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이





시골에서 만난 소꿉친구가 조금 이상한 이야기 - 12(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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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털털털털-




달리는 기차에 앉아, 얀순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손톱을 짓씹었다.




"오빠오빠오빠오빠오빠-"




얀순이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오빠와 연락이 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따지고 보면,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었다.




휴대폰이 생긴 이후로, 얀순이가 시도 때도 없이 얀붕이에게 연락했기 때문이다.




집 앞에 핀 꽃이 예쁘다.


오늘은 특히 더 바람이 시원하다. 오빠는 잘 지내고 있느냐.


방금 지나간 구름이 돌고래 모양이었다. 언젠가 진짜 돌고래를 오빠랑 같이 보고 싶다.




이처럼, 시답지 않은 말들.




사실은, 어떤 말이든 좋았다.




오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니까. 오빠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얀순이에게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얀톡으로 말을 걸고, 오빠와 떨어져있는 시간이 너무도 견디기 힘들어지면 전화를 했다.




연락을 하는 횟수가 많아지니, 자연히 그만큼 받지 못하는 횟수도 많아지기 마련.




그래도, 얀순이는 연락을 확인한 제 오빠가 어떤 방식으로든 대답해주리라 믿고 기다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얀붕이가 얀순이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경우는 여지껏 한 번도 없었기에


얀순이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어갈 뿐이었다.




"하윽."




가슴 안쪽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듯한 통증에, 얀순이가 가슴팍을 부여잡고 신음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오빠를 만난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하루, 혹은 그 이상을 만나지 못한 것처럼 얀순이의 가슴 한 구석이 쑤셔왔다.




"그 아줌마-"




까득-




확실했다.


몇 번을 죽여도 되살아나는 산신이라는 여자.




그 여자가, 오빠에게 해코지를 하러 간 것이다.


나를 못 이기겠으니까. 우리 사이를 방해하려고.




"비겁한 년... 비겁한 년..."




무관심에서 증오, 증오에서 살의.


제 오빠 앞에서는 절대로 보여주지 않을 어둡고 축축한 감정이 얀순이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 여자가 오빠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고, 누구를 겹쳐보고 있는지.


얀순이에게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 여자가 오빠의 뜻을 거스른 것이 문제였다.




그 탓에, 자신을 만나러 오겠다는 오빠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죽여버릴 거야."




떨구었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본 얀순이의 동공이


사냥을 앞둔 짐승의 그것처럼 세로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어긋난 마을로 향하는 철길 위.




단 한 명의 작은 승객을 태운 채로 마을로 향하는 기차가 자욱한 안개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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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정신이 들었느냐."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얀붕이의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다.




의식을 되찾은 얀붕이에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었다.




여기가 이승인지 저승인지.


죽지만 않았다면 생각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얀붕이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정신을 차리자마자 눈에 들어온 압도적인 광경이, 얀붕이로 하여금 현실에서 눈을 뜬 것이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케 했다.




"..."




주변의 땅이, 나선형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치는 중이었다.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상승, 나선..."




콜록콜록.


헛숨을 들이킨 얀붕이가 기침을 했다.





시간을 되돌린다거나, 수백년 전의 존재가 지금껏 살아있다거나.


얀붕이는 이미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와 맞선다는 전제하에 행동했다.





하지만 이토록 거대한 스케일을 가진 광경을 직접 목도하고 나니,


아무리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해봐야 그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평정 따위는 이미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한 시도조차, 눈 앞에 펼쳐진 힘 앞에서는 한 줌의 모래알에 지나지 않을 터였으니.





"이제 알았겠지. 쓸 데 없는 저항은 그만 두거라."




산신이 낮게 읊조렸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의 목소리에,


나선의 꼭대기에서 아래로 시선을 돌리던 얀붕이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시간이 늦어 기온이 떨어진 것과 맞물려


높아진 고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약기운을 몰아내는 데에 일조한 듯했지만.


주변이 이래서야,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 자명했다.




하다 못해, 몸이라도 정상이었다면.




"큭..."




겨우 몸을 일으켜세운 얀붕이가 미처 떨쳐내지 못한 약기운과 아찔한 고도감에 몸을 휘청거렸다.




"앉거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마."




방금 막 얀붕이가 몸을 일으킨 것이 무색하게, 산신이 턱짓으로 땅을 가리켰다.




얀붕이가 잠시 망설였다.


도망이라도 시도해보려면, 처음부터 서있는 편이 확률이 높을 터였다.




"..."




하지만, 그러한 의도를 꿰고 있다는 듯 매섭게 이쪽을 주시하는 산신의 눈동자에


얀붕이는 일단 잠자코 자리에 앉기로 했다.




도망칠 때 치더라도, 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한 얀붕이의 행동에 썩 만족한 듯, 산신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이야기부터 할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얀붕이를 마주보고 앉은 산신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선, 네놈 없이 못 사는 그 꼬마. 기차를 타고 다시 마을로 돌아왔더구나."




그 말에, 얀붕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패한 도박수.


산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얀순이가 얀붕이의 예상보다 빨리 행동에 나선 셈이었다.




운이 좋다면 얀순이가 마을 바깥에서 기다려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얀붕이의 예상이 깨진 순간이었다.




얀붕이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탓에 손이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새하얘졌다.




"하여,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 아이가 너에게 그토록 의지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하고."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네놈이 그 아이에게 가족같은 존재가 아닐까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산신이 가느다란 검지손가락을 펴보이며 말했다.




"하여, 그 아이에게 진짜 가족을 주었다."




달빛 아래에서, 산신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기차역에 안개를 깔아두고, 약간의 수작을 부렸지.


안개 속에서 편안한 꿈을 꿀 수 있도록 말이야."




"꿈...? 안개...?"




자신이 약에 취해 헛것을 봤던 것처럼, 얀순이에게도 약을 썼다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한 얀붕이가 멈칫했다.




"외지인인 네놈에게는 직접 손을 댈 수 없었으니 약을 썼지만, 그 아이에게는 내 권능을 썼지."




얀붕이의 의도를 읽은 산신이 선심을 쓰듯 얀순이를 막아세운 함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내려보는 듯한 그 시선이, 얀붕이에게는 퍽 언짢게 느껴졌다.




"그 아이의 친부모를, 그 아이와 함께 꿈에 가두었다."




얀순이의 부모님이라니.


처음 듣는 정보에 머리가 복잡해진 얀붕이가 세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경써야 할 점이 한두개가 아니었다.




"친부모라니. 얀순이는 분명,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그랬지. 쓰임새를 다한 마을의 부품 사이에서, 내가 다시 찾아내기 전까지는 말이야."




산신이 얀붕이의 말을 끊고서 담담하게 읊조렸다.




"마을의 주민들 중에는, 적게나마 마을의 이변을 눈치챈 자들이 있었다."




"...설마."




"그래. 네가 사랑하는 소녀의 친부모도 그러했다.


마을에 놔두면 위험요인이 될테니,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했었지. 그 아이의 친부모인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최적의 수를 두었다는 듯, 자랑스레 만행을 실토하는 산신의 꼴에, 얀붕이의 이가 갈렸다.




"네놈은 내게 감사해야 하겠구나.


네놈이 파고들 수 있었던 소녀의 빈틈.


그 결핍을 만들어준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인 셈이니."




"..."




무엇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인가.


얀순이의 결핍을 채워준 것이 자신이고, 그 결핍을 만들어낸 것이 산신이니, 이에 감사해야 한다는 말인가.




터무니 없는 궤변에, 얀붕이의 눈빛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적대적인 감정이 새어나왔다.




"이제야 조금은 사내다운 눈이 되었구나.


무얼, 이제는 부질없는 일이다."




분을 삭이는 얀붕이를 앞에 두고, 산신이 조롱하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아이는 제 부모와 함께 즐거운 꿈속에서 이 마을과 함께 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어떤 죄를 지어도 긍정해주고,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친부모와 함께 말이다."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한 산신의 말의 의도가, 얀붕이에게는 마치


너는 더 이상 얀순이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얀붕이가 고개를 돌려 까마득한 아래를 바라보았다.


불행히도, 얀순이가 있을 역까지는 시선이 닿지 않았다.




쯧. 고깝다는 듯 혀를 찬 얀붕이가 다시금 나선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나한테 받아낼 게 있으니까 살려둔 거 아니야?"




"글쎄."




산신이 알쏭달쏭한 태도를 견지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한번 더 네놈의 수에 놀아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얻어맞았어."




"..."




"네놈은, 그래- 인정하마. 간계에는 도가 텄어.


또 어떤 신묘한 수를 써서, 내 계획에 흠결을 내고자 할 지 모를 일이지."




산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얀붕이를 바라보았다.




"하여, 이번에는 나쁜 소식이다."





꿀꺽-


얀붕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


좋은 소식이라는 말에도 바가지를 썼는데, 나쁜 소식은-





얀붕이가 온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마을 정중앙에서 고고히 융기하는 나선의 지맥.


그 꼭대기에서, 마침내 산신이 선고했다.






"너는, 여기에서 죽어줘야겠다."





탓-





산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얀붕이가 뒤를 돌아서 내달리기 시작했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나선형의 내리막을 따라 도망치며,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조차 무시했다.




"하아... 하아..."




얀붕이는 금방이라도 폐가 터질 것처럼 젖먹던 힘을 다해 달리면서도, 다음 수를 강구했다.




'기왕이면, 얀순이네 할머니도 좀 내보내줘.'




자신은 정신을 잃기 전에, 얀순이네 할머니를 살려달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신에게 소원을 빈 꼴이었다.




약기운에 취해서 삶에 미련을 버린 나머지, 뒤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 쪽, 나 못 죽이잖아. 동기가 없으니까.'




이는 자신이 처음 산신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이다.


그 때는 산신이 무고한 자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이 뒷받침되었기에, 다소 강하게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원을 빌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권선징악, 등가교환.


그만그만한 옛날 이야기들이란, 대개 그런 법이었으니까.


신에게 소원을 빌었다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




그리고, 지금의 이야기는 필시 막바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막바지에 아무리 전개를 바꿔보려 해도, 이야기의 큰 흐름까지는 바꿀 수 없다.


이제 와서 일발의 역전을 노릴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을에서 도망친 꼬마는 다시 마을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정도의 이야기로 끝맺지 않으면 안되었다. 




얀붕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늘처럼 칼칼해진 숨을 삼켰다. 




"흐악... 하아악..."




한참이나 전력으로 내달린 얀붕이의 목구멍에서는 이미 피 맛이 나다 못해, 다 쉬어가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허억... 그래도..."




고도는 착실히 낮아지고 있다.


이제 다음 수를 생각해야-




미약한 기대감이 얀붕이의 가슴 한 구석에서 몸집을 부풀리기 시작한 그 때.





핏-





촤아악-





커다란 날벌레가 귀 근처를 알짱댈 때처럼 불쾌한 파공성이


내리막을 내달리던 얀붕이를 흙바닥에 미끄러뜨리듯 멈춰세웠다.





"그만, 거기까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얀붕이가 멈추며 일으킨 흙먼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산신이 얀붕이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며 경고했다.





"헉... 허억..."





얀붕이가 숨을 고르며 뺨을 쓸어내렸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뜨뜻한 피가 묻어나왔다.




산신이 쏘아보낸 자갈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이로써 명백해졌다.


지금의 산신은 언제든지 자신을 해칠 수 있었다.




거기에 먼저 자리를 박차고 도망간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 맞이한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산신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을 공산이 컸다.




악취미였다.





"후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한 얀붕이가, 길게 날숨을 내뱉었다.




"그만하면 되었다. 저항 없이 가거라."




"하."




우스운 상황이다.




한 때는 죽음을 각오했으면서, 운 좋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제서야 목숨이 아까워진 자신도.


얌전히 목숨을 내려놓으라고 재촉하는 저 산신도.




"하하하..."




얀붕이가 실없이 웃었다.




문득, 일전에 아버지에게 오기로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잘 마무리 짓겠다고 했었던가.


제 한 몸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얀순이부터 챙기려 했던가.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했냐면, 그렇지도 않았던 주제에.





"실성했는가. 아니면, 그러한 시늉인가."





"-으하하, 하하핫, 아... 진짜..."





눈가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자조하던 얀붕이가 꽉 쥔 주먹을 풀었다.





"죽기 싫다. 정말. 이제 와서."





얀붕이가 하늘로 손을 뻗으며 중얼댔다.


여름의 시골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별을, 그 손으로 잡으려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별을 잡을 수는 없었다.


얀붕이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게 조금이라도 더 폼이 살 것 같아서.


만화나 소설에서 이런 상황에 처한 인물들이 으레 그렇게 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러면서도, 죽음을 면전에 둔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한 유치함이 역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영특하다는 우월감.


자신은 누군가를 구해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오만.




사랑하는 여자아이 하나도 제대로 구해내질 못해서, 결국에는 제 발로 마을에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제 목숨이 아깝다.





하늘로 내뻗어졌던 얀붕이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만 할까."





그렇게 말한 얀붕이가, 짧은 생을 되짚었다.





먼저 스쳐지나가는 것은 가족들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끔찍이도 아껴주던 엄마.


서툴지만, 자신을 믿어주었던 아버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손자 행세를 하는 꼬맹이를 먹여주고 재워주신 할머니.





그들 중 누구 하나에게라도, 제대로 되어먹은 아들이자 손자였던 적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


삶에서 가장 짧고 소중한 시간에 얀붕이가 떠올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얀순이였다.





돼먹지 못한 주제에 허세에 찌들어서


인생을 바꿔줄 사람인 양 굴었던 못난 동네 오빠지만



그럼에도 기대어주었던,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동생.





사랑하는 얀순이.




나 없이도 얀순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고고도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얀붕이의 뺨을 간질였다.





터벅터벅.


산신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던 얀붕이를 조금씩 현실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얀붕이의 지척에 멈춰선 산신의 손이 서서히 허공으로 들리고, 얀붕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여름의 시골에 쓰여진 이야기, 그 마지막 페이지.


모든 것을 내려놓은 열두 살 소년의 얼굴 위로 차가운 달빛이 떨어졌다.





이와 동시에, 미묘하게 기류가 바뀌었다.







---







"산신을 죽였다고?!"




얀순이에게 열차표를 건네며, 꼭 자신이 없을 때 풀어보라고 당부하던 얀붕이가 그만 평정을 잃고 소리쳤다.




"응, 근데... 칼로 몇 번을 찔렀는데도 안 죽더라구. 너무 튼튼한 거 있지..."




얀순이가 양 쪽 검지손가락을 마주대고 꼼지락대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그래도! 그 아줌마, 나한테 손도 못 댔다?


오빠가 죽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볼게!"




마치 제 부모에게 다음 시험은 더 잘 보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작은 주먹을 꼭 쥐고 당차게 포부를 밝히는 얀순이의 태도에 얀붕이는 제 미간을 짓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 아줌마는, 그걸 당하고만 있고?"




"빨리 움직이니깐, 되던데..."




얀붕이의 질문에 얀순이가 다시금 쭈그러들었다.




"위험하잖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니, 그보다 왜 따라온 거야?"




기가 찬 얀붕이가 물었다.




"그냥, 그냐앙... 처음에는 보고만 있을려고 했는데,


그 아줌마가 자꾸 오빠한테 끼를 부리니까..."




요약하자면, 질투가 났다는 말이었다.




늘 여자 조심하라던 어머니의 말이 얀붕이에게 처음으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긴 거 맞아?"




얀붕이의 질문에 급격히 화색이 돈 얀순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후우.


얀순이가 산신을 압도하는 광경은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얀순이가 산신과 만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얀붕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기왕 싸웠으면 이겨야지."




얀붕이가 체념하듯 내뱉은 말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얀순이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응. 싸울거면... 이기는 게 좋겠지."




얀붕이가 도돌이표처럼 제 말을 따라하는 얀순이의 볼을 잡아늘렸다.





---







기류가 바뀌었다.


기분 좋게 불어오던 산들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졌을 뿐인, 작고 미묘한 변화.




하지만, 얀붕이에게는 한없이 익숙한 느낌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얀순이와 함께 있을 때에 종종 느꼈던, 익숙한 감각.




애태우듯 섬세하고 애절하게 구속되어가는 느낌.




인지의 틈새, 반음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음계(音階)의 어딘가.


나선형의 오르막을 박찬 무채색의 그림자가 찰나를 가르고 산신의 지척에 나타났다.





"뭣-"





그리고, 산신이 비로소 그 엇박을 인지하는 것과 동시에.


직선으로 내뻗어오던 그림자는 그 힘을 그대로 원심력으로 치환하여, 산신의 명치에 팔꿈치를 돌려꽂았다.





"커헉-"





대비하지 못한 충격에 날아가버린 산신은, 그대로 까마득한 나선의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에, 지척에서 느껴지던 존재의 기척이 바뀐 것을 눈치챈 얀붕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얀순아."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앞에 서있는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홀린 듯, 얀순이의 시선이 얀붕이에게로 향했다.





오싹-





살기와 분노로 점철된, 한 번도 본 적 없는 얀순이의 시선에 얀붕이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세로 동공.


얀붕이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보았던, 그 동공이었다.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동자.





"오빠."





"얀순아, 왜 왔어. 오빠가, 오빠가 간다니까."





"거짓말."





천천히 얀붕이에게 다가오던 얀순이가, 얀붕이의 품에 제 얼굴을 가져다대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얀붕이의 심장이 세차게 맥동했다.


죽음을 각오했을 때보다도 더 빠르게.





"오빠. 다쳤네."




얀붕이가 헉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저 아줌마가 그랬어?"




낮고 평온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목소리.


날을 숨긴 칼처럼 베일 것 같은 얀순이의 분위기에, 얀붕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나지막하게 대답한 얀순이가 손을 들어서 얀붕이의 얼굴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쓸었다.




"저기, 얀순아... 미안해-"




얀붕이가 얀순이에게 사과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지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자, 얀붕이의 품에 안긴 얀순이의 정수리가 살짝 떨렸다.





"오빠가, 위험한 곳에 혼자 남아서 미안해.


얀순이를 지켜주고 싶어서 그랬어."





"응."





얀순이의 볼이 씰룩였다.





"그래도, 이 방법밖에 없었어. 얀순이를 지키고 싶어서-"




"안돼."




얀순이가 얀붕이의 품에서 입질을 했다.





오빠가 다친 사실도, 만나러 오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않은 사실도 전부 불만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 그랬다는 제 오빠의 말 한마디에, 얀순이의 기분은 봄날 눈 녹듯이 풀려버리고 있었다.





"어쨌든 안된단 말이야아... 오빠가 다치면..."




그럼에도, 얀순이는 해결을 봐야 했다.


제 오빠는 아직 마을에 남은 이유를 해결하지 못한 듯했고, 자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특히, 제 오빠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핏자국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그 원흉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아주, 년놈들이 쌍으로...!"




그 때, 얀붕이와 얀순이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피칠갑을 하고 나타난 산신이 분노에 차서 소리쳤다.




"용서하지 않는다... 반드시, 반드시!!!"




"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작은 소리를 낸 얀순이가, 드디어 제 오빠의 품에서 떨어졌다.




"네가 그랬다고 했지."




얀순이가 산신을 향해 몸을 돌리고 낮게 읊조렸다.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느껴지는 살의에, 산신이 잠깐 멈칫거렸다.




이미 두 번이나 얀순이에게 패배한 기억이 산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이... 이..."




움직여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저 부품을 단죄해야 한다.


서방과의 재회를 방해하는 저 소녀의 목을 잘라서, 마을과 함께 제물로 바쳐야 한다.





헌데.


그럴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그럴 방도가 없다.





비현실의 현신(現身)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산신이,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고 있었다.





분노에 몸을 맡기고 기세좋게 나타났을 때와는 다르게, 산신이 조금씩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번 회차는 버리고 한번 더 회귀를-'




"무슨 생각해?"




지근거리에서 들려온 얀순이의 목소리에 산신이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렀다.




"으아!!"




신력(神力)에 의지하지 않은 물리력의 행사.




발악에 가까운 그 공격을 가뿐히 피한 얀순이가, 이번에는 산신의 뒤에서 나타났다.




"오빠를 해칠려고 했잖아. 너도 당해봐야지."




"!!!"




소스라치게 놀란 산신이 바닥에 넘어졌다.





"왜... 나에게 왜 이러는 것이야..."





땅바닥에 몸을 붙인 산신이 원초적인 공포에 몸을 떨었다.





"이상하다."




콱-





"죽지도 않는데, 왜 무서워하는 거야?"





산신의 머리를 짓밟은 얀순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아!"




잠깐을 고민하던 얀순이가, 이내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외쳤다.





"아프기는 하구나! 맞아맞아! 튼튼해도, 아플 수는 있구나아-!"





저 멀리에서 즐거운 듯 웃음짓는 얀순이를 보고, 얀붕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순간에 전세가 뒤바뀌었다.




얀순이는, 그야말로 산신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해온 노력이 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산신은 죽지 않는다.




일전에 얀순이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방금의 추락에서 살아돌아온 점이 이를 증명했다.




죽일 방도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끄아아악!




산신의 비명이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얀순이가 산신의 발목을 돌려버리고 있었다.





얀순이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얀붕이의 얼굴에 드리운 초조함의 그림자는 좀체 옅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머리를 굴리며 혼잣말을 내뱉던 얀붕이가 휴대폰 시계를 바라보았다.





PM 11:50.





자정까지 10분.


10분 동안, 얀순이와 함께 마을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얀붕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막차도 없고, 막차가 있다고 한들 산신이 이를 좌시하고 있지도 않을 터였다.





쿠구구구-





나선형으로 융기하고 있는 땅은, 아까보다 명백히 고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얀순이도 자신도 기억을 잃은 채로 여름의 초입으로 돌아가고 말 터였다.





"으아아아!!!"





그 때. 저 멀리에서 바닥을 기던 산신이 얀붕이를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당하고만 있을 바에야, 공격이 먹힐 상대에게 한 방이라도 먹이겠다는 궁여지책.





그러나.




"...미쳤어?"




이러한 산신의 시도를 미연에 차단하듯, 얀순이가 얀붕이를 겨누던 산신의 손가락을 밟아버렸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친 거야?"




"으... 으윽."





산신에게 고통을 주던 얀순이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산신을 마구 짓밟았다.


산신은 이제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상승나선...


나선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는 구조... 상승은..."





얀붕이가 혼잣말을 중얼댔다.





방법이 있을 터였다.


어머니가 이 땅의 구조를 파악한 것처럼, 미리 그 구조를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할 수 있다.




할수 있어야 했다.





"용쓰지 말고 죽어. 얼른 죽어. 얼른."





얀순이가 산신의 코를 밟아 으깨며 말했다.


산신은 이제 저항도 하고 있지 않았다.





"잠깐, 용쓰지 말고...?"





그 때.


얀순이의 말을 듣고 있던 얀붕이의 머리에, 한줄기 벼락이 스쳤다.





얀붕이가 급하게 휴대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PM 11:55.





자정까지 5분 남짓.





얀붕이가 급하게 나선형의 땅을 달려올라가기 시작했다.





"얀순아!!! 여기서 그 아줌마 잘 좀 막고 있어!!! 부탁해!!!"





"!"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얀붕이의 외침에, 피떡이 되어가던 산신의 몸이 움찔거렸다.





"...안...돼...!"





산신이 쉬어빠진 목소리를 내며 지금까지 중 가장 격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작된 산신의 몸부림에 얀순이도 일순 멈칫했으나.




"어디가, 나랑 놀아야지."




곧 그런 산신을 밟아 땅에 고정시켰다.





얀붕이는 그런 얀순이와 산신을 뒤로하고, 내려왔던 오르막을 다시 내달렸다.





"허억... 나선이... 아니었어..."





왜 진즉에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어머니와 아버지가 남겨준 단서에 매몰되어,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용, 용이었던 거야..."





이무기, 강철이, 혹은 용.


옛날 이야기에 곧잘 등장하는 미신.




정확한 종은 몰라도, 비슷한 종류라면.




약점을 파악한 얀붕이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달리는 동안 제 추측이 맞기만을 바랐다.





"허억... 허억... 내려오지 말걸..."





드디어 나선의 상층부에 도달한 얀붕이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며 후회했다.


최상단의 경사가, 내려오기 전보다 명백히 심해져있었다.





나선의 최상단, 용이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 탓에 용의 머리 부분의 경사가 이미 90도에 육박한 상황.





자정까지는 체감상 2분이나 남았을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얀붕이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용의 턱 부근, 흔히 용의 약점으로 거론되는 역린(逆鱗)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나선의 최상단 언저리 가시덤불 사이, 다홍색으로 피어난 꽃 한송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형태이기에,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다.




무슨 꽃이더라.


얀순이가 알려주었던 꽃인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망설일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얀붕이가 용의 머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백 미터를 족히 넘는 높이에서 추락할 만한 아찔한 상황.





"끄아악..."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멈추지만 않는다면 꽃에 닿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얀붕이가 안간힘을 썼다.





"제... 바아알...!!"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용의 머리를 오르던 얀붕이의 손이 마침내 가시덤불 사이에 피어난 다홍색 꽃에 닿았다.





그 때.





"네노오옴-!!!"





얀붕이의 발치 부근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른 액체가 순식간에 산신의 형태로 변해서 얀붕이의 발목에 매달렸다.





"끄아아악!!!"





얀붕이가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놓으면 죽는다.


산신은 다시 재생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틀림없이 개죽음일 터였다.





"놔...! 놔...!"





얀붕이가 나머지 한 쪽 발로 산신의 얼굴을 걷어찼다.





시간.


얼마나 남았지.





이미 만신창이가 된 얀붕이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오빠아아아-!!!"





그 때, 저 밑에서부터 숨이 터져라 뛰어온 얀순이가 뒤늦게 이쪽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오빠!!! 기다려!!! 내가, 지금-!!!"





"오지 마!!!"





얀붕이가 한 쪽 팔로 용의 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로 소리쳤다.





딱!




그러자 산신은 산신대로 급했는지, 얀붕이의 발목에 매달린 채로 손가락을 튕겼다.


이에, 저 아래에서부터 쏘아진 자갈이 얀붕이의 어깨를 관통했다.





"오빠아아아!!!"





얀순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하아... 하아..."





얀붕이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미물 주제에, 신에게 이길 수 있을 성 싶더냐아-!!!"





산신이 얀붕이의 발목에 깊숙이 손톱을 박아넣으며 외쳤다.





시간.


시간.


시간.





안개처럼 흐릿한 의식 속에서, 얀붕이의 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스으읍...





"얀순아아아아!!!!!"





얀붕이가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결국 이렇게 되나.


볼썽사납게 얀순이한테 다 맡겨놓고, 너무 멋있는 부분만 먹으려고 했나.





초점이 맞지 않기 시작한 눈으로 얀순이를 바라보며, 얀붕이가 자조했다.





이런 거, 만화에 나올 때마다 존나 미련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랑해-"





얀순이에게 마음을 전한 얀붕이가 나머지 손을 들어서 다홍색의 꽃을 꺾어버리고, 까마득한 높이에서 그대로 추락했다.






"안돼애애!!!"


"안돼!!!"





산신과 얀순이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






아.


진짜 끝까지 비겁하구나.





멀어지는 얀순이를 바라보는 얀붕이의 머리 속이 자기 혐오로 점철되었다.





고백을 하고 죽어버리면, 대답도 못 듣고.


혼자 남을 얀순이는 어떻게 하라고.


또 도망치는구나.





얀붕이와 함께 추락하던 산신이 얀붕이의 발목에서 팔을 놓았다.


연신 눈을 굴리는 것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는 듯 보였다.





역린을 꺾기만 해선 안 죽나.


그래도.





산신과 함께 추락하는 도중, 얀붕이가 공중에서 자세를 바꾸어서 산신의 위를 점한 상태로 양 팔을 붙잡았다.





"에잇, 놓아라! 이익-!"





"너는 나랑 가자."





동귀어진을 각오한 얀붕이의 말에, 산신의 낯빛이 급격히 파래졌다.










쿵-









AM 00:00.





거짓된 마을의 마지막 밤.


유리처럼 비산하는 나선의 한가운데에서





소년의 여름은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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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후.





"저기..."




한 소녀가 책상에 엎드린 얀순이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 밥 안 먹어...? 점심시간인데..."




"응."




얀순이가 엎드린 채로 대답했다.




"응, 일단 나는 불렀어..."




그렇게 모든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떠나고 나서야, 얀순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필 그 날의 꿈이라니.


짜증이 치밀었다.




여름의 낮은 길어서 싫어한다.




그 망할 시골에서 운 좋게 살아나와, 아버님의 도움을 받아 도시로 올라왔지만.


도시는 오빠가 말한 곳처럼 훌륭한 곳이 아니었다.




학교에는 멍청이들뿐이었고, 다른 곳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도시든 시골이든, 오빠가 옆에 있기에 좋은 것이었다.





질릴대로 질린 표정을 한 얀순이가 교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가는 오빠랑 진짜 돌고래 보러 가고 싶다.'




일전에 오빠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인지, 발 가는대로 향했기 때문인지.


말도 없이 조퇴한 얀순이의 발걸음이 어느덧 집 근처 수족관 앞에 멈춰있었다.




"무슨 수족관이람."




고개를 저은 얀순이가 그대로 수족관을 지나쳤다.




어차피, 오빠와 함께 오려고 했던 곳이다.




오빠가 없다면 돌고래건 흰수염고래건, 아무 감흥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얀순이의 발걸음이, 조금 쓸쓸해보였다.






---








"다녀왔습니다."




얀순이가 을씨년스러운 열 두평 아파트의 현관에 들어섰다.




대답은 없었다.


할머니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그 때부터 집에 돌아와도 자신을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다녀왔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면 빈 방 어딘가에서 오빠가 튀어나오지 않을까하는 망상 때문이었다.




오빠가 없는 풍경은, 늘 잿빛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








"그래서 왔다고?"




"응."




뭐가 그리 당당한지.


제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휘적거리는 얀순이를 바라보며, 얀붕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빠 공부해야 돼."




"어? 나랑 같이 하면 되겠다!"




능청을 떨며 일어난 얀순이가 얀붕이의 목에 팔을 감았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얀붕이가 안경을 고쳐썼다.


그러자, 얀순이가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고 멈춰섰다.




"오빠, 자꾸 그러면 나 못 참아."




얀순이가 얀붕이의 귀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아니, 또 왜!"




이에, 얀붕이가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방금, 나한테 끼부린거 맞지? 맞지?"




"내가 뭘 했다고!"




얀붕이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안경 고쳐썼잖아. 그거 나 보라고 한 거 아냐?"




"미쳤지... 미쳤어..."




얀붕이가 얀순이를 무시하고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얀순이는 잠시 볼을 부풀리더니, 이내 무엇인가 생각해낸 듯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오빠."





"..."





"나, 임신했다?"




덜컹-




얀붕이가 거칠게 의자를 끌며 일어났다.




"아니야... 거짓말 치지 마... 콘돔 끼고 했는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 얀붕이의 표정은, 그 여름에 생을 마감하기 직전 산신의 표정과 거의 흡사했다.





"그거, 내가 가져온 콘돔이잖아."




얀순이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제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열 여덟 살의 소년에게는 충분히 자극적인 광경일진대, 그럼에도 얀붕이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푸르죽죽해져갔다.





"너, 너, 콘돔 낀대서 이 방 건너오는 거 허락해 준건데-"





얀붕이가 삿대질을 하며 옆방을 가리켰다.





"구멍 안 뚫겠다고는 안 했잖아."





"아니야, 거짓말이지...? 거짓말, 거짓말 치지 말라니까..."





얀붕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공부고 나발이고 간에 다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아핫! 맞아, 거짓말이야-"





와하하-!


그렇게 말한 얀순이가, 얀붕이의 침대에 발라당 누워서 폭소하기 시작했다.





"이, 얘가- 장난을 칠 게 있고, 안 칠 게 따로 있지."





순식간에 10년은 폭삭 늙어버린 얀붕이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아하... 그래도, 이제 나랑 놀아줄 생각이 좀 들었어?"





너무 웃어서인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얀순이가 얀붕이에게 달라붙었다.





"하아..."





이렇게까지 하는 거보니 뭔 일이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한 얀붕이가 한숨을 쉬며 책을 덮어버리고, 얀순이를 따라 방에서 나갔다.






---






"...그 날 꿈을 꿨다고?"




얀붕이가 습관처럼 안경을 고쳐쓰다가, 잠깐 흠칫했다.




다행히도, 얀순이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오빠랑 좀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




"안 그래도 주말에는 하루 종일 같이 있는데... 아니다."




실언이라고 생각했는지, 곧 말을 주워담은 얀붕이가 얀순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니나 다를까, 품에 안긴 얀순이의 몸이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시골에서 운 좋게 살아나온 이후로, 얀붕이를 향한 얀순이의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그 전에도 심했던 얀순이의 집착 증세가, 이제는 거의 병적인 수준이 되고 만 것이다.


오죽하면 얀붕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로 6개월 동안, 얀순이는 얀붕이가 시야에 없으면 생활을 못 할 정도였다.





한 번은 치료를 위한 강경 수단을 쓴답시고 얀붕이가 3시간을 떨어져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얀순이는 3시간 내내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다가, 결국에는 실신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꼬박 6년을 적응시킨 결과가 이것이었다.


얀붕이의 목소리나 사진 없이 열 시간, 실물 얀붕이 없이는 열두 시간.





돌아가신 얀붕이 어머니의 골든 타임이 스물 네 시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중증이었다.





그나마 이것도 많이 발전한 것이라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얀붕이가 용의 머리에서 추락하던 그 때의 광경은, 지금도 가끔씩 얀순이에게 정신적 부담을 가하고 있었으니까.





얀붕이가 조용히 얀순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그 여름의 마지막 순간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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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랑 가자."





이번에야말로 산신을 끝장낼 의도로,


결연한 각오를 입에 담은 얀붕이가 산신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쿵-





추락은 길지 않았다.





헌데 어찌 된 영문인지, 꼼짝없이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얀붕이는


다소 어정쩡한 자세로 바닥에 엎드려서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의 마지막, 산신이 쏜 자갈에 관통당한 어깨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죽지는 않은 듯했다.





"하, 하..."





주변을 둘러본 얀붕이가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까지 있던 마을의 풍경이 아니라, 버려진 짚단으로 가득한 평야였다.





"깬 거 맞지? 이번엔 진짜 끝났지?"





플래그가 될 여지가 농후한 위험한 발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긴장이 풀린 얀붕이는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발라당.


차가운 흙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얀붕이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얀붕이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얀순이.


모두가 나선형의 저주 바깥으로 도망치는 방식으로, 일직선으로 전진하는 방식을 택했다.




직선은 평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신 역시 고고도에서 추락하는 동안 위아래 일직선으로 이동한 셈이니, 마을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마을과 한 몸인 산신만 추락하고 만 셈이었다.





"오빠, 어디 있어? 오빠..."





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얀순이가 자신을 애타게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 기..."





어깨가 아프면 말도 잘 안 나오는 건가.


얀붕이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자신의 무사를 알리고는, 기력을 다하고 의식을 잃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선에 얀붕이가 마지막으로 담은 것은


자신을 안아들고 서럽게 오열하는 얀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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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었네."





소파에서 얀순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6년 전을 회상하던 얀붕이가 서서히 손을 멈추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얼마나 예뻐."





그렇게 얀순이를 소파에 눕힌 얀붕이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턱-





얀순이가 얀붕이의 손목을 강하게 쥐었다.





"어디가?"





"아니, 자는 줄 알고..."





"오늘은 나랑 놀기로 했잖아. 근데 어디 가냐구."





얀순이의 서슬퍼런 시선에, 얀붕이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진짜 안 되겠어."





얀순이가 얀붕이의 팔을 잡아끌어 소파에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아니, 나 진짜 억울해. 자는 줄 알았단 말이야."





"오빠, 방금 나더러 가만히만 있으면 예쁘다고 했잖아."





아뿔싸.


얀붕이가 1분 전의 만행을 후회했다.





"하아... 하아... 그거, 끼 부린거 맞지? 나 유혹한 거 맞지?"





얀순이가 달뜬 숨을 내뱉으며 얇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어, 어어."





"다 오빠 잘못이야... 오빠가, 오빠가 유혹해서..."





얀순이가 얀붕이의 몸에 제 몸을 한껏 밀착시키고는,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이미 말이 통할 상태가 아니었기에, 얀붕이는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안전한 날이니까 그냥 해도 괜찮지? 괜찮지?"





"아니. 그래도-"





"오늘 나랑 놀기로 했잖아... 하읍"





얀순이가 얀붕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한 순간에 먹잇감이 된 얀붕이는 눈을 감으며,


오늘이 안전한 날이라는 얀순이의 말이 진실이기만을 바랐다.







삐걱- 삐걱-





소파가 춤추는 소리가 아파트 방안을 채웠다.





그렇게, 뜨거운 여름의 어느 날은 얀붕이와 얀순이에게 있어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되고 말았다.



6년 전. 다홍색의 능소화를 꺾어낸 소년이, 비로소 사랑을 쟁취했던 날처럼.



저주에 삼켜진 마을에서 소녀와 소년의 눈이 맞았던 그 날처럼.






맴- 맴- 맴-



스피오- 휘휘오- 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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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아이를 재우던 얀붕이가 설거지중인 얀순이에게 말을 붙였다.




배가 부풀어있는 것으로 보아, 얀순이는 벌써 둘째를 가진 모양이었다.




"그 날, 산신이 당신 꿈에서 친부모님 만나게 해줬다고 그랬는데.


어떻게 설득했어?"




"응?"




설거지를 하던 얀순이의 손이 멈추었다.




"나 구하러 왔었잖아. 부모님 나오는 꿈에서 어떻게 깼나 싶어서."




탁탁 물기를 털고 얀붕이에게 다가간 얀순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며, 검지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비밀."




"허,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네."




굳이 캐묻고 들 생각도 없었기에, 얀붕이는 마저 아이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 때.


무심코 눈을 뜬 얀붕이의 첫째 아이가 돌연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어어,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뚝- 뚝."




문득, 얀붕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가 갑자기 왜 울었을까.




아이들이야 그냥 우는 일이 허다하다지만,


꼭 무언가를 보고 운 것 같아서. 자신 너머에 있던 무언가를 보고 운 것 같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도 꽤나 이상하지 않은가.


제 뒤에는, 친부모를 어떻게 설득했냐는 말을 들은 아내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얀붕이는 이내 고개를 흩어 망상을 떨쳐버렸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골에서 만난 소꿉친구가 조금 이상할 뿐인, 그 뿐인 이야기라고.




이상한 이야기야, 꽤 빈번히 들리는 법 아니겠는가 하고.





그 날의 기억을 대수롭지 않게 덮어두었다.







"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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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