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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날 밤, 조그마한 자취방에 양복을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 지친 듯 문을 닫는다. 그는 지친 얼굴로 자기 가방과 양을 벗어 던지고 양복을 적당히 개어 방 한쪽 구석 어딘가에 걸어놓는다.


"벌써 12시인가?"


남자는 벽걸이 시계를 보면서 피곤하면서도 익숙한 듯, 전기 포터에 물을 끓인다. 그리고 컵라면에 비닐을 부욱하고 뜯어 스프를 안으로 뿌려 넣는다.


틱.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포터는 물이 다 끓었다고 말했고 남자는 컵라면에 물을 불어넣는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라면 냄새가 향기롭게 퍼져나갔고 그는 서둘러 라면이 다 끓기를 기다리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이는 시곗바늘 때문인지, 아니면 남자가 피곤했던 탓인지, 아니면 그 모든 것 때문인지 남자는 라면이 익어가는 동안 고개를 꾸벅꾸벅하기 시작했고 이기지 못할 잠에 빠져들었다.



"후르릅, 후릅!"


남자는 누군가 라면을 먹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분명히 그만 사는 집이었는데 누군가 라면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의아함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자, 한 소녀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아, 일어나셨어요?"


그녀는 무안한 듯 헤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라면을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누군데 남의 집이 있으신가요?"


"그게 복도를 지나가다가 맛있는 라면 냄새가 나서 못 참고 그만..."


남자는 자신의 문을 닫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문을 쳐다보지만, 문은 별 인간 열려 있었다.


'요즘 피곤해서 깜빡하고 안 닫았나?'


"그나저나 아저씨는 무슨 일 하세요?"


"아저씨라는 이래 보여도 아직 20대라고!"


갑작스러운 그녀의 도발에 남자는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러자 여자는 그 모습을 웃긴 듯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푸웃, 네,네~"


그녀의 들린 팔 아래로는 상당히 심한 흉터가 보였고 남자는 그 순간 흠칫하였다.


"이거 보고 놀라신 거죠?"


"아니.. 그게.."


여자는 자기 팔목을 걷어내며 보여주었고 남자는 그 모습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여자의 팔뚝에서는 자상의 흔적이 있었고 팔 곳곳에서도 상당히 커 보이는 부상들이 있었다. 또한 한동안 씻지 못했는지 상처에는 검은색 먼지 같은 무언가가 묻어있었다.


"괜찮은 거지?"


"네, 괜찮아요. 다 오래된 상처라 이제는 별 감각도 없어요. 그러면 벌써 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잠깐만! 그래서 누구..?"


여자는 서둘러 집 밖으로 뛰쳐나갔고 남자 또한 그를 뒤쫓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집 전체가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지진인 건가?"


남자는 서둘러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집 전체는 더 크게 울렸고 남자는 결국 바닥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허헉, 어헉..."


남자는 눈을 뜨고 사방을 살핀다. 하지만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휴대폰만이 울릴 뿐이었다. 남자는 휴대폰을 곧바로 확인했지만, 온 문자는 직장 상사의 업무지시일뿐이었다.


"뭐지, 꿈인 건가?"


남자가 의아해하며 휴대폰을 내려놓자 그의 앞에 있는 컵라면은 뚜껑이 열린 채로 누군가 먹은 듯 양이 줄어있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남자는 알 수 없는 오싹함을 느끼며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어떠한 흔적도 없었고 문을 단단히 잠겨있었다.


다음 날,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로 꿈속에서 늘 그녀가 등장했다. 계속해서 등장하자 무언가 찝찝한 느낌도 들었지만, 어차피 꿈속의 일이니 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평소에도 길거리나 회사에 다닐 때, 무엇보다도 여성과 이야기를 나눌 때 소름이 돋았지만 단지 기운이 쇠해서라고 생각하였다.


"뭐야? 오늘은 일찍 왔네?"


"뭐, 그냥 피곤해서 일찍 잤지."


오늘도 잠이 들자 어김없이 그녀가 남자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더 깨끗해진 것 같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뭐 먹을 거 없어?"


"벌써 배고픈 거야?"


"그냥, 하루 종일 여기에 있으니까 심심한 거지."


그녀는 그런 말을 하면서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섰다. 마침내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말했다.


"그런데... 왜 나를 이렇게 도와주는 거야?"


"응?"


"처음 볼 때부터 나한테 친절했잖아. 혹시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아니, 딱히 그런 건 없는데..."


"거짓말하지 마. 그러면 일면식도 없는 나를 왜 도와줬어? 역시 이건가?"


그녀는 그러면서 자신의 후줄근한 티셔츠의 목 부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옷 안쪽의 가슴과 균형 잡힌 몸매가 여실히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군살 하나 없는 완벽한 몸매의 모습에 순간 혹했지만 남자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아니, 나는 그냥 너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고!"


"정말?"


그녀는 더더욱 다가가 이제 서로의 피부가 부딪혔다. 남자는 자신의 가슴팍에 느끼는 말랑한 느낌의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추슬렀다.


"그냥 평소에 너무 힘드니까 대화할 친구가 필요했는데....마침 네가.. 나타나서."


남자의 횡설수설한 대답에도 그녀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 그러면 나는 그냥 평범한 친구다?"


"그냥 친구는 아니지만..."


"뭐, 그 정도면 됐어."


그녀는 그제야 남자를 풀어주었다. 그녀가 떨어지자,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남자가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그녀는 방 안에서 낡은 게임기를 꺼내 그에게 물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조종기가 있는 그것은 남자가 자취를 처음 시작했을 때, 산 게임기였다.


"그거 오래된 건데.."


"상관없어."


"그렇다면야, 여기로 가져와 봐."


남자는 게임기의 옆쪽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눌렀고 게임기는 조그마한 기계음과 함께 시작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였다.


"마침 둘이 하기 딱 좋은 게임이 있는데..."


남자는 그러면서 한 게임을 골랐다. 52가지 세계게임이라고 적혀있는 게임을 고르자 귀여운 소리를 내며 게임기가 작동하였다.


"너무 애들이 하는 게임 아니야? 조금 더 재미있는 거 없어?"


"그 생각, 하다 보면 바뀔걸?"


남자는 조작 버튼을 눌러 주사위를 굴리는 게임을 눌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소리쳤다.


"아니, 왜 6이 안 뜨는 건데!!"


"그게 바로 업보다. 이말이야~"


"업보는 무슨, 이건 무효야!"


"어허, 패자가 어디서!"


둘은 시간이 가는지 모르고 게임기를 즐겼고 그러면서 둘은 더 가까워졌다.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 남자는 말했다.


"벌써 시간이 다 됐네."


"그래? 그런 거 신경 쓸지 말고 한 판 더 하자."


"에이, 그럴 순 없지."


그 말을 듣자, 그녀의 눈동자는 급격하게 차가워지는 것 같다고 남자는 느꼈다.


"왜? 같이 있으면 안 돼?"


"일을 해야 밥을 먹고 살지. 그리고 게임기도 새로 사고."


"밥도 나랑 같이 먹고 나랑 여기에 계속 있으면 되잖아."


"장난 그만 치고 내일 또 보면 되잖아."


"내일? 내일 본다고?"


그녀는 그 말을 듣자, 남자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남자는 벗어나기 위해 힘을 주었지만 자기 몸은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손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이거 놓아줘, 응?"


"내가 메일마다 너만을 생각하고 너랑 놀아주는 데 왜 너는 날 생각하지 않는 거야? 왜 나랑 떨어지려고 하는 거야? 응? 이제 내가 지겨워졌어? 왜 나한테 계속 잘해주는 건데? 어?"


그녀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인 것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남자는 서둘러 그녀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남자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내 잘못이지. 내가 한눈팔지 않도록 해야 하는 건데."


여자는 그러면서 남자의 다리에다가 손을 데더니 말 그대로 쥐어짰다. 남자의 다리는 마치 가벼운 끈처럼 비틀어지기 시작했고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그는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극심한 고통과 함께 남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억. 역시 꿈인 건가?"


남자는 이불을 들어 자기 다리를 쳐다본다. 다행스럽게도 다리가 부서져 있지 않았지만,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 모습에 소름이 끼친 남자는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출근 준비를 하고 집 문을 향해 다가갔다.


"어...?"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문이 자연스럽게 열렸다. 분명 어젯밤에 문을 잠가놨을 때인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느낀 남자는 이 끔찍한 상황에 벗어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려는 순간, 여성의 손이 그의 입을 막았다.


"어디가?"


남자는 필사적으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여성의 손에 이끌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꿈속의 그녀가 있었다.


"분명히 여기는 현실일 텐데.."


"왜? 현실에 내가 있으면 안 돼? 나는 너랑 같이 만나서 어디를 갈까? 뭘 먹을까도 항상 생각했는데."


"아니야, 이건 사실일 리가 없어. 꿈이겠지."


"으흠, 그렇게 믿기지 않는다면 믿기게 해줄게."


그녀는 꿈에서처럼 남자의 다리를 잡아 비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그만! 그만!"


"이제 꿈에서 깼지?"


그녀는 입이 찢어질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은 이제까지 함께했던 친구가 아니었고 이제는 인간인 것조차 의심스러웠다. 다리가 부서진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남자의 뺨을 만지며 여자는 말했다.


"내가 꿈속에 얼마나 오래 있는지 알아?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어. 나쁜 놈, 잘하는 척하다가 뒤통수치는 놈. 정말 많은 녀석을 만났어."


그녀는 말을 끊고 남자와 눈을 맞추었다. 겁에 잔뜩 질린 눈은 오히려 그녀를 더 흥분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근데 넌 달랐어. 너는 나를 친구처럼 대해줬어. 심지어 내가 유혹하더라도."


이번에 그녀는 윗옷을 완전히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흠잡을 때 없이 완벽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녀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나랑."


"꺼져…. 미친 년아!


남자는 바닥에 있는 게임기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여자는 자신이 맞았다는 것이, 피를 흘린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자기 이마에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만진다.


"어, ..피네?"


"누구도 사랑한다고 다리를 부러트리진 않아. 그리고 이건... 더는 같이 있지 못하겠어."


남자는 부러진 다리를 억지로 일으켜 천천히 문 앞으로 걸어간다. 그제야 여자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는 남자의 다리를 부여잡기 시작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어? 그러니까 잠깐만 있어봐? 응?"


여자는 자신이 잘못을 뉘우친 듯 남자를 붙잡지만 남자는 피를 흘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문을 열려고 하였다.


덜컥, 덜컥


"뭐야 이거 왜 안 열려?"


남자는 당황하며 손잡이를 잡고 돌리지만 문은 의미 없는 소리만 날 뿐 현관문은 열리지 않았다.


"설마 진짜로 열릴 거로 생각한 거야?"


남자는 여자를 쳐다본다. 그녀는 아까 전 애절한 목소리는 장난이었는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뭐야? 여기는 꿈이 아니잖아. 빨리 문 열라고!"


"여기가 꿈이 아니라는 증거 있어?"


"뭐라고?"


"여기가 꿈이면 어떡할래?"


"분명히 잠에서 깻는데..."


남자는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할 수 없는 상황에 정신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현관에서 그대로 주저앉은 남자에게 그녀는 말했다.


"그건 그렇고 날 때렸으니 교육받아야겠지?"


"아니야. 이건 아니야..."


"걱정하지 마. 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말해줄게. 앞으로 영원히..."


그녀는 벌벌 떨고 있는 남자를 조심스럽게 안은 후에 방 안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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