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arca.live/b/yandere/84341483?p=1


※ 본 게시글은 사촌간의 이성적 묘사를 담고 있음, 보기 꺼려진다면 즉시 뒤로 버튼을 눌러주길

 


사람과는 인연이 적은 우리 집에 오랜만에 정겨운 벨소리가 울렸다.  


어릴 적부터 허물없이 지내곤 했던 사촌 누나가 차를 직접 우리 집앞까지 끌고 오면서까지 멀리서 찾아온 것이다. 그래도 누나라기엔 나이 차가 제법 많이 나서 일방적으로 누나가 내게 져 주거나 양보해주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어른이 되고부터 만나는 횟수는 많이 줄었지만, 미리 큰부모님 연락을 받았었다. 오랜만에 그리운 재회였다.


현관으로 마중나간 나는 환하게 이를 드러내며 둘을 맞이했다.


"...그렇게 되서 나도 남편도 일 문제로 멀리 떠나야 하거든. 염치없는 거 아는데 꼭 좀 맡아줄 수 없을까? 이제는 부탁할 사람이 너 하나뿐이라..."


두 손 모아 간절하게 부탁을 해오는 사촌 누나의 허리맡에는 언뜻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여자애가 서 있었다.


친하게 지내온 사촌과의 관계를 계산적으로 여길 정도로 나는 속좁은 사람은 아니었다. 보란 듯이 가슴을 쭉 펴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글쎄, 괜찮다니까! 맡겨만 둬! 사촌끼리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승낙하자 누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소중한 딸아이를 두고 먼 벽지에 업무 차 떠나는 괴로움을 회사원인 나로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치 못할 사정임에도 많은 돈을 벌어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서니 좋은 부모는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보다 음, 미야 짱이 나를 싫어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는데..."


나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 다행히도 날 경계하거나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같이 살면서 서로 오만정이 다 떨어진 사례를 최근 들어 주변인으로부터 풍문으로 많이 들었기에 마냥 낙관할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걱정하지 마. 미야 짱은 착한 아이인걸. 분명 네 말도 잘 들을 거야, 그치?"


벌써 떠나는 차림의 사촌 누나가 정수리를 쓰다듬어주자 미야 짱은 기분이 좋은 듯 살짝 푸근하게 웃었다. 묘하게 강아지를 닮은 인상의 소녀였다.


"...네, 괜찮아요. 전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말수는 적었지만, 같이 살다 보면 그다지 문제가 될 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모르는 아이의 착하고 순수한 다른 일면을 알아가기 위한 기회라고도 볼 수 있었다. 새삼 들뜬 기분이 차올랐고, 나는 다시 한 번 당분간이지만 새로운 가족이 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핫, 역시 누나랑 쏙 빼닮았어. 그럼 지금부터 잘 지내보자, 미야 짱."


어린 강아지가 사람으로 변하면 이런 느낌일까. 미야 짱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앞으로 안 좋은 버릇이 될 것 같다는 또 다른 걱정이 생기고 말았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섣부른 기대감에 여자애 특유의 민감한 머리카락은 어수선해지지 않도록 최대한 천천히 쓰다듬었다.


"...말로요."


그러자 미야 짱이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대답했다.


"...응?"


"저야말로, 라고 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테츠야 아저씨..."


다행히도 손으로 뿌리치거나 하지 않는 걸 보면 쓰다듬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다. ...응? 오히려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일단 누나가 챙겨줬겠지만, 기특하게 어깨에 크로스백을 걸쳐 멘 아이. 먼저 급하게 떠나가는 누나는 마지막까지 내게 감사 인사를 했지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건 내 쪽이었다. 그래도 말수가 조금 적은 것 같으니 요즘 같은 흉흉한 세상에 이상한 일을 겪지 않도록 나는 결의를 다졌다.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자고.


'...일시적이지만, 이제는 내 가족이야! 헤어질 때 안 좋게 끝나면 모처럼 돌아온 누나를 볼 면목이 없잖아! 힘내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 결심은 과거에 잠깐 스쳐지나갔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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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가 출장을 간 지 한 달 무렵, 회사 일을 모두 끝내고 퇴근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의자에 앉아있으니 온몸이 쑤셨다.


"...테츠야! 이제 왔구나? 어서 와!"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의 현관문을 열기도 전에 집에서 먼저 튀어나온 건 미야 짱이었다. 이렇듯 집에 발을 들이기도 전엔 대체 어떻게 타이밍을 재고 있는지 하루도 빼먹지 않고 미야 짱이 기습적으로 나와서 날 반겨주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삼촌과 조카치곤 거리감이 묘하게 가까운 기분을 종종 느끼곤 했다. 


"아, 응... 기다렸어? 내가 좀 늦었지?"


홀로 집을 지키려니 외로웠겠다 싶어 나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으응, 괜찮아! 테츠야가 나보다 더 고생이잖아. 자, 오늘 하루도 열심히 했으니 얼른 소파로 와! 자, 빨리~!"


나는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하는 수 없이 작은 손에 이끌려 거실에 강제로 따라갔다. 아직 욕실에서 씻지도 않았는데 급하기도 해라.


미야 짱은 처음과는 사람이 딴판이다 싶을 정도로 성격이 변했다. 나와 같이 살고부터 태도가 점점 풀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삼촌인 날 커플끼리 쓸 법한 이름으로 직접 부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 눈도 있어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다고 신신당부해도 미야 짱은 반말을 끝까지 고수했다. 꺾이지 않는 고집에 나는 항복하는 게 전부였다. 푸근한 미소를 보고 있으면 그럴 생각이 전혀 안 들기도 하고.


"늘 성실히 살아가는 테츠야에겐 상을 줘야겠지? ...옳지옳지. 오늘도 회사에서 열심히 일했으니까 평소처럼 또 쓰다듬어줘야지~♡ 내가 아는 테츠야는 아주 멋진 남자야~." 


소파에 얌전히 앉으면 그 후로는 미야 짱의 끝없는 귀여움 세례가 시작됐다. 앞머리, 뒷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귀에 바람을 후~ 불어넣으며 간질이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건 그나마도 양반이었다. 집안에 있다는 편안함 때문일까. 숨기지도 않으려는 듯 뒤에서 온몸으로 내 머리를 와락 끌어안고 느긋하게 감상하듯이 앞머리를 매만지기도 했다.


결국 조카딸의 시선은 나중에 감당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곧 고등학교를 진학할 아이에게 아저씨내 풀풀 나는 어린 삼촌이 해맑은 머릿속에서 전부가 되게 할 순 없었다. 무엇보다 몇 달 후, 헤어져야 할 이별의 순간에 끝이 안 좋을지 걱정이 됐다.


왼쪽 귀에 따듯한 입김이 불어온 순간, 간지러움을 견디지 못한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아, 그...! 저기, 미야 짱...?! 미야 짱도 이제 곧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야 할 나이고, 나도 어엿한 성인이니까 이런 건 슬슬 그만하는 게...!"


"...그렇구나, 테츠야는 나랑 꼬~옥 끌어안는 게 그만큼이나 싫다는 거지?"


이야기가 뭔가 굉장히 곤란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걸 이런 행위에 익숙해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 그런 게 아니고..."


"그럼 이제 나도 테츠야한테 더는 쓰담쓰담 안 해줄 거야. 회사에서 퇴근해도 거들떠도 안 보고 반겨주지도 말아야지... 앞으로 나를 쓰다듬는 것도 당연히 금지고."


또 퇴로가 없어졌다. 뒤에서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과 사나운 목소리가 아까의 부드러운 입김 대신 귓가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그 싸늘한 낯빛을 볼 자신도 없어졌고, 나는 퇴근하자마자 알게 모르게 본능적으로 표정이 풀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어도 해맑은 여자애 한 명이 집안 전체의 분위기를 이토록 띄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그 손길에 거부할 수 없었다. 퇴근 뒤의 쓰다듬기는 흔한 직장인들의 끝나고 마시는 맥주 한 잔과 비슷할 정도의 행복을 줬으니까.


"...읏, 사실 거짓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좋아서 이대로면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았어. 미안해, 네 입장도 들어주지 못한 내 잘못이야! 늘 이렇게 있고 싶어!"


즉시 품 속에 안겨들며 사과를 몸소 실천하자 싸늘했던 미야 짱의 표정도 순식간에 밝아졌다. 은근 이마 쪽에 대충 알 법한 봉긋한 감촉이 느껴졌다. 모두들, 인간 쓰레기라고 날 불러다오. 얼마든지 폄하하고 경멸받는다 한들, 내게 합리화할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면, 여기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우리 둘만의 집이라든지.


인간 쓰레기라는 걸 스스로 알고 있어도 사춘기 여자애 특유의 좋은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옷의 천가지 너머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침대 같은 편안함. 지친 일상만 반복하던 내겐 새로운 신선함이 되어주었다.


"알고 있어. 난 테츠야를 믿으니까. 방금 그 말도 거짓말인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젠 다시는 거짓말하면 안 돼~? 난 착하고 솔직하게 응석을 부려주는 테츠야를 무척 좋아하니까♡"


목소리도 평소처럼 상냥하게 돌아온 미야 짱은 그대로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 정수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왠지 처음과 입장이 뒤바뀐 건 아니, 미야 짱?


"응, 어른답지 못했어... 고마워, 미야 짱..."


그래도 내게는 거스를 수 없는 압력이란 게 있었다. 그게 곧 미야 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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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의 일과는 업무에 있다. 상사의 보이지 않는 갑질, 동료 직원들의 뒷담화, 야근과 피로 외에도 가장 큰 적, 졸음과도 맞서싸워야 했다. 하지만 왠지 몇 주 전에는 무뎌져서 거의 다 죽어가던 눈꺼풀이 요새는 제법 힘이 들어가 있다고 느껴졌다.


한창 회사 일에 전념하고 있자, 옆자리에서 빤히 쳐다보는 무언의 압력이 느껴졌다. 그러다 결국 말을 걸기로 결심했는지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상사가 모니터 화면 속에서 내 눈동자가 움직인 타이밍을 재빨리 낚아챘다.


"...저기, 테츠야 군."


"아, 네."


모니터에 집중하느라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 앞을 본 채 대답했다.


"뭔가 요즘 생기가 넘치지 않아? 내가 봐도 차이가 확 나는데?"


말을 걸어오는 여상사는 희한하게 내 사소한 변화를 이런 식으로 민감하게 눈치채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햇살 같은 미소로 옆자리인 내 업무 환경까지 덩달아 밝아지는 건 그 덤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그런가요?"


"응, 그야 예전에는 오전 작업 때만 해도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으니까. 보기도 좋은걸."


기분좋게 말을 거는 와중에도 얼굴은 늘 눈부신 미소를 잃지 않았다. 상사와의 관계가 부담스러워 최대한 비즈니스적으로 해결하려는 내가 유일하게 편하게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녀였다.


"으음...? 그, 그렇게나 심한 얼굴이었나요?" 


겉으로 보기엔 눈에 띄게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렇다고 매번 손거울을 볼 수도 없으니 일일이 다 확인하긴 힘들었다.


"혹시 여친이라도 생긴 거니~? 응, 그런 거야?"


내 여친의 유무가 과장은 어지간히도 궁금한 눈치였다. 어느새 그녀의 관심사는 내 자가진단에서 연애사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그래도 그 아이를... 여친이라고 대답했다간... 사회적으로 죽겠지...?'



'테츠야, 기다려. 지금 밥 퍼 줄게?'


'자, 와이셔츠 다림질해뒀어♡ 봐봐, 나 빨래도 잘하지~?'


'있지, 테츠야는 아직 여자친구 같은 거 없지?'



"아하하... 그럴 리가 없죠. 그렇지 않아도 전 여자랑은 거리가 인연이 먼 사람인데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선을 긋고 대충 둘러댔다.


"흐응~ 그래~? 테츠야 군, 여친은 아직 안 만들었구나~."


아주 신이 난 듯 맞장구를 치는 상사는 아직도 날 골려먹는 게 즐겁구나 싶었다. ...뭐야, 남이 솔로가 된 게 그렇게나 즐거우세요? 방금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이 들린 것도 같았지만, 또 다른 남은 업무를 지시하는 부장의 집채만한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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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 위에서 좀처럼 뜨지 않는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가 여간 힘들었다. 늘 충분치 못한 잠자리에 시달린 몸을 이끌고 방을 나오면 부엌엔 요새 매일 같이 부지런하게 나를 챙겨주는 미야 짱이 있었다. 그건 미리 설정해둔 알람 시계에 맞춰서 일어나지 못한 오늘 아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안해, 미야 짱... 늦잠 자 버렸네."


"괜찮아, 한 두 번도 아니고. 자자, 빨리 옷부터 입어. 그러다 지각할지도 모른다~?"


최대한 빠르게 씻고 출근 차림이 되면 미처 풀려 있는 넥타이는 늘 새댁처럼 미야 짱이 대신 매주었다. 아직 미성년인 애가 이만한 일을 해낼 수 있다 보니 방밖으로 나오면 이제는 입부터 벌릴 기대를 하고 봤다.


미야 짱은 나중에 어떤 복받은 남자가 데려가려나? 아주 분한 나머지 난 그때 분명 구석에서 질질 짜기야 할 것이다.


"하하, 매일 신세를 지네... 아, 맞다. 아침은..."


"난 이미 먹었으니 괜찮아. 당신 건 저기에 차려두었으니 이따 챙겨먹어. ...꼭이야, 응? 아침을 거르는 건 건강의 적이니까."


애타게 날 올려다보는 미야 짱의 눈길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일단은 새로운 집안일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늘 별탈없이 그 어려운 일들을 모조리 끝냈으니, 어리숙한 나와는 이미 비교대상조차 아닌 건 확실했다. 그래도 이런 부러운 신붓감과 잠시나마 같이 있을 수 있는 나는 그야말로 축복받은 남자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면목없어... 그건 그렇고 미야 짱, 정말 엄마 같아..."


나는 존경을 담아서 미야 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도 기분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오랜만에 받는 쓰담쓰담을 만끽하는 듯 했다. 이제 보니 처음 만났을 때와는 머리 길이도 많이 길어졌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향긋한 향수 냄새에 호화로운 머릿결... 잘 보이고 싶은 남자애가 있다는 건 사랑에 민감한 사춘기 여자애에겐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나는 3주 정도 납득하지 못할 예정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신경쓰지 마~. 이미 익숙해졌는데 뭘."


미야 짱은 옷매무새에 사소한 주름이라도 보이면 즉각 달라붙어 이것저것 살폈다. 감정에 한창 민감해서 뭐든 터지기 쉬울 나이인데, 애써 걱정을 안 끼치려는 모습이 장했다. 곧 나랑은 연배가 2배에 가까웠지만, 하는 짓은 나보다도 더 성숙한 조카였다.


"하하, 뭐 그것도 그런가..."


그럴 때면 나는 이미 한 명의 어엿한 성인인 조카에게 할 말이 없어졌다. 과연 예전부터 똑부러진 사촌 누나의 딸이었다. 하는 일을 도맡아 솔선수범하고, 불평 하나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성인의 표본이었다. 


책가방을 들춰멘 미야 짱은 늘 현관문을 나갈 때면 내 손부터 끌고 나갔다. 주변 이웃집에서 볼까 싶어 손을 잽싸게 놓으려 해도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는 포기한 채 일종의 어리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날이 무척 쾌청했다. 푸르도록 흘러가는 하늘, 길거리의 화단에 흐드러지게 만개한 꽃밭. 그리고 나는 그보다도 더 화사한 미소를 볼 수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겼다. 미야 짱이 다니는 중학교와 내가 다니는 직장이 갈리는 데에 늘 있는 갈림길, 우리는 늘 거기서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난 먼저 학교에 갈 테니 일 잘하고 와~. 아 그리고 있잖아. 다녀오면 또 우리 애기 착하다 해줄게~?"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복주머니가 터져서 흘러넘치는 놈일지도 몰랐다. 뭐든 서툰 내 주제에는 과분하게.


"으음, 그건... 네,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신세를 지는 그녀의 흐드러진 미소를 보고 더더욱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며 길거리의 점이 된 그녀를 보며 나도 힘내자는 구호를 속으로 외쳤다. 그리울 딸을 위해 먼 타지에서 일하는 누나를 위해, 현모양처 부럽지 않도록 내조와 뒷바라지를 해주는 미야 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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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회사에 비해 업무 환경이 자유로운 우리 회사는 점심 시간도 각자 나가서 먹었다. 거래처의 건으로 부장이 급히 자리를 비울 일이 생기면 각자 마음대로 취향껏 식사를 하는 게 일종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파일로 정리한 서류를 모아 회수하고 있자, 저번처럼 옆에서 과장이 책상에 앉아 늘어지는 신음을 흘렸다. 좀 있을 업무를 미리 몇 개만 짚고 나자, 부하 직원들이 들리지 않을 대화를 나누며 업무실을 나간 것이었다. 기가 빠지는 부하들을 돌보는 것 역시 상사의 빠질 수 없는 역할 중 하나였다. 피로감이 장난 아니게 누적되다 보니 배고프다는 소리를 시종일관 늘어놓았다.


식사에 나름대로의 철학을 담고 있는 그녀는 이름난 맛집을 찾아 리뷰한 뒤,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는, 일반인 중에서도 나름 유명한 축에 속했다. 여상사의 실로 훌륭한 몸매를 보고 있으면 전부 그 영양이 어디로 가는지 짐작이 갈 것도 같았다. 유독 특정 부위에 영양이 과다했다. 


방금 전부터 그녀는 살금살금 내가 끝마치고 시간에 맞춰 나갈 타이밍을 재려니 아무래도 줄이 끊이지 않는 맛집에 홀로 가는 건 여러모로 부담이 되는 것 같았다. 이따 전달할 서류는 서랍에 넣어두자 평소에 들었던 목소리치곤 꽤나 하이톤인 목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예상대로 업무 얘기가 아닌 점심 식사 메뉴 얘기부터 꺼냈다. 


"테츠야 군, 지금 시간 괜찮아?"


"아뇨, 저도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라... 왜 그러세요?"


어느덧 업무실에는 과장과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생각이 통했는지 사무적이던 과장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러워진 게 느껴졌다.


"아, 너만 괜찮다면 요 근처에 정말 맛좋은 집을 하나 내가 알고 있거든. 모처럼 예약석에 지인이 오기로 했는데 급하게 중요한 약속이 잡혀서 마침 하나가 비었지 뭐니.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식사를 권하는 과장의 모습은 며칠 전보다 톤이 많이 올라 있었다. 술자리에서 대놓고 내게 무심한 듯 어깨를 기댔던 과장의 달콤한 목소리가 무심코 기억에 남았다.


"아, 네. 상관없어요. 마침 뭘 먹을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잡생각을 떨쳐낸 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는 과장을 따라 그녀가 알고 있다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인플루언서가 리뷰하는 식당이니 비쌀 거란 생각이 저절로 미쳤다. 잔뜩 주눅이 들어있자, 과장이 갑자기 내게 팔짱을 걸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은 말야. 그 예약 레스토랑은 오로지 커플이어야만 입장할 수 있거든. 군말없이 여자랑 단둘이 따라나오는 걸 보면 쑥맥인 척해도 테츠야 군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지~?"


풍만한 몸매를 들이대는 과장은 일부러 그러는 건지 못 알아채는 건지조차 불분명해보이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다른 남자를 꼬실 수 있었더라면 그러고도 남을 부장이 어째서 나를...?


"예...? 아, 저 그런 식당은...! 아, 아무래도 저, 과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는...!"


행인들의 눈이 차츰 우리들 쪽으로 쏠렸다. 몸매가 좋은 것과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보는 시선이 많으니 품속에서 허둥대던 것도 잠시, 그녀가 소악마 같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뭘 괜찮다니까~? 명목상 커플이지, 들어가기만 해도 30% 할인인데 말야. 흐흥, 이래도 거절할 거야, 응~?"


의기양양하게 묻는 과장의 표정에는 벌써부터 승기가 가득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보란 듯이 자랑하는 것도 내가 알고 있는 그녀의 버릇 중 하나였다.


"아, 으... 그,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좀처럼 없는 황금 같은 기회에 나는 보란 듯이 과장이 파놓은 함정을 덥석 물고 말았다. 내 옆자리에서 일하기엔 과장은 지나치게 머리가 비상한 게 탈이었다. 그러자 다시 그녀는 내 등 부위에 닿는 감촉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 멋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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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정성들여 손수 골라온 식재료가 가득한 바구니가 힘없이 거리에 주저앉는 소리였다. 그 덧없는 소리를 기점으로 소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처럼 까맣게 타들어가는 기름에 퐁당 빠진 허여멀건한 물감처럼.


이제 막 사랑이란 감정을 깨우치기 시작한 소녀의 눈에는 분노가, 이중적 잣대를 깨고 관계라는 모순을 딛기 시작한 소녀의 입은 증오로 달싹거렸다. 몹시 목이 말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무척 어리석고 우매했다.


저멀리 테츠야가. 아니, 내 사랑이 이름모를 여우년의 손길에 이끌린 채.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라도 된 양 거리를 달갑게 걷고 있었다. 딱 붙어서.


이도저도 안 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그 누구라도 이렇게 생각할 만했다. 사랑에 눈이 먼 소녀는 그럴 만했다.


우리에 또 다른 방해 요인이 남아있다는 걸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 보잘것없는 우리 안에서 그녀는 포식자였고, 눈앞에 보이는 가증스러운 여자는 곧 피식자가 될 터였다.


"테츠야는... 누구에게도 못 줘. 안 줄 거야. 누가 뺏도록 내버려둘까 봐?"


어느새 싱그러운 나무 특유의 생기를 거두고 앙상한 가지만 자리잡은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새로운 칼날을 갈고 있었다.



각자 분배해 비용을 계산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그 기본을 과장은 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기가 비용을 내겠다면서 끝까지 만류하는 과장의 등살에 못 이긴 나는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답답함을 느끼며 회사 업무를 계속했다.


바로 옆자리라 눈치가 보였으나, 내 생각 외로 시간은 다행히도 빠르게 흘러갔다. 지시한 업무를 키보드로 만지작거리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노을빛 하늘이 머리 위에 있었다. 오늘따라 평소 보이지 않던 먹구름 떼가 유난히 많았다. 그 때문인지 웅대한 수채화를 그리던 하늘은 먹물을 겹쳐놓은 것처럼 새카맸다. 어쩌면 보는 사람에 따라 소름마저 끼칠 만큼.


'...그래도 이제 다 끝났으니까 괜찮아! 평소에 나만 쓰담쓰담받는 것도 좀 그랬으니... 이번엔 어른인 내가 쓰다듬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자연스레 녹을 듯한 표정을 짓는 미야 짱의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고행길 끝의 피로와 수척함은 그 아이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감쪽같이 날아가니 요즘들어 부쩍 일의 능률도 오른 느낌이었다. 늘 쓴소리만 하던 부장이 칭찬을 했다고 미야 짱에게 말하면 쓰담쓰담 시간이 두 배는 늘어날 게 틀림없었다.


"아, 맞다. 요즘 들어 바빠서 미야 짱을 챙겨줄 겨를도 없었는데... 마침 근처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다주면 좋아하려나?"


여자애의 취향은 남자로선 알기 무척 어려웠다.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푸딩에 절로 손이 갔다. 탱탱하고 부드러운 데다 달콤한 식감을 싫어하는 사람은 적어도 없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내가 먹을 것까지 총 세 개였다. 나머지 두 개는 집안일에 힘을 써주느라 지친 기색 하나 않는 미야 짱을 위해서. 미안하거나 고맙다는 형식적인 말 말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나는 그나마도 이런 것밖에 사다줄 수 없었다.


"나 왔어, 미야 짱. ...미야 짱?" 


들뜬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문을 힘차게 열자 미야 짱 대신 칠흑 같은 어둠이 날 반겼다.


나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미야 짱이 떠나겠다거나, 누나를 보고 싶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미야 짱, 미야 짱...! 어, 어딨어? 내가 너무 늦은 거구나? 그래서 먼저 자고 있는..."


흘러나오는 식은땀을 간신히 훔쳐낸 내가 다급하게 집안을 뛰어다니자 어둠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보였다. 딱 내 어깨 바로 밑까지 오는 아담한 몸. 하지만 시린 달빛을 받아 매서운 눈을 치켜뜬 그녀는 이미 내가 알던 미야 짱이 아니었다.


소름 끼치도록 그녀의 고개가 부자연스럽게 꺾였고, 굳게 잠긴 입에서 평소와 달리 기계음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새카만 암흑 속에서 얼굴을 감추려는 듯 새하얗게 질린 마스크가.


"...왜 이제 왔어? 테츠야. 쓰담쓰담해줄 시간이 이미 지났잖아."


미야 짱은 웬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생기가 없어진 눈동자가 날 지그시 직시했다. 자신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날 집요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뇌가 굳어버린 나는 궁색하게 변명하는 게 전부였다. 미움받으면 어쩌지 하는 알량한 생각이나 품은 내가 변명거리라고 꼴에 내놓을 수 있는 건 오면서 칭찬받을 생각에 신이 난 회사 얘기였다. 


"그, 그건... 미안. 일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그, 그래도! 오늘 몰아서 일을 전부 끝냈다고 부장님이 칭찬을 했어! 그래서...!"


방정스러운 입 때문에 음절이 자꾸 절었고, 그런 날 무표정으로 쳐다보던 미야 짱이 갑자기 내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있잖아, 테츠야. 당신은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분명 있지? 내가 모르는 다른 비밀이."


유독 흰자 부분만 커진 눈동자는 더 이상 날 놔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에 영문 모를 말들, 추궁하듯 빤히 바라보는 눈과 시선이 맞자 심장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버린 기분이었다. 


"비, 비밀...? 난 미야 짱한테 숨기는 게 없는데 이번엔 어쩌다 우연히 일이 늦어져서... 미안, 화 많이 났어?"


어르고 달래보려 하자 미야 짱이 순수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어린애답지 않은 그런 미소. 늪처럼 절대 놓아주지 않는 끈적하고 요염한 미소로 그녀의 입가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입꼬리가 방긋 웃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고 있었다.


"테츠야. 난 테츠야가 거짓말하는 게 제~일 싫어. ...나, 사실 다 봤다? 테츠야가 나 몰래 다른 여자랑 친하게 팔짱 끼고 걸어가는 거."


그 말이 귓가에 닿자 오늘 유일하게 점심을 먹으러 같이 외출했던 과장이 생각났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정작 그게 아니었다. 신경이 곤두선 내 머릿속이 최악의 상상을 만들었다. 


"...어?"


입이 무어라 덧붙이기 전, 미야 짱이 먼저 말을 낚아챘다. 생기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 방 안을 물들인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이 날 뚫어져라 응시했다. 


"내가 전에 테츠야한테 여자친구가 있냐고 물었을 때, 기억 나? 그 때 테츠야는 없다고 말했어. 지금으로부터 17일 9시간 23분 14초 전에 그렇게 말했잖아." 


어둠 속에 잠긴 미야 짱의 눈동자가 점점 차가워졌다. 미야 짱이 왜 추궁을 넘어 집착까지 하는지 알지 못했다. 쓰다듬는 건 모성애의 일종이라고 책에서 봤는데 그렇게 여긴 게 큰 잘못이었나...? 나는 이유를 물어보려 했으나, 낯선 광경에 굳어버린 입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옴짝달싹 못하며 가둬진 채 대답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테츠야는 나한테 거짓말을 친 거야. 난 테츠야가 늘 성실하다고 생각했어. 이런 나쁜 버릇은 빨리 고쳐야 하니까 역시 여기선 따끔하게 혼내지 않으면 안 되겠지?"


실상은 꾸지람을 듣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방적인 매달림일 뿐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말하려던 걸 목구멍 너머로 간신히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살짝 열린 창문의 틈새에서 불어온 바람을 받아 그녀의 머리키락이 흔들렸다. 저벅, 저벅, 무기질적인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와이셔츠 차림의 그녀가 처음으로 고운 살갗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민낯이 드러나자 자세한 윤곽은 달빛에 가려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야 짱이 옷가지를 한쪽 구석에 포개두고 어느새 내 뒤로 갔는지 방문을 걸어잠그는 소리가 났다.


메마른 발소리로 보아 그저 나한테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테츠야... 실은 스위치가 켜지기 직전이었는데 마침 길거리에서 그런 광경을 목격한 거 있지? 응, 테츠야 덕분에 내가 계획해둔 절차를 실행에 옮길 수고를 덜게 됐네... 이 모든 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러니... 지금부터는 말 잘 들어야 해?"


다가온 실루엣이 이번에는 반대로 달빛을 가렸다. 또 눈앞이 막막해졌다. 쌀쌀한 밤공기 대신 달아올라 뜨겁게 달궈진 숨결이 방 안을 가득 채운 건 알 수 있었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격렬한 기시감. 나는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그녀의 왼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흥건하게 피로 젖은 칼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