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자연계에서는 9할의 수컷이 죽을 때까지 아무 암컷과도 접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말이다.


강인하고 매력적인, 소수의 선택받은 수컷만이 암컷과 만나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길 권리를 얻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중간한 수컷들은 도태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간단히 다시 말하자면, 나 따위의 인간이 그 녀석과 사귀고 있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언제나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과 같이.









그 녀석은 항상 나를 보면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고, 사귀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그 녀석은 항상 밝았고, 모두가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그 녀석이 웃게 하는 것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녀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화장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그 녀석과 나는 닮은 점이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 많은지 적은지.


용모가 아름다운지 아닌지.


공부를 잘 하는지 아닌지.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갔을 때에... 그 집에 감도는 공기가 화목한지 아닌지.


우리는 항상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이었지만,


그 색만은 정반대인 듯이 서로 달랐다.


그 녀석은 잘났고,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그 녀석의 자존감에 덧대 분칠하는 화장품같은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대비는 극적인 효과가 되어 그 녀석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그런 나를 녀석은 퍽이나 아꼈다.


마치 항상 가방에 넣고 다니는 화장품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이 분칠을 하기 위해 거울에 자신의 민낯을 비추듯이,


녀석은 나와 단 둘이 되면 남들에게는 보이지 못할 말과 행동을 보였다.


그 녀석은 항상 나를 보면 웃었다.


주위에 보는 눈이 있을 때에도, 혹은 나와 단 둘일 때에도.


다른 것은 그것이 가식적인 웃음인지,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비웃음인지 뿐이었다.


차마 남에게는 내보일 수 없는 나의 못난 부분들을 그 녀석은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나의 가난. 나의 모자람. 나의 부끄러움.


그 모든 것이 그 녀석의 즐거움이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 녀석이 웃는 것에만 홀려서,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저 네가 웃는다면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 얼굴을 밟는 너의 구두를 기꺼이 핥을 듯한, 구차하고도 맹목적인 사랑이었다.


나를 비웃는 것이 너의 기쁨이라면, 나도 또한 기쁘게 광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었고,


나의 마음을 짜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줄수 있는 건 사랑뿐이었는데, 그것조차 무한하지는 못했다.


억지로 쥐어짠 마음은 마른 걸레가 되어 초라하게 널브러졌다.


밀대에 말려 바닥이나 닦는 그런 걸레 말이다.


내게 딱 알맞은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그만하자고, 그러니까"


"무슨 소리야 그게, 갑자기 나오라더니 무슨 일인데"


"네 말대로 하자. 내가 부족하잖아. 예전부터 생각했었어. 네 말이 항상 맞아. 너랑 나랑은 수준이 안 맞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사라지고 싶다. 그게 다야"


오랫동안 생각했었던 말을 뱉었더니 녀석의 반응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다 쓴 화장품 통을 쓰레기통에 처박듯이 시원하게 헤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저 녀석의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모습은 언제나 웃고 있었는데.


왜 지금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걸까.


예상치 못한 반응에 불편해진 나는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파하고 싶어 다급해졌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운을 떼었다.


"뭐,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냥... 다음에는 나보다 더 잘난 사람 만났으면 좋겠어."


"기다려 봐, 뭘 멋대로 가려고 하는데? 아직 얘기 안 끝났어"


강하게 손목을 쥐이자 순간적인 통증에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깜짝 놀라서 다시 뒤돌아 그 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 하고 두 명의 소리가 잠시 겹치고 난 뒤에,


"잘 있어라"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서 다시 그 녀석을 뒤로 했다.


"야 최민정, 가지 마, 기다려"


순순히 기다려 줄 정도의 마음은 이미 걸레를 짜듯이 빨려나간 뒤였다.


나는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서 뭔가 말하는 것 같았지만, 경황이 없어 무슨 말인지는 듣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녀석이다.


항상 웃는 얼굴은 태양처럼 환해서, 그것을 보면 그 누구도 저 녀석을 미워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없어도 잘 살 것이다.


실연의 아픔은 일주일이나 가면 오래 간 것이겠지.


다음 주 정도면 훌훌 털고 일어나서,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키는 대로 불러내서 내 욕이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지금까지가 내 분에 넘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분에 넘은 행복은 밝은 햇빛처럼 나를 비추었고,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명확하게 나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버틸 수가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맞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미리 차단해둔 덕에 녀석에게서 오는 연락은 없었다.


예약해 둔 시간에 빠듯하게 역에 도착했다.


내가 올라타자 문이 닫히고, 기차는 내 친정이 있는 대구로 출발했다.


가만히 앉아서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감자 아무 빛도 없는 어둠이 찾아왔다.


그 캄캄함에 다시 한번 실감했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 그 녀석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