을 열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분명, 무섭게 일그러진 이윤서의 표정을 보고 겁을 먹은 것이리라.


그렇게 5분이 지나고, 비서는 다시 이윤서의 사무실 문을 열고 그녀에게 보고했다.



"회장님, 차가 준비됐답니다."


"알았어. 금방 내려갈게."



회사에서 차를 몰고 15분이 걸려 도착한 강지성이 있는 사무소.



"여깁니다."


"돈 뜯어먹는 새끼들 아니랄까봐, 거처는 또 바퀴벌레같이 생겼네."



건물 바깥에서부터 찌린내가 날 것 같은 모습에 눈살을 찌뿌리며 이윤서가 올라갔고,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에 입구에 사람 하나 없는 구닥다리 계단을 보며 냉소적인 말투로 싸늘하게 내뱉었다.



"하긴, 벌레 소굴에 경비가 있을 리 없지."


"기다렸다가 안에 있는 인간들 전부 죽일까요?"


"됐어, 그냥 등처먹은 새끼만 뽑아버려."



철문을 열고 그녀의 조직원들이 들이쳐도 반응이 없는 적막한 사무실.


그녀의 조직원들은 그대로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문에 [사장실]이라 적혀있는 문을 차고서 그대로 쥐 떼처럼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여기 김덕춘이라는 새끼가 누구야."


"뭐야, 니 새끼들...... 켁!!"



상황은 너무나도 시시하게 흘러갔다.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두목이라는 인물은 별다른 저항 하나 못 해보고 그녀의 조직원들의 손에 그대로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오래된 돌바닥이었던 사무실과 달리 카펫이 깔려있는 바닥에 각종 장식품들이 즐비한 사무실을 보며 코웃음을 치던 이윤서는 조직원들의 손에 카펫 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사장 옆에 유유히 앉았다.



"씨발, 니들 뭐하는 새끼들이야!!"


"그거까진 내 알 바 아니고. 당신, 강지성이라는 남자가 빚진 돈을 7배까지 불려서 노예계약하고 있다며?"


"개지랄하네. 내가 내 노예 쓰겠다는데 왜 이 씨발년이 지랄이야? 가서 부잣집 아재들한테 스폰비 받고 빠구리나 뜨고 와, 이 창년아!"



그 순간, 이윤서의 표정이 섬뜩하게 변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을 짓고서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안 되겠네. 이 새끼 목 매달아."


"밧줄로 할까요?"


"야, 지, 지금 뭐하려는 거야!"



마치 객관식처럼 죽이는 방법에 색다른 선택지도 있다는 듯한 소름끼치는 질문.


조직원의 물음에 이윤서는 웃으며 코트 주머니에 있던 둥그런 무언가를 조직원에게 던졌다.



"아, 오랜만에 그거 해 봐."


"예."



루어 낚싯줄이었다.


자칫하면 사람 손가락도 소세지마냥 잘라버린다는 그 낚싯줄.



"그냥 매끈한 걸로 할까요?"


"아니, 칼로 좀 긁어. 그래야 비명들을 맛이 나지."


"......아, 아아아!! 자, 잘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상황파악을 하고 도축되기 전의 돼지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두목은, 이내 이윤서가 날린 주먹에 목젖을 맞아 소리마저 지르지 못 하게 되었다.



"그러게 왜 사람 말을 개보짓구녕으로 들었어, 이 씨발 버러지 새끼야."




[드드드득]




칼로 마구잡이로 낚싯줄을 긁는 소리가 두목의 귀에 공포를 심어주었고, 어느샌가 천장에 낚싯줄을 천장에 매단 조직원의 손에 두목은 끌려갔다.



"몸부림쳐봤자 너만 괴로워. 마음 놓고 눈 감고 있어."



석면 천장을 뚫고 숨어있는 골조에 줄을 감고 남은 줄을 책상에 묶은 간이 교수대.


조직원들은 나무 의자에 두목의 발을 올려놓고 칼로 긁은 낚싯줄을 목에 둘둘 감고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차."




[쿵]




이윤서의 말 한마디에 바로 넘어지는 나무 의자.



"케겍!! 악, 으가윽, 아아아악!!"



살이 찢겨나가는 고통에 몸부림칠수록 줄을 묶어놨던 책상이 미친듯이 들썩거리고, 방울방울 떨어지던 핏방울은 서서히 수도꼭지 밸브를 열듯 그 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내 그렇게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고통 속에서, 두목이라는 작자는 허무하게 도륙된 피부와 뼈를 드러내며 죽어버렸다.



"시체만 치워버려."



두목이 죽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차갑게 웃으며 지켜보던 이윤서는 손으로 입 부분을 가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그때,



"어......?"


"여기서 또 보네요. 이쯤되면 운명인가?"


"이게 뭐가 어떻게 된......"



숙취가 덜 풀린 채, 혼날 각오로 비틀비틀 사무실을 온 강지성은 갑작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이 모습에 뇌리가 정지하는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당신이 진 빚, 7배나 불려서 등골 빼먹고 있길래 이렇게 벌 준 거에요. 어때요?"



촌스러워 보이는 금발에 제일 반듯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강지성의 두목이, 목 살갗이 갈기갈기 찢겨 걸레짝이 되고 바닥에는 혈관이 다 뜯겨나간 증거처럼 검붉은 피가 바닥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칼로 목 부분만을 붉게 난도질해버린 테루테루보즈같은 모습으로 죽어있는 두목을 본 강지성의 속은 순식간에 뒤집혀졌다.



"우욱......! 우웨에에엑!!"


"어라, 비위 약하구나?"



그의 구역질과 함께 소화 덜 된 치즈덩어리와 위산이 사무소 바닥을 더럽혔고, 피비린내와 토의 악취가 섞여 사무소는 마치 생지옥에 온 것 같은 풍경을 자아냈다.



"당신, 대체 누구야...... 대체 누구길래 이런 짓을......!"


"나야, 지성아."



전부 자신을 강지성이라고 부르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애칭으로 부르는 여자.


뇌리에 스쳐가는 불길한 예감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으로 강지성은 20년 전에 헤어졌던 그때의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 윤서?"


"기억하고 있었구나? 기뻐."



아까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성을 안는 이윤서.


사람이 목이 찢겨 죽어버린 현장에서 자신을 다정하게 안은 여자라니, 가히 모순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왜냐니?"


"너,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대체 왜 이렇게, 잔인해진거야......?"



진심이 담긴 의구심으로 물어보는 강지성의 표정을 본 이윤서는, 눈썹을 약간 기울이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윤서야......"


"여기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길어져."



어린아이를 달래듯 토닥토닥 등을 쓰다듬던 이윤서는 굻고 있던 무릎을 펴더니, 강지성의 땀 가득한 손아귀에 쪽지를 쥐여주고 나가기 직전, 



"만약에 나와 마지막 대화가 하고 싶다면, 이틀 뒤 밤 11시까지 와 줘."


그가 편 종이는 작은 약도와 X표시가 있는 쪽지.


그녀가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

*

*




그렇게 길고도 짧은 시간은 흘러 어느덧 약속의 시간이 다가왔다.


그믐달의 달빛이 안개에 가려진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밤하늘 아래의, 이제는 원래 형태마저 찾아볼 수 없는 폐교회.


강지성은 격하게 두근대는 심장 고동을 따라 무식하게 큰 폐교회의 문을 열었다.




[드드드드드드]




"약속대로 와 줬구나."



거대한 폐공장 문을 열자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백열조명 하나가 쓸쓸히 켜져있는 건물 파편에 앉아있는 이윤서는 그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윤서야, 이제 대답해 줘. 여태껏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럴거야. 그 전에, 네 기억으로는 내가 이민 갔다고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


"......응."



어느샌가 나타난 그녀의 부하가 강지성에게 간이의자를 하나 펼쳐줬고, 그 의자에 앉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이민간다는 거, 나도 모르게 부모님이 했던 거짓말이었어. 할아버지가 받으신 유산을 받고 이런 곳에 조금도 발 딛기 싫다고 도망간 거였거든."


"아......"


"그래도 내가 너를 잊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도망가는 몸이 됐다고 해도, 언젠가 네 곁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스무 살까지 버텼어."




[치익]




이윤서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한숨을 내뱉으며 태연하게 불을 붙였다.



"그런데, 부모라는 작자들이 내 의견은 좆도 없이 갑자기 돈지랄을 하고 싶었는지 씨발 역겨운 기생오라비 새끼를 예비시위라면서 나랑 맺으려고 하더라? 2년동안 싫다고 말해도 이미 돈에 눈이 뽑힌 인간들은 주변을 못 보더라고."



눈 앞의 뿌연 담배연기 너머로 조금씩 손을 떨며 말을 이어가는 그녀의 표정은, 냉소적이면서도 어딘가 슬퍼보였다.


적어도, 강지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전부 죽여버렸어. 마시면 내장이 다 녹는 독으로 마지막 티파티를 벌여줬지. 남은 빈 독병은 그 기생오라비 새끼 옷주머니에 넣어서 뒈진 그 새끼가 다 뒤집어쓰고."


"그 뒤로 난 악착같이 살았어. 네가 다른 누구와 비교해도 나를 고르게 만들도록. 지폐로 침대를 만들어 자도 될 정도로 돈을 쌓아올리고, 아무도 내 본성을 모르게 온갖 곳에 기부해서 누구도 우리를 못 깎아내리게 명예도 쌓아올렸어. 그런데 그거 알아?"



다 핀 담배꽁초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바닥에 담뱃재를 적시는 이윤서의 눈물이 같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저 눈물이 진짜일지 가짜일지, 강지성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그럴 때마다 네 울고 있는 모습이 생각나서 미치겠더라. 어릴 때부터 마음 약하던 그 애가 밥은 잘 먹고 다니는건지, 쓰레기들한테 이리저리 휘둘리는 건 아닌지, 혹여나...... 나를 만나기도 전에 죽은 건 아닐지."


"윤서야......"


"하...... 미안. 다 커서 울기나 하고, 꼴불견이지?"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훔치며 안쓰러운 모습으로 그녀는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걱정돼서, 널 보호해 줄 주위 사람도 붙였어. 피가 섞인 가족도 독으로 내장까지 녹여 죽인 주제에, 6살 때 만났던 남자애 하나가 그리워서 이런 짓을 한다는 거, 웃기지 않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부정할 필요없어. 이렇게 난 더러운 인간이야. 너 하나 만나겠다고 부모를 죽이고, 위선을 몸에 뒤집어쓰고, 좋아하는 사람 하나 믿지 못해서 일거수일투족까지 감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쓰레기같은 인간. 그러니까, 이것만큼은 내가 결정해서는 안 돼."



그러고는 앉아있던 포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핸드백을 건네는 이윤서.


얼이 빠져있는 강지성을 대신해 그녀가 핸드백을 열었고, 그 안에는 1억이라는 숫자가 적힌 백지수표가 9장 들어있었다.



"9억이야. 네 빚 전부 갚고도 남을 돈."


"갑자기 이걸 왜 나한테......"


"네 선택을 따를거야. 만약 그 돈을 가지고 나가도, 정 떨어지게 너를 뒤쫓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그제서야 강지성은 그녀의 말을 알아차렸다.


지금 이 가방에 든 9억이라는 돈은, 평생 놓아버리게 될 자신의 인연의 대가라는 것을.


강지성은 잠시 망설이더니,




[툭]




"바보, 그 돈이면 뭐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가방을 버리고, 이윤서를 끌어안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잊어, 윤서야. 돌아온다는 소리만 믿고 20년동안 너를 기다려온 건데......"



강지성은 9억이라는 돈보다도, 20년을 기다려온 인연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연어는 있지? 바다로 가서 자라다가 산란기에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알을 낳고 끝내 짝과 함께 죽는 거야. 낭만적이지 않아?"


"......"



강지성은 침묵했다.


이 폐교회 속에서 서로 숨도 못 쉬게 온몸을 감싸는 열기 가득한 포옹이, 그들의 이별을 마무리짓는 걸 축하하듯 내리는 싸락눈이, 한때의 소년과 소녀의 눈시울을 붉혔다.



"너만이 내 강이자 짝이야, 지성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서도 난 네 곁에 있을게."




*

*

*




차광 블라인드로 옅은 그늘이 깔린 이윤서의 사무실.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이틀 전 두목을 살해하러 가던 그때 그대로의 모습처럼 보였지만, 딱 한 가지 바뀐 것이 있었다.


그녀가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만지작거리고 있는 고가의 액자에 담긴 사진이 더이상 낡은 사진이 아닌, 이윤서의 웨딩드레스와 강지성의 턱시도를 입고 찍은 웨딩사진으로 바뀌었다는 것.



"강지성 님의 경호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비서가 들어와도 계속 액자를 만지작거리던 이윤서는, 돌연 액자에서 손을 떼고는 비서에게 물었다.



"오늘 지성이한테 들러붙었던 여자들 수는 몇 마리야?"


"5명입니다."


"가벼운 애들은 경고차원으로 택배만 보내. 지성이한테는 모르게 하고."



아마 강지성은 모를 것이다.


그때 그에게서 빌린 라이터의 주소지가 화재로 종업원 전부가 죽어버렸다는 것을.


지금도 그의 행선지마다 되도 않는 애꿎은 이유로 무고한 협박과 고문을 받고 있는 여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지금 그가,


다름아닌 서울을 장악한 거대조직 [금강파]의 이윤서 회장의 유일한 반려자인 것을.


아니, 오히려 모르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강은 그 누가 뭐라 말해도 아무 말 않고 흘러가야 하는 존재이니까.



"......헤헤."



그녀는 그를 지키기 위해 지금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다.


그녀가 살아있는 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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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거 존나 오래걸리노

한 3주 동안 쓰는데 쓸 때마다 이게 얀데레 맞나 싶기도 하고 느와르가 맞나 싶기도 하고 제목이랑 이게 씨발 맞냐 싶고 존나 애매하다



이제 얼마 안 남은 느와르 대회 사료쓰고 얀붕이들 얀렘가 함 만들어보자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