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길 운전 조심하고. 다음 주말 약속 잊지 마?'



"알겠어. 조심히 갔다 올게. 또 보자."



시골 밤의 운전길.



어두컴컴한 길과 지나다니는 차가 없기 때문에 쉽게 피곤을 느끼게 되는 길.



지방 출장을 걱정한 아가씨의 안부 연락을 받으며 예약해놓은 숙소로 운전한다.



"아가씨는 너무 걱정이 많으시다니깐."



배려 깊은 아가씨의 마음에 웃음을 지으면 쓸쓸한 밤길에서도 따뜻한 기분이 되는 것 같다.



그렇게 헤드라이트에 비친 가로수의 모습을 지나치고 있을 때



"뭐지?"



칙칙한 가로수의 모습 중에 흰 무언가가 보였다.



백미러로 바라보니 가로수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지만,



사람의 다리 같은 것이 보인다.



길거리에 버려놓은 흰 종량제 봉투일까 생각해 보아도,



저렇게 다리 같은 것이 삐죽 튀어나올 리가 없다.



"......"



차 속도를 늦추면서 고민한다.



가끔 듣는 도로 위 귀신일까?



아니면 정말로 버려진 '시체'일 것일까?



그냥 무시하고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이대로 확실히 넘어가지 않는다면, 매일 밤마다 잠자리가 험해질 것 같다.



"에이 씨......"



자동차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차를 조금 후진.



형태에 조금 가까워졌을 때 차에서 내린다.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 않으니 분명 귀신 같은 것은 아닐 터.



한 걸음씩 다가가 보니 가로수 너머로 사람의 다리가 나와 있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간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



큰 외침에 반응도 없는 사람.



수상하게 조용한 거리 때문에 경계심이 높아진다.



혹여나 가까이 왔을 때 기습을 당할 수 있어, 도로 중앙으로 걸으며 다가간다.



품 안에 스턴건을 쥐며 가로수 너머를 보았을 때,



가로수에 기대어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보였다.



흰 셔츠에 선명히 보이는 붉은 핏자국.



비상 상황임을 알아채자 빠르게 다가간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다가가니 사람은 여성이었으며, 옆구리의 상처가 심해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저기요! 정신 차려요!"



어깨를 흔들며 외쳐보니



"끄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반응을 못 하고 있다.



"제 말 들리세요? 상처가 많이 심한가요?"



의식이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 구급차를 부를게요. 잠시만-"



당연한 대처를 하려 했지만,



"안......돼..."



그녀로부터 간신히 짜내어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에요, 구급차를 안 부르면 죽는 것밖에 더 되요?"



그냥 술 취한 사람의 푸념이겠거니 생각하며 휴대폰을 조작하는데,



'텁석!'



"병원은...... 안돼..."



어디서 그런 힘이 남았는지 내 손을 강하게 붙잡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그러면 그대로 있을 거에요?"



이리저리 손을 흔들며 그녀의 손을 떼보려 하지만,



여자답지 않은 악력이 내 손을 놓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셔츠 밖으로도 보이는 근육의 형태.



웬만한 남성보다도 강할 것 같은 자태를 보여준다.



"부탁...이야... 병원은...가지말아......"



가늘게 뜬 눈빛에서 전해지는 간절한 부탁.



그녀의 신체와 이를 돋보이게 하는 슈트 차림.



그리고 옆구리의 피를 보아서 그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고 깨닫는다.



"하아......"



엮이면 안 되는 사람하고 엮인 것 같아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러나 이미 이렇게 오지랖을 부려버렸으니, 끝까지 함께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안 그러면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으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제 차에 타서 숙소로 가죠."



그녀의 한 팔을 부축하며 일으킨다.



보이는 체형답게 몸무게도 가볍다고 할 수준은 아니다.



그녀와 어떻게든 차까지 걸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공주님 안기는커녕, 업는 것도 못 할테니까.



"으으으......"


뒷좌석에 타자마자 앓는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그녀.



숙소까지 가는 도중에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상태는 머리에서 내쫓는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나에게는 방법이 없다.



병원은 안 된다고 하는데.



차를 다시 몰고 숙소를 향한다.



백미러로 그녀를 보니 잠들은 건지 죽은 건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다.



차가 멈출 때까지 그녀는 어떨지 모르는 법.



숙소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그녀는 잠들어 있던 것 같다.



카운터에서 키를 받고 차에서 짐을 꺼낸다.


"저기요. 숙소 도착했어요. 일어나서 방에 들어간 다음에 자요."



피곤할 터인 그녀를 깨워 엘리베이터까지 부축한다.



그녀를 업는 것도 힘들 것 같기에 이렇게 해야한다.



"......"



죽어가는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는 그녀.



말없이 방까지 도착해 그녀를 침대에 눕힌다.



생판 모르는 여자를 같은 방에 들여도 괜찮은 것인지 위기감이 맴돌아도,



한번 휘말린 이상, 끝까지 해주기로 했다.



"......"



침대에서 곤히 잠든 그녀.



그러나 이대로 응급조치 없이 잠들었다가는 내일 아침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시체일지도 모른다.



편의점으로 가서 응급처치 도구를 사 들고 들어온다.



"......"



잠들어 있는 여성의 옷을 벗기는 것에 저항감이 매우 느껴지지만,



무고죄라던가 여러 가지 복잡한 앞날이 고민되지만.



"에이... 진짜...."



마음먹고 그녀의 셔츠를 풀어 상처를 본다.



피를 닦고 소독제를 바른 후 거즈와 붕대로 감는다.



이런 비슷한 일을 회사에서 해본 적도 있어서 나름 능숙하게 손을 움직인다.



"뒷세계에 물들지 않도록 하는데, 이런 식으로 자꾸 엮이는구나."



그녀에게서 급한 부분을 처리하며 한시름 놓는다.



주변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려 한때에



속옷만 입은 그녀의 상반신을 보았는데,



근육 속에 있는 여성스러움에 기묘한 느낌이 든다.



"됐다. 됐어."



여성스러움이면 내 주변에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앞으로 뒤탈이 없도록 깔끔하게 행동하자.



그녀와 다른 방을 쓸까 생각도 했지만, 혹시 모를 비상 상황에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다음 날 내 옆방에서 시체가 나오면 곤란하니까.



목욕 가운과 타월을 걸치고 쇼파에 자도 괜찮은 것 같아서 눈을 감는다.



부디 내일 갑자기 시체로 변하지 말기를.





2



'삐삐삐삐’



아침 알람을 들으며 눈을 뜬다.



그리고 신경 쓰였던 그녀의 모습을 확인해 보니



"------"



나름 편안한 표정으로 잘 자고 있다.



아침부터 좋은 소식이 생겼다는 생각에 아침을 사러 나간다.



혹시 몰라 그녀가 먹을 수 있는 것도 같이 사와 돌아온다.



아침을 먹으면서 간단하게 씻고, 노트북으로 업무를 본다.



어차피 외출은 오후부터이니 그때까지는 그녀를 돌보자.



그렇게 이리저리 시간을 보냈을 때.



"으으음......"



점심이 가까이 왔을 때 그녀가 일어난다.



"으......"



멍한 눈으로 상반신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말없이 그녀를 본다.



'몸 상태는 좋아진 것 같네.'



나름 만족하며 그녀를 관찰하자니 그녀도 나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아... 너는...."



"어제 그렇게 다쳤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그녀에게 물병을 건네주면서 어제 일을 떠올리게 한다.



"꿀꺽꿀꺽- 크으... 에... 그러니까...."



그녀도 막 일어난 참이기에 여러 가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자.



"어......."



그렇게 그녀의 생각이 방황하고 있을 때 나는 한가지 번뜩이는 것이 있다.



'그녀에게 상의를 입혀야겠다.'



바지는 입었어도 상의는 속옷만 입은 상태.



어떤 여성이라도 지금 상황에는 놀랄 것이 분명하다.



아가씨를 시중들며 여성의 모습에 익숙해져 버린 자신을 원망하면서,



그녀에게 셔츠를 덮어 상반신을 가린다.



"......."



"......."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반응을 기다린다.



'스으윽’



이마에 식은땀이 나도록 기다리던 때에 귀에 들리는 소리



그녀를 바라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입고 있는 모습



"...... 아, 옷 고맙다."



원래라면 비명을 들으며 그녀를 진정시켰어야 할 상황에 너무나 무덤덤한 반응.



"...... 괜찮은건가요?"



괜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을까 싶다.



"......? 뭔가?"



"아닙니다. 괜찮다면 상관없겠지요."



흔한 여성 같지 않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는 몸을 보여도 화내지 않는 것 같다.



'꼬르르륵’



"아... 혹시 먹을 게 조금 있는가."



"여기. 혹시나 해서 사 왔어요."



아니면 흔한 여성과는 다르게 그녀가 무덤덤한 편일지도.



그녀는 김밥, 샌드위치, 우유 등 나름 양이 되는 음식들을 빠르게 먹는다.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은 좋지 않을 것 같으니 다시 노트북을 향해 업무를 본다.



"...... 저기...."



뒤로부터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응? 무슨 일이라도?"



몸은 노트북을 향한 채 대답만 전해준다.



서로 어색하지 않도록.



"너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으음......"



천장에 시선을 올리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한다.



"어떤 사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름 복잡한 사정이 있겠다 싶어서.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지.



무섭다거나 이상하다거나 하지는 않아요."



"그런가...."



"사람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이는 내 신념이자 가치관.



사람은 누구나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괜한 호기심에 이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



이런 생각 또한 아가씨와 함께 지내면서 익히게 되었다.



"이제 씻겠다."



어느새 먹을 것을 해치운 그녀가 자리에서 기세 좋게 일어난다.



다시 보니 그녀의 키는 190cm가 넘는 것 같다.



평균 키인 내가 그녀를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이니.



"네...."



무어라 말을 할까 했지만, 여성의 예민한 부분에 참견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말을 아끼기로 한다.



'쏴아아’



문 너머로 여성의 씻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녀의 체형을 생각하니 흥분되기보다는 여전히 기묘함을 느낀다.



이제 곧 헤어질 사이이기에 좋은 일 했다는 것으로 치자.



'끼이익’


그녀의 샤워 소리를 배경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그녀가 빨리도 씻고 나온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다."



옷을 입은 채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는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온다.



"혹시 휴대폰 좀 빌릴 수 있을까?"



"네. 여기."



어제 그녀에게서 휴대폰을 찾을 수 없어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한다.



"------ 응. 나다. 휴대폰이 망가져서 이렇게 됐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응. 여기로 와줄 수 있나?



여기는... 아니다. 우리 건물 쪽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알겠다. 응."



쿨하게 내 휴대폰을 돌려주더니 수건을 침대에 던져놓고 그녀의 외투를 집어 든다.



"오늘 일은 기회가 된다면 보답하고 싶다."



"아니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냥 운이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해요."



"...... 잘 모르겠지만, 정말 고마웠다."



그렇게 나름의 감사를 말하며 현관 쪽으로 가는 그녀.



"어, 잠깐."



"응? 뭔가?"



"설마 머리도 안 말리고 나가려고요?"



그녀의 체형과 더불어 말리지 않아 달라붙은 머리는 마치 귀신을 연상할 정도로 괴이하다.



얼굴 자체는 예쁜 편이지만, 체형과 머리로부터 나오는 분위기가 이를 망치고 있다.



"괜찮다. 평소에도 이렇게 다녔다."



"어이, 진짜냐고. 여성이 그렇게 소홀히 다니면 안 된다고요."



아가씨의 머리 손질로 버릇이 된 헤어드라이기를 손에 들고 그녀에게 오라는 손짓을 한다.



"정말 괜찮다...."



"와서 앉아봐요. 오래 안 걸려요."



망설이는 것 같더니 쭈뼛쭈뼛 와서 의자에 앉는다.



정말 머리 손질을 안 받고 살았는지 불안해한다.



'위이이이’



익숙하게 그녀의 머리를 만지며 드라이기로 말린다.



손질하지 않으면서 머릿결은 왜 이리 좋은지. 아가씨도 질투할 정도다.



말린 머리를 빗으며 가지런히 모양을 잡는다.



약 5분 넘게 손질하니,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로 변했다.



"봐요. 아까보다 훨씬 예쁘네요."



"윽... 그런가...."



그녀에게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 얼굴을 붉힌다.



"잠깐만, 머리를 이렇게 해보면...."



아가씨의 것인지는 모르지만 차에서 주웠던 고무 머리띠를 그녀에게 묶는다.



포니테일의 머리를 만들고 나니, 여성스러움과 간편함을 챙길 수 있다.



"자, 됐다."



"......"



말없는 그녀는 거울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일어난다.



"헤어링은 선물인 셈 치고 가져요."



수건과 음식 쓰레기들을 정리하면서 그녀에게 작별의 말을 한다.



"그... 고맙다...."



조금 붉어진 것 같은 얼굴로 수줍어하는 것 같다.



"앞으로 어디서 다치고 거리에 쓰러지지는 말아주세요."



손 인사로 그녀를 보내니 그녀는 말없이 종종걸음으로 현관으로 나갔다.



"보... 보답은 나중에 꼭 하겠다!"



닫힌 현관문을 다시 열며 그녀가 말을 남기더니, 황급히 문을 닫고 떠난다.



"대답은 듣지도 않겠다는 건가."



덩치와는 다르게 신선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재미있는 날들도 있구나.



방과 짐을 정리하며 떠들썩했던 날들을 마무리한다.





3



"음~ 이거 정말 맛있다!"



"그치? 인터넷에도 나오고 유명한 빵집이라던데?"



"오빠도 참. 굳이 이런 거 안 사와도 되는데~"



"응? 무슨 소리야? 내가 먹으려고 사 왔는데?"



"정말. 말이라도 해주면 덧나?"



"하하. 미안. 너 주려고 사 온 거야."



"풋! 솔직하지 못하긴~"



내 앞에서 빵을 먹으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여성은 나의 아가씨.



김연진.



부모 없고, 집을 잃고, 갈 곳 없는 나를 그녀의 부모가 거두어서 가족처럼 함께해 준 분이다.



그들에게 구원받은 삶이기에, 그녀에게만큼은 내 모든 것을 바치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나보다 5살 정도 어려서 존경을 담아 아가씨라고 부르려 했다가



정떨어지는 것 같다며 서로 편하게 부르고 말하기로 한 사이다.



나름 이름있는 기업의 회장인 어르신은



어린 그녀가 회사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이것저것 배우는 동안, 나에게 그녀의 돌봄을 부탁했다.



그 덕분에 나와 아가씨는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남매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참, 오빠 그 공장은 어떻게 됐어? 심각하거나 하지는 않아?"



"아, 가서 확인해 보니까 홍수로 기구가 조금 침수되기는 했는데, 금방 복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



조금만 기다리다 연락 오면 다시 가동해도 되고, 시설 보수만 조금 지원해주면 될 것 같아."



"다행이네. 올해는 왜 이리 비가 많았던 걸까?"



"앞으로 더욱 이상해질 텐데 대비를 잘해야겠네."



그녀의 회사 경영에 팔과 다리가 되어서 열심히 움직이는 나의 역할.



어렸을 적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날들이지만, 어르신과 아가씨 덕분에 이렇게 과분한 날들을 맞이할 수 있다.



"아, 오빠 그리고 혹시 대학교에 한번 같이 와줄 수 있어? 나랑 대학교 데이트 한번 하자~"



"갑자기 무슨 소리람."



나를 잘 따르는 것도 좋지만, 예전처럼 너무 달라붙어서 주위의 시선이 조금 무섭다.



"자꾸 복학생 선배가 귀찮게 한단 말이야. 군대 나오면 뭐 해, 수준이 저 모양인데!"



"아하하... 그 나이대가 그럴 수 있지."



"칫... 적어도 오빠만큼 듬직하면 모를까...."



"응? 뭐라고 했니?"



"아니, 하여간 진짜 학교 한 번만 같이 와줄 수 없어? 남자친구 행세만 하면서 나랑 어울려 주라~"



어르신을 닮은 깊은 마음씨 그리고 연예인에 꿇리지 않는 귀여운 미모로 아가씨가 저렇게 졸라대면 어떤 남자라도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응~?"



촉촉한 눈빛과 간절한 모습.



거절했다가는 분명 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아~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 돌면 어떻게 하려고?



앞으로 회사 일도 생각하면 조심해야 한다고?"



"소문나도 괜찮은데...."



"응? 또 뭐라고 했니?"



"아니야! 크흠!



오빠, 나 좀 도와주라~ 그냥 학교 밥 먹고 카페 한 번만 가면 되. 응? 딱 한 번만~"



"으이구...."



어르신을 생각해서 이런 관계는 좋지 않다고 생각되면서도, 아가씨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는 나.



"알았어... 다음에 시간 되면 같이 가자."



"아싸!"



"이번뿐이다?"



"흐흥~! 괜찮답니다? 오빠의 협력에 감사의 말씀을~"



방금 버려진 고양이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아가씨.



어디서 그런 처세술을 배우셨는지요....



'♪~’



"이제 갈 시간 됐네. 오늘 고마웠어! 대학교 데이트 기대하고 있어줘!"



아침 해 같이 상쾌한 미소로 자리를 뜬다.



"내가 못산다니까...."



아가씨의 어리광에 못 이겨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이런 나날 덕분에 나 같은 사람도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슬슬 정리하고 나도 일을-"



'띠리링’



티타임 자리를 정리할 때 휴대폰에서 울리는 알람음.



전화번호를 보니 저장되어 있지 않는 번호다.



"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스읍...... 나다...."



"응?"



모르는 여성의 목소리에 뜬금없는 발언.



"어... 제가 목소리를 헷갈려서 그런데, 혹시 어느 분 되실까요?"



"그... 저번에 구해주고, 머...머리 해줬던......."



머리 해줬다는 말에 바로 기억났다.



"아! 그때."



그때로부터 2주 조금 안 돼서 연락이 온 것이다.



이런저런 업무가 있어 금방 잊고 있었는데,



휴대폰을 빌려주었을 때 번호로 나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잘 지내셨나요? 목소리는 괜찮아 보이네요."



"덕분에, 잘 회복했다. 고맙다."



"별 말씀을."



사람 한 명을 구했다는 사실에 나름 기쁘다.



"저... 그래서 그때 말한 보답을...."



"아,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아니다. 내가 꼭 해주고 싶다...."



의외로 고집이 있구나 이분.



"음... 그걸 바라고 한 건 아닌데요...."



"보답도 할 겸... 하...한 번 더 마...만나고 싶다...."



"에, 바쁘실 텐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나는 괜찮다!!!"



우왓 목소리가 꽤 크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한 번 더 뵙죠.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에헤헤- 아! 시...시간은 언제든지 괜찮다! 좋은 시간대 알려주면 내가 준비하겠다!"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 것 같다.



"그런가요... 그러면 공휴일도 괜찮을까요? 다음 주 토요일 점심은 어떤가요?"



아가씨와 내 업무 스케쥴을 보았을 때, 이때가 시간이 빈다.



"다음 주 토요일 점심... 응! 괜찮다! 그때 만나는 것이다!"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요?"



"장소? 아! 만나는 장소는... 으음......."



꽤나 헤매는 것 같아서 장소 결정은 그녀에게 맡기로 했다.



"시간이 꽤 남았으니, 그때까지 알아보고 결정하는 게 어떨까요?



결정되면 저에게 문자 보내주세요."



"으응! 그렇게 하겠다! 결정하면 문자 보내겠다!"



"아! 그러고 보니 서로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네요. 제 이름은 김연빈입니다."



"내... 내이름은 순...이다."



"순이요? 성씨는요?"



"이... 이순이다. 그러나 다들 나를 순이라 부른다...."



"아 그렇군요...."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이름을 나누지만, 이렇게까지 상식이 어긋나는 관계도 처음이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 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순 씨."



"고마운 거다!"



힘 있게 마쳐진 전화에 그녀는 나름 즐거워하는 것 같다.



"사람마다 즐거운 기준은 다르겠지...."



토요일 일정표에 기록한 뒤 자리를 정리한다.



다음 주도 이리저리 바쁠 것 같다.





4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면 일주일은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00백화점 앞에서 만나는 거다. 10시까지 와달라.'



나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금요일 밤에 온 문자로 약속이 기억났다.



백화점이라...



아까씨와 몇 번 간 적이 있는데,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 공간이다.



'알겠습니다. 내일 뵙죠.'



라는 답장과 함께 내일을 준비한다.



'삐삐- 삐삐-'



짧게 느껴지는 수면을 깨워진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니 정장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꾸며야 한다.



화장실에서 조금 더 신경 쓴 뒤, 회색 면바지와 여름용 남색 셔츠를 입는다.



흔히 '남친룩'이라고 불리는 패션으로 집을 나선다.



지하철을 타고 20분 거리의 백화점 앞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까지 20분 정도 여유가 있다.



휴대폰으로 다른 소식이 없나 막 꺼내서 들여다보려는 참에



"빠앙!"



내 앞에 서서 경적을 울리는 고급 SUV 차량.



어르신이 쓰는 차량과 같은 메이커인데, 모델이 다르기에 다른 사람의 차일 것이다.



"오...오래 기다렸다."



창문이 내려가며 그녀가 운전석에서 인사한다.



"음~ 방금 도착한 참이기는 한데, 어떻게 딱 맞았네요."



"우...우연이다. 나도 도착하니까 너가 보였다...."



그녀의 손이 나를 재촉하는데 멈추지 않을 것 같아 차 조수석에 타기로 한다.



"실례합니다."



"어...어서와라...."



차에 타자 그녀의 움직임이 없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그-그러면, 일단 주차하러 가겠다."



괴물 같은 자동차의 마력으로 주차장까지 운전한다.



이런 도심에서 부딪히면 수리비도 많이 나올 텐데, 접촉 사고가 걱정되지 않은 것일까.



'등록 차량'



백화점 주차 기계의 문구를 보고 이 차가 백화점에 등록되었음을 알아차린다.



어떻게 하면 백화점에 등록 차량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이...이제, 올라가자...."



어느새 주차를 마친 그녀가 차에서 내리며 나가자고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을 때까지는 몰랐는데,



"으음......"



이제와서 눈치챈 것이 있다.



"무...무슨 일 있나."



"아니, 별건 아닌데요."



근육진 몸매가 드러나는 슈트 차림의 그녀가 내 앞을 먼저 가는 모양이다 보니



'저 사람 어디 회장 아들인가?'



'저런 보디가드도 같이 있잖아.’



평소에 아가씨의 보디가드를 맡던 내가 역으로 보디가드를 당하는 입장이 되버렸다.



당하는 입장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에, 나는 이 시선이 너무나 거북게 느껴진다.



"옷은 정장 말고 다른 것 입고 오시지 그랬어요."



"옷? 옷 말인가? 아... 그...그게 입을 옷이 이것 밖에 없어서...."



"에이, 그래도 다른 캐주얼 옷 있을 거잖아요. 저는 신경 안 쓰는데, 편하게 입고 오시지."



"그... 정말로 다른 옷이... 없다...."



나름 수줍어하면서도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말이 진실인 것 같다.



"다른 옷 없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그 옷도 불편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이거 맞춘 것이라서 하나도 안 불편하다."



"아하......."



과연 그런 것이었나. 하여간 이래서 부자들은....



"그래도 제가 보기에 조금 그러니 이왕 옷 하나 사는 게 어때요?"



그녀의 상식은 평범함에 매우 벗어나 있지만, 그런 것에 하나하나 놀라면 내가 지친다.



차라리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불편하지 않게 조금씩 바꾸는 것이 낫다.



"그...그래도 내 옷을 사버리면!"



"아~아~ 정장 빼입으신 분이 있어서 나도 차라리 정장 입고 올 것 그랬나, 후회되네요~"



내가 부담스럽다는 점을 적극 표현.



그녀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해줘야 한다.



"으... 알겠다... 그러면 내 옷 좀 사겠다...."



"그러면 좋지요."



그녀는 내 요구를 충분히 거절할 수도 있는데, 순순히 져준다.



솔직히 회장 아들과 그 보디가드라는 모양새만큼은 꼭 피하고 싶다.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옷 있으실까요?"



매장 직원이 우리를 보자 빠르게 다가온다.



"이 숙녀분이 가볍게 입을 옷을 찾고 있습니다."



옆의 그녀를 숙녀라 강조한다.



"어... 그렇군요! 혹시 어떤 종류를 원하실까요?"



직원이 그녀의 체형을 보고 처음에 말을 잃었던 것 같다.



하여간 나 같아도 놀랄 것이다.



"음... 아무래도 몸이 드러나지 않는 롱 원피스 쪽이 좋을 것 같네요."



"아! 롱 원피스 말씀이군요! 이쪽에 와보시겠어요."



당사자인 여자는 한마디도 못하고 직원과 나만 열심히 말한다.



체형이 크기에 그녀에게 맞는 큰 치수의 옷이 적었지만,



무릎에 살짝 내려오는 옷이 이전보다는 훨씬 가벼운 느낌을 준다.



"어...어떤가."



졸지에 마네킹이 되버린 그녀는 얼굴을 들지 못한다.



"으음... 아까보다는 훨씬 좋네요."



"네! 손님. 손님 체형에도 매우 잘 어울려요!"



"그...그런가... 그러면 이 옷으로 하겠다...."



여섯 자리의 가격을 보고 한 번 놀랐지만, 어차피 그녀가 살 것이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성분이 결제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아, 이 카드는 제 것입니다. 하하."



"아 그러시군요!"



절대로 거짓말이지만, 다른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저렇게 말하고 넘어간다.



혹시나 그녀의 눈치를 보면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네 감사했습니다."



직원의 배웅을 받으며 정장이 담긴 백을 들고나온다.



나에게 보답이라는데 그녀의 옷을 사는 모습이 웃기기는 하다.



"그... 너는... 여자랑 많이 만나 보았는가...."



목적 없이 백화점 안을 걷고 있을때에 뒤에서부터 그녀가 말을 건다.



"여자요? 업무상 여자랑 일할 때도 있지요. 제가 남자라고 여자랑 어색하게 말할 것처럼 보였나요?"



"그건 아니다...."



"여...연빈은 애...애인이라도 있는 것인가.... 너무나 능숙하게 말하는 것 같다...."



"애인이요? 애인은 없습니다. 다만 나이 차가 있는 여동생이 있어 자주 돌보다 보니 이런 것에 익숙할 뿐입니다."



"그런가!"



아까의 부끄러워하는 모습과 달리 갑자기 당당해졌다.



"혹시 좋아하는 음식 있는가! 같이 점심 먹자!"



시간을 보니 점심이 다가왔다.



"저는 육고기 종류면 다 좋아하는데, 순 씨는 괜찮은가요?"



"고기. 괜찮다! 스테이크 집으로 가자."



갑자기 내 손을 강하게 쥐며 앞으로 끌고 간다.



무의식적으로 잡은 손이지만, 악력이 꽤 강하다.



그리고 나를 한 팔로 끌고 가는 모양처럼 강렬한 걸음걸이로 움직인다.



어떤 이유로 저렇게 신났는지 모르지만, 밥 먹을 생각에 기뻐졌을지도 모른다.



브랜드 있는 스테이크 집에서 식사하고 나오는 길.



이에 낀 조각을 빼기 위해 화장실에 잠깐 갔다 온다고 하였다.



나오니 그녀는 어느 카페의 창에 붙어있는 광고를 보고 있다.



카페에서 파는 여름 한정 파르페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오, 이런 파르페를 파는군요."



물론 백화점이라 가격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수준.



"어? 왔는가. 있길래 그냥 한번 본 것이다."



나름 괜찮은 척하지만, 참는 것 같은 모습이 보인다.



"맛있어 보이는데? 한번 먹을까요?"



내가 낼 돈이 아닌데도 가볍게 말한다.



"그... 남자는 이런 거 싫어하지 않나?"



"으음~ 저는 아이스크림처럼 단것 엄청 좋아하는데요?"



물론 아가씨와 자주 다니면서 입맛도 동화된 것이다.



"배...배부르지는 않은가? 내가... 조금 많이 먹기는 한다...."



이 파르페를 매우 먹고싶어하는 의지가 전해진다.



"배는 안 부릅니다. 간식 먹을 때는 다시 배고프지요."



그녀에게 웃으며 대답하니



"그럼 들어가자!"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나를 끌고 들어간다.



힘은 왜 이렇게 쎈지, 손이 다 아프다.



"흐음~! 맛있다!"



눈을 빛내며 맛에 감탄하는 모습은 일반 여성과 다름이 없다.



뭐, 사람은 다 똑같다는 것이지.



파르페를 다 먹고 나니 어느 정도 배가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저... 혹시 다른 것도 먹어봐도 괜찮은가...?"



마치 어른에게 조르는 아이 같은 모습으로 물어본다.



"물론이죠. 순 씨가 내는 건데 원하시는 만큼."



입가심용으로 나는 커피를. 그녀는 다른 메뉴의 파르페를.



아가씨와 함께하는 디저트 때와 많이 다르지만, 그녀가 행복해 보이니 문제없을려나.



카페를 나왔을 때는 오후 2시 가까이 되어 태양 빛이 너무 강하다.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기에는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날씨.



그렇다고 안에서 무얼 하면서 보낼 거리도 없다.



그녀도 딱히 점심 이후의 계획이 없었는지, 내가 걷는 길을 따라 올 뿐이다.



아마 이 '보답'은 여기서 마무리 하여도 좋을 것 같다.



"시간도 됐고. 이제 슬슬 각자 집으로 돌아갈까요?"



"에? 벌...써?"



"벌써 오후 2시. 밖은 너무나 덥고, 안에는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네요.



주말 저 때문에 무리해서 나온 것 같은데, 저는 만족했으니 이제 쉬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



아쉬워하는 것 같지만, 그녀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엮일 생각은 없다.



그녀가 어두운 곳에 있든, 그렇지 않든, 나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서로 맞추려 해도 한계가 있는 거리감.



애초에 이런 관계는 그냥 '지인'으로 알고 끝내는 것이 깔끔하다.



"이것도 인연인데, 제 명함 하나 드릴게요.



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서 언젠가 또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업무 관련으로도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주세요. 비즈니스적 관계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내 명함을 받아 든 그녀는 명함 내용에 집중한다.



"더운 날 저 대접해 주신 것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늘은 이만하고 슬슬 돌아가시지요."



그렇게 백화점 입구로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덥석’



"데려다주겠다...."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팔을 잡으며 권유한다.



"데려다주시면 저야 고맙지요."



이런 호의는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집은 어디인가."



"00역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는지요. 그 주변에서 살고 있습니다."



"알겠다."



의외로 능숙하게 네비게이션을 조작하여 안내받는다.



"오늘은... 어땠는가?"



음악이나 라디오를 틀지 않는 드라이빙.



나름 거북해 보이는 분위기에서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식사도 맛있었고요."



"그러면 다행이다."



30분 정도 지나니 집 주변으로 도착한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집 주변은 차로 들어가기 힘들거든요."



"알겠다."



"오늘 고마웠어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보지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아무런 말 없이 손을 흔들어 주는 그녀를 뒤로하고 집으로 걸어간다.



그녀와 앞으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았지만, 나중 일은 모르는 것이라며 가볍게 떨쳐낸다.





5



그로부터 몇 주는 지났을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빠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하루는 갑자기 거센 비가 내려서 골목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오늘 비는 저녁에 오는 거 아니었어?"



기상청 어플을 보며 불만을 토하던 도중



'쿠당탕!'



골목 뒤쪽에서 굉장한 소리가 들린다.



'퍽!'



'깡!'



'으악!'



소리를 들어보니 평범한 사고는 아닌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경찰에 위치 문자를 보낼 준비를 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



"당신은...."



누군가 갑자기 튀어나와 문자 송신 버튼에 손가락을 누를 뻔했다.



"그... 순씨?"



"아...안녕한가."



비와 군데군데 피로 젖어있는 그녀의 모습에 휴대폰을 집어넣는다.



"무슨 일인가요? 이런 날에. 소리를 보아하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았는데요."



"그... 미안하다...."



그 말의 의도가 뭔지 이해를 못 하고 있을 때



"저기 있었다! 찾아라!"



그녀 뒤로 다른 사람의 외침이 들렸다.



"미안하지만, 일단 뛰어라!"



그녀는 내 손을 낚아채더니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달려 나간다.



"자-잠깐! 뭔일인데 이렇게!"



"시간 없다! 그냥 따라와라!"



저항하기에는 내 손이 뜯겨나갈 것 같아서 그녀를 따라 뛰기로 했다.



거센 빗속에서 추격전이라니.



내가 왜 휘말려야 되는지도 모르며, 거센 비로 내 옷이 다 젖는 것에 기분이 좋지 않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할 게 많겠군.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서로의 숨이 거칠어질 정도로 달렸을 때



앞에서 승합차 한 대가 길을 막는다.



"어서 타십쇼!"



그녀로부터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소속'이었던 것 같다.



'부아아앙!'



굉음과 함께 강한 급가속으로 달려 나가는 차량.



나는 뒷좌석에서 그녀와 함께 흠뻑 젖어있다.




이렇게까지 비를 맞아본 적이 없는데, 강한 에어컨 바람에 추위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



내가 추위에 불편해하는 것을 보자 그녀는 좌석에 있던 외투를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미안하다...."



긴말이 없는 그녀의 화법이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꽤 괴로워하는 것 같다.



발까지 축축해진 기분 나쁨과 서늘한 에어컨 바람 사이에서 이도 저도 못 하는 시간을 한참 보냈을 때.



차는 브레이크를 걸며 어느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멈췄다.



'조직'의 사람들이 맞이하러 나왔는지 사람들이 나름 있다.



"이분을 부탁한다."



라는 짧은 말과 함께 그녀는 건물로 들어가 버리고, 나는 다른 조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 안 숙소 같은 방으로 들어간다.



손님을 형편 좋게 휘말리게 하고 방 하나 던져주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지만,



여기서 불만을 말했다가는 무서운 일을 보게 될까 싶다.



우선 젖은 옷을 벗고 씻었다.



방에는 이미 여분의 정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간신히 고장 나지 않은 휴대폰으로 저녁에 늦을 것 같다는 문자를 보내고 음료로 목을 축인다.



쇼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안내역의 사람이 노크 후 시간이 괜찮은지 물어본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어느 사무실 앞.



복도부터 분위기가 굉장한 것이 어느 간부의 사무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안내역은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하며 자신은 복도에서 기다리는 것 같다.



이 안에 누군가 있는 것이다.



'똑똑’



"들어오게나."



문 너머로 중년의 남성 목소리



"실례하겠습니다."



"어서오게나."



장엄한 분위기의 방에서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 남성.



"손님에게 실례를 끼쳤군. 내가 대신 사죄의 말을 드리리다."



"괜찮습니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지요."



"고맙네.... 자리에 앉게나. 무거운 이야기는 아니니 부담 가질 것 없네."



남성의 자리에서 마주 볼 수 있도록 쇼파가 있어서 그곳에 앉는다.



"내 소개가 늦었군. 나는 000. 건영 기업의 회장이지."



"반갑습니다. 김연빈이라고 합니다."



사무실의 분위기가 어르신의 것과 비슷하더니, 회장님이었나.



그리고 이 기업은 조직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이었던 것 같다.



"우리 딸아이가 신세를 진 것 같아서, 잠시 이야기라도 할까 해서 불러보았네."



딸이라. 그녀의 아버지가 되는 것일까.



"편하게 들어주겠나. 한 늙은이의 푸념을...."



나름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나는 남성의 말을 들었다.



순.



그녀는 그의 친딸이 아니다.



조직의 일에 휘말려 고아가 된 아이를 남성이 거두어서 키우기 시작한 것.



모든 것을 잃은 슬픔에,



남성은 기업과 조직의 일로 항상 관심을 가져줄 수 없었고,



그녀를 섬세하게 돌봐줄 여성 인원 또한 부족했었기에



상식과는 많이 어긋난 그녀가 된 것 같다.



남성은 그녀를 미워한다기보다는, 더욱 잘해주지 못해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또한 남성은 그녀를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며, 또한 알았더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자신은 이런 부분에서 너무나 부족한 사람이기에,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녀도 나름 이런 환경을 이해했는지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고



나름대로 씩씩하게 자라고 적응했던 것 같다.



그는 그녀가 조직의 일에 엮이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녀는 조직의 일을 너무나 잘했고



또한 그녀 스스로도 조직의 일이 좋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지금까지 그녀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그녀에 대한 안타까움을 지니며 지내던 도중 그녀가 변하기 시작한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며, 휴대폰을 보며 끙끙 앓거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혼잣말을 할 때도 있고



밖에 나가서 누군가를 계속 쫓아다니거나



조직원 중 아무나 붙잡아서 이런 건 어떻게 하나, 저런 건 어떻게 할지 등



말이 매우 많아졌다고 한다.



그녀에게 놀랐던 남성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고 한다.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이냐고.



"그 고민은 자네에 대한 것이었다네.... 연빈군."



커피를 마시며 딸아이의 성장에 흐믓해하는 남성.



"그 아이가 드디어 사람다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지.



처음 느끼는 감정에 애달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강렬한 욕구.



내가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처음 본 모습이었다네....



원래 다른 부모라면 화를 내거나 경계할 법하지만,



나는 그저 기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그도 그럴 게 아이가... 생각을 보여주지 않던 그 아이가....



너무나 수줍어하고, 기뻐했으니까 말이야......."



딸의 재롱을 보는 부모처럼 남성의 얼굴은 부모의 웃음을 짓고 있다.



"나는... 솔직히 아이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네.



나로서는 도저히 못 했던 것이지만, 누군가가 아이의 행복이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네....



연빈군...."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남성. 그녀의 아버지.



"내가 자네에게 부탁함세....



아니 무릎을 꿇고 빌 수도 있다네.



그러니 부디. 아이를, 우리 딸을....



자네가 도와줄 수 있겠나?"



"......."



그녀와 남성의 사정은 충분히 이해했다.



내가 얼마나 그녀에게 특별했는지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아가씨와 어르신의 기업을 따르는 몸.



솔직히 나 스스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래도,



그래도, 나랑 비슷한 처지인 그녀가 마음에 걸린다.



그녀를 냉정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



내가 아가씨 없이는 살 수 없었듯이, 그녀도 그럴 것이니까.



"......"



나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리는 그.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렇게 자유로운 몸은 아닌지라 쉽게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가...."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녀를 돕겠습니다."



"자네는... 괜찮은 것인가?"



그의 눈동자가 커지며 나를 배려해 주는 것 같은 말.



"분명 아이와 함께하다 보면 오늘 같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네.



일이 일이다 보니 피투성이로 나타날 때도 많을 거고.



자네는 정말로 괜찮은겐가?



꺼림칙함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 거절해도 괜찮다네."



"회장님께서, 아니 아버지가 친히 부탁하실 정도인데 제가 못 할 것이 있나요.



저도 어렸을 적은 좋지 않았는데, 그녀와 비슷한 처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고맙네... 고마워......"



남성은 밝은 얼굴로 서랍에서 양주를 꺼내더니 잔 두 개를 들고 나에게 가져온다.



그리고 잔에 따라지고 나에게 전해지는 술잔.



"부디. 우리 딸을 잘 부탁함세."



"감사합니다."



'짤랑!'



남성과 술잔을 건배하며 한잔 마신다.



"나가면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것이네. 오늘 고생 많았으니, 푹 쉬게나."



"들어가 보겠습니다."



밝아진 사무실을 뒤로하고 안내원을 따라 다른 곳으로 가니



식당처럼 차려진 음식과 함께



"와... 왔는가."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가 있다.



"......"



아무말도 하지 않자, 불안해보이는 그녀.



"음... 우리."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친구부터 할까? 순 씨?"



이 말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응!"





6



순. 영어로는 sun.



이름부터 따지고 싶어지는 그녀는 예상대로 손이 많이 가는 여성이었다.



예전 어린 아가씨를 돌보았을 때처럼, 다 큰 여성을 상대로 아이 돌보듯이 하나하나 가르쳐주는 일들이 다시 벌어진다.



예를 들자면,



그녀로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가 꽤 자주 오게 되었는데, 업무상 전화를 받지 못할 경우



부재중 통화가 세 자리에 가까워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통화는 받기 힘들 때도 있으니 간단한 것은 문자로 연락할 것’



이라는 규칙을 정한 뒤에야 통화 빈도는 줄어들었다.



대신 그만큼 문자가 많이 오게 됐지만.



그리고 예전의 아가씨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다.



휴일마다 구실을 만들어 나를 만나려 하기에, 내 황금 같은 휴일이 아가씨와 순의 대응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가씨와의 시간은 편하기에 어렵지 않아도 순과의 시간은 어딘가 모르게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아가씨로부터



"오빠, 요즘 너무 바쁜 거 아니야?"



라는 의심을 받을 정도로, 그녀는 외출할 때 나를 꼭 데리고 가려고 한다.



실탄 사격장에서 반동 강한 데저트 이글을 한 손으로 평범하게 연사해 놓고서는 나에게 뒤돌아보며



'어땠어?'



라는 표정을 지으면, 뭐라 반응해 줘야 할지.



노래 부르기 좋아하는 나를 따라온 코인 노래방에서 절망적인 음치로 노래를 부르다 마치고



낮은 노래방 점수를 보고 잘했다며 박수를 쳐주어야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렵게 된다.



그래도 순, 그녀 나름대로 나에게 배려해 주며 열심히 하려고 한다.



다만, 상식이 어긋나있다 보니 내 기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하루는 요리를 대접해 주겠다며 저녁때 초대받았는데,



'본인 기준'으로 넉넉하게 준비하여 성인 20인분의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자신의 배에서는 엄청난 신호음이 들리고 있으면서도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듯



눈앞에서 바라보아지는 식사는 수사당하는 느낌을 주었다.



혼자서 다 못 먹었고, 그녀와 같이 먹어도 남아서 남은 건 조직원에게 나눠주었다.



맛은...... 괜찮았다고 하자.



마지막으로 남녀 간의 거리감이 아가씨 이상으로 마비되어 있다.



지방 출장이 있었을 때, 나 혼자 편안히 쉬어야 할 숙소 주변에서 갑자기 그녀와 마주쳤다.



'우연히' 그곳에 있었을 뿐이라며 또 강제 에스코트를 당하다 숙소까지 침입.



끝끝내 내 방에서 나가려 하지 않기에



"다 큰 여자가 남자랑 같이 잔다는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말하면



"나랑 같이는... 싫은가?"



라며 버림받은 대형견 같은 표정으로 슬퍼한다.



이 이상 거절해도 듣지 않을 것 같아서 반쯤 포기하고



"오늘 밤만 같이 자는 거다."



라는 말에 해맑은 미소로 응답하는 아이 같은 모습.



그녀의 몸을 의식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잠들 수 있었는데,



도중 너무 더워서 잠이 깼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를 곰인형 껴안듯이 자고 있어서 체온 때문에 더워진 것이다.



큰 체형으로 나를 인형같이 만들어 버리는 압도감에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자는 동안에도 힘이 들어간 건지, 나를 감았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력을 다해 팔과 그녀의 몸을 간신히 밀어도, 얼마 되지 않아 그녀가 나를 다시 껴안아 버린다.



결국 그날은 저항하다 지쳐서 잠들어버렸으며, 다음날 서로 땀에 엄청 젖은 채로 일어나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휘둘리며 피로함이 배로 늘어버린 최근,



아가씨로부터 대학교 데이트에 초대받게 되었다.



"꽤 시간이 지나서 대학교로 불렀네."



"적당한 시기를 정하느라 힘들었어. 사람들도 다 모이는 행사 때 딱 좋겠다 싶어서!"



팔에 달라붙은 아가씨와 함께 대학교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저기! 내가 수업 들으러 자주 가는 건물이야!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하더라고."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아가씨는 기쁜 듯이 나에게 소개한다.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보니,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가씨가 흔히 식사하는 대학교 식당.



딱 학생이 먹을만한 식단이어서 그냥 평범하게 먹지만,



"오빠, 이거 한번 먹어봐. 아-"



생각지 못한 아가씨의 권유에 먹었다가.



"나한테도 해줘~"



라며 먹여주기도 하거나.



주변에서 본다면 바보 커플이 분명할 것이다.



그녀 뺨에 묻은 것을 물티슈로 지워줄 때



"오빠는 어디서 다른 여자한테 이렇게 잘해주면 안 돼?"



라는 말을 들었다.



아가씨를 돌보는 것이 몸에 익다 보니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여자의 호감을 사는 행동을 자주 한다고 듣는다.



혹시 순, 그녀도 내 습관 때문에 그런 것일까?



식사 후 카페에서 디저트 타임.



커플 한정 메뉴를 시키면서 남사스러운 시간을 한참 보냈을 때,



잠깐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남자 화장실에 들렸다.



볼일을 보고 문으로 나가려 할 때 문이 열리더니



"순?"



그녀가 문 앞에 있었다.



"우연이네. 이런 곳에서도 만나고."



분명 우연이 아니겠지만.



그런데 그녀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



화장실로 걸어들어오며 나에게 다가온다.



"어이, 여기는 남자 화장실이야. 너가 들어올 수 있는-"



'쾅!'



그녀의 오른팔이 내 뒤의 벽을 강하게 짚었다.



시멘트벽에서 저런 소리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누구인가...."



"으...응?"



"같이 다니던 여자. 누구인가."



"아. 소개한 적은 없었나. 내 아가...... 여동생이다."



아가씨라고 말했다가는 더욱 곤란해질 것 같아서 여동생이라고 했다.



"정말 여동생이 맞는가?"



순은 이럴 때만 판단이 날카로워진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싶었지만, 거짓말도 아니다.



"응. 여동생 맞아. 나랑 너무 다르게 생겨서 오해받을 때도 많아."



"......."



그녀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는지 벽에 몰아붙인 자세에서 계속 고민하는 듯하다.



"나, 이제 가야 하는데, 비켜줄 수 있을까?"



나름 짜증 난다는 말투로 그녀의 주의를 끈다.



"미...미안했다."



주눅 든 표정의 그녀와 같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나는 카페로 돌아간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모른 채.



그날 밤.



침대에서 휴대폰 보며 뒹굴다 이제 슬슬 잘까 하던 때.



전화가 울리며 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무슨 일 있어?"



'오늘은 미안했다....'



"아, 뭐 괜찮아...."



'즐거워 보였다.'



"응? 누가."



'너가. 정말 밝게 웃고 있었다.'



"가족이니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



'나한테는 그런 얼굴 보여주지 않는다....'



"아... 미안......."



'나도 가족처럼... 될 수 있는 건가.'



"글쎄... 그건 쉽게 말할...."



'...... 혹시 이번에 나랑 같이 나가줄 수 있는가.'



"어디 가려고...... 이번 주에 시간은 어렵고, 다음 주 토요일 어때?"



'알겠다. 그러면 그때 만나겠다.'



"그래. 다음에...."



그녀 특유의 짧은 말 화법.



처음부터 많이 당해서 이런 소통 방식이 익숙하다.





7



"아...아-"



그녀와 약속이 잡혔던 당일.



이전에 와본 적 있었던 스테이크 집에서 갑자기 그녀는 입을 벌리며 저런 말을 한다.



"응? 나보고 먹여달라고?"



"그... 그렇다. 아-"



수줍어하면서 자기에게도 해달라고 한다.



"아니, 꼭 그렇게 해야 해?"



"여동생에게 주는걸... 봤다. 나는... 안되는가?"



그때 엿보고 있었던 것이냐고!



이런 건 빨리해 주지 않으면 나만 피곤해지기에 냅다 조각을 찍어서 그녀 입에 물려준다.



"으믐... 맛있다. 자, 아-"



"그게 어...."



그녀에게까지 당하고 싶지는 않아서 거절할까 싶었지만,



나에게 먹일 때까지 팔을 내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에 주변의 시선이 모이는 것 같다.



"냠. 음. 맛있네."



나는 재빨리 먹어서 이 상황을 끝낸다.



오늘은 이걸 위해 불렀었구만!



혹시 모를 불안감은 적중하여 카페에서 하트 모양의 빨대 음료를 마신다거나 했다.



"너무 부끄럽다고... 이런건...."



속이 더부룩한 것 같아 컨디션이 좋지 않다.



화장실에서 속을 다스리며 진정시키고 있을 때



정장을 입은 남성 셋이 화장실에 들어온다.



백화점의 경비겠거니 하며 거울을 바라보는데,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덥썩!'



갑자기 검은 주머니가 뒤집어씌워지더니 내 몸이 들어 올려진다.



"으웁! 으으으으웁!"



주머니가 얼굴을 조여서 입을 열 수 없다.



나를 들어 올린 남성들은 비상계단을 통해 어디로 가는 것 같았다.



"으우우우우웁!"



발악해 보아도 바닥으로부터 들어 올려진 내 몸의 저항은 남성들에게 쉽게 제압당할 뿐이다.



"이 남자가 맞습니다. 가시죠."



차 문이 열리더니 나를 넣고서 시동이 걸린다.



'치이이익’



나를 향해 스프레이 같은 것이 뿌려지더니 갑자기 졸음이 쏟아진다.



아... 이러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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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에 잠에서 깬다.



눈을 뜨니 낯선 공간.



심지어 내 몸은 의자에 묶여있다.



납치당했던 일이 생각나서 판단력이 예리해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자니 문이 열린다.



"잘 잤는가. 기둥서방."



조직원으로 보이는 남성 셋이 들어왔다.



"잠깐 우리가 벌일 일이 있어서, 협력 좀 해줘야겠어."



그런 말을 남기고는 내 휴대폰을 그들이 꺼냈다.



내 손의 지문을 강제로 대어 잠금을 해제한 뒤 휴대폰을 조작하는 그들.



"김연진이라... 이거 안챈기업 회장 딸 아니야?"



순간 아찔해진다. 아가씨에게도 위협을 하는 것일까.



"형씨. 형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조사했다고. 그러니까 우리 말 순순히 듣는 게 좋아."



아가씨에게 허튼짓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가씨에게 더욱 해가 될까 말을 삼켰다.



"그래,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다칠 일은 없다고."



남성은 껄렁하게 말하며 내 휴대폰을 계속 조작한다.



"순 알지? 건영 회장의 순. 이 여자 부를 때 반말로 했었나?"



"반말로 하지...."



"그래? 그러면, 00공원 오후 8시까지 와줘. 이렇게 보내도 되겠네?"



내 휴대폰을 가지고 사칭해서 연락을 보낼 생각이다.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더 이상의 말은 그녀에게도 안 좋을 것 같기에.



"머리가 좋은 형씨네. 뭐 상관없어. 조금 쉬다가 다시 보자고?"



내 휴대폰을 가져가면서 그들은 방을 나간다.



나는... 아가씨는... 순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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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피로로 의자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을 때,



방문이 열리고 남성들이 다시 들어왔다.



내 휴대폰 너머로 보이는 것은 평소와 다른 순의 모습.



"연빈! 괜찮은가!"



영상통화로 나와 순을 통화시키려는 것 같다.



"......?"



상황을 머리로 따라잡지 못해 그녀의 말에 멍때리게 된다.



"건들지 말라! 그는 건드리지 말라! 건드렸다가는, 내가... 내가 다 죽일 테다!"



"어이어이, 그런 무서운 말 하지 말라고? 우리는 이 남자한테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조직원은 나를 인질로 삼아 그녀에게 협박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잘 있는 것을 보았지? 너가 잘 움직여 준다면 그도 무사할 거다.



어때? 이제 고분고분해질 마음이 드나?"



"크흐윽!"



"얌전히 잡혀서 이쪽으로 오도록. 그러면 이 남자도 무사히 풀릴 수 있을 것이다."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



그녀가 포기하는 듯한 목소리.



"협력 고맙네~"



나에게 그 말을 남기며 다시 방으로 나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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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이 조금 흘렀을까.



문밖으로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다.



'퍽!'



'깡!'



이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소리.



밖에서 싸움이라도 난 것 같다.



'쾅!'



갑자기 문이 급히 열리더니 한 남성이 급히 들어온다.



"너, 잔말 말고 따라와!"



내 손에 수갑을 채우고 의자에 묶인 줄을 푼다.



내 팔을 잡아채어서 복도 밖으로 나가니,



몇 인원이 무기를 들고 분주하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러다 인질극까지 벌어지는 건가.'



그렇게 현실에서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조직싸움을 보며 말없이 남성을 따라간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자, 주차장은 조용한 것 같았다.



'끼이이이익!'



아니, 조용했었다.



주차장에 차들이 몰려오더니



"저기 있다!"



조직원들끼리 부딪혀 패싸움이 시작된다.



"아, 진짜. 일 꼬이게 하네."



남성은 차로 나갈 수 없음을 보고 조직원 몇과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1층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통로에서



"연빈!!!!"



그녀는 목소리와 함께 통로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야이 씨! 쟤 발 좀 묶어놔!"



그렇게 주변의 조직원 몇을 보내고 남성은 나를 뒤로 끌어가려는데,



'퍽!'



'우드득!'



'콰직!'



둔기의 소리와 함께 사람의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남성이 끌고 온 곳은 뒷문인 듯하였으나



"안 되겠습니다. 뒷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열리지 않는 것 같다.



남자는 내 얼굴을 보더니 나를 앞세우고 머리 뒤에 무언가를 댄다.



'찰칵’



"?"



내가 처음 듣는 소리에 반응을 보이자.



"허튼짓 하지말어. 머리에 바람구멍 나기 싫으면."



말과 함께 머리를 툭툭 민다.



머리 뒤에 있는 것은 권총일 것이다.



그녀를 봤던 복도로 다시 와서 남자는



'타앙!'



"어이! 너네! 잘 들어. 이 사람 죽이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



총을 한번 쏘고 주의를 돌린다.



혹여나 했었던 인질극이 시작했다.



"연빈......."



그녀는 총에 노려지는 내 모습을 보고 두려워한다.



"어이 순, 너 때문에 되는 게 없네 진짜."



'타앙!'



남성이 그녀의 오른 어깨에 총을 쐈다.



"끄흐윽!"



"혼자 오면 될 것을 건영 놈들까지 다 끌고 왔네? 이 남자 살리고 싶지. 그치?"



"그는... 그는!"



"알아, 알어.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뒷걸음으로 정문까지 나가."



"알겠다...."



그녀는 한쪽 어깨를 붙잡으며 뒤로 걷는다.



한 걸음. 두 걸음.



걸을 때마다 옆의 쓰러지고 피 흘려 엎드려진 사람을 지나친다.



부러진 배트, 굴러다니는 쇠파이프와 칼.



그리고 군데군데 고인 피.



"좋아. 조금 더 뒤로. 어이, 거기 너! 아직 움직일 수 있나? 그래 그년 뒤에서 팔 좀 묶어버려."



그녀가 뒷걸음으로 다른 조직원에게 다가가 팔을 잡힐 때



'타앙!'



'슈우욱!'



'털썩!'



총성이 들리더니 등 뒤가 가벼워진다.



그녀가 멀쩡한 팔로 권총을 이쪽에 겨냥하고 있다.



"이런!"



'퍽!'



그녀는 재빨리 뒤돌아 뒤의 조직원을 제압한다.



권총 들던 팔로 한방.



머리를 잡고 니킥으로 넉다운.



'털썩!'



"연빈! 연빈! 괜찮나?!"



그렇게 통로 쪽 상황이 정리되자 그녀는 나에게 휘청거리며 달려온다.



이 건물에서 가장 멀쩡한 사람이 인질이었던 나. 웃기는 일이다.



"미안하다. 끄으으으윽! 미안.....하다......."



그녀는 눈물이 맺히며 계속 미안하다는 말뿐이다.



"곧 경찰이 올 겁니다! 어서 가요!"



건영 조직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급히 와서 우리를 데려간다.



"당분간 조사 때문에 숨으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차에서 전해지는 조직원의 말.



"숨는다라.... 숨는 건 내키지 않는데...."



아가씨를 뵈어야 하는데, 숨게 되면 서로 큰일이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침울한 표정의 조직원과



"미안하다...."



옆에서는 더욱 죽을상인 그녀.



"혹시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지내기만 해도 괜찮을까?"



"저희 회사에 있는 것이 가장 안전하지만...."



"그렇군...."



내가 경찰 조사 대상이 되면 필연 그녀도 걸리게 된다.



쓰러진 사람뿐만 아니라, 총에 대한 것까지도.



이제와서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정말 심각한 일에 휘말렸었다.



아가씨와 어르신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안챈기업 밖에서는 이런 식으로 휘말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안챈기업의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나와 아가씨가 종종 사용했던 별장을 가겠다고 전한다.



"혹시 내 집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



운전하던 조직원에게 말한다.





8



"오빠!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다치지는 않았어?!"



짐을 챙기고 도착한 별장에서 있자니 아가씨가 밤늦게 도착했다.



"별건 아니고, 운이 안 좋게 일에 휘말려서.... 다치지는 않았어."



"어휴... 정말 걱정했잖아! 또 예전처럼 그런 일 벌였다가 감옥이라도 가는 줄 알았네!"



"미안 미안. 이번은 정말로 휘말린 거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진짜! 오빠랑 같이 갈 곳이 많은데, 별장 생활이라니 으으웅!"



그녀도 내가 다치지 않은 것을 보니 안심한 듯하다.



어르신에게 먼저 연락을 했었으니, 당분간은 문제 없이 이곳에서 회사 일을 할 수 있다.



"오빠가 여기 있는 김에 나도 여기서 휴양이나 할까?"



"안돼. 너는 학교 가야 하잖아."



"학교는 방학할 때까지만 통학하면 되지! 예전처럼 바비큐도 같이 하자!"



"못 말려 정말...."



유일한 문제라고 하면



'연빈. 아픈 곳은 없나?'



순의 연락.



이 기회로 그녀랑 거리를 두려 한다.



아가씨와 어르신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 이상은 내가 엮일 수 없다고 느꼈다.



분명 건영 회장님에게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녀를 돕겠습니다.'



라고 말했었고, 지금은 확실히 '할 수 없는' 정도다.



회장님과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지만,



아가씨와 어르신을 생각한다면 내가 선택할 길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몸은 괜찮아. 당분간 조용히 있어야 하니까 연락은 하지 말아줘.'



'>연락은 다른 번호로 하면 괜찮지 않은가?'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당분간 연락 못 할 것 같아.'



'>잠깐, 이해를 못 하겠다. 한번 전화하고 싶다.'



나는 전화를 무음으로 돌려놓고 휴대폰을 집어넣는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내가 휘둘리기만 했어서 그런지, 그녀는 여전히 저돌적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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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생활이 한 달을 조금 넘었다.



첫날 순의 착신 이력은 세 자리를 넘어서 계속 왔기에 휴대폰 차단 번호에다가 등록해 버렸다.



이전보다 훨씬 조용해진 휴대폰과 고요한 별장 주변.



바쁘게 지냈던 과거와 비교해 보니 이곳에서의 생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아가씨도 곧 학교 방학이 시작되니 별장에서 같이 지내자고 하는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불안함이 느껴진다.



거리감 제로의 밀착 생활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그 전에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오늘 사람을 불러서 내 집으로 돌아와 봤다.



우편함에 꽂힌 많은 우편.



그중 한 우편은 손 글씨로 '연빈에게'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안에는 usb가 들어있고, 영상이 저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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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IOjfswRriE






할아범.



>네 아가씨. 무슨 일인지요.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기쁜 소식이군요. 그렇지만 아가씨는 다른 고민이 있으신 것 같군요.



그게... 그는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로부터 미움받았다는 것일까요?



그런 것 같다.



>그가 아가씨에게 '싫다'고 말한 적이 있을까요?



그런 적은 없다.



>그러면 왜 미움받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나와 연락해 주지 않는다.



>아, 이전에 잡혀갔었던 그 분이군요.



맞다. 그런데 그 이후로 연락이 안 된다.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들었는지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잠깐 동안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너무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마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네요.



그런 것 같다. 답장 한번 없고, 전화도 신호가 가지 않는다.



>연락받지 않았다 해서 아가씨를 미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불안하다.



>아가씨께서 그에게 서투르셨던 것 같군요



언제나 잘해주려 했는데, 항상 실패했다.



>아가씨께서 그에게 노력했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그래도 그가 모르면 소용없다.



>그도 아가씨와 함께하면서 웃지 않았던가요?



웃기도 했고, 힘들어했을 때도 있다.



>그런 추억이 있다면 그도 아가씨를 떠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힘들게 하는 게 아닐까 두렵다.



>그에게 미안한 일이 많았나요



많은 것... 같다....



>그래도 다시 만나고 싶으신 것이지요?



다시... 만나고 싶다....



>만난다면 이전처럼 그를 또 힘들게 할 것 같나요?



그럴 것 같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아가씨를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수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다....



>아가씨가 볼 때 그는 강한 사람이었나요?



여리고 너무 착했다. 그래서 항상 조심했었다.



>그런 아가씨를 거절하지는 않았군요?



뭐라고 했어도 계속 함께 해줬었다.



>그에게 해주려다 실패한 것에는 무엇이 있나요?



내가 총 쏘는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그는 좋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노래를 불렀는데, 잘 부르지 못했다.


음식을 해주려 했는데, 그가 얼마나 먹는지 몰랐다.



>아가씨 없이도 그는 행복했을까요?



여동생하고 있을 때 행복해 보였다. 나에게는 그런 얼굴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행복할 수 있다면 아가씨께서는 그와 헤어질 수 있겠나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를 향한 아가씨의 마음은 잘 알았습니다. 이제 그에 대해서 물어보죠.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한테도 그래서, 빼앗길 것 같았다.



>그는 아가씨의 욕심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못할 것 같다.



>그는 아가씨에게 준 것이 있었을까요?



머리를 손질해주었다.


옷을 골라주었다.


친구가 되어주었다.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어 줬다.


영화관도 같이 가보고,


놀이공원도 같이 가줬다.


화장도 알려주었다.


나보고 어엿한 여성이라고 했다.


나보고 예쁘다고 해줬다.



>아가씨는 그와 있어서 행복했나요?



너무 행복했다. 즐거웠다.



>아가씨는 그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나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그런데도 함께 있어 준 그는 아가씨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면 그의 마음을 알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방법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면 이 늙은이의 말을 따라보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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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서는



무대에 선 그녀. 화장과 옷으로 단장하고 마이크 앞에 서 있는 모습.



반주와 함께 그녀가 노래를 부른다.



음치였던 그녀가 음에 맞추어 가사를 부른다.



목소리와 표정에서 보이는 그녀의 감정.



후회, 기쁨, 추억 그리고 결심



'그댈- 위한- 나의- 사랑-인-걸-요---'



노래의 장렬한 마무리와 함께 눈물을 훔치는 모습.



"하... 음치가 사람 감동하게 만드네...."



그녀는 나와 닮았다.



나는 아가씨에게.



그녀는 나에게.



아가씨 없는 나는 사는 의미가 없다면,



내가 없는 그녀도 사는 의미가 없을까.



아가씨가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면 나는 너무 괴로울 것이다.



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녀는 괴로울 것이다.



내가 예전에 버림받아 거울 앞에서 울던 모습은



지금 나에게 버림받아 화면 앞에서 우는 그녀의 모습이다.



"헤어 나올 수 없이 엮여버린 것인가...."



휴대폰을 들어 그녀의 수신 차단을 해제한다.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어본다.



몇 분이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내가 아가씨에게 버림받으면 어떻게 될까?



폐인이 되거나 자살하거나.



그녀가 나에게 버림받았다면?



폐인이 되거나 죽으려 하거나.



좋지 않은 예감에 그녀를 만나보기로 한다.



나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하면, 너무나 앞일이 두렵기 때문에.





9



택시를 타고 그녀를 만났었던 건영 건물 앞에 도착한다.



로비로 들어가 얼굴을 아는 경비를 통과하여 엘리베이터에 탄다.



그녀의 방 층수를 누르고 올라간다.



그녀의 방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똑똑’



"......."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다.



'끼이익’



혹시나 싶어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큰 의자가 이쪽을 등지고 있다.



"순? 있어?"



작은 목소리로 말하니



"여...연빈?"



의자가 돌더니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별일 없었-"



"할아범 말이 맞았어...."



"어? 뭐라고?"



(그 영상을 보고 그가 찾아온다면, 그는 분명 아가씨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역시 너도 나를 조...좋아하는구나!"



"뭐...뭐?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역시 할아범은 뭐든지 아는구나. 정말 고마워!"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온다.



나는 뒷걸음으로 문고리를 잡아보지만



'쾅!'



그녀의 팔이 내 뒤의 문을 닫는다.



"여...연빈. 니가...니가......."



"왜...왜 그래?"



"니가 먼저 유...유혹한거다!"



"?! 으으우웁!"



갑자기 틀어막히는 입.



그녀의 손이 내 머리를 강하게 붙들고 있어서 떼어낼 수 없다.



"스우우웁! 스우우웁!"



그녀의 거친 호흡이 얼굴에 닿는다.



"으으으읍! 으으으으으읍!"



그녀를 떼어내려 애써보지만, 그녀의 팔 힘을 이길 수 없다.



"하아아!"



'콰당!'



그녀가 입을 떼고 동시에 나를 바닥에 넘어뜨린다.



"잠깐! 지금 뭐 하는 거야!?"



"괜찮다. 나한테 맡기면 된다."



그녀는 내 허리 위로 올라타더니 재킷과 셔츠를 벗는다.



열기와 함께 땀이 맺힌 그녀의 몸.



저런 신체에 내가 저항할 수 있을까 싶다.



"잠까아안! 오자마자 이게 무슨 짓이냐-"



"연빈. 니가 먼저... 꼴리게 한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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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늦게 떠올라서, 늦게 써서, 늦게 올림.



근데 쓰고보니 느와르가 적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