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만약에 당신이 알고있는 것이.

 

 

 

 

 

 

 

 

 

 

 

 

 

 

 

 

 

 

 

 

 

 

 

 

 

 

 

 

 

당신이 걸어온 길이.

 

 

 

당신이 사랑해온 것이.

 

 

 

당신의 삶 모든 것이.

 

 

 

 

 

 

 

 

 

 

 

 

 

 

 

 

 

 

 

 

 

 

 

 

 

 

 

 

 

 

 

 

 

 

 

 

 

전부 거짓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것은 어느 날.

 

 

 

어느 날 어느 때에 갑자기.

 

마치 심연 속에 잠겨있던 것을 확 잡아채는 손아귀처럼.

 

그렇게 그는 깨어났다.

 

 

 

 

 

 

 

 

 

문득 떠지는 눈.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는지.

 

자신이 누구이며,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마치 원래 잠들어있었던 것처럼.

 

 

 

 

 

 

 

시야는 온통 하얀색 뿐이었다.

 

하얀 커튼과 하얀 천장. 


하얀 침대와 알 수 없는 하얀 기계들, 비프음.

 

자신의 몸에 꽂혀있는 수많은 바늘들과 또 전선들.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던 탓인지 몸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목은 완전히 잠기어 한낱 옹알이조차 내뱉을 수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만 뒤룩뒤룩 굴리면서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것 뿐이다.

 

 

 

모든 것과 모든 상황이 전부 모르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신체도, 어딘지 모를 이 곳도, 이유 모를 이 전선들과 기계들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고자 애쓰던 그의 귓가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

 

또렷한 하이힐 소리가 이윽고 그의 앞에 멈춰서고, 커튼을 걷어내었다.

 

 

 

 

 

 

 

 

 

 

 

잔뜩 긴장한 채 가슴 졸이던 그가 순간 두 가지 의미로 숨을 멈췄다.

 

 

하나는 그의 앞에 서있는 이 인물이 그를 해할 것인지, 혹은 구한 은인인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함.

 

다른 하나는 맹세컨대 그가 기억을 잃기 전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만한 미모를 지닌 여성을 본 적 있을까 하는, 순수한 경탄.

 

 

 

그 여성은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점차 눈이 커지더니 이내 환히 웃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며,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 낯선 여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애정 어린 손길에 차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길엔 여전한 불안함을 뚫고 어딘가 마음을 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

 

 

일전의 낯선 아름다운 여인은 자신의 아내라고 했다 - 적어도 본인은 그렇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루 일을 끝마치고 퇴근하는 길에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했었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누워있었다고 했다. 

 

 

처음 의사로부터 영구 기억상실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지만

 

금세 수습하고 그가 깨어난 것만 해도 신께 감사하다며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이전에 이런 아름다운 아내와 자신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는 모른다만,

 

적어도 이런 그녀의 미소를 본 지금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내의 이름은 '연'.

 

'연'이 알려준 자신의 이름은 '인'.


인과 연.

연과 인.

 

인연, 그리고 연인.

 

 

 

재밌는 이름이지 않느냐며, '연'은 까르르 웃었다.

 

 

 

 

 

 

 

 

 

 

 

연이 퇴원 수속을 밟고 오는 사이, 인은 병원 로비에 앉아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처음 보는 것이라 인의 눈길을 잡아 끈다.

 

쉴 새 없이 고개가 돌아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놀이 공원에 처음 나온 아기의 그것이었다.

 

 

 

 

그런 인을 발견한 연은 어딘가 저려오는 마음과 애틋함이 녹아 나오는 미소를 짓곤,

 

그와 팔짱을 끼고 바깥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병원 문 밖으로 나온 그의 눈 앞에,

 

 

 


 

 

신세계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 

 

수많은 로봇.

 

또 수많은 호버카들과 또 수많은 네온 사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마천루들.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고개를 돌려도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건물들.

 

인과 연이 서 있는 이 곳도 얼마나 높은지, 보도 난간의 에너지 스크린 너머 아래로 구름이 보일 지경이었다.


깔끔한 광장과 화사한 햇볕. 기분 좋은 열기.

 

끊임없이 들려오는 광고와 음악 소리. 

 

 

하늘에서는 무엇인가 - 분명 교통수단일 것이다. - 쉴 새 없이 돌아다녔고,

 

마천루들 사이사이로 자기부상 트램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은 어딘가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말을 잃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광경을 눈에 담느라 바쁜 인.


그런 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연은 또다시 마음이 저려옴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의 앞에 검은 고급 호버카가 멈추고, 검은 정장의 사내가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어리둥절하는 인을 연이 밀어넣은 뒤 자신도 탑승하자, 사내는 다시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의 아내라는 사람은 그 미모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OCP라는 어떤 초거대 기업의 총수이며, 그 기업을 거의 홀로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아예 도시 하나가 그녀 손 아래 있다고도 했다.

 

정재계를 막론하고 무수한 인사가 그녀의 눈에 들고자 온갖 눈물나는 추태를 부린다고 했다.

 

 

 

 

 

 

 

 

그런 부족함 하나 없는 연이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지극정성일까 생각해보던 인은


 그녀의 외모와 지위, 재력을 전부 떠나서 자신의 아내에게 최선을 다 하리라 마음먹었다.



비록 기억은 잃어버렸지만 어쨌든 그는 그녀에게 소중한 사람이었고, 소중한 사람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고서야, 연이 그에게 매달릴 일이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연이 그에게 매달리는 만큼, 그 또한 연을 사랑했겠지.

 

구태여 필요 없는 후회거리를 만드는 것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었고,

 

그런 사람이었다.

 

 

 

 

 

 

 

 

 

 

 

 

 

 

 

 

 

 

 

 

 

 

 

 

 

 

 

 

 

 

 

 

 

 

 

 

 

 

 

 

 

 

 

 

 

 

 

 

 

 

 

 

 

 

 

 

 

 

... 위화감.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반 년.

 

벌써 연과 함께 지낸 지 반 년이 흘렀다.

 

 

 

그 동안 인은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연은 인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해 주었다.

 

인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보게 해 주었다.

 

먹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듣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면 또 무엇이든.

 

 

 

 

 

다만.

 

 

 

 

 

 

 

 

 

"안 돼, 인. 바깥만큼은 안 돼."


"연....정말 안 될까?"

 

"내가 말했잖아. 아직 위험하다고... 아직은 준비가 안 됐어."

 

 

 

 

 

인은 고개를 들어 연의 등 뒤 창 밖을 바라보았다.

 

활기찬 거리가 그의 눈동자 위에 다시금 제 자태를 그렸다.


저 멀리, 수평선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푸른 선을 그었다.

 

 


그 푸르른 눈동자를 붉은 눈동자가 바라본다.

 

연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에게 다가왔다.

 

 

 

 

 

"...인."

 

"응?"

 

 

 

"내가...정말 정말 사랑하는 거 알지."

 

"...알아."

 

 

 

 

 

나지막이 대답하는 인을, 연이 살며시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나 됐지?"

 

"오늘로 딱 6개월."

 

 

 

"...그럼 네가 누워있었던 시간은 알아?"


"...아니."


"....자그마치 6년이야. 6년."

 

 

 

 

 

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나. 처음에 연락받고 달려왔을 때....다들 거짓말하는 줄 알았어. 여기 누워있는 이게 내 남편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울음기가 묻어나오는 곳은 비단 연의 목소리 뿐만이 아니었다.

 

인은 자신의 가슴팍이 점점 젖어드는 것을 느끼면서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니까...집에 돌아왔는데 덜컥 겁이 나더라..? 여기서 항상 맞아주던 네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라고 하니까."

 

"그러니까....갑자기 이 집이 너무...너무 무서워지는 거 알아? 그냥...그냥 다 무서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인을 끌어안은 두 팔에 더더욱 힘이 들어간다.

 

마치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직접 증명해달라는 듯이.

 

 

 

 

"더 무서웠던 건... 내가..내가 가는 곳마다 전부 네가 있었다는 거야..."

 

"내가 뭘 하든, 어딜 가든 인...네가 있었다구.."

 

"그러니까 제발.... 인... 제발..."

 

"...가지 마."

 

"6년... 6년이란 말야...."

 

 

 

 

 

기어이 연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알았어, 연. 이제 다시는 그런 이야기 안 할 테니까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정말이야..?"


"응. 약속할게."

 


 

조금의 갑갑함 정도야 연이 슬퍼하는 것보다야 나을 테니까. 


연은 코를 훌쩍이며 더더욱 그의 품을 파고든다.



연을 마주 안아 달래면서도 인은 그러나 창 밖 수평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스스로를 그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째서 그런 꿈을 꾸었을까.


바닷가.


바닷가 붉은 지붕의 아담한 집.


그곳에서 인과 함께 즐겁게 뛰놀던 누군가.

 

 


 그 그림자는 분명 연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애틋함은.


이 미칠듯한 그리움은.


여섯 달이 흐를 동안 매일 그의 앞에 나타나던 꿈과 그림자는 무엇이며


어째서 그 꿈을 꾸고 나면 자신은 울고 있었을까.



그것은 그 곳에 가보면 알게 될 일일까?

 

 

 

 

 

 

 

 

 

 

 

 

 

 

 

 

 

 

 

 

 

 

 

 

 

 

 

 

 

 

 

 

이상했다.

 

 

 

인은 바깥에 나와 걸으며 생각한다.

 

 

그가 다시 바깥에서 홀로 거닐고 싶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연도 극렬한 거부 반응을 보였지만

 

반드시 그녀의 눈이 닿는 곳에 있겠다는 거듭된 맹세와 혼신의 설득 끝에 마지못해 그를 내보내주었다.

 

 

 

수많은 행인들과 안드로이드들이 그를 지나치지만 부딪치지는 않았다.

 

 

 

어째서일까.

 

 

 

 

 

 

 

어째서일까.

 

 

 

 

 

어째서 자신은 그렇게 바깥을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일까.

 

전부터 연이 그것에 불편해하는 기색은 알고 있었으면서.

 

 

 

무엇이든 연이 꺼려하는 것이라면 양보했던 전과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외출에 관해서는 인 역시 강박 수준으로 쉬이 포기하기가 힘들었다.

 

 

 

자신조차 그런 고집 부리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연의 슬픈 표정을 마주하고도 그 꿈에 매달리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굳이 밖에 나올 필요도 없는데 ... 도대체 왜?

 

 

 

 

이상했다.

 

 

 

 

 

 

 

어째서 그는 꿈의 장소가 바로 저 창 너머 수평선의 그 곳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걸까?

 

 어떻게 저 바다가 꿈 속의 집이 있는 바로 그 바닷가라는 것을 알고 있나?

 

'왜?'

 



 

 

무언가 불쾌했다.

 

마치 자신이 잊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은 것이.

 

무엇인가 분명 떠오를 듯 하면서도 아무런 실마리가 없는 것이.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벌레가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 느낌이었다.

 

 

 

 

 

위화감.

 

위화감이 들었다.

 

 

이상했다.

 

연과 함께 지내기를 반 년이 흘렀다.

 

 

 

그 동안 인은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 동안 인은 많은 것을 관찰했다.

 

 

 

 

 

사람은 졸리면 잔다.

 

사람은 더우면 땀을 흘린다.

 

사람은 배고프면 먹는다.

 

사람은 배변을 봐야한다.

 

사람은 숨을 쉬어야 한다.

 

 

 

 

 

사람은...사람은...사람은...

 

 

 

 

 

빠------앙!

 

 

 

 

 

그런데 그는.

 

 

 

그는 잠을 자되, 졸리진 않았다.

 

그는 더워도, 땀이 흐르지 않았다.

 

그는 밥을 먹어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는 변의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숨을 쉬되,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빠-------앙!

 

 

 

 

 

 

 

생각에 잠겨있던 그가 화들짝 놀라 발걸음을 멈춘 곳 바로 위에 호버-하이웨이가 있었다.

 

시속 수백킬로미터는 가뿐히 넘나드는 호버카들이 특유의 굉음을 내며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그런 호버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인의 시야에 무엇인가 들어왔다.

 

 

로봇 팔을 조종하는 안드로이드 두 기가 호버-하이웨이를 이리저리 손보고 있었다.

 

 

 

 

 

 

 

- 호버카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호버-하이웨이는 그 어떤 사고 없이 세심한 정비가 필요한 설비였다. 

 

- 호버카들의 속력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호버-하이웨이를 정비하는 일은 인간 대신 안드로이드들의 몫이 되었다.

 

 

 

 

 

 

 

 

 

 

 

빠----------앙!

 

 

 

 

 

문득,

 

인의 뇌리를 번개같이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 호버-하이웨이의 열기를 감당할 수 있고,

 

 

 

 

 

 

 

 

 

 

 

 

 

 

 

 

 

연과 지내게 된 지 반 년.

 

 

 

반 년 동안 인은 많은 것을 관찰했다.

 

 

 

 

 

 

 

 

 

 

 

 

 

 

 

연은 졸리면 잔다.

 

연은 더우면 땀을 흘린다.

 

 

연은 배고프면 먹는다.

  

 

연은 화장실을 간다.

 

 

연은 숨을 쉬어야 한다.

 

 

 

연은 항상 서랍에서 무언갈 보고 미소지었었다.

 

 

 

 

 

- 섬세한 움직임이 가능하며,

 

 

 

 

 

 

 

 

 

빠-------앙!

 

 

 

 

 

 

인은 잠을 자되, 졸리진 않았다.

 

 

 

인은 더워도, 땀이 흐르지 않았다.

 

 

 

인은 밥을 먹어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인은 변의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인은 숨을 쉬되,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언젠가 몰래 그 서랍을 들여다 봤을 때

 

- 인간처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빠-------앙!

 

 

 

 

 

 보았던 사진 한 장

 

그런 자신과 같은 부류를

 

 

 

 

 

 

 

 

 

 

 

 

 

 

 

 

 

 

 

 

 

 

 

 

 

 

 

 

 

 

 

 

 

 

 

 

 

 

 

 

 

 

 

 

 

 

 

 

 

 

 

 

 

빠-------앙!

 

인은 분명, 하나 알고 있었다.

 

 

 

 

 

 

 

 

 

 

 

 

 

 

 

 

 

 

 

 

 

 

 

 

 

 

 

 

 

 

 

 

 

 

 

 

 

 

 

 

 

 

 

 

 

 

 

 

 

 

 

 

 

 

 

 

 

 

 

 

 

 

 

 

 

 

 

 

 

 

 

 

 

 

 

 

 

 

 

 

 

 

 

 

 

 

 

 

 

 

 

"흐응 흥~"

 

 

 

연은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철을 덮었다.

 

보통은 다들 가상 터치스크린을 쓰지만, 그녀는 그냥 서류를 썼다.

 

 

 

나름의 차별화랄지.

 

혹은 삭막한 도시 속 감성 한 점이랄지.

 

 

 

어차피 서류철에 내장된 디지털 스캐너가 알아서 데이터화 시켜줄 터였다.

 

 

 

 

 

최근 들어 사업도 잘 풀리고,

 

일상은 - 인이 돌아온 후로 - 언제나 행복하고.

 

계속 지금만 같았으면.

 

 

 

그녀와 지낸 지 곧 1년을 앞둔 지금, 인 또한 건강을 많이 회복한 것 같아 연은 더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의 산책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은 여전히 불안하지만...

 

 

 

그녀가 퇴근 준비를 하는 때마침 인이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온다.

 

 이제 함께 집에 갈 시간이었다.

 

 

 

 

 

 

"...?"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사무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냥 조금 늦는 거겠거니 하며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인은 항상 연에게 최선을 다 해왔다.


그는 언제나 그녀와의 약속에 늦는 법이 없었다.





연은 곧바로 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 중 -이라는 무미건조한 문구만이 반복적으로 점멸할 뿐이었다.




"제발... 제발 받아줘, 인...!"



잘근잘근 입술을 씹는 그녀의 눈에 소파 위에 놓여있는 인의 책이 들어왔다.


최근 들어 인은 저 책만 몇 번이고 돌려 읽었던 것 같다.




  [ 이백 살을 맞은 사나이 ]










불현듯 연은 자신의 책상 아래를 더듬었다.


"...하."


입술을 빼뚜름하니 비튼 그녀가 책상의 서랍 중 하나를 열었다. 


서랍 안에는 흑백 사진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 사진 속에서 백발의 소년과 긴 머리의 소녀가 만면에 웃음을 띄운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 사진을 바라보던 연은 아무 응답 없는 신호를 끊고, 다른 곳으로 전화를 돌린다.


인과는 다르게 바로 전화를 받지만, 아무런 말이 없다.









연이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며 입을 열었다.































"놈이 알아챘어. 산 채로 잡아와."


























커다란 건물 입구에서 검은색 호버카들이 우루루 쏟아져나왔다.



그 중에는 가끔 사설 경호원이라기에는 과도한 중무장을 한 사내들도 있었다.






저들도 정말 사람일까.


혹은 자신과 같은 안드로이드일까.




나와 같은 안드로이드라...


'나'는 대체 뭐지?


나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인 척 하는 무언가인가.




복잡해지는 생각을 치우고, 우선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인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옷깃을 여미며 발걸음을 돌리던 그 순간 


삐-------------!

돌연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인의 귓가를 때리고, 모든 전광판과 네온사인이 멈추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곧추 세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당황하며 웅성이고 상황 파악을 위해 사방을 둘러본다.







곧이어 스크린이란 스크린 전부에 어떤 그림이 떴다.



거리의 모든 곳에 인의 얼굴이 도배된다.


[ 특별 현상 수배 ]


- OCP 고위험군 실험체

- 접근 금지

- 적극적인 신고 요망

- 포상금 : 최소 1,000,000,000 $ 이상




"이런 제기랄! 10억 달러라고?" "저 정도 포상금이면 도대체..."


"안드로이드가 탈출했나? 꿈도 못 꾸겠네." 


"신고라도 하면 뭐라도 떨어지지 않겠어요?" "백발이라면 흔하진 않은데."

 


...혹자가 말하기를 아예 도시 하나가 그녀 손 아래 있다고도 했다.

 



"...이봐, 자네..."


웅성이던 사람들 중 한 중년 신사가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던 인의 어깨를 잡아채었다.



"어?" 


중년 신사의 얼굴이 굳었다가 이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걸 본 인이 정신을 차리고 그의 팔을 쳐내지만,


그것이 오히려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흰 머리..." "저거 아냐?" "...어? 어?!"











"..잡아!!"


누군가의 고함을 기점으로, 인이 땅을 박차는 동시에 몇몇 용감한 젊은이들이 그에게 덤빈다.



"크악!"


"이 새끼!"


인의 옷깃을 잡으려던 한 청년의 얼굴에 인의 주먹이 꽂히고, 그의 친구인 듯한 대머리가 분노하며 인에게 달려들었다.


인은 능숙하게 대머리의 태클을 피하고 대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어억!"




인은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격투술 따위를 일절 배운 적이 없었다.


책에서조차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십수 년동안 단련한 종합 격투기 선수와도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그 선수의 움직임이 그의 신체에 프로그래밍이라도 된 듯이.






"꺄악!" 


"엡실론에서 알파에게 알린다! 타깃을 발견했다! 포획 시도하겠다!"



혼돈 속에서 검은 군장의 무리가 인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OCP특임대 라고 적힌 대형 호버-버스 두 대가 멈춰서고 있었다.



"개 자식이!...어억!"


뒤로 나동그라졌던 대머리가 다시 일어나 그에게 달려들었지만


인은 그를 그대로 흘려내어 인에게 달려오던 특임대 무리에게 던져버렸다.


대머리가 특임대와 뒤엉켜 일대 혼란이 벌어진 틈을 타 인은 재빨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현상 수배자다!" "잡아!" "꺄악!" "비켜!"


인이 후드를 뒤집어쓰고 달리는 와중에도 사방 곳곳에서 그를 잡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개중에 눈에서 붉은 빛을 내는 안드로이드들은 손속을 두지 않는 이상 떨쳐내기도 힘들었다.



- 삐비빅!


경고음을 내며 안드로이드 하나가 튀어나와 심상치 않은 완력으로 인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인의 번개같은 움직임에 바깥으로 메다꽂힌 안드로이드가 향한 방향엔 불운하게도 호버-하이웨이가 있었고.


몇 차례 굉음과 섬광 끝에 기계 손목만이 다시 도보로 튕겨나왔다.



"미친...." "주님 맙소사."




"저기 있다!" 


"여기는 감마! 지원 요청한다!"


겁에 질린 군중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특임대가 다가왔고, 인은 행인들을 밀쳐내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머뭇거릴 새가 없었다.


온 도시가 그를 잡아 죽이려고 들었다.


말벌집 한가운데 쳐들어가 난리를 쳐도 이보다는 덜할 것이었다.


몇 사람이 다시금 길가에 나동그라지고, 몇 대의 안드로이드들이 박살이 나는 동안,


그의 뒤로 목소리가 들릴 만큼 특임대가 가까이 따라붙었음을 인은 직감했다.





불현듯-.


인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파지직-!


그의 머리 위를 스쳐지나가는 스턴스틱의 소리가 생생했다.




퍼억- 

"억!" 


인이 허리를 숙이며 내뻗은 뒷발차기에 얻어맞은 특임대원이 넘어지고, 다른 특임대원이 그를 뛰어넘어 스턴스틱을 휘둘렀다.


앞으로 구르며 간신히 피한 인의 눈 앞에 또 다른 특임대 팀이 달려오고 있었다.



"순순히 투항해! 도망갈 길은 없다!"


팀의 리더인 듯한 특임대원 하나가 인에게 소리쳤다.


사방을 둘러보지만 특임대원 말대로 길은 막혔고, 갈 곳이 없었다.


눈을 붉게 빛내는 안드로이드들.


벌써 인의 앞 뒤를 꽉 메운 특임대원들과 또다른 군용 안드로이드들.


이곳을 바라보는 수많은 행인들과 자신의 얼굴이 떠 있는 전광판들.


숨을 몰아쉬는 인의 앞으로 방패와 스턴스틱을 치켜든 특임대원들이 점점 다가왔다.
















사랑해, 인.







이곳에서 이렇게 끝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가 왜 만들어졌는지. 왜 이런 꿈을 꾸는지.


이 분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무언가를 눈여겨보던 인의 주먹이 꽉 쥐어진다.







"크악!"


그를 무력화시키려던 특임대원을 들이받은 인이 옆으로 재빠르게 몸을 굴렸다.


뒤에서 날아들어온 스턴스틱이 허공을 갈랐다.


인은 바닥에 떨어진 스턴스틱 하나를 집어들고 그대로 달려가 -


특임대원들이 뒤쫓고, 인의 행동에 불길함을 느낀 특임대장이 외친다.


"빌어먹을, 뭐하는 거야!"


- 난간 틈새에 스턴스틱을 냅다 꽂아넣었고


파지직-!


콰쾅!!



- 일순 굉음과 섬광, 커다란 스파크가 일었다.




난간의 에너지 스크린이 다운되어 형체를 감추었다.


화려한 전기 폭발에 모두들 넋을 놓은 틈을 타 인은 난간을 오른다.



"젠장! 놈을 잡아!"


인을 발견한 특임대장이 고함치지만, 인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뒤에서 날아오는 욕지거리는 순식간에 대기의 파열음에 묻힌다.







빛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수많은 건물의 창들과 호버-웨이들







스쳐지나가는 트램 속 놀란 사람들의 얼굴들











인은










웃기게도














자신이 생각해도
















웃길 정도로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자유로웠다














몇 초 사이 어두워지는 









조명들과 수많은 파이프, 











그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뭔지 모를 증기.













몇 초 사이






빠르게 다가오는




새까만



심연의 바닥
















































그것은 어느 때.

 

 

어느 때에 갑자기.

 

마치 심연 속에 잠겨있던 것을 확 잡아채는 손아귀처럼.

 








사랑해, 인!


나랑 결혼해줄래?












"크허억-! 컥!"



번쩍 눈이 뜨이고, 인은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음과는 다르게, 이곳은 어두컴컴했다.


한 가지 여전한 게 있다면 모든 게 처음 보는 것이라는 것 뿐.


냄새는 지독했고, 바닥은 더러웠다. 


알 수 없는 수많은 파이프들과 전선들이 건물과 외벽 이곳저곳을 타고 늘어져 있었다.


전깃줄에서는 이따금 스파크가 일어났다.


그가 여태 보던 세계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일어났나? 신기하군."


낮게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에 인이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좁은 골목에 넝마를 걸친 사내 하나가 드럼통 안에 피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했지만, 형형한 눈빛은 그 사내가 만만한 인물은 아닒을 짐작케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나이'라니. 나도 처음엔 믿지 못했지. 살아있을 줄은 더더욱."


껄껄 웃는 그의 말에 그제서야 인은 자신의 몸을 되돌아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자네는 누구지? '윗세계'의 사람인가? 아니. 아니지. 사람이라면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테니 . 그럼 역시 안드로이드인가. '윗세계'의 물건은 남다른가 보군."



어느 새 자문자답을 하는 그에게 인이 입을 열었다.



"저는...."


"음..?"


"...인... 인 이라고 합니다."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프흐...파하하하하하!"



별안간 파안대소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지. 네놈은 '인'이 아니야."


숨이 넘어가도록 웃으며 끌끌대던 사내가 갑자기 허리춤에서 무언갈 꺼내들었다.


인은 그것이 '권총'이라고 불리는 물건임을 어렵잖게 알아챘다.


특임대원들이 차고있던 것과는 다르지만 그것은 분명 권총이었다.



무언가 항변하려는 인의 말을 가로막고, 사내가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넌' 누구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뒷골목 사방 곳곳에서 낯선 이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손에는 인의 눈에도 익숙한 총과 스턴스틱 뿐만 아니라 갖가지 흉기들이 들려있었다.







제압할 수 있을까?


손을 움찔거리는 인을 향해, 사내가 입을 열었다.


"허튼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이곳 밑바닥에는 눈이 많거든."



특임대와는 다르게, 저들은 여차하면 정말 나를 죽일 생각이다.


소총과 산탄총을 등 뒤와 어깨에 멘 게 아니라 두 손에 들고 있다. 


겨누고 있다.






땀을 흘리지 않는데도, 땀이 흐르는 것만 같은 기분.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인의 가슴을 꾸욱 조였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너'는 누구지?"



사내의 형형한 눈빛에 인은 마치 발가벗겨진 채 모든 것을 읽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나'는 누구지?


'나'는 정말로 '인'이 맞는 건가??


'내'가 살아온 기억이 맞는 걸까?





"...나는....!"





'나'란 도대체 뭐지?


'나'는 뭘 위해 존재하는 거지?


그저 '인'이었던 누군가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건가?


'인'의 기억을 받고 '인'의 행세를 하는 안드로이드가, '나'인 건가?


고작 그딴 대체품에 불과한 건가?






"나는..!"



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감과 동시에,


사내도 권총의 해머를 코킹시켰다.





영겁같은 찰나가 지나가는 순간.


인의 입이 열렸다.



"...잘...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인지..."












숨소리조차 나지 않던 몇 분이 흐른 끝에 사내가 총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폭발할 것 같던 분위기가 한 꺼풀 풀리는 느낌이었다.



땀을 비 오듯 쏟다 한숨을 푹 내쉰 모히칸 청년도.


풍선껌을 쫙쫙 씹던 불량스런 외모의 여자도.


몽둥이를 만지작거리던 근육질 거한도.




"따라오게."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은 계속해서 정신줄을 붙잡아야만 했다.


사내를 따라 빠져나온 뒷골목 너머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더 붐비고, 시끄럽고, 화려했고, 정신없었다.


몇 번이고 사람에 치이고, 사내를 놓칠 뻔한 후에야 인은 가까스로 그의 뒤에 따라붙을 수 있었다.




수많은 골목을 돌고 돌던 사내는 이윽고 한 건물 지하로 내려가 문을 두들겼다.


철문에 달린 주먹만한 창 하나가 드륵 열리더니 허옇게 센 눈동자 두 개가 그들을 훑는다.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사내의 말에 조금 뒤 덜커덩 소리가 나고, 철문이 열렸다.





통로는 좁았고, 조명은 희미했으나 사내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통로의 끝에는 거구의 남성이 철창살이 얼기설기 얽힌 어떤 문 앞에 서 있었다.



굵고 낮은 그의 음성이 통로에 울린다.


"어디로 가십니까?"


"최하층."


"'아버지'를 뵈러 가시는군요. 좋은 시간 되십시오."


거구의 남성이 옆으로 비키고 창살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사내와 인이 안에 들어서자 다시 철창살이 모이고, 더불어 위아래로도 다른 철창살 문이 그 입을 닫았다.


쿠웅- 하며 기계가 가동하는 소리와 동시에 바닥이 아래로 꺼지는 느낌이 들어서야 인은 이것이 승강기임을 알았다.


이제껏 승강기라고는 연의 집무실에서 타던 최신식 엘리베이터밖에 모르던 인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것이었다.



"뵈기엔 이래도 잘 굴러."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퉁명스런 사내의 말에 인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띵 소리와 함께 승강기가 다시 입을 벌렸다.


다시금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 사내를 따라 인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번쩍이는 네온 사인과 붐비던 인파들, 시끄러운 소리들이 가득하던 좀 전의 거리를 지나온 게 마치 거짓말이라는 듯.


지금 그들이 걷는 회랑은 은은한 조명과 담담하지만 섬세한 종교적 부각들이 어우러져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와 더불어 둘만의 발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인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회랑의 끝.


거대한 목재 문 두 짝을 사내가 밀어 열었다.


문 너머로는 - 인이 여태껏 본 광경을 통틀어 -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당이 그 자태를 내보이고 있었다.


성당의 제단 앞에서는 펑퍼짐한 로브를 두른 어느 노인이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사내가 노인에게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데려 왔습니다."


노인은 그의 말에 아랑곳 않는 듯 다른 초에 촛불을 붙였다.


사내도 노인의 행동에 아랑곳않고 무릎을 꿇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초에 불이 붙고, 짧게 기도문을 중얼거린 노인이 그 사이 어쩔 줄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는 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왔느냐."


노인의 목소리는 다 쉰 듯 쉭쉭거리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뭔지 모를 따뜻함이 녹아있었다.




노인이 끌끌 웃었다.


"....기어이... 설령 그 놈이 진짜로 살아 돌아온다 한들 구별할 자신이 없을 정도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던 노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인에게 따라오라 손짓하고는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그에게 고갯짓을 하고 나서야 인은 부랴부랴 노인의 뒤로 따라붙었다.




 "해야 할 이야기도 많지만, 보여줄 것도 많구나. 이리 들어오거라."


노인이 안내한 곳은, 아담한 방이었다.


사람이 지낸 기색은 오래되었음에도 지속적으로 관리했는지 깨끗했다.


곰돌이가 그려진 분홍색 벽지에는 이곳저곳에 낙서가 그려져 있다.


조그만 이층 침대는 기껏해야 열 살배기나 누울 크기였고, 이불에서는 아이들 특유의 분내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묻어있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종이책들은 세월 탓에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방 한 켠에는 이 방에서 지낸 아이들의 것인지 장난감들이 정리되어 있다.






"...엇."


인은 그제서야 자신의 눈가에 물방울 하나가 맺혀있음을 눈치챘다.




이 방.


어딘지 모르게 굉장히 그리웠던 이 방.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치는 방.










놀자, 인!


나 잡아봐라!


바보야!


사랑해, 인!


결혼해줄래?












노인은 인이 심호흡하며 감정을 수습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인이 이 뜬금없는 감정의 요동에 대해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이 방은 뭔가요?"


"이 방은..."



노인은 인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고는, 이어 입을 열었다.



















"이 방은. '인'이 어릴 때 자랐던 방이네."












무덤덤한 인의 모습에 노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나 보군."


"...짐작하고 있었으니까요."


"따라 오게. 보여줄 것이 아직 많이 남았네."











***





노인이 들고 온 것은 오래된 사진첩이었다.


가죽 표지는 거의 다 해져서 너덜너덜했지만, 소중한 것이기에 노인의 손길은 섬세했다.




사진첩은 귀여운 백발의 소년과 긴 머리의 아름다운 소녀의 빛바랜 추억과 시간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 둘은 서로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먹고, 자고, 기대고 있었다.


아이답게 가벼운 입맞춤하는 사진도 꽤나 많이 나왔다.




백발의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긴 머리 소녀 또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른 법이었다.



"...이 여자아이는..."


"자네가 아는 그 아이가 맞을 걸세."


노인은 쓸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자네도 봤겠지만. '윗세계'와 같이 이 아래 밑바닥에도 사람이 사는 법이네."


"다만 조금 더 삶에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것 뿐이지."


"그 아귀다툼 속에 내버려진 불쌍한 아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네."


 비록 지금은 다 늙어 눈을 감는 일만 기다리는 신세지만 젊을 땐 한 가닥 했었다며, 세월을 이기지 못한 호랑이가 웃었다.



"좋게 살았다고는 못하겠어. 그래도 그 둘은 나름 잘 키웠다고 자신하네."


"둘은 사이좋게 잘 지내주었네. 음. 잘 지내주었지. 싸우는 일 없이 말일세."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될 줄이야... -.




노인은 회한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인'이 열 아홉, '연'이 열 여덟이 되는 해.


어렸던 두 아기 새가 이제 둥지를 떠나 날갯짓을 준비하던 때.



앙심을 품었던 라이벌 갱단의 짓이었는지, 혹은 사고였는지.


그들이 지내던 곳에 원인 불명의 커다란 화재가 났고


'연'은 살아남았지만 '인'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고 했다.





"그 날 이후로, 그 아이는 바뀌어버렸네. 아주 바뀌어버렸지. 몸도, 마음도."


일주일 내내 넋을 잃고 있던 '연'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매장을 앞둔, 까맣게 타버린 '인'의 시신과 함께.



"가끔씩 우리를 찾아오곤 했지만. 하루하루 그 아이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 날이 갈 수록 아예 딴사람이 되어 돌아왔네."


"어느 날 들은 소식으론 이제 우리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곳에 올랐다더군."




그러길 몇 년 후.


다시금 그녀가 이곳을 찾아왔다고 했다.



"인"과 함께.





"처음 봤을 땐 자네처럼 믿을 수가 없었네. 다들 눈을 의심했지. 마치 그 녀석이 살아 돌아온 것만 같더군."


"그저 숨만 쉬고 있지 않을 뿐, 언뜻 보면 그냥 자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어. 나조차도 보다가 설마 싶었네"





"녀석은 이제 단 하나만 준비하면 된다고 하더군, 끌끌."



"...그것이 무엇입니까."









인의 질문에, 노인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심장. 누군가의 살아있는.. 심장."



노인은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다시 담담히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반대했네. 그걸 위해 무고한 사람의 심장을 우리 손으로 뽑는 것도 꺼림칙했지만.."


"이미 십여 년 전에 보내주었어야 할 아이를 다시 불러오다니. 아니, 그 아이라고 할 수도 없지."


" 그건 그냥 그 아이를 흉내낸 무언가에 불과할 뿐이야."


- 자넬 일컫는 건 아니었네.




사과하는 노인에게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인이 입을 열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걸을 어딘가로 숨기고, 없애버렸네. 그리고 이만 놓아주라 했지. 그건 그냥 그 녀석을 욕보이는 것 뿐이라고."


"그랬더니 그 아이가 어떻게 나온 줄 아는가?"



노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뭘 했습니까...?"













"...웃었네..."


"미친 것마냥 웃었어.."


"우리들도 용납시키지 못할 완성도라면, 없어지는 게 맞다고."


"자신이 바란 '인'이 아닌 마네킹에 불과한 거라고."


"그건....그건 더 이상 광기라고 부를만한 것도 아니었네."





그러길 수 년간 몇 번 더 반복되고, 다시 십여년 소식이 끊긴 후.


나타난 게.




"...저군요."


"그렇지."

- 하늘에서 누군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뭔지 모를 예감이 들었네.

그래서 사람을 보냈고.




문득, 인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미약하지만.


아주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박동 하나가


그의 손에 울림을 전해주고 있었다.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인이 끓어오르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는 사이, 그를 데려왔던 사내가 나타났다.


"아버지."


"생각보다 훨씬 부지런하구먼. 여전하기는, 끌끌."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급히 모습을 감추고, 노인은 다시 인을 되돌아봤다.


"자네는 어쩔텐가."


"저는..."





생각에 잠긴 인에게 노인이 두 손가락을 펼쳤다.





"두 가지 길이 있네."


"하나는 그냥 이대로 도시를 떠나는 것. 나갈 길은 진즉 마련해뒀네. 그 길로 영영 떠나게."


"..."


"그리고 '자네'만의 삶을 살아. 그 녀석의 것도,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 '자네'의 삶을."








침묵하는 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노인은


다시 입을 연다.





















"붉은 지붕의 집."





번쩍 뜨이는 눈. 홱 돌아오는 시선.



노인이 끌끌 웃었다.


"녀석이 언젠가 말하길 서쪽의 바닷가에서 살다가 왔다고 하더군."


"그 곳을 찾아가보게."


"그 곳에서 자네가 진정 누구인지 찾게."


"그것이 이 늙은이가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선물이네."








































성당의 문이 다시 한 번 활짝 열리고 또 다른 방문객을 맞이한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손님이 오다니. 쓸쓸한 늙은이를 굽어살피신 주의 축복이라."


노인이 끌끌 웃었다.








"허튼 수작 집어치워, 영감. 어딨어."


검은 정장 차림의 연이 노인에게 쏘아붙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연의 눈빛을 마주하고도 노인은 마냥 웃을 따름이다.


"아직도 사로잡혀 있느냐. 이만 보내주라 말한 지가 애저녁이거늘."


"어디 있냐고."


"끌끌끌..."




노인의 어깨 너머 제단 뒷편.


백색 머리칼의 누군가가 황급히 성당 뒷편 통로로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챙-!


노인의 왼 소매에서 지팡이가 튀어나와 그녀의 발 앞을 그었다.


한 발짝만 더 내딛었더라면 가차 없이 잘렸을 것이다.



"...거기까지야, 영감. 정을 봐서 이번만은 넘어가주겠어."



태양처럼 타오르던 눈빛 대신.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혹한이 자리한다.


넘치다 못해 소멸한 것 같은 증오의 무감정을 앞에 두고도, 노인은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었다.


연은 노인에게서 등을 돌리며 귓가에 손을 대었다.


"전부 서쪽으로 보 -" 

- 카앙!








"....무슨 짓이야, 영감..?"


연의 귀에서 작은 전자기기가 바닥에 떨어져 몇 조각으로 산화한다.


 노인은 다시금 끌끌 웃었다.



"이만 보내 주라니까. 아비 말이 말 같지 않느냐."


"...."



노인의 비어있던 오른손에는 길다란 장도가 예기를 뽐내며 하얀 검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의 손에도 같은 생김새의, 묵빛 장도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못난 딸이로다, 끌끌..."




저 멀리.


많은 이들의 고함소리와 욕설이 고요한 회랑을 타고 성당에 울려퍼진다.







신의 안식을 모독하는 핏빛 찬양가를 타고 


악마의 검은 날개가 천사를 덮쳐왔다.
















"개새끼가!"


고함과 함께 스턴스틱이 날아들었다.


전기 충격에 특임대원이 온 몸을 부르르 떨고 무력화된다.



뻑-! 

"욱!"


안드로이드에게 배를 얻어맞은 여자의 다리가 풀리고 구토를 쏟았다.


안드로이드는 눈 먼 산탄에 산산조각이 났다.


산탄총을 갈기던 남자를 특임대원 둘이 자빠뜨리고 난타하기 시작했다.


사물이 날아다니고 사람도 날아다니는 난리통 속


방금 안드로이드 하나를 반쪽내고 온 인의 앞을 모히칸 청년이 안내했다.



"차고는 저 쪽에 있수다! 차 키 받으쇼!"



차 키를 건넨 모히칸 청년이 인에게 달려들던 특임대원을 붙잡아 뒹굴고 소리쳤다.



"이 씨발..! - 빨리 가쇼!"



"저기 있다!" "잡아!"


"막아-!!" "못 지나간다, 씨발새끼들아!"






"크아악!" "컥!"


간신히 호버카에 올라탄 인의 뒤로 비명이 연달아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인의 눈에 불량배들을 사정없이 베어넘기는 연이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섬뜩한 묵빛 검에는 벌써 진득한 피가 잔뜩 묻어 흐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연의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슈우웅-.



호버카에 시동이 걸리자, 연이 뜀박질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서너 명이 더 달려들지만 어김없이 핏물이 튀었다.


인은 서둘러 엑셀 페달을 밟는다.



"이런 미친..!"


호버카에 점차 속력이 붙는 와중에도 따라붙는 연의 모습에 인이 욕지거릴 내뱉었다.




연이 돌연 팔을 뒤로 주욱 뻗더니.


일순 검은 빛 섬광이 호버카를 꿰뚫었다.









나무에 들이박고 뒤집힌 호버카로 터벅터벅 걸어간 연이 쪼그려 앉았다.


백색 머리칼의 남성이 검은 날에 가슴을 관통당한 채 머리를 핸들에 박고 있었다.



연이 호버카를 걷어찬다.


굉음과 함께 호버카가 그대로 붕 떴다가 다시 몸을 뒤집으며 착지했다.


"빌어처먹을 너구리 영감..."


연이 다시 제 검을 뽑아 회수하며 뇌까렸다.


연의 믿을 수 없는 각력을 체험했지만 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흰 머리의 남자. 







그는 인이 아니었다.












***


연이 유인책에 당해 한창 차고지에서 싸우고 있을 즈음.


인은 어느 해변가에 호버카를 멈춰세웠다.


길도 모르고, 처음 보는 지역이지만.


왠지 모르게 낯익은 것 같기도 했다.





모르겠다.


자신의 발이 마치 자아라도 갖고 있는 듯이 주인도 모르는 곳을 향해 스스로 안내하는 묘한 느낌.


근거는 없지만 확신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이 곳이 맞다는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머릿 속에 살아있는 '인'의 기억 덕분일까.


기묘하다.



어딘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하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인'의 기억을 갖고 있지만 '인'이 아닌 '나'는 무엇일까.


'인'의 모든 걸 마주하고 나면 답이 보이는 걸까.


결론이 나는 것일까.





사실 그걸 보고 나서도 별다른 게 없다면...


그럼 왜 이곳에 왔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이 곳을 왔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도대체 왤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복잡해지는 머릿속.


그것 모두를 곱씹으면서, 인은 계속해서 걸었다.


무미건조하게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화창한 햇살만이 그의 곁에서 함께 거닐었다.





"..아."


어느 새, 그의 눈 앞에 집 한 채가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다 무너지고. 


뼈대가 훤히 드러나고.


담쟁이 넝쿨에 뒤덮이고


흉한 모습이었지만.





"붉은 지붕..."


그 집이었다.














끼이익-.


끼이익-.




문을 열고 들어오자, 어둡고 퀴퀴한 실내가 반겨준다.


군데군데 뚫린 구멍으로 햇빛이 간신히 들어와 밝히는, 거실이었을 이 곳은 분명 아늑했으리라.




썩고 해진 가죽과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긴 소파가 꿈에서 본 위치 그대로 놓여있다.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인은 조심스레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목재들은 군데군데 탄 자국이 남아있었다.


꿈에서 '엄마'가 웃으며 냄비를 들고 식사를 차려주던 부엌은.


그 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잔해를 헤치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문이 다 타 없어지거나 겨우 매달린 방 셋이 나타났다.


이 옆의 방은... 그 꿈 속 '엄마'와 '아빠'가 있던 안 방..


마주본 방은 창고...




그리고 맨 안쪽 방.


그 곳에 들어서자.




"...어."


전부 다 타버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 분홍색 바탕에 곰돌이 무늬가 있다.


이층 침대였을 어떤 목재 뼈대는 타다 남은 채 벌레가 먹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불쏘시개와 새까맣게 그을린 겉표지들은 이전엔 종이책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방 바닥 이곳저곳에 타다 남은 장난감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불편한 기시감...


더더욱 거슬리는 어떤 위화감...







와드득-.


방에 들어서던 인의 발에 무엇인가 밟힌다.


발 밑에는 비록 그을렸지만 형체가 온전한 액자 하나가 뒤집혀있다.




그것을 집어들어 뒤집자, 그 안에는 빛은 바랬으되 멀쩡한 사진 하나가 꽂혀있었다.





백발 머리 소년.


긴 머리 소녀.


그리고 동년배의 다른 아이 한 명.



비록 얼굴 부분은 유리가 그을려 알아볼 수 없지만,


'연'보다는 짧지만,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여자아이임을 짐작케 했다.






"윽...! 흐극...! 흐으...흐으...! 허어...! 허으윽..!"


그것을 보자마자,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동시에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감정이 몰려와 북받치기 시작했다.



목이 메었다.


"어흑..커흐...크흐..."


영문도 모른 채 기어이 터지는 울음과 눈물을 간신히 삼키며 닦아낸 뒤,


얼굴이라도 볼 요량으로 인은 액자를 비틀어 열고 사진을 꺼냈다.




그 여자아이의 얼굴 부분은 찢겨있었다.


비비적거리며 눈물을 닦던 인의 눈에 사진 한 켠 작은 메모가 들어왔다.



연, 인,


"진...?



"

누군가 서툴게 직직 그어버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나마 보이는 획을 따라 긋자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얼굴이 없는 이 여자아이의 이름일 것이다.


다시금 두통이 엄습했다.







붉은 지붕 아래 집.


'엄마'...'아빠'...


바닷가에서 연과 뛰놀다가...



멀리서 호버 엔진소리들이 멈춘다.




사랑해, 인...


나랑 결혼해줄래..?




누군가 거침없이 잔해를 헤치고 들어온다.









그것은






"숨바꼭질은 끝났어. 얌전히 돌아와."







"....나는...아니, '나'는 대체 무엇인가요..?"




나지막이 내뱉는 인의 말에 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는 인이야."


"그 사람의 기억을 가졌을 뿐이잖아요.."


"그 사람의 기억을 갖고, 그 사람으로써 살면. 그 사람이 아니고 뭔데?"


"그 사람과 완전히 다른 누군가가, 그 사람과 똑같이 산다고 해서 동일 인물이 될 수 있나요?"


"그럼 다를 건 또 뭐야?"





연이 한 발짝 다가선다.


인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창조주에게, 자신의 존재를 묻는다.







"그건 만들어진 것 뿐이잖아요!"


" 그 사람으로써 살아가야 하는 '나'는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착각하지 마. 네가 뭐라 생각하던 상관없어. 너는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내가 그렇게 믿는 인이야."


"그럼 그냥 조용히 인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인의 울먹임에 연이 으르렁거렸다.




자신과 눈을 맞추던 그 아이는





인이 찬찬히 뒤를 돌아본다.


 아름다운 여인의 붉은 두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그럼 당신은요...?"











아주 예쁜 검은 눈의 갈색 머리 여자아이.



"진."











연.


..아니,


붉은 눈의 검은 머리 여자아이.


'진'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진이 멍하니 인을 바라본다.


"....인...?"




인이 그녀를 노려본다.


"연은...어떻게 했어.."



"...몰라.."



"무슨 짓을 한 거야!"


"모른다구...!"




인이 한 발짝 다가서자


진이 한 발짝 물러섰다.




"연 어딨어-!"


"오지마..!"



풀썩-.


다리가 풀렸는지 진이 주저앉았다.


인이 다가서며 윽박지른다.



"연은 어디갔어!!"


"읏...! 오...오지마!"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진이 울먹이며 소리질렀다.


"넌 아무것도 몰라-!!"



이내 진이 울음을 터뜨리지만, 인은 멈추지 않았다.




불에 타는 집


그곳에 두고 온




"당장 바른대로 말해!"


"그.. 그 얼굴로 소리지르지 마...."


"말 하란 말이야-!!"


"무..무서워... 하지 마...!"





점점 더 움츠려드는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멱살을 잡-


파지지직-!




"크학...!"


"..라는 건 거짓말."


"끄....으..."




인의 목에 꽂아넣은 스턴 건을 회수한 진이 악어의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그녀가 무릎을 꿇은 채 마비된 인의 이마에 손가락을 대고 밀자 근육에 신경 신호가 차단된 인은 그대로 나자빠지고 만다.


"기억이 돌아왔네?"


"그으....으..."



진이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으며 입을 연다.


눈과 신음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를 흘끗 내려다보며 담담히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는 해 줄게. 누워서 들어."








원래 이 집엔 마음씨 좋은 두 부부와 외동아들 인이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 나간 부부를 마중간 인의 앞에 부부의 손을 잡고 나타난 꾀죄죄한 두 여자아이.


부부는 이 둘을 인의 새로운 형제자매이니 서로 잘 지내라며 소개시켜 주었다.


처음에는 모든 걸 경계하던 진이었지만, 따뜻하고 자상한 두 부부와 아낌없이 제 것을 나눠주는 인에게 결국 마음을 열었다.


.

.

.


배려심 깊고 친절한 인의 모습에 진은 인간적인 호감이 차츰 다른 무언가로 변질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피는 이어지지 않았을지언정 남매끼리 그 감정은 금기시되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애초부터 자존심 셌던 진은 그딴 사실 인정하기 싫었기에.


그래서 그 마음을 숨겼다.






그러던 나날, 바다로 놀러나갔다가 밥 먹게 오라는 '엄마'의 말에 둘을 찾던 진은


평소보다 먼 해변가까지 와서야 연과 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랑해, 인..


나랑 커서 결혼해줄래?





차라리 듣지 않았다면.


차라리 모른 채 넘어갔다면.




마냥 해맑던 인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을 테고.


진도 놀란 마음에 조금 더 있다가 멋쩍게 나오는 둘을 불렀지만.




차라리 모르고 있었더라면.


연의 마음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연의 숨은 행각들이 하나하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갈 수록 도를 넘어가는 연의 애정 행각과 성적 어필, 그리고 독점욕과 견제.


해소되지 못한 채 갈수록 쌓이는 질투심과 왜 나는 안 되느냐는 억울함, 깎이는 자존심. 


그제서야 진은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고, 생각보다 자신의 욕망이 강하다는 걸 알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그의 옆은 연의 독차지였다.


차라리 듣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불을 질렀어."


"...뭐..?"





겨우 입을 움직이게 된 인의 반문에 돌연 진이 눈을 희번득하게 뜨며 소리지른다.




"왜냐면...왜냐면 전부 다 방해였으니까! 엄마도! 아빠도! 그 썅년도!"


"그래서 다들 자는 사이에 너만 꺼내고 전부 다 불질러버렸어."


"너무...너무 속이 시원하더라...?"


"왜 여태까지 이러지 않았을까?"


"왜 여태껏 참고만 있었을까?"


"이렇게..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쉽게 널 가지는 거였는데!"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는 인에게, 진이 쪼그려앉아 사이한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런데...한 가지 문제가 있었어.."


"네게 겨우 용기를 내서 고백했는데..."


"그런 날 네가 거부했어."


진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썅년에 비해서 내가 부족한 게 뭔데...!"


"대체 뭔데...!"


"널 갖기 위해 모든 걸 바쳤는데!"


"널 가지려고 모든 걸 무릅썼는데!"


"심지어...심지어 날 마치 벌레보는 눈으로 봤다고!"


-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혼자 멋대로 조사해놓고... 멋대로 죽고...





나지막이 중얼대기 시작하는 진에게 인이 질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너였어....네가 맞았어..! 이 미친 년이..."




인의 말에 진이 고개를 휙 들고는 그의 위에 올라타 그의 두 뺨을 붙잡았다.



"맞아! 나 미쳤어! 너한테 미쳤어! 널 사랑해, 인!"


"오..오지 마!"


"널 가져야겠어! 넌 내 거야. 내 거라고! 옛날부터 넌 내 거였어야 했어!"





질린 얼굴을 하던 인이 무언가를 떠올리곤 급박하게 소리질렀다.



"..그...그래도 그를 가질 수는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갸우뚱하는 진의 표정은, 진심으로 그게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이..'인'은 죽었어..! 난 그저 모조품에 불과할 뿐이야..! 껍데기라고... !"



'내가' 안드로이드인지 인간인지는 상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저 년에게 이 몸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




"아닌데?"






"...그게 무슨.."






"너는 너야, 인."


진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섬뜩한 미소를 짓는다.






"너는 모조가 아니야."


"네 심장도 네 거야, 인."


"모르겠어?"


"애초에 안드로이드 따윈 없었다는 거야."









"인. 너는 처음부터 너였어."









방화사건의 전말을 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은 불을 질렀다.




자신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며 손을 뻗는 진을 조소하며.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던 그 때처럼.


똑같이 불에 걸어들어가 죽었다.










다만 한 가지, 그의 실수가 있었다 한다면.


진을 한참 과소평가했다는 것.














반쯤 타다 남은 그를 기어이 꺼내온 그녀는 안드로이드 뼈대 위에 그의 신체를 이식하기 시작했다.



타다 남았으면 그거라도.


다 타고 없어졌으면 인공이든 대체 장기든 복원이든 상관없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이.


그렇게 해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살렸다.



그가 땀이 나지 않는 이유는 진피층이 다 타버렸기에 인공 피부로 대체했기 때문이오,


그가 숨이 차지 않는 이유는 폐와 순환계가 열기에 전부 상해 인공 장기로 대체했기 때문이었고,


그가 먹고 싸지 않는 이유는 그녀가 굳이 소화계 기능을 복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그걸 어떻게 믿어! 그것도 거짓말이-"




"인."


"진심으로-."


"- 감히 안드로이드 따위가, "


" 감정과 자아를 가질 수 있다 생각해?"




"...이..!"




"참! 네게 보여줄 것이 있어."




진이 그를 벌떡 들쳐업고 바깥으로 나왔다.






수많은 이들이 폐허를 둘러싸고 도열해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는.....! "













특임대원들.


대머리 남자.


모히칸 청년.


불량배 여자.


백발의 가발을 썼던, 미끼 역 남자.


덥수룩한 수염의, 그 사내.


그리고 '아버지'라 불렸던 노인마저도.



그에 더해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았는지 아닌지도 모를.


이름 모를 수천 수만 명이.


어쩌면 그 이상의 숫자가 모여 빼곡히 해변을 채우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아무말 없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있는 모습은 어딘지 소름끼치기까지 했다.





"...이게...무슨..."


말을 잃은 인을 바닥에 앉히고, 진이 그를 뒤에서 휘감듯 껴안았다.








"인사해, 인."


"우리 아들딸들이야."



"...뭐?"



인이 가까스로 손을 들어 노인을 가리켰다.



"당신이 왜 여기있어요..? 다...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말이 안 되잖아..!!"




가만히 인을 응시하던 노인이... 허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한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건데...!"




"아. 분명 우릴 길렀니 뭐니 하던 역할이었던가."


"예, 어머니. 과분하게도."






"인. 들었지? 사실 우리는 누가 기른 게 아니야."


"우리 스스로 큰 거지."


"네가 사건 조사를 어떻게 혼자서 해? 그 험한 뒷골목에서?"


"그렇게 착해빠진 네가 혼자서 가능했을 거라 생각해?"




"전부 내가 만든거야."


"'아랫세계'도. '밑바닥'도. '윗세계'도. 전부 다."




진의 커다란 가슴이 그의 뒷머리를 감싼다.


그녀의 고혹적인 손길이 계속해서 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우리 강아지.. 혼자 재밌는 걸 파헤치는 것 같길래 잠깐 내버려뒀더니."


"나랑 이야기도 안하고 제 멋대로 실망해서 제 멋대로 행동을 해버리고."


"멋대로 죽으려 들고. 괘씸하게."






연속으로 그를 덮치는 충격적인 사실에 인의 눈빛이 갈 곳을 잃는다.


진이 끈적한 손길로 그의 몸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처음에 네가 깨어나서 한 짓이 뭔 줄 알아?"


"또...또 자살을 시도하더라?"


"내가 어떻게 살렸는데, 괘씸하게."


"그런데 혹시 또 모르잖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정말 네가 콱 죽어버릴지."


"그래서 내가 한 가지 약속을 했어."


"네가 어떻게든 자해를 시도할 때마다, 아이를 갖기로."


"정신을 잃든, 어쩌든 상관 없었어. 어차피 네 몸의 순환계는 전부 인공이라 조정 가능했거든."


"마침 정소도 정자도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던 게 천운이었어."




"그러니까 인, 넌 이제 정말 무한정으로 발기가 유지되고 정자가 생성되는 생체 정자탱크라는 거지."



진이 킥킥 웃다가 제 아랫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여튼 그렇게 한 40명 쯤 낳으니까 나도 내 장기가 남아나질 않더라고."


"그래서 내 몸도 차차 바꿔가기 시작했어."


"마침 네가 반항할 때마다 힘에 벅차기도 했고."


"그래서 나도 너랑 같이, 바꿀 수 있는 건 싹 바꿨어."






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진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네 탓이잖아. 숨 쉬듯 자해를 해대니 나도 그만큼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구."



"미친....미친 년.... 미친 거야...!"



"맞아. 미쳐버렸어! 그 만큼 널 사랑해, 인!"


"아, 그리고 마지막에 네가 한 짓은 참고로 기억 삭제였어."


"한 100년 동안 잠금을 해버렸더라?"


"어떻게든 풀고 풀어서 6년으로 줄였어."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아...?


자그마치 6년..6년이야...


스쳐지나가는 듯한 그 때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그 동안 열심히 '화풀이'를 해댔지. 6년 동안 쉴 새 없이 배가 무거웠어."


"그래도 괜찮아! 익숙하니까!"



상식과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진실 앞에서


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를 간신히 내뱉는다.


도대체..




"하..하나만....하나만 알려줘..."




도대체 언제부터 이 짓을 했어야




"얼마든지."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도대체..언제부터..."







"음..."












진이 생긋 웃었다.


"기억 안 나."













그래.


처음부터 놀아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무얼 하든 


전부 그녀의 손바닥 위였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분간할 수 없다.


그녀가 말해준 내 과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분간할 길이 없다.


실제로 저 불탄 집이 내가 살던 집인지도 모른다.


애초에 내 이름이 실제로 '인'인지, 다른 것인지도.


그녀가 '진'인지, 누군지도.




그럼 나는...나는 도대체 뭐지?


이 현실은 현실이 맞는 건가?







생각이 뱅글뱅글 돌았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 지조차 모른다.


그 시작점마저, 그 기준마저 거짓일테니.






미궁(Labyrinth).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무한한 미궁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아, 하나 더 알려줄게."


"몸을 바꾸는 김에, 신경도 손 좀 봤어."


"그게 무슨 뜻이게?"



"...."



자포자기한 채 모든 정신을 놓아버린 인의 귓가에, 진이 속삭였다.




"성감대를 내 맘대로 만들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개인적으로"







어느 새 속옷을 벗어제낀 진이 그의 위에 올라타 한 마디를 덧붙인다.


"나는 아날이 좋더라."


인의 시야 위로.


새하얀 그녀의 엉덩이가 내려앉았다.









































 





































그것은 어느 날.

 

 

 

어느 날 어느 때에 갑자기.

 

마치 심연 속에 잠겨있던 것을 확 잡아채는 손아귀처럼.

 

그렇게 그는 깨어났다.

 

 

 

 

 

 

문득 떠지는 눈.

 

 

 

언제부터 이렇게 있었는지.

 

자신이 누구이며, 왜 여기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마치 원래 잠들어있었던 것처럼.

 

 

 

 

 

 

시야는 온통 하얀색 뿐이었다.

 

하얀 커튼과 하얀 천장. 


하얀 침대와 알 수 없는 하얀 기계들, 비프음.

 

자신의 몸에 꽂혀있는 수많은 바늘들과 또 전선들.

 

 

 

오랫동안 잠들어있었던 탓인지 몸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목은 완전히 잠기어 한낱 옹알이조차 내뱉을 수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만 뒤룩뒤룩 굴리면서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자 노력하는 것 뿐이다.

 

 


 

모든 것과 모든 상황이 전부 모르는 것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신체도, 어딘지 모를 이 곳도, 이유 모를 이 전선들과 기계들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고자 애쓰던 그의 귓가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

 

또렷한 구두 소리가 이윽고 그의 앞에 멈춰서고, 커튼을 걷어내었다.

 

 

 

 

 

 

 

 

잔뜩 긴장한 채 가슴 졸이던 그가 순간 두 가지 의미로 숨을 멈췄다.

 

 

하나는 그의 앞에 서있는 이 인물이 그를 해할 것인지, 혹은 구한 은인인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함.

 

다른 하나는 맹세컨대 그가 기억을 잃기 전이라 하더라도 과연 이만한 미모를 지닌 여성을 본 적 있을까 하는, 순수한 경탄.


비단결 같은 흑발과 루비같은 붉은 눈동자. 오똑한 이목구비.


비록 만삭의 몸이었음에도 그 미모가 바래는 일은 없었다.




여성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점차 눈이 커지더니 이내 환히 웃었다.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며,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곤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그의 귓가에 대어 들려주는 뱃속의 태동은 생명력이 넘쳤다.

 

 


이 낯선 여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애정 어린 손길에 차츰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길엔 여전한 불안함을 뚫고 어딘가 마음을 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확인되셨습니다. 환영합니다."


권태에 찌든 목소리로 출입국관리원이 버튼을 누른다.


게이트가 열리고 수십 만에 더한 한 명이 또 도시에 들어선다.



"다음."



이번에도 이상없다.


버튼을 누르려던 관리원이 문득 입을 연다.



오늘따라 한번쯤은.


"화면이 조금 뭉개져서 그런데, 방문 목적이 뭐였나요?"




"방문 목적이요?"


깊게 눌러쓴 넓은 챙 모자를 슬쩍 들어올리며, 그녀가 관리원을 바라본다.






"분실물을 찾으러 왔어요."



"..감사합니다. 행운을 빌어요."


"고마워요."



관리원은 고개를 으쓱이며 게이트를 열었다.


수십 만에 한 명에 다시 한 명을 더한다.






관리원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찾아보지만


수백만의 행렬 사이에 그새 모습을 감추고 없다.










어딘가 그녀는.




희미한 '엄마'의 냄새가 났다.


그것이 못내 꺼림칙했지만.



그의 앞에 늘어선, 수십 만에 두 명에 더해야 할 수백명이 있기에 


관리원은 상념을 지우고 다시 권태 속에 빠져들었다.


















도시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최첨단기술의 집약체라고 할 만큼.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보던 광경이 전부 구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 

 

수많은 로봇.

 

또 수많은 호버카들과 또 수많은 네온 사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마천루들.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고개를 돌려도 눈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건물들.

 


깔끔한 광장과 화사한 햇볕. 기분 좋은 열기.

 

끊임없이 들려오는 광고와 음악 소리. 








여인이 얼굴을 가리던 모자를 들춘다.



갈색의 긴 생머리. 한 눈에 봐도 예쁘다고 직감하는 이목구비.


살짝 내린 선글라스 너머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얼굴의 거의 반이 화상 자국이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미모를 바래진 못했다.




그 중 가장 높이 솟아오른 건물을 본다.


[ O C P ]




그녀의 입술이 빼뚜름하게 비틀린다.


그것은 언젠가 오래 전.


누군가가 지었던, 그 미소와 흡사하다.













"조금만 기다려."














"찾으러 갈게."









걸음을 옮긴 그녀의 모습이 금세 인파에 파묻혀 사라졌다.


그녀의 뒤로 수십 수백명, 수천명이 또 지나간다.





깔끔한 보랏빛 네온사인만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라비린스 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