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각해보기에도 퍽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었다.

남들처럼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모나지 않는 평범한 친구들을 사귀고, 뒤처지지 않을 만큼만의 적당한 성적을 유지하며, 남들처럼 그럭저럭한 대학에 들어가, 남들처럼 머지않아 군대에 갔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도착한 종착지는, 너무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회사.

그곳에서 천천히 사회와 물들어가며, 특별과는 거리가 먼- 참으로 지독할 만큼 평범한 삶.


스스로, 그리고 타인의 기준으로도 쉽게 답할 수 있을 만큼.

내 삶이란 그런 무미건조함 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나에게 몇 번의 기회는 찾아온다고 하던가.

회색빛만이 가득하던 내 풍경에 처음으로 화사한 색채가 다가온 순간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모두가 회색빛을 뿜어내고 있는 공간 속에서 그녀는 유일하게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때는 화사한 노란 빛, 어떤 때는 우울한 파란 빛. 어떨 때는 보는 것 만으로도 웃음을 짓게 되는, 싱그러운 초록 빛.

하얀 국화만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그녀는 홀로 유일하게 빛나는 빨간 장미였다.


그래서 그럴까.

처음으로 욕심이 생겼다.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함께하고 있었다.

같이 있으면 있을 수록 내 빛깔도 조금은 변해가는 것 같아서, 가까워 질 수록 내 풍경도 그녀처럼 물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인생에서 몇 안되는 큰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먼저 다가갔다.


"저도 좋아요!"


그런 용기가 보답이라도 받는 것인지.

그녀는 다행이도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돌아다니고, 점점 회사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남의 잦아졌을 때.

나는 어느샌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임을, 설령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여자가 제 운명인 것임을, 깨달았다.


"저희 조금 더 진지하게 만납시다. 저는 진심이에요."


그래서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었다.

혹시 라도 거절할까 싶어서 불안한 가슴을 꾹 눌러 담은 채, 덜덜 떨리는 입으로 어떻게든 그 말을 겨우 꺼내었다.


"조, 좋아요...대리님. 저도 실은..."


나의 진심을 담은 말에,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그 날 이후로 우리의 만남은 더 깊어졌다.

오랫동안 그녀와 교제하며, 마냥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격이나, 취향의 극명한 차이 때문에 둘의 사이에 며칠 간은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던 날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 온 뒤 땅이 굳듯, 서로를 점차 이해하며, 우리는 서로의 색을 소중히 끌어안고 한 발짝 한 발짝 힘차게 걸음을 내 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동거까지 같이하게 되었을 무렵.


띵동-


"아! 왔다."


그녀의 언니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우리 집에 찾아왔다.


"어머머 언니! 뭘 이리 많이 사왔어?"


"얘는, 빈 손으로 오는게 더 실례야. 안녕하세요~ 벌써부터 이르긴 하겠지만 제부 씨라고 불러도 되죠? 얀붕씨도 편하게 처형이라고 불러요!"


"아.....네."


아직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반 쯤은 이미 결혼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나를 제부라고 부르는 그녀는 놀랄 정도로 여자친구와 똑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에게 듣기로는 언니와 일란성 쌍둥이라고 했었나.

아주 오랫동안 경험해온.

나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처형의 눈에 보이는 그 '회색'의 빛깔이 아니었다면 나는 둘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둘은 똑같았다.


그 첫 만남 이후로, 우리의 삶은 순탄했다.

양가 부모님들과의 첫 만남.

기쁨의 눈물과 함께한 프로포즈.

세상의 축복을 받으며 서로에게 사랑을 맹세한 결혼식.

아이는 몇 명이나 낳고 싶은지 진열된 꼬까신을 보며 아내와 시시덕 거리는 그런 행복하고 충만한 삶.


그렇게 하얗기만 하던 도화지를 웃음이 만개한 얼굴로 이런 저런 색으로 물들여보는, 우리에게는 그런 행복한 일 만이 가득한 줄 알았다.


"제부~ 나 왔어요."


"처형? 갑자기 어쩐 일로...집 사람은 막 볼 일 있어서 나간 참인데."


"어머, 진짜요? 이런...타이밍이 안 맞았네."


동생의 집에 찾아온 것 치고는 한껏 꾸민듯한 외모로 곤란한 듯이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

웃고는 있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그 회색의 빛깔은 이유 모를 서늘함을 동반하며 내 등골을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차라도 한 잔 내올게요."


"후훗, 고마워요. 제부."


어쩐지 요염함을 띠는 웃음으로 살랑살랑 현관을 넘는 그녀의 눈은 단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지 불안함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과연 '아내'를 보러 온 것이 맞을까?

자의식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그녀의 목적이 다른 것 같다는 느낌에, 나는 켕기는 마음을 억누르고는 그녀에게 차를 내주었다.


"음- 향 좋다. 고마워요. 제부. 으음- 우리 할 것도 없는데 동생 오기 전까지 얘기나 좀 나눌까요?"


"네, 뭐..."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무언가 묘한 불편함이 섞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제부는..."


"제부는..."


"그러고보니, 제부는..."


처음의 얘기는 평범했으나, 점차 대화의 주제는 '나'에 대한 것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아내를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아내의 어떤 점에 반했는지, 아내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뭔지...등등

점차 질문은 노골적으로 변했으며, 긴가민가 했던 나조차도 점차 이 대화에 불편함만이 느껴지던 때.


"어, 뭐야. 언니 왔어? 미리 얘기해 주지!"


"에이, 잠깐 어디 가는 길에 들렀던 거야. 그래도 제부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가 들어오며 불편했던 대화는 겨우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후우-"


금세 퍼져가는 자매의 화기애애한 대화들을 보며, 겨우 안심의 한숨을 내쉰 나는, 이때까지는 처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부~"


"제부~! 나 왔어요! 문 좀 열어줄래요?"


"제부! 주말이라고 너무 자면 몸에 안 좋아요!"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주말마다 우리 집에 찾아왔다.

찾아오는 이유는 나름 타당할 수 있겠으나, 느낌으로서는 아니었다.

노골적인 시선.

아닌 척 종종 다가오는 은근한 터치.

회색의 눈에 감춰둔 그녀의 욕망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나는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부, 낯빛이 어둡네. 무슨 일 있어요?"


오늘도 '공교'롭게, '아내'가 없는 때에 찾아온 처형이란 사람은, 내 얼굴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은근슬쩍 이마에 손을 대고 있었다.


"열이라도 나는걸까?"


"........"


손목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향수의 냄새는 아내가 자주 쓰는 것과 동일한 향.

패션도, 분위기도, 찾아올 때마다 점차 아내와 동일해지는 그녀의 눈 만큼은 다행이도 아직 내가 구분할 수 있는 회색이다.


"...그만 하세요."


"아..."


조금은 강한 어조로 내 이마에 댄 그녀의 손을 치운다.

선을 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듯,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짓자 처형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미, 미안해요 제부. 부, 불쾌했으려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주말마다 찾아오시면 조금 힘듭니다 처형. 그것도 '아내'가 없을 때만 오시는 거요. 남들이 안 좋게 생각합니다."


"그...그렇겠지? 미, 미안해요. 절대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단호한 내 태도에 눈에 띄게 불안해진 태도로 우물쭈물거리던, 그녀는 약간 비틀거리는 몸으로 일어나더니 이만 가보겠다며 현관을 나섰다.


"...하아-"


그래도 이 정도면 좋게 마무리 한 것이겠지.

...그녀가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쌍둥이였던 만큼, 어렸을 때부터 언니와 자신의 취향, 성격, 습관까지도 늘 똑같았다고 아내가 얘기했었으니까.

모든게 똑같은 사람인 만큼 남자에 대한 취향도 어쩌면 같지 않을까, 그렇게 짐작할 따름이었다.


"다녀왔어요~"


그날 저녁.

아내가 집에 돌아오자, 나는 오늘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얘기했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입술을 짓씹던 아내의 빛깔은, 처음으로 보는 검은 색.


"...언니가...하,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표정으로 처형에게 전화를 걸고는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집을 나섰다.

아- 이거 한바탕 뒤집어 지겠구나.

아찔해진 표정으로 다급히 뒤를 따라 나섰으나, 이미 아내는 차를 탄 채 어딘가를 향해 거칠게 엑셀을 밟은 뒤였다.

전화라도 해보자니, 말리지 말라는 듯,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아내는 새벽이 지나 동 틀 때가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한 숨도 자지 못한 내가, 혹시나 싶어 장인 어른께까지 전화를 해보았지만 둘이 집에 찾아오지는 않았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


그렇게 초조하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도저히 못 참겠다 싶어서 집을 나서려던 차.


"다녀왔어."


현관을 열자 바로 앞에서, 피곤한 기색의 아내가 그리 말했다.

한 눈에도 부스스해 보이는 머리와, 퀭한 눈.

놀라서 그녀를 단숨에 껴안았다.


"괜찮아? 전화도 안돼서 많이 걱정했어."


"으응- 잘 해결했어. 자기, 나 피곤한데 조금만 잘게..."


비틀거리는 아내를 잘 부축해서, 침대로 보냈다.

많은 일이 있었는지 곧장 곯아 떨어지는 아내.

그런 안쓰러운 모습에, 나는 집사람이 편히 자게끔, 머리를 조금 쓰다듬고는 조용히 안방 문을 닫았다.


여하튼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듯, 처형은 그 후로는 단 한번도 우리집에 오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아내가 그 날 도대체 어떻게 으름장을 놓았는지, 명절에도 얼굴 한 번 안 비추는 것은 좀 애석하기는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경사스럽게도 아내가 임신까지 하면서, 나는 현재 매일매일을 특별한 삶을 살아오는 느낌이다.


주말이 지나 다시 찾아온 월요일.


"다녀올게."


"다녀와요~"


몇 년이 지나도 여전히 깨가 쏟아지는 웃음과 말을 뒤로 하고 현관문을 닫는 순간.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를 깜빡하고 안 챙긴 것이 생각나 다시 문을 열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서류를..."


유난히 햇빛이 눈부시던 날.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눈이 보인다.


모든것이 밝았지만.

























그곳만은 '회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