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떠올리지 못했다.

 

떠올릴 수 있던 것은 그 날이 아주 덥고 습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산에 있었다는 것.

 

「■■■■■■■■■」

 

그리고, 그리고.

 

내가 누군가와 어떤 약속을 했다는 것뿐.

 

 

 

 

 

매년 여름이 올 때마다 이번엔 얼마나 더울지 조금 기대됐다.

 

지구온난화인지 열대화인지는 몰라도, 해가 지날수록 최고

기온이 갱신되니 이젠 얼마나 더워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디서 얼핏 들은 바로는 언젠가 지구도 화성이나 금성만큼

뜨거워 질 수 있다고 하던데.

 

뭐, 그건 내가 죽은 뒤의 일일 테니 그다지 걱정되진 않는다.

 

“학교에는 멍이나 때리려고 오는 거냐?”


아야. 박영혁이 이 망할 자식이, 다짜고짜 머리를 쳐?

 

“얌전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 걸지 마, 병신아.”


“어쩌라고. 그나저나 집에 안 가냐? 벌써 종 쳤어.”


“아.”

 

그런가, 벌써 종이 쳤나.

 

그러고 보니 우리 말고는 교실에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어디 두고 사는 거야? 벌써 치매 왔냐?”


“내 똥기저귀는 네가 갈아주는 거지?”

 

“좆빠는 소리하고 앉았네.”

 

우리는 티격태격 싸우면서 학교를 나왔다.

 

시간이 벌써 저녁에 가까웠지만, 한여름인지라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그나저나 너, 오늘은 일 안 해?”


“나라고 맨날 일하는 줄 아냐? 게다가 내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거라고...시도 때도 없이 싸웠다간 먼저 미쳐버릴걸?”

 

영혁이가 끌끌 웃으며 내 뒤통수를 툭 쳤다.

 

“뭐냐 그, 너무 무리하진 말고.”


“나 죽으면 육개장 맛있는 집에 부탁할 테니까 먹으러 와라?”

 

“오냐.”


죽느니 사느니, 아직 그런 말을 할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혁이에겐 그렇지 않다. 고작 16살 나이지만, 녀석은

이미 어엿한 퇴마사였으니까.

 

‘목숨 걸고 싸우는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다니, 미친놈.’

 

물론 영혁이가 하고 있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불이 나면 소방관이 오고, 범죄가 일어나면 경찰이 온다.

 

그리고 영적인 현상이 일어나면 퇴마사가 오는 것이다.

 

사회에 퇴마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그나저나 스승님은 좀 어떠셔?”


“대상포진 때문에 아직도 끙끙 앓는 중.”


“아이고, 다음에 한 번 뵈러 가야겠네.”

 

내가 퇴마사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0살 무렵 때였다.

 

우리 할머니가 사실은 엄청나게 대단한 퇴마사이고, 영혁이는

재능이 있어서 제자가 되었고, 정작 손자인 내게는 그 어떤

재능도 없어서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게 참 이상하지만.

 

어쨌거나 그게 나의 현실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고.

 

“아무튼, 나중에 내가 뵈러 간다고 전해줘.”


“맨입으로?”


“거 그 정도도 못 해주냐? 치졸한 새끼.”

 

“알겠으니까 꺼져, 남정네랑 붙어 다니기 좆같거든.”


“아, 네에-”


영혁이가 버스를 타러 갔고, 나는-

 

-------

 

나는-

 

“뭐야, 씨발.”


여기가 어디지, 아니...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주위가 어두컴컴해...? 아까 전까진 훤한 대낮이었는데?

 

손목시계를 보니 오후 11시 30분 무렵이었다.

 

‘분명 내가 하교했을 때는 6시였는데.’

 

그럼 5시간 30분 동안 무슨 일이...?

 

나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켰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지도에는 내가 산에 있다고 나와 있는데, 지도를 확장하니

내가 살던 서울이 아닌 완전히 다른 지방에 있었다.

 

“잠깐, 그보다도 여기는...!”


내 고향이다. 정확히는 내가 6살 무렵까지 살았던 동네.

 

부모님의 사정 탓에 나는 6살 때까지 할머니 손에 자랐고,

내가 살던 동네는 전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극한의

오지였다.

 

오죽하면 내가 컴퓨터라는 걸 8살 무렵에나 알게 됐으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대체 왜 내가 여기에...!?”


기억나질 않는다. 시간을 생각하면 나는 여기까지 오는데

그 5시간 30분을 쓴 것 같기도 했다.

 

끌려왔나? 아니, 그건 아니다. 그랬다면 기억이 없을 리가.

 

무엇보다도 뒤를 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보였다.

 

뭐가 됐든 나는 내 발로 여기까지 온 게 분명하다.

 

“좆됐네 진짜, 여긴 사람도 안 다니는 곳인데...!”


우리 고향은 이미 소멸 직전에 몰린 깡촌이다.

 

특히 이 주위는 할머니를 제외하곤 사람이 아예 살지 않는

무인지대였고, 이 산은 할머니조차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근데 내가 이 산을 어떻게 알고 있지?’

 

분명 할머니는 내가 이 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 나도 이 산에 와본 적이 없다.

 

그래야만 한다. 

 

나 는 이 산 에 온 적 없 다.

 

「약속, 지키러 왔구나.」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아, 그래.

 

나는 이 산에 온 적 있다.

 

할머니의 경고를 듣지 않고, 이 산에 놀러 왔다.

 

그리고 분명히, 만나버렸다.

 

「기다리고 있었어.」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소녀의 형상이었다.

 

까마귀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얼굴을 뒤덮은 앞머리, 나른한 목소리, 달빛처럼 빛나는 피부.

 

그것은 그때 그 시절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 그 시절이 언제였지?

 

“으아아아아악-!!”


뭐야? 방금 뭐였지? 내가 방금 대체 뭘 본 거지?

 

벽을 더듬어 방의 불을 켜자, 강렬한 섬광이 내 눈을 때렸다.

 

그래, 여긴 내 방이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자고 있었다.

 

“꿈...꿈인가...그랬나...”

 

뭐 이런 악몽이 다 있담, 아직도 몸이 덜덜 떨렸다.

 

너무나도 생생하고 또렷한 악몽. 

 

이토록 무서운 악몽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보다 나는 왜 그 여자애를 무서워 한 거지?’

 

다른 악몽하고는 뭔가 본질적으로 달랐다.

 

귀신이 나온 것도 아니요, 피와 내장 같은 게 나오지도 않고

무언가에 쫓기거나 어디서 떨어지는 꿈도 아니었다.

 

고향에 있는 산에서 왠지 모르게 낯익은 소녀를 만났다.

 

단지 그뿐인데, 왜 나는 아직도 떨고 있는 거지?

 

“...잠은 다 잤네, 니미.”


참 기분 더러운 꿈이었다.

 

그래, 그냥 악몽일 뿐이었다.

 

 

 

 

 

금요일이 온 것은 기뻤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순 없었다.

 

새벽에 꾼 그 기묘한 악몽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꿈이란 무릇 시간이 좀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건만, 나는

아직도 그 꿈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녀의 모습, 목소리, 그리고 고향의 어두컴컴한 산.

 

...뭔가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이 시간에 전화를 받으려나, 나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뚜르르- 뚝.

 

「뭐냐, 이런 이른 시간부터 전화를 다 하고.」

 

바로 받았구나. 할머니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잘 지내셨어요, 할머니?”


「뭔 일 있었지? 빨리 용건이나 말해, 약수터 갈 시간이다.」

 

손자가 모처럼 전화했는데 반응이 왜 이리 차갑단 말인가.

 

하여튼 할머니는 늘 이랬다, 참 변하지 않는 분이다.

 

“대단한 건 아니고, 이상한 꿈을 꿨어요.”


「하긴 너도 이제 몽정할 나이기는 하구나.」

 

“아니! 그런 꿈 말고요! 고향에 있는 산이 나오는 꿈-”

 

「너, 만났구나?」

 

...?

 

무슨 말씀이시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확 차분해졌다.

 

「잘 듣거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평소처럼 행동해.」

 

“네? 아니, 뭔 소리예요? 너무 뜬금없잖아요.”

 

「설명해봤자 넌 이해 못 해. 영혁이가 설명해 줄 게다.」

 

뚝. 뚜, 뚜, 뚜-

 

여전히 자기 할 말만 하고 끊어버리는구나, 할머니.

 

그보다도 영혁이가 설명해준다고? 대체 뭘?

 

아니 그 전에...내가 그 여자애를 만난 걸 어떻게 아셨지?

 

“불길하게 왜 이래, 진짜.”


...일단 교실에나 가야지. 

 

우리 교실에 들어오니 조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직 조금

이른 아침이라 애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음?”


그리고 내 옆자리에 처음 보는 여자애가 앉아있었다.

 

저 자리는 분명 빈자리였는데, 다른 반에서 온 건가?

 

“아, 왔구나.”


...!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이 목소리, 이 얼굴, 이 여자는.

 

“좋은 아침이야...우후후...”


“...너...누구야?”


꿈속에서 만난 그 여자애다.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고, 뭔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지만,

분명히 내가 꿈에서 본 그 여자애였다.

 

“어...무슨 뜻이야? 혹시 또 드라마 얘기하는 거야?”


대체 뭐야? 왜 아는 척이지? 대체 뭐냐고, 이 녀석은?

 

“지랄 말고 대답해. 너 대체 누구야?”

 

“네 소꿉친구...영희잖아?”


소꿉...친구?

 

웃기지 마라, 이런 소꿉친구 따윈 둔 적 없단 말이다.

 

‘잠깐.’

 

분명히 할머니가 말했다. 평소처럼 행동하라고...

 

설마 이 녀석이 나타날 걸 알고 계셨던 건가?

 

‘일단 할머니 말대로 하자, 이 녀석이 뭔지는 몰라도...’

 

절대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쯧, 너는 류튜브도 안 보냐? 요즘 네프리스에서 이게

제일 유명하잖아. 그 뭐냐, 점점 기억을 잃는 주인공...”

 

“아, 그거? 나는 안 봐서 잘 모르겠네...”


“그 정도는 보라고, 촌년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 자리에 앉았다.

 

“숙제는 해왔어?”


“너 내가 숙제하는 거 본 적 있냐?”


“또? 선생님이 엄청 화낼 텐데...”


마치 나에 대해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거기에 이 태도, 뭔지는 몰라도 내게 적대적이진 않다.

 

‘역시 귀신이나 엇비슷한 존재겠지?’

 

나야 일단은 일반인이지만, 할머니나 영혁이 덕분에 조금은

그쪽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귀신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아니, 애초에 정말 귀신이 맞는 걸까?

 

“야, 웬일로 이리 일찍 등교했냐?”


영혁이!

 

놈이 껄렁껄렁 교실로 들어와 내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냥 잠이 좀 빨리 달아나서. 왜, 꼽냐?”


“허허, 요놈이 웬일로 지각을 안 하다니...영희 너도 꽤

일찍 왔네?”

 

“나도 오늘은 일찍 오고 싶은 기분이어서.”


영희. 영혁이가 녀석을 영희라고 불렀다.

 

이름을 알고 있다...하지만 어떻게?

 

“야, 화장실이나 미리 갔다 오자. 1교시 수학이여.”


“아, 맞다. 그 양반 화장실 안 보내주지?”


나는 영혁이와 어깨동무를 하고선 교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야, 너 저 여자 누군지 아냐?”


“저 여자? 뭐, 영희 말하는 거야?”


연기하는 게 아니다. 영혁이는 저 여자를 알고 있다.

 

“일단 화장실 가자. 가는 길에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 엉, 알겠어.”


쏴아아- 나는 일부러 물을 틀어놓고서 영혁이와 나란히

서서 오줌을 쌌다.

 

“저 여자, 내 소꿉친구 아니야.”


“뭔 개소리야? 너 또 어디서 이상한 드라마 보고 왔냐?”
 
“아니라고 씨발, 할머니한테 얘기했더니 일단 얌전히 모른 척

하고 있으라 그랬어. 저 녀석한테 손대지 말라는 뜻 같아.”

 

“...”


할머니 얘기를 하자마자 영혁이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셨으면 확실하겠지.”


“믿어주는 거야?”


“넌 안 믿어, 근데 내가 스승님은 믿거든.”


이 새끼가 진짜...믿어주는 건 고마운데 영 기분 더럽다.

 

“그럼 저게 뭔지 대충 알겠어?”


“그전에 하나 물어보겠는데, 너 귀신한테 죽은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 있냐?”


갑자기 그건 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귀신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귀신이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 없었다.

 

“귀신이라는 건 말이지...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찌꺼기야. 인간의 강렬한 의식이 남긴 기억과 인격의 파편.

즉, 고작해야 자아를 가진 그림자밖에 안 된다는 거야.”

 

그러니까...결국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건 불가능하단 건가?

 

“평범한 사람은 이걸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운 좋게

조건이 맞아서 보게 될 수는 있지만, 서로에게 간섭하는 건

더 힘들어. 내가 무슨 말하는지 이해했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저게 귀신은 아니라는 거야?”


“일단 내 예상은. 저건 귀신 따위보다 훨씬 위험해.”


영혁이가 지퍼를 올리면서 한쪽 눈을 파르르 떨었다.

 

“다수의 기억과 인식을 조작했어. 심지어 나조차도 네가

말해주기 전까진 이상한 걸 전혀 못 느꼈고. 알아듣겠어?

저건 흔해 빠진 귀신 따위가 아니야. 저건 최소한 신이라고.”

 

“신...!?”


신이라니, 이야기가 점점 산으로 가잖아...!

 

“이 정도 힘을 가진 존재는 나도 본 적 없어. 스승님이 그리

말씀하셨다면 뭔가 아실 텐데, 함부로 뭐라 말씀하시지 않은

걸 보아하니...보통내기는 아니야.”

 

“씨발, 그럼 어떡해? 저거 죽여야 하는 거 아냐?”

허! 영혁이가 가소롭다는 듯 짧게 웃었다.

 

“신을 죽여? 네가 말하고도 좀 이상하지 않냐? 신은 절대로

못 죽여. 기껏해야 어디 가두거나 달래는 것밖에 답 없어.”

 

“너 퇴마사잖아! 저런 것도 상대해봤을 거 아니냐고!”


“나도 저런 건 본 적도 없다고 했잖아. 애초에 신은 인세에

함부로 개입하질 않아. 근데 육신을 가지고 직접 나타나서

활동하는 신? 그런 케이스는 고대 문헌에서나 나온다고!”


영혁이가 내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야, 잘 들어. 그냥 평범하게 행동해, 절대 저걸 자극하지 마.

스승님이랑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 전까지는 그냥

네 소꿉친구라고 생각하고 지내라고.”

 

“그게 가능하겠냐!?”

 

“죽고 싶지 않으면 해. 난 지금부터 조퇴하고 바로 스승님

뵈러 갈 테니까, 며칠만 좀 참아.”

 

그리고 놈이 나를 버리고 화장실에서 나갔다.

 

붙잡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다, 영혁이 말이 옳았으니까.

 

“미치겠네, 진짜!”

 

나는 세면대에 물을 틀고 세수했다.

 

좀 진정하자, 그래. 아직까진 괜찮지 않은가.

 

녀석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최소한 당장 내게 적대적이진

않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생전 본 적도 없는 괴물이랑 소꿉친구인 척을 하라니.’

 

...잠깐.

 

생전 본 적도 없다...?

 

뭐지, 이 위화감은? 내가 대체 뭘 놓치고 있는 거지?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화장실 밖으로 나간 순간-

 

“아, 그...기다리고 있었어.”

 

그 여자가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순간 표정 관리를 못할 뻔했지만, 나는 곧 침착하게 대처했다.

 

“뭔데 졸졸 따라와? 네가 강아지도 아니고.”

 

“다음 교실, 같이 가고 싶어서...”


“쯧,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네. 앞장서.”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먼저 앞장서서 걸어갔다.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방심하지 말자고.’

 

부디 할머니랑 영혁이가 빨리 와주기를.

 

 

 

 

 

수업이 다 끝나고 하교 할 시간이 찾아왔다.

 

다행히 녀석은 딱히 무슨 짓을 하진 않았고, 대신 귀찮을

정도로 나에게 말을 걸며 친근한 척을 했다.

 

무섭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귀신 비슷한 무언가와 엮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무속인의 핏줄을 타고 태어났다지만, 솔직히 나는 귀신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퇴마사라는 게 있다는 건 알아도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도 모르고...

 

“아, 기다리고 있었어...”


‘씨발.’

 

혼자 조용히 하교할까 했더니, 녀석이 먼저 학교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같이 갈래?”


“...알겠어.”


돌아가는 길, 버스 안.

 

녀석은 말없이 내 옆에 서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 걸까,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었다.

 

“노을, 예쁘네.”


“어?...어엉, 그러네.”


“산에 있을 때 종종 같이 봤잖아, 기억나?”


...산?

 

설마 고향에 있는 그곳을 말하는 건가?

 

“하긴, 오래전 일이니까...넌 자주 산에 와서 나랑 놀아줬잖아.

기뻤어, 나 같은 건 아무도 찾아주질 않았으니까...”


“...그게 이유야? 네가 날...좋아하는?”


내 말에 녀석이 얼굴을 확 붉히고선 고개를 푹 숙였다.

 

“...응...물론, 그게 아니어도 이유는 많지만...”

 

나는 지금 확신했다.

 

이 녀석에게 악의는 없다. 적어도 나에 한정해선 그렇다.

 

하지만 정체를 모르는 한, 방심할 순 없었다.

 

‘귀신이나 신들은 사람하고 사고방식이 다르니까.’

 

그게 무섭다는 거다.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구조가 다른 게.

 

“참, 너희 집은-”


“응? 무슨 소리야? 난 바로 옆집에 살고 있잖아.”


참고로 내가 사는 원룸 옆방은 한참 전부터 비어있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아, 그랬지. 미안, 요즘 자꾸 뭘 깜빡하네.”

 

“그런 것까지 깜빡하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너무 뭐라 그러지 말라고.”


그리고 잠시 후, 집에 도착했다. 

 

드디어 끝났네- 내가 문을 열자마자 녀석이 말했다.

 

“아,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좀 놀다 갈래...?”

 

“너희 집에서?”

 

“응. 네가 싫지 않다면...”


당연히 싫지! 정체도 모를 괴물 집에 누가 들어가냐고!

 

“아니, 오늘은 피곤-”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눈이, 나를 꿰뚫었다.

 

‘거절하면 죽는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의 한기.

 

‘이게 녀석이 감추고 있던 본성인가...?’

 

내게 악의를 가지진 않지만, 자기 뜻에 거스르는 것까진

용납 못 하겠다 이건가?

 

“피곤...하니까 너희 집에 좀 누워있을까.”

 

“응, 간식도 있으니까 마음껏 먹어도 돼.”


결국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녀석의 집에 들어왔다.

 

“안은 생각보다 깨끗하네.”

 

“응, 그야 매일 청소하니까...”
 
평범한 원룸이다. 어딜 봐도 특이한 점은 없었다.

 

침대와 냉장고, 옷장 하나. 특별한 구석이라곤 없다.

 

“그....그럼 뭐하고 놀까? 아! 내가 차...한 잔 타줄게.”

 

쪼로록- 녀석이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자, 마셔.”


“...”

 

이거 진짜 마셔도 되는 거 맞나?

 

마시면 갑자기 기절하고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고, 고마워.”


“헤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죽이지는 않겠지.

 

나는 단숨에 녹차를 들이마셨다.

 

“커헉!?”

 

“왜 그래?”


“콜록, 콜록! 아니, 그냥 사레들린 거야...”

 

다행히 차는 그냥 평범한 녹차였다. 맛도 그냥 평범했다.

 

“정말...너는 옛날부터 조심성이 부족했다니까...”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아, 옛날엔 정말 즐거웠지. 너는 거의 매일같이 산에 와서

나랑 놀아줬고, 게다가 그런 약속까지 해줬으니까...”


“약속?”

 

“기억 못하는 거야?”


순간,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느껴본 적 있다. 이 감각,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의 서늘함.

 

“기억...하고 있어.”


나는 목소리를 겨우 짜내 대답했다.

 

“어떤 약속이었는데?”


그건.

 

이제 와서 무슨 약속이었는지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에 정말로 약속을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나는 이 괴물하고 무슨 관계였던 거지?

 

「■■■■■■■■■」


무언가 들렸다. 아니, 나는 떠올렸다. 하지만 선명하진 않다.

 

뭐라고 했었지? 우린 대체 어떤 약속을 나눴던 거지?


“대답하지 못하면-”


띠리리리-!

 

그때였다. 내 핸드폰의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받아도 될까?”


“응, 얼른 받아.”

 

띠. 내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경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지금 뭐하고 있어! 나 심심해!」

 

이 목소리는...은혜다. 유은혜, 내가 이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럭저럭 친해진 여자애였다.

 

친하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적당히 친근하다 정도지만.

 

“미안, 지금 좀 바빠서.”

 

「또 딸치고 앉았냐? 아하하하, 하여간 남자들이란!」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선 웃어줄 수도 없다.

 

「할 거 없으면 놀자! 지금 애들이랑 같이 노래방 가는 중!」

 

“아...미안. 지금 진짜로 좀 바쁘거든.”


이쪽은 지금 목숨이 오가는 상황인데, 태평하게 노래방이라.

 

뭐 이런 블랙 코미디가 다 있담.

 

「그으래? 에잉, 재미없기는. 다음엔 안 부를 거야, 그냥!」

 

“미안,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뚝. 나는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누구야, 방금 그 여자?”


“아...그냥 친구.”

 

“친구? 나 말고 여자가 또 있는 거야? 왜?”

 

찰나의 순간, 녀석이 내 바로 코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나한테는 너뿐인데, 너는 왜 다른 여자가 있는 거야?”


“어, 그...그게...”

 

“...”


그러더니 녀석이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치사해.”

 

그리고.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치사해-”

 

숨을 쉴 수가 없다.

 

주위가 어두워진다, 공기가 나를 짓누른다. 

 

모든 게 멈춘 듯이, 세상이 사라진 듯 고요해진다.

 

“약속했잖아, 약속했는데, 왜?”

 

“------”

 

“난 거짓말쟁이가 싫어.”

 

어느새 녀석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죽는다, 살해당한다. 도저히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끄흑, 끄윽-”


“약속해, 나 이외에 여자랑 친하게 지내지 않겠다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왔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고, 방은 멀쩡했고, 녀석은 침대에

걸터앉아 웃고 있었다.

 

“약속, 한 거야?”


“...”


방금 대체 뭐였지?

 

도저히 머리로 따라갈 수가 없다, 이런 미친...

 

‘뭐 이딴 괴물이 다 있는 거야?!’

 

고작 귀신 따위가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그럼 이제 뭐하고 놀래?”


“...같이 드라마나 볼래?”


“좋아, 같이 보자.”

 

지금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지만.

 

그랬다간 정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것 같았다.

 

 

 

 

 

나는 밤이 되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옆집, 그러니까 내 방에 돌아오니 할머니와 영혁이가

앉아서 차와 과자를 먹고 있었다.

 

“하, 할머니?”


“거 표정을 보아하니 아주 호되게 당한 모양이구나.”


할머니는 옛날하고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늙어 보이면서도, 여느 젊은이

들보다도 활달해 보이셨다.

 

“옆에 있는 게지? 느껴진다, 아주 살벌해.”


“네...대체 저 옆에 있는 게 뭡니까, 스승님?”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꾸나.”

 

나는 영문도 모르고 할머니의 뒤를 쫓아갔다.

 

벌써 나이가 아흔은 되실 텐데, 어째 나보다도 발이 빨라서

쫓아가기 벅찼다.

 

“옛날 옛적에, 산에는 신이 살았다.”


할머니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네?”

 

“옛날은 지금하곤 달랐지. 산마다 신이 살았고, 요괴나 정괴가

살았어. 시대가 바뀌면서 이젠 거의 다 사라져 버렸지만...”
 
옛날에 얼핏 들은 이야기였다. 할머니가 어릴 적에 종종

들려주곤 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몇몇 산에는 신이 남아있다. 지금 네 옆집에

살고 있는 그분도 마찬가지고.”

 

“대체 뭡니까, 그건?”


“부르는 이름이야 많지만, 나는 산신님이라고 부르지.”


산신님.

 

그 이름을 들으니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우리 가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산신님을 산에 가두고 달래는

일을 했다. 나의 할머니, 그 할머니, 또 그 할머니가...”


“대충 언제부터...?”


“아무도 모른다. 최소한 고려 시대 이전에도 있었다는 건

확실하지...”

 

고려 시대라고? 그럼 거의 천 년도 더 됐다는 말 아닌가?

 

“그런 신이 아직도 남아있었을 줄은...”


“너에게도 비밀로 했으니까. 산신님의 존재는 우리 가문과

연관된 몇몇 사람만 안다. 그분은...너무 위험했거든.”

 

어느새 우리는 검은 승용차가 서 있는 주자창에 다다랐다.

 

“사람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신이시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스승님?”


“그분은 종종 어떤 사람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그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를 저주하곤 하셨다. 그 때문에 과거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지. 처음부터 존재한 적도 없듯...”

 

탁. 나는 승용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 모든 건 네가 시작한 일이다.”


“내, 내가?”

 

“너는 내 당부를 어기고 산에 들어갔다. 그리고 산신님을

만나버렸지. 또...어떤 약속을 해버렸고.”

 

또 그 약속 이야기인가, 대체 무슨 약속이었기에?


“약속한 사실 그 자체를 잊어버리면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너무 얕본 게지. 그분은 절대 잊지 않으셨다.”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저런 괴물하고 같이 지낼 자신 없단 말이에요!”


“징징대지 마라, 지금 해결하러 가는 길이니.”


부웅- 할머니가 승용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셨다.

 

“잘 듣거라, 지금부터 너와 산신님을 같은 곳에 가둘 게다.”


“네!?”

 

“네가 거기 들어가면 산신님도 바로 쫓아오실 테지. 그럼

거기서 버티기만 하면 끝이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고, 절대 안에서 문을 열지 말거라.”

 

“아니, 나보고 지금 죽으라는 거예요!?”


“안 죽는다. 그분은 널 사랑하시니, 죽이지는 않을 게야.

문제는 네가 멋대로 밖으로 나왔을 때의 일이지.”

 

할머니가 마른 침을 삼키셨다.


“그분은 평소엔 온화하시지만, 한 번 뿔이 나면 그보다 더

잔악한 신이 없을 정도지. 마음 단단히 먹어라.”

 

그 후, 우리는 몇 시간이나 달린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의 고향, 아마도 내가 처음 산신님을 만난 곳.

 

자동차에서 내리니, 옛날에 몇 번 정도 온 적 있던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크기는 작지만 건물에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그저

오래된 기와집일 뿐인데,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대체...제가 산신님하고 무슨 약속을 한 거죠?”

 

“...”

 

할머니가 나를 흘끗 보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뱉었다.


“나도 모른다.”


“네?”


“하지만 내가 너의...일탈을 깨달았을 땐 이미 늦어버렸지.

산신님은 무엇보다도 약속을 중요시하는 분. 그분이 봉인을

깨고 나온 것도 그 약속 탓일 터.”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쯤 되면 말도 안 나온다. 이런 초대형 사고를 치다니.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동이 틀 때까지는 못 나온다고 봐야겠지.”

 

그럼 지금 시간이 새벽 1시니까...거의 5, 6시간이나...?

 

“준비되면 들어가거라. 영혁아, 각오 단단히 하거라.”


“네, 스승님.”


...나머진 두 사람에게 맡겨야하나.

 

나는 심호흡을 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방이었다.

 

그리고 이 음산한 기운이...어둠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좋아.”

 

나는 문을 닫고서, 혹시 내가 안에서 열지 못하도록 자물쇠를

잠근 뒤 열쇠를 저 멀리 던졌다.

 

이렇게 어두우니 나도 찾을 수 없겠지. 밖에서 꺼내줄 즈음엔

동이 터서 안이 훤히 보일 테니, 그때 열면 된다.

 

남은 건 산신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

 

짤랑, 짤랑, 쿵, 쿵, 쿵-

 

바깥에서 북을 치고 방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시작됐다. 자아, 언제쯤 오는 거지-

 

「나 기다렸어?」

 

“우와악!?”


벌써 왔다고!? 산신이 내 등 뒤에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 안에...!”


「어떻게? 그야, 여긴 원래 내 집이었으니까?」

 

여기가 산신의 집이었나...그러고 보니 묘하게 익숙하다.

 

“난 여기 온 적이 있었던 건가?”

 

「아아, 역시 전부 잊어버렸구나. 저 할망구 때문에.」

 

남의 할머니는 할망구라고 부르다니...

 

“이제 널 여기에 다시 봉인할 거야. 미안하게 됐어, 내가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몰라도...너는 밖에 있어선 안 돼.”

 

사람의 기억과 인식을 조작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다.

 

그런 괴물이 사회를 휘젓고 다니게 되면...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감히 상상조차 못하겠다.

 

「그렇구나...알겠어,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어?

 

미쳐 날뛸 거라고 생각했던 산신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째서...?”


「그야, 약속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약속이 대체 뭐냐고!?”


이제 그 약속을 기억하는 건 너뿐이다.

 

그리 말한 순간, 그녀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기분 나쁘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혐오스러울 줄은 몰랐다.

 

「말해줄까? 어떤 약속이었는지.」

 

그녀가 내게 다가와 턱에 손가락을 올렸다.

 

「나중에 커서, 결혼하자.」

 

그 말을 들은 순간 떠올랐다.

 

모든 게, 그때 있었던 모든 일들이.

 

“아, 아아아-”


나는 버려진 자식이었다.

 

부모님은 서로를 미워했고, 끝내 나조차도 미워하게 되었다.

 

결국 버려지듯 할머니 밑에서 자란 나는, 이 아무도 없는

시골에서 미칠 듯한 고독함에 시달려왔다.

 

할머니는 언제나 엄격하고 냉정하셨다.

 

퇴마사란 일이, 무당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가족의 정이니

개인의 행복을 버려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내가 할머니의 경고를 듣지 않은 이유가.

 

절대로 산에 혼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경고를 어기고.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 버려진 집에서 널 만나고.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고.

 

“나는...널 사랑했구나.”


「우린 서로 사랑했어, 그래서 약속했지. 네가 다 컸을 즈음,

내가 널 찾아가겠노라고. 그리고 너와 혼약을 맺겠노라고.」

 

나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해버렸다.

 

왜 할머니가 내 기억을 지워버린 건지 이제야 알았다.

 

그분은 날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산신에게서.

 

“하지만, 난...지킬 수 없어. 그 약속은 지킬 수 없다고.”

 

「무슨 말이야? 이미 지키고 있으면서.」

 

“뭐?”


「정말로 이게 날 봉인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했어?」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무언가, 전제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좀 이상하잖아? 나를 봉인하기 위한 의식인데 너를

함께 여기 넣다니,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지 않아?」

 

그건...그랬다.

 

위화감. 나도 분명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위화감을 무시했다.

 

“그럼, 바깥에 있는 두 사람은...”

 

「물론 그 두 사람은 이게 제대로 된 의식이라고 믿고 있어.

하지만 이걸 어쩌나? 전부 나한테 속고 있는데.」

 

그럼, 그럼.

 

나는 허둥지둥 바닥에 던진 열쇠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녀가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리며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나는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나는 이 어둠 속에 영원히 갇혀있어야 한다.

 

“싫어!!”

 

나는 문을 박박 긁으며 미친 듯이 두들겼다.

 

“꺼내줘!! 싫어, 싫어!! 제발 살려줘, 할머니!! 영혁아!! 나,

나 여기 있어! 아무나 이 문 좀 열어줘!! 싫어, 싫다고!!”


「넌 그 어느 곳으로도 못 가.」

 

그리고 나는 보았다.

 

어둠 속에 쌓여있는 그림자들을.

 

나 이전에 그녀에게 사로 잡혀버린 영혼들을.

 

수없이 많은 그림자가 나를 향해 무어라 말하며.

 

그들이 나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나도 그들을 향해 웃었다.

 

 

 

 


 

 

 

 

 





아 빌어먹을 공포물 너무 어려운데스

무서우면서도 꼴리게 쓰는 건 프로의 영역인레후...그리고 나는 프로가 아닌데스우...

아마 한 달 정도는 글 못 쓰고 지내야 할 것 같아서 미리 내고 감

시간이 더 있으면 더 다듬어서 내거나 다른 걸 내고 싶었지만 이제 시간이 없는데샤악!

데프픗...다음 대회 주제는 좀 쉬우면 좋겠다는레훗....