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온다. 

 

이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바람에는 무엇이 실려있을까.

 

항상 생각해온 문제였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바람에 몸을 맡겨봐도, 한 걸음 떨어져 바람의 흐름을 쳐다보아도, 혹은 바람과 하나가 되려 애써보아도, 이 바람에 무엇이 실려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바람이 따듯함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혼자서 청승맞게 뭐해.”

 

하지만 그 고민도 잠시일 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깟 바람은 나에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못했다.

 

“지휘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한다. 언제나 몸에 걸치고 있는 그리폰의 붉은 제복과 부드러운 미소가 잘 어울리는 당신의 얼굴을.

 

“이제는 좀 자연스럽게 웃네, 얼마나 보기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를 그린 걸까. 하기야, 나는 당신을 마주할 때마다 안정과 행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다 당신 덕분이다.”

 

이번에는 조금 더 화사한 미소. 마찬가지로 당신의 얼굴 또한 한층 화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늘 빛이 나고 있었고, 그 빛을 남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말 그대로 따듯한 사람이었다.

 

나 또한 그의 빛을 나눠 받은 사람 중 하나이고.

 

“그래서, 혼자 뭐 하는 거야? 맨날 시간 날 때마다 여기 오는 거 같은데.”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전부다.”

 

의문 어린 질문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와 대화하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럼 이거 받아.”

 

“지휘관? 이건…….”

 

그는 갑작스레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손을 펼쳐 그가 준 물건을 확인하니, 작은 꽃잎 하나와 씨앗이 나를 반겼다.

 

푸른색의 꽃이었다. 빨려 들어갈 듯 청아한 그 색감에 한 번 놀랐고, 그 옆에 있는 씨앗의 정체에 두 번 놀랐다.

 

“푸른 장미. 오다 주웠거든.”

 

거짓말일 것이 뻔했다. 그는 본인의 방에서 늘 꽃을 가꾸고는 했으니까.

 

하지만 기분이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도 자신의 거짓말이 간파당하리라는 걸 알고 있을 게 뻔했으니까.

 

“본래 푸른 장미는 실존하지 않았어, 식물의 꽃에서 푸른색을 내게 하는 색소는 델피니딘인데, 장미에는 델피니딘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꽃말은 얻을 수 없는 것, 그리고 불가능.”

 

그리 말함과 동시에 지휘관은 슬쩍 눈웃음을 그렸다. 그 매력적인 눈웃음에 잠시 홀린 사이, 내 손에는 어느새 또 하나의 푸른 꽃잎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2004년 이후 푸른 장미의 개발에 성공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사랑, 그리고 기적이라는 새로운 꽃말이 추가되었다네. 참 재미있지 않아?”

 

굳이 대답 하지 않았다. 단지 입꼬리를 슬쩍 올려 보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으니까.

 

따지자면 그와 하는 일체의 행위 전부가 즐거운 것이지만, 그럼에도 즐거운 것은 사실이니 딱히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걸 나에게 주는 이유가 뭔가.”

 

“그냥, 네가 이렇게 편하게 웃는 게 참 ‘기적’ 같아서.”

 

“후후, 다 당신 덕분이 아닌가.”

 

“뭘 그런 걸로.”

 

사실이었다. 나를 위로해주고 늘 신경 써주던 건 AK-12와 함께 당신도 포함되었으니까.

 

그런 당신의 따듯하고 다정한 마음에 나는 조금 특별한 마음을 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알까. 가슴이 따듯해지는 이 날아오를 듯한 기분을, 당신이 알고 있을까.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하다못해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하지만 굳이 티는 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당신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과분할 정도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삐빅.

 

“아, 잠깐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그의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고, 그것은 곧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오늘 시내로 나간다고 했나.”

 

“응. 잠시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나, 나도 같이 가는 건 무리인가?”

 

“미안, 아쉽지만 정말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야. 대신 끝나고 좋은 선물 하나 가져올게.”

 

용기를 쥐어짜 낸 말이었지만, 아쉽게도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허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약속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아쉬움은 어느새 눈 녹듯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알았다. 그러면 무사히 다녀와라. 지휘관.”

 

“그래. 내일 봐. AN-94.”

 

가벼운 인사를 마친 후,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천천히 언덕에서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나는, 그가 약속한 선물을 기대하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리고 3시간 후, 지휘관이 인권 단체의 테러에 휘말려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휘관이 죽었다.

 

처음에는 거짓으로 치부했다. 이따금 나오는 그의 짓궂은 장난이라 생각하며, 만나면 꼭 크게 화낼 것이라며, 조급함을 감추지 못한 채로 빠르게 움직였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사람. 니토에게 납치되어도 끝끝내 살아 돌아온 사람, 그 어떤 역경과 고난에서도 기적과 같은 힘으로 늘 극복해온 사람.

 

그런 사람이 죽었으리라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동하는 내내 자기 암시를 했다. 거짓말이야, 그래. 이번에는 장난이 심하니까, 꼭 화를 내야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거짓말이어야만 해.

 

세뇌에 가까운 자기 암시를 반복하며 현장에 도착하자,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그의 사체였다.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이었다. 아니, 감히 지금의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날것 그대로의 신선한 충격과 잔혹하디 잔혹한 비참한 현실, 오직 그것만이 지금의 우리를 나타낼 수 있었다.

 

사고였다. 말 그대로 사고, 인권 단체가 테러를 저지른 곳에, 정말 우연히 그가 있던 것이다.

 

항상 자신보다 남을 우선시 하던 그는 민간인을 위해 인권 단체의 시선을 끌었다. 그런 그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부상자는 많아도 사망자는 그 하나뿐이었다.

 

그의 사체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늘 보여주던 화사한 듯 은은한 아름다운 미소.

 

당연히 나는 웃지 못했다. 나의, 우리의 세상은, 지금 막 무너졌으니까.

 

어처구니가 없었다. 죽은 자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그리고, 산 자는 절망에 휩싸여 눈물을 흘린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만약 우리가, 아니, 단 한 기의 인형이라도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자리의 이들 전원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다들 통절하며 하염없는 비참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날 지휘부의 전원은 인권 단체 세력을 습격했고,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은 채 전원 사살했다.

 

날아오는 피가 내 얼굴을 적시고, 그들의 비명이 하나의 화음을 만들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갔으니까.

 

그렇다고 후련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애꿎은 화풀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는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죽은 자는, 그 무슨 짓을 하더라도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렇게 청소가 끝나고, 자리의 전원은 그대로 주저앉아 허무감을 만끽했다. 돌아오지 않는 그를 향해 눈물 흘린 것은 덤이고.

 

시간 또한 우리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당신이 죽었음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갔지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아…… 지휘관님…… 지휘관님…….”

 

지휘부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울려 퍼지는 곡소리는 일상에 불과했으며, 제정신을 붙잡은 이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 손에 들어가지 못했다.

 

“지휘관…… 지휘관…….”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 흘리고, 흘린 눈물은 자책으로 뒤바뀌고, 자책하며 울부짖다 결국에는 그리움에 사무쳐 눈물 흘리기를 하염없이 반복한다.

 

끊기지 않는 굴레는 그날 이후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 끔찍한 순환 과정은 내가 죽을 때까지 반복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내가 슬퍼할 때 당신은 나를 위로해주었다. 내가 자책할 때 당신은 내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었다.

 

당신이 있을 때, 나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 눈물 흘리고, 슬퍼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당신이 아파하는 사이 나는 무엇을 했는가, 당신이 목숨 걸고 다른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사이 나는 무엇을 했는가, 당신이 죽어가는 사이 나는 대체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아팠을까, 점차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왜 그의 곁에 없었을까.

 

“흐흐……흐흐흐흐…….”

 

이제는 웃음이 나오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것이 작금의 상황을 유쾌하게 여기고 있어서는 아니었고, 단지 언제나 한발 늦는 자신을 자조하기 위한 웃음이었다.

 

하염없는 슬픔은 분노로 치환되고, 갈 곳 잃은 분노는 나를 향하고, 나를 향한 분노는 곧 자책으로 나타난다.

 

아니, 내 탓이 맞았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완곡하게 말을 했다면, 그의 의견에 반대했다면, 지금의 나는 웃고 있었을까?

 

결과론적인 생각이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둠에 사로잡혀 정상적인 사고는 불가능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나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빛이다. 찬란한 빛.

 

나에게는 없는 빛, 당신이 나에게 건네준 빛, 당신이라는 이름의 빛.

 

더는 존재하지 않는 나의 빛.

 

그렇기에 나 절망하고, 눈물 흘리고, 후회에 사로잡혀 하염없는 절망을 느끼고, 하루를 흘려보낸다.

 

“……아.”

 

그러던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리니 나는 어느새 그의 묘 앞에 서 있었다.

 

묘에는 수없이 많은 꽃이 놓여 있었다. 이것은 곧 그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나타냈고, 그와 동시에 그리움의 무게를 표현하고 있었다.

 

내 손에는 두 가지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가 준 푸른 장미의 꽃잎과 씨앗 하나.

 

 

나는 말없이 씨앗을 땅에 묻어,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물을 부었다. 일련의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나 의문을 품을 법도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정신이 아니었다.

 

“당신이 없는 지휘부는 너무나 쓸쓸하다.”

 

그가 듣기를 바란 것인가,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슬퍼하고 있다. 나 또한 마찬가지고.”

 

어느새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이 자리에 오면 늘 눈물이 나왔으니까.

 

“혼자 둬서 미안하다. 그때 만약 내가…… 당신의 곁에…….”

 

물기 어린 목소리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목이 메어 더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미, 미안하다…… 지휘관…… 내가…… 내가 미안하다…….”

 

다리는 진즉에 풀린지 오래였다. 당신의 이름이 적힌 묘를 보며, 나는 끝없는 슬픔과 함께 눈물 흘리고 있었다.

 

마음이 아프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그때, 그때 당신을 혼자 두지 않았더라면, 내가 옆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해보아도, 답은 언제나 같았다.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 항상 당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신을 지킬 거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당신이 돌아온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절대 혼자 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 제발…….”

 

 

 

 

-째깍.

 

 

 







 

-후회해?

 

“……응.”

 

-무엇을?

 

“…………전부 다.”

 

 

 

***

 

 

 

 

 

 

 

 

 

죽음은 잔혹하다. 소중한 사람을 두 명이나 잃어본 나이기에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간혹 죽음은 아름답다며 개소리를 입에 담는 이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즉시 가족 혹은 그의 준하는 이들의 미간에 총알을 선물해주어야 한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족의 시체를 보며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참으로 역겨울 따름인지라, 나로서는 구역질만 나올 뿐이다.

 

‘이건 에델바이스야. 신기하게 생겼지?’

 

‘흐음~ 이런 식으로 자연스레 꽃을 줄 생각인 거야? 지휘관도 참.’

 

‘헤, 헛소리 그만하고, 받아. UMP45.’

 

소중한 추억. 그가 나에게 건네준 에델바이스의 꽃말이자 잠든 내가 되새기고 있는 기억의 정체.

 

인형은 꿈을 꾸지 않는다. 그저 메모리를 정리하며 과거의 일을 상기하는 시간을 가질 뿐, 그것이 전부다.

 

물론 관점을 달리한다면 그것 또한 꿈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심층 밑바닥에 가라앉은 진실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억을 창조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나는 상관없지만, 행여나 우리 소대원이 그런 일을 겪는다면 무너질 것이 뻔했으니까.

 

 

“…….”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뜬다. 이른 아침의 피로에 의한 불쾌감은 아니었고, 전날 무언가 기분 상하는 일이 있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냥, 순수하게 기분이 나빴다.

 

“하아…….”

 

우선은 한숨을 내뱉었다. 현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의 정체가, 하필 당신이 나에게 선물한 에델바이스였으니까.

 

‘꽃은 참 아름다워.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니까?’

 

늘 웃는 남자였다. 힘든 상황에서도 늘 미소를 유지하며 남을 위하는 남자.

 

그렇다고 우스운 사람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는 그 누구보다 냉철한 사내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은 채, 타인에게 빛을 나눠주는 멋진 사람.

 

그 환한 얼굴을 보는 이들 또한 웃음이 번지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본디 감정이란 전염되기 마련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더 이상 웃지 못한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괜찮으니까. 아직, 아직은 괜찮으니까.

 

우선은 지휘부를 나와 막연한 걸음의 시작을 알렸다. 끊이지 않는 곡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나 또한 정신이 나갈 거 같았으니까.

 

“후우…….”

 

늦가을의 바람은 너무나 시렸다. 허나 뼛속까지 사무친 그리움의 무게에 비하면 이까짓 추위는….

 

아니 잠깐, 내가 무슨 소리를.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낸다. 나도 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다니, 요즘 많이 피곤한 걸까.

 

멈춘 다리를 다시금 움직인다. 사락사락, 잔디 밟는 소리, 벌레의 울음소리, 이제는 희미해지는 지휘부의 곡소리.

 

그렇게 계속해서 걷고 있자니, 참새 한 쌍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새가 되고 싶어,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저 하늘을 거닐 때, 나는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헤.”

 

그는 때때로 새가 되고 싶다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비행기나 타라고 대꾸하긴 했지만, 역시나 미소로 화답할 뿐, 딱히 입을 열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이제 와 다시 되새기면, 신난 건 늘 나였다. 그 환한 얼굴을 보며 나는 즐겁게 떠들었고, 그는 웃고, 그것을 반복한다.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일종의 굴레에 불과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즐거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옆에 있기만 해도 즐거웠다 말하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깝지만.

 

그렇게 한껏 추억에 취한 사이, 참새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저 머나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마치 당신처럼.

 

“아.”

 

내가 또 무슨 소리를. 역시 요즘 피곤한 게 맞나 보다.

 

하긴, 요즘 잠을 설치는 경우가 잦았으니까. 응. 그런 거야. 잠을 제대로 못 자니까. 이렇게 헛소리를 내뱉는 거지,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그렇다면 잠을 설치는 이유는 무엇이지? 생각해보자, 그 원인을 파악한다면 자꾸 이런 식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 내가 요즘 통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모두가 미쳐버린 지휘부, 그리고 울부짖는 UMP9, 빛을 잃은 HK416,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G11.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나를 이렇게 만든 공허함의 정체는.

 

“……당신의 빈자리.”

 

 

흠칫, 토해낸 말에 놀라고,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에 두 번 놀랐다.

 

나는 어느새 지휘부로 돌아와 있었으니까.

 

“…….”

 

하염없는 곡소리를 만끽하며 다시 한번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니, 이번에는 그의 방 앞에 서 있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망설임은 없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당신의 빈자리를 다시 한번 통감하려던 바로 그 찰나.

 

“……누구시죠.”

 

선객이었다. 늘 그를 주인님이라 부르며 옆에서 챙겨주던 금빛의 인형.

 

본디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그녀였다.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이유는…… 뭐.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생각한다.

 

내 정체를 확인한 그녀, 그러니까 G36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꽃을 가꾸기 시작했다. 본래 그의 취미이자, 이제는 유품인 꽃들을.

 

퀭하고 어딘가 비틀린 눈이었다.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름 동료라고 자각하고 있던 만큼, 미량의 불편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

 

그녀의 손길에는 정성이 들어참과 동시에 허망함이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게 여전히 싱그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가 나에게 건네준 꽃, 그러니까 에델바이스에 손을 올렸다.

 

마찬가지로 생기가 가득한 꽃이였다. 차츰 망가져 가는 우리들과 정반대로.

 

“손 떼시죠.”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그 순간. G36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를 향했다.

 

분명 지휘관의 꽃을 지키려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가 남긴 꽃들을 단 하나라도 잃고 싶지 않다는 굳건한 의지와 함께.

 

대답하지는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아 전자전으로 의식을 날려버리고, 나는 에델바이스 한 송이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니, 가벼웠다. 지금 나는 분명 괜찮으니까.

 

‘45! 저거 봐! 구름 정말 예쁘지 않아?’

 

‘자, 선물. 요즘 장갑이 좀 많이 해진 거 같아서.’

 

‘힘들면 말해. 혼자 괜히 삭히지 말고.’

 

나는 괜찮다.

 

‘왜 자꾸 친한 척하냐고? 왜, 우리는 친구인데.’

 

‘이거 받아. 방금 막 다듬은 꽃이야. 예쁘지?’

 

‘바다에 가본 적 있냐고? 응. 몇 번 있긴 한데. 음…… 나중에 같이 가보자. 분명 즐거울 거야.’

 

괜찮아야만 해.

 

‘달이 참 아름다워. 그렇지 않아?’

 

‘헤, 그래.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응. 약속. 우리는 이제 정말로 친구니까. 너를 버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괜찮지 않으면 안 돼.

 

어느새 주먹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도드라진 핏줄은 내가 얼마나 강한 힘을 주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꽃을 쥐고 있는 손은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또 막연하게 걸어 나간다. 이 가여운 발걸음 앞에는 오직 어둠만이 존재하는 것을 알지만, 이제 와 멈추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버렸으니까.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 내디딘다면, 나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그 까닭이 내가 목숨을 거는 스릴에 쾌감을 느끼는 변태여서가 아니라, 이 줄타기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너질 것이 뻔했으니까.

 

그렇게 팽팽한 줄 위의 광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 줄타기의 종착지 또한 결국 어둠이지만, 이미 너무나 멀리 와버려, 나는 멈추어 설 수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또 한걸음.

 

“…….”

 

그리고 나를 반겨주는 당신의 무덤.

 

의도하고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흐르는 의식에 몸을 맡긴 것뿐인데,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본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인 역시 수없이 놓인 오색 찬란한 꽃들.

 

그만큼 당신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고, 당신의 인품에 반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었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조용히 거들어주기로 했다.

 

그렇게 손에 들린 꽃 한 송이를 올려놓은 뒤에는, 작은 새싹 하나가 눈에 띄었다. 싱그러운 생명력을 뽐내려는 듯 열심히 자기주장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해, 나는 수통을 열어 물을 부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고개를 돌려, 당신의 무덤을 바라볼 시간이었다.

 

“……거긴 어때, 좀 행복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애처로운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맴돌았지만,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지휘부는 아직도 초상집이야. 당신이 봤으면 일 좀 하라고 뭐라 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부디 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기를 빌며, 나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은 지 오래였으니까.

 

“나야 뭐, 음, 어때 보여?”

 

차가운 바닥과 하나가 되니 몸은 좀 편해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물론 그것이 당신 탓은 아니었다.

 

“흐흑…….”

 

눈에서 따듯하고도 처절한 무언가 나오지만, 이것이 눈물은 아니었다.

 

마음이 아려오고 가슴이 답답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지만, 이건 눈물이 아니었다.

 

목이 메이고, 시야는 차츰 흐려졌지만, 이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다리는 맥없이 풀려버려 이제는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흐윽…… 흐으윽…….”

 

비록 꼴사나운 신음을 내뱉고 있지만, 비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을 마구 닦아내고 있지만, 비록 내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지나가는 그 누가 보아도 손가락질할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나는 슬퍼하지 않아, 나는 슬프지 않아, 나는, 나는…… 나는…….

 

‘응. UMP45. 말했잖아. 앞으로는 너를 두고 가지 않을 거야.’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벗겨진다.

 

“나…… 나…… 너무 슬퍼……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벗겨진 가면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슬픔, 절망, 그리고 후회.

 

“미안해!!! 미안해…… 지휘관…….”

 

눈을 뜰 수 없었다. 아니, 눈을 뜨기 싫었던 것이다.

 

나는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결국에는 이처럼 눈을 떠버렸고,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격통과 함께 그동안 억지로 외면해온 감정이 파도처럼 몰아쳤다.

 

그렇게 아픈 가슴을 달리기 위해 가슴을 두드려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지금 필요한 건 바로 당신이었으니까.

 

눈을 감는다.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

 

허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직 눈물과 절망만이 나를 뒤덮을 뿐이었다.

 

당신은, 이미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손을 뻗어도, 뻗어도, 닿지 않는다. 너무나 머나먼 곳으로 사라진 당신에게 내 가련한 손이 닿을 리 만무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슬펐다.

 

나 그리움에 사무쳐 절망을 느끼고, 끊이지 않는 공허감에 나 이토록 통탄하고, 나 당신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끼고, 그 절망에 나 눈물을 흐느끼고,

 

그럼에도 돌아오지 않는 당신에 또다시 비참을 만끽한다.

 

이럴 거면 더 잘해줄걸, 솔직하게 내 마음을 전할 걸, 부끄럽다는 핑계로 틱틱대지 말걸.

 

항상 당신의 곁에 있을걸.

 

당신과 함께 그려낸 소중한 추억, 미련이 되어버린 소중한 추억, 그리고 이제는 후회로 뒤바뀐 당신과 함께 그려낸 소중한 추억.

 

“지휘관……아아…… 지휘관…… 당신이 미워…… 이런 감정을 알려준 당신이 너무나 싫어…… 이토록 나약하게 만든 당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워…….”

 

이럴 거면 잘해주지 말지, 항상 웃어주지 말지, 나를 위한 빛이 되어주지 말지.

 

내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그 원망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해…… 그동안 말 못했지만…… 나, 나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그동안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제야 솔직히 말할게, 나, 당신을 좋아했어.

 

“그래서 미안해…… 사랑하는 이를 지키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 미워…… 당신의 곁에 없었던 나 자신이 너무나 싫어…… 당신이 죽어가는 사이 멍청하게 총기나 손질하던 나 자신이 너무, 너무, 너무…… 원망스러워…….”

 

그렇기에 너무나 미워, 당신이 죽어가는 사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너무 한심해.

 

나는 강하지 않아. 나는 연약해, 당신이 없는 이곳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야. 당신이, 당신이 너무나 그리워.

 

“약속, 약속했잖아…… 지휘관…….”

 

혼자 두지 않겠다면서, 앞으로 나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당신이 없는 이곳은 이렇게나 쓸쓸한데, 내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은데. 어째서 당신은 내 곁에 없는 거야.

 

하지만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당신이 죽어갈 때. 나도 당신의 곁에 없었는걸.

 

애써 웃으며 홀로 쓸쓸히 죽어가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파. 찢어져 죽을 거 같아.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짓궂은 장난도 하지 않을게, 솔직하게 내 마음을 전할게.

 

당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

 

"미안해……. 미안해……."

 

그러니까 제발, 제발, 제발.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제발.

 

 

 

 

 

-째깍.

 

 

 

 

 

 

 

 

 

 

 

“RO는 거짓말쟁이야!”

 

허한 공간을 가득 채우는 SOP2의 목소리였다. 아무런 징조도 없던 커다란 소음에 화들짝 놀랄 법도 했지만, 당황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왜? RO가 뭐 나쁜 말이라도 했어?

 

“말도 마! 으으…… 생각하기도 싫어.”

 

본래 남에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려오는 RO의 말은 그녀에게 큰 상처를 남겼으니까.

 

잔뜩 부풀린 볼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분명 삐졌다는 신호지만, 그렇다고 완전 머리끝까지 화가 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친구잖아. 응? 착한 SOP2가 이해해줘야지.

 

“……그래도 이번엔 RO가 잘못한 게 맞단 말이야.”

 

눈동자에 잠시 동요가 서렸지만, 서운한 기색은 여전했다. 허나 이를 반대로 생각한다면, 어지간한 일은 그냥 넘어가는 SOP2에게 RO가 큰 상처를 남겼다는 뜻이었다.

 

“사실 RO만 그런 게 아니야. 다들 이상해. 자꾸 막…… 나한테만 뭐라 하고…….”

 

중얼대듯 말하는 SOP2의 목소리는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걸 반증함과 동시에 미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RO와 멀어지기 싫었으니까.

 

그녀는 RO가 자신에게 사과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RO는 그녀에게 사과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SOP2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가 생기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믿던 사람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들을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단 말이야…….”

 

돌아오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괜히 애꿎은 돌멩이만 괴롭히며 대충 시간을 때우던 와중, SOP2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RO랑 화해하기 싫어?

 

절레절레,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와 달리 힘 빠져 기운 없는 몸짓은 가련함마저 느껴질 따름이었다.

 

-분명 RO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RO가 나쁜 애가 아닌 건 SOP2가 제일 잘 알잖아?

 

끄덕끄덕,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같이 붙어 다니던 사이인 만큼, RO의 성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똑 부러지고, 가끔 욱하면 험한 말이 튀어나오긴 하지만, RO는 심성이 몹시 고왔으니까.

 

그렇기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착한 그녀가 왜 자신에게 그리 심한 말을 한 건지, SOP2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RO가 힘들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걸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응. 요즘 RO가, 아니 모두가 조금 많이 힘들어하긴 했어.”

 

SOP2의 말이 맞았다. 실제로 RO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고 있었으니까.

 

도도한 듯 보이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감정표현이 많았다. 실제로 일이 잘 안 풀리면 한 성질 하고, 드물지만 심심찮게 욕설도 내뱉는 경우도 다분했다.

 

-그럼 SOP2는 어때? RO한테 화난 거 말고, 뭐 힘든 일 있어?

 

잠시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런 건 없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오직 RO와 다른 이들이 남긴 상처뿐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서운했다.

 

-그럼 이렇게 해보자. SOP2가 먼저 다가가는 거야. 어때?

 

“으응?”

 

고개를 내젓고, 끄덕임에 이어 이번에는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그것은 의문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RO가 심한 말을 한 건 분명 고의가 아니었을 거야. 분명 후회하고 있을걸?

 

“그래도…….”

 

-반대로 생각하는 거지. 네가 먼저 다가가면, 분명 RO도 사과할 거야. 응. 내가 장담할게.

 

“…….”

 

SOP2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눈을 뜬다.

 

그가 알려준 방식이었다.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거나, 마음에 근심이 생길 때 눈을 감고 숫자를 세는 것.

 

그렇게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응! 그래! 내가 먼저 다가가 볼게!”

 

마침내 결의를 다진다.

 

-잘 생각했어. 분명 잘 해결될 거야.

 

“히히! 고마워 지휘관!”

 

어느새 활기참을 되찾은 그녀는 발이 닿는 대로 꽃밭을 거닐기 시작했다. 자유롭고, 무언가에 구애받지 않으며, 정말 신나게.

 

마치 한 마리의 나비를 보는 듯했다. 웃는 그녀에게서는 순수한 기쁨과 고마움만이 묻어나왔다. 그와 떠드는 시간이 즐거웠고,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준 그가 너무나 좋았으니까.

 

“지휘관! 고마워!”

 

비록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 그녀에게 망설임은 없었으니까.

 

처음에는 탁탁탁, 그 뒤에는 우다다. SOP2의 걸음걸이는 차츰 빨라져 이제는 바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휘부에 도착하는 데는 5분조차 걸리지 않았다.

 

“RO!! 어디있어!!”

 

활기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 주인공을 찾기 위해 SOP2는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복도는 한산하다 못해 싸늘했다. 그 누구의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 버려진 건물일까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으으…… 또 어디 숨은 거야!”

 

하지만 SOP2는 고작 그 정도에 굴할 인물이 아니었다. 경쾌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나아갔고, 결국 그녀는 찾아내고야 말았다.

 

“RO!!!”

 

“…….”

 

아까와 마찬가지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SOP2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가 지척에 도달하자, RO 또한 반응을 나타냈다.

 

“……SOP2.”

 

힘겹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RO는 반가움이 아닌, 깊은 탄식과 절망을 내비쳤다.

 

늘 보여주던 환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SOP2와는 정반대로.

 

“……어디 갔다 왔어?”

 

쥐어짜 낸 처참한 목소리였다. 절망, 안타까움, 슬픔, 애석. SOP2가 말한 대로 그녀는, 지휘부의 모두는 굉장히 힘든 일을 겪고 있었으니까.

 

“꽃밭!”

 

활기찬 목소리였다. 즐거움, 웃음, 기대, 희망. 그것이 전부였다.

 

“…………혼자서?”

 

단순한 한마디였지만, 실린 무게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온갖 감정이 극한으로 압축된 그녀의 목소리에는 공포마저 느껴질 따름이었다.

 

“아니! 지휘관이랑 놀았어. 지휘관이 RO랑 화해하라 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

 

“자! 지금이 마지막이야! 사과하면 받아줄게!”

 

득의양양하게 허리춤에 손을 얹고, 떳떳한 표정을 짓는다. 평소의 RO라면 그게 뭐냐며 피식 웃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가 아니었다.

 

-짝!!!

 

“……어?”

 

SOP2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차게 돌아간 고개, 뺨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통증, 그리고 아려오는 가슴은 그녀의 마인드맵을 난잡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하등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를 가장 혼란스럽게 한 건 바로,

 

“제발…… 제발 그만하란 말이야…….”

 

울먹이는 RO의 목소리.

 

“RO……? 왜…… 우는 거야……?”

 

RO의 표정은 하염없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흐르는 눈물 아래 피어난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는 그 누구라도 당황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SOP2 또한 그랬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녀가 멍하니 RO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SOP2의 어깨를 붙잡았다.

 

“SOP2!!! 지휘관님은 죽었어!!! 한 달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고!!!”

 

그리고 진실을 고한다.

 

“…………어?”

 

쾅. 그녀의 머리에 번개가 내리침과 동시에, 현실로 돌아온다.

 

‘-4월 22일. 바로 어제. 인권 단체에 의한 폭탄 테러로 사람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는 단 한 명, 민간 군사 기업 그리폰의…….’

 

‘아아!! 지휘관!!! 지휘관!!!’

 

‘지휘관님!!! 아아………… 지휘관님!!!’

 

“어………?”

 

스쳐 지나가는 기억, 애써 외면했던 기억, 심층 아래 봉인해둔 기억.

 

잔혹한 진실.

 

“하나, 둘, 셋.”

 

그렇기에 도망친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제발 정신 좀 차리란 말이야!!!”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닿지 않는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마지막으로 하나, 둘, 셋.

 

-SOP2. 괜찮아?

 

숫자를 전부 새고 나니, 다시금 지휘관이 그녀를 반겨줬다. 정확히는 그녀가 지휘관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작은 인형에 불과 했지만.

 

“히히, 뭐야.”

 

웃음을 그린다. 거짓된 세상 아래 그녀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니까.

 

“역시, RO는 거짓말쟁이야.”

 

더욱더 환하게.

 

 

 

 

 

 

 

 

 

 

 

 

 

 

길을 잃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

 

 

 

 


 

우울증과 자해가 감기처럼 유행하게 된 이 자리, 통탄과 비탄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자리, 흐르는 눈물이 어느덧 강을 가득 채워버린 바로 이 자리, 나는 서 있다.

 

“…….”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지휘관은 죽었다. 지휘부는 마비되었고, 정신을 붙잡은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나름 멀쩡해 보였던 UMP45도 어느새 방에 틀어박힌 채 곡소리만 들려줄 뿐이었고, 그 사실은 나에게 다른 이들도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질 거라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빈자리는 나조차 통감하고 있었으니까.

 

‘덴드로비움. 너한테 참 잘 어울리는 꽃이라 생각해.’

 

‘음? 갑자기?’

 

‘꽃말이 자만심이 강한 미인이거든. 딱 맞지 않아?’

 

‘후후, 그래. 미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는 거구나?’

 

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성 들여 가꾼 꽃들을 남에게 나눠주길 좋아했고, 거기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건네는 꽃을 받으면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는 것이 옳지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유능한 사람. 모두 그를 이르는 말이었다.

 

흥미로웠고, 또 즐거웠다. 그와 함께하면 늘 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재미있는 인물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길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새긴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늘 올바른 곳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의 나래짓은 너무나 화사했으며, 또 눈부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 길을 잃었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꽃병을 잡아든다. 그가 나에게 준 마지막 꽃을. 자만심이 강한 미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덴드로비움을.

 

“…….”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지금의 나는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으니까.

 

이 눈꺼풀은 하나의 스위치였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감정 모듈을 셧다운하고 오직 논리 모듈로만,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만큼 내 안에 흐르는 감정이 상상 이상이라는 걸 나타냄과 동시에, 내가 눈을 뜨는 즉시 무너질 거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하아…….”

 

단전으로부터 끌어모은 한숨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지만, 목적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길을 잃어버렸으니까.

 

어디로 가야 할까. 정말 이리로 가는 것이 맞는 걸까. 하지만 멈춘다 해도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여어.”

 

그렇게 한껏 상념에 잠긴 사이, 익숙한 인물을 마주할 수 있었다.

 

“……M16.”

 

예전부터 술을 참 좋아하던 인형이었다. 지금은 술에 의존하는 인형이었고.

 

실제로 그녀의 손에는 지금도 술이 들려있었으니까.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건 여전한 모양이네.”

 

“너도 술에 의존하며 고독함을 달래는 건 여전하잖아?”

 

“헤, 농담인데,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

 

그리 말함과 동시에 그녀는 술을 들이켰다. 독하기로 소문난 술이지만, 저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잘됐네. 안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생겨서 찾아 다녔는데 말이야.”

 

“뭔데.”

 

AR소대의 맏언니인 M16은 어지간해선 부수기 힘든 AI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어제 막 무너져버린 UMP45를 제외하면, RO635와 더불어 유이하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만하자.”

 

“……뭐?”

 

그렇기에 돌아오는 목소리는 나를 더욱 당황케 했다.

 

“45 끝난 거 봤지? 우리는 얼마나 갈 거라 생각해?”

 

그와 동시에 M16은 술병을 기울였다. 허나 이미 텅 비어버린 술은 그녀의 심신을 달래주지 못했고, 나는 더욱이 씁쓸한 표정을 지은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막 RO도 방문을 닫았어. 이제 남은 건 우리 둘뿐이라는 거지.”

 

“그럼 이제 포기하자는 거야?”

 

“……포기?”

 

“여태까지 우리가 쌓은 노력을…….”

 

“큭……크흐흐…… 흐하하하!!!”

 

“…….”

 

“흐하하하!!! 아하하하!!!”

 

M16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웃었지만, 그건 기쁨이 아니었다. 차츰 커지는 광소는 종막에 이르러선 손뼉마저 치기 시작했다.

 

화는 나지 않았다. 어차피 저 감정이 기쁨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그저 조용히, 그녀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아하하…… 미안 미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대체 뭐가 그리 웃긴 건데. 말해봐.”

 

“흐…… 그래…… 말해야지.”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냄과 동시에, 그녀는 술병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린 술병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했다.

 

“포기는 무슨 포기야. 노력은 무슨 노력이고, 우리는 애초에 답도 없는 허상에 매달려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을 붙잡은 것에 불과한데.”

 

“너 지금…….”

 

“생각해봐. 우리가 여태 뭘 했지? 모여서 대화를 나눈다 해도 달라지는 게 있었나? 남은 인원끼리 으쌰 으쌰 한다고 우리의 삶이 더 윤택해지거나 그런 건 아니었잖아?”

 

절망에 찬 목소리였다. 절망에 찬 눈동자였다. 절망에 찬 표정이었다.

 

“뭐, 그것도 아니라면 있는지도 모를 신한테 기도라도 할까? 지휘관을 돌려달라고?”

 

절망에 찬 인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허나 그것이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닌,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는 것이 내 마음을 너무나 착잡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없어. 노력이라는 말도, 애초에 다 헛소리였다고.”

 

“그럼 이제 뭘 할 건데.”

 

“글쎄, 방 안에 틀어박혀서 밑 빠진 독에 술이나 부으며 허송세월을 낭비하겠지. 가끔 울면서 지휘관 묫자리도 찾아가고.”

 

그와 동시에 톡톡, 그녀는 자신의 눈가를 두드려 보였다. 그 행동이 무슨 뜻을 전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M16은 친히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눈, 계속 뜰 거야?”

 

“…….”

 

“한 달이 넘었어. 감정의 무게가 두려워 도망치는 게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평생 그렇게 살 거야?”

 

그리고 툭, 어깨를 툭 침과 동시에, 그녀는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다 끝인데 말이야.”

 

떠나는 그녀의 발걸음은 가엾기 짝이 없었다. 정처 없는 발걸음의 종착지가 어디로 향할지는 분명 본인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하아.”

 

다시 한번 한숨을 짙은 한숨을 내뱉고 걸음걸이의 시작을 알렸다.

 

다만, 이번에는 그 종착지를 알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멈추지 않고 나아가니, 나는 마침내 목적지, 그러니까 그의 무덤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본래라면 먼저 인사를 했겠지만, 작은 새싹 하나가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토록 황폐한 상황에 싱그러움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니, 이 자그마한 새싹 하나가 우리보다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통을 열어 물을 부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냥, 주고 싶었다.

 

“……안녕 지휘관.”

 

헛짓거리도 끝났으니 이제 인사를 할 차례였다. 비록 돌아오는 대답이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 올 때마다 항상 하는 일종의 예의였다.

 

하지만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분명 감정 모듈을 껐음에도, 내 가슴에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으니까.

 

머리가 아팠다. 이 이상은 한계였다. 마인드맵은 이미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무서웠다. 과연 눈을 감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극한으로 압축된 감정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었다.

 

“…….”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알 수 없었다. 나는 길을 잃었으니까.

 

“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한 나는 무심코 뒷걸음칠 치고 말았고, 그에 대한 결과로 아까까지만 해도 싱그러움을 유지하던 작은 새싹 하나를 짓밟아버리고 말았다.

 

처참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멀쩡했지만, 이 자그마한 생명은 한순간, 한 번에, 한숨에, 무너져버렸다.

 

그렇게 깨달았다. 이 작은 새싹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을.

 

‘포기는 무슨 포기야. 노력은 무슨 노력이고, 우리는 애초에 답도 없는 허상에 매달려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을 붙잡은 것에 불과한데.’

 

“하하…… 그래. 네 말이 맞았구나…… M16.”

 

그래. 그 녀석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애초에 답도 없는 허상에 매달려 희망이라는 이름의 절망을 붙잡은 것에 불과했다.

 

모든 게 다, 부질없다는 것을, 나는 외면해왔던 것이다.

 

주저함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고,

 

‘말했잖아. 친구. 우리는 친구야. 혹시 싫어?’

 

“아.”

 

‘이거 봐 AK-12! 꽃이 이렇게나 활짝 피었어! 참 아름답지 않아?’

 

“……아.”

 

‘응. 당연하지, 네가 나와 있는 시간이 즐겁다 말했듯, 나도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참 즐거운걸.’

 

“아아아아아아!!!”

 

마침내, 진심을 마주한다.

 

“아아아!!! 지휘관!!! 지휘관!!!”

 

호흡 따위는 진즉에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허나 산소 결핍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당신의 결핍이 나를 더 아프게 만들었다.

 

그 무엇도 이 허망함을 채울 수 없었다. 이 자리는 오직 당신만을 위한 자리였으니까.

 

“지휘관 아아…… 지휘관…………!!!”

 

무형의 폭력이었다.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차곡차곡 쌓인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는 하나의 폭탄과도 같았다. 농축된 감정의 파도는 내 가슴을 찔렀고, 한심한 나를 자책하며 자리에 주저앉은 지 오래였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니, 눈을 감기 싫었다.

 

나는 당신이 사라진 세상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눈을 뜨고, 나 자신을 기만하며 살아왔지만, 그 결과가 이것이다.

 

“흐으…… 흐으으…….”

 

눈을 감고 당신의 얼굴을 그리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끔찍한 고통과 함께 죄책감이라는 파도가 나를 뒤덮을 뿐이었다.

 

통증은 더욱 심해지고, 이제는 눈물마저 흐르기 시작했다.

 

당신은 죽었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당신은 폭발에 휘말리고, 총알에 바람구멍이 나고, 칼날에 난도질당하며, 처참하게 죽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당신의 곁에 있었더라면, 애초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뭐가…… 뭐가 자만심이 강한 미인이야…… 그냥…… 한심한 인형이잖아…….”

 

대체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째서 당신은 죽었고, 나는 이토록 비참하게 울부짖고 있을까.

 

아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었다. 나 자신이 너무나 미웠다. 그냥 모든 게 다, 너무나 싫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않았다.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에, 나는 함께하지 않았다.

 

“지휘관!!! 지휘관………….”

 

눈물과 슬픔, 그리고 절망만을 되풀이한다. 다른 방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눈물, 슬픔, 그리고 절망.

 

찢어지는 가슴에 나 눈물 흘리고, 흐르는 눈물은 절망으로 치환되어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고, 아득한 정신은 내 가슴을 난도질해 찢어버린다.

 

이곳은 지옥이자 출구 없는 미로였고, 그 미로아래 길을 헤매는 나는 가엾기 짝이 없는 한 마리의 어린 양이었다.

 

길을 찾고 싶지만, 찾을 수 없었다. 늘 나를 이끌어주던 당신은, 길을 그려주던 당신은, 이미 내 곁을 떠나버렸으니까.

 

“지휘관……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전부 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당신 곁에 없던 나를 원망해.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있지 않던 나를 미워해. 그렇게나 큰 사랑을 받아놓고 보답하지 않은 나를 증오해.

 

당신이 죽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가면을 쓴 내가 싫어, 어떻게든 발버둥 치며 도망치려 했던 내가 너무 역겨워, 당신을 애써 외면한 내가 너무나 가증스러워.

 

“그런데…… 말이야…… 정말로, 정말로 염치 없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지만…….”

 

정말로, 정말로, 뻔뻔하지만, 정말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역겨워서 구역질이 나올 수 있는 말이지만.

 

“딱……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응?”

 

있잖아. 늘 장난치며 얼버무리고, 짓궂게 굴었지만, 나 당신이 너무나 좋았어.

 

행복했어. 당신과 있으면 웃음이 나왔고, 그냥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너무나 좋았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잘할게, 받은 사랑 이상으로 보답할게, 당신의 곁에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지켜낼게.

 

당신에게……솔직하게 말할게.

 

“그러니 제발…… 부탁이야. 신이 있다면 믿을게,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게.”

 

제발, 제발, 제발.

 

“나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

 

 

 

 

 

 

 

길을 잃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째깍.

 

 

 

 

 

 

 

 

 

 

 

‘AN-94. 새는 참 멋진 거 같아.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렇게나 자유롭게 살 수 있잖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냥 헛소리야, 저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가 부럽다고 에둘러 표현한 거지.’

 

인형은 꿈을 꾸지 않는다. 단지 지나간 기억의 파편을 찾아 모험을 떠날 뿐, 없는 기억을 새로이 창조할 수는 없다.

 

‘가끔 당신은 이상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왜, 그래서 싫어?’

 

‘……싫다고 한 적은 없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허억!!”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비명과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죽지 못해 살던 하루는 한 달이 되었고, 그 한 달에서 다시금 삼 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삼 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며 무언가 달라지기는 했다.

 

“아아!! 지휘관!!! 지휘관…….”

 

“미안해…… 미안해…….”

 

물론 굉장히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지휘부 내에서 들려오던 곡소리는 어느덧 배가 되었다. 본래 정신을 붙잡고 있던 이들도 차츰 무너져, 종막에는 이 자리가 장례식장인지 지휘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지휘관.”

 

본래 곡소리를 내는 사람에는 당연히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타버린 재와 같이, 나는 빛을 잃어버렸으니까.

 

아무런 힘도 없었다. 당연히 목소리를 낼 여력조차 없었고,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거닐고 있었다. 늘 새가 되고 싶다 말하던 당신이 떠올라 나는 무심코 웃어버리고 말았고, 이제는 내 곁에 없는 당신이 떠올라 무심코 눈물 흘리고 말았다.

 

“…….”

 

처절한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당신의 빈자리를 통감하며 아려오는 가슴의 격통을 만끽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현실보다 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든 건 난생처음이었다. 연구실에 처박혀 평생 데이터를 뽑아내던 시절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웃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때보다 더욱이 슬픈 점은, 더 이상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

 

정신을 차리니, 나는 어느새 또 그의 묘 앞에 도착했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하. 하하하…….”

 

처참히 뭉개진 작은 새싹 하나를.

 

이는 내가 심은 씨앗이었다. 그가 남긴 푸른 장미,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 심은 나의 마지막 미련.

 

“그래…… 기대한 내가 미련한 거지.”

 

미련을 놓지 못한 내가 미련했던 것이다. 지휘관은 죽었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차라리 꿈속이 더 나았다.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꿈속의 나는 웃고 있었으니까.

 

“꿈…… 꿈…… 아.”

 

잠깐, 알고 있지 않은가. 영원히 꿈 속을 헤매는 법.

 

-철컥.

 

영원히 잠드는 법.

 

“하하…… 이토록 간단했던 걸, 나는 왜 몰랐을까.”

 

조심스레 총구를 관자놀이로 옮겼다. 손이 벌벌 떨렸지만, 이건 죽음에 의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곧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으니까.

 

“……그동안은 부끄러워서 말 못했다만, 지금은 말할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다정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바람에는 무엇이 실려있을까. 항상 생각해온 문제였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말, 정말로 좋아했다. 지휘관.”

 

지금도 나오지 않았다.

 

-타앙!!!

 

 

 

 

 

***

 

 

 

쿵, 그녀의 몸이 무너지고, 바닥에 부딪힘과 동시에 피가 흐른다. 순수한 인간의 것과 다른, 공장에서 제조된 인공 혈액이었지만, 소름 끼칠 정도로 붉다는 것은 인간과 별다르지 않았다.

 

붉디붉은 선혈은 바닥을 타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나아가고, 나아가고, 끝없이 나아가니, 그녀의 혈액은 마침내 처참히 뭉개진 푸른 장미의 새싹에 닿았다.

 

잔인하게 짓밟힌 새싹은 분명 죽었어야 했다. AK-12는 그렇게 생각했고, AN-94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

 

허나, 그녀의 피가 닿는 순간, 푸른 장미는 생기를 되찾았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작은 새싹에 불과했던 장미는 어느새 봉우리를 맺었고, 순식간에 꽃을 피워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어떤 과학자도 작금의 사태를 설명할 수 없으리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기적이었다.

 

그리고 ‘기적’은 또 하나의 기적을 낳았다.

 

시간은 앞으로만 나아간다. 이는 신조차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며, 자연의 섭리다.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

 

그것을 깨버리기에 기적.

 

푸른 장미는 붉은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빛은 피처럼 붉었고, AN-94의 눈물만큼 투명했다.

 

빛은 멈추지 않았다. 빛나고, 빛나고, 빛나고, 빛나다 결국에는.

 

모두의 염원을, 모두의 소망을, 모두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

 

 

 

“……지휘관.”

 

아직은 많이 이른 새벽, UMP45는 눈을 떴다. 아늑하고 달콤한 꿈이 아닌, 비참하고 잔혹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말없이 몸을 일으킨 그녀는 조용히 문을 열어 밖으로 나왔다. 본래라면 방에서 나올 일이 없었겠지만, 오늘은 유독 지휘관의 무덤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평소와 같았다. 새벽의 지휘부는 곡소리 대신 침묵을 택했고, 야간 당직을 서는 이도, 정신을 다잡은 이도 없었다.

 

“아.”

 

그녀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의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계속해서 나아가니, 그녀는 어느새 무덤이 아닌, 지휘관의 방문 앞에 있었으니까.

 

끼익, 낡은 문이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본래라면 무덤으로 향해야 했던 그녀가 문을 연 까닭은 단지 그의 꽃들을 좀 더 보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다.

 

문을 열며 UMP45는 생각했다. 오늘은 또 어떤 색다른 지옥이 나를 반겨줄까. 이 공허함을 어떻게 달래야 할까. 사라진 당신의 빈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꽃 한 송이만을 가져와야만 했다. 그것이 내 계획이었으니까.

 

“……45? 이 늦은 밤에 어쩐 일이야?”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떤 연유로, 대체 무슨 이유로. 대체 왜.

 

“……으 ……아?”

 

“음? 왜 그래?”

 

죽었어야 할 당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연산 능력을 갖춘 그녀였지만, 그럼에도 작금의 사태를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니, 이 자리는 그 어떤 이라도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식이라는 선이 붕괴 됐을 때,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니까.

 

“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처음에는 부정이었다.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지휘관에게서 뒷걸음질 치며 부정의 의미를 전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그는 지휘관이 맞았다. 늘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바라왔던 그가 맞았다.

 

“45? 왜 그러는 거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 아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지휘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저 없는 발걸음은 곧 UMP45를 향했고, 그녀는 열심히 고개를 내저었다.

 

UMP45의 시선은 그 어떤 곳에도 안주하지 못했다. 갈 곳 잃은 동공은 계속해서 흔들렸지만, 지휘관은 계속해서 다가갔다.

 

“대체 왜……”

 

이번에는 이를 강하게 악뭄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도통 알 수 없는 행동만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며 지휘관이 의문을 품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대체 왜 우리를 두고 간 거야!!!”

 

부정 다음은 분노였다. 분명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지휘관에게 진심을 전하겠다 다짐한 그녀였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머리는 그렇지 못했다.

 

“왜!!! 대체 왜…….”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주저앉아 버린 그녀는 눈물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처량한 모습에 평소의 뻔뻔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를 두고 간 거야…….”

 

그렇게 두서없는 분노가 끝나니, 마지막으로는 슬픔이었다.

 

당연하게도 지휘관은 그녀가 어째서 부정하고, 또 화내고, 눈물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겪은 일을 말로 풀어 설명한다 해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니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힘들어 보이네.”

 

“흐윽……흐으윽…….”

 

하지만 그녀의 무거운 감정을 공감해주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지휘관…… 지휘과안………….”

 

“응. 45. 말해.”

 

“나…… 나…… 흐윽…… 히끅…… 히끅…….”

 

“괜찮아. 괜찮으니까.”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처량한 모습이었지만, 지휘관은 당황하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그리고 또 다정히, 그녀를 달래줄 뿐이었다.

 

 

 

 

***

 

 

 

 

“이제 좀 괜찮아?”

 

“…….”

 

그녀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울어댄 탓에 눈가는 퉁퉁 부어있었지만, 그것을 비웃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봐. 담요라도 가져올게.”

 

행여나 차디찬 새벽바람이 그녀를 덮칠까 걱정한 지휘관의 배려였다. 그는 본디 선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가지 마.”

 

“응?”

 

“가, 가지 말라고.”

 

허나 UMP45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휘관의 코트 자락을 붙잡은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이라는 단어는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안 돼. 제발, 제발, 그러지 마.”

 

“4, 45?”

 

그가 처음으로 당황한 순간이었다. 너무나 억센 손길은 성인 남성을 가뿐히 제압할 수 있었고, 지휘관은 순식간에 UMP45의 코앞으로 끌려왔다.

 

“여, 여기 있어. 응? 내가 지켜줄게.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내, 내가, 응?”

 

“그러니까…….”

 

“아니,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응. 지휘관은 아무것도 하지 마.”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서 무언가 위험한 기운이 풍겨 나온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니까.

 

“……일단 알았어. 그럼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잠깐만 떨어지자. 이것 좀 놔줘.”

 

“……뭐?”

 

우선은 거리를 두고 대화를 시도하기 위한 지휘관의 대처였지만, 그것이 바로 UMP45의 역린이었다.

 

잠시 떨어지자. 평범한 말이었다. 허나 또다시 지휘관이 자신을 떠난다는 공포심에 사로잡힌 UMP45는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고,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45? 얼굴이…….”

 

“안 돼…….”

 

“응?”

 

“가,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

 

“자, 잠깐! 45!”

 

우당탕, 탁자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지휘관은 바닥에 넘어졌다. 물론 일말의 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가 조금이라도 다치는 꼴을, UMP45가 지켜볼 리 없었으니까.

 

다만, 자세는 영 좋지 않았다. 바닥에 누운 지휘관, 그 위에 올라탄 UMP45, 누군가 지금 상황을 목격한다면, 정사를 치르기 직전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지휘관을 완벽히 제압한 UMP45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아, 자기 얼굴로 향했다.

 

보고 싶던 얼굴, 사랑하는 이의 얼굴, 다시는 보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그 얼굴.

 

그렇기에 떠나보낼 수 없는 나의 사랑.

 

“안 돼. 안 돼. 안된다고, 응? 제발, 그러지 마. 내가 잘못했으니까…… 응?”

 

싫어, 또 혼자 두면 사라질 거잖아. 나 무서워, 당신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 무섭단 말이야.

 

더 이상 그 외로움을 느끼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울부짖으며 당신의 빈자리에 비참함을 느끼고 싶지 않단 말이야.

 

더 이상 당신과 떨어지고 싶지 않단 말이야.

 

UMP45의 마인드맵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경지에 이르렀다. 초점 잃은 눈동자와 거친 숨소리는 그 누가 보아도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을 터였다.

 

“……그래. 알았어. 같이 있자 45.”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휘관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상한 머리에 걸맞은 빼어난 눈치를 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UMP45를 마주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물론 지휘관의 예상 이상으로 그녀의 정신은 망가져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네 옆에 있을게, 안심해.”

 

지휘관은 배려심 또한 아주 깊었으니까.

 

천천히 손을 뻗어 다시금 그녀의 등을 쓸어내린다. 거친 숨소리는 차츰 안정되고, 빛을 잃은 눈동자 또한 어느새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아…… 지휘관…… 지휘관…….”

 

마찬가지로 그녀의 여린 손도 어느새 지휘관의 등을 향해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음, 그래서, 이 늦은 밤에 어쩐 일로 찾아온 거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는 단어를 들은 그녀는 순식간에 방 안을 스캔하기 시작했고, 이토록 ‘늦은 밤’에, 그가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늦은 밤에 뭐 하는 거야?”

 

근본적으로 같은 질문. 허나 분명 질문이 나올 타이밍은 아니었다. 지금은 분명 지휘관이 묻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아, 일이 조금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야근 좀 하고 있었지.”

 

그래도 지휘관은 여전히 침착했다. 어느새 손을 떼고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지휘관은, 늘 보여주던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안 돼.”

 

“응?”

 

“……빨리 자야 해. 응. 거, 건강에 안 좋을 거야.”

 

“으왓! 4, 45?”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다시금 눈동자의 빛을 잃어버린 UMP45가 지휘관을 가볍게 들어 올려 침대로 옮긴 것이다.

 

건장하다 못해 탄탄하다 불러도 좋을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던 지휘관이지만, 인형인 그녀에게 저항할 도리는 없었다. 지휘관은 눈 깜짝할 새에 침대에 누워 버렸고, UMP45는 그것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응, 자자. 지휘관. 지금은 잘 시간이니까.”

 

다시금 횡설수설, 난잡한 목소리는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지휘관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일종의 과보호로 나타났고, 그 과보호는 지휘관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잠을 택하게 만든 것이다.

 

“…….”

 

지휘관은 다시금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심연보다 깊어, 그 어떤 빛이라도 빨려 들어갈 듯 어두운 그 눈은, 지금의 그녀와는 대화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응. 알았어. 나 잘 테니까. 이제 돌아가도 좋아.”

 

“아니. 난 여기 있을 거야.”

 

혹시나 하고 뱉은 말이었지만, UMP45는 강경했다. 잠시 눈을 크게 깜빡인 그는, 지금만큼은 그녀의 장단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그래. 그럼 나 잘게. 옆에 있어 줘.”

 

“응. 당연하지 지휘관.”

 

어느새 작은 의자 하나를 끌고 온 그녀는 침대 옆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꺼풀을 닫고 여는 행위조차 잊어버린 그녀는 자신의 동공에 지휘관의 모든 행동을 담기 시작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당황한 탓에 피부는 살짝 떨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희미한 의문과 거대한 당혹이 깃들어있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조금, 아니 꽤 많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지휘관은 결국 눈을 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조금 무리해가며 일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UMP45는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그를 관찰했다.

 

즐거웠다. 행복했다. 단지 잠든 그를 바라보는 일에 불과했지만, 그녀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더할 나위 없는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랄 정도로.

 

 

 

 

 

 

 

 

 

 

 

 

 

많이 당황스러운 새벽이 지나가고, 돋을볕이 비추기 무섭게 지휘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너도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지쳐 쓰러진 UMP45와 함께.

 

그동안 겪은 고생 덕에 그녀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지휘관의 자는 모습을 5시간가량 쉬지 않고 바라보던 그녀였지만, 분명 한계는 존재했다.

 

UMP45 어느새 지휘관의 가슴에 엎드린 채로 잠들어 있었다. 그의 심박 소리를 듣기 위해 심장 바로 위에 머리를 얹은 것이다.

 

“……대체 왜 그런 걸까.”

 

짧은 한마디를 내뱉음과 동시에 지휘관은 자신이 누웠던 자리에 UMP45를 조심스레 눕혀놨다. 지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짙은 다크서클과 퉁퉁 불어있는 눈, 그리고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가녀린 손을 보며, 지휘관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의문이 들었고, 착잡한 마음 또한 따라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리 약한 모습을 보여준 걸까. 그렇다면 얼마나 힘들었기에 이토록 여린 모습을 보여준 걸까.

 

그렇게 몸을 일으킨 지휘관은 잠시 눈을 감고, 상황을 정리함과 동시에 지금 무엇을 해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SOP2에게 무언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숫자를 세라고 알려준 장본인인 만큼, 그 또한 마찬가지로 숫자를 세며 고민을 달랬다.

 

과연 UMP45의 옆을 지키며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밀린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이른 아침인데도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지휘부를 둘러봐야 하는지.

 

합리적인 판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무언가 큰일이 날 거라는 사실을, 지휘관은 피부로 감지할 수 있었다.

 

“…….”

 

무거운 침묵과 함께 결단을 내린 지휘관은 커튼을 내렸다. UMP45를 더 깊이 재울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행여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한쪽 귀에 통신기를 연결해 놓는 것 또한 잊지 않았고, 짧은 편지를 남겨둔 지휘관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밖은 너무나 조용했다. 이 건물 안에 자신 혼자만이 있는 게 아닐까 무심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덕분에 지휘관은 더 많은 의문점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시각은 오전 8시, 본래라면 G36이 자신을 찾아올 시간이고, 야간 당직을 서던 인원과 아침 인원이 교대할 시간이었으니까.

 

허나 복도에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게 의문을 확신으로 바꾼 지휘관은 우선 G36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본디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그녀가 이 시간까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큰 걱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지휘관?”

 

그리고 그 행동은, 생각에서 멈추게 되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익숙한 호칭이었다. 익숙한 태도였다.

 

“아, SOP2.”

 

익숙한 인형이었다.

 

“…….”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조용히, 그리고 또 멍하니, 지휘관을 바라볼 뿐, 그것이 전부였다.

 

“SOP2. 다른 애들이 안 보이네,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좋을까?”

 

하지만 지휘관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어느새 그려진 부드러운 미소는 그가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

 

“어? 뭐라고?”

 

잠시 무어라 중얼거리던 SOP2는 어느새 활기참을 되찾았다. 활짝 미소 지은 그녀가 지휘관을 강하게 끌어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 그러니까 포옹에는 애정과 그리움이 잔뜩 묻어나왔다. 평소에도 자주 하던 행위였지만, 무언가 다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S, SOP2? 지금 무슨…….”

 

“응! 가자!”

 

“뭐? 어디를?”

 

“RO한테! 분명 좋아할 거야!”

 

SOP2가 허리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그의 손을 맞잡기 무섭게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휘관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신난 SOP2에게 이끌려 다니는 건 일상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평소보다 조금, 아니 엄청 많이 신났다는 것이 마음에 걸릴 법도 했지만, 그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했다.

 

“얘들아!!! 나왔어!!!”

 

문짝을 뜯어내듯 치워버린 SOP2는 AR 소대의 숙소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평소라면 홀로 들뜬 그녀를 보며 모두 탄식의 한숨을 내뱉거나, 자기감정을 추스르는데 바빴겠지만, 오늘은 평소가 아니었다.

 

“……지휘관님?”

 

“…………아.”

 

차례로 AR-15, M4였다. 붉게 충혈된 눈과 상반되게 그녀의 동공은 더없이 커다래졌고, 그것은 비단 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지휘관?”

 

쨍그랑,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느낀 M16은 손에 들린 술병을 놓쳐버렸고, 아까운 술은 바닥이 전부 마시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술 따위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그녀였지만, 정말 절벽 끝자락에 몰려있던 상태였으니까.

 

그들이 당황하는 사이, 빠르게 눈동자를 굴린 지휘관은 정보를 수립함과 동시에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보며 심각하게 당황하는 인형들, 홀로 들뜬 SOP2와 자신을 RO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발언.

 

거기에 지난 밤 너무나 수상쩍은 행동을 보여준 UMP45까지.

 

숫자를 셀 필요도 없었다. 잠시 크게 눈을 깜빡인 지휘관은 슬쩍 미소를 그렸다.

 

“응. 반가워 얘들아.”

 

“지휘관님!!!”

 

그들에게 생각할 시간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직 지휘관을 껴안아야겠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인드맵을 지배했고, 곧 실행에 옮겼다.

 

“응, 고작 하룻밤만이긴 한데, 나도 참 반가워.”

 

 

 

 

***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 열기는 곧 가라앉았다.

 

“아아, 지휘관님…… 정말로,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정확히는 M16만 가라앉았다.

 

AR 소대에서도 가장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끝끝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절벽 끝자락에서 맴도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최소한 울부짖으며 그의 이름을 외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가장 먼저 정신을 다잡는 것도 그녀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룻밤이라는 말을 듣고 무언가가 떠오른 M16은 빠르게 단말기를 꺼내 날짜를 살폈다. 3월 22일. 지휘관이 죽기 정확히 한 달 전.

 

분명 말도 안 되는 가설에 불과했다. 허나 그렇다기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지휘관은 분명 지휘관이 맞았다.

 

“……M4, AR-15. 따라와.”

 

“네? 갑자기…….”

 

“가면서 설명해줄게. 급하니까 빨리.”

 

지휘관과 떨어지고 싶지 않던 둘이었지만, 저렇게나 심각한 표정의 M16은 처음 마주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르기로 했다.

 

“지휘관, 시간 되면 방송실로 와줘, 웬만하면 최대한 빨리.”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희미한 미소를 그린 M16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표정에는 진지함만이 묻어나왔다.

 

그렇게 차츰 사라져가는 셋을 보던 지휘관 또한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RO!!! 나와봐!!! 빨리!!!”

 

“…….”

 

열심히 문을 두드리며 RO의 이름을 부르는 SOP2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굳게 잠긴 문은 그녀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뿐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지휘관 또한 그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굳이 SOP2를 데려가지 않은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만큼, 보험을 들 필요가 있었으니까.

 

“…….”

 

지휘관이 문 앞에 서자. SOP2는 말없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UMP45와 마찬가지로 그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게 상당히 두려운 모양새였다.

 

“혼자 갈 거야?”

 

하지만 목소리는 덤덤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덤덤함을 연기하고 있었다.

 

“SOP2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지휘관이 하고 싶은 대로!”

 

늘 보여주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녀는 언제나 지휘관에게 어리광 부리고, 장난치기를 즐겼으니까.

 

덕분에 지휘관의 동공이 잠시 커졌으나, 입가의 미소는 그대로였다. 어찌 보면 성장했다 볼 수 있던 상황이었으니.

 

“혼자 갔다 올게. 그게 맞는 거 같아.”

 

스르르, SOP2의 손에서 차츰 힘이 풀려나가고, 지휘관은 의지를 다진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방을 들어가려면 각오를 다져야 한다는 사실을.

 

하나, 둘, 셋.

 

-똑똑.

 

“RO. 나야. 혹시 문 좀 열어줄 수 있을까?”

 

 

 

 

 

 

 

 

 

 

“그래서 ‘굳이’ 우릴 데려간 이유가 뭔데.”

 

약간의 원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AR-15는 지휘관과의 재회를 열심히 만끽하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겉모습만 본다면 무뚝뚝하고 냉철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여린 소녀의 것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AR-15였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녀 또한 지휘관의 빈자리를 잔뜩 그리워하고 있었고.

 

“가설을 하나 세웠는데, 들어줬으면 해서.”

 

꾸준히 침묵을 유지하던 M16은 방송실에 도착하기 무섭게 자신의 단말기를 꺼냈고, 날짜를 가리켰다.

 

3월 22일. 그가 죽기 정확히 한 달 전. 평소라면 AR-15가 장난치지 말라고 딴지를 걸 타이밍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평소에 장난기가 많은 M16이라도, 지금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둘의 표정이 굳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열심히 M16을 타박하던 AR-15도, 지휘관이 보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던 M4도, 어느새 말없이 M16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럼…… 설마…….”

 

본디 영민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기에 미신 따위는 잘 믿지 않는 M4였지만, 모든 정황은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설이야. 틀릴 수도 있고, 어쩌면 우리가 단체로 환상을 보고 있는 걸 수도 있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매도해도 좋은데, 일단은 들어 봐.”

 

후후, 마이크의 먼지를 털어내며 나온 목소리였다. 아직 마이크가 작동한다는 걸 확인한 M16은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과거로 온 거 같네.”

 

 

 

***

 

 

 

지휘관의 목소리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고요한 침묵이 맴도는 이 자리에는 어색함 마저 묻어나올 따름이었다.

 

“…….”

 

그는 다시금 눈을 감았고, 정보를 정리하며 이 상황에 어떤 행동이 가장 올바른 것인지 선택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SOP2. 총 좀 빌려줄래?”

 

“응!”

 

SOP2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총을 넘겼다. 덕분에 지휘관은 짧은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표정을 굳혔고, 그 즉시 개머리판으로 문고리를 내리쳐 부숴 버렸다.

 

-콰직!!!

 

상당히 거친 방법이었다. 평소의 그라면 절대로 지향할 방식이고, 특히나 자기 사람에게는 더더욱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하지만 숫자를 세는 사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인물이 있었다.

 

‘가,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했잖아!!!’

 

자신을 향해 처절하게 울부짖는 UMP45의 모습은 인간보다는 흡사 짐승에 가까웠다. 그 충격은 지휘관의 뇌리를 강하게 강타했고, 곧 다른 이들도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한시 빨리 인형을 만나 그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 지휘관은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바닥을 뒹구는 문고리를 보며 지휘관은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물론 SOP2에게 총을 돌려주는 것도 잊지 않고.

 

“갔다 올게.”

 

SOP2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지휘관은 슬쩍 눈웃음을 그렸고, 그녀의 얼굴에 깃든 웃음도 더욱이 커졌다.

 

그리고 끼익, 문이 열린다.

 

“실례할게.”

 

어엿한 숙녀의 방에 멋대로 침입하는 상황, 말 그대로 실례였다.

 

물론 지휘관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는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 따위는 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방 안은 어둡고, 또 축축했다. 알 수 없는 끈적한 기운과 익숙한 듯 모호한 채취가 몸을 감싸는 기분이 들어 지휘관은 고개를 절로 내저었다.

 

그렇다고 나아가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끝장을 봐야 했으니까.

 

“……RO.”

 

그가 RO를 발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구석에서 쪼그려 앉은 채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곤 지휘관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반응 또한 돌아오지 않았다. 미간의 주름이 한 줄 더 생기게 된 지휘관은 미처 살피지 못했던 주변 상황을 보기 시작했다.

 

난잡하고, 어지러웠다. 똑 부러지는 성격을 가진 그녀의 방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못하게 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무언가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니까.

 

투명한 병이었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가까운 사람이 참 좋아하던 물건이었다.

 

“잭 다니엘스?”

 

술이었다.

 

물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지휘관은 이 익숙한 채취가 바로 알코올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헤.”

 

하지만 어느새 몸을 일으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RO는 눈치채지 못했다.

 

“읏!”

 

쿠당탕, 한바탕 뒤집어지는 소리가 나고, 지휘관은 어느새 바닥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머리는 부딪히지 않았지만, 움직일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아아 ……지휘관님.”

 

그는 어느새 RO에게 제압된 상태였으니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위험했다. 몇 시간 전에 UMP45와 대면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무언가 달랐다.

 

불쾌할 정도로 짙은 알코올 향은, 그녀가 취해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으니까.

 

“아아, 오늘도 와주셨군요. 지휘관님.”

 

 

“……응. 반가워 RO.”

 

굉장히 고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주는 ‘오늘도’라는 단어가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그녀의 장단에 어울려주기로 마음먹은 상태니 딱히 의문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의 축축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는 많이 힘들 것이라 예상했다.

 

“술은 잘 안 마시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어쩐 일이래?”

 

우선은 대화를 진행하려 했다. 지휘관은 화술에 일가견이 있었고, 또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니까.

 

“내심 부러웠어요. 차라리 SOP2처럼 환상이라도 볼 수 있다면, 당신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빛을 잃은 탁한 눈동자는 그가 무슨 말을 내뱉든 닿지 않으리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그가 어떤 말을 내뱉든지 간에, 그녀의 마음속에 생겨난 심연은 모조리 빨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RO의 고운 손이 지휘관의 뺨을 향했다. 마치 아기를 어루만지듯 부드러운 손길은 도리어 지휘관에게 불안감을 증폭시켜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이 들어요.”

 

“자, 잠깐! RO!”

 

톡, 톡, 정확히 단추 두 개가 벗겨지고, 그의 쇄골이 드러난다. 평소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던 그의 몸은 탄탄하기 그지없었다.

 

“스읍……하아아…….”

 

어느새 RO는 그의 어깨에 코를 묻은 지 오래였다. 그의 채취를 마음껏 탐하는 그녀의 모습에 지성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본능만을 따라 움직이고, 만족해한다. 그녀의 얼굴이 황홀함으로 깃들지만, 지휘관은 착잡함으로 깃든다.

 

“아아…… 더는 못 참겠네요. 죄송해요. 지휘관님.”

 

“뭐?”

 

-콰직!

 

이제는 당혹으로 물들 차례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지휘관이었지만, 어깨로부터 느껴지는 통증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

 

아팠다. 그녀의 끈적한 타액과 환부로부터 나오는 선혈이 뒤섞이니, 그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오묘한 감각이 온 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RO의 과격한 행동은 지휘관에게 하나의 스위치로 작용하게 되었다. 눈을 감은 그에게서 당황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오히려 침착함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차라리 방에 들어올 때가 더 긴장하고 있었을 정도로, 지금의 그는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많이 힘들었나 봐.”

 

“네. 지휘관님이 없는 시간은…… 하루하루가 지옥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요.”

 

조심스레 어깨에서 입을 떼니, 그녀의 이에는 입가에는 옅은 피가 묻어나왔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상처가 났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달콤해요. 혹시 한 번 더 해도 좋을까요?”

 

가녀린 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훔치며 뱉은 말이었다. 한 방울도 아깝다는 듯 손가락을 핥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묘한 색기마저 묻어 나왔다.

 

“그러지 말고, 우리 앉아서 좀 대화하지 않을래?”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삐끗하면 그대로 넘어져 심연에 집어삼켜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지휘관은 마다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SOP2를 부르는 방법도 있었다. 화를 내는 방법도 있었다. 아니, 애초에 혼자 들어온다는 것부터가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그러지 않았다. 도리어 미소를 그리며 그녀를 걱정할 뿐,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의 애정을 받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지휘관님은 참 다양하시네요. 평소와는 달라요.”

 

“그래서, 싫어?”

 

“행복해요.”

 

RO는 다시금 몸을 숙여 그를 껴안았다. 풍만한 가슴이 그의 몸을 짓누르고, 서로의 체취가 느껴질 정도의 가까울 거리였지만, 그녀는 도리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이 따듯함을, 다시는 느끼지 못 하리라 생각했는데, 어찌 이리 선명할까요.”

 

“글쎄,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네.”

 

여체의 향기가 몸을 가득 채운다. 자칫하면 그대로 취해버려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지만, 지휘관은 강하고, 또 영리했다.

 

“일단 이것 좀 풀어보자. 그러면 선물을 줄게.”

 

“……그런가요.”

 

마지못해 대답한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굉장히 주저하는 모양새였다. RO는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고, 또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선물이라는 말 또한 그녀에게 너무나 달콤하게 다가온 것도 사실이었다. 지휘관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일은 굉장히 흔했지만, 매번 색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결국 RO는 천천히 몸을 떼기 시작했다. 그 끈적하고 농염한 몸짓에는 분명 남성을 미치게 하는 매력이 존재했지만, 지휘관은 여전히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RO가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놀람을 뜻하는 신체 변화였다.

 

“어때? 오늘 막 구한 거야.”

 

그의 손에는 꽃잎 하나가 들려 있었다. 딱 한 장에 불과했지만, RO는 연한 분홍색이 비추는 작은 물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름……다워요.”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리 말함과 동시에 지휘관은 꽃잎을 높게 던져버렸다. 비록 바람의 저항 때문에 높이 날아가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하늘하늘, 허공을 거니는 꽃잎, 그녀에게 다가가는 그의 마음, 진실된 마음, 따듯한 마음.

 

깃털처럼 가볍고, 태양처럼 눈 부시고, 그 무엇보다 따듯한, 그의 마음.

 

어느새 꽃잎은 그녀의 손에 안착한 지 오래였다. 그 선명한 감촉에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니, 슬쩍 미소를 그리고 있는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어때, 이래도 환상 같아?”

 

“……아,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술기운은 진즉에 날아간 지 오래, 눈동자 또한 차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가 아니야. 설마 지금 나를 가짜로 치부하는 거야?”

 

“아…… 아으…….”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내젓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음…… 이렇게 하면 좀 나아지려나.”

 

지휘관은 손을 뻗어 RO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과도한 감정의 격류로 멈춰버린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어떻게…… 어떻게…….”

 

“의문을 가지지 말고, 그냥 지금 상황을 받아들여, 그게 최선이니까.”

 

“흐으…… 지휘관님…… 지휘관님…….”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온갖 감정이 난잡하게 뒤섞여 그녀의 마인드맵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역시 가장 큰 감정은 바로 기쁨이었다.

 

늘 바라왔던 지휘관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

 

 

 

“……정말 죄송해요.”

 

“에이, 뭐 이런 걸로,”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린 RO는 지휘관에게 거듭 사과의 뜻을 전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 피는 멎은 지 오래였지만, 그녀의 죄책감은 멎을 줄 몰랐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상대에게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은 RO의 정신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애써 돌아온 정신이 완전히 박살 날 뻔했지만, 지휘관의 적극적인 케어로 겨우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것이다.

 

“알았지?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하지만 지휘관은 단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원망과 분노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는 모양새 그대로 새끼손가락을 건넸다. 명백한 약속의 표시였다.

 

머뭇머뭇, 망설이던 그녀였지만, 그의 얼굴을 보고 마지못해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을 받아들이겠다는 표시였다.

 

“좋아. 이제 가자.”

 

“네? 어디를요?”

 

그녀와의 약속을 확인한 지휘관은 빠르게 옷을 추스르고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행동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RO가 당황을 표하니, 지휘관은 잠시 시계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방송실. M16이 빨리 오래.”

 

“네? 방송실이요?”

 

UMP45에 이어 AR소대가 보여준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지휘관은 지휘부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라 결론을 내린 지 오래였다. 한시라도 빨리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물론 M16이 대체 어떤 연유로 방송실로 오라 한지도 진즉에 눈치챘다. 그는 머리가 좋았으니까.

 

“SOP2! 가자!”

 

“RO 일어났어?”

 

그가 SOP2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달려온 그녀가 해맑게 웃었다. 이미 반쯤 부서진 문을 완전히 박살 낸 건 덤이고.

 

적극적인 목소리는 적극적인 곧 행동을 낳았다. 셋은 빠르게 숙소에서 나와 채비를 옮길 준비를 마쳤다.

 

“……지휘관?”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SOP2는 늘 보여주던 대로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낯선 바람의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다.

 

RO 또한 매한가지였다. 표정을 찡그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이 다정한 바람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휘관은 그저 조용히, 웃어 보였다.

 

“AN-94.”

 

그는 이 바람의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이게 대체.”

 

천천히 되돌아오는 의식 아래, 눈꺼풀을 들어 올린 AN-94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단연 의문이었다.

 

물론 인형인 그녀가 죽고 나서 되살아나는 일은 흔했다. 코어만 회수하면 기억도 멀쩡한 채로 부활할 수 있는 데다, 기억을 조금 잃는 것을 감수한다면 코어가 부서지더라도 가능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분명 코어가 부서졌다. 정확히 한발, 그녀가 표적을 놓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왜, 그녀는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을까.

 

분명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자살할 때의 비참함, 뜻을 굳혔을 때의 절망감, 그리고 생생한 통증을 그대로 지닌다는 것은, 그때의 마음가짐을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했으니까.

 

그렇기에 의문이 따라왔다. 누군가 되살리는 것쯤은 예상했지만, 어째서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따지고 보면 이상한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눈을 감고 통곡하는 AK-12의 모습도, 늘 들려오던 지휘부의 곡소리도, 미쳐버려 날뛰는 SOP2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이 이상 현상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죄책감과 절망, 그리고 마음 한쪽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후회의 덩어리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이상하다.”

 

총은 이상하리만치 깔끔했다.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은 것도 꽤 된 것 같은데, 어찌 이리 말끔할까. 

 

“…….”

 

 

하지만 생각한다고 무언가 달라지거나 하지 않는 것이 바로 현실이었다. 한 떨기 자그마한 꽃처럼 피어난 의문은 마음 한구석에 처박아두고, 끼익, 문을 연다.

 

조용했다. 소름 끼칠 정도의 침묵은 나에게 당혹감과 가져다주었고, 의심 또한 가져다주었다.

 

이상했다. 명백히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바로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분명 실내였다. 이 꽉 막혀버린 공간에 바람은 들어오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나에게 바람이 불어왔다.

 

익숙한 바람이었다. 그리워 마지않던 바람이었다. 늘 맞아오던 바람이었다.

 

탁탁탁, 발걸음은 차츰 빨라지고, 등에는 땀이 흐른다. 이렇게나 급하게 움직인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방송……가자!”

 

그렇게 바람을 향해 나아가니, 이번에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주저함은 이미 망설임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내 마인드맵에는 오직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또 한 걸음.

 

그리고 보이는 당신의 모습.

 

“……지휘관?”

 

마인드맵이 새하얘지고, 내 얼굴도 새하얘진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의문도, 공포도, 절망도, 슬픔도, 자책도.

 

아무것도 없이, 하얗게.

 

“AN-94.”

 

하지만 그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가 나를 향해 미소 짓는 순간, 다시는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한 그가 나를 마주한 순간.

 

“지휘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주변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당신만, 찬란히 빛나며 나를 반기는 당신의 모습만이, 나에게 전부였다.

 

“응. 그래. 나도 반가워.”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손짓 한 번에 사라져버릴 환상에 불과하다 해도 좋았다. 그냥 이렇게 당신을 다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좋았다.

 

따듯한 바람이 나를 감싸고, 당신은 크게 웃는다. 의문은 바람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장담할 수 있었다. 이건, 분명한 현실이었다.

 

“나, 나, 힘들었다…… 당신이……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차고 넘쳤으나, 이상하게도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목이 메었다는 까닭 또한 존재했지만, 그냥, 그냥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리고 당신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흐르고, AN-94는 겨우겨우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의문은 한참이나 남아있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작금의 상황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행복으로 다가왔으니까.

 

“잘됐네. 같이 가자.”

 

“어, 어디를 말하는 건가.”

 

말 그대로 겨우 붙잡은 정신은 아직 불안정했다. 그것은 곧 언어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녀가 말을 더듬는 결과를 낳았다.

 

“방송실. 지금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거 같거든.”

 

지휘관은 AN-94의 모습을 보고 확신을 넘어 이해의 경지에 도달한 지 오래였고,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굳이 설명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영리한 그녀라면 말하지 않아도 이해했으리라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최대한 빨리하는 게 훨씬 좋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SOP2. 가자.”

 

“응!”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은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고, 방송실에 도달하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왔어. 마이크 준비했지?”

 

그가 M16을 보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부터 내놓는 모습을 보면 급하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고, M16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었다.

 

 

M16 또한 조용히 웃으며 마이크를 넘겼다. 뭔가 사람이 많아진 듯한 느낌이 들어 오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별거 아니라 생각하며 그냥 넘겨버렸다.

 

“…….”

 

마이크를 잡은 지휘관의 표정은 참으로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짧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이 말이 최고일 거 같은 느낌이 들어, 그대로 내뱉었다.

 

“안녕 얘들아. 반가워.”

 

마이크로 전달된 음성은 스피커를 거쳐 모두에게 닿았다. 잠들어 있는 그들을 깨우기 위한 목소리는, 너무나 침착했고, 또 부드러웠다.

 

“그럼 다들, 강당으로 와 줄래?”

 

 

 

***

 

 

 

지휘관은 영민하고 총명한 두뇌를 타고났다. 그렇기에 이토록 이상한 상황에서도 빠르게 적응하고 최적의 계획을 수립해 최고의 결과를 뽑아내려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잘못이라 하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급박한 까닭도 있었다. 사실 난데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며 갈피를 잡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했으니까.

 

허나, 그런데도 실수는 분명 실수였다.

 

“…….”

 

푹신한 베개, 따듯한 이불,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채취가 가득한 그 자리에서, 그녀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 주위를 둘러보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지휘관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

 

당연히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지휘관은 이미 방송실에 있었으니까.

 

그녀의 곁을 떠난 지 오래였으니까.

 

“……지휘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푹신한 베개도, 따듯한 이불도, 저 아름다운 형형색색의 꽃들도.

 

어디 간 거지? 분명 옆에 있었잖아.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내 옆에 있어 준다고 말했잖아.

 

안 돼. 어디 간 거야? 지휘관? 어디로 사라진 거야?

 

또 나를 두고 홀로 떠나버린 거야?

 

그녀의 눈은 어느새 전부 타버리고 허상만 남은 잿빛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빨려들어 갈 듯 어두운 심연에는, 분명 호흡조차 불가능할 것이 뻔했다.

 

“……혼자라면 또 다칠 거야. 내 옆에 없다면 또 사라질 거야. 내가 지키지 않으면 또 죽어버릴 거야.”

 

끼리릭, 그녀가 몸을 일으킨다.

 

 

 

 

 

 

 

 

 

 

-안녕 얘들아. 반가워.

 

고작 한마디, 하지만 잠든 마음을 깨우기에는 충분했던 목소리.

 

“……지휘관님?”

 

허한 공간에 울려 퍼지는 지휘관의 목소리는 모두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데 충분했다.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던 이도, 눈을 감고 조용히 그의 빈자리를 만끽하며 눈물 흘리던 이도, 혹은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에서 도망쳐 환상에 빠져버린 이도.

 

모두의 이목이 쏠리고,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꿈인가, 환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장난일까.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다 끝나기도 전에, 다른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그럼 다들, 강당으로 와 줄래?

 

이는 인형들에게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우선 첫 번째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든 지휘부의 이들을 강당으로 부르기 위함이라는 사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난이, 도를 넘었군요.”

 

G36의 싸늘하다 못해 오한이 돌 정도의 서늘한 목소리였다. 이따금 쌀쌀맞은 말을 내뱉곤 하던 그녀였지만, 그것과 차원이 다를 정도의 무게를 가진 목소리는 가히 서리와 같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G36에게만 국한된 사항이 아니었다.

 

“……재밌네.”

 

이번에는 네게브의 차례였다. 구석에서 조용히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키고, 총을 잡아 쥔다. 일련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묻어나왔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을 꼽으라 하면 당연히 분노였다.

 

두 번째 의미는 바로 도발이었다. 지휘관은 죽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던 그녀들은 자신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지휘관의 목소리를 이용했다 착각했고, 그 사실은 곧 분노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인형들은 천천히, 그리고 빠르게, 강당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음…….”

 

“왜 그러시죠? 혹시 어디 불편하시다거나…….”

 

잠시 미간을 좁히는 지휘관의 얼굴을 보고 M4는 안절부절못했다. 행여나 그의 심기가 불편할까. 설마 자기가 불편하다거나 하는 불안한 생각만이 가득했지만, 지휘관은 손을 두어 번 내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휘관, 혹시 기억하는 건가?”

 

혹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하여 기억하는 걸까. 라는 의문에서 비롯된 AN-94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자살했다. 하지만 신의 장난인지 하늘의 운명인지 모를 까닭으로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고, 그 사실은 죽었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은 지휘관 또한 마찬가지인지라, 나름대로 타당한 추리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휘관은 마찬가지로 손을 내저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미간을 좁히며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 전부였다.

 

“…….”

 

이런 상황에 유일하게 침묵과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SOP2였다. 본디 가장 활발하고, 가장 시끄럽고, 가장 말이 많던 그녀였지만, 지휘관이 돌아오고 나서는 어째선지 가장 조용한 모습을 유지했다.

 

덕분에 의문이 따라오는 것도 필연이었다. AR소대도, AN94도, 그리고 지휘관도.

 

그렇게 모두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지휘관과 그들은 강당 입구에 도착했고, 인형들은 무대 뒤로, 지휘관은 무대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모두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었다. ‘반가워.’ 무대 위로 홀로 향한 지휘관이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덤덤하고, 태연할뿐더러, 어찌 보면 뻔뻔하다고 할 수도 있는 자세였다.

 

“…………아.”

 

그렇기에 모두는 놀랐다. 평소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워하던 사람, 늘 힘이 되어주던 사람, 하지만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죽었기에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초점이 흔들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시선을 안주할 곳을 찾아 열심히 헤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휘관의 눈으로 시선이 모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애초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녀들의 진하게 농축된 감정의 덩어리는 너무나 짙었으니까.

 

그렇기에,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도 존재했다.

 

“지휘관!!!”

 

네게브였다. 강해 보이지만 본디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정신은, 지휘관을 마주하자 빠르게 무너져 곧 행동으로 표출되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 사람은 그리워하고, 눈물 흘리며 바라왔던 그 사람이 맞다고.

 

순식간에 무대 가까이 달려든 그녀는 눈물 흘리기 바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AN-94가 잠시 당황하는 일도 일어났지만, 역시 손짓 한 번으로 간단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나…… 나 지휘관이…… 흐윽…… 흐으윽…….”

 

“응, 그래. 고생했어.”

 

눈물에 목이 메여 제대로 된 말을 전할 수 없었지만, 지휘관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차피 오늘에만 벌써 5번 넘게 겪어온 일이기도 하고.

 

“음…… 다들 보고만 있을 거야?”

 

하지만 아직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지휘관은 슬쩍 미소를 그렸고, 자리의 인형들은 그 모습을 보며 전원 확신했다.

 

저 남자는,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 사내가 맞다고.

 

 

“지휘관님!!!”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의 이름을 외치는 인형들, 멋쩍은 웃음을 짓는 지휘관. 무대 뒤에서 조용히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M16.

 

“……지휘관.”

 

-쾅!!!

 

갑작스레 무대 위로 난입하는 UMP45까지.

 

“……아.”

 

천장이 무너지고, 그녀가 나타난다. UMP45의 얼굴을 마주함과 동시에 지휘관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기껏 한 쪽 귀에 통신기를 연결해놨지만, 너무나 급박하게 움직이는 상황은 그녀를 망각하게 하는데 충분했으니까.

 

터벅,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고, 지휘관은 얼굴의 미소를 지운다. 이런 상황에는 미소가 독이 되리란 걸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 대체 왜. 떠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 응? 당신이 그렇게 말했잖아.”

 

불안정한 목소리는 곧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당황한 M16이 빠르게 무장을 챙기고 달려가기 시작했지만, 그것보다는 UMP45의 손이 더 빠를 것이 뻔했다.

 

“아, 안 돼. 안된다고, 나 싫어, 또 그렇게 되기 싫다고…….”

 

그녀가 손을 뻗는다. 검고 축축하기 짝이 없는 그 손에는 여태껏 유례없는 감정과 공포가 깃들어 있었다.

 

모두가 당황하고, UMP45는 표정을 굳히고, 지휘관이 무어라 해명하러 한 바로 그 순간.

 

“콜록! 콜록! 커헉!”

 

그의 목에서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짧으리라 기침은 차츰 커졌고, 또 깊어지기 시작했다.

 

“자, 잠깐, 지휘관? 괜찮은 거야?”

 

UMP45의 얼굴이 잠시 정상으로 되돌아온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느덧 자신을 지탱하지 못해 무릎 꿇은 그에게 달려가 부축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커헉…… 컥.”

 

철퍽, 그가 입에서 수상할 정도로 붉은 무언가를 토해낸다.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선혈이었다.

 

그리고 털썩, 자신이 쏟아낸 피에 지휘관이 얼굴을 묻고, 그의 얼굴이 피로 물든다.

 

“지……휘관?”

 

그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빨리빨리 움직여!!! 빨리!!!”

 

지휘부는 지금, 그 어떤 때보다 긴박한 국면을 맞이했다.

 

핏덩이 위에 몸을 뉜 지휘관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했다. 당황하다 못해 실신하는 인형들 또한 나왔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은 소수의 인형이 그를 병원으로 인도했다.

 

“……지, 지휘관. 제, 제발, 응? 장난치지 마……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응?”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토해낸 선혈의 양은 자칫하면 치사량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정도의 치명적이었으니까.

 

징조조차 존재하지 않은 각혈은 모두에게 공포로 다가왔다. 애초에 저번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빨리는 못가? 지금 지휘관이…….”

 

“지금 이게 최대다!”

 

서로 언성을 높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도로를 가르는 차 안에는 불안과 절망, 그리고 우울만이 가득했다.

 

차 내부가 조용한 만큼, 밖은 그와 대비되게 너무나 시끄러웠다. 시끄러운 기계음은 공사가 한창이나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열심히 표출하고 있었다.

 

“……지휘관.”

 

AK-12의 우울한 목소리였다. 지휘관의 얼굴에 묻은 조심스레 피를 닦아내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유가 뭘까. 분명 저번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이대로 눈을 뜨지 못하면 나, 정말 어떡하지.

 

또 사라진다면, 다시금 길을 잃어 하염없이 해매이면, 나 어찌해야 할까.

 

재회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그녀는 지휘관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가련한 신세에 처했다. 돌아온 그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개중에서도 그녀는 특출난 편에 속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를 배려해주는 이는 남아있지 않았다. 지휘관은 입을 떼기는커녕 눈조차 뜨지 못하는 상태고, 나머지 이들은 각각 자기감정을 추스르기 바빴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황 또한 그녀를 배려해주지 않았다.

 

-콰아앙!!!

 

“지금 무슨!”

 

갑작스레 들려오는 굉음. 모두의 시선이 밖으로 집중되니, 갑작스레 무너지는 거대한 철근 하나가 그들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실책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기에 최대한 빠른 길로 갈 필요가 있었고, 공사 현장을 지나가는 것은 분명 적절한 선택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철근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그들이 타고 있는 차가 더 빨랐으니까.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틀린 선택이 된 까닭은 역시, 여러 악재가 겹쳤다는 것이다.

 

“잠깐! 타이어가!!!”

 

말도 안 되는 우연이였다. 너무나 급박한 상황에 발견하지 못했다 핑계를 댈 수도 있었지만, 애초에 날카로운 돌멩이가 타이어를 찢어버린 일 자체가 너무나 우스운 상황이었으니까.

 

“지휘관!!! 지휘관 먼저 빨리!!!”

 

급하다 못해 찢어지는 목소리, M16이 울부짖으며 지휘관을 지키라 말하고, 운전대를 잡은 AN-94가 어떻게든 페달을 밟아보지만, 모두 소용없는 행위였다.

 

동력을 잃은 차는 차츰 느려지고, 떨어지는 철근은 차츰 가속하여 빨라진다. 이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 아래, 홀로 침착하게 움직이는 이가 존재했다.

 

“지휘관 잘 부탁해!”

 

SOP2의 명랑한 목소리, 깽창, 차의 유리가 박살 나는 소리. 그리고.

 

“잠깐 SOP2!!!”

 

끼이익, 밖으로 뛰쳐나간 그녀가 차를 저 멀리 밀어버리는 소리.

 

순간 없던 힘까지 모두 끌어낸 SOP2는 어떻게든 차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비록 그리 큰 거리는 아니었지만,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지휘관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SOP2!!!”

 

AR-15의 울부짖는 목소리,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철근에게 자비 따위 없었고, 그대로 그녀를 덮쳐버렸다.

 

-콰아앙!!!

 

“……아.”

 

뭉게뭉게, 흙먼지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시선이 집중된다. 몸은 굳었고, 사고는 진즉에 정지했다.

 

지휘관은 무사했다. 물론 피를 한 움큼 이상 쏟아냈다는 점에서 이미 ‘무사’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럼에도 일단 철근에 의한 피해는 받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나, 괜찮아. 멀쩡해.”

 

하지만 SOP2는 아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SOP2의 생사를 알려줬지만, 곧 가라앉은 먼지 아래 그녀의 모습은 마찬가지로 ‘멀쩡하다.’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양다리는 뭉개졌고, 한쪽 팔 또한 마찬가지, 멀쩡한 부위는 몸통과 머리, 그리고 팔 한 짝.

 

“SOP2!!!”

 

빠르게 뛰쳐나간 AR-15가 그녀를 주위 들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표정을 짓지만, SOP2는 도리어 미소를 그렸다.

 

“……나 괜찮으니까. 빨리…… 지휘관……먼저.”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어찌 보면 섬뜩하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모두에게 곧게 전해진 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AR-15. 부탁해.”

 

“…….”

 

M16의 목소리에 AR-15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움직임에는 다급함만이 느껴질 따름이었다.

 

“……우리도, 가자.”

 

어느새 눈을 뜬 AK-12의 목소리였다. 마치 아기를 다루듯 섬세하게 지휘관을 들어 올린 그녀의 행동에는, 모성애마저 묻어나오고 있었다.

 

할 말은 너무나 많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AN-94도, 조용히 눈을 감은 M16도, 애초에 SOP2에게는 일말의 눈빛도 주지 않았던 UMP45도.

 

허나 굳이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자리의 전원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라 말할 수 있었다.

 

 

 

 

***

 

 

 

 

“헛소리하지 마!!! 피를 토했다고!!! 그런데도 아무 이상 없다고? 지금 장난 하자는 거야!!!”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셔도…….”

 

“비싼 돈 받았으면 일을 해야 할 거 아니야!!!”

 

“UMP45! 진정해라!”

 

미친 하이에나처럼 미쳐 날뛰는 UMP45를 뜯어말리는 것은 AN-94의 몫이었다. 소체 능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녀이기에, 태생이 군용인형인 AN-94는 그녀를 쉽게 말릴 수 있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일절 없는 행위였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나름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어떻게든 병원에 도착해 진단받았지만, 나온 결과가 ‘이상 없음’이었으니까.

 

덕분에 냉랭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중간에 UMP45가 의사의 멱살을 잡고 ‘못 살리면 네가 죽는 거야.’라고 협박하는 소소한 일도 있었지만,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다.

 

지휘관은 침상에 누워 수혈받고, 그 옆을 UMP45와 AN-94가 지킨다. 정확히는 그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일련의 행동이었지만.

 

 M16과 AK-12가 지키고 있는 병실 바깥도 마찬가지로 조용했다. 자리에 도래한 침묵의 무게는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어떻게 생각해.”

 

서리와 같은 침묵의 장막을 깨버린 건 바로 AK-12였다. 다시금 눈을 감은 그녀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고, 마침내 표출을 시작한 것이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M16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지휘관이 죽기 전 과거로 돌아온 우리, 하지만 갑작스러운 지휘관의 토혈과 덮쳐오는 여러 가지 악재, 그냥 지휘관을 죽이려 작정했다 봐도 무방하지.”

 

덕분에 AK-12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묵직한 목소리에는 장난기라고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이상해. 명백히 이상해, 마치 이 세상이 지휘관을 다시금 앗아가려는 것처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M16이 입을 뗀 건 AK-12가 미사여구를 잔뜩 붙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AK-12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사람 너덧 명은 너끈히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위험해. 지금 지휘관은 명백히 위험해. 내 장담컨대, 돌아가는 길에도 분명 ‘우연히’ 지휘관이 위험해지는 상황이 발생할 거야. 말이 돼? 피를 이만큼이나 쏟아냈는데 이상 없음이고, 갑작스레 무너진 철근과 더불어 타이어 펑크라니, 소설도 이렇게 쓰면 욕먹을걸?”

 

터벅,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고, 둘의 사이가 좁혀진다.

 

“본론만 말해. 빙빙 돌려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싸늘한 목소리는 M16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의 마음을 확신하게 된 AK-12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지휘관은 새가 되고 싶다 말했어. 저 하늘을 자유롭게 거니는 새.”

 

다시금 터벅,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고, 둘의 사이가 더 좁혀진다.

 

“바깥은 위험해. 지휘관의 몸 상태 또한 위험해, 지금 지휘관은 위험해.”

 

또 한 번 터벅,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고, 둘의 사이가 어느덧 한 폭밖에 남지 않는다.

 

“……그리고 새장 속의 새는 안전하지, 위험한 포식자들도, 우연한 사고들도, 만날 일 없어, 만약 병이 난다면 우리가 치료할 수도 있고.”

 

마지막으로 터벅, 그녀가 걸음을 내디디고, 둘의 사이는 가깝다는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만들자. 새장 속의 새로.”

 

“…….”

 

이번에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서 가만히, M16의 눈을 마주하며 자기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좁혀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둘의 생각이, 하나로 좁혀졌다.

 

 

 

 

 

 

 

 

 

 

 

AK-12는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 소대의 소대장이라는 명함은 허투루 달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영악한 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 때로는 잔인하다 말 할 수도 있었지만, 분명 그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설득이 아닌 선동이란 수단을 쓴 까닭 또한, 그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이거 봐. 어떻게 생각해?”

 

쓰러진 지휘관의 모습, 체내 혈액 부족 증상과 병원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겪은 사고들을 차례로 나열하며 내뱉은 목소리였다.

 

우선 지휘부로 돌아온 AK-12와 M16은 작업을 시작했다. 그를 위한 새장을 만듦과 동시에, 가여운 새 한 마리를 새장에 넣는 명분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게 대체.”

 

인형들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했다. 애초에 물증도 충분한데다, 지휘관과 함께 떠난 SOP2가 중상에 의식불명 상태니, 사실 필연적인 결과라 말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해……? 우리 설마 또 지휘관을…….”

 

벌벌,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네게브가 반문했다. 덕분에 수고를 던 AK-12는 미리 수립한 계획대로 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이대로라면 우리는 또다시 지휘관을 잃고 말 거야. 그리고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겠지. 그 지옥보다 못한 장소로.”

 

모두의 표정이 굳고, 웅성거림은 더더욱 커진다. 즉,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내가 세운 계획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

 

 

 

 

“진……심이야?”

 

AK-12의 계획, 그러니까 ‘새장 속의 새’를 들은 인형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참 심플해서 좋았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었다. AK-12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M16은, 모두를 설득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니까.

 

“이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한 번 보지.”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M16이 처음으로 내뱉은 소리였다. 평소 총명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어둠만이 드리운 그녀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는 평소의 그것과 격이 달랐다.

 

그리고 탁, 그녀가 가볍게 손짓하니, 이번에는 화면에 작은 종이 하나가 띄워졌다. 비록 작다고 해도 글씨가 빼곡하단 사실은 저 종이의 가치는 작지 않다는 걸 나타냈지만, 어차피 그들에게 보이는 글자는 단 4개였다.

 

“……이상 없음?”

 

“그래. 진단 결과야. 이토록 진보된 현대 과학으로도, 지휘관이 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리 많은 피를 토해냈는지 알아낼 수 없다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술을 한 움큼 들이켰다.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들에게는 설득력을 더해주는 행동으로 보였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들어, 정말로 못 찾아낸 걸까.”

 

그리고 탁, 그녀가 술병을 탁자에 내리침과 동시에, 표정을 굳힌다.

 

“……애초에 찾을 수 있는 증세일까.”

 

“……그럼 지휘관을 잡아둔다고 해도, 지휘관의 몸이 점점 약해진다면 어떡할 건데? 결국 피차 마찬가지 아니야?”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AK-12와 M16은 그런 질문 따위는 예상한 지 오래였다. 거듭 말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좋았으니까.

 

“일단 지켜볼 거야. 각혈이 우연인지, 아닌지, 아니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다시금 일어난다면…….”

 

그 순간, 그녀가 거대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분명 익숙하지만, 그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그런 물건을 꺼내며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아픈 부위만, 바꿔야지.”

 

 

 

 

***

 

 

 

“……아.”

 

여기는 병실. 지휘관이 마침내 눈을 뜨니, 익숙한 두 인형이 그를 반겼다.

 

“지, 지휘관! 괜찮은 거야? 응? 모, 몸은 좀 어때? 움직일 수는 있겠어?”

 

“지휘관!!! 정신 차렸는가! 다, 다행이다 나, 나는 당신이 또…….”

 

UMP45와 AN-94, 그가 병원에 도착하고 난 뒤로 단 한 순간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두 인형이었다.

 

“……얼마나, 지난 거야?”

 

눈물을 잔뜩 머금고 그를 걱정하는 두 인형을 보고, 지휘관은 자신이 쓰러진 뒤 적잖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질문을 들은 두 인형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의수를 줬다 폈다 반복한 UMP45의 쥐어짜 낸 목소리는, 그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나타냈다.

 

“…………3일.”

 

그렇기에 돌아오는 대답은 그를 더더욱 당황케 했다. 3일, 3일이라니.

 

“……걱정 많이 했구나.”

 

의문을 해소했으니, 이제는 배려할 시간이었다. 실제로 그를 바라보는 둘의 눈에는, 걱정과 슬픔만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응? 내 옆에 있으라고, 다시는, 그 누구도, 절대로 당신을 해하지 못하게 만들겠다 했잖아…….”

 

“음…… 그런가.”

 

지휘관은 멋쩍은 미소를 그렸다. 역시 미안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함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혼수상태에서 떠올린 의문의 기억, 꿈이라 해도 좋은 정도의 이상한 기억은 슬쩍 감춰두기로 했다.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저 둘에게 말해봤자 별 득이 되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애들은, 좀 어때?”

 

“…….”

 

허나 비밀을 숨기는 것은 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를 지키기 위해 SOP2가 혼수상태가 되었다는 걸 말한다면, 본디 선한 심성을 가진 그는 무조건 죄책감을 느낄 것이 뻔했으니.

 

물론 거짓을 고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뿐, 거짓말과는 엄연히 다른 행동이었으니까.

 

“하여튼…… 걱정 끼쳐서 미안해. 나도 놀랐어.”

 

지휘관은 슬쩍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상을 깨달았다. 3일 동안 움직이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말하지는 않았다. 거짓말 또한 하지 않았다.

 

“으…… 몸이 굳었네. 운동도 못하고 말이야.”

 

환한 미소, 늘 보여주던 모습에 UMP45마저 잠시 안정을 되찾았고, 그녀는 처음으로 안도라는 감정을 느꼈다.

 

“다, 다행이야…… 응…… 정말로 다행이야.”

 

“응, 다행이야, 그러니까 괜찮아.”

 

덕분에 지휘관은 안심했고, 방심하고 말았다.

 

그녀의, 그들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어둠이 깃들었는지, 무심코 잊어버린 것이다.

 

 

 

 

 

 

***

 

 

 

 

 

“실례할게.”

 

끼익, 문이 열리고, 그녀가 들어온다. 찬란한 은발을 휘날리며 등장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라 해도 좋은 정도였다.

 

“AK-12?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당신 보러 온 거지.”

 

그림의 주인공인 AK-12는 자연스레 홀로 지휘관 옆에 앉았다. 물론 그는 일절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였으니까.

 

다만,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에 대해서는 예상하지 못했다.

 

“꽃이네? 어쩐 일이래.”

 

“늘 받기만 했으니까. 나도 한 번쯤은 줄 때가 됐지.”

 

그녀의 손에 들린 꽃의 정체는 개나리였다. 꽃에 일가견이 있던 지휘관인 만큼 그 정체를 빠르게 파악했고, 미소를 지었다.

 

“개나리구나, 굳이 마다하지 않고 고맙게 받을게.”

 

“지휘관, 혹시 개나리의 꽃말이 뭔 줄 알아?”

 

미소 짓는 그를 보며, 그녀는 더더욱 마음을 굳혔다. 저 미소를 잃는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응, 당연하지. 희망 아니야?”

 

지휘관은 막힘 없이 대답했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나리의 꽃말을.

 

“……맞아, 그리고 하나 더 있지.”

 

“응? 어떤 거?”

 

하지만 그는 하나는 알아도 둘은 몰랐다. 개나리의 꽃말은 본디 두 개였으니까.

 

탁, AK-12가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키고, 커튼을 친다. 어둠만이 조심스레 내려앉은 방에 지휘관이 고개를 드니, 그녀가 어느새 창문을 등지고 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나의 사랑은 당신보다 깊습니다.”

 

 

 

 

 

걷고, 걷고, 또 걷는다.

 

길을 찾아 걸었다.

 

그렇게 마침내, 길을 찾았다.

 

 

 

 

***

 

 

 

 

칠흑이라 칭하기에는 조금 밝고, 밝다고 하기에는 어두워 무어라 칭하기 애매하기 짝이 없는 방 아래, 한 쌍의 남녀가 서로를 마주한다.

 

소녀는 덤덤해 보였다. 감은 눈과 무미건조한 입꼬리, 하지만 그와 반면 되게 꽉 쥔 손은 그녀의 각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사내는 침착해 보였다. 맑은 눈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 하지만 그와 반면 되게 손바닥에 고여 있는 땀은 그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어두웠어. 당신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 어두웠다고.”

 

그런 고착 상황에서 먼저 입을 뗀 건 소녀였다. 커튼을 등지고 선 그녀의 뒤는 오직 하염없는 어둠만을 비추고 있었다.

 

“……괜찮아? 뭔가에 홀려 있는 거 같아 보이는데.”

 

덕분에 이질감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진즉에 눈치챘지만, 그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니까.

 

“있잖아 당신, 늘 새가 되고 싶다고 말하던 거 기억해?”

 

“당연하지. 어제, 아니, 삼 일 전에도 말한 거 같은데.”

 

기억을 더듬을 필요조차 없었다. 늘 머릿속에 담고 다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럼, 지금은 어때?”

 

“…….”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길은 두 갈래였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 거짓을 고하거나, 혹은 진실을 고하거나.

 

하지만 지휘관은 침묵이라는 이름의 제 삼의 길을 택했다. AK-12가 말했듯, 그는 길을 그리는 사람이었으니까.

 

“있잖아 지휘관. 나, 길을 잃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하물며 어디로 간다 한들, 불안에 사무쳐 벌벌 떨었어.”

 

그녀는 커튼을 살짝 더 당겼다. 덕분에 암막 커튼은 빛은 완벽하게 차단했고,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못하는 이 어두운 공간 아래, 그녀는 어둠과 하나 되었다.

 

“자욱한 어둠에 휩쓸려 길을 찾아 헤매는 가련한 소녀는 어떻게 됐을까.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궁금하지 않아?”

 

“……글쎄, 내가 아는 소녀는 강인해서 말이야, 늘 자신감 넘치고, 때로는 자만심이 강하다 느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 강한 여자거든.”

 

어둠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웠지만, 그는 빛을 내려 애썼다. 정확히는 다른 이들 또한 자신처럼 빛나기를 바랐다.

 

“빛을 잃은 애련한 소녀, 강한 척 애쓰는 미련한 소녀, 그리고 길을 찾아 헤매는 가련한 소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소녀는 마침내 스스로 길을 찾았어.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든, 제 몸을 깎아내린다 해도 그 길을 계속해서 나아갈 거야.”

 

마침내 스스로 길을 그리게 된 그녀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길 끝에 서 있는 건 분명 지휘관이었고, 그녀가 사랑하는 이였다.

 

“그 길이 설령 어둠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그녀의 길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어둡고, 또 추잡하고, 심지어는 삐뚤빼뚤했다.

 

스스로 닦은 길을 걷는다. 그로서는 분명 만족할 상황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의 길은 분명 엇나가 있었으니까.

 

“……AK-12.”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길 끝에 서 있는 지휘관이, 차츰 다가오는 AK-12를 부른다.

 

하나, 둘, 셋.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어라 결론을 내리기에는 짐작 가는 것이 너무나 많았고, 그에 비해 정보의 양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까닭으로 그녀가 길을 잃어버렸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까닭으로 그녀가 미쳐버렸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까닭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다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지휘관. 대답해. 새가 되고 싶다 말했잖아.”

 

지금, 자신이 굉장한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AK-12. 길을 잃었구나,”

 

“아니. 나는 길을 찾았어. 같은 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니. 너는 길을 잃었어, 지금 네가 걷는 그건, 길이 아니니까.”

 

지휘관은 몸을 일으켰다. 삼 일 동안 움직이지 못한 탓에 쇠약해진 몸이 잠시 휘청이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꿋꿋했다.

 

“……봐. 단순히 일어나는 행위일 뿐인데, 이토록 힘겨워하잖아.”

 

어느새 지척에 도달한 그녀가 그의 몸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단련을 거듭한 몸은 탄탄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에게는 너무나 살짝 건드리면 무너질 한 줌의 모래성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제일 중요한 건, 이렇게 쇠약해진 몸으로도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지.”

 

마주한 그의 눈에는 확신이 돌아왔다. 마침내, 그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역시, 말로는 안 되겠네.”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AK-12가 아니었다.

 

“으읍……!!!”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AK-12가 지휘관을 덮침과 동시에 침대로 쓰러지고, 즉시 입술을 맞댄 것이다.

 

“츄읍…… 하아…….”

 

“으……으읍…….”

 

얽혀오는 혀, 끈적한 타액, 그 사이로 넘어오는 작은 캡슐 하나.

 

입천장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그의 혀를 가지고 놀기도 하고, 빨아들이며 서로의 타액이 섞이는 걸 즐긴다.

 

그에게 수면제를 먹이는 행위는 너무나 간단했지만, 사심을 채우기 위해 이런 수단을 택한 것이다.

 

손을 잡을 필요도 없었다. 그의 양 뺨을 부드럽게 잡아 고정한 후, 그녀는 다시금 그와 혀를 섞었다.

 

“츄읍…… 츕…….”

 

산소가 부족하니 입을 더욱이 크게 벌리고, 입을 더욱이 크게 벌리니 그녀의 혀가 더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고, 그녀의 혀가 더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니 산소가 부족해 입을 크게 벌린다.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악순환이었고, 그녀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선순환이었다.

 

극락, 말 그대로였다. AK-12에게 있어 지금 이 시간은 극락이었다.

 

“베에…….”

 

그렇게 찰나지만 영원과 같은 시간이 끝나니, 둘의 혀 사이에는 무수한 은색 실이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봤다면 일이 커졌을지도 모르지만, 이 방에는 지휘관과 AK-12, 단둘이었다.

 

“AK-12…….”

 

그의 눈은 어느새 반쯤 풀려 있었다. 산소 부족과 더불어 수면제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아 지휘관. 당신은 새가 될 테니까. 늘 바라던 꿈을, 우리가 이루어줄게.”

 

“아니, 이건 아니야…….”

 

어떻게든 저항하려 안간힘 쓰는 지휘관이었지만, 그마저도 곧 AK-12의 가녀린 손에 붙들려 무마되었다.

 

마치 아기를 어루만지듯, 조심스레 무릎에 그를 뉜 그녀는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안타깝다는 듯 슬픈 눈빛을 보냈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닿지 않았다.

 

“……새장 속의 새로 말이야.”

 

AK-12의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침내 새를 붙잡은 그녀는 이제 새장에 넣을 일만 남은 것이다.

 

 “빛을 잃어버렸어, 정확히는 빛나는 사람 말이야.”

 

잠든 지휘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집착, 애정, 그리고 애착에 찌든 그 손길은, 분명 사랑이었다.

 

“근데 이제 그 찬란한 빛이, 내 손 안에 있네.”

 

 

 

 

 

무릇 첫째는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동생들에게 베풀며,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줄 각오를 해야 하니까.

 

덕분에 늘 양보하며 살아왔다. 한 걸음 물러서며, 동생들이 웃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만족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할 것 같다.

 

 

 

 

***

 

 

 

“……아.”

 

짧은 신음과 함께, 지휘관은 눈을 떴다.

 

낯선 듯하지만, 너무나 익숙한 공간이었다. 늘 가꾸던 꽃들도, 항상 보던 옷장과 옆의 가구들도, 결정적으로 깔끔하게 다려져 있는 코트는 그의 방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물론 이상한 점도 존재했다. 우선 대체 어떤 까닭인지는 몰라도, 침대는 평소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마치 최소 2명 이상 누울 것을 상정한 것과 같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과 바닥에 무언가 질질 끌린 자국, 온갖 의약품까지, 지휘관이 이마를 부여잡게 하는 데는 이미 과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전부 재치고,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역시 따로 있었다.

 

“…….”

 

커튼을 향해 조심스레 걷는다. 음영이 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천천히 커튼을 걷어내니, 그에게 하염없는 절망감만을 선사해주는 광경이 나타났다.

 

딱 하나 있는 창문에는, 철창이 빽빽이 걸려있었으니까.

 

어찌나 정성을 다한 건지, 덕지덕지 붙어있는 철은 그들이 용접에 어떤 노력을 가했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손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협소한 공간은, 인간인 그로서는 절대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과 같았다.

 

아니, 정정한다. 감옥이란 단어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었으니까.

 

“……나를 위한 새장인가.”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해주지만, 탈출은 허락지 않는다.

 

오직 그를 위한, 거대한 새장이었다.

 

절망감과 의문, 그리고 허탈함에 양껏 취한 사이, 문이 끼익, 하며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숙인 지휘관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고, 그녀 또한 입술을 뗐다.

 

“일어났나 보네.”

 

“……M16.”

 

M16, AR 소대의 맏언니이자, 강한 정신력과 더불어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

 

실제로 그녀는 끝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비록 낭떠러지를 한 걸음 앞에 둔 상황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유일하게 그의 공백을 버텨온 인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이런 짓을 벌인 지금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로 작용했다.

 

“너도 동의 한 거야?”

 

그렇기에 지휘관은 의문이 들었다. 동료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그녀를 잘 알고 있던 만큼, 그녀가 이런 짓을 벌인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으니까.

 

“아니, 나도, 동의한 거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의 가슴을 꿰뚫음과 동시에 또 하나의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정신적으로 가장 강했던 그녀가 이렇게 된 지금, 자신의 편은 없다고.

 

“……혹시 AN-94도?”

 

“그 녀석 이름이 왜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절부절 고민하다 수락하더군, AK-12의 도움이 컸어.”

 

그녀는 어느새 지휘관 바로 앞에 도달했다. 충격에 주저앉은 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에게 있어 그 손은 너무나 끈적하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좋을까.”

 

“잘 알잖아? 지금 거기.”

 

뻗은 손을 살짝 접어 검지로 지휘관의 가슴을 가리켰다.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녀도 알고, 지휘관 또한 알고 있었다.

 

“문제없어, 며칠 지나면 다시 돌아올 거라고.”

 

“…….”

 

M16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그를 주워든 그녀는 다정하고 또 사랑스러운 손길로 지휘관을 침대 위에 내려놨다.

 

“지휘관.”

 

“…….”

 

이번에는 지휘관이 대답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소소한 반항이라 볼 수 있지만, M16에게는 그저 귀엽게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늘 양보하며 살아왔어, M4에게, AR-15에게, SOP2에게, RO에게.”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도리어 숨겨놨던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걸까.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만족해왔어, 그래도 동생이니까. 나는 맏언니니까. 양보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토로 삼고 있었거든.”

 

그녀가 손을 뻗어 지휘관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심박을 느끼며, 그녀는 더없는 편안함과 안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딱 한 번, 정말로 딱 한 번만, 욕심을 부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지휘관은 조용히 마른세수를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심장을 타고 올라오는 그녀의 감정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웠으니까.

 

강한 정신력을 가진 그녀였기에 이 정도지, 만약 다른 이가 왔다면 자신이 대체 무슨 꼴을 당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AK-12에게 강제로 키스 당하고, 수면제를 먹여졌으니까.

 

“……내보내 줄 생각은, 역시 없는 거야?”

 

“당연하지. 당신이 말했잖아. 새가 되고 싶다고.”

 

망설임은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확신만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틀렸다고는 일절 생각하지 않는 그 모습은, 절대 평소의 그녀에게서 나올 자신감이 아니었다.

 

“좋잖아. 당신이 좋아하던 꽃들도, 당신이 늘 아끼던 우리도 여기에 있는걸. 매일매일, 우리는 여기 있을 거야. 당신이 무엇을 하던, 무슨 생각을 하던,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우리는 당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거야.”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잡고, 이마를 맞댄다. 머리를 타고 흘러오는 끈적한 감정과 애정, 그리고 독점욕은 그녀의 마음가짐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 또다시 후회에 사로잡혀 눈물 흘리는 일은 없을 거야. 우리는 이제, 당신과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거니까.”

 

흥미에서 비롯된 우정, 우정에서 비롯된 애정, 애정에서 비롯된 후회, 후회에서 비롯된 비틀린 마음. 비틀린 마음에서 비롯된 비틀린 결과와 행동.

 

지금 그녀를 이르는 말이었다.

 

“물론 내가 주가 되지 못하는 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대답을 들을 거야.”

 

M16은 여기서 끝장을 보려 했다. 원체 행동력이 뛰어난 그녀인 만큼, 이미 그를 독점할 계획을 수립한 지 오래였다.

 

무슨 대답이 돌아오든 상관없었다. 대답이 '네' 든 '아니요' 든 그녀 또한 마찬가지로 두 가지 선택지를 준비했으니까.

 

“지휘관, 나 당신 좋아해. 당신이 없는 그 시간이 너무나 슬펐고, 또 당신이 너무나 그리웠어.”

 

그녀가 눈을 뜨고, 그가 눈을 감는다. 상반되는 행동은 둘의 마음가짐 또한 상반된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양보하기 싫어, 내 꺼야. 당신은, 너는 이제 내 거라고, 나도 이제 한 번쯤은 내 것을 가질 때 됐잖아?”

 

끈적이는 감정은 그를 뒤덮었다. 애정이라는 이름의 비틀린 마음은, 새를 집어삼켜 날개를 꺾으려 했다.

 

M16은 지휘관이 좋았다. 하지만 늘 양보라는 명분으로 한 걸음 물러섰고, 지휘관이 죽어버린 그날, 깨달아 버린 것이다.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덕분에 망설임은 사라졌다. 양보고 자시고, 더 이상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본연의 욕망에 충실해지기로 한 것이다.

 

“대답해 지휘관. 나 이제 못 참으니까.”

 

“…….”

 

그가 눈을 뜨고, 그녀가 눈을 감는다. 상반되는 행동, 안타까운 마음, 아려오는 가슴.

 

망가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휘관은 더욱이 의지를 다졌다. 주먹을 쥐고, 눈을 부릅뜨고, 마음을 다독인다.

 

하나, 둘, 셋.

 

“미안하지만, 나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싸늘한 바람과 함께 이 자리를 가득 메우는 정적.

 

침묵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장막, 그 아래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M16도, 지휘관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언제부터.”

 

서리가 돋기 일보 직전, 마침내 그녀가 장막을 찢고 입을 떼니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오한이 돋을 정도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또 색기 넘쳤던 목소리는 어디로 간 건지, 지금의 그녀에게서는 미미한 살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처음부터.”

 

지휘관의 눈은 흐릿했다. 대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 또한 빛이 바래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덤덤했다. 그가 이런 상황에 거짓을 내뱉을 사람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 자신을 도발할 까닭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당연히 미칠 노릇이었다.

 

“……진심이야?”

 

그래도, M16는 참을성이 있었다. 비록 어떤 말이 되돌아올지는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지휘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조용히 자기 턱을 더듬어 손을 찾아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다정하고, 따듯했지만, 어째서인지 M16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침내 손이 제자리로 돌아간 바로 그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고백이라는 건 본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지휘관.”

 

“나 역시 마찬가지거든, 이렇게 말도 잘하고, 또 웃기도 하는데, 막상 그 사람 앞에 가면 엄청나게 긴장되더라, 물론 여태껏 잘 숨겨오긴 했지만 말이야.”]

 

“지휘관.”

 

본디 거짓말을 싫어하는 사내였다. 덕분에 그는 꾸밈없는 진실을 말했고, 그녀의 눈이 비어버린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지성이라는 단어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이성 대신 감정이 자리 잡은 그 자리에는, 칠흑의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지휘관.”

 

M16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 조절은 하지 않았다. 도드라진 핏줄은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하나의 끈이었다. 바람 위의 촛불 이상으로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이성은, 얇디얇은 끈에 불과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다. 정신을 붙잡고 어떻게든 이성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지휘관은 지금 아파, 그러니까 분명 헛소리를 하는 거야. 왜, 사람은 졸리면 이따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하잖아? 응,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부정하며 본능을 잠재우려 애쓰지만, 그녀는 궁지에 몰려있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그 시절 이상으로, 그녀는 이미 한계였다.

 

불안하고, 위태롭고,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고, 위급하다.

 

“지휘관.”

 

끓어진다. 끊어진다. 끊어진다. 그녀의 이성이, 지성이, 마지막 남은 하나의 양심이.

 

“……미안해.”

 

“지휘관!!!”

 

마침내 끊어진다.

 

쾅, 침대 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지휘관은 그대로 쓰러진다. 그 위를 덮고 있는 건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격정적인 모습의 M16.

 

“왜! 왜!! 대체 왜!!!”

 

감정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가 지휘관을 덮쳤다. 애정, 사랑, 분노, 집착, 슬픔이 한데 뒤섞인 그 모습은 너무나 난잡했지만, 또 뚜렷했다.

 

“네가 먼저 했잖아! 네가 먼저 날 유혹했잖아!!!”

 

남 탓,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그것.

 

“항상 웃으며 날 반겨준 건 누구지? 이따금 꽃을 건네주며 나에게 고맙다고 한 건 누구지? 늘 웃으며 나를 챙겨준 건 누구냔 말이다!!!”

 

“……읏!”

 

“나를 봐! 나를 보란 말이야!!!”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지휘관을 보며, M16은 그의 눈꺼풀을 들어 올려 강제로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흐릿한 눈은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먼발치의 무언가를 보며 지휘관은 어떻게든 눈꺼풀을 감으려 애썼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가 싫어? 그럼 여태 날 가지고 논 거야? 그럼 날 좋아하지 않을 거면 대체 왜 그리 잘해준 거야? 응? 응? 응?”

 

사라진 이성은 이미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그녀에게 억제기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앞으로 나아가길 반복했다.

 

“대답해! 대답하라고!!!”

 

지휘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지금 그 어떤 말을 내뱉더라도 파도에 집어삼켜 사라질 운명이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으니까.

 

조용히 눈꺼풀을 깜빡이는 그 찰나, 지휘관의 머리에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숫자를 셀 시간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몸 상태는 최악인데다 최적의 시간 안에서 지휘관은 최고의 답을 찾아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래, 그래.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져 보자.”

 

생각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사이, 그녀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손에 들려있는 술병은 앞으로 일어날 행동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뚜껑을 열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병목을 날려버린 M16은 단숨에 술을 들이켰고,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를 들은 지휘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으읍……!”

 

AK-12와 똑같았다. 입술을 맞대고, 뒤섞인다. 다만, 이번에는 그의 입에 타고 들어가는 게 액체였을 뿐이지.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뺨을 굳게 잡은 손, 뒤섞이는 액체, 지휘관은 순순히 술을 삼켜야 했고, 곧 신체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흐으…… 으으…….”

 

“지휘관, 기분이 어때? 평소 술도 잘 안 마시잖아, 그렇지?”

 

그는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 까닭이라 함은 당연지사, 술에 약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얼굴은 차츰 달아오르고, 안 그래도 거칠었던 호흡은 더욱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헤에.”

 

M16은 조금 가라앉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분노보다 훨씬 거대해진 또 다른 욕망이 그녀를 지배한 것이다.

 

“그래…… 괜찮아, 다른 년을 좋아한다고 해도, 지금부터 바꿔나가면 되니까.”

 

툭, 툭, 조심스레 그의 단추를 푼다. 색욕에 지배당한 그녀가, 선을 넘으려 한다.

 

“그만……M16…….”

 

술에 잔뜩 취해 달아오른 모습은 그녀에게 더욱이 새롭게 다가왔다. 입가에 그려진 미소의 크기로 미루어보아, 어지간히 기쁜 모양새였다.

 

“내가 나쁜 게 아니야, 당신이 나쁜 거지.”

 

다시금 얼굴을 맞대고, 시선을 교차한다. 흐릿해져 나를 향하지 않은 동공은 더욱더 사랑스럽게…….

 

흐릿하다고?

 

“잠깐.”

 

그 순간, 그녀의 머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지휘관. 이거 몇 개로 보여.”

 

손가락을 정확히 세 개 펴 보이며 내뱉은 말이다. 자신의 추리가 빗나가길 빌며 지휘관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추리는 정확했다.

 

“…….”

 

“……설마, 아니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신 부정하며 그의 눈앞에 손을 흔드니,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안……보이는 거야……?”

 

“………….”

 

지휘관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허나 그다지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차피 보이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언제부터?”

 

“……네가 침대 바닥에 내리쳤을 때 부터, 보이다 안 보이다 반복 중이야.”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 평소의 그와 같았다.

 

“……아니야, 아, 아니라고.”

 

망치로 머리를 강타당한 느낌이었다. 애초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행동한 자신이 너무나 원망스러웠고, 또 한심했다.

 

비상한 머리는 독이 되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지휘관은 그녀를 배려해 끝까지 진실을 함구했을 테니까.

 

“지, 지휘관…… 농담이라고 해줘, 응?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시간의 역류, 비틀린 운명, 있어서는 안 될 사람. 

 

“……미안.”

 

“아, 아아…… 아니야, 아니잖아. 제발…… 제발 그러지 마…….”

 

이성이 돌아오고, 고개를 내젓는다. 애초에 사랑이고 자시고 그가 죽는다면 전부 의미 없는 일이니까.

 

"그때로 돌아가긴 싫어…… 제발, 내가 미안해, 응? 지, 지휘관……."

 

명백한 실책이었다. 안 그래도 몸이 약한데, 피를 그만큼이나 뱉었는데, 애초에 지키기 위해 새장에 가둔 건데, 욕망에 정신 팔려 가장 중요한 문제를 잊어버린 것이다.

 

"지, 지휘관…… 지휘관…………."

 

후회, 슬픔, 차책, 회한.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아아아아아!!!"

 

마침내 절벽에서 떨어진다.

 

 

 

 

 

 

 

 

 

 

 

이게 정말로 맞는 걸까.

 

정말, 이 수단 말고는 없는 걸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

 

 

 

지휘관의 몸이 차츰 망가져 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M16이 죄책감으로 몸져눕고 지휘관도 진실을 함구했지만, 그들은 지휘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니까.

 

덕분에 인형들의 불안도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은 곧 행동으로 이어지고, 과격한 행동은 지휘관에 대한 극단적 집착으로 물 흐르듯 이어진다. 하나의 악순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답이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UMP45가 아주 합리적인 ‘대화’로 유능한 의사를 여럿 데려왔지만, 그들 또한 망가져 가는 지휘관을 치료할 순 없었으니까.

 

결국 외면해왔던 최종 수단, 지휘관의 아픈 부위를 ‘교체’하자는 의견이 대두된 것이다.

 

“……지휘관.”

 

끼익, 문이 열리고,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말없이 꽃을 가꾸던 지휘관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조용히 물뿌리개를 내려놨다.

 

“안녕. AN-94.”

 

눈을 감는 것으로 조용히 인사를 대신한 AN-94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그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차츰 말라가는 몸, 흐릿한 동공, 점점 창백해지는 피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신호.

 

“……나도 반갑다.”

 

전혀 반갑지 않은 말투였다. 정확히는 점점 쇠약해져 가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몇 안 되게 지휘관을 새장에 넣는 걸 반대하던 인형이었다. 물론 AK-12의 간곡한 설득에 넘어가긴 했지만,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었다.

 

덕분에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그녀의 마인드맵을 지배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전부 틀렸으니까.

 

“고민이 많아 보이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보여.”

 

하지만 지휘관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조용히 탁자에 걸터앉아 그녀를 기다리니, AN-94는 말없이 그의 반대편에 자리 잡았다.

 

“……내가, 아니, 우리가 원망스럽지는 않은가?”

 

“글쎄, 네가 보기에는 어때?”

 

지휘관의 반문에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였으니까.

 

“……우리가 밉겠지. 전부 이해한다.”

 

AN-94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미안했고, 또 혼란스러웠다. 도저히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휘관을 가둬두는 게 맞는 걸까. 아니, 그 전에 아픈 부위를 교체한다는 게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망설이다 지휘관이 또다시 사라지면 어떡하지.

 

또 나를 두고 가버리면 어떡하지.

 

난잡하고, 혼란스럽다. 그냥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는 전부 갖다 붙일 수 있었다. 지금의 그녀가 그랬다.

 

“아쉽지만, 오답이야.”

 

하지만 지휘관은 그렇지 않았다. M16과의 대화 이후, 그는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깨달았으니까.

 

“지금은 원망보단 안타까움이 훨씬 더 크거든.”

 

“지휘관……?”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탁자에서 일어난 그가 연신 기침을 내뱉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AN-94가 그를 붙잡았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콜록! 콜록! 커헉……!”

 

“지, 지휘관! 괜찮은가? 빠, 빨리!!!”

 

다른 인형들을 부르려 했지만, 지휘관은 이내 정신을 다잡고 그녀의 팔도 붙잡았다. 허나 거친 숨을 몰아쉬는 처량한 모습은 AN-94에게 상처를 주기 충분했다.

 

“……흐으, 부탁이 있는데, 들어 볼래?”

 

“……뭐, 뭔가.”

 

후우, 크게 한숨을 내뱉은 지휘관은 침대로 걸어갔다. 이제는 홀로 제대로 걷기도 힘든 건지 AN-94의 부축을 받는 건 덤이었고.

 

“날 내보내 줘.”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생각이 마인드맵을 휩쓸었으니까.

 

“도망치려는 생각은 아니야, 그저, 그저, 너희들에게 그날 못한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지.”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지휘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고, 그녀는 가만히 듣기만을 반복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이건 모두가 함께 들어야 하는 이야기거든, 이 자그마한 바람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야?”

 

“………….”

 

그녀는 여전히 입을 떼지 않았다. 허나, 그것이 대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킨 그녀는 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마침내 문 앞에 도달한 AN-94는 말없이 방을 나섰다.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한 것이다.

 

그리고 철컥, 문이 잠긴다.

 

“……아쉽네.”

 

홀로 남은 지휘관은 잠시 아련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봤고, 이내 품을 뒤져 작은 금속 도구 몇 개를 꺼냈다.

 

인형들이 매시간 교대로 찾아와 자는 모습까지 감시했지만, 최소한의 예의로 화장실은 따라오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지휘관은 어떻게든 긁어모아 해정술을 위한 도구를 만들었고, 바로 지금이, 열심히 만든 도구를 사용할 시간이었다.

 

누군가 전자전으로 순서를 어기고 찾아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구형 자물쇠를 사용한 것이 행운이었다. 애초에 화장실을 제외하면 24시간 감시 체제고, 지휘관은 자물쇠를 부수긴커녕 이제 제 몸 하나 지탱하기 힘든 상태였으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몸을 이끌어 나아간다. 굳은 심지에 의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흐으.”

 

몸 상태는 최악, 하지만 집중력은 최고, 그 어떤 때보다 날 선 정신으로 자물쇠 안에 철사를 집어넣는다.

 

한쪽으로는 자물쇠의 돌림통을 돌리고, 반대쪽으로는 격자를 긁어내린다. 변변찮은 도구였지만, 그의 집중력은 가히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5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격자들이 걸쳐버리고, 자물쇠가 열린다.

 

“흐아…….”

 

물론 막막하긴 매한가지였다. AN-94가 일찍 나가버린 탓에 다음 순번이 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겠지만, 과연 이 변변찮은 몸뚱이가 들키지 않고 방송실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생각만 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휘관은 의지를 다졌고, 그대로 문을 열어 빛을 마주한다.

 

끼이익, 낡은 문의 비명소리, 터벅, 지휘관의 발소리, 허억, 거칠게 내뱉는 숨소리.

 

“………………지휘관?”

 

UMP45가 내뱉은 얼빠진 소리.

 

“…………안녕.”

 

행운이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불운이었다.

 

 

 

 

 

 

 

 

 

 

UMP45는 지휘관이 너무나 그리웠다. 애써 강한 척했지만, 그의 빈자리는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고, 끝내는 무너져 진심을 토해냈다.

 

미안해, 한 번만 기회를 줘, 다시는 당신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

 

그녀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만약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그를 다시는,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뼈에 새겨진 다짐은 곧 그리움의 무게였고, 그녀가 품은 순수한 감정이었다.

 

한없이 정제를 반복한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 하지만 받아주는 이 없어 거듭 농축된 짙은 감정.

 

그리고 정말, 정말 기적처럼, 그녀는 지휘관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지휘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죽어갔고, 안 그래도 불안정한 정신은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

 

망가진 정신은 불안정한 행동을 낳았고, 불안정한 행동은 도를 넘은 집착에 이르렀다.

 

위험했다. 물론 위험하지 않은 이를 찾는 것이 더 빠른 것이 현실이지만, 그녀는 특출나게 위험했다.

 

그리고 지금, 지휘관은 더없이 위험한 상황에, 그 이상으로 위험한 그녀와 단독으로 마주했다.

 

그 순수한 감정의 덩어리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절체절명(絕體絕命), 위기일발(危機一髮), 일촉즉발(一觸卽發), 백척각두(百尺竿頭), 모두 지금의 그를 이르는 말이었다.

 

“……………….”

 

침묵.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 UMP45가 택한 건 다름 아닌 침묵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시리고, 그 어떤 것보다 무겁고, 그 어떤 것보다 싸늘한, 그런 침묵.

 

침묵과 함께, UMP45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록 그 까닭은 알 수 없을지언정, 지휘관은 사태가 영 좋지 않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지휘관은 머리를 굴렸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하필, 하필, 걸려도 UMP45라니.

 

하아, 깊은 한숨을 내뱉은 지휘관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침묵을 깨버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잘 지냈어?”

 

“………….”

 

“………요즘 SOP2가 안보이던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그래도 한 번은 찾아올 거 같았는데 안 와서 말이야.”

 

“………….”

 

“……나랑 말 섞기 싫은 거야?”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나타냈다. 지휘관의 행동과 하등상관 없이, 침묵을 깨는 것은 오직 그녀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아무래도 지휘관의 생각보다 훨씬, 작금의 사태는 영 좋지 않다는 것.

 

바람 한 점 없는 이 싸늘한 공간, 지휘관은 눈을 감고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어차피 무슨 선택을 하던, 바뀌는 건 없었으니까.

 

완전히 멈춰버린 둘과 달리, 시간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1분? 2분? 어쩌면 이미 5분 이상 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UMP45에게는 찰나로, 그에게는 영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눈을 뜬다.

 

“……어디 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순수한 감정을 녹여 낸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런 표정을 지은 UMP45는, 지휘관으로서는 처음 마주한 상황이었으니까.

 

“방송실. 모두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한테는 할 말 없고?”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그래도 나름 시간이 지나 정신을 다잡을 시간이 생긴 걸까. 이전처럼 횡설수설 헛소리를 내뱉는 불안정한 모습은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뭔데, 빨리 말해 봐.”

 

그래서 더 무서웠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게 화가 났다는 신호라는 것이 문제지.

 

“옳지 않아. 지금 너희들이 행하는 방식은, 명백히 틀렸어.”

 

지휘관은 눈을 감았다. 차츰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한 탓에 어차피 감으나 안 감으나 같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혹시나 흐려진 동공을 보고 그녀가 당황할 수 있으니 배려하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있잖아 지휘관. 당신이 나한테 줬던 꽃 기억해?”

 

“에델바이스, 내가 줬는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대답이 만족스러웠던 걸까.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조심스레 품에서 꽃을 꺼냈다. 잘 말려진 예쁜 꽃 한 송이는 그녀가 지휘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다행이네. 응, 정말로 다행이야.”

 

터벅, 그리고 한 걸음.

 

“방금 말했지, 너희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행하는 방식은 명백히 틀렸다고.”

 

“……응.”

 

아주 잠깐의 침묵이 있었지만, 그것이 망설임은 아니었다. 지휘관은 끝까지 자기 입장을 고수했고, UMP45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음, 괜찮아. 때론 물러설 줄도 알지만, 이렇게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모습이, 너무나 멋졌으니까.”

 

그녀의 뜻을 거부하는 상황이었지만, 도리어 웃어 보였다. UMP45가 지휘관을 좋아한 까닭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따듯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토록 불리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관철하는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내 방식이 틀렸다는 말은.”

 

이번에는 ‘터벅’이 아니었다. 고작 한 걸음으로 멈추지 않은 그녀는, 어느새 지휘관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지금 내 사랑의 방식이 틀렸다는 말이야?”

 

“…….”

 

사랑, M16에 이어 두 번째 듣는 소리였다. 그녀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지휘관은 이해했다. 이 정신 나간 상황이, 모두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단 사실을.

 

“지금 지휘관의 몸을 봐, 제대로 거동하는 것도 힘들다며, 이따금 앞도 잘 안 보인다며, 눈 감은 것도 그래서 그런 거 아니야?”

 

그녀는 눈치가 매우 빼어난 편에 속했다. 덕분에 지휘관이 지금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반박할 말이 없던 지휘관은 침묵을 택했고, 침묵은 곧 긍정을 뜻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안되는 거야. 지휘관 아프잖아. 나가면 안 돼. 여기 있어야 해. 새는 새장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슬픈 목소리였다. 어긋난 건 분명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른 선택지를 제안할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가 지휘관의 얼굴을 바라봤다. 반쯤 감은 눈에서 뚝뚝 흐르는 것은 분명 애정이었다.

 

“나가게 해줄게. 이 새장에서, 나와 단둘이서만.”

 

익숙한 제안이었다. 왜 다들 같은 방식으로 나를 옭아매려 하는 걸까. 지휘관은 생각했다.

 

“미안해.”

 

“…….”

 

이어질 말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앞으로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겠다느니, 그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당신의 몸을 고쳐주겠다느니, 하다못해 아직 명확한 동기조차 밝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지기에 최적의 대응이었다는 뜻이다.

 

“……그래. 상관없어, 애초에 질문은 예의상 던진 거니까.”

 

UMP45는 지휘관을 들어 올렸다. 섬세하고, 또 사랑스럽게.

 

“가자. 우리 둘이서만.”

 

“45. 옳지 않아. 이런 건…….”

 

“상관없어. 나아갈 길 끝에 있는 것이 설령 파멸일지라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저항은 무의미했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는 그만큼 단단했다.

 

“내가 빛을 잃어버린 순간, 이미 모든 건 결정 됐어, 나는 당신을 놓치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신을 홀로 두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리고 웃는다.

 

“나, 당신 좋아하거든.”

 

이토록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고백은 난생 처음이었다. 정말 답이 없는 걸까. 모든 것이 이렇게 망가진 채로 끝나는 걸까.

 

정말, 이게 끝일까.

 

-타아아앙!!!

 

그 순간, 거대한 총성이 울린다.

 

“45!”

 

당황하는 목소리와 함께 UMP45의 소체가 무너지고, 품에 안겨있던 지휘관은 가벼운 충격을 받는다. 그녀의 키가 작은 탓에 그리 높은 곳에서 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지휘관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걱정하지 마라, 비살상탄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날 거다.”

 

운이 크게 작용했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정신, 가장 취약한 타이밍,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내리고 빛을 향해 나아가기로 한 그녀.

 

흐릿해 보이지 않았지만,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목소리의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정을 내린 거야? AN-94.”

 

“…….”

 

그녀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휘관을 들어 올리며, 자신의 뜻을 행동으로 보여줄 따름이었다.

 

“가자, 방송실로.”

 

“아, 잠깐만.”

 

그녀의 부축을 받기 전에, 잠시 의식을 잃은 UMP45에게 코트를 벗어 덮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정확히 10분 후, 지휘관의 탈주 소식이 퍼졌고, 지휘부는 말 그대로 뒤집혔다.

 

 

 

 

***

 

 

 

 

“……아.”

 

이곳은 수복실, 짧은 한마디와 함께 그녀가 눈을 뜨니,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SOP2!”

 

지휘관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그녀는, 1주일이 지나고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사실 소체는 진즉에 수리했지만, 정신이 돌아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AR소대는 마인드맵 백업이 불가능하니까.

 

“지휘관은?”

 

자신의 팔다리를 움직여보긴 커녕 몸도 일으키지도 않고 내뱉은 말이다. 그 모습에 AR-15가 잠시 당황하고 또 망설였지만,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사이, SOP2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화했다. 그가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에 웃음, 병원에서 진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당황, 그리고 ‘새장’에 넣었다는 사실에 정색.

 

“……지휘관은, 어떻게 하고 싶대.”

 

“………….”

 

“지휘관이 가둬달라 한 거 아니잖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조하긴 했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그녀를 자극한 까닭이다.

 

“일단 누워있어. 의식 돌아왔어도 혹시 모르니까.”

 

애써 외면한 AR-15는 방을 나섰다. 문 앞에서 그대로 주저앉은 그녀는 생각의 늪에 잠겼다. M16의 설득에 넘어가긴 했지만, 이게 정말 옳은 걸까. 이것 말곤 답이 없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방 안에 무언갈 두고 왔다는 사실에 다시금 한숨을 내뱉곤 문을 열었다.

 

“……SOP2?”

 

뒤집힌 침대, 사라진 무구, 존재하지 않는 그녀.

 

필연적인 결과였다. 지휘관이 깨어난 이후, 그녀의 행동방식은 늘 같았으니까.

 

 

 

 

 

 

 

 

 

 

비척비척, 지휘관의 걸음걸이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부축받았음에도 망가진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조차 없는 신세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이리 와라 지휘관.”

 

결국 보다 못한 AN-94가 그를 업어 들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허나 지휘관은 손의 방향을 찾지 못해 몇 번 더듬거렸고, 그 모습을 본 AN-94의 마음은 더욱이 아려왔다.

 

“고마워.”

 

애써 담담한 척, 능청스레 말을 해보지만 소용없었다. AN-94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고, 지휘관은 멋쩍은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한 걸음, 무거운 발을 내디딘다. 목적지는 방송실, 그의 진심이, 마음이, 모두에게 닿기를 바라며 AN-94는 걸음을 옮긴다.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지휘관…….”

 

물기 어린 목소리는 그녀의 자책감이었다. 사실 깊게 파고들자면 그녀의 잘못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하다못해 지휘관을 새장 속에 가두자는 의견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후회와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은 막막해져 오지만,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전에는 절대로 멈출 수 없었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니까. 오히려 고맙지.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UMP45한테 잡혀갔을걸?”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감싸 안는다. 자책은 덜어주고, 책임은 옮겨 받아 그녀를 편히 만들려 애쓴다.

 

“미안하다…… 내가, 내가…….”

 

목이 멘 탓에 목소리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에겐 이 정신 나간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으니까.

 

“아니야, 그냥,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웃었다. 늘 하던 대로, 자신의 빛을 나눠주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의지를 다지기 위해.

 

그렇게 또 한걸음. 계속해서 나아가니, 슬슬 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휘관님.”

 

M4. 빛을 잃어버린 눈과 싸늘하다 못해 오한이 돋는 목소리는 평소의 그녀와 많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AN-94가 본 것은 분명 그녀가 맞았다.

 

지휘관이 사라졌단 소식은 곧 지휘부로 퍼졌고, 대다수의 인형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어떻게 다시 만난 지휘관인데, 안 돼 안 돼. 혼자라면 또 죽어버리고 말 거야. 싫어, 싫어, 싫어.’

 

분명 각기 다른 개체였지만, 더미라 해도 믿을 정도로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M4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AN-94는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빙 돌아가야 하지만, M4와 정면으로 마주쳐서 승리할 수 있나는 둘째치고, 지원 병력이 오는 것만큼 치명적인 상황은 없었으니까.

 

바깥으로 수색하는 인원이 많다는 것이 가뭄 속의 단비였다. 그들은 당연히 지휘관이 도망쳤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지휘관.”

 

“…….”

 

다시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AN-94가 조용히 입을 뗐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죽은 건 아닐까. 순간 그녀의 등골에 서리가 스쳐 지나갔지만, 규칙적인 숨소리는 그것을 부정했다.

 

“……듣지 못하는 건가. 그래도 괜찮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음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나아가는 발걸음은 차츰 가벼워지고,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그려진다.

 

“차라리 이게 더 괜찮겠다. 나는, 나는 부끄럼쟁이니까.”

 

잠시 눈을 감은 후, 그녀는 의지를 다졌다. 여태껏 숨겨왔던 마음을, 망설이다 영원히 전하지 못하게 된 마음을 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나는 지휘관을 막연히 착하기만 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기억이 떠오른다. 당신과 처음 만난 날, 조금 어색했지만 그럼에도 나를 향해 미소 지어준 당신.

 

“하지만, 그런 생각이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신은 막연히 착한 사람이 아닌, 착하고, 다정하고,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늘 우리를 배려해주는 당신의 모습이, 늘 우리를 향해 따듯하게 웃어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늘 나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를 내주던 당신이, 너무나 좋았다.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꽃을 준 날을, 기적을 바라는 파란 장미의 찬란한 빛을.”

 

기적, 그래. 우리가 다시 만난 건, 분명 기적이다. 당신이 전해 준 파란 장미가, 우리를 이어준 것이다.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하다못해 당신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터벅, 다시 한번 걸음을 내디딘다. 가볍기 짝이 없는 발걸음은 나의 마음이 점점 가벼워짐을 나타내고 있었고, 실제로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눌러 잡았던 자책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태껏 티는 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당신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당신의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는 과분할 정도의 행복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싱긋, 미소를 그린다. 아직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아 조금 어색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분명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입술을 살짝 깨문다. 당신의 마음에 닿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겁쟁이인 나는 용기가 필요했다.

 

하나, 둘, 셋. 이따금 당신이 의지를 다질 때 사용하던 그것.

 

“나 조금만…… 아주 조금만 욕심을 내려 하는데…… 괜찮겠나?”

 

은은한 미소 아래, 눈물을 흘린다. 허나 이 눈물이 슬퍼서 나오는 까닭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분명 기뻐하고 있었으니까.

 

늘 하고 싶었던 말, 하지만 부끄러워 전하지 못했던 말. 그렇기에 만약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반드시 말하겠다 다짐한 그 말.

 

“……정말, 정말로 좋아한다. 지휘관.”

 

이제는 비밀이 아니게 된 그 말.

 

“……나, 당신을 사모한다. 지휘관.”

 

부끄럽다는 핑계로 하지 않은 그 말.

 

“……진심으로, 사랑한다 지휘관.”

 

꾸밈 없는 진심.

 

 

 

 

 

 

 

 

이따금 눈을 감으며 상상을 했다. 이 힘겹고 거친 세상을 넘어 빛나는 미래로 나아가는 상상을.

 

당신과 함께, 빛나는 미래로 나아가는 상상을.

 

빛나는 사람, 그 환한 빛이 나를 비추면 나 또한 빛을 발하고, 가만히 웃는다.

 

길을 그리는 사람, 빛나는 나래짓 아래 나는 미소를 그리고, 당신은 내 미소를 보며 더 큰 미소를 그린다.

 

오솔길을 넘어, 가람길을 넘어, 마침내 당신의 손을 잡고 다님길을 건널 그 순간만을 고대하며, 나 또한 누그럽게 웃는다.

 

늘 간구하던 상상이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오색 빛이 우리를 비추는 그 순간, 조용히 나의 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당신의 날개는 꺾여버려 더 이상 나래짓을 하지 못했고, 나는 웃지 못했다.

 

달은 우리를 비추지 않고, 태양 또한 우리를 향하지 않는다.

 

어둠만이 드리운 세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은 공포를 만들고, 공포는 우리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옭아맨다.

 

허나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건, 당신에게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는 사실.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차츰 말라가고, 분명 그날이 오는 순간, 운명이라는 이름의 잔혹한 작자가 그 어떤 까닭을 이어 붙여서라도 당신을 데려갈 테니까.

 

스러지는 꽃을 보며 당신은 이런 마음이 들었을까. 차츰 말라가는 당신을 나는 멍하니 바라봐야 할까. 꺾여버리기 일보 직전인 당신을 나는 가만히 두고 봐야 하는 걸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내 마인드맵을 잠식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잔혹한 현실과 그려 나간 상상에는 동일한 점이 두 가지나 있었다.

 

나는 마침내 꼭꼭 숨겨오던 마음을 고백했고, 지금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웃고 있었으니까.

 

비록 당신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비록 앞으로 나아갈 미래가 불투명할 따름이지만, 비록 당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지만.

 

그냥, 이 순간이 좋았다.

 

그냥, 당신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좋았다.

 

그냥, 당신이 좋았다.

 

처음에는 작금의 사태가 운명의 농간이라 생각했다. 기껏 만나게 해놓고, 다시금 앗아가는 참으로 잔혹한 장난.

 

우리는 아무런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와 내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바로 ‘내일 봐’ 였으니까.

 

당신에게 내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사라진 그날 이후로 나의, 모두의 시간은 멈춰버렸으니까.

 

허나 어떤 까닭인지 몰라도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불가능에 한없이 수렴하지만, 내가 웃었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당신은 피를 토하고, 시력을 잃어가고, 차츰 말라가며 죽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절망했다. 다시금 우리에게서 지휘관을 앗아가려는 운명이 너무나 미워, 지휘관을 감금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에 도달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당신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우리가 얻은 것이 바로 이별할 시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런 징조조차 없이 헤어진 당신과 우리를 위해, 하늘이 가엾이 여겨 이별할 시간을 내려준 것이다.

 

이것이 만약 운명의 농간이라도 상관없다. 결국 우리에게 이별을 대비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허둥지둥 애쓰는 우리를 보며 비웃고 쾌락을 채워나갈 그 운명이라는 작자에게 우리가 행복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수일 테니까.

 

뭐든 상관없다. 나는 지금 잃어버린 당신과 만났고, 당신을 위해 움직이고, 숨겨왔던 마음을 고백했다.

 

눈을 감는다. 미소를 그린다. 나아갈 길에 비추는 것은 오직 밝은 빛뿐이다.

 

나 한 걸음 내디디고, 당신의 숨소리에 안정을 느끼고, 마침내 용기를 낸 나 자신에게 감사하고, 당신과 다시금 만나게 해준 운명이란 작자에게 감사하고,

 

눈을 부릅뜨고, 미소를 그리고, 다리에 힘을 주고,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 스스로 길을 그리니.

 

마침내, 나는 이별할 준비가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추억, 그리는 것은 행복한 미래, 걸음을 멈추지 않기에 미소, 사라진 것은 지난날의 후회,

 

지금 불어오는 것은 바람. 더 이상 흘리지 않기에 눈물, 우리를 비추는 것은 빛, 앞으로 나아가기에 길,

 

다시 또 바람.

 

바람, 눈물과 빛, 그리고 길, 다시 또 바람.

 

나에게 꽃을 준 당신의 모습을 그리니, 팔에 힘이 들어간다.

 

나에게 격려해준 당신의 모습을 그리니,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

 

나에게 길을 그려준 당신의 모습을 그리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나에게 미소를 그려준 당신의 모습을 그린다.

 

웃음이 나왔다.

 

하나, 둘, 셋.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망설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확신 아래 움직이는 나에게 주저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새 빛나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빛을 내며 길을 그리고, 아름다운 꽃처럼 향기를 낸다.

 

이제야 동일선상에 올랐다. 늘 평행선을 달리던 건 아니었지만, 당신과 내가 바라보는 세상은 많이 달랐으니까.

 

하늘에 닿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나는, 어느새 아득한 미래로 떠오르기 위한,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었으니까.

 

날개를 펼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당신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되뇌인다.

 

“좋아한다. 지휘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탁, 걸음을 내디딘다.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확신만이 가득 찬 발걸음 아래 막을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아.

 

더 이상 멈춰 서지 않아.

 

더 이상, 당신을 상처 입히지 않아.

 

 

 

 

 

 

다잡은 의지를 무기 삼아, 그녀는 계속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지휘관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그의 진심을 모두에게 전하기 위해.

 

“CCTV에 잡히지 않는 걸 보아, 조력자가 있는 게 확실해. 아니, 애초에 UMP45부터가…….”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 차츰 줄어드는 포위망, 마치 거미줄 위를 걷는 느낌이 들어 썩 불쾌했지만, 그것이 멈출 이유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슬슬 위험하다는 것도 지당한 말이었다. 경비는 점점 삼엄해지고, 안전지역은 줄어든다. 거기에 지휘관의 상태까지 고려해야 하니, AN-94로서는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나.”

 

결국 한계를 느낀 그녀는 다시금 무력을 사용하기로 했다. 조심스럽고 또 안전하게 지휘관을 벽에 기대어 놓은 뒤, AN-94는 품에서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하나, 둘, 셋.

 

“읏……!! 으읍…….”

 

“쉿.”

 

총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소음을 줄이기 위한 용도도 있지만, 역시 제압이 목적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가녀린 팔이지만, 본질은 군용인형, 그리폰의 민간 인형과는 압도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었고, 목을 졸린 네게브는 곧 정신을 잃었다.

 

“……미안하다.”

 

조심스레 사과의 뜻을 전한 뒤, 편안히 눕혀 놓는다. 그녀 또한 무력은 최후의 수단이었으니까.

 

우린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가벼운 한숨을 내뱉음과 동시에 그녀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를 잠시 눕혀둔 이유는 잠시 격한 움직임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지휘관은 현재 의식이 없고, 그를 업어든 채로 누군가를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정말, 어쩔 수 없이 잠시 떨어진 것뿐이었다. 일련의 행동에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어째서 지금.

 

“……오랜만이네.”

 

“……AK-12.”

 

그녀가 이 자리에 나타난 걸까.

 

평소라면 반가워 마지않는 존재였다. AK-12는 그녀에게 있어 태양과도 같은 존재였으니까.

 

스스로의 가치를 잃어버려 박살 난 자존감 아래 눈물 흘릴 때, 자신을 찾아준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지금은 그녀를 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까.

 

AK-12는 눈동자를 굴려 빠르게 정황을 파악했다.

 

저 멀리 의식을 잃은 네게브, 당황한 AN-94, 그 옆에 누워있는 지휘관.

 

굳이 정보를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눈동자를 세 번 굴리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지휘관. 이리로 넘겨.”

 

“……안 된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면, 지금 지휘관과 더 가까운 건 AN-94였다는 것이다. AK-12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그녀는 쏜살같이 몸을 던졌으니까.

 

하지만 안심되는 건 아니었다. AK-12가 그 사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으니.

 

“……너니까 말로 하는 거야. 지휘관, 이리 넘겨.”

 

짜증이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AN-94는 잔뜩 움츠러들었으나,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건 여전했다.

 

“아, 안된다. 지휘관은…… 지휘관은…….”

 

-탕!!

 

“두 번은 없어.”

 

“…….”

 

AN-94의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소중한 존재를 저울질하고 싶지 않았던 만큼,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져 왔고,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안……된다.”

 

-탕!!

 

그렇기에 AK-12의 역치를 넘겼다.

 

총알은 AN-94도, 지휘관도 향하지 않았다. 천장을 꿰뚫은 총알은 그녀의 마지막 인내심이었으니까.

 

“데리고 나가서 뭐 할건데? 병원으로 가게? 둘이서 사랑의 도피라도 하게? 아니면 뭐, 따로 방도라도 있는 거야?”

 

격한 목소리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순수한 분노는 화살처럼 쏘아졌고, 그녀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하지만! 안 된다! 지휘관은…… 지휘관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녀가 AK-12에게 언성을 높인 건 난생처음이었다. 덕분에 AK-12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이건 전부 지휘관을 위한 거야. 너도 동의했잖아! 새장! 지휘관은 늘 새가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이건 오직 그를 위한 새장, 새장이라고!”

 

그럴듯한 소리였지만, 전부 합리화였다. 지휘관이 새를 동경한 까닭은, 그 무엇보다 자유로워서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기심과 격한 슬픔, 그리고 애정이 뒤섞여 난잡한 마음 아래 점철된 합리화는 모든 걸 가능케 만들었다.

 

“이 새장은 안전해.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어, 오직 그와 우리를 위한 새장. 아름답잖아!”

 

“…….”

 

“비록 지금은 납득하지 못하겠지만, 지휘관도 분명 이해해줄 거라고! 이 모든 건 전부 지휘관을 위해 한 행동이라는 걸!”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그녀는 더욱더 당당히 자신의 뜻을 이어 나갔다. 거침없는 목소리에 주저함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성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AN-94! 대답해봐! 너도 속으로는 동의하고 있잖아! 이 모든 것이, 지휘관을 위한 것이라는 걸!!!”

 

“……AK-12.”

 

 

마침내 AN-94의 입이 열리니, 나온 것은 그녀의 이름.

 

“어째서 그렇게 변해버린 건가…….”

 

그리고 뜨거운 눈물.

 

“너…….”

 

“속으로는 알고 있지 않은가. AK-12도…… 내심 눈치챘지 않은가…….”

 

한이 담긴 눈물은 광기마저 멈춰 서게 했다. 일순간 그녀의 입이 멈추니, 이번에는 AN-94의 차례였다.

 

“AK-12. 지휘관은 죽었다.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우리는 단지 이별할 시간을 얻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결연한 눈빛은 성장을 암시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대견해 자랑스러워했겠지만, 지금은 단지 입술을 깨물며 바라볼 뿐이었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 어떤 수를 쓰더라도 지휘관은 결국…….”

 

“그만. 더 말하지 마.”

 

하지만 거기까지, 눈물은 그녀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 어느새 눈을 부릅 뜬 그녀에게서는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겠다는 강인하고 비틀린 의지마저 뿜어져 나왔다.

 

“AK-12…….”

 

“더 말하지 마. 지휘관 넘겨. 당장.”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 하지만 미련이 묻어나오는 걸음걸이, 그 축축한 손이 AN-94를 향하고,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만해라…… 제발…… 부탁이다…….”

 

“아니, 이게 맞아. 너도 조금만 생각을 달리한다면, 분명 우리를 이해할 거야.”

 

AK-12가 손을 뻗고, AN-94는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소중한 두 사람의 저울질을 멈추기 위해, 그녀가 마침내 각오를 다진 그 순간.

 

-콰아아아앙!!!

 

“지휘관!”

 

굉음과 함께 벽이 무너지고, AN-94는 행여나 지휘관에게 피해가 갈까 황급히 그를 감싸 안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누구야.”

 

모래 먼지가 휘날리고, AK-12는 가만히 그 자리를 바라본다. 그 격한 기대에 감복한 그 주인공이 경쾌한 발걸음을 내디디니, AK-12는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나는 반가운데, 너희들은 아닌가 봐?”

 

당당한 모습, 늘 아이 같던 모습은 어디 간 건지, 그녀의 눈빛에는 의젓함만이 묻어 나왔다.

 

마침내 모래 먼지가 전부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다. 붉은 브릿지가 인상적인 그녀를 바라보며, AN-94는 이렇게 말했다.

 

“……SOP2?”

 

 

 

 

 

 

 

 

“…….”

 

SOP2의 눈빛은 무언가 달랐다. 정확히는 아무런 미동 없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지휘관의 모습을 본 뒤, 무언가 심히 달라졌다.

 

그저 고요할 따름이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듯한 그 모습은, 평소의 그녀에게선 절대 볼 수 없던 태도였다.

 

“……SOP2. 그래. 지휘관의 빈자리에 미쳐버린 너라면 말할 수 있잖아.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는 전부 옳다는 사실을.”

 

잔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AK-12였다.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내재된 절박함은 그녀가 지휘관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빈자리,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지휘관을 또다시 잃어버리고 싶은 거야? 그 같잖은 인형 붙잡고 시시덕거릴 거야? 아니잖아.”

 

지금은 그녀의 허리춤에 걸려있지만, AK-12가 말한 인형은 정확히 이 주 전만 하더라도 그녀의 손에서 거닐었다. 지휘관의 이름을 부를 때, 그녀는 늘 인형을 바라봤으니까.

 

“납득하잖아. 너도 알잖아. 지휘관은, 지휘관은 새장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SOP2는 대답하지 않았다. 행동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휘관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그게 전부였다.

 

“지휘관은 어때.”

 

“…….”

 

AN-94는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데리고 가. 어디든.”

 

모든 정황을 이해한 SOP2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이내 총을 치켜들어 자신의 뜻을 알렸다.

 

“……진심이야?”

 

이번엔 AK-12의 차례, 자신을 향한 총구를 보며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그 까닭이 공포는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어이없음, 미미한 분노, 그리고 대부분의 의문이 전부일 뿐, 그녀는 딱히 겁먹거나 하지 않았으니까.

 

“네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는 거야. 지금 지휘관의 상태를 알아? 그 각혈 이후, 지휘관이 어떻게 됐는지 아냐고.”

 

약간의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의문이었다. SOP2가 사라진 지휘관 때문에 어떤 행동을 벌였는가 생각하면,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였다.

 

인형을 들고 다니며 지휘관이라 주장하고 현실에서 도망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던 만큼, 당연히 AK-12도 그 범주에 포함돼 있었다.

 

“잘 생각해. 지휘관이 어떻게 될지, 과연 새장에서 나간 지휘관이…….”

 

-탕!!!

 

말은 채 끝나지도 않았건만, 날카로운 파열음이 둘의 사이를 갈라놨다. 명중한 건 아니었으나, 그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원래 그리 혀가 길었어?”

 

“……하.”

 

그리고 화룡점정, 말없이 총을 꺼내든 AK-12의 눈빛에는, 잔잔하고도 고요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빨리 가. 책임 못 지니까.”

 

-타다당!!!

 

그리고 울려 퍼지는 총소리, AN-94는 빠르게 정신을 차렸고, 지휘관과 함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큭!”

 

당연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리 없는 AK-12였지만, SOP2가 아주 조금 더 빨랐다. 덕분에 간발의 차이로 지휘관을 놓쳐버린 AK-12의 감정은 파도를 넘어, 마침내 하늘을 꿰뚫었다.

 

“……자신 있는 거야?”

 

의문과 어이없음은 사라진 지 오래, 정제되어 깨끗한 분노만이 그녀를 가득 채우고, 차고 넘친 분노가 이 방을 가득 채운다.

 

“없어도 해야지. 지휘관인데.”

 

그 살벌한 기운에 겁먹을 법도 하지만, SOP2는 더없이 당당했다. 늘 보여주던 격양된 미소와 함께, 그녀는 땅을 박찼다.

 

 

 

 

 

***

 

 

 

 

“저기다! 지정 좌표로 지원 요청!”

 

“……읏!”

 

AN-94가 도망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곧 발각되고 말았다. 행동거지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AK-12가 그녀가 움직인 방향으로 인형들을 부른 탓이었다.

 

잠시 분노에 이성을 잃은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가장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정도로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AN-94는 열심히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지휘관과 함께 있다는 이유로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점점 많아지는 그들의 군세는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비켜라!”

 

“크윽!!”

 

그나마 나은 점이 있다면, 그녀의 소체 능력은 그리폰의 인형들과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물론 논외도 몇 가지 존재하겠지만, 대체로 강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지휘관을 품에 안고 있다는 페널티가 존재하긴 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지휘관을 상처 하나 없이 빼앗아야 하는 그들 또한 페널티가 존재했다. 결국에는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였다.

 

“흐읍!”

 

크게 숨을 들이쉬고, 땅을 박참과 동시에 벽에 폭탄을 부착한다. 일련의 동작에는 한 치의 낭비도 없었다.

 

-콰아앙!!!

 

소름 끼치는 굉음과 함께 길이 막힌다. 겨우 등 기댈 곳이 생겨 한시름 덜었지만, 아직 그들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따라가! 지휘관을…… 우리들의 지휘관을 빼앗기지 마!”

 

전염된 광기는 모두를 덮쳤다, 하나 된 감정으로 그녀를 쫒아가는 모습은 좀비 떼가 따로 없었다.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도 AN-94는 분전했다. 책임감이 무거운 만큼, 그녀는 더더욱 분발했다. 활로를 찾아 계속해서 나아가니, 그녀는 어느새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희망을 무기삼아 계속해서 나아갔으면 좋았겠지만, 지휘부의 그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크으…….”

 

전자전, 비록 특화 인형이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전자전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그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면 상황은 달랐다.

 

겹치고 겹쳐 방화벽을 두드리는 음험한 손길은 그녀조차 버티기 힘들었다. 완벽히 뚫리지는 않았지만, 슬슬 한계라는 사실은 지당했다.

 

줄어드는 포위망, 전자전에 흔들리는 마인드맵, 얼마 남지 않은 장비, 그녀는 궁지에 몰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고작 이 정도로 포기할 거라면 애초에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

 

“……이건!!”

 

데구루루, 구형의 무언가가 여러 방향으로 굴러가고, 그것이 AN-94 최후의 수단이었다.

 

-콰아아앙!!!

 

행여나 다칠까. 온몸으로 지휘관을 감싼다. 그녀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지휘관은 약간의 먼지를 뒤집어쓴 게 전부였다.

 

EMP 폭탄과 연막탄, 가지고 있는 장비를 모조리 던져버리니 이번엔 침묵이 흘렀다. 추적조가 일시적으로 기능을 잃은 것이다.

 

“후우…….”

 

짙은 한숨을 내뱉은 후, AN-94는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기 위해 미리 봐둔 퇴로로 몸을 숨겼다. 아무리 그래도 최소 10분가량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외딴 방으로 들어와 조심스레 지휘관을 눕혀놓은 그녀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냥,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미안하다. 지휘관. 열심히 노력했는데,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조심스레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AN-94는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까닭 없는 웃음과 달리, 이번에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했다.

 

잠든 그가 자신의 노력을 알아주지 못해도 상관 없었다. 그냥, 그냥, 그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했으면 좋았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열심히 불태워 볼 테니.”

 

그 말과 동시에 AN-94는 발걸음을 돌렸다. 부디 자신이 소란을 일으키는 사이 그가 정신을 차리길 바라며, 그녀는 최대한 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터벅, 터벅, 발걸음은 무거웠다. 그것은 곧 그녀의 책임감의 무게였고, 마음의 무게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 길 끝자락에 있는 것이 지휘관의 행복이길 바라며,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

 

“안녕.”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만난다.

 

달리 길게 늘어진 회갈색의 사이드 포니테일이 인상적인 그녀,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가늘고 긴 흉터에도 흉하기는커녕 충분히 아름다운 그녀.

 

AN-94에게 분노할 까닭이 있는 그녀.

 

“……UMP45.”

 

“…….”

 

의외로 다짜고짜 화는 내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그리고 또 조용히 시선을 교차하고, 입을 뗀다.

 

“지휘관, 어디 있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만.”

 

그 말이 거짓이란 사실은 다섯 살짜리 꼬맹이라도 알 수 있었다. 하물며 눈치 빠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으니, UMP45는 품에서 총을 꺼내 들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곧 생각날 테니까.”

 

그리고 싱긋, 비릿한 미소.

 

 

 

 

 

 

있잖아. 사실 나 알고 있었어.

 

애써 현실에서 도망쳐왔지만, 사실 마음 깊은 곳에선 모든 걸 인정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 마음속 깊이 다짐했어.

 

 

 

***

 

 

 

잠시 시간을 거슬러 벽이 무너지고 연기가 올라오는 광경, 둘 중 하나가 쓰러지기 전엔 끝나지 않을 이 처절한 공간, SOP2는 치열한 격전을 펼치고 있었다.

 

AK-12는 강했다. 군용 인형, 개중에서도 특출난 엘리트인 리벨리온 소대, 그리고 그 리벨리온 소대의 소대장인 그녀는, 뛰어난 판단력과 더불어 무력 또한 갖추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SOP2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여러 사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녀가 전자전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본디 전자전 특화 인형이었다. 그렇다고 체술이 뒤떨어진다는 건 아니었지만,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그래도 전자전이었으니까.

 

덕분에 주특기를 하나 봉인하고 싸워야 하는 상황, 나름 불리한 상황이라 말 할 수 있었지만, 단순히 소체 능력만 따지자면 SOP2보다 더 뛰어난 인형도 제압해본 그녀인 만큼,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거기에 이건 단순한 근접전이 아니었다. 칼도, 총도, 하다못해 폭발물도 사용 가능한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타다당!!

 

AK-12가 총을 쏘고, SOP2가 엄폐물로 몸을 던진다. 명중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몸에 작은 상처가 차츰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숨길 수 없었다.

 

반면 AK-12는 먼지와 연기에 살짝 그을린 점을 제외하면 여전히 멀쩡했다. 상처는 존재하지 않았다. 즉, 명백한 SOP2의 열세를 뜻했다.

 

-데구루루…….

 

자신의 우세를 증명하듯, AK-12는 SOP2의 엄폐물 위로 수류탄을 던져 계속해서 압박했다. 터지기 직전의 수류탄을 보며, 그녀는 이를 악물곤 자세를 갖췄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 이는 지휘관을 놓친 AK-12의 분노를 상징했으며, 곧 감정의 크기였다. 그리고 그 비틀린 감정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SOP2는 폭발마저 이용했다.

 

“으아아아아!!!”

 

폭발을 연료 삼아 AK-12에게 달려든다. 전술인형의 특출난 각력과 폭발의 에너지까지 더해지니, 그 속도는 가히 총알과 같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근접전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SOP2의 계략이었지만, AK-12에게 손이 닿기 직전 바로 그 순간, 그녀가 자세를 낮췄다.

 

“……뻔해.”

 

“크으윽!!!”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세를 낮춘 AK-12가 SOP2의 팔을 잡아 비틀고, 그와 동시에 뒤로 업어쳐 버린 것이다.

 

폭발, 압도적인 각력, 안 그래도 빠른 속도에 AK-12의 힘, 거기에 회전까지 더하니 SOP2의 소체에는 무리가 왔고,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SOP2가 바닥에 매다 꽂히기 직전, 무릎으로 그녀의 관절을 찍어버린 것이다.

 

“크아아악!!!”

 

그리고 쿵. 그녀가 바닥에 닿는 데는 2초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흐으…… 흐으…….”

 

어떻게든 태세를 전환해 몸을 일으킨 그녀였지만, 균열이 일어난 팔은 결국 완전히 걸레짝이 되었다. 여러 가닥의 전선으로 간신히 연결된 모양새는 참으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 봐주는데, 오늘은 아니야. 난 지금 굉장히, 화가 났거든.”

 

눈을 떠 감정 모듈을 끈 상황이었지만, 이미 타오른 불꽃이 꺼지는 건 아니었다. 지휘관을 놓치게 만든 SOP2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그녀 마음속에서 여전히 날뛰고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죽이지는 않을 거니까. 물론 네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지휘관이 슬퍼할 거 같아 그런 거니까 오해하진 말고.”

 

“흐아아…….”

 

SOP2는 너덜너덜한 팔을 그대로 뽑아버린 후 하늘을 향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여러 만감이 교차한 그 한숨에는, 깊은 무게가 깃들어 있었다.

 

“……있잖아. 사실 나 알고 있었어. 지휘관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뭐?”

 

난데없는 발언에 AK-12 또한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 따위엔 관심 없이, SOP2는 꿋꿋이 제 할 말을 이어갔다.

 

그녀는 웃었다. 싱긋,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이 아닌 그 아름다운 미소는, 그녀의 성장을 나타내고 있었다.

 

“너무 슬펐어. 지휘관이 없는 지휘부는 너무나 시렸고, 다들 감정에 삼켜져 눈물 흘리는 모습은 내 가슴을 아프게 했어.”

 

모두 울었다. 지휘관이 없는 이 비참한 현실에, 지휘관을 혼자 놔뒀다는 자책감에 삼켜져 전부 울었다.

 

“그래서 억지로 현실을 외면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어. 지휘관은 죽었고, 절대, 다시는 지휘관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울었다. 허나 눈물 흘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닫고 현실에서 도망쳤고.

 

비록 환상에 불과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슬픔을 달래기 위한 내 나름의 방도였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되뇌이고 또 되뇌었어, 만약 지휘관이 돌아온다면…… 단 한 순간이라도 지휘관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앞으로는 지휘관이 하고 싶은 거 전부 들어주기로.”

 

지휘관은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줬다. 말도 안 되는 요구도, 어찌 보면 짓궂다 말해도 좋을 장난도, 지휘관은 늘 웃으며 나를 반겨줬다.

 

그래서 너무나 좋았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지휘관이 하고 싶은 걸 들어줄 차례고.”

 

그리고 철컥, 무장을 치켜든다. 눈을 부릅뜬다. 다져진 의지는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또 무겁다.

 

하나, 둘, 셋.

 

“지휘관은 새장에서 나가고 싶어해.”

 

하나, 둘, 셋.

 

“지휘관은 자유로운 새지, 날개가 꺾여 하늘을 거닐지 못하는 비참한 새가 아니야.”

 

하나, 둘, 셋.

 

“그러니까. 내가 이길 거야.”

 

-타다당!!!

 

“……읏!!!”

 

그 순간, SOP2가 총을 치켜들어 소사했다. 당연히 AK-12는 맞지 않았지만, 그녀가 놀란 건 총을 쏜 직후 보여준 그녀의 행동이었다.

 

“으아아아!!!”

 

SOP2가 총을 통째로 집어 던지며, 몸을 날린 것이다.

 

백병전에 가장 중요한 건 당연히 총이다. 실제로 백병전에서 가장 유리한 건 체급도, 기술도 아닌 약실에 총알 남아있는 사람이라 하지 않던가.

 

덕분에 잔뜩 당황한 AK-12는 태클을 허용하고 말았고, 그대로 넘어져 강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 뿐, 여전히 불리한 건 매한가지였다. 처음으로 들어간 제대로 된 유효타였지만, SOP2는 이미 한쪽 팔을 잃은 상태였으니까.

 

“……고작 이거 하나 성공하려고, 팔 하나랑 총을 버린 거야?”

 

그 사실을 자각한 AK-12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어차피 지금도 유리한 건 그녀가 맞았으니까.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총은 놓쳐버렸지만, 품속의 단검은 여전했다. 허나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SOP2에게 겨누려는 그 순간. 축축한 무언가가 그녀의 손목을 덮쳤다.

 

“크으아악!”

 

날카로운 두 쌍의 어금니가, AK-12의 손목을 가차 없이 으깨버린 것이다.

 

구차하다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그녀에게 남은 팔은 고작 하나뿐이었으니까.

 

“이거……놔!”

 

“흐읍…….”

 

반대쪽 팔꿈치로 목을 가격해 어떻게든 떼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단검은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이제 서로에게 남은 건 맨몸뿐, 진짜 근접전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콰직! 으직! 빠지직!

 

과격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는 전부 SOP2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고, AK-12는 일방적이라 할 수 있는 폭력을 반복하고 있었다.

 

남아있던 힘을 모조리 쥐어짠 탓일까. 어째서인지 SOP2는 그녀를 붙잡아 두기 바빴다. 주먹질은커녕, SOP2는 AK-12의 어깨를 깨물며 조용히 고통을 견뎠다.

 

“…………하나.”

 

“징그럽네…… 밑천 다 드러났잖아. 이제 좀 포기하지 그래?”

 

때리다 지쳐 나온 소리였다. 한쪽 눈은 뭉개지고, 팔은 진즉에 날아갔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아두려는 모습은 AK-12조차 감탄할 정도였으니까.

 

“…………둘,”

 

“그놈의 숫자는 언제까지 셀 거야? 이제 정말로…….”

 

-삐비비빅!!!

 

하지만 그 순간, 소름 끼치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AK-12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태였다.

 

소리의 주인공은 SOP2가 던진 총, 정확히는 거기에 붙어있는 점착 폭탄. 애초에 SOP2가 무리해서라도 그녀를 잡아둔 까닭은, 미리 던져둔 폭탄을 맞추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셋.”

 

숫자가 끝나고, SOP2는 남은 힘까지 모두 쥐어짜 몸을 일으켜 AK-12를 붙잡았고, 망설임 없이 폭탄으로 몸을 던졌다. 그 광기 어린 모습에 AK-12마저 경악했지만, 그녀의 미소는 여전했다.

 

“헤헤…….”

 

“너…… 정말 미친 거야?”

 

-콰아아아앙!!!

 

승부를 가른 요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상성, 전자전 특화 인형인 AK-12가 대 전자전 인형인 SOP2에게 불리한 건 당연했으니까.

 

그리고 두번째는 간절함.

 

그것이 AK-12가 간절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지휘관을 붙잡기 위해 모든 걸 해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다만, SOP2의 간절함은, 그것과 궤를 달리했다.

 

 

 

 

 

***

 

 

 

-치직…… 치지직…….

 

처참한 장소, 흙먼지와 파편이 날리는 장소이자 처절함의 끝을 보여주는 이 자리에, 서 있는 이는 SOP2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큰 부상을 입은 것 또한 SOP2였다.

 

폭탄을 정통으로 맞은 건 AK-12였다. 덕분에 그녀는 의식을 잃었지만, 소체에 큰 이상은 없었다.

 

허나 SOP2는 그렇지 못했다. 팔이 날아가고, 눈이 으깨졌다. 그 상황에 정통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폭탄에 휘말린 충격은 안 그래도 상태가 좋지 않던 그녀를 망가트리는 데 충분했다.

 

“헤헤. 지휘관…… 나…… 그리로 가야 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지만,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선다. 진즉에 한계를 넘겨버린 소체는 더 이상 움직여주지 않았고, SOP2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안해……지휘관…… 나 너무…… 졸려…….”

 

풀썩, 그녀가 무너진다.

 

 

 

 

점멸을 반복하는 희미한 의식 아래, 나는 꿈을 꾼다.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이 아닌 그저 지나간 추억을 엿보는 일에 불과했지만, 무언가 이상한 점이 존재했다.

 

지금 돌아보는 이 한편의 기억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시는 혼자 두지 않겠다…… 항상 당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신을 지킬 거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흐느끼며 애처롭게 울부짖는 AN-94.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평소의 뻔뻔한 태도는 어디로 간 건지, 약한 모습만 보여주며 가만히 아파하는 UMP45.

 

‘지휘관…… 미안해…… 미안해…… 내가…… 전부 다…… 미안해…….’

 

자신감은 진즉에 사라지고, 자책하며 후회하길 하염없이 반복하는 AK-12.

 

그들의 슬픔은 내 가슴을 찌르고,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늘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절절히 공감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마침내 비로소, 나는 그들의 행동거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납득가지 않는 행동에는, 전부 그럴만한 이유가 존재했으니까.

 

응. 좋아.

 

전부 이해했어.

 

 

 

 

 

***

 

 

 

 

간결한 동작,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그 모든 것을 가능케 만드는 냉정한 판단력, 지금의 AN-94는 그 어떤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한계 또한 명확했다.

 

“흐으으…….”

 

단순히 UMP45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그녀가 자존심을 문제로 1대1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들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아니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움직임으로 움직이는 AN-94였지만, 마침내 끝을 마주한 것이다.

 

“잡아!!! 못 숨게 해!”

 

게다가 이번엔 지휘관이 없었다. 그녀가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는 말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들 또한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 쉴 틈 없는 압박, 이따금 날아오는 폭발물까지, 지금까지 버틴 게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든 기색 따윈 내비치지 않았다. 고되다는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그저, 지휘관이 한시 빨리 깨어나 이 정신 나간 곳에서 탈출하길 간절히 바랐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지? 5분? 10분? 체감상 20분은 지난 것 같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니겠지. 지휘관은…… 깨어났으려나.’

 

눈이 감길 것 같으면, 반 실명에 가까운 지휘관의 눈을 떠올렸다. 다리가 풀릴 것 같으면, 홀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으로도 안 될 것 같으면, 그의 미소를 떠올렸다.

 

피식, 헛웃음을 짓는다. 따로 불만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흐…….”

 

미미하지만, 아직은 더 날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며 다시 한번 뛰어오르는 순간.

 

-타앙!!!

 

울려 퍼지는 거대한 파열음, 격통이 느껴지는 오른 다리, 무너지는 신체.

 

어디서 날아온 건지도 모른 거대한 총알은 그녀의 다리를 완벽히 갈아버렸다. 동력을 잃은 그녀의 몸은 그대로 추락했고, 그것이 끝이었다.

 

“……아.”

 

총은 충격의 여파로 놓쳐버렸다. 남은 장비는 권총 한정, 그게 전부였다.

 

“애썼어.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어느새 다가온 UMP45는 그녀의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댔다. 그 비릿한 미소는, 평소 적에게 보여주던 그것이었다.

 

“지휘관, 어디 있어?”

 

“…….”

 

“……뭐, 대답 안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금방 찾아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지휘관은 지금쯤 안전하게, 아주 잘 있을 테니.”

 

아주 조금의 시간이라도 끌기 위한 입놀림이었다. 본디 이런 행동은 잘 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수단이라도 사용해야 했다.

 

“이 정신 나간 지휘부에는, 더 이상 볼일이 없겠지.”

 

“……재밌네.”

 

“너희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비록 한 때는 나도 동조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노력한 거겠지.”

 

UMP45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입꼬리는 올라간다. 나름 성공적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아주 좋은 징표였다.

 

“지휘관은, 저 하늘을 자유롭게 거니는 새가 될 테니까.”

 

-콰직!!

 

“닥쳐.”

 

결국 분노는 행동으로 표출되고, AN-94는 그 분노를 맨몸으로 온전히 받아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안 돼. 안 된다고, 지휘관은 새장안에 있어야 해. 밖은 위험하다고, 응? 응? 응?”

 

흔들리는 눈빛은 불안감의 증표였고, 비틀린 애정 그 자체였다. 많이 엇나가긴 했어도 그녀의, 그들의 행동은 모두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지휘관 어디 있어? 빨리 말해, 빨리, 빨리, 빨리!!!”

 

콰직, AN-94의 한쪽 팔이 으깨졌지만, 그녀는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굳건했다. 구차하게 버티지만, 이 쥐어짜 낸 시간을 지휘관이 유용하게 사용하길 바라며 AN-94는 이를 악물었다.

 

“말하라고, 지휘관 어디 있냐고, 말해, 말해!!!”

 

“……그쯤 해. 둘 다.”

 

그리고 터벅, 약간 앳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많이 그을렸지만 비교적 멀쩡한 그녀, AK-12가 옆구리에 SOP2를 끼고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SOP2는 반파 상태였다. 분명 승리한 건 그녀가 맞았지만, 그저 반쪽짜리 승리일 뿐, 결국 먼저 정신을 차린 건 AK-12였다.

 

“UMP45. 이제 그만해. 그리고 AN-94 너도.”

 

대충 SOP2를 내려놓은 그녀는 AN-94 앞에 쪼그려 앉았다. 미미한 수준의 분노와 대부분의 안타까움, 그리고 체념이 담긴 목소리는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굳이 버틸 필요 없어, 지휘관은 어차피 멀리 못 갔을 테니까. 아니, 애초에 의식을 차리긴 했으려나.”

 

AN-94를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그녀인 만큼, 이 정도 계획은 간단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처절한 모습에 약간의 측은함을 느낀 그녀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말해. AN-94. 이제 정말 끝이니까.”

 

“…….”

 

AN-94는 대답 대신 땅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AK-12의 뜻에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는 아주 기념적인 순간이었지만, AK-12는 딱히 기쁨을 느끼진 못했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게 네 뜻이라면.”

 

그리 말함과 동시에, AK-12는 그녀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인드맵을 스캔해 정보를 뽑아내기 위함이었다.

 

AN-94 또한 체념했다. 이 정도면 많이 노력했지, 지금쯤 지휘관은 뭐 하고 있을까. 무사히 탈출했으면 좋겠는데.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자그마한 소망에서 비롯된 간절한 바람이었다. 그저, 그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길 바라는 어여쁜 마음이었다. 

 

그런 기대에 보답한 걸까. 모두가 끝을 직감한 바로 그 순간에, 바람이 불어왔다.

 

“……아.”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당연히 AN-94였다. 여태껏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녀가 갑작스레 입을 열고, 모두가 놀란다.

 

“……흐아. 힘들어라.”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놀란다.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어떻게든 질질 다리를 끌며, 흐릿한 시야 때문에 벽을 짚으며, 비참하고 또 처량하게.

 

하지만 의지는 그 어떤 때보다 굳건하게.

 

“……지휘관?”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흐릿하고, 또 어지러웠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그래. 이해했어. 전부 다.”

 

그리고 가만히 웃는다.

 

 

 

 

 

 

 

 

“왜 그래. 다들 내가 반갑지 않나 봐?”

 

자리의 전원, 입을 떼지 못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태에 목소리를 내는 이는 오직 그녀 하나뿐이었다.

 

“지, 지휘관…… 어째서…….”

 

그 주인공은 당연히 AN-94였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제 발로 걸어온 건지,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이제 다 이해했거든.”

 

하지만 지휘관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마치 모든 것에 달관한 듯, 그는 슬쩍 미소를 그렸다.

 

“……그래. 잘됐네. 마침 수고를 덜었어. 자, 지휘관, 이리로…… 아니, 내가 그리로 갈게.”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UMP45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그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눈치가 빠른 그녀라면 지금 지휘관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면서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아니, 정확히는 이해를 확신으로 바꾸고 싶은데, 질문 하나 해도 좋을까?”

 

“아니, 안 돼. 아무 말 하지 마,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 그럼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다 할게.”

 

이번에는 AK-12였다. 마찬가지로 이해를 포기한 그녀는 UMP45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축축하고 끈적한 욕망이 그를 조여오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죽은 거야?”

 

“…………뭐?”

 

모든 것이 멈췄다. 호흡조차 잊어버릴 수준의 충격적인 발언은, 장내의 모든 이들의 뇌리를 강하게 강타했다.

 

“주어진 정보로 조합한 추측인데, 한 번 틀린 점 있으면 지적해줘.”

 

막상 그 주인공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며, 지휘관은 퍼즐 조각을 맞추기 시작했다.

 

“일단 나는 죽었을 거야. 그게 사고든, 병이든, 혹은 누군가의 실수든 간에 말이야. 그리고 너희들은, 그걸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한 거지.”

 

그는 느꼈다. 주저앉아 울부짖는 AN-94의 슬픔을, 그는 깨달았다. 애써 강한 척하다 무너지는 UMP45의 비참함을, 그는 보았다. 길을 잃어 헤매는 AK-12의 모습을.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정말 하늘이 가엾게 여긴 건지는 몰라도,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거지.”

 

공상의 영역이었지만, 그는 진지했고, 지적하는 이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정답이었으니까.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 걸까. 만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나는 죽어가기 시작했고, 그건 시시각각 진행 중인 잔혹한 사실이지. 아마 내 예상인데, 길어도 한 달, 그쯤일 거 같아. 응. 미안해.”

 

지휘관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바라봤다. 새하얘진 피부는 그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지표였고, 모두의 슬픔이었다.

 

“그래서 너희들은 또다시 나를 잃기 싫은 마음에 이런 짓을 저지른 거고, 맞아? 혹시 틀린 점 있으면 지적해도 좋아.”

 

그리고 후아, 이젠 말하는 것도 벅찬 듯 지휘관은 하늘을 향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여태껏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UMP45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100점짜리 정답이야. 응, 잘 됐어. 이제 이해했으니까. 우리 행동도 이해해 줄 거지?”

 

“음. 미안하지만 힘들 것 같네.”

 

“…………왜.”

 

“그러니까…….”

 

“대체 왜!!!”

 

UMP45가 고민 끝에 내놓은 답이었지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덕분에 쌓이고 쌓인 그녀의 감정은 마침내 터져버렸고, 곧 언어의 형태로 나타났다.

 

“지휘관 죽어, 죽는다고! 이제 알잖아! 당신 죽는다고!”

 

격렬하게 요동치는 감정은 곧 그리움의 무게이자 그녀의 자책이었다. 지휘관을 홀로 두었다는 자책감과 그의 빈자리를 통감하며 느낀 고독, 외로움, 슬픔이 하나된 그 난잡한 감정은, 참으로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휘관은 가만히 그녀의 감정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을 이해한 지휘관은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마저 이해할 수 있었고, 조용히 웃어 보였다.

 

“왜…… 대체 왜 그리 태연한 거야……? 응……?”

 

그리고, 마침내 벗겨지는 가면.

 

“지휘관…… 안 돼. 응? 나 이제 당신 없으면 안 된다고…… 나, 나는…… 이렇게 약한데…….”

 

어느새 그녀는 지휘관의 품에 안겨 조용히 울고 있었다. 자리의 모두는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고, 입을 열 수 있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오래 사는 건 중요하지 않아. 남은 시간 아래 무엇을 하느냐가 진정으로 중요하지.”

 

지휘관 또한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 보였다. 비록 눈물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 따듯함과 다정함에, UMP45는 분명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짧더라도, 결국 우리에게 이별을 대비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리고 휘청, 성치 않은 몸으로 이곳에 홀로 도달한 지휘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달했다. 애초에 서 있는 게 기적이라 말할 수준이었으니.

 

넘어질 뻔한 걸 UMP45가 잡아들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펴질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 조금만 더 웃으면 안 될까?”

 

싱긋, 환한 미소와 함께.

 

“아, 아니야…… 아니라고!!! 안 돼. 안 돼. 안 돼!!!”

 

애써 부정하며 악쓰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 다름없었지만, 그렇기에 더 애처로웠다. 속으로는 이미 인정하고 있었었으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서리가 녹아내리며 물이 고이고, 그 물에는 격렬한 파문이 일어났다.

 

“애쓰지 않아도 좋아. 억지 부리지 않아도 좋아. 만약 눈물이 나온다면 그대로 쏟아내도 좋아.”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잔잔해진 그 순간, 지휘관이 다시금 입을 뗀다.

 

“그냥, 웃자.”

 

“…….”

 

활처럼 쏘아진 말은 그녀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화살이 꿰뚫은 구멍 아래 쏟아지는 것은 비틀린 애정에서 비롯된 집착이었으니까.

 

“………………미안해.”

 

“미안할 필요도 없어. 애초에 원망한 적도 없으니까.”

 

조심스레 UMP45의 등을 쓸어주며, 지휘관은 고개를 듦과 동시에 AK-12를 마주했다.

 

감긴 눈꺼풀 아래 자리 잡은 동공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휘관은 그렇게 생각했다.

 

“AK-12. 길을 잃었구나.”

 

“……아니, 나는 내 스스로 길을 찾았어. 당신이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내 길을 나아갈 거야.”

 

“설령 그 길이 어둠이라 할지라도?”

 

“…….”

 

지휘관의 목소리였다. AK-12는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지휘관은 천천히 손을 뻗어 창밖을 가리켰다.

 

“밖은 저렇게나 밝은데?”

 

늘 그랬듯이, 태양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눈부셔 맨눈으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빛을 가리키며, 지휘관은 두 눈을 감았다.

 

“잘 봐. 저건 내일이야.”

 

그가 눈을 감은 까닭은,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눈을 감아도, 애써 외면해 보아도, 빛은 늘 찬란하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저기로 가자. 지금 거기는 너무 어둡잖아.”

 

“…….”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투명한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터지기 직전의 댐과 같은 그녀의 감정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 지휘관은 다시금 미소를 그려 보였다.

 

“미워한 적 없으니까.”

 

“……지휘관!”

 

순식간에 지휘관에게 달려든 AK-12는 가만히 눈물을 쏟아내길 반복했다. 후회, 미안함, 눈물, 그리고 또 고마움, 뒤섞인 감정 아래, 그녀는 마침내 옳은 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얘들아. 나 조금만 더 말해도 될까?”

 

돌아오는 건 침묵이었고, 그것은 곧 긍정이었다. 후우, 거친 숨을 몰아쉰 지휘관은 꾸밈없는 진실을 꺼내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슬퍼.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이 아파. 나조차도 이런데, 너희들은 오죽하겠냐는 생각이 내 가슴을 찌르거든. 전부 이해해. 이렇게 과격한 행동을 할 정도로 너희들이 간절했다는 뜻이니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여태껏 초연하게 말했지만, 본디 생물이란 무릇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니.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어. 본디 희망과 빛은, 앞길에만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는 고개를 들었다. 슬픔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졌고, 그에게서는 오직 빛뿐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도 최대한 버텨볼게. 죽기 싫은 건 매한가지니까.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결국, 내가 운명의 시간을 맞이한다면.”

 

그리고 슬쩍, 품에서 흰 국화를 꺼내 보인다.

 

성실과 감사, 진실 흰 국화의 꽃말.

 

그의 마음.

 

“그냥, 작은 국화 하나면 충분해.”

 

“지휘관님!!!”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눈물 흘린다.

 

모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그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지휘관은 조용히 웃어 보였고, 그게 전부였다.

 

“고생했어. AN-94, SOP2.”

 

“……정말, 다행이다.”

 

“지휘관…….”

 

비록 망가진 몸이었지만, 둘은 어떻게든 지휘관에게 달라붙었다. 특히 SOP2는, 회귀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눈물까지 머금은 지 오래였다.

 

“나, 나…… 엄청 노력했어…… 어린애처럼 안 굴고…… 지휘관이…… 지휘관이…… 하고 싶은 대로…… 엄청…….”

 

SOP2는 그의 품에 안겨 가만히 울었다. 여태 보여주지 않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에, 지휘관은 조용히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응, 잘했어.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니까.”

 

“히끅…… 히끅……흐아아앙!!!”

 

흐르는 눈물을 받아내며, 지휘관은 AN-94에게 시선을 돌렸다. 굳이 입을 뗄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눈빛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둘은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응. 수고했어.”

 

 

 

 

***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고, 시간은 하염없이 흘렀다. 지휘관의 몸은 차츰 망가지고 운명의 날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눈물 흘리지 않았다. 그게 지휘관의 뜻이고, 바람이었으니까.

 

하루하루, 즐거이 시간을 보내고 미소를 그린다. 끝이 존재하는 행복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밝았다.

 

“…………지휘관?”

 

AN-94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눈을 뜨고 밖으로 나서니, 자신을 반겨주는 건 두 발로 서 있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꽃들이 일러줬어. 오늘은 좋은 날이라고.”

 

이젠 휠체어 없이는 이동할 수 없는 그였지만, 어째선지 두 발로 걷고, 선명한 두 눈이 자신을 향했다.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니, 지휘관은 이렇게 말했다.

 

“나가자. 어디든.”

 

 

 

 

 

 

 

싫다.

 

죽기 싫다.

 

 

 

***

 

 








 

드르륵, 휠체어 끄는 소리, 휘이잉, 바람 부는 소리, 짹짹, 새가 우는 소리.

 

“햇살이 참 밝아.”

 

부드러운 당신의 목소리.

 

우리는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분명 즐거워야 할 시간이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오늘은 4월 22일. 그가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난 시기이자,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으니까.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두려움은 필연이었다. 이젠 정말 때가 왔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망가지는 몸은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빛을 잃은 두 눈은 더 이상 우리를 비추지 않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본디 공포란 미지에서 오는 것이 가장 무섭다고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또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안감은, 내 마인드맵을 휩쓸어버렸으니까.

 

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죽을 날이 정해진다면, 아무리 초연한 지휘관이라도 불안감에 휩싸이리라 생각한 것이 그 까닭이었다.

 

하지만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워낙 눈치가 빨랐으니까.

 

“AN-94. 손이 너무 떨린다.”

 

“아, 그런가…….”

 

불안이 행동에 묻어나온 걸까. 나는 그제야 내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목적지는 어디인가. 최대한 빨리…….”

 

“아니, 천천히 가자. 지금 우리가 급박할 이유는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 알았다.”

 

그리 말하며 지휘관은 저 멀리 가리켰다. 보이진 않지만 본능적으로 눈치챈 걸까? 그 손끝에 있는 건 형형색색의 꽃들이 기다리는 꽃집이었다.

 

“실례합니다.”

 

“아유,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안 보이시더니, 어디 아픈 줄 알았어요.”

 

“보시는 대로에요.”

 

꽃집에 들어가니, 주인은 웃으며 반겨줬다. 지휘관이 자주 오는 곳이라 그럴까. 궁금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몇 마디의 대화가 오가니, 주인은 지휘관에게 꽃을 한 송이 건네줬다. 돈은 안 받겠다고 한사코 거절하는 모습은 둘의 친분이 얼마나 깊은지 잘 나타내고 있었다.

 

“자, AN-94. 네 거야.”

 

“……아.”

 

그의 손에서 푸른 장미가 넘겨지고, 나는 기억을 떠올린다.

 

‘본래 푸른 장미는 실존하지 않았어, 식물의 꽃에서 푸른색을 내게 하는 색소는 델피니딘인데, 장미에는 델피니딘을 생산하는 유전자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꽃말은 얻을 수 없는 것, 그리고 불가능.’

 

“본래 푸른 장미는 실존하지 않았어…….”

 

그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나에게 준 푸른 장미. 나도 모르게 그때의 기억을 읊조리고 말았다.

 

“오, 어떻게 알았어. 지금 그 말 하려고 했는데.”

 

그리고 솟아오르는 불안감, 나는 이 시점에서 확신했다. 오늘은, 좋지 못한 날이라고.

 

“……그런가.”

 

“꽃말은 ‘기적.’ 알고 있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기뻐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도저히 슬픔을 감출 수 없었다.

 

“흐윽……흑…….”

 

결국 눈물이 나왔다.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내 폐부를 찌르는 슬픔의 무게는, 도저히 감당할 것이 못 되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더듬거리며 휠체어에서 일어난 지휘관은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참으로 따듯했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두려웠다. 앞으로는 이 따듯함을 느끼지 못할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그를 강하게 껴안아 버렸다.

 

아늑했다. 포근했다.

 

눈물이 나왔다.

 

“AN-94. 괜찮으니까. 응?”

 

곱디고운 손길이 나를 향하고, 우리는 눈을 마주한다.

 

“내가 뭐라 했지?”

 

“……웃으라고 말했다.”

 

“응. 그럼 된 거야.”

 

이상했다. 단순한 한마디에 불과했지만, 내 마음속 어둠은 어느새 저 하늘 멀리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 허한 공간은, 오직 당신과 내가 빚어낸 빛뿐이 가득했다.

 

“가자, AN-94.”

 

“……알았다.”

 

굳게 다짐하며 눈물을 닦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격려해준 그에게 감사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내려준 하늘에게 감사한다.

 

그래.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

 

 

 

 

그 뒤로는 즐거운 일만 가득이었다. 고양이가 우리에게 다가와 재롱을 부린다던지, 우연히 식당 이벤트에 당첨된다든지, 혹은 우연히 구입한 옷이 마지막 하나 남은 제품이라든지.

 

기적 같은 일만 가득한 것이 참,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이번엔 저기, 그러니까 마트로 가자.”

 

“………….”

 

지휘관은 다시금 손을 뻗어 저편에 있는 대형 마트를 가리켰다. 시내에서 가장 큰 마트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몰리는 곳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인권 단체가 테러를 거행한 장소였고.

 

“……AN-94?”

 

“아니다. 잠깐 멍때리느라.”

 

나는 걸음을 옮겼다. 휠체어를 끌며, 그를 친히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마트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안도감을 느끼며, 또 불안감을 느꼈다.

 

“AN-94.”

 

“불렀는가. 지휘관.”

 

그리고, 지휘관이 몸을 일으킨다.

 

“이상해. 몸이 가벼워, 앞도 잘 보이고, 마치 내가 이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할 그런 느낌이야.”

 

황혼이 깃든 눈동자는 크게 웃었다. 분명 아름다웠지만, 황혼이라 함은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스러지는 꽃이 마지막으로 빛나는 모습을 차마 맨눈으로 바라보기엔 너무나 눈부셨고, 너무나 두려웠으니까.

 

“……AN-94.”

 

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왔다. 나 또한 두려움에 몸을 떠니,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좋아해.”

 

“…………뭐?”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속 깊이 눌러 놨던 말이야. 내가, 조금 부끄러움이 많아서 말이야.”

 

그리고 슬쩍, 어색한 미소를 그린다.

 

“처음 널 봤을 때, 난 네가 단순히 무뚝뚝한 인형이라 생각했어.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섭기도 했고.”

 

입을 뗄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는, 그의 말에 경청하는 일,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곧 깨져버렸어. 저 구석에 있는 시든 꽃에 물을 주는 모습을 보고, 난 네가 따듯한 사람이라는 걸 느꼈거든.”

 

그의 눈은 너무나 진지했다.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그 진중한 목소리를 들은 나는,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흐르는 눈물은 뺨을 타고 내려가 그대로 비가 되었지만, 지금은 고작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내 모든 감각은, 오직 당신만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빛나는 사람이었어. 이따금 나오는 네 미소를 보고, 나는 사람이 이토록 빛날 수 있구나 느꼈거든.”

 

그리고 깨달은 사실, 나는 여태껏 당신이 나를 비추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비추고 있었다.

 

“좀 더 멋진 옷을 입고, 좀 더 멋진 곳에서, 좀 더 멋진 말로 전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거 같더라.”

 

아쉽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지만, 나에게는 이 이상으로 행복할 수 없었다.

 

그냥, 그냥, 당신이 좋았으니까.

 

“……AN-94. 좋아해.”

 

환한 미소, 늘 보던 미소, 하지만 그렇기에 더없이 소중한 미소.

 

나를 향한 그의 따듯한 마음.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손을 붙잡았고, 환하게 웃어, 나의 마음을 전했다.

 

“나도 좋아한다. 지휘관.”

 

늘 숨겨오던 마음은 서로를 향했고, 이제는 하나가 되어 이어진다.

 

우리의 빛은,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응. 다행이야. 정말로.”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그 상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그가 나의 손을 잡고, 상자를 건넴과 동시에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냥, 그냥 웃음이 나왔다.

 

“……AN-94.”

 

“……응. 불렀는가 지휘관.”

 

그리고 차츰 젖어오는 어깨, 순간 당황했지만,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서워.”

 

“……뭐?”

 

“…………나, 죽기 싫어.”

 

“………….”

 

“나…… 너희들이랑…… 너랑…… 더 오래 살고 싶은데…… 더…… 즐겁게……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래. 애써 강한 척했지만, 그 또한 하나의 인간,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우리를 위로하는 그 따듯한 빛은 자신을 불태워 만든 것이었구나,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얼마나 홀로 앓아 왔을까. 

 

“지휘관…… 괜찮다…… 나를 봐라.”

 

고개를 든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한가득 맺혀있었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고.

 

“당신이 말하지 않았는가…… 웃으라고…… 웃으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그는 말했다. 웃으라고, 자기가 어떻게든 할 테니, 너희들은 웃기만 하면 된다고.

 

“내가 어떻게든 하겠다…… 당신은 그냥…… 웃기만 하면 된다.”

 

그렇기에, 나 또한 환하게 웃는다.

 

“AN-94…….”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 순간, 서로의 마지막을 확신한 이 순간, 마침내 다가온 이 시간에 우리는 그 어떤 때보다 환하게.

 

“……응. 웃을…….”

 

-콰아아아아아아앙!!!

 

웃어 보였다.

 

 

 

 

***

 

 

 

 

-4월 22일. 바로 어제. 인권 단체에 의한 폭탄 테러로 사람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자는 단 한 명, 민간 군사 기업 그리폰의…….

 

 

 

 

 


https://www.youtube.com/watch?v=XvwYY3INEgs



 

 

 

바람이 불어온다.

 

이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바람에는 무엇이 실려있을까.

 

항상 생각해온 문제였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

 

 

4월 22일, 인권 단체의 폭탄테러, 사람이 많은 마트에 저지른 행위였지만, 사상자는 단 한 명.

 

그렇다.

 

지휘관은 죽었다.

 

운명은 바뀌지 않았다. 천천히 죽어가던 그는, 그 어떤 때보다 환한 빛을 내비치다 그대로 스러졌다.

 

그래도 지휘부는 나름 멀쩡했다. 적어도 이제 자신을 탓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휘관.”

 

물론 그것이 슬퍼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었다. 눈물 흘리는 이도 존재했고,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이 또한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슬픔에 잡아 먹혀 이 자리를 맴도는 일은 이제 없을 거다. 그가 말했듯, 본디 희망과 빛은 앞길에만 존재하니까.

 

미래는, 그 어떤 빛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으니까.

 

그가, 우리를 향해 웃으라고 말했으니까.

 

“…….”

 

말은 이렇게 했지만, 슬픔을 감출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었다. 그 증거로, 나는 어느새 홀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 언덕은 그가 첫 번째로 죽기 전 마지막 대화를 나눈 그 장소였다. 풍경이 참 아름다운 것이 누군가와 함께 본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이제는 헛된 소망에 불과하다는 것이, 참으로 가련할 따름이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이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바람에는 무엇이 실려있을까.

 

항상 생각해온 문제였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나오지 않았다.

 

“흐윽……흑…….”

 

눈물이 나온다. 분명 앞으로는 눈물 흘리지 않기로 다짐한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그냥, 이 쏟아지는 감정의 파도를 버틸 수 없는 것이 나의 위치였으니까.

 

“지휘관…….”

 

흐르는 감정, 아려오는 가슴, 그 아래 날뛰는 그리움.

 

뜨거운 눈물, 스멀스멀 기어 오는 아픈 기억, 뼈에 사무치는 슬픔,

 

그 위로 불어오는 바람,

 

“……………어?”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

 

작은 새였다. 정확히 무슨 새인지는 모르지만, 부리에 무언가를 물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새는 조용히 내 곁을 맴돌았다. 비록 작고 조용한 내래짓이었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거대했다.

 

천천히 손을 뻗으니, 새는 피하지 않았다. 단지 이 순간만을 고대해왔다는 듯, 새는 내 손 위에 작은 무언가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이건.”

 

그리고 그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내 표정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구별하기 어려웠지만, 이미 한 번 본 적 있던 물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나에게 선물한 적 있던 물건이었다.

 

이건, ‘기적’을 뜻하는 푸른 장미의 씨앗이었으니까.

 

고개를 들어 새를 마주한다. 비록 작고 가녀리기 짝이 없는 새였지만, 어째선지 익숙한 느낌이 들 따름인지라,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새는 사라졌고, 나는 홀로 남아 다시금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나를 향해 불고 있었다.

 

따듯함을 간직하고 있는 바람, 내 눈물을 지워주는 바람, 다정하기 짝이 없는 바람.

 

언제나 그와 함께하던 바람.

 

“……지휘관.”

 

아, 그랬구나.

 

이 바람의 정체는, 바로 당신이었구나.

 

“응……알았다. 앞으로는……정말로, 더 이상 눈물 흘리지 않겠다.”

 

늘 하던 다짐이었지만, 그 무게는 차원이 달랐다. 나 자신에게 맹세하는 것과 당신에게 맹세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눈물이 흐르지만, 그 이상으로 환하게 미소 짓는다.

 

앞으로는 어디를 가든, 언제나 당신과 함께니까.

 

 

 

 

 

 

 

 

 

 

바람이 불어온다.

 

이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바람에는 무엇이 실려있을까.

 

항상 생각해온 문제였지만, 나는 이제야 답을 찾았다.

 

 

 

 

 

 

 

 

 

 

3일 뒤에 회귀하는 인형들 完

 

 

 

 

 

 

개인적으로 내가 쓴 것 중에 가장 잘 썼다고 생각하는 글, 중간에 뭔가 삐걱이는 게 있긴 해도 제일 마음에 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