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드래곤녀가 있었다.
다른 모든 드래곤들처럼
그녀도 보물에 미쳐 있었다.
금을 위해서, 다른 마을을 공격했다.
금을 위해서, 다른 드래곤을 죽이고 둥지를 강탈했다.
그래, 오직 금이다.
금을 위해 수은을 들이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연금술사들 처럼
금을 위해 악덕을 쌓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이 드래곤녀는
어느 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통행증을 발급해주시면, 여기 있는 금 다 드릴테니, 좀 지나가면 안 되겠수?"
또 새로운 보물을 찾아 인간으로 변이한 드래곤녀는
저 멀리 마을 입구에서 경비병과 실랑이하는 한 남자를 보았다.
"아니 글쎄, 저 앞부터는 전쟁 구역이라고 그러네, 돈이 문제가 아니고, 댁 목숨이 위험하다고!"
"에이, 인생에 금이 남수, 추억이 남수? 추억이지, 다! 젊은 시절엔 뭐 고생도 사서 한다더만!"
"거기다, 이 앞에 있는 산에는 산적들이 우글거리고, 보물에 미친 용도 여기에서 살..."
"산적은 피할 재주가 있고, 용이 보물에 미쳤으면 돈 없는 나는 건드리지도 않겠구만! 에헤이~"
돈 보다 추억?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통행증을 위해 저 정도의 금을 내는 남자는
얼마나 더 많은 금이 있을까?
"지나가게 해 주십쇼, 제가 호위해 드릴 테니."
거대한 창을 들고 인간으로 변이한 드래곤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자와 경비병 사이의 대화에 꼈다.
"캬, 아가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수다. 아니, 경비 아저씨. 보십쇼. 이제 호위까지 있는데, 두려울 거 있겠수?"
"난 모르겠수... 통행증은 발급해 드릴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쇼. 요즘 것들은 목숨이 아깝지도 않나..."
경비원이 초소로 잠시 들어간 사이, 남자는 드래곤녀에게 말을 걸었다.
"캬, 이거 고맙수. 내가 역마살이 껴서, 한 곳에서 원체 머물지를 못 하거든. 근데, 전쟁이 났다고 안전이니 뭐니 하면서 도시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지 뭐요?"
"그건 됐고, 호위비로 금은 좀 주셔야겠는데."
"아무렴, 아무렴. 금이야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지."
주먹 네 개 만한 금 주머니를 드래곤녀에게 권하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약 한 달 정도 호위비면, 이거면 되겠수? 지금은 금이 이것 뿐이고, 한 달 뒤엔 또 금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말이유."
"뭐, 나쁘진 않군요."
이 남자는, 금을 너무 가볍게 본다.
뭐, 자신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드래곤녀는 금주머니를 자기 가방에 넣었다.
한 달 동안
이 남자와는 정말, '금이 아깝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류트를 꺼내 들고 "아아, 그 거대 크라켄을 무찌른 용맹한 선원을 보라!" 며 바다 선원의 노래를 했고
어떤 날은 술을 한 잔 꺼내 들고 "그러니까, 이건 당신에게만 하는 얘긴데, 저 멀리 왕국의 공주가 글쎄 다른 여자를..."이라는 이야기를 했고
어떤 날은 붓을 꺼내서 몇 번 휙휙 긋더니 "보슈. 외국 옷은 이런 것도 있다우. 신기하지 않수?" 라며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것도, 이국의 복식을 입은.
심지어 드래곤녀가
"그래? 그 이야기는 이러이러한 거 때문에 못 믿겠는데?"
라고 딴지를 걸면
"그렇수? 그럼, 이 이야기도 거짓이라 확신할 수 있수?"
"아하, 오늘은 이야기가 아니라 노래가 고프신 모양이로구만."
"그러니까 말이유, 그게 이렇게 이렇게 문장이 요기 그려져 있었는데 말이지..."
이렇게 새로운 이야기, 노래, 그림 등등을 꺼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덧, 한 달이 지나고
목적했던 도시에 도착했다.
"이야~ 고맙수. 내 다음에 만나면 한번 더 사례하리다!"
남자는 그리 말하고 웃으며
드래곤녀를 두고 술집으로 향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누구도 해쳐본 적 없이 금이 이만큼 생겼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처음 듣는 감미로운 노래, 가끔은 터져나오는 함성과 같은 그 음유시.
그림으로 본 외국의 그 화려한 복식들과 그걸 입은 모습을 즉석에서 그려줬던 그 그림.
저 먼 땅에서 벌어졌던, 반쯤은 믿지 못할, 반쯤은 신뢰성 있는 이야기들.
이것도, 보물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보물에 미친 종족이다.
다시, 그 도시로 향했다.
일주일만에 그 도시를 떠나진 않았으리라.
도시로 가서
그 남자가 있을 법한
가장 큰 술집에 들어갔다.
"캬~ 좋구만, 그러니까, 그 때 얼간이 경비병이 글쎄, '용은 비만 도마뱀일 뿐이다! 너희는 맞서 싸워라!'라고 외치면서도 엉덩이에 불을 붙인 채 도망갔더란 말이요!"
술집 제일 앞에선
큰 맥주잔을 들고
그 남자가 모두의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침 넘어가는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술집의 여인들은 그 남자에게 눈웃음을 쳤다.
코가 빨개진 배불뚝이 술꾼조차 맥주잔을 꼭 쥐고, 그 남자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이고, 드래곤님! 저보다 저새끼가 더 살이 쪄서 먹을 게 더 많습니다~!'라고 말이요! 그러니까 화아아악! 하더니, 글쎄 그... 술이 좀 부족한데?"
즉시 한 바텐더가 술을 따르고
손님들은 그 남자에게 돈을 던졌다.
다른 바텐더는, 그 돈을 모조리 주워서 기록하고 있었다.
"이야아아... 오래앤만이유으...?"
혀가 잔뜩 꼬인 채로
남자가 드래곤녀에게 물었다.
옆에는 다른 술집 여자를 둘 끼고.
"오랜만입니다. 잠시 어디를 좀 다녀오느라..."
"아니이이 뭐어어... 이거어엇도 인여어언인데에에... 하안자안 하시게쑤우?"
"오빠아~ 우리랑 놀아줘야지~"
"오빠아~ 우리 둘도 오늘 밤 그 여자처럼 아주 죽여주기로 했잖아아~?"
천박한 미소를 지으며
여자 둘은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추고 가슴을 남자의 손에 가져다대고 있었다.
"캬아아... 도온으은 업스으으면 버얼고! 이쓰며언 쓰으고...! 아가씨이이... 내일 오며어언... 한 자안 사알 테니까... 꼬옥 오슈..."
곧이어
남자는 위 층 숙소로 향했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처음으로, 금보다 소중한 것을 만났다.
처음으로, 보물을 눈 앞에 두고 아무것도 못 했다.
아니, 아무것도 못 한 게 아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한 거다.
다음 날
술집에 거대한 용이 들이닥쳤다.
숙소는 반파가 되었고
경상자는 아랫층 숙소에 머물던 사람들 여럿
중상자는 윗층 숙소에 머물던 술집 여자 둘
그리고, 실종자는 다른 마을에서 왔던 남자 하나.
"... 뭐여... 이게... 내가, 꿈을 꾸나...?"
술이 덜 깬 듯한 남자에게
거대한 드래곤이 말을 걸었다.
"내 둥지에 온 것을 환영한다."
"... 어... 잘못했수...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것는디, 아무튼 잘못했수. 풀어 주면 안될까? 난 한 군데에 오래 머물면 정신이 나갈 거 같거든..."
그리고 거대한 드래곤은
점점 모습이 줄어들어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변했다.
"...으응? 오랜만이유? ... 아니, 댁이 드래곤이었수? 신비한 경험 다 하겠구만..."
"정말, 꿈 꾸는 것 같군. 이렇게 쉬울 줄이야..."
남자의 입에선
술 냄새가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고
곧, 용의 냄새가 배기 시작했다.
"...뭐요. 뭐 하는 거요?"
"아니 뭐, 한 달간 노래와 이야기 값은 치러야 할 거 같아서."
옷을 벗으며, 드래곤녀가 무심히 말했다.
"어디, 여자 둘 죽여주는 솜씨가 어떤지 보자고."
"아니, 잠깐.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나는..."
다시, 남자의 입이 드래곤녀의 입에 의해 막혔다.
"뭐, 솜씨 발휘하기 싫으면, 내가 움직이고."
그 다음날부터
남자는 이야기와, 노래와, 그림 등등으로
드래곤녀를 즐겁게 해야 했다.
그리고 '값'은 남자의 몸으로 치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남자의 목소리는, 점차 나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점점 생동감이 사라졌다.
그림은, 붓조차 제대로 쥐지 못 했다.
"내보내 주쇼... 내가 역마살이 껴서... 오랫동안 한 곳에 있으면 힘이 없어져서..."
"힘이 없으면 좋지. 내게 저항을 못 한다는 거니까."
남자의 눈이 죽어가고
말은 점점 의미를 잃어가도
'그 한달'간의 보물은 드래곤녀의 뇌에 박혀 있기에
그 남자는 지금 드래곤의 둥지에 '보물'이 되었기에
드래곤녀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술? 구해다 주지. 여기 오래 묵힌 명주가 많아. 여자? 내가 있어. 넌 내게 새로운 경험을 줬으니까, 나도 너에게 새로운 경험을 줄게. 그러니까, 그 경험을 다 할 때까진 여기 있어야 해. 알았어?"
"...내보내 주쇼..."
역마살이 꼈다는 소리는 허튼 소리가 아닌지
결국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남자를 보며
드래곤녀는 결국 다시 결단을 내렸다.
"외부 산책은 허용해 주지."
그것만으로도, 남자의 눈에는 생기가 약간 돌았다.
외부 산책이 허용되고 두 달 뒤
남자는 도망에 성공했다.
드래곤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단 한 번도, 보물을 잃은 적 없는데
처음으로 내 보물을 잃어버리다니!
분노에 휩싸였지만
행동은 빨랐다.
당장 현금화 가능한 보석류를 챙기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서 주변을 수색했다.
'저 멀리, 반쯤 말라 비틀어진 남자가 어디어디 도시로 간다고 했었습니다.'
'며칠 전, 수다스럽고 노래 잘 부르던 남자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다고 했었습니다.'
'글쎄, 그 남자가 저기 있다니까?'
하루 사이에 드래곤녀의 이목을 속이고
제일 예상하지 못한 길을 타서 도망간 지 석 달.
드래곤녀는 결국 남자가 어제 도망쳐왔다는 도시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일 큰 술집에서
건강을 살짝 되찾은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오오~ 저 바다에 세이렌이여어~"
몇 달 전에야 들어보았던 목소리였다.
생기가 넘치고, 파도가 넘실대는 듯한 그 분위기에 순간 드래곤녀가 취해 있을 때
남자가 입을 열었다.
"잘 들으셨수? 자, 나는 어제 와서 오늘 나가는 떠돌이니, 뱃삯이나 좀 보태주쇼!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내년에 죽지도 않고 또 올지 어떻게 알겠수!"
그리고 그 때 그 날처럼
손님들은 환호하며 돈을 던졌다.
재빠르게 돈을 챙기고
바텐더에게 돈을 금으로 바꿔서 빠져나가는 남자를
드래곤녀는 은밀히 따라갔다.
"지금 당장 뜨는 배 있수?"
"밤엔 배 못 띄우는데."
"에이, 좀 봐주슈... 역마살이 껴서, 한 곳엔 오래 못 있는 체질인데, 이젠 쫓기기까지 하는 몸이란 말이유..."
"내가 어떻게 못 해. 밤엔 배 못 띄운다고."
선원이랑 실랑이를 하는 남자의 뒤에
드래곤녀가 슬쩍 다가가서 말을 꺼냈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가지. 내가 즐거운 곳을 하나 아는데 말이야."
남자는
순간 온 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깊은 밤의 어둠이 선원의 눈을 막았기에
선원은 그저
"잘 됐네. 이 아가씨한테 안내를 받던가."
하고, 매정히 뒤돌아섰다.
"왜 도망갔어?"
"... 차라리 죽이슈..."
온 몸이 묶여버린 남자에게 드래곤녀가 물었다.
"내가 그렇게 잘 해줬잖아. 술도 줬어. 밥도 구해다 줬어. 산책도 시켜줬어. 왜 도망갔어? 왜?"
"내가 부탁할 건, 자유 뿐이유... 자유를 주지 않을 거면, 그냥 죽이슈..."
애처로이 고개를 떨구고 우는 남자에게
드래곤녀는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환희였다.
그 누구보다도 찬란했던 남자가
지금 내 동굴 안에 있다.
이 찬란한 빛은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 찬란한 기억은 내 머리 속에 살아있다.
보물에 미친 드래곤녀는
그렇게 새로운 보물과 함께
또 다른 보물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p.s. 요청받아서 써옴. 드래곤녀 글은 몬무스 채널에서 신청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받으니까 기분 묘하네.
과거글 모음 : https://arca.live/b/yandere/8328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